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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심지

  • 작성일 2023-09-20
  • 조회수 701

복숭아 심지

이하정



1장.

시작


늦봄. 비의 엄마 소유의 과수원. 푸른빛의 나무들 아래로 비와 재. 비와 재,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수확하고 있다. 재의 핸드폰에서 뉴스 소리 작게 흘러나온다.


그 뉴스 들었어?

어?

뉴스. 여자들 말이야.

뭐?

온몸에 멍이 든 채로 죽은 여자들. 계속 발견되고 있잖아.

아···

너도 들었지?

뭐··· TV 넘기다가 본 것 같네.

그거 병 때문이래. 알아?

······

무슨 벌레가 있대. 기생충 같은 거. 근데 그게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냄새를 맡는대. 벌레가 아픈 사람 몸을 찾아서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 사람 몸이 꼭 벌레 먹은 과일처럼 상하고 짓무르게 된대. 보이지? 딱 이 썩은 과일들처럼 되는 거야. 근데 꼭 멍 든 것처럼 보인대.

······

어떤 사람들은 심식나방 바이러스라 부르더라. 죽어서 발견된 사람들 몸이 꼭 심식나방 애벌레가 갉아먹은 복숭아처럼 보인다나.

······

신기하지 않아?

신기하긴 뭐가.

그 익숙한 나방 이름이 이렇게 들으니까 낯설다. 진짜 이상하고 무섭지.

헛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해.

헛소리라고? 다들 난리야. 요새.

재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좀 터무니 없는 얘기 같긴 해도··· 아니라고 하기엔 계속 발견되잖아. 죽은 사람들이.

됐다고.

넌 무섭지 않아?

무섭긴.

진짜 안 무서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방이니 과일이니 헛소리해대는 거 마음에 안 든다고.

헛소리일지 진짜 바이러스일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말한 그 멍 들어서 죽었다는 여자들··· 모르는 거잖아.

당연히 모르지. 넌 뭐 그 여자들 알아?

내 말은.

뭐.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거 당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야. 그런 거 아니야. 그랬으면 진작 그런 쪽으로 조사를 했겠지.

······

아, 진짜 이상하다니까? 너 봤어? 발견된 사람들?

보기 싫어.


비, 말없이 일을 계속한다. 재, 비를 잠시 바라보다가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 비와 재가 일하는 동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비의 엄마,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비와 재, 일에 집중해 알아차리지 못한다. 비의 엄마, 머뭇거리듯 잠시 비를 쳐다보다 다가선다.


엄마

전화 두고 나갔지.


비, 돌아본다. 서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아, 응. 일하느라.

엄마

계속 울려서 내가 받았어.

무슨 일인데?

엄마

진이라는 애 아니?

진?

엄마

······

아··· 대학교 동기.

엄마

친하니?

아니?

엄마

······

왜?

엄마

진이···

걔가 뭐?

엄마

그 애가···

······

엄마

죽었대.

······뭐?

엄마

사고가 났대. 장례식에 올 수 있냐고 전화가 왔더라. 방금.



2장.



발병


진의 장례식장. 해가 사람들 사이로 앉아 있다. 장례식장은 소란스럽다.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다.


동기 1

사고였대.

동기 2

무슨 사고?

동기 1

교통사고랬나.

동기 2

교통사고?

동기 1

의료사고랬나.

동기 2

그거는 완전 다르잖아.

동기 1

아니면··· 뭐 그냥 사고···

동기 2

그럼 씨, 세상 모든 죽음이 다 사고지. 사고 아닌 죽음이 어딨냐?

동기 1

얘는··· 완전 사고지. 이제 막 제대했는데. 불쌍한 놈.

동기 2

씨··· 그건 맞아. 진짜 어쩌다가···

동기 1

사고···

동기 2

사고···


비,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다 동기들과 떨어져서 테이블 한 가운데 앉아 있는 해를 발견한다. 비는 해의 옆자리에 앉는다. 해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안녕?

······

안녕.

······

저기, 해.

어?

안녕, 이라고 했어.

아··· 안녕.

너랑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

잘 지냈어?

근데 너 누구지?

뭐? 이 년도 안 됐는데 벌써 잊어버린 거야?

정신이 없어서.

너 진이랑 헤어지고 우리 사이도 멀어졌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건 한 삼 년 만이지. 그럼 한 번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

······

나 정말 모르겠어?

······

······

비.

진짜 기억 못하는 줄 알았어.

아, 미안. 비. 내가 널 어떻게 못 알아봤지? 내가 정말 정신이 없나 봐.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니.

······

너 많이 놀랐겠다.

나?

괜찮아?

괜찮냐고?

아······ 여긴 언제 왔어?

한 두 시간 됐나···

두 시간이나 있었어?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게,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네.

빨리 온다고 왔는데.

사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할까. 그냥 가만히 멍 때리다 보면 한 두 시간은 훌쩍 흘러 있어. 나는 한 십 분쯤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안 믿겨.

응?

지금 너랑 여기 앉아 있는 거.

응.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시간이란 거, 정말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나도 몰라.


비, 해를 바라본다.


모두 너 걱정하는 것 같더라.

날?

다들 아닌 척 다른 이야기하면서도 너 신경 쓰고 있어.


해,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다. 해를 보던 시선들이 다른 곳을 본다.


왜?

당연하잖아.

뭐가 당연한데?

우리도 다 슬프지만······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된다니?

왜 날 신경 써?

그거야···

그거야?

넌.

난?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

여자친구였잖아.


사이.


가늠이 안 돼.

······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맘이 어떨지 말이야.

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애들 때문이면.


해, 주위를 살핀다. 동기들, 해의 눈치를 본다.


나 정말 괜찮아. 사실 나는 하나도 안 슬퍼.

그렇게 말하는 편이 편해?

아니, 나는 정말···

······

그러니까, 걔가 죽어버려서.

······

나는 걔가 더 이상 없어서 좋아.


