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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430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독자를 속이는 문장을 생산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움을 찾아 한 부류의 시인들은 의식적으로 철저하게 어절과 어절을 섞는다. 대상에 의미를 얹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지우려 노력한다. 또 한 부류의 시인들은 문장에 의미를 담아 교훈을 준다. 이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정서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 두 경향의 창작에서 벗어난 부류의 시인들은 조심스럽게 전통에 발을 딛고 시 쓰기를 실험한다. 비평은 이러한 현실을 살피고 각각에 맞는 잣대를 대야 한다. 창조적 머리로 뜨거운 시를 바라봐야 한다. 이제 2020년대 시와 비평의 좌표는 어디인가 물어야 할 때가 도래했다. 


1) 에드워드 윌슨 『통섭』, 사이언스북스, 2005, 364쪽.


   2. 원초적 자유의 시와 지금 이곳의 비평


   2010년대를 지나 2020년에 들어서면서 일군의 시인들은 언어의 외연이 사유의 외연보다 작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현상의 이미지를 기존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서로 다른 문장을 섞어 민낯의 이미지에 접근하려 노력한다. 기표에 의미를 지우자 기의는 사라진다. 이때 시는 원초적 자유를 얻어 문장과 문장은 낯선 표정을 짓는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과정이다. 시는 원본 없이 존재하는 삶의 에피파니이다. 시인이 감각하고 체험하여 찾아낸 시뮬라크르는 늘 경이롭다. 장 보드리야르는 “그 휘어짐이 실재나 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 대상은 소멸하여버린다. 곧이어 사라진 지시 대상들이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함에 의해서 시뮬라시옹은 더욱 강화된다.”2)고 주장한다.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이다. 현대인들은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시뮬라크르에 지배받는다. 비유하여 말하면 시인에게 시는 시뮬라크르이고, 시를 쓰는 과정은 시뮬라시옹이다. 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토피아로 향한다. 형이상학적 진실로 가는 과정에 감정의 재현은 낯설지만 새로운 에피파니를 만든다. 그리고 시인들은 시뮬라크르에 지배받는 세상을 꿈꾼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형이하학적인 세계가 멜랑꼴리하기 때문이다. 

   2020년대는 전통에 발을 딛고 있는 시인들과 전통을 무너뜨린 시인들로 나뉜다. 새로운 물결의 머리에 올라탄 시인들은 흉내 낼 원본인 전통적 서정시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으로 바꾼다. 따라서 시적 물결은 더욱더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촉발한다.


   (세로 세포와 가로 세포 실험 찾아 볼 것)

   그리고 다른 오감 등이 작동할 때/다른 부분의 자극이 저장된 기억을 건드린다.

   이때 우리는 어느 정도 같은 대기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한 날씨를 경험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건 사고를 접하는 경우도 비슷한 감각을 형성한다. 이러한 비슷한 감각의 경험은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예) 비가 오는 날 A와 커피를 마셨는데 다른 날 비가 올 때 A와 커피 마신 기억을 떠올린다. 혹은 커피만 마셔도 A를 떠올릴 수 있다.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어느 정도 규격화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체험, 감각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이 작용은 A가 나를 떠올릴 때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에 서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슷한 경험을 해도 서로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 경험의 순간에 서로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생각에 골몰하는 것은 공통 기억을 형성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저 순간을 누리는 기억만이 서로를 떠올리게 한다.


