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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469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는 일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역광의 세계에 있어도 나는 나로 남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역광 안의 나는 나를 유지하며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순간은 원초적 의미를 찾아 삶의 이면을 탐구하는 시간이다. 시적 화자는 중심이 되지 못한 주변의 삶에 촉수를 댄다. 그곳에 삶의 무게에 눌린 슬픔이 있다. 강렬한 햇볕 때문에 짙어진 어둠은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을 갖게 한다. 안희연은 시적 화자를 통해 사물에 부여된 의미를 지운다. 그러자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는 여유가 생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 감각적 주체가 된 화자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는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 이렇듯 역광의 세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곳이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그것은 너무 검고 너무 무거워 보여서


   가방 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다


   늘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때 나는 홀로 믿어지다,라는 말에 붙들려 있었는데


   믿을 수도 있었는데 왜 믿어진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는 믿어질 것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검침원」 부분


   사물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원초적 의미로 존재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초월할 줄 아는 게 사물이다. 시적 화자는 검침원이 들고 온 커다란 가방을 보고 있다. 가방을 바라보자 가방은 현실을 벗어나 미래로 도주한다. 검침원의 가방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다. 화자는 가방을 원초적 공간에 배치하고 가슴으로 밀려오는 비현실적 세계를 본다. 시적 화자의 감각에 포획된 가방엔 ‘미래’가 담겨 있다. 안희연의 시에 드러난 사물은 이렇듯 세계를 초월하는 알 수 없는 물자체이다. 검침원이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미래라는 무게 때문이다. 가방에서 미래를 유추하는 방법이 초월적 사유이다. 현실과 미래는 불확실성 때문에 늘 규정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검침원은 여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초월 의지를 불태우는 자이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검침원은 집 안을 살피는 것으로 현실과 연결된다. 그러나 화자의 투영된 감각은 현실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점검의 대상이다. 이렇듯 검침원은 믿을 수 있을 만큼 현실을 점검하며 미래로 가는 길을 고집스럽게 연다. 

   안희연은 감각 대상을 포획하기 위해 물리적인 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것에만 사로잡히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사물은 감각의 그물을 언제나 피해 간다. 이 때문에 안희연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곳에서 정동적 촉수로 사물은 포획된다. 


* 안희연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에 발표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한다. 제목만 표기된 경우는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2. ‘몸’을 위한 공간의 발견


   안희연은 시적 사유의 새로움을 위해 노력한다. 이 결과가 몸을 위한 공간의 발견이다. ‘나’의 몸은 공간 안에 존재하며 개별적 경험에 따라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다. 몸은 공간에 의지하기 때문에 대체로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몸은 공간에 있고, 기억은 공간 밖에 있을 수 있다. 공간은 현실적이어서 몸과 일체가 된다. 그러나 기억은 몸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을 순간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 몸과 기억이 나뉘고 파편화되어 서로 다른 비대칭의 세계로 향한다. 안희연은 시공간이 일치된 곳이 아니라 몸이 있는 몽유적 공간에 집중한다. 시인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 몸이 있었던 공간을 시적 에너지로 삼는다. 이처럼 시인은 낯선 실험이 힘을 얻는 시대에 몸이 있었던 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나’를 형성하던 몸을 따라가면 그곳에 낯선 공간이 펼쳐져 시는 스스로 지향점을 찾는다. 

   몸은 ‘나’를 만드는 물리적 실체이다. 실체인 몸이 있는 곳에 몽유적 기억도 존재한다. 감각은 삶의 체험과 맞물려 있다. 몸이라는 실체가 있어야 구체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시인에게 몸이라는 요소는 시를 쓰는 에너지이자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할 개념이다. 우리의 욕망과 상상력도 몸이라는 플랫폼이 있으므로 가능해진다.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몽유산책」 부분