장례식장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긴 침묵.



3장.


첫 번째 멍


초여름. 비가 일하는 과수원. 해가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일하던 비, 해를 발견한다.


오랜만이네.

한 달 전에 봤는데.

한 달. 한 달 밖에 안 됐구나.

너도 정신 없었을 테니까. 좀 더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요즘 분위기도 이상하고.

······

여기 오는 데 헤매진 않았어? 과수원은 처음이지? 왜 예전엔 한 번도 안 데려 왔나 몰라.

그럴 사이가 아니었나 보지.

말 섭섭하게 한다. 그래도 우리 한 때 친했다고 생각하는데.

너랑 나 졸업하고 연락 한 번 안 했는데.

졸업하곤 연락 완전 끊겼지만··· 나 진 소식 듣자마자 네 생각이 났거든.

나 왜 불렀어?

그냥. 궁금해서.

뭐 또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있었어. 네 말대로 분위기도 이상한데, 밖에 나다니기도 싫고.

꼭 요즘이 아니라··· 너 대학 졸업하고 말야. 음, 난 취직 못 했다? 야, 식품영양학과는 도대체 뭘 하니? 이 취업부터가 골고루가 안 된다. 아예 포기하고 본가 내려와서 계속 놀고 먹다 슬슬 눈치 보이기 시작해서 일 년 전쯤부터 엄마 과수원에서 일하는 중이야. 그래서 같이 일하는 애가 낙하산이라고 하도 뭐라 하는데··· 아, 근데 정말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농사도 그렇더라. 엄마 일이라고 솔직히 좀 쉽게 봤는데. 여기 이 과일들 있잖아, 이렇게 내가 매일 같이 나와서 들여다보고 살펴도 어느 날 아침에 보면 벌레 먹어 있고, 상해 있고 그래. 참······.


해를 바라보던 비, 복숭아 나무를 쳐다본다.


이거, 복숭아야.

보면 알아.

보면서 네 생각 솔직히 가끔 했어.

······

좋아했잖아. 너. 우리 집 복숭아.

옛날 일이야.


비, 검은 봉지를 들고 와 해에게 건넨다.


왜?

먹으라고. 근데 아직 약간 설익었으니까, 집에 조금 뒀다 먹어. ······진작 갖다 줘 볼 걸. 이제야 주네.

필요 없는데.

받아. 미안한 마음을 담아 두 배로 넣었어. 사실 맘만 같아서는 세 배로 넣어주고 싶은데, 과수원이 요새 좀 안 좋아서 그럴 수가 없네.

왜?

이제 여름이잖아. 벌레가 많아.

벌레?

응. 난리야.

무슨 벌레?

무슨 벌레냐고? 말하면 알아? 종류야 완전 많은데··· 지금 얘네들은 특히 그··· 복숭아심식나방이라고. 그거 때문에 고생하고 있어.

심식나방?

그냥 여름에 유행하는 흔한 해충이야.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그 애벌레잖아?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이 그 끔찍한 일에 심식나방을 갖다 붙일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된다고?

그래.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애초에 사람 몸속에 애벌레가 들어간다는 얘기도 이상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정말 만에 하나 나방 애벌레 같은 게 사람 몸 안에 들어간다 쳐. 그렇다 해도 그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그렇게 끔찍하게···

확실해?

확실하냐고?

응.

왜 그런 걸 물어?

오늘 뉴스 봤어?

아니.

월세가 세 달이 밀렸는데, 연락이 안 돼서 집주인이 신고를 했더니 죽어 있었대.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든 채로. 거실과 안방을 가르는 경계에 몸을 가로하고 아주 이상한 자세로 누워 있었대. 심장 부근에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경찰들이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텅 빈 방 안에 단내가 진동하더래. 사람이 죽었는데, 피 냄새 같은 게 아니라. 집 안에 과일 같은 거라도 썩었나 하고 봤는데, 음식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대. 그 흔한 벌레도 하나 없었고.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두 달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벌어지고 있어. 근데 넌 아니라고 확신해?

그래서? 웬 변종 애벌레 같은 게 갑자기 어느 날 생겨나서 그게 뭐,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냄새를 맡는다고? 몸속으로 들어가고 멍 들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두 달 내내 발견되고 있는 그 끔찍한 몸들을 보고도 그런 얘기를 믿어? 그게 믿어져? 맞거나 다친 게 아니라, 애벌레 하나가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

너는 못 믿어?

나는 못 믿어.

못 믿는구나?

어. 못 믿어.

그럼 이 얘기는 믿겠어?

또 무슨 얘기를 믿어야 하는데.

나 병 걸렸어.

뭐?

병 걸렸다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내가 걸렸다고. 그 병에. 온몸이 곪아가고, 아니 썩어가고 있어.

뭐라고?

썩고 있다고. 자. 네 눈으로 봐.


해, 자신의 몸에 든 멍을 비에게 보여준다. 해의 팔 위로 푸른 멍.


너 왜 이래?

이제 믿겨?

너 어쩌다 다친 거야?

벌레가 몸 안을 기어 다니는 거, 어떤 느낌일지 상상할 수 있어?

······

항상 느껴지는 건 아니야. 전혀, 그 어떤 느낌도 들지 않을 때도 있어. 그땐 나도 내가 아프다는 걸 잊기도 해. 그럼 드디어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그 생각 때문에 다시 내가 아프다는 걸 깨닫아. 또 심장 쪽이 간지럽기 시작해.

있잖아.

처음에는 간질거리만 했어. 근데 어느 날 밤이었어.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그래서 잠에서 깼어.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어.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저 오로지 내 안을 기어가는 벌레만이··· 더··· 더··· 커져서

너 설마···

······

누구한테 맞아?

너 지금 내가 맞았냐고 물어본 거야?

또··· 그런 거야?

그걸 이제 묻네?

뭐?

옛날에는 그렇게 모르는 척하더니.

