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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 작성일 2018-03-01
  • 조회수 2,512

[단편소설]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김혜나




해질 무렵, 메이는 차문디 언덕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문디 언덕 정상에 자리한 차문데쉬와리 사원1)을 찾는 이들이 새벽녘 태양빛을 받으며 하염없이 오르는 천일(千一) 계단을 메이는 매번 늦은 오후 시간에 찾아가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해 뜨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이소르 관광지를 구태여 저물녘에 찾아가는 데는 그녀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다. 우선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두컴컴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위험천만하게만 느껴졌다. 특히나 외국인 여자라면 유난히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인도 남자들의 끈덕진 눈빛을 메이는 피하고만 싶었다. 훤한 대낮에도 조심스레 다녀야만 하는 거리를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새벽녘에 돌아다니는 것은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경배 드리고 싶은 힌두의 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메이는 그 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고 좋아했지만 그들을 믿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차문디 언덕 위에서 볼 수 있다는 그 장엄한 일출에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딱 한 번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미리 예약해 둔 릭샤2)를 타고 차문디 언덕 정상에 올라가 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언덕 저 너머로 황금빛 태양이 떠올랐으나 하늘은 이미 동이 다 튼 대낮과 같은 상태였다. 이미 날이 밝은 상태에서 언덕 너머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뒤늦게 드러나 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메이는 그때 알게 되었다.
인도 남부, 카르나카타 주에 있는 마이소르 지방에 도착하기 전부터 메이는 차문디 언덕에 대한 풍문을 익히 들어왔다. 마이소르에 도착해 시내를 돌아볼 적부터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된 인도 사람들 또한 차문디 언덕의 일출만큼은 꼭 보러 가라고 귀띔해 주곤 했다. 산기슭의 천일 계단을 따라 걸으며 마주하는 태양은 우리의 심장을 뜨거운 감동에 젖게 만든다면서 말이다. 특히 마이소르 궁전 앞에서 만난 한 노인의 모습이 메이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커다란 은테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손에 쥔 채 궁전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메이에게 차문디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일출을 이야기해 주며 그 순간의 감격에 담뿍 젖어들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저 먼 차문디 언덕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 가던 순간에는 메이에게도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떠오르는 태양빛을 말로 전해 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 노인이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3)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현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메이 또한 그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인도의 성자나 현자를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기대와 환상을 그 노인에게 덧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1) 차문데쉬와리 사원 : 복을 빌어 주는 것으로 인기가 있는 차문디 여신을 모신 힌두 사원이다.
2) 릭샤 : 소형 엔진을 장착한 삼륜차로, 인도의 보편적인 교통수단.
3) 에리얼 글룩리크,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김영사, 2004.


오전 요가 강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 부고를 받았어.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의 부고는 아니었지. 나와 함께 요가 수련을 하고 있는 동료 강사의 아버지였고, 장례식장은 대전이었어. 아주 가까운 관계의 요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 수요일이었고, 목요일인 내일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니깐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에 잠시 다녀와도 될 것 같았어.
버스터미널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전철역 방향으로 걸었지. 그런데 내 발걸음이 평소와는 달랐어. 내 안에 얕은 떨림과 흥분이 자라났어. 왜일까? 나는 지금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가는 것뿐인데, 어딘가 먼 휴가지로 떠나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겨우 한 시간 반 거리의 대전에 가는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나에게는 어디론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듯한 느낌이 배어들었어. 그래, 떠남, 떠남이었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 중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떠남,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것의 정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오빠는 그토록 많은 여행을 떠나는 거겠지, 라는 생각까지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대전으로 가는 차표를 사서 버스승강장으로 나아갈 적에는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어. 승강장으로 나가기 전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도 한 잔 주문했지. 이내 커피가 담겨 나온 컵을 손에 들고 버스승강장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밀어젖혔어. 버스에 올라 차표에 적힌 좌석 번호를 확인한 뒤 그 자리에 가 앉았고.
