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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종교화, 정치인의 신앙화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7-03-16
  • 조회수 550

정치의 종교화, 정치인의 신앙화

이영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재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했다. 당일 이 소식을 들은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은 폭력을 휘두르며 극렬하게 항의해 현재까지 참가자 3명이 사망하고 참가자와 경찰을 합쳐 다수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모 대통령 변호인의 말처럼 박근혜를 예수로 보지 않는 이상 그들의 폭력 행위를 이해할 까닭이 없다. 이는 “정치의 종교화”, “정치인의 신앙화”의 대표적인 예다.

 

정치의 종교화는 이념의 종교화에서 시작한다. 이념의 종교화는 특정 이념에 대한 무조건적 맹신과 타 이념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성과 폭력성을 갖는 것이다. 보수진영에서의 정치의 종교화는 공포가 근본이다. 공포라는 것은 불확실성에 기반 한다. 수풀 너머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때 사람들은 공포심을 갖는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는 더욱 강경하고, 패권주의적이며,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책임을 매우 중시하는 각자도생을 공포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또한 적에 대한 반사적인 규정과 증오. 즉, 레드 콤플렉스가 보수진영 내에 깔려있다. 대한민국은 분단체제와 전쟁의 기억이 있기에 레드 콤플렉스는 굉장한 효과를 지닌다. 레드 콤플렉스야 말로 공포의 메커니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선명하며 이질적인 적을 두는 것은 공포의 불확실성에 대한 해소다. 이는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라 할지라도 기득권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젖어 공포를 내재화 하고 적을 규정하는데 동조하게 된다. 이러한 공포의 심리가 작동해 정치의 종교화를 이룬 예로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를 들 수 있다. 일베에서는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등등 약자에 대한 혐오가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혐오의 감정은 강자가 갖는 감정이 아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인정을 받기위해 노력하거나 초월하는 태도를 갖지 못할 때 자신의 존재가 철저하게 가려진 곳으로 도피하고 자신의 존재가 하등하다고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면에 폭력성으로 쌓여 그것을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약자라고 인식되는 상대들에게 퍼부어 공포를 해소하려는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진영에서의 정치의 종교화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진보 또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것에 더하여 진보는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경제적 계급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불러일으켜온 분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진보는 경제적 계급에 대하여 자본의 독점으로 인한 착취 주체와 착취 대상의 산물로 인식하기에 기본적으로 자본계급을 향한 분노가 있다. 거기에 더하여 마르크스가 제창한 공산주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과도 연관되는데 그 단점은 마르크스는 역사는 정해진 과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공산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즉, 공산사회야 말로 인류의 이상향이자 역사의 종착지로서 공산주의를 향해 가는 길 외의 것들은 전부 쓸데없거나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토론과 비판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는데 있다. 실제 진보적 성향이 강한 오늘의 유머(이하 오유)에서는 선민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마르크스 사상의 가지는 한계와 연관된다.

 

두 진영의 양상이 다르더라도 그 본질은 두려움이라는 것에 공통점을 지닌다. 단지 그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려 드느냐의 차이로 이념이 생기고 정치의 종교화의 양상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사람이 공포를 느끼거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매우 당연한 감정 중 하나다. 그러나 이것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면 맹신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종교화만으로는 상기한 탄핵반대집회참가자들의 행위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감이 있다. 그들의 행위가 정치적 종교화를 전제로 하지만 그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필자는 정치의 종교화뿐만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신앙화가 이루어지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의 신앙화는 정치의 종교화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엄밀한 차이가 있다. 정치의 종교화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 발로로 분출되는가가 주된 반면에 정치인에 대한 신성화는 자신을 그 인물에 투영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공포 또는 분노를 느끼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 특정 정치인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과 이상향을 투영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특정정치인에게 투영시킨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참모 리처드 워슬린은 사람들이 정치인이 가지는 견해와 정책에 근거하여 뽑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에게 자신의 이상향 또는 정체성을 투영하여 선거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사회의 박정희 시대를 지내신 분들이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희생”한 박정희를 온전히 믿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상의 이상향 또는 자신들의 고달프고 자부심이 있는 삶을 투영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박정희 신화인 것이다. 이것이 그 딸 박근혜에게 박정희 영광의 부분을 투영되어 절대화된 것이 오늘날의 박사모의 신앙이다. 그들은 박근혜를 동일시하기에 이르러 박근혜의 추락은 곧 그들의 추락, 더 나아가 그들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전체의 부정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폭력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초유의 장마대선으로 얼마 남지 않은 준비 기간 동안 더불어 민주당의 대세론이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 민주당의 대선후보들 중 문재인은 단연 대세론으로 굳히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일부지지자들의 문재인에 대한 신앙화는 그 정도가 심하다. 오유에 들어가면 문재인에 대해 공격적 성향을 드러낸 이재명을 한 목소리가 되어서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재명은 단지 경선토론과정의 규칙과 문재인의 문제성 발언들에 대해 확인하고 비판한 것이지 문재인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나 음모론 등의 저급한 공작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은 공격당하고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친노, 친문의 지지가 과연 박근혜에게 향하는 지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개인이 위대하다손 치더라도 그는 명예로운 영웅으로서 자리해야 할 뿐 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영웅이 나타나면 위태로워진다. 그 영웅이 신이 된다면 민주주의는 기나긴 침묵에 빠져 들 것이다. 절대화된 종교가 인간의 구원이 아닌 교리 그 자체가 목적이 되듯 마찬가지로 정치의 종교화는 정치행위의 목적인 국민에 앞서 정치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게 된다. 정치를 위한 정치는 독재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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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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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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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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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희

