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 작성일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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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모빌리티 패러다임 1
김유림
김숨 「룸미러」
1. 길 위에 표류하는 인간
모빌리티는 시대를 읽는 키워드가 되었으나 문학과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국내외적으로 『서유견문』, 『열하일기』 , 『오디세이아』, 『리어왕』, 『돈키호테』등 이동을 모티브로 천착한 세기의 걸작들은 넘쳐난다. 반면 모빌리티 인식을 기반으로 문학 작품을 사유한 사례는 미미한 편이다. 현대는 이동성이 범람하는 사회다. 다양한 이동 매체와 첨단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제외한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시대의 거울인 문학 분야에서도 이동 매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모빌리티 수행 과정에 천착한 문학 작품 해석은 시대의 재해석이며 사회를 관통하는 인식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더하여 문학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치 추구는 문학 분야를 넘어 예술계 전반에 시너지 효과를 추동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김숨 소설 「룸미러」1)는 ‘길 위의 장르’2)로 교통 시스템이 사건의 주요 무대다. 도로에 범람하는 교통수단은 사회의 얼굴이다. 수백만 원 단위부터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자가용, 생계 수단인 물류 수송용 트럭, 관광버스, 배달 오토바이 등은 물신주의, 사회 계급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다. 소설은 집을 떠나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 중에 서사가 전개되어 이동 중에 결말에 이른다. 이때 이동 수단은 가족이 임시 체류하는 거소가 된다. 즉 집이 정주에 근거한 안정된 공간이라면 교통수단은 집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잠시 머무는 장소로 불안정한 공간이라 하겠다. 이동 중에 체류지는 사이 공간3)이다 사이 공간의 불안정성은 경제적 약자의 현실 삶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계 위기로 대별 된다.
「룸미러」의 사건은 어린 사내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화자는 아내다. 소설의 배경 공간은 자가용으로 가족의 이동을 모티브로 한다. 가족은 남편의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다. 외자식인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어릴 적부터 가장 역할을 해왔고 친척 대소사까지 빠짐없이 챙긴다. 아내가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는 오롯이 남편이 책임지고 있다. 남편은 두 달 전에 직장을 옮겼다. 가장의 잦은 이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원인이다. 고용 불안은 가장의 심리 불안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불안 심리는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야근 중에도 집에 수시로 전화하여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잠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퇴근해 오면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티브이 볼륨조차도 낮춘다. 가장의 강박 행위는 가족이 차를 타고 이동 중에도 계속된다.
남편은 차선을 바꾸면서도 룸미러로 뒷좌석의 아이들을 흘끔 살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의 두 눈동자가 흘끔 룸미러를 향하고 얼굴이 긴장하듯 굳었던 것이다. (「룸미러」 본문, 이하 쪽수만 표기, 183-184쪽)
남편은 운전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룸미러로 아이들을 살핀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온통 아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불안의 근원은 아이가 태중에 들면서부터였다. 남편은 자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했다. 첫째와 둘째 모두 남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불안감은 증폭된다. 그가 자식에게 갖는 심적 부담은 외모가 닮은 꼴이라서가 아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계의 질서는 부의 대물림 가난의 고착화를 양산했다. 남편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가장의 책임감뿐이다. 어머니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무방한 친척의 대소사 참석을 강요한다. 남편은 일종의 채무 의식으로 어머니의 뜻을 따른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처지에서 집안 대소사 챙기기, 가족 부양은 심리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남편은 자신의 삶을 답습할 두 아이가 부담스럽다 못해 두려운 존재로 각인된다.
조상의 희생과 업적 덕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부채 의식은 강요나 다름없으며 두려움과 공포심의 근원이다.4) 어머니와 자식에 갖는 남편의 채무 의식은 오랜 관습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부모에 받은 채무 의식, 가장으로서 자식에 대한 책임감은 그를 억압의 기제가 된다. 남편이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는 첫째 요인이 생계 위기라면 둘째 요인은 거부할 수 없는 관습이다. 따라서 남편이 룸미러를 강박적으로 살피는 행위는 경제적 어려움과 탈출구 없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 불안에서 기인한다.