   시적 화자의 몸은 의식과 분리되어 특별한 사건을 재현하는 데 열중이다. ‘나’는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독자적인 표현을 위해 “멀고 먼 담장 위를” 아주 편안한 자세로 걷는다. 어렸을 적 꾸었던 꿈이 실현되는 기분을 즐기는 ‘나’는 과거의 기분을 이곳으로 불러온다. 옛적 아름다웠던 시간은 수면보행증으로 불완전하게 재현된다. ‘나’는 불완전하고 위태롭게 걸어 다니지만 꿈이 실현되었다는 것 때문에 행복하다. 삶이 꿈으로 가는 여행이라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는 이 순간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다. 그러니 몽유 속 산책은 꿈이 실현되어 허공을 걷는 기쁜 나의 모습이다. 현실에서는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순간이 성숙의 시기에 나를 찾아왔다. 이 순간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이다. 몽유의 걷기 방식은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균열을 낸다. 시공을 초월한 바람처럼 걸어가는 화자의 발걸음이 투명한 소리를 흩뿌린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부분


   여름의 태양은 열기로 푸른 행성을 자신처럼 붉게 만든다. 뜨거운 계절의 언덕에 오르면 모든 풍경은 감당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무작정 걸어간다. 여름의 푸른색은 붉은 열기로 끊임없이 표정을 바꾼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열기를 견디고 있는 생명체들은 필사적이다. 어떤 생명은 태양을 외면하고, 또 어떤 생명은 태양에 순응한다. 뜨거운 열기와 강렬한 빗줄기가 번갈아 행성을 난타한다. 여름과 마주하는 순간은 불과 물로 생명을 담금질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가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는 진술은 당연하다. 언덕은 삶의 고비이며 견뎌야 하는 순간이다. 고통과 상처를 지워가며 “한참 걷다” 보면 빗줄기가 만들어놓은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난다. 여름은 생명에게 필요한 불과 물로 극단적 순간을 만든다. 끝없이 오르는 기온의 상승과 함께 빗줄기도 강해져 “사방은 물웅덩이”로 변한다. 열정적 순간은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처럼 고통으로 바뀐다. 뜨거운 열기와 강렬한 빗줄기로 표정을 한순간 바꾸는 여름 언덕은 삶의 주름과 불안을 상징한다. 


   그 방에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온몸이 뒤틀린 나무가 온몸을 비틀며 자라고 있다

   몸속에 갇힌 태양

   찬란했던 물의 기억을 태우며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칠 때마다 시퍼런 이파리가 돋아났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자물쇠를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방 안에는 웅크린 나무가 있다

   곤한 잠에 빠진 거인처럼

   벽을 움켜쥐던 손을 거두어 가슴팍에 얌전히 모으고 있다

   물도 햇빛도 없이

   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을 갖게 되는지

                                                ―「백색 공간」 부분

  

   화자는 의도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여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방에선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비워진 공간을 뚜렷하게 그려놓는다. 그리고 삶의 순간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몸을 비틀며” 자란다고 선명하게 진술한다. 이것은 여백을 잘 이용해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가 아니다. 화자의 예상치 못한 어두운 삶을 ‘백색 공간’으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불행을 계획하지 않고, 그것에 맞설 준비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색 공간은 두려운 현실이 된다. 화자는 “몸속에 갇힌 태양”을 확인한다. 분명하게 만져지는 태양은 화려함을 잃은 존재이다. 그러한 태양은 “찬란했던 물의 기억을 태우며” 과거의 시간을 되새김질한다. 삶의 여백으로서의 여유가 아닌 불행과 상처로 깊은 주름을 보여준다. 자신을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슬픔이다. 화자는 굳게 닫힌 아포리아를 열기 위해 “자물쇠를 가지고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삶의 계획표 어디에도 없었던 웅크린 나무가 방 안에 있다. 방은 휴식이며 삶의 에너지를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방엔 “물도 햇빛도” 없는 백색 공간이 무표정하게 펼쳐져 있다. 

   몸은 공간을 발견하고, 공간 또한 몸을 발견한다. 발견은 삶의 원초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공간에 두고 실존적 질서 속에 정신을 둔다. 

 


   3. 기억이 시작된 곳


   몸의 감각이 살아날 때 기억은 시작된다. 주체의 감각은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게 돼 있다. 우리가 인위적인 것들을 제거해 낸 원초적 공간에서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은 메커니즘 때문이다. 공간 안에 있는 몸은 자극에 언제든지 반응한다. 다양한 자극에 대한 반응은 기억과 맞물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공간은 주체로 하여금 개인의 기억을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러므로 주체에게 공간은 환경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개인사가 써지는 시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공간에서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극을 수용하는 몸은 기억 속에서 구체성을 띠며 삶을 안정시킨다. 감각한다는 것, 반응한다는 것은 몸의 실존이다. 공간에서 반응하는 주체는 기억으로 자신을 지키며 확장한다. 