왜 갑자기 옛날 얘기를 해? 말 돌리지 마.

말은 너나 돌리지 마. 네가 물어 봤잖아. 나 누구한테 맞았냐고? 너 그게 정말 궁금해?

······

맞아. 나 맞았어. 옛날에. 너도 알겠지.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겠지만.

그건···

근데 지금은 아냐. 지금은 진짜야. 난 병에 걸렸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

그때는···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섣불리 얘기를 꺼냈다가, 네가 더 상처 받을까 무서웠어.

······

아니, 사실은 내가 너무 무서웠어. 네가 여름에도 온몸을 다 가리는 긴 옷을 입고 강의실에 나올 때, 그 옆에서 수업에 애써 집중하려고 앉아 있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이 진짜 싫었어. 그 기분이 너무 너무 선명하게 남아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서··· 너랑 진이 헤어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도 너한테 연락하지 못했어.

······

장례식날, 너한테 말 건 거.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한테 간 거, 그거 내 선택 같은 거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그날 나도 너한테 왜 갔는지 몰라. 사실 우리 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남보다 더하지.

근데 그날 내가 네 옆에 앉아서 이렇게 너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게 다행이야.

너 하나만 해.

해, 복숭아심식나방 바이러스 같은 건 없어.

······

내가 알려 줄게. 그런 건 없다는 거.

그보단···

······

정말 웃긴 게 뭔 줄 알아?

뭐가 웃겨?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하는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거야. 네가 믿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지. 넌 언제나 그랬어.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야. 널 이해하고 싶어도, 말이 안 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아.

아니면 그 비슷한 상태라 생각하겠지. 그거 아니? 누구는 내가 괜찮다고 하는 걸 믿지 않고, 누구는 내가 아프다고 하는 걸 믿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을 수도, 안 괜찮을 수도 없게 됐어. 난 장례식, 그날 이후로, 내가 아니게 됐다고.

이해해.

넌 하나도 이해 못 해. 정말. 하나도. 넌 확실한 사람이니까. 말이 되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기준 같은 거. 넌 절대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 널 이해해보려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 얘기를, 네가 네 얘기를 해준다면···

난 그런 거 할 수 없어. 설명 같은 거 되지도 않으니까.


둘 사이의 긴 침묵. 비와 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해, 과수원을 나가버린다. 비, 혼자 남겨진 채 시간이 흐른다. 잠시 후, 재가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재, 검은 봉지를 들고 있다.


누구야?

······누구?

누구 온 거 아냐? 방금 들어오다 나가는 사람 본 것 같은데.

아, 옛날 대학 동기.

아, 친구?

······손에 든 그건 뭐야?

이거? 그러니까. 과수원 들어오는데, 입구에 버려져 있더라?

입구에?

보니까 복숭아던데?

복숭아라고?

근데 누가 복숭아를 버려. 그것도 멀쩡한데. 다 완전 예쁜 애들이야. 아마 뭐 사장님이 아시는 분 드리려고 빼 두신 건가 그렇겠지? 근데 혹시 또 누가 가져갈까 봐, 일단 들고 왔어. ···아, 맞다. 너 그거 들었어?

뭐.

또 발견됐다는데. 죽은 여자.

······

혼자 살던 자취방에서. 진짜 뭔지는 몰라도 소름 끼쳐.

이 얘기 그만하자.

왜? 넌 안 믿는다고?

그냥.

몰라. 나는 심식나방 얘기 들으면 이제 아주 닭살이 돋아. 죽은 여자들도 끔찍하지만, 이번 여름 복숭아 피해만 지금 얼마야? 귀하다. 살아남은 이 복숭아들.


재, 복숭아 나무 사이를 지난다. 비, 재가 내려놓은 검은 봉지를 바라본다.


친구 아니야.

어?

친구 아니라고. 걔.



4장.



두 번째 멍


과수원. 비와 해, 마주 서 있다.


더 할 얘기가 있어?

직접 보여줄게. 그냥 벌레일 뿐이라는 거. 너한테 어떤 해도 입힐 수 없다는 거.

넌 그렇게까지 증명하고 싶니?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거?

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아니라고?

난 틀렸어.

웃기시네.

그래. 난 틀렸었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넌 몰라. 알면 이럴 수 없지.

사람들이 떠드는 그 병, 왜 못 믿느냐고 물었지? 너 때문이야.

모든 게 다 내 탓이겠지.

오래 생각했어.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 삼 년 전에 내가 널 내버려둬서 그런 걸 거라고.

옛날 얘기 좀 그만해.

네가 수시로 병결 내기 시작했을 때도 난 더 의심하지 않았어. 사실 그때 네 문제는 병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서도. 내가 신경 쓰는 걸 싫어한다고도 생각했어. 물었을 때 회피했었잖아. 네 탓 하는 건 아니고, 그래서 더 못 믿겠는지도 모른다고. 그 바이러스라는 거. 나한테는 꼭 이게 기회 같아서. 내가 그때 믿지 않았던 거 이제라도 믿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미안해.

이제 와서 사과 같은 거 해도 의미 없어.

방금 그 말은 너한테 아무 의미도 없겠지.

그걸 아는데도 해?

근데 내가 바꾸려는 건 과거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봐 주면 안 될까?


해, 비에게 다가간다. 비와 해, 복숭아 나무 앞에 함께 선다.


뭘 보라는 건데.

여기 보여? 이 구멍.

보이네.

대충 보면 찾지 못하겠지?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까. 겨우 이거야. 심식나방 애벌레가 갉아먹은 자국.

그래도 얘네는 아프겠지. 겨우 이 정도로도.

그러니까 이런 구멍 하나 없는 복숭아들은 진짜 귀한 거라고. 운 좋아서 이런 아픔 모르는 애들이잖아. 내가 준 복숭아 방치하지 말고······


해, 말이 없다. 비, 애벌레가 갉아먹은 복숭아를 따서 반으로 가른다.