2. 경쟁사회, 10퍼센트 파이를 위한 각축전
198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자가용 보급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 가구당 한 대의 자동차 시대가 열렸다. 자가용 소유가 일반화되면서 차는 경계 계급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화자의 가족이 탄 차는 1998년에 출고된 금색 베르나다. 소형으로 분류되는 베르나는 주인공 가족의 경제 사정을 표상한다.
한남대교에서 반포대교를 지날 때 가족의 베르나와 트럭이 나란히 달린다. 트럭 적재함에는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가 실려있다. 베르나는 마포대교에서 트럭을 앞서 나간다. 돼지 운반에 동원된 소형 트럭보다는 베르나가 속도 경쟁에서 우월적 위치를 점유한다. 통상적으로 돼지 운송은 남편의 직업보다 열악한 생계형 직업군의 일이다. 베르나의 트럭 추월은 겨룰만한 대상이라는 인식을 추동한다. 돼지 운반 트럭을 따돌린 베르나는 흰색 승합차와 마주친다. 추월을 노리던 승합차는 아슬아슬하게 베르나를 앞지른다. 4차선을 달리던 덤프트럭이 예고도 없이 3차선으로 달리는 가족의 차 앞으로 끼어들었고 남편은 순식간에 2차선으로 밀려난다. 덤프트럭은 물리적 크기로 보아 베르나가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속도 경쟁이 벌어지는 도로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표상한다. 깜빡이 없이 끼어들어 베르나를 위협한 덤프트럭은 운행 규칙을 어긴 것으로, 불법 편법이 난무하는 부조리한 사회의 전경이다. 남편은 무법천지인 도로 환경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 유턴하여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너무 멀리 와있는 데다 유턴 구간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도로라는 거친 삶터의 경쟁 구도에 지친다. 지나온 삶을 되돌릴 수 없듯이 집이라는 안정된 공간으로 돌아갈 길은 막혔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무리하게 끼어든 흰색 승합차, 4차선으로 달리다 깔아뭉갤 듯 3차선으로 밀고 들어온 덤프트럭은 베르나에 탑승한 가족의 삶을 위협하는 외부 요인이다. 사회 집단 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가는 현존재는 개인의 힘보다 외부에서 도래하는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살 수밖에 없다. 자유 경쟁 체제로서 시장 메커니즘은 공정이 기반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경쟁 규칙의 공정성은 희망일 뿐이다. 특정 사람들, 즉 사회 지배권력의 이로운 방향으로 시장 질서는 재편되어 있다.5) 베르나와 덤프트럭의 질주는 불공정한 게임의 기표다.
선인장연구소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면서부터였다. 최고 제한속도인 90킬로를 훌쩍 넘겨 110킬로까지 치닫던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60킬로까지 떨어지더니 40킬로대까지 떨어졌다. 40킬로를 정점으로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아예 멈춰 서고 말았다. 남편이 옴짝달싹 않는 앞차를 향해 클랙슨을 짧게 울렸다. 그는 클랙슨 소리가 아이들을 깨우기라도 할까 봐, 손으로는 클랙슨을 누르면서도 두 눈으로는 룸미러를 흘끔거렸다. (196-197쪽)
가족이 탄 베르나는 조금씩 주행속도가 떨어진다. 이는 경쟁 생태계에서 도태되는 남편(가족)의 현주소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가족의 베르나가 달리는 차선이 개인 가족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라면 무리하게 끼어든 차들은 개인이 넘어설 수 없는 사회라는 외피의 힘일 것이다. 남편은 위험을 피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차 안이라는 거소, 즉 가정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가족의 베르나와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내달리는 차종에 있다. 돼지를 실은 트럭, 덤프트럭, 승합차는 통상적으로 부유층의 이동 수단이 아니다. 베르나와 경쟁하는 트럭은 자가용이라기보다 서민 계층의 생계유지 수단이다. 전 세계 부의 90퍼센트를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가지고 있을 만큼 양극화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6) 소설에서 가족의 베르나와 경쟁하는 차량 운전자는 모두 서민 계층으로 삶터에서 경쟁은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
양화대교 부근에서 차량 정체가 시작되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 떼가 “돼지들의 살점을 뜯어 먹기라도 할 듯 공격했다.”(210쪽) 서민들의 일상은 정체되어 가고 생존 투쟁은 치열하다 못해 잔혹하다. 「룸미러」의 도로 환경 세계는 90퍼센트의 파이를 고작 1퍼센트 부자들에게 빼앗기고 남은 10퍼센트의 파이를 두고 99퍼센트 빈자들이 벌이는 혈투가 난무한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외제 차는 소형 베르나나, 트럭, 승합차와는 경쟁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따라서 도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장소가 된다.