어느새 버스가 출발해 도로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어. 차창 밖 풍경들이 마치 물 흐르듯이 지나쳐 갔어. 문득 오빠가 떠올랐어. 오빠와의 기억이라거나 오빠의 모습이 아닌, 오빠라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떠오르는 거였어. 그러고는 마치 만트라4)를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서 낮게 웅얼거렸어. 이제 다시는 편지하지 않을 거야, 선언이라기보다는 좌절에 가까운 울음과도 같은 소리였어. 이제 다시는 편지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마지막 편지일 거야. 그러나 그것은 확언이라기보다는 바람에 더 가까웠지. 언젠가 또다시 오빠에게 편지하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것이 마지막 편지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는 ‘대전’이라는 도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이고, 지방 어느 도시를 가건 서울에서 지나쳐 가는 도시이기에 나는 왠지 그곳에 자주 가본 것만 같았지만 실제로 그곳에 내려 두 발을 딛고 걸어 본 적은 없었던 거야. 그랬구나, 나는 대전에 처음 가는 거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지금의 이 설렘이 얼마간 이해가 되었어. 처음 가보는 곳이니 당연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양 두려움을 동반한 기대와 설렘이 찾아오는 거겠지. 생전 처음 마주하는 도시의 모습, 그 순간의 내 상태 같은 것이 자꾸만 되새겨졌어. 그곳은 어떤 곳일까, 나는 상상했어. 버스는 점점 어둠 속으로 깊이 나아갔어. 나도 따라 그곳으로, 더 깊이, 더 나아갔어. 그래, 그랬어…….

4) 만트라 : 가르침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주문으로 진실한 말(眞言) 혹은 성스러운 문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가 행자들은 요가 수련 전후에 스승과 신에 대한 경배의 의미로 만트라를 외우기도 한다.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았다. 어른도 아이도 아니고,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메이는 생각했다. 남자이면서 여자인, 노인이면서 아이인, 서양인이면서 동양인인 사람. 그에게서 요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메이는 평안함을 느끼곤 했다.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자연히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강렬한 신체 단련으로만 다가오던 아쉬탕가 요가5) 수련의 시간이 마치 하나의 요람처럼 느껴졌다. 포근한 담요로 감싸인 요람이 가만히 흔들린다. 흐름을 타는 아이, 희고 보드라운 살결, 작고 말랑한 뼈……. 그 움직임의 물결을 느끼며 메이는 요가를 해나갈 수 있었다.
인도, 마이소르에 온 지 어느덧 석 달째였다. 마이소르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고 짐을 풀던 즈음에는 더디게만 흐르는 듯했던 하루 또 하루가 어느 순간부터 정처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요가 선생님은 오늘도 아무런 말이 없다. 원래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메이와 소통하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이의 생각으로는 둘 다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요가 수련을 하는 데 딱히 말이나 대화가 필요하지는 않았기에 메이 또한 그에게 말을 붙이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메이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아쉬탕가 요가의 동작들만 연습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이따금씩 메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게 다였다. 설사 메이가 잘못된 요가 동작을 취하더라도 결코 그녀에게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고 조용히 떠나갈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럼에도 메이는 종종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자신의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옳은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메이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의 몸이 어떠한 상태인지 아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까지 알고 있지 않을까, 메이는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가 메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듯 메이 또한 그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요가를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케이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머릿속으로 또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문장들을 그녀는 쓰고 또 썼다. 오늘도 선생님이 계속 똑같은 자세만 도와줘. 아쉬탕가 요가에는 연속된 순서가 있고, 선생님이 늘 도와주는 것은 ‘마리챠아사나’6)라는 거야. 마리챠아사나에는 A, B, C, D까지 총 네 개의 순서가 있는데, 그중에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마리챠아사나 D였어. 