   생각과 사회화에 대하여


   생각은 개인적이고 기억은 공통적이다. 생각은 기호화된 기억이여 기억하는 것은

   ― 윤지양 「기억 비평」 부분(『문학과사회』 2020년 봄호)


   윤지양의 「기억 비평」은 전위시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전통적 서정시가 보여주던 질서나 규범은 무시돼 있다. 위 시에서 화자는 기억에 대한 사유 곡선을 그리고 있다. 기억은 주체의 정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기제이다. 현재의 육체는 과거의 육체와 다르지만, 현재의 기억은 과거의 기억에 기반하기 때문에 동일하다. 육체의 장기들은 일정한 기간마다 새롭게 생성된다. 그러므로 ‘나’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기억이다. 시적 화자는 “(세로 세포와 가로 세포 실험 찾아 볼 것)”이라고 말하며 이 사실을 지워버린다. 인간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워질 수 있다는 망각곡선을 표현한 것이다. 전통적 서정시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적 실험이다. 주체의 정체성을 만드는 기억은 특별한 시도가 없을 때는 자연히 소멸의 길을 걷는다. 기억은 강도에 따라 망각의 양이 달라진다. 

   모든 기억은 ‘나’를 만듦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망각하지 않는 기억은 ‘나’를 위험에 빠뜨린다. 반드시 망각해야 할 상처는 지우는 게 마땅하다. 이렇게 특별한 기억을 제외한 기억은 ‘나’의 정체성과 관련되기에 소중하다. 화자는 왜 기억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가. 그것은 기억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리고 다른 오감 등이 작동할 때/다른 부분의 자극이 저장된 기억을 건드린다.”고 기억의 망각을 경계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각은 의미 있게 작동돼야 한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고립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정체성은 중요하다. 정체성이 없다면 우리는 남들과 하나가 돼 갈등과 대립 없이 섞일 수 있다. 행복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어쩌면 정체성은 필요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고립되고 불안하더라도 정체성 있는 ‘나’를 원한다. 사회는 같아지려는 압박과 달라지려는 정체성과의 싸움이 지속되는 곳이다. 이 모든 정체성을 만드는 질료가 우리의 기억이다. 

   사회가 동일자로의 압박을 가하면 주체는 기억이라는 방어기제를 만든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동일자가 되었을 때 커다란 이익을 창출한다.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고립되고 개성화되면 자본의 논리는 먹혀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사회는 개인에게 압박을 가하고 특정 이데올로기로 세뇌한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이유로 화자는 “이때 우리는 어느 정도 같은 대기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한 날씨를 경험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사건 사고를 접하는 경우도 비슷한 감각을 형성한다.”고 잠시 정체성 추구의 무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화자는 이것은 사회의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의 이와 같은 의식은 “이러한 비슷한 감각의 경험은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이내 정체성이라는 방어벽을 친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머릿속 기억을 끌어안는다. 

   자신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은 “예) 비가 오는 날 A와 커피를 마셨는데 다른 날 비가 올 때 A와 커피 마신 기억을 떠올린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다가 “혹은 커피만 마셔도 A를 떠올릴 수 있다.”는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성을 쌓는 일은 이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를 동반한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상품에 대한 상징성이 효과를 얻으려면 정체성 없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압박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화자는 기억으로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그러기에 화자는 “생각과 사회화에 대하여”에 밑줄을 긋는다. 생각하고 기억하는 ‘나’는 사회화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뿔 꺾기는 구조화된 사회에서 쉽지 않다. 그러므로 화자는 “생각은 기호화된 기억이여 기억하는 것은”이라며 말을 줄인다. 사회는 우리의 개별적 기억을 지우며 다중화된 기억을 심는다. 기억으로 무장한 정체성에 가해지는 사회의 압박과 그것에 맞서는 주체의 투쟁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전통적 서정시는 머릿속에 있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질서와 균형 잡힌 현상을 노래한다. 시인과 세계는 일치했으며, 시어는 언어미학으로 출렁거렸다. 하지만, 2000년 이후 특히 2020년대의 시는 감정의 과잉을 억제하며 현상 안쪽으로 깊이 잠입한다. 따라서 윤지양의 「기억 비평」은 전통을 무너뜨린 자리에서 전위를 시도한다. 기억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논리를 시 속에 삽입해 넣는다. 시인은 시적 화자의 감정과 인물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언어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 자유를 보장하며 새로운 시적 확장을 지향한다. 이러한 시도는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에 강했던 신춘문예 당선시에서도 나타난다. 서정적 자아를 지우며 탈서정을 지향하는 시가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것은 시의 지형도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2022년도 경향신문 당선작 백가경의 시는 우리 시단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전문(『경향신문』 2022년 신춘문예)