부의 편중을 해결할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양극화는 갈수록 극심하다. 예를 들자면 불과 10년 사이 동네 구멍가게는 자취를 감췄다. 대기업 상표를 단 편의점들이 골목 상권을 점유하면서 취약 계층의 먹거리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정치와 경제 두 영역은 분리할 수 없다.7) 현 정부는 대기업의 법인세 감면, 상속, 증여세 완화와 같은 소위 부자 감세 정책에 매진하고 있다. 지나친 포퓰리즘도 경계해야 하나 균형 잃은 정책은 사회 취약 계층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가족 해체, 결혼 회피, 딩크족 양산은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룸미러」의 도로 환경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이다.
3. 결핍과 동결, 그리고 죽음
가족의 베르나를 둘러싼 도로 질주는 위협적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재편되는 물질 사회의 은폐된 얼굴처럼 어떤 규칙도 질서도 없다. 덤프트럭이 3차선으로 달리고 있는 가족의 차를 깔아뭉갤 듯이 덤벼든다. 남편이 급하게 2차선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바람에 차체는 심하게 흔들린다. 가족의 삶 전반이 위협을 받고 있다. 뒤따라오던 차들이 가족의 베르나를 향해 경고 클랙슨을 울려댄다. 남편은 극도로 예민해진다. 남편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지만 위험은 고스란히 가족 몫이다. 가정의 운전자인 남편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에 무력감에 빠진다. 고작 욕설만이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미친 새끼!”
남편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룸미러를 흘끔거렸다.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차를 살피는 것일 수도, 뒷좌석의 잠든 아이들을 살피는 것일 수도,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196-197쪽)
남편의 욕설은 첫째, 덤프트럭 운전사를 향한다. 물리적으로 베르나를 위협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식을 겨눈 정황으로 읽힌다. 남편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해 왔다. 자식이 잠들기를 바라는 심리도 부담감에서 촉발된 것이다. 셋째, 무기력한 그 자신이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딱 한 번 돼지를 실은 트럭을 추월했을 뿐 승합차, 덤프트럭, 버스에 번번이 밀려난다. 직장에서도 설 자리를 잊은 그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해 왔다. 남편은 경쟁에 취약한 인물이다. 그의 욕설은 자기혐오와 더불어 자신이 처한 불행을 타자, 즉 아이들에게 돌리려는 태도를 보인다.
‘미친 새끼’라고 욕설을 뱉으면서도 남편은 룸미러로 뒷자리에 자식들을 살펴본다. 아이들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고 도로는 정체 상태다. 계기판의 속도는 점점 떨어진다. 그의 삶은 한 걸음도 앞서가지 못하고 있다. 도로에 멈춘 차는 이들 가족의 정체된 삶의 메타포다. 가족은 정체 원인도 모르고 차 안에 갇힌다. 날은 어두워지고 도로에 모든 차가 라이트를 켠다. 남편은 라이트를 켤 의지조차 없다. 어둠은 짙어지고 정체된 현실을 타개할 어떤 방안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뒤차가 쏘아대는 헤드라이트는 가족의 차에 숨겨진 비밀이라도 캐낼 듯 집요하게 비춘다. 상향등에 드러난 “남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보였다.”(203쪽) 룸미러로 아이들을 확인하는 남편의 강박적인 행동과 가족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클랙슨 소리, 뒤차 헤드라이트는 어둠에 가려진 차 안을 쏘아본다. 이들 부부가 감추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아빠가 원하는 바는 자식들이 잠들어있는 것이다. 헤드라이트에 질린 남편의 얼굴은 의미심장하게도 자식들의 죽음을 유추하게 한다.