    안녕하세요? 이영님, 반갑습니다.^^ 이번에도 정치 관련 글을 올렸네요. 저의 본업이 정치 평론은 아닙니다만, 문학 평론 역시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장르이지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영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코멘트 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폭력을 행사한 사건의 핵심을 ‘정치의 종교화, 정치인의 신앙화’로 보고 있습니다. 분명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리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는 정치의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치와 신학의 연동에 대해서는 주권론에 대해 서술한 토머스 홉스의 대표적 저작 『리바이어던』을 비롯해, 나치의 공법학자로 악명을 떨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주권(자)와 법, 예외상태와 정상상태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정치의 종교화, 정치인의 신앙화’를 다루는 이영님의 논의는 더 깊이 있게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영님은 발터 벤야민,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의 학자들이 모두 정치-신학의 관계를 어떻게 재전유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들의 저작을 읽으며, 그들이 고뇌한 사유의 결과물을 꼼꼼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연한 이야기를 얕게 반복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념 정의에 대한 고려를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이념의 종교화는 특정 이념에 대한 무조건적 맹신과 타 이념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성과 폭력성을 갖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이념의 종교화’를 ‘이념의 절대성’ 혹은 ‘이념의 배타성’으로 바꿔 써도 뜻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이영님이 제시한 ‘이념의 종교화’가 개념의 독특성을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영님이 ‘종교화’라는 개념어를 쓴다면, 이때는 훨씬 더 엄밀하고 정확한 정의가 요구됩니다. 물론 뒤에 종교화와 신앙화를 구분 짓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오기는 합니다. 「정치인의 신앙화는 정치의 종교화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엄밀한 차이가 있다. 정치의 종교화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 발로로 분출되는가가 주된 반면에 정치인에 대한 신성화는 자신을 그 인물에 투영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공포 또는 분노를 느끼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 특정 정치인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과 이상향을 투영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특정정치인에게 투영시킨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개념 정의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한마디로 ‘정치(인)의 종교화’라고 묶어도 이 글의 논지는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이영님은 ‘종교화’와 ‘신앙화’를 구별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앞에 붙은 ‘정치’와 ‘정치인’의 구별에 의해 나뉘는 것처럼 보이는, 실제로는 같은 개념에 불과합니다. 더불어 보수를 ‘공포를 민감하게 느끼는 부류 -> 공포를 투사하는 명확한 적(공산주의자)의 설정’, 그에 더해 일베까지 나아가는 설명은 보수에 딱 맞는 해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층위가 다른 세밀한 해석법이 필요합니다. 가령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와 연관된 에드먼드 버크의 저작을 기초로, 그것이 한국에서 얼마나 왜곡된 형태로 이용되어왔는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한편 이영님이 진보 진영의 문제로 거론한, “마르크스가 제창한 공산주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과도 연관되는데 그 단점은 마르크스는 역사는 정해진 과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공산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도 다시 숙고해봐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이 글에 쓰인 이영님의 마르크스주의 이해는 아주 초보적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속류 유물론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붙여 놓은 링크를 참조하시면,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다양하고 다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7636) 마르크스주의는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기 마르크스의 다름을 아예 ‘인식론적 단절’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짧은 댓글에서 전부 다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역시 그렇게 쉽게 비판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를 비판하는 책으로는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참고하시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 자체를 리부트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알랭 바디우나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참고하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박정희 시대와 박근혜 시대를 잇는 아래 분석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지요. 「우리 사회의 박정희 시대를 지내신 분들이 ―그것이 진실이던 아니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희생”한 박정희를 온전히 믿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상의 이상향 또는 자신들의 고달프고 자부심이 있는 삶을 투영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박정희 신화인 것이다. 이것이 그 딸 박근혜에게 박정희 영광의 부분을 투영되어 절대화된 것이 오늘날의 박사모의 신앙이다.」 틀린 서술은 아닙니다만, 설득력 있는 서술도 아닙니다. 왜 박정희 신화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가 대한 역사적*사회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메커니즘을 이영님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문장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두 권의 책을 읽기를 권합니다. 권보드래, 천정환 교수가 함께 쓴 『1960년을 묻다』와 권보드래 교수 외 여러 필자가 참여한 『1970 박정희 모더니즘』입니다. 우선 이 책을 읽어야, 이영님이 언급한 ‘박정희-박근혜 신앙’의 대물림이 글을 통해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비평적 개입을 시도하는 이영님의 에너지는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독서와 공부가 필요합니다. 자꾸 옳은 이야기를 하려 하지 마시고, 지금 대다수가 놓치고 있는 포인트를 적시하는 글쓰기를 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영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는 필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당부드립니다.

    • 2017-03-21 01:14:57
    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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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휴, 정말 많이 배운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조언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 2017-03-21 23:46:04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