  

   데카르트는 천장을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고 좌표계를 만들었다. 그는 2차원 좌표계를 좌표평면이라 하고, 3차원 좌표계는 좌표 공간이라 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세바스챤 힐튼이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발명의 최종 목적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주는 데 있다. 좌표에 해당하는 교차점에 닿게 하는 놀이는 데카르트 좌표계의 개념을 실질적으로 만지는 학습이다. 어린이들은 즐거운 정글짐 놀이를 통해 좌표축들이 서로 직각으로 만나는 좌표계를 온몸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내적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야 할 3차원의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바스챤 힐튼의 정글짐은 어린이들에게 현실적 감각을 깨닫게 해주는 놀이터이다.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에 등장하는 하이퍼큐브는 정사각형과 정육면체를 n차원으로 확장한 폴리토프이다. 하이퍼큐브는 3차원의 정육면체를 당기면 만들어진다. 이렇게 완성된 하이퍼큐브는 8개의 입체로 구성되어 있다. 위 시는 하이퍼큐브를 이해하기 위해 3차원에 대한 학습장인 정글짐을 시적 공간으로 만든다. 시적 화자는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고 1차원의 이미지를 그린다. 1차원은 x라는 하나의 좌표만을 사용한다. 시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정글짐에서 둥근 쇠파이프를 잡고 1차원에 대해 학습하는 중이다. 이러한 학습은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이라고 2차원으로 차원을 높인다. 선과 선으로 이루어져 정사각형을 만든 2차원은 정글짐 놀이에서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이라며 현실을 학습하는 것으로 시적 의미를 확장한다. 정글짐에서의 학습은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과 같이 현실적 문제에 가닿는다. 이처럼 시인은 정글짐에서 3차원의 정육면체를 현실적 계층의 문제로 변주한다. 

   위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린이와 성인이 혼재돼 있다. 어린이들이 시의 전반부에서 정글짐 놀이를 통해 현실을 배운다면, 시의 중반부는 성년이 된 어린이 또는 성년의 현실 문제가 3차원의 공간에서 표현된다. 시적 화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 문제를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이라고 1차원에 사는 하층계급의 생활고를 드러낸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은 하나의 냉혹한 현실이다. 이곳을 벗어나려 각 주체는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하는 노력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할 수밖에 없다. ‘나’는 3차원의 정육면체가 조여오는 압박을 온몸으로 견디는 존재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앞뒤, 좌우, 위아래로 압박하는 공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한다. 높은 차원으로 확장하려 해도 이곳에선 불가능하다. 그냥 좌표 하나만 늘이면 된다고 자신을 타이르지만, 정육면체는 변하지 않는다.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낼 수 없듯이 우리는 이곳 정육면체인 3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 데카르트가 파리를 통해 영감을 얻은 이 공간은 우리를 파리와 동일자로 만든다. ‘나’와 ‘너’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3차원에 갇힌 수형자이다. 우리의 머리 위 창공은 4차원 이상의 공간이지만, 우리가 믿는 실제의 공간은 4차원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이 어린이에게 던지는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라는 질문은 공허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상한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퍼큐브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4차원의 연구소장과 파리처럼 3차원의 공간에 있는 아이들의 대화는 소통이 안 된다. 이러한 차원의 갈등은 연구소장이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이들은 정글짐의 놀이를 통해 3차원을 터득한다. 그리고 아이들로 은유 되는 3차원의 우리는 4차원의 그림자가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이처럼 우리는 3차원을 벗어나고자 4차원을 꿈꾸는 존재이다.