   몸이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 공간에서 기억은 시작된다. 시적 화자가 변화에 자극받을 때마다 기억은 낯선 일들로 확장되기를 거듭한다. 


   네가 아는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것을 생각해봐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마리

   작은 양이었다


   너는 그것을 잘 돌봐줄 것을 당부했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그날 꿈속에서 너를 본 이후로

   나는 양과 함께 살아간다


   목이 마르거나 춥진 않을지

   간밤 늑대의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도 잔뜩 뿔이 나

   있지도 않은 양 따위, 중얼거린다

                                    ―「양 기르기」 부분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이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꾸만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싶어했다


   아직 덩어리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할 수 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얼굴 위로 진흙이 줄줄 흘러내렸다

                                      ―「액자의 주인」 전문


   「양 기르기」의 화자는 “네가 아는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것을 생각해봐”라고 머릿속에 새겨두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시간의 한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과거로의 여행이다. 그리고 과거의 공간에 자리했던 나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당시 그곳의 공간에 있었던 나와 현재 이곳의 공간에 있는 나는 동일하다. 화자는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사물이 “한 마리 작은 양”이라는 것을 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는 자신이 경험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과거의 공간에서 솟아난 어떤 일에 대한 애정은 현재의 공간에서 꽃을 피운다. 일이나 사물에 대한 애정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과거에 실현되지 못한 것들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솟아났던 열정은 “그날 꿈속에서” 본 것처럼 흔적으로 존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진다. 그렇기에 화자는 “나는 양과 함께 살아간다”고 진술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은 저마다 꿈을 꾼다. 시적 화자는 양을 기르며 세상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것에 의미를 둔다.

   현재의 몸과 과거의 몸은 물리적으로 다르다.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세포는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와 다르게 만든다. 내 얼굴을 구성하는 이목구비도 이렇게 새것으로 교체된다. 하지만, 과거의 공간에 몸이 있을 때의 경험은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경험은 기억이 되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해 준다. 시적 화자는 「액자의 주인」에서 과거의 기억을 현재 이곳으로 불러온다. ‘주인’은 아직 망각곡선으로 사라지지 않은 중요한 인물이다.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액자의 주인을 꺼내는 일은 통증을 동반한다. 화자는 이러한 통증을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과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로 표현한다. 과거의 나를 지배했던 액자 속 주인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절망하는 나를 다독이는 일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다. 장기 기억으로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액자의 주인이 나에게 “자꾸만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다.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은 기억이다. 액자의 주인도 현재의 나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이다. 화자가 파편화된 현실을 견디는 힘도 액자의 주인에게서 나왔다. 


   우리는 덜컹이는 기차 안에 있었다 올라탄 기억은 없지만


   가고 있다고 믿었다 저마다 마음속으로 빛나는 운석을 상상했다


   불길이 시작된 곳

   흰 눈 속에 흰 개를 묻을 때 울려퍼지던 낮은 종소리


   창밖은 새하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됐지만 진짜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선로를 벗어난 게 아닐까요 애초에 운석이 존재하긴 했던 겁니까 사람들은 내놓으라고 말했다 흰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누구의 이빨자국이지?」 부분