남편은 일 년 전 중국 출장길에 박제 새 세 마리를 사 왔다. 박제 새는 말 그대로 죽은 새다. 그가 사 온 박제 새를 아이들 품에 안겨준 사람은 화자인 아내다. 그녀는 두 아이에게 각각 한 마리를, 나머지 한 마리는 아이들 방문에 매달아 놓았다. 아이들 방을 봉인하듯이 박제 새를 방문 고리에 걸어둔 그녀의 심리 또한 자식을 거부하는 모양새다. “아이들이 잠들지 않으려고 해서 박제 새를 한 마리씩 안겨주었어.” (186쪽) 화자는 남편에게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아이들은 강요된 잠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외출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냉동 만두를 한 봉지씩 구워 먹였다. “서른 개나 되는 냉동 만두는 유통기간이 14일이나 지난” 것이다. 유통기간이 지났다고 당장 아이들이 변을 당하는 정황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폐기 처분해야 한다. 화자의 행위는 미필적 고의가 분명하다.
“날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남편이 룸미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뭘···?.”
“내가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혹시 도마뱀 말이야?” (190쪽)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그 아이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도마뱀이 사라졌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도마뱀이 죽었다고 둘러대지만, 도마뱀의 행방은 묘연하다. 남편이 도마뱀을 식탁에 올려놓고 죽이는 시늉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겨우 일 년 만에 어른 팔뚝만큼 자란 도마뱀을 두려워했다. 도마뱀을 혐오한 이유는 무섭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두 아들이 자라는 것처럼. 남편은 도마뱀의 행방에 대해 아이들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아이들도 도마뱀 죽이는 시늉을 장난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며 남편을 대신하여 변호한다.
“나는 그저 도마뱀이 죽었다고만 했어.”, “당신이 도마뱀을 죽였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이 도마뱀을 죽인 것도 아니잖아.”(190쪽) 아내의 남편 변호는 과할 정도다. 이쯤에서 부부는 차 안에 숨겨진 사건의 공모자가 된다. 아이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남편은 차의 속도를 높이며 룸미러를 주시한다. 그는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도마뱀의 목을 조른 것이 장난이 아니라고 털어놓는다. “나는 그때 정말로 도마뱀을 죽일 작정이었어···!”남편은 지은 죄를 털어내듯 자백하고 다시 룸미러를 살핀다. 의미심장하게도 도마뱀의 죽음을 확인하는 듯하다. 룸미러에 반추된 세계는 범죄를 저지른 자, 범죄를 은폐하려는 자의 불안으로 들끓는다. 룸미러는 사회의 숨겨진 이면이다. 부모라는 힘으로 사회 통치 권력으로 자신의 범죄 행위를 덮이려는 시도는 도처에서 횡행한다.
“죽었을까?”
남편이 룸미러를 흘끔거리며 내게 불쑥 물었다.
“뭐가?”
