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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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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4-03-19
  • 조회수 285

요즘은 어떤 사랑이 마음 안에서 찰랑거린다고 느낀다. 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더 수많은 우회로들을 찾았다. 영화하고 싶다는 말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당혹으로 물들이는데 너무 충분한 일이었다. 학교 특성상 그랬다. 내가 외고에 진학하게 된 것은 하나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이 의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십대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짙어졌다. 일월의 시작부터 일기를 쓰면서, 나의 꿈을 계속 소환해냈다. 꿈을 인지하게 되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알고 억지로 그랬다. 어차피 늘 잔존하고 있던 것, 늘 나를 늦봄의 버드나무처럼 흔들리게 하던 것이 꿈이라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포부가 진짜 꿈을 말할 수 없어서 건져낸 다듬어진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쭉 알고 있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던 그 순간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를 독대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연기자를 말하면, 부모님은 뉴스 앵커를 말하는 식으로. 나의 꿈을 돈벌이 가능한 직업으로 바꿔 버린다’고. 나는 셀린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 어쩌다가 무정한 사람이 되었는지, 꿈 꾸는 나를 왜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하기보다도 그들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올바르게 기능한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글쓰기를 매일 두 시간씩 억지로 반복하면서 나는 처음 나를 마주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성숙을 다시 끌어올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견딜 수 없어 하던 열넷 즈음으로. 언어화되는 치기들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던 때로.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어리숙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하는 나만 있었다. 나의 진심을 자꾸 의심하고, 왜를 묻는 과정은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일은 마음을 하루종일 가라앉게 하는 일이었다. 

최은영은 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성숙은 그저 우리 환경에 익숙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서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기꺼이 마주하고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지난 두 달은 조그만 방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여행지와 벌이는 다정하고 날카로운 밀회였다. 내가 가진 미성숙과 독대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꿈을 꿈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양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질투하면서도 동경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꿈을 이룬 사람들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다가도, 끝이 없이 희망차진다. 존경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는 일이 꿈 앞에서는 당연한 것임을 너무 늦게 안 것 같았다. 이 사실이 꿈을 꿈으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의심해온 시간들이 서러웠다. 명징하게 문장으로 정리되는 목표, 과정에서의 사랑 없는 고통이 성장을 담보한다는 생각은 꿈을 잊어버린 채로 살던 때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간 나는 꿈을 배제한 채로 살아오느라 성장을 잘못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부르튼 채로 사는 것이 삶을 성실히 이행하는 증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몸이 아플 때, 심신 중 무엇도 안전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될 수록 내가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고된 것만이 나를 나아가게 한다면서 직접 겪은 적도 없는 진리를 애써 맹신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성장통의 효능을 오용한 것이다. 겪을 필요 없는 고통까지 구태여 짊어지는 쪽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이상한 만족과 적잖은 쾌락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바란다고 세뇌하면서 해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갈급한 일이 마음 속에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시험기간을 보내면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왜? 바라지 않았지만 나의 선택으로 생긴 의무 앞에서 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만 하면 되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 지금이 허송세월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눈에 보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이상 때문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심신에 생채기를 낸 것이다. 

이게 내 꿈이구나, 나는 이 일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고 단순한 깨달음을 마음에 새긴 날. 그 날은 겨울답지 않게 유달리 따뜻하고 쾌청했다. 조금 이른 점심 나절의 산책을 하면서 마음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절망과 우울, 낙담과 찌질함이 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동경, 애써볼 용기도 함께 있는 것이 꿈이라고, 하늘에 옅게 남은 비행운의 조각을 보며 생각했다. 

성장통이 아름다운 것은, 분명히 고통이 남긴 훈장 같은 상흔 때문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태여 주는 고통이 아니라 자연히 감수하려는 고통이다. 지난한 과정 앞에서도 꼿꼿이 서는 마음이다. 고통 앞에 놓여야 하는 것은 사랑이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해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감내하는 마음이 왜 성장과 맞닿아 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사랑해온 세월과 알게 모르게 연마해온 세월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날 밤, 다시 앉은 책상 앞에서 나는 한 마디를 적었다. 이제 나의 일기장 가장 앞 페이지, 그 유달리 튼튼하고 두꺼운 종이 위에는 나의 주문이 적혀 있다. 꿈과 사랑. 이제 나를 지탱해줄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꿈의 변화나 지속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 지금 사랑하는 것. 나를 살게 하는 것이 머릿속에 가득하다면 겁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도, 나는 승리의 주문을 욀 수 있다. 꿈과 사랑,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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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은 영원하지 않다 (영화 <다음 소희>)

영화는 생동하는 숨소리로 시작한다. 적막 속에서 들리는 숨찬 호흡 소리. 우리는 듣지 못하는 음악을 들으며 소희는 몇 번이고 춤을 춘다. 똑같은 구간에서 재차 넘어질 때에도 금세 털고 일어선다. 세상이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찰 때, 우리에게 그 속에서의 실패는 달가운 것이 된다. 아프겠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일어서 보라는 충고가 나를 견고하게 만드는 기운이 된다. 그렇지만. 꿈을 꾸고, 혹은 꿈은 거창하니까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잊고 있던 것 같다. 마음에 피어오르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접는 지난하고 아픈 과정을 내색 없이, 어색함 없이 견뎌내는 것이 삶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내 주변에도 있고, 멀리에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의 일이었던 적이 없어서 나는 기어코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어설픈 자세로 엉엉 울게 되었다. 소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울기보다도 화를 냈을 것 같다. 어쩌면 허무했을 지도 모르겠다. 종종 소희의 시선으로 장면들이 전환될 때면 애틋한 나의 지난 날이 그리워져 울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런 추측 마저도 오만한 것이 된다. 나의 사사로운 슬픔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이면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크게 들었던 마음은 슬픔과 허무함이었다.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소희가 죽기 전과 소희가 죽은 후가 그 경계이다. 관객인 나와 함께 생동하던 인물이 죽고 나서도 여전히 영화가 진행된다는 것이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 영화가 한 발짝 내 앞으로 더 다가왔다. 소희의 살아감을 볼 때 커다란 슬픔과 희미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슬픔, 모든 것을 어림짐작으로 넘겨 버리고 안전한 나의 삶에만 몰두했다는 슬픔, 말간 소희의 웃음에 배인 아름다움, 술 한 잔에 그날의 엿 같음을 일축시켜버릴 수 있다고 믿던 젊음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말이다. 소희가 손목을 그었을 때 새하얀 눈에 빠르게 퍼지는 선혈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리다가도 안심했다. 영화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삶은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이면서도 그 사실을 명징하게 짚어준다. 소희가 죽기 때문이다. 그 때에 나는 머리를 크게 맞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새차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런 것이었다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소희가 죽고 나서 영화의 화자는 유진에게로 넘어간다. 그녀는 형사과의 팀장. 유진이 사건을 파고들면서 서서히 예민해지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배두나 배우의 얼굴에는 세상을 무미건조한 무언가로 압축시켜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의 시간이, 그럼에도 모든 것을 지사적으로 바라보며 쉽게 괴로워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완고함이 있다. 그런 그녀가 숨어있던 진실들을 들춰내도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이 아주 큰 허무함으로 다가왔다. 폭력이 시작점이 조그맣지 않다는 것, 소희와 준희, 은아, 동호와 태준.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 20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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