그게 가장 어렵고 불편한 자세야. 그래서 나는 내가 마리챠아사나 D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나를 도와주길 원해.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마리챠아사나 C 순서를 하고 있을 때 다가오는 거야. 나는 그게 이상해. 나는 이미 마리챠아사나 C를 할 줄 아는데, 그 동작에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데, 그는 늘 이 자세만 도와주고 가버리는 거야. 그리고 내가 원했던 마리챠아사나 D는 전혀 도와주질 않아.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좀 더 요가를 수련해 보면, 1년, 2년, 3년…… 매일 수련해 나가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까? 그것이 성장이고 깨달음일까?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오빠, 그것은 나중의 일이잖아. 나는 아직 성장하지 않았잖아. 나는 아직 어리잖아. 나는 아직 어둠 속에 있잖아. 그래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잖아. 나는 너무 답답하기만 한데, 두렵기만 한데, 먼저 이 길을 가본 사람이라면 나에게 좀 말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해답을 가르쳐줄 수 있잖아. 나를 여기서 건져 올려줄 수 있잖아. 그러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지. 삶은 언제나 해답이 없어. 그래서 나는 더욱더 그 답을 갈구해. 해답을 찾기 위해 요가를 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승을 찾아가지……. 그러나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아. 오빠조차도…… 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떠나가 버렸어. 오빠의 마음이 어떤 거였는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어. 때로는 그것이 더 용서가 안 돼, 오빠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피 흘리면서, 그 피를 바라보면서…… 들이마시고…… 오빠를 증오하지……. 검붉은 피보다 더 탁하게 물들어 가는 내 오장육부를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내 안에 핏물을 쏟아 부으면서……. 하루, 또 하루……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5) 아쉬탕가 요가 : 아쉬토Astau는 여덟, 앙가Anga는 나뭇가지, 요가Yoga는 결합을 뜻한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 제시된 요가의 여덟 가지 측면을 나뭇가지에 비유한 용어로 지혜와 영성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이 인간 존재가 깨달음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아쉬탕가 요가’는 파타비 조이스(K. Pattabhi Jois, 1915~2009)에 의해 인도 마이소르 지방의 아쉬탕가 요가 연구소(KPJAYI)에서 전파되어 온 수련 체계를 뜻하기도 한다.
6) 마리챠아사나 : 위대한 현인 마리치의 이름을 딴 요가 자세이다. 팔로 다리를 감싸고 등 뒤에서 손을 맞잡아 척추를 늘이거나 비트는 등의 동작들이 총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 마리챠아사나 A, B, C, D라고 부른다.


오전 여덟 시, 요가 수련을 마친 메이는 요가원 건물 밖으로 나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푸른빛이 감돌던 새벽녘의 어스름이 모두 물러나고 대낮처럼 환한 빛이 온 거리에 만연해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요가를 통해 어지러운 상념과 혼탁한 마음을 모두 비워낸 것이 아니라 그저 기운이 다 빠져나가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되새겨 볼 여력이 없는 거였다. 심지어 단지 기운이 없는 건지 허기가 지는 건지조차 분간이 되질 않았다.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숙소로 가는 길 식당에 들러 이들리7)와 와다8)를 주문했다.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음식이기에 직원은 주문과 동시에 곧바로 그것들을 집어 포장해 주었다. 메이는 계산을 치르고 음식이 담긴 봉투를 받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가 매트와 가방을 방바닥에 부려 놓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땀에 젖은 옷부터 좀 갈아입고 손을 씻고 소변도 본 뒤에 식탁에 앉아 차분하게 음식을 먹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극심하게 몰려드는 허기부터 어떻게든 채워야만 했기에,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제일 급했기에,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먼저 할 수가 없었다.
음식이 담긴 봉투의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메이의 손은 재빠르게 그 음식을 집어 입안으로 옮겨 넣기 시작했다. 들짐승이 다른 짐승의 살점을 물어뜯기라도 하듯 숨도 쉬지 않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수저도 포크도 필요하지 않았다. 식당 직원이 포장해 준 삼바르9)와 처트니10)를 빵 위에 들이부은 뒤 손으로 대충 뒤섞어 입안으로 밀어 넣기만 반복했다. 그것을 모두 먹어치우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메이는 그것이 무슨 맛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냥 빵이고, 튀김일 뿐이었다. 아니, 입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무언가일 뿐이었다.