“도마뱀 말이야······” (193쪽)
기괴한 대화를 주고받는 부부 앞에 돼지를 그득 실은 트럭이 등장한다. 트럭 적재함에서 흘러나온 오물 냄새가 가족이 탄 차 안으로 스며들었고 마포대교 위쪽 하늘은 썩은 두부 같은 구름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오물 냄새’, ‘썩은 두부’, 부부는 결코 온당치 못한 일을 공모하고 있다. 남편이 죽이고 싶었던 대상은 도마뱀이 아닐 가능성이 짙다. 차에 오를 때부터 잠든 아이들은 이동하는 내내 잠들어있다. 클랙슨 소리에도 급하게 차선을 바꾸느라 차체가 몹시 흔들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외출 전 남편은 와이드 룸미러로 교체했다. 룸미러 교체는 아이들을 억압하려는 아버지의 욕망이다.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은 객관화된 아버지다. 아이들이 억압된 룸미러는 동시에 아버지가 동결된 세계다.8) 남편은 룸미러를 통해 감금된 자신과 대면한다. 자의적인 감금, 그것은 역설적으로 도피 행각이다. 그 와중에 새 한 마리가 베르나로 돌진하다 앞 유리에 부딪혀 피투성이가 된다. 가족의 차장에 투신한 새는 룸미러로 도피한 남편을 현실 세계로 끌어낸다. “새는 모가지가 부러지고 몸통이 터진 채로 앞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212쪽) 남편은 와이퍼를 작동하고 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와이퍼로 막기 어렵다. 피를 흘리는 대상은 새가 아닌 아이들이다. 아버지에게 억압당한 아들, 이는 곧 아버지, 즉 남편이다. 자아를 결박당한 가장은 존재감을 상실한다. 아내는 차에서 내려 아직은 숨이 붙어있는 새를 차 트렁크에 은닉한다. 죽음은 삶처럼 도로에 펼쳐져 있고 삶은 죽음처럼 가족의 일상을 파고든다. 도피처를 잃은 가장은 도마뱀의 죽음, 박제 새,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새, 잠든 아이들과 동일시된다. 가족은 차 안에 결박당한 채 도로 위를 떠돈다.
4. 현실과 비현실의 콜라주
인간은 환경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9)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생명을 얻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먹어야 산다는 간단한 생존 법칙은 자연이 주는 엄중한 진리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부양 책임도 떠맡아야 한다.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듯한 남편의 태도는 부양 책임의 엄중함이다. 표면적으로 남편이 경제적 부담, 아내는 양육 부담을 지고 있다. 아이들이 박재 새나 도마뱀처럼 되지 않았다고 치부해도 이들 부부가 자식을 완곡하게 거부하는 심리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아이들 방문에 걸어둔 박제 새의 “핑크빛 부리가 여차하면 남편의 눈동자를 파먹을 듯 그악스럽게 벌어져 있었다.”(185쪽) 박제 새는 아이들이다. 어머니인 그녀는 아이들을 부모에게 해악을 끼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박제 새를 아이들 품에 안겨 잠재우고 방문에 걸얼 봉인한 행위와 개연성을 갖게 된다. 부부에게 두 아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둘째 아들 호석은 박제 새가 살아있다고 여기고 새의 부리에 생쌀을 넣어준다. 호석의 행위는 남편(아빠)의 분노를 산다. 두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의 먹이 또한 아빠가 부담할 몫이다. 아이들이나 도마뱀의 성장과 비례하여 남편의 부양 부담은 가중된다. 무섭게 자란 도마뱀에 대한 남편의 적의는 죽이고 싶은 욕구로 변한다.
통제 불능에 빠진 충동은 죽음으로 떠돈다. 죽음의 메타포는 첫째, 가족 나들이의 목적지가 장례식장이라는데 있다. 둘째, 남편이 중국 출장길에 사 온 박제 새다. 셋째, 도마뱀의 죽음이다. 넷째,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다. 다섯째, 천호대교를 지날 즈음 가족 앞에 나타난 ‘우주 관광’이라고 적힌 노란 관광버스다. 좌석이 텅 빈 채 줄지어 도로를 내달리던 버스는 가족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가족이 도로에서 버스와 다시 마주쳤을 때는 늙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늙은이들은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 소설이 죽음의 메타포를 유기적으로 구성한 것은 현실 삶의 잔혹한 일면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죽음의 유보적 전개는 불투명한 미래 암시다.10) 죽음이 막다른 길이듯 가족의 베르나는 동력을 잃는다.