갉아먹은 자국만 작은 게 아니라, 애벌레도 진짜 작지? 네 손톱만 해.

색깔도 손톱 색 같네.

지금은 이렇게 약간 누런 흰 색이긴 한데, 나중에 탈출할 때는 붉은 빛이 돌아.

붉은색이 된다고?

복숭아에서 나올 때는.

무섭다. 꼭 피라도 빨아먹은 것 같잖아.

복숭아에 피가 어딨어.

그래서 말했잖아,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꼭 그런 것 같다고.

직접 눈으로 보니까 어때.

끔찍하네. 내 안에도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크지.

뭐?

이 작은 벌레에 비하면 넌 너무 크다고. 이런 게 네 몸 안에 들었다고 해도, 이런 거에 맞서서 지기에는 네가 크다고.

그래서?

그래서 네가 싸울 수 있다고. 널 괴롭히고 있는 그게 뭐든.

뭐든?

정말 나는 이해할 수도 없는 신종 바이러스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이미 너무 지나와 버린 시간이든.

······

진이든.

내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데? 그렇게 많은 거랑?


비, 복숭아 몇 알을 딴다. 비,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복숭아를 담는다. 비, 봉투를 해에게 건넨다.


내가 지켜볼게.

······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서 살펴볼게.

······

나 그런 거 잘 해. 그게 일이라서.


사이. 해, 천천히 옷소매를 걷는다. 가려져 있던 팔이 드러난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멍이 늘긴 했지만.


해, 복숭아가 담긴 봉지를 받아 들고는 과수원을 나간다. 재,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넌 모르는 사이에 복숭아도 줘?

누가 모르는 사이라고 했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럼 뭐야.

지난번에 장례식 갔던 날 만났어.

장례식에서 친구를? 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지.

죽은 애 여자친구였어.

방금 나간 사람?

응.

너랑은 무슨 사인데?

그냥 나 혼자서 돕고 싶어 하는 사이.

왜?

잘못한 게 있어서.

힘들겠다.

힘들겠지. 난 상상도 할 수 없고.

걔 말고. 너 말하는 거야. 진짜 상상도 할 수 없을 걸.


비, 과수원 밖을 바라본다.



5장.


세 번째 멍


해의 자취방. 방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비, 냉장고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몸에 멍이 안 사라져. 계속 간지러워. 벌레가 더 커진 것 같아.

너 청소 안 하지. 청소 좀 해. 그거 먼지 알러지일 수도 있어.

그런가?

너 냉장고 안에 다 맛 간 거 알고 있어?

몰랐네.

집안 꼴이 이게 대체 뭐야.

아··· 청소기가 너무 무거워서 들지를 못하겠어서.

무슨··· 청소기 그게 뭐··· 너 매일 집에만 이렇게 온종일 박혀 있는 거야?

바깥은··· 덥잖아. 귀찮고.


비, 냉장고 속에서 검은 봉지를 꺼낸다. 봉지를 열자 안에는 짓물러 터진 복숭아가 들어 있다.


야.

왜.

너 이거 뭐야?

그게 뭔데?

복숭아잖아.

아···

아?

잊어버렸네.

그게 다야?

왜, 변했어? 냉장고 안에 넣어뒀는데도 그래.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뭘?

내가 너 과수원에 부른 날. 네가 복숭아 버리고 간 거 모를 줄 알았냐고.

······알면 그만 챙겨주지.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왜 계속 챙겨줬니.

야. 네가 좋아했잖아.

내가 좋아했지.

근데, 넌 어떻게 사람이 생각해서 준 걸 그렇게 버리고. 이 따위로 내팽겨쳐둘 수가 있어? 너는··· 그래? 내 관심이 이런 거야? 전혀 쓸모 없는 거? 여기 처박아 두고 싶은 거?

넌 보고 있으면, 가끔 정말 재밌어.

뭐?

넌 지금도 내가 그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어?

지금은 그게 너무 싫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니?

너 정말 좋아했잖아, 우리 복숭아. 대학교 다닐 때.

너는 모르지··· 모르겠지··· 절대 절대 모르겠지. 네가 들고 있는 그 썩어 문드러진 복숭아가 차라리 날 더 이해할 거야. 네가 말한 그 대학교 때. 그래··· 내가 그때가 떠오르는 순간, 순간들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는 건 모르지?

······내가 멍 하나 안 든 복숭아들을 골라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데.

네 멍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지기를.

······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기를.


사이. 해, 웃는다.


너무 좋다.

······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

너한테 나는 그 뿐이야? 그 예전의 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니?


해, 비에게로 다가온다. 해, 비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더니, 봉투 속에서 무른 복숭아를 꺼낸다. 해, 복숭아를 씹어 먹기 시작한다. 복숭아의 과즙이 터져 흐른다. 비, 그 모습을 쳐다본다.


됐니?

······

됐어?

······

이제 만족하니?


해,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비의 침묵.



6장.


네 번째 멍


과수원. 재, 쌓여 있는 박스를 옮기고는 가장 아래에 놓인 박스를 뜯는다. 박스 안에 엉망이 된 복숭아. 재, 상자를 들고 걸어간다. 과수원 한쪽에 쏟아져 있는 복숭아들. 재, 상자를 엎는다. 비, 들어온다.


뭐하다 이제 와? 일도 많은데.

······

표정이 왜 그래? 아, 이거 복숭아 아까워서? 좀 그렇긴 해?

······

꼭 무덤 같지 않아? 복숭아 무덤. 단내가 진동을 한다.

나 싸웠어.

뭐라고?

싸웠다고. 해랑.

해가 누군데.

과수원에 왔던 애.

왜 싸웠는데?

변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 걔가 하는 이상한 소리들 내가 하도 안 믿어주니까, 자기가 미친 것 같냐고 묻더라. 솔직히··· 이젠 정말 그래.

넌 꼭 과수원에서 일하는 사람 마인드네. 직업 정신이 투철한 건가?