이미 이인분의 음식을 먹어치운 셈인데도 메이는 계속 허기가 졌다. 책상 위에 과자가 남아 있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위 난삽하게 올라와 있는 물건들을 손으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과자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책상 서랍까지 일일이 다 열어 보고 옷장도 열어 봤지만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다 먹어치웠거나 일부러 사다 놓지 않은 게 분명했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 먹었거나, 사놓지 않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미 충분히 먹었잖아, 참아야 해. 특히 과자와 초콜릿, 빵과 케이크는 더 이상 먹지 말아야 해. 참아야 해, 견뎌야 해, 라고 생각할수록 메이에게는 그것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들고 방문을 열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건물에 자리한 편의점으로 들어가 오트밀 쿠키, 초콜릿 쿠키, 코코넛 쿠키들을 한 움큼씩 집어 들었다. 과자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다크 초콜릿과 아몬드 초콜릿 봉지도 더 집었다. 지금 다 먹지는 않을 거야. 메이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웅얼거렸다. 그냥 맛만 볼 거야. 그리고 조금씩 나누어서 먹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다 먹지 않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7) 이들리 : 발효시킨 쌀 반죽을 쪄서 만든 빵으로 주로 남인도에서 아침식사용으로 먹는다.
8) 와다 : 렌틸콩 가루와 삶은 감자로 만든 반죽을 튀긴 것으로 이들리와 함께 아침식사로 먹는다.
9) 삼바르 : 렌틸콩과 채소, 향신료를 넣어서 끓인 인도식 스튜.
10) 처트니 : 과일이나 채소를 향신료에 섞어서 만든 인도식 피클 또는 소스. 빵이나 밥과 함께 먹는 게 일반적이며, 아침식사용 빵은 주로 코코넛 처트니와 함께 먹는다.


지난밤, 꿈을 꾸었어. 대개의 꿈보다는 선명하고 대개의 현실보다는 흐릿한 순간들이 이어졌어. 꿈속에서 그 사람, 요한을 만났어. 꿈속이지만 그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어. 그의 모습을 보자 뭔가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뛰었어. 그와 동시에 가슴 가득 설렘이 차올랐지. 그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어. 그래서 나는 우리가 정말 헤어지긴 한 건지 의심했어.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와 나는 분명히 헤어진 상태였어. 그래, 우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요한의 집에 있고, 그는 침대에 누워 있어.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반팔 티셔츠 차림에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어. 그가 나에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말해.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앉아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는 그의 다리에 손을 갖다 댔어. 그리고 그의 한쪽 다리를 길게 늘어트린 뒤 들어 올렸지. 세상에, 살이 쪘어……. 내가 말했어. 내 말에는 놀람과 경이가 들어 있었어. 그의 얼굴에 다소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어. 나는 믿을 수 없었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른 쪽 다리를 다시 들어 올려 보았어. 반대쪽 다리에도 어김없이 살이 올라 있었어.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놀라 물었지. 그러자 그의 얼굴은 마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장군과도 같이 의기양양해졌어. 그리고 그것이 무슨 특급 비밀이라도 되는 양 입을 앙다물었어. 나는 위로 들어 올린 그의 다리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어 보았어. 그리고 그의 허벅다리 바깥쪽과 안쪽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어. 정말로, 살이 찐 거였어. 눈물이…… 흘렀어. 기적이 있다면, 이런 거구나. 나는 그만 그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모아 한쪽씩 주무르기 시작했어. 아주 조금일 뿐이지만, 예전보다 살이 오른 그의 다리는 주무르기 훨씬 편했어. 물리적으로 편한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편했어. 뼈와 가죽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그의 몸이 행여나 부서질까 봐 조심해야만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그의 종아리를 눌러도 내 손에 그의 뼈가 닿지 않았어.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아프다며 소리를 내지를 일도 없었어. 도대체 어떻게 살이 찔 수 있지? 신에게 감사드렸어. 신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정말이지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어.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어.
사랑해.