   2020년대의 시인들은 2010년대의 전위를 딛고 ‘언어의 원초적 자유’를 시적 공간에서 실험한다. 소통 방식이 1차원의 직선이나 2차원의 선과 선들이 이루어놓은 평면 형상이 아니라 3차원의 입체모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시적 현실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은 3차원의 정육면체를 끊임없이 당기고 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시도는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던 신춘문예에 상당한 균열을 가했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아 현대인들의 감각이 바뀌었듯이 시 쓰기의 방식도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전위시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은 시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원초적 자유를 실험하는 시인들 때문에 지금 이곳의 비평가들은 새로운 좌표계를 만들 것이다.  


2)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16~18쪽.


   3. 물결의 논리


   시의 물결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에서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제2의 물결 집단과 제3의 물결 집단과의 대립은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3)하게 된다. 물결의 충돌로 지금 우리 시단도 긴장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제 처음의 첫 번째 질문인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에 답을 해야 한다.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소통 불가의 시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전위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추상화가 색과 선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가듯이 시를 쓴다. 언어의 원초적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물결의 머리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밀려오는 물결에 올라타는 행위는 역동적이며 낯선 이미지로 꿈틀댄다. 시적 실험은 한국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작업이다. 문장에 의미를 지우면 시는 스스로 말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러므로 한국 시의 확장을 위해 비평은 더욱더 이론적 추임새를 넣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에 답할 차례이다. 그림에 구상과 추상이 있는 것처럼 시도 선명도가 높은 전통적 서정시가 있고, 내면의 감정을 재현하는 모호성 높은 전위시가 있다. 둘은 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소중하다. 시적 발화에 따라 시 쓰기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인위적 ‘칼 대기’는 지양해야 한다. 

   이전의 물결인 전통적 서정시를 무너뜨려선 안 된다. 이 말은 새로운 물결인 전위시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다양한 샐러드가 한 그릇에서 조화미를 발휘하는 것처럼 시인들도 다양한 색깔로 각자의 개성을 지향해야 한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물결은 분명 새로운 감각을 요구한다. 누군가는 전통적 물결로 시를 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물결로 시를 쓴다. 이러한 물결은 개별적인 시적 에너지로 ‘한국 시’라는 큰 강물을 만들 것이다. 

   지금 이곳의 비평은 질 들뢰즈의 “현대 회화를 구상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는 추상 회화의 힘든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추상 회화와는 다른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다른 길이 없을까?”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평은 전통적 서정시를 포기하면 안 된다. 또한 새로운 서정시도 견인해야 한다. 이 어려운 지점을 딛고 비평가는 새로운 시의 물결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급의 비평은 피투 된 시를 선택해 창조적 의미를 밝혀내는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3) 앨빈 토플러, 『제3의물결』, 홍신문화사, 199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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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 관리자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선주원 1) 기억하기를 통한 슬픔과 애도 우리의 삶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 모두 슬픔이라는 고통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서도 안 되는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괜찮은 척, 센 척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언제나 우리를 적시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곳곳에서 배어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서 기원하는 슬픔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동반하면서, 우리를 홀로 섬에 있게 한다. 홀로 섬에 남겨진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 즉 외로움에 치 떠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툴고 어색한 채 어떻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생겨나는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누군가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데서 오는 슬픔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의 실체를 깨달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를 통해 슬픔의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말을 걸면서 그저 순정하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짐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홀로 미쳐가거나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애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슬픔에 젖거나 세상과의 단절을 도모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작용하지 못한 채 과도한 기억을 낳는다. 과도한 기억은 혼자만의 섬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부추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슬픔의 고통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을 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양상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사랑하던 연인 ‘구’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담’이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과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과잉,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건으로 값이 매겨지는 삶을 살아갔던 ‘구’의 고통, ‘구’의 죽음 뒤에 작용하는 ‘담’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었던 ‘구’를 증명하는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아울러 너무나도 사랑한 존재였던 ‘구’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구’를 먹는 ‘담’의 식인 행위를 통해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자 인물 &l

  • 관리자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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