뭐?

너 진짜 걜 돕고 싶은 거면 우리 같은 농부가 아니라, 이 나무여야지. 집이랑 과수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렇게 돌아보고 마는 게 아니라 이 뿌리 박힌 나무들처럼 계속 떠나지 않고 여기 서 있어야 한다고. 근데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야.

뭐가 당연한데?

착각하지마.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럼? 뭘 할 수 있어? 방금 네가 그랬잖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건 걔가 달라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

넌 네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게 뭐.

아니? 넌 걔를 구할 수 없어.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착각이지.

이젠 너하고까지 싸우고 있고. 진짜 지겹다.

싸우려는 게 아냐.

그래? 난 곧 싸울 것 같은데.

난 널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하나도 날 위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네가 뭘 알아.

그건 걔도 똑같을 걸? 네가 하는 얘기, 하나도 도움 안 될 걸.

됐다. 그만하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야,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편해.

야.


비의 핸드폰이 울린다. 비, 전화를 받는다.


죄송한데, 지금 좀 바빠서.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비, 이야기를 듣는다. 비, 아무 말이 없다. 재, 비를 본다. 비, 전화를 끊는다.


왜 그래?

해가 농약을 먹었대.

뭐라고?

위세척 했대.

괜찮은 거야?

병원이래.


긴 사이.



7장.


다섯 번째 멍


병원. 한 병실. 해, 퇴원 준비를 하고 있다. 옷을 갈아입는 해. 해의 몸에는 멍이 가득하다. 비, 병실로 들어온다. 뒤따라서 재, 들어온다.


넌 나방 애벌레에 대해서 잘 안다며.

놀랄 일이 더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넌 지금 처음으로 할 말이 그거야?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제발 그만 좀 하지? 그 바이러스 얘기라면 지겨워 죽겠으니까. 더 할 말도 없고. 너는 네가 지금 기어코 뭔 짓을 한지나 알아? 대체 제정신이냐고.

죽으려고 한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데?

이렇게 하면 애벌레가 밖으로 나올까 했어. 두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

봐서 뭐하게?

그냥. 내 고통을 알아준 건 이 벌레밖에 없었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

죽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안 죽었잖아. 난 이렇게 안 죽어.

네가 그렇게 잘났어? 죽을지 안 죽을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애벌레가 내 안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난 안 죽어.

제발 말 같은 소리를 해.

이 고통을 다 겪고 나면 우리한테서 나방이 나온대. 그 나방이 떠나가고 나면 우리는 해방이야. 완전한, 해방.

뭐라고?

심식나방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가입할 수 있는 카페가 있어. 거기서 그랬어.

카페도 있어? 근데 인터넷 의사들 믿으면 안 되는데.

내가 물어봤었잖아. 복숭아에 해충이 생기면 넌 어떻게 하냐고. 그러니까, 네가 그랬잖아. 약을 쓰거나, 불에 태워 없앤다고.

그게 뭐?

해본 거야.

그래서 농약을 먹었다고?

응.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네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 물었다는 거네?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넌 이게 아무 일도 아니야?

······

묻잖아.

너, 내가 졸업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난 살고 싶지도, 그렇다고 죽을 의지도 없었어. 그러니까··· 그래, 난 걔에 대한 미움만으로 가득차서 살았어. 그거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네가 취업 고민할 동안 난 남들은 다 잊어버린 기억 속에 갇혀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그러더라. 걔가 죽었대. 갑자기.


사이.


그날 이후로 난 텅 비었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슬픔도. 아픔도. 근데 내 안에 이 벌레가 생긴 거야. 난 이제 뭔가를 느껴. 이 벌레 때문에 나는 너무 편해졌어. 알겠어?

······도와주겠다고.

뭐, 다른 대처법 있어? 약이나 불태우는 거 말고. 참고로 죽이고 싶지는 않아.

너 농약 처먹고 위세척하고 지금 겨우 퇴원하는 거야. 네 꼬라지 너는 안 보여? 내가 병원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기다리다 그대로 정신 나가는 줄 알았다고. 근데 넌 지금 나한테 진짜 그딴 거나 묻고 싶어?

그게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난 못 해.

방금은 날 돕겠다며.

미쳤어. 넌 진짜 이기적이야.

그래. 난 미쳤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어.

야. 나쁜 게 나야? 이렇게 만든 게 나냐고.

······

어? 좆같은 그 새끼지.

······

그러니까······ 그 새끼 때문에 왜 네가 이렇게 돼야 하는데?

맞아.

이제 그만 잊어버릴 순 없는 거야?

근데 난 너도 용서 못했던 것 같아. 알아. 내가 싸울 사람은 네가 아니지. 나도 아니까. 난 네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좋겠어. 내가 관심 있는 건, 지금 내가 걸린 이 바이러스 뿐이야. 네가 믿든 말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자. 넌 돌아가서 나 말고 그 복숭아들이나 돌보면 돼.

정말 내가 시간을 낭비했네.


비, 병실을 나간다.


왜 안 따라가?

······

왜 너도 내가 이상해서?

별로. 나도 그랬던 적 있어.

농약 먹어봤다고?

아니. 나도 누굴 엄청 미워해봤다고.

얼마나?

죽이기까지 했어.

죽인 건 좀 무섭네.

너도 언젠가는 죽여야 할 거야.

아쉽지만, 이미 죽었어. 아까 못 들었어?

······

나도 걔를 정말 여러 번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

이렇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8장.



여섯 번째 멍


해안로. 재, 바다를 보고 서 있다. 비, 걸어온다.


사람을 왜 여기까지 불러? 한가한가 봐. 이렇게 놀러 다니고.

밤에 보면 더 멋있는데. 아, 아쉽다.

그럴 시간 없을 텐데.

예전에 여기 올라오기 전에 바닷가에서 살았어.

뜬금없이 갑자기 웬 옛날 얘기?