도로 정체는 파탄 직전에 이른 가족 관계처럼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베르나는 자유로에 멈춘다. 자유로는 이율배반적으로 자유를 억압한다. 정체는 심각했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차들의 행렬을 앞질러 어디론가 걸어간다. 허공에서 출몰한 새 떼가 공격적으로 차들이 멈춰있는 도로 상공을 선회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새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을 공격한다. “새들이 저러다 돼지들을 다 잡아먹어 버리겠어.” (210쪽) 먹고 먹히는 잔혹한 세계의 질서는 이들 부부의 태도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마뱀의 목을 조르고 박제 새를 아들의 품에 안겨주고 유통기한이 지난 만두를 먹이는 행위가 그것이다.
부부의 행위는 의식적 자기방어 기제로 심리적 억압에서 비롯된다. 억압은 거부의 예비 단계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발현하는 불쾌의 산물이다.11) 주목할 지점은 이들 가족의 경제적 여건이 파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당장 생계가 어렵고 자가용이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다수의 하층민과 비교하면 남편은 엄연히 직장이 있고 베르나를 타고 장례식장을 찾을 만큼의 여유는 있다. 즉 부부가 자식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시대성의 반영이다.
공동체 중심의 가치가 우선하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우선하면서 가족 유지, 부양 책임 회피는 사회에 또 다른 그늘이 되어간다. 엄밀히 보자면 이들 가족의 해체는 물신주의 풍조가 원인이다. 그 중심에는 양극화가 존재한다.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가 심해질수록 사회문제 역시 악화 일로를 걷는다.”12) 상대적 박탈감은 좌절과 분노를 넘어 삶의 의지마저 꺾게 된다.
“좀 자야겠어.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깨워주겠어?”
남편은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깨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잠들어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 또한 잠들어있기를 그는 바라는 게 아닐까. (210쪽)
남편은 아이뿐 아니라 아내마저도 거부한다. 이쯤에서 가족 공동체는 해체 국면에 접어든다. 연료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고 시동을 켜 둔 채 남편은 차에서 내린다. 운전자의 자리 포기한 가장은 남편, 아빠의 역할을 포기한 것과 같다. 아내는 남편이 떠났으나 가정의 운전자가 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조수석을 고수한 채 룸미러를 자신 쪽으로 거칠게 돌린다. 룸미러는 망가졌고 차의 연료는 바닥난다. 시동은 꺼지고 그녀 또한 차에서 이탈한다. 어머니 역할을 포기한 것인지 삶을 포기한 것인지는 베일에 가려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았다.”(216-217쪽)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탈출한 그녀가 본 광경이 무엇인지는 미스터리다. 다만 그녀는 “지금쯤 내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217쪽)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아이들이 끔찍한 것인지 주어진 삶이 끔찍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차에 남겨진 존재는 잠든 아이들 둘뿐이다.
5. 불가해한 사건, 삶으로 운전
「룸미러」 비친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모호하다. 아이들이 박제 새나 도마뱀처럼 생명을 봉인 당했는지, 정말 깊은 잠에 빠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부부가 아이들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소에서 탈출한 부부가 삶을 향해 질주하는 정황은 아니다. 꽉 막힌 도로, 연료가 바닥난 차, 부부의 힘으로 해결은 불가능하다. 가족의 삶은 도로 환경이라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봉인 당했다. 외부의 힘은 사회라는 거친 삶터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다.
차에서 내린 부부가 발 디딘 미지의 세계는 죽음 이후의 세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란 관광버스는 베르나 곁에서 죽음을 싣고 내달리는 중이며 차창에 기댄 늙은이는 죽음의 사자처럼 그녀 가족들의 차를 쏘아본다. 가족이 탑승한 베르나 앞 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 새 떼가 출몰하고 돼지들의 죽음이 난무하는 도로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있다. 그녀의 눈앞에 끝없이 늘어서 있는 차들, 도로에 발이 묶인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소실점을 향해 이동한다. 무리가 늘어나는 만큼 주변에 멈춘 차들은 텅 비어간다. 도로의 소실점은 곧 삶의 소실점이다.
