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문학신간 리뷰]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 작성일 2015-07-14

 

[문학 신간 리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5)

 

 

 

박인성(문학평론가)

 

 

 

 

book-kilin    이장욱의 소설 텍스트는 매우 당파적이다.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문학에 있어서 지극히 일반론에 가까운 이야기다. 일차적으로 내가 여기서 말하는 당파적인 텍스트란 누군가는 읽어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읽어낼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단순히 텍스트의 (비)가독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서 순전히 타인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거리(distance)를 취할 때는 절대로 읽히지 않는 맹점(盲點)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이장욱의 이야기는 당파적이다. 기존의 소설들보다도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한층 독자의 서사적 감각을 자극하고 고취시키기는 방식으로 쓰인 것 같다, 따라서 이 소설집을 읽는 독자는 지금 자신이 읽고 있는 이야기가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에 대하여 예민하게 되물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언뜻 보았을 때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소설적 기획은 인물에 대한 전기적 기록의 형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 「우리 모두의 정귀보」,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의 이름이고, 그 이름과 결합된 수식어들에 소설을 읽어내는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으리라는 예감까지도 든다. 그러나 저 이름들이 대변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운명일까? 예를 들어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서 서술자인 ‘나’가 알고 있는 하루오는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인격적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서술자가 하루오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앎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여기 있는 하루오 본인이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존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p. 21) 미국인과 오키나와 태생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혈연적인 복잡성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에 ‘자살여행’을 온 겨울 부산 남포동에서 하루오의 일부가 죽었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만약 그 순간 하루오의 일부가 죽었다면, 여전히 살아남아서 세계 각국을 여행하다가 ‘나’와 만난 하루오는 누구일까? 절반 이상의 죽음 이후에도 다카하시 하루오라는 여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부분적인 방식으로 삶에 드리워진 맹점을 겨냥하는 텍스트다.
    하루오의 존재는 그 누구도 자기 삶의 전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 자체의 부분성을 환기시킨다. 그 여분의 삶이 누구의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마치 이를 의식하듯이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소설들에서는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문장들이 존재한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이것은 누구의 악몽인가?”(p. 285)라는 질문을 변주하듯, 과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 것일까를 되풀이하여 묻는 것이다. 이 ‘누구’는 아직 인칭이 부여되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내부에 한정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장욱의 질문은 ‘나는 이야기의 외부에 있는 순수한 관찰자야’라고 이야기 내부의 존재에 대하여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독자의 태도를 불온하게 뒤흔든다. 그의 서술적 태도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작가, 서술자, 캐릭터, 독자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고 미분화된 영역인 탓이다. 이야기를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텍스트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잔여’는 누구의 것인가? 소설가 이장욱이 염두에 둔 ‘독서의 윤리’가 존재한다면, 그 윤리는 이야기를 읽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 누구나가 자신의 몫 이상의 책무를 떠안을 수 있으며, 자신의 것 이상의 운명에 연루될 수 있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정귀보」에서 정귀보에 대한 평전을 쓰기 위해 그의 삶을 복기하고 있는 서술자는 독자의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후에야 천재 미술가로 평가받게 된 정귀보의 삶을 취재하면 취재할수록 서술자는 오히려 평전을 쓸 수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게 된다. 무엇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정귀보라는 보편적 인간과, 그에 대한 미술계의 과도한 해석적 가능성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서술자로 하여금 새롭게 평전을 쓰고자 마음먹게 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정귀보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였다. 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음에도 상한 곳 하나 없는 정귀보의 시신은 감당할 수 없는 해석적 대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술자로 하여금 정귀보의 삶에 대한 글쓰기를 감당하게끔 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삶의 당파성은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당파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삶은 스스로를 낯설게 이야기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따라서 표제작인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에서 기린불의 진위 여부는 단순한 해석상의 입장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술자가 자신의 해석에 대하여 취하는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편협함 때문에, 거꾸로 그의 이야기는 생기를 얻는다. 기린불의 진실성?영원성에 매료되어 박물관 관리인으로 취직하기까지 한 서술자는 기린불의 진위 여부가 학계의 쟁점에 오르자, 스스로 기린불을 불에 태워버린다. 기린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진실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다시금 기린을 상상의 세계에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이라는 표현 자체의 역설에 기대고 있다. 순수한 상상의 동물인 기린의 불상에는 그 육체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비가시성이 함께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통해 지시되는 것이다. 화해되지도 극복되지도 않는 존재의 부분성만이 언제나 나머지의 것, 혹은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의 서술자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에 깃든 비가시적인 부분으로서의 기린의 ‘눈빛’이다. 눈빛은 단순히 육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체 이상의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시성은 언제나 비가시성을 포괄하고 있으며, 비가시성 또한 가시성을 포괄한다. 표면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이항대립적인 부분들이 사실은 불가피한 방식으로 맞물려 가까스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언제나 절반 이상인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극도로 위태로운 작업이다. 말하는 자, 말해지는 자, 듣는 자 모두의 운명을 한데 묶어 분리될 수 없게끔 서로에게 책임 지우는 치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장욱은 작가 스스로를 포함하여 이야기에 개입하는 모든 종류의 의식들을 문제 삼고 있다. 거기에는 안전거리도, 외부적인 권위도 인정되지 않기에, 이야기하는 자는 어떤 객관성도 보편성도 주장할 수 없는 지점에서 스스로의 윤리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다.
    앞서의 이야기를 종합할 때,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의 이야기들은 내게 있어 몹시도 낮은 지점에서 서서 불안하게 증언하는 주체의 기록들로 읽힌다. 1) 이야기하는 주체들은 스스로도 제어하거나 의미화하지 못하는 여러 의식들ㆍ감정들 사이에서 연루됨으로써만, 언제나 절반 이상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 삶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영역을 제한적인 방식으로나마 이야기하는 당파적인 이야기, 스스로의 당파성을 알면서도 예민하게 타인의 운명을 자신에게 개입시키는 이야기만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지닌다. 나의 처음 입장을 번복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모든 텍스트는 당파적인 텍스트다. 그러나 이장욱 소설의 남다른 점은 이러한 당파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작가와 독자까지도 참여적인 독서 과정 속에서의 스스로의 맹점과 마주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 질문 앞에,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p. 144) 다.

 

 

작가소개 / 박인성(문학평론가)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으로 당선되어 등단. 현재 계간 《자음과 모음》 편집위원으로 활동.

 

 

   《문장웹진 7월호》

 

추천 콘텐츠

응원의 방식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 관리자
  • 2025-07-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