   현대인에게는 자신이 정한 목적지가 저마다 존재한다. 이 시대가 만들어놓은 자본이라는 욕망이 목적지인 사람도 있고, 생의 어느 시기 자신에게 각인된 독특한 욕망이 목적지인 사람도 있다. 자신이 빚어낸 꿈을 꾸며 의미를 확장해가는 모습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목적지로 가는 행위를 화자는 “우리는 덜컹이는 기차 안에 있었다 올라탄 기억은 없지만”이라고 확인한다. 현대성이 강요하는 목적지는 물화의 가치에 반응한다. 이러한 현대성이 증폭될수록 현대인의 불안은 커진다. 이곳 아닌 저곳 어딘가에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몰두한다. 현대성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한 화자는 “마음속으로 빛나는 운석을 상상”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우리가 숨 쉬고 꿈꾸는 도시는 불안하여 강렬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을 바탕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의 “창밖은 새하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파편화되고 익명화된 구조 속에서 우리는 꿈꾸고 미래로 달려간다.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차를 탔지만, 이 열차가 선로를 벗어난 것 같아 불안하다. 우리가 찾는 운석이라는 물질은 꿈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의 언저리에서 싹튼 꿈은 색깔이 결여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의 새로운 기억은 만들어져야 한다. 새롭게 솟아난 기억은 나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것이다. 



   4. 사실과 해체의 시간


   현대를 사는 주체는 몸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한다. 우리가 딛는 공간을 현실적인 ‘나’는 감각적 주체가 되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입증할 수 있는 진실을 해체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해체적 욕망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싶어서이다. 현재 주어진 물화 중심의 질서를 부정하겠다는 심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현대성의 구조는 주체의 주변화와 꿈의 상실을 부추겼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하는 주체는 굳건하게 솟은 사상적 축대를 허물고 싶어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물화를 중심에 두고 작동하는 세계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에서 꽃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물화의 세계도 이처럼 파편화된 누군가의 꿈을 피고 지게 한다. 견고하게 질서 잡힌 곳에서 전체성에 흡수당하는 나를 관조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따라서 나는 나를 해체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물화가 폭력이 되는 순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 ‘나’는 카오스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부작용에 휩싸인다. 내 고립은 우리 시대의 불행한 선물이다. 이때마다 나는 나를 해체한다.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소동」 부분


   해체의 욕구가 물화 중심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기제라면, 화자의 해체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화자는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오는 것으로 해체를 시작한다. 그런 행위는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이 물화 중심주의로 사고하고 행동할 때, 화자는 구조화된 질서를 파괴하고 싶었다. 따라서 화자는 우산을 숨긴 채 비를 맞는다. 이것은 타자화된 욕망을 꿈꾸는 현대성에 대한 반항이다. 이제 파편화된 반항으로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사람들의 편향된 심리는 나에게 비폭력적이지만, 그것은 견디기 힘든 폭력으로 다가온다. 이미 지금 이곳의 “시소는 기울어져” 질서 잡힌 불안 상태가 지속된다. 화자가 인식하는 것은 “나는 지워진 사람”이다. 시대의 가치로 환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커질수록 개인은 파편화된다. 고립된 개인은 시대와 불화하며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안희연은 현대성의 공간이 아닌 원초적 공간을 걷기 시작했다. 레비나스가 지적한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감각적 주체가 되어 고통의 언어로 현대성을 성찰한다. 이러한 시적 질문의 방식이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시인의 시는 원초적 공간에서 태어나는 에피파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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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lsqu

  • 관리자
  • 2023-11-08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 관리자
  • 2023-09-15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선주원 1) 기억하기를 통한 슬픔과 애도 우리의 삶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 모두 슬픔이라는 고통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서도 안 되는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괜찮은 척, 센 척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언제나 우리를 적시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곳곳에서 배어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서 기원하는 슬픔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동반하면서, 우리를 홀로 섬에 있게 한다. 홀로 섬에 남겨진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 즉 외로움에 치 떠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툴고 어색한 채 어떻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생겨나는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누군가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데서 오는 슬픔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의 실체를 깨달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를 통해 슬픔의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말을 걸면서 그저 순정하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짐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홀로 미쳐가거나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애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슬픔에 젖거나 세상과의 단절을 도모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작용하지 못한 채 과도한 기억을 낳는다. 과도한 기억은 혼자만의 섬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부추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슬픔의 고통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을 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양상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사랑하던 연인 ‘구’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담’이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과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과잉,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건으로 값이 매겨지는 삶을 살아갔던 ‘구’의 고통, ‘구’의 죽음 뒤에 작용하는 ‘담’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었던 ‘구’를 증명하는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아울러 너무나도 사랑한 존재였던 ‘구’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구’를 먹는 ‘담’의 식인 행위를 통해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자 인물 &l

  • 관리자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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