소설에 투영된 죽음의 시나리오는 사회의 어두운 현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비율은 1995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2002년 카드 대란으로 이어지면서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기점으로 역대 최고치(15,906명)를 찍었다. 현재까지도 인구 10만 명당 매년 27명 가까운 사람들이 스스로 생명 권리를 포기한다. OECD 회원국 평균보다 2.4배 높은 수치다.13) 이러한 통계는 한국 사회의 우울한 단면이며 경계 위기가 자살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특히 경계해야 할 지점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생명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반 자살로 포장된 부모의 자식 생명 침해는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다. 덧붙여 정부는 국가의 위기관리 실패로 죽음에 내몰린 사람들의 비명에 답해야 하며 양극화 해소 방안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정책 보완에 힘써야 할 것이다.
「룸미러」는 길 위에 펼쳐진 소외 계층의 삶을 비춘다. 거미줄처럼 깔린 도로는 경제 계급을 표상하는 기호이며 속도 경쟁에 매몰된 자본주의 얼굴이다. 남편은 경쟁 생태계에서 밀려난 현대인의 기표다. 그들에게는 죽음보다 낯선 것이 바로 삶이다. 삶은 불가해한 사건으로 실존의 층위에 존재한다.14) 그러므로 ‘사이 장소’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질주는 삶으로의 운행이다.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 운전대를 잡을 것이며 도로 질주는 계속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역동적으로 흘러왔으며 그 중심에는 인생이라는 거친 도로에서 삶을 위해 질주하는 99퍼센트의 서민들이 존재했다. 김숨 작가는 물질문명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봉인된 삶을 모빌리티 시스템으로 풀어냈다. 문학은 삶으로의 운행을 추구하는 예술 장르임이 틀림없다.
1) 김숨, 「룸미러」, 『간과 쓸개』, 문학과 지성사, 2011, 183-217쪽.
2) 닐 아처, 「길 위의 장르」, 피터 메리만 외 9인, 김태희 외 3인 엮 『모빌리티와 인문학』, 앨피, 2019, 47-76쪽
3) 존 어리, 김태한 역, 『모빌리티』, 2022, 40쪽. 존 어리는 이동과 관련 있는 도로, 정류장, 기차역, 부두 등의 장소를 사이 공간, 중간공간이라고 소개한다. 사이 공간은 마크 오제가 주장한 비장소와 매개적이다. 관념으로 존재하는 가상공간, 비현실적 공간의 개념으로 정체성 상실, 관계의 해체 양식을 띤다. 또한 실체적 장소로서 사이 공간은 이동권을 저해하는 기술적 관문의 형태로 존치된다. 이동성 부동성이 상충하는 사이 공간은 억압, 통제, 제약 등 모빌리티 자유가 침해되는 특성을 갖는다. (본문 30, 37, 40, 455쪽 참조)
4)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역,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2, 151-154쪽.
5) 로버트 라이시, 안기순 역, 『자본주의를 구하라』, 김영사, 2017, 120쪽.
6) 지그문트 바우만, 한상석 역, 『모두스 비벤디』, 후마니타스, 2020, 15쪽.
7) 로버트 라이시, 앞의 책, 17쪽.
8) 자크 라캉, 권택영 외 3인 역,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2017, 15-25쪽.
9)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998.
10) 하성란, 「광물성의 기록」, 김숨, 『간과 쓸개』, 문학과 지성사, 2011, 327쪽.
11)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박찬부 역,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18, 137-138쪽.
12) 토니 주트, 김일년 역,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플래닛, 2011, 31쪽.
13) 최윤영, 최승원, 「자살예방 빛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의 법적 쟁점과 과제」, 행정법연구, 제40호, 사단법인 행정법이론실무학회, 2018, 152쪽.
14) 강동호, 「죽음보다 낯선」, 『노란개를 버리러』, 문학동네, 2011, 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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