봐봐. 파도 들이쳤다 사라지는 거.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다 쓸려내려가는 거야. 모래, 조개, 죽은 동물들. 쓰레기까지. 어때? 가슴이 좀 뚫리지 않아? 답답한 거. 난 그렇던데.

바다 본다고 해결될 걱정이면 좋겠네.

딱 이런 데서 밀어버렸어.

뭘?

예전에 만났던 사람.

어?

사랑이 실체가 없는 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농담한 거지?

네 친구 있잖아. 애인이 죽었다면서? 아니야. 안 죽고, 여전히 살아 있어. 그게 문제라고. 죽여버려야 하는데. 나처럼. 안 그러면 평생 보고 살아야 돼.

야. 재미도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은 꼭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우리 안에서 끊나지 않고 반복재생 돼. 우리는 그걸 멈추는 방법을 모르고, 그 과정에서 기억은 엉킨 녹음 테이프처럼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풀어낼 수도 없게,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우리에게 남지. 그러니까······ 걘 제대로 재생도 할 수 없는 쓰레기 테이프를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고. 죽여버리라고 했는데, 이미 죽어서 그럴 수 없다더라? 아, 그 말이 아닌데.

네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너도 그래. 너도 걜 그만 버려야 돼. 이만큼 안 풀려도 그걸 모르겠어?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려워? 네가 못 버리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

대체 갑자기 왜 이래?

네가 죽을상 하고 있는 거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서?

죽을상을 하고 있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게?

장난해?

모르겠는데? 내가 너 사랑하나?

야, 이게 무슨 사랑이야.

그럼 뭐가 사랑인데?

뭐라고?

돕겠다고 말은 하지만 걔를 더 괴롭게 하는 너? 아니면 그 좆같은 새끼 하나도 못 잊고 아직도 미련이나 갖고 있는 걔? 그래도 그나마 내가 제일 사랑인 것 같은데. 네가 그랬잖아. 네 말대로 나쁜 건 그 좆같은 새끼라고.

······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

사랑이 있어서 지금 이런 것 같아?

알았어. 정신 차리면 되잖아.

그 좆같은 새끼가 몇 명을 망치고 있는지 봐봐.

그만해. 진짜 재미없으니까.

나도 재미없다. 쓸데없는 사랑 얘긴 그만하자.

이제 더 할 말 없지?

네 친구가 걸렸다는 그 병. 그거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병이야.

······진짜 있는 거야?

모르지.

똑바로 답해.

네가 믿는 거면 있는 거고, 아닌 거면 없는 거고. 그게 중요하나?

중요해.

그래. 누군가한텐 엄청 중요해 보이더라.

너는 언제부터 알았는데?

네 친구가 매일 보는 그 심식나방 바이러스 감염자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카페 그거. 그거 내가 만들었는데. 그럼 꽤 됐겠지?

장난하지마.

우리가 장난 같아?

어쩌다가 넌 그런 병을 알게 된 건데?

음.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잘 안 난다. 그 기억도 여기다 다 밀어버렸거든.

······

아, 시원하다. 그치?

왜 이제 말해?


사이.


바다에 다 밀어버려. 바다는 다 지워주니까.



9장.



부화


과수원. 복숭아 무덤 앞의 비. 비, 복숭아 무덤을 쳐다보고 서 있다. 비의 엄마,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엄마

가만히 서서 뭐해?

그냥 보고 있었어.

엄마

뭐, 다 벌레 먹은 애들인데. 그거 보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그러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네.

엄마

혹시 재 봤니?

못 봤는데.

엄마

못 봤다고? 이상하네.

왜?

엄마

오늘 출근 안 한 것 같은데. 연락도 안 되고. 너 뭐 들은 거 없어?

없는데.

엄마

연락도 없이 안 올 애가 아닌데. 뭔 일 있나?

모르겠는데.

엄마

네가 연락해볼래?

안 받는다면서 뭘 나까지 해. 있다 오겠지 뭐.

엄마

그래도 모르잖아. 이상한 세상이고. 혹시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하니.

쓸데 없는 얘기를 해.

엄마

못 들었어?

뭘.

엄마

시체 또 나왔대잖아.

시체?

엄마

그거 바이러스 말이야. 몸 밖으로 꼭 뭐가 뚫고 나간 것처럼 심장에 구멍이 나있더래. 혼자 살고 있던 이십대 여자애라던데. 거의 네 또래지. 자취방에서 혼자 죽은 채로 발견됐다던데, 너무 끔찍하지 않니? 아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몰라. 별별 이상한 뉴스들이 끝도 없이 들리지. 너도 조심해. 뭔지는 몰라도 무섭다. 늘 여자가 조심해야 해. 결국 잘못되는 건 다 여자애들이야.

어디였는데?

엄마

어?

어디라고 했냐고.

엄마

어디냐고? 서울이었던 것 같은데. 서울 어디였지. 모르지.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비, 과수원을 나가려다 붙잡힌다.


엄마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

가봐야 할 데가 있어. 급해.

엄마

어디? 엄마가 알아야지.

알아서 뭐하려고.

엄마

요즘 이상하게 자주 나가던데, 누구 만나? 남자니?

나한테 신경 좀 꺼.

엄마

안 돼. 방금 엄마 얘기 못 들었어? 걱정돼서 어딜 보내. 안 그래도 오늘 재도 없어서 과수원에 일할 사람도 없고. 그냥 한동안은 과수원 일에 집중해. 여름 막바지라 할 일도 많잖아.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그래, 오늘은 지난주 주문 들어온 건들 다 준비해놔? 벌레 먹은 저것들도 이제 그만 다 정리하고? 알겠지?


비의 엄마, 과수원을 나가려한다. 비, 나가려는 엄마를 본다.


엄마.


비의 엄마, 다시 돌아본다.


내가 과수원에서 일하게 된 날 기억해?

엄마

응?

나 학교 졸업하고 일 년쯤 지났을 때였나. 엄마가 나 취직 준비도 아무것도 안 하고 처울고 누워서 우울해하고 있는 거 못 보겠다고 과수원에서 일하게 시켰잖아. 단순노동이라도 하면 머리가 좀 빈다고. 그냥 손이랑 발이랑 움직이게 된다고. 그러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생각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엄마

아. 그랬나?

그래, 뭐라도 해보자 했어.

엄마

어쨌든 나아졌고··· 안 그래?

그래서 난 그날 이후로 계속 이 벌레가 처먹은 복숭아만 지겹도록 들여다봤어. 여기에 뭔 정답이라도 있는 것 마냥. 나는 믿었다고. 근데 아니, 여긴 아무것도 없었어. 난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어. 그때 날 괴롭히던 거 전부 다, 끝나지 않았다고. 난 계속 그 자리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아니, 어쩌면 더 엉망진창······

엄마

무슨 일 있니? 너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엄마는··· 나한테 그런 것밖에 안 가르쳐줬잖아. 아무것도 아닌 셈 치는 거. 그냥 잊는 거. 새로 시작하는 거.

엄마

뭐? ······너 지금 내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야?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엄마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럼 엄마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나보고 어쩌라고? 난 노력했어. 이혼하고, 널 혼자 키워보려고. 그딴 인간 있느니만 못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너한테 아빠가 없단 거 부족한 걸로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여기서 아빠 얘기가 왜 나와?

엄마

······전부 다 네 아빠 탓이니까.

엄만 늘 그래. 엄만 늘 아빠 탓이야.

엄마

그럼 누구 잘못이야? 내 잘못? 네 잘못? 네 아빠 아니었으면, 네가 과수원에서 꼴도 보기 싫은 복숭아 쳐다보고 있을 필요나 있었겠니? 네가 이 땡볕에서 박스 포장이나 해야 하는 거 다 네 아빠 때문이야. 그렇게 싫어 죽겠으면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네 아빠나 탓해.

누구 잘못도 아니니까. 나한테 신경 끄라고.

엄마

넌 내 마음을 어쩜 하나도 모르니?

난 기억도 안 나는 아빠보다, 엄마가 이러는 게 더 짜증난다고.

엄마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니?

어떻게 되든 이제 나도 모르겠어.


비, 비의 엄마를 지나쳐 과수원을 나간다.


엄마

야.


비의 엄마, 제자리에 서 있다.


엄마

너까지 일 안 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비의 엄마, 텅 빈 과수원을 둘러본다.


엄마

아무도 없잖아.


비의 엄마, 과수원에 혼자 남겨진 채 서 있다.



10장.


해방


해의 집. 방문, 열린 채로 있다. 거의 텅 빈 방. 해, 창틀을 딛고 창가에 올라서 있다. 창문이 완전히 열려 있다. 그때 비, 뛰어들어온다.


안 돼!


비, 해를 붙잡는다. 비와 해,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다. 아파하는 해. 해, 몸에서 흰 가루가 떨어진다. 바닥에도 흰 가루. 비, 몸에도 묻는다.


이게 뭐야.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 너 얼굴이 왜 이래? 야,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해. ······팔은 또 뭐야. 이 가루는 대체 다 뭐야? 몸에 뭘 바른 거야?

바른 게 아니라······ 보면 몰라?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뭔데, 이게.

진이야. 나온지 시간이 지나서 말라붙은 거야.

진이 어디서 나온다는 거야.

내 몸에서.

그게 어떻게 네 몸에서 나와.

내 꼴 보면 모르겠어? 뭐가 나와도 안 이상하다고. 썩기 시작한지도 꽤 됐어.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비, 해의 멱살을 잡는다. 비, 해의 옷을 들춘다. 해의 피부 위로 벌레가 먹은 듯한 작은 구멍.


······네가 왜 곪아가는지 알아? 네가 왜 썩고 있는지 아냐고.

아직도 넌 그걸 모르겠니?

네 주위가 죽은 것들로 가득하니까. 과일도 상한 애랑 같이 두면 멀쩡한 애들도 상해.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된 건 네가 죽은 사람을 보내지 못해서라고. 제발 그만 좀 해.

울지 마.

안 울어.

네가 이렇게 괴로운 건 나를 놓지 못해서야. 그만 포기해.

가지 마. 네가 없으면, 전부 다 없던 일이 되잖아.

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진은 죽었어. 걘 이제 너한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게 너무 너무 싫다고. 걔가 아무것도 못하게 됐다는 게.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너랑 나인 게 싫다고. 난 이렇게 됐고, 그리고 너도···


해, 갑자기 멈춘다. 비, 해를 본다. 긴 사이.


왜 그래.

들려?

뭐가.

내 심장 소리 들어봐.

야.

들리지.

너 안 뛰어.

아냐. 이렇게 빨리 뛰잖아. 엄청 빨라.

병원 가자.

점점 더 빨라지는데.

어? 병원 가자. 지금이라도. 이 병이 진짜, 진짜 있는 거라면··· 그런 거면 뭐라도 해주겠지. 어떻게든 해주겠지.


비, 핸드폰을 꺼낸다.


119···


해, 비의 핸드폰을 빼앗아 던진다.


병원을 왜 가.

제발.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구급차 부를 거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비, 핸드폰을 주우려 한다. 해, 막으려고 한다. 비, 해의 팔을 붙잡는다.


아파.

그러니까 병원에 가자고.

너 때문에 아프다고. 놔.


해, 뿌리친다. 해의 등 뒤로 창을 타고 내리쬐는 햇살. 해, 돌아본다. 햇살, 해의 몸을 훑는다.


때가 왔어.


해, 일어선다. 해, 창가로 다가간다. 햇빛, 해의 심장 부근으로 모인다.


뭔가가··· 엄청··· 빠르게···


해, 고통스러워한다. 비, 일어선다.


뭐야. 어디서 이렇게 달달한 냄새가······

너 얼른 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나가라니까.

안 가. 난 못 가.

야, 이건 네 이야기가 아니야. 내 이야기지.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나도 여기 있잖아.

곧 나올 거야.

뭐가.

나방이.

하지 말라니까.

부탁이 있어.

지금 해도 안 들어줄 거야.

다른 건 다 잊어도 되니까. 하나만 기억해. 날 찢고 날아갈 나방. 그건 꼭 똑바로 봐 줘.

나방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야. 이번만큼은 내 말이 맞아. 지금까진 네가 다 맞고, 내가 다 틀렸어도.

내가 못 봤던 거, 너는 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장담할 거야.

그거 나오면 잘 보내줘. 꼭.


방 안이 환해진다. 해, 가슴을 붙잡는다. 


장례식 날 있잖아.

갑자기 장례식 얘기를 왜 해.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어.

그게 뭔데.

왜 너는 끝까지······


해, 주저 앉는다. 해의 몸이 비 앞으로 떨어진다. 비, 코를 쥔다. 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비, 고개를 파묻는다. 들지 못한다. 정적.


아니야. 아무것도 안 보여.


비, 천천히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비, 싱크대를 붙잡고 일어선다. 비, 물을 받는다.


밀어버려.


비, 물을 바닥에 들이붓는다. 바닥에 떨어진 진이 물에 녹는다.


바다가 다 지워줄 거야.


비, 해에게 다가간다. 비, 해의 몸을 바라본다. 비, 손가락으로 해의 몸에 묻어 있는 진을 닦아본다. 비, 손가락을 입에 넣는다.


다네. 엄청······.


긴 사이.


왜 너는 끝까지······


긴 암전.



11장.



과수원. 재, 소각통에 담긴 복숭아를 보고 서 있다. 재, 소각통에 불을 붙인다. 타는 복숭아를 바라보는 재. 비의 엄마, 재에게 다가온다.


엄마

태우는 거야?

여기 이 복숭아들요. 지금은 불에 타고 있으니까 고통스럽기만 하겠죠?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가 좋았지 싶을 거예요. 근데 조금만 더 버티면 곧 자기를 엄청 오랫동안 괴롭히던 벌레에게서 해방될 텐데. 한 치 앞을 모르고 있는 거죠.

엄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뭔가에 눈 앞이 가려서 주위에 있는 좋은 게 이상하게 하나도 안 보이는 그런 때가 있는 것 같아서요. 불에 휩싸여서 타고 있는 이 복숭아들처럼.

엄마

웃기네. 복숭아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아, 전 얘네가 꼭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엄청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막 반짝거릴 때. 꼭 땀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엄마

넌 과수원 일이 좋아?

바다를 보는 것만큼은?

엄마

뭐? 그게 좋다는 거야?


비의 엄마, 재,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복숭아를 본다. 그때, 소각통에서 재가 날아오른다. 재, 날리는 재를 쥐어보려고 하지만 손 틈새로 빠져나간다.


엄마

그래··· 훨훨 날아가라.


재, 날아가는 재를 올려다본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조금씩 무거워지며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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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마선에 노출되어 슈퍼 히어로가 된 세 명의 박사는 왜 지구를 지키려 하지 않는가 정범철 등장인물 스컹크맨 (최만수) 51세 / 남 / 여러 가지 냄새를 뿜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블루씨스루 (이강재) 48세 / 남 / 투시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그린타키온 (진순남) 43세 / 남 / 빛보다 빠른 속력을 발휘하는 히어로. 레드플라이 (고혜정) 43세 / 여 / 두 팔에서 날개가 돋아나 하늘을 날 수 있는 히어로. 기자 1, 2, 3, 4, 5, 6 취객 스파이더맨 사회자 통역사 레드플라이의 엄마 때 현재 곳 대한민국, 서울 1장 – 기자회견 무대에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무대 뒤에는 “감마선 히어로 긴급 기자회견”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관객들이 등장하는 동안 사회자가 먼저 등장해 마이크 체크를 하고 기자회견 준비를 한다. 기자 역의 멀티남도 등장해 사회자와 인사도 나누고 카메라를 점검하며 객석에 앉는다. 사회자의 인사로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사회자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참석해주신 국내외 언론매체 관계자와 기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전에 연락드린 바와 같이 이번 기자회견은 감마선 히어로 네 명 중, 세 명의 히어로가 긴급히 요청하여 마련되었습니다. 세 명의 히어로는 스컹크맨, 블루씨스루, 레드플라이입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빠른 진행을 위해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점 먼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통역이 필요한 외신 기자분들은 입구에서 나눠드린 동시통역기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못 받으신 기자분 계신가요? Is there anyone who didn’t get the translator? 아, 저 뒤에… (무대 옆을 보는데 그냥 진행하라는 신호를 받은 듯) 네? 아, 그렇군요. 지금 준비된 통역기가 부족하다고 하네요. 예상보다 많은 외신 기자 분들이 참석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세계의 눈과 귀가 국내 히어로들에게 쏠려있다는 방증이겠죠? 그럼 지금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세 분의 히어로 여러분, 무대로 나와주십시오. 스컹크맨, 블루씨스루, 레드플라이가 정장을 입고 무대로 등장해 자리에 앉는다.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 터진다. 스컹크맨은 서류 파일을 들고 있다. 사회자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아 아마 모르는 분이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국민 여러분과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스컹크맨 지금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는 거죠? 사회자 네, 그렇습니다. 스컹크맨 안녕하십니까. 최만수라고 합니다. 블루씨스루 안녕하세요. 이강재입니다. 레드플라이 안녕하세요. 고혜정입니다. 기자1 히어로 네임으로 말씀 좀 해주세요! 난처한 표정의 세 박사. 사회자 네, 각자 히어로 네임을 좀…. 스컹크맨 스컹크맨입니다. 블루씨스루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붉은 여인의 초상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현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현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현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현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현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현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현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현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현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현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현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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