나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오직 그 말만이 차올랐어. 나는 많이 놀랐어. 나는 이미 그와 헤어졌는데, 그를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이 나보다 더 먼저 그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어.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지. 떨리는 이 심장을, 설레는 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사랑해…… 그 사람을…… 아직도, 너무나 사랑해, 오빠…….


이른 저녁부터 케이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메이에게 허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낮 시간에 충분한 양의 음식을 먹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저녁은 먹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메이는 몰려드는 허기를 물리칠 수 없었다. 집 안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그마한 방 한 칸에 화장실만 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주방도 없고 냉장고도 없었다.
메이는 다시 편지 쓰기에 집중해 보려 했지만 한번 일어난 식욕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메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윗옷을 걸친 뒤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때마다 길가에 나와 음식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에게서 고비 만추리안11)과 야채 초우멘12) 그리고 차파티13)를 달라고 말했다. 후식이 될 만한 것도 필요할 듯해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편의점에 들러 머핀과 초콜릿도 좀 더 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할 거야……. 메이는 노점 상인에게 계산을 치르고 주문한 음식을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책과 노트북, 화장품과 필기구가 난삽하게 올라와 있는 책상을 치우거나 정리할 정신도 없었다. 메이는 밖에서 사온 음식들을 방바닥에 부려 놓고 그대로 주저앉아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초우멘 그릇에 만추리안을 붓고 양념이 골고루 배게 섞은 뒤 입으로 넣었다. 차파티도 꺼내어 그 위에 초우멘과 만추리안을 올리고 꾹 꾹 싸서 먹었다. 포장 그릇에 남아 있는 잘게 썬 야채와 양념까지 메이는 손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먹어치웠다. 순식간이었다. 허무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고 또 먹어도 메이는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다. 메이는 봉지에 들어 있는 머핀과 초콜릿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 머핀과 초콜릿이 들어와 있지만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냥 사물이었다. 머핀과 초콜릿이라고 불리는 사물들이 입안에 들어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을 뿐 그 어떠한 맛도 향기도 느낄 수 없었다. 머핀과 초콜릿을 모두 씹어 삼키고 났을 때,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으로 가서 머핀과 초콜릿, 아이스크림, 식빵, 감자 칩 봉지를 집어 들었다. 한 번 살 때 충분히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에 잡히는 대로 바구니에 다 쓸어 넣고 계산해 달라고 말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우선 식빵 위에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올려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배 안에서 내장기관들이 뒤엉키는 소리가 났다. 왼쪽 어깨 견갑골 부위와 무릎 아래 혈 자리에서도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메이는 더 먹어야만 했다. 그녀는 머핀과 감자 칩을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식빵 위에 올린 뒤 싸서 먹었다. 끈적한 달콤함이 온몸 가득 차오르는 순간, 메이는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을 순간적으로 멈췄다. 입안에 들어온 음식들이 갑자기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메이는 방바닥에 부려 놓았던 비닐봉지를 집어 입안에 있던 음식을 뱉었다. 음식과 침을 모두 다 뱉었는데도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더럽고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 앞에 주저앉아 목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방금 먹은 음식들이 입 밖으로 나와 변기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이 먹은 게 다 똥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메이는 목구멍 안으로 더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음식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눈과 콧구멍에서도 뭔지 모를 액체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가 가진 모든 구멍에서, 심지어 모공에서까지 온갖 오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쓰레기통이구나, 여기는……. 내 안은, 진짜 더럽구나……. 메이는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한번 비어져 나온 울음 또한 쉽게 멈추려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역류해 올라오는 듯했다. 몸에서 나오는 오물들이 바닥에 쌓이고 쌓여 종내에는 그녀의 몸까지도 오물 자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존재하기 싫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태에서, 이 순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메이는 도망치고 싶었다.
메이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서 도망쳐서, 자신이 속했던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이곳에 왔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로 가면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다른 사람이지는 않아도 됐다. 그냥 ‘나’만 아니면, 지금의 내 모습만 아니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온갖 고통과 절망을 먹는 행위로 덮어씌우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만 아니면, 무엇이 되든 어디에 있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만 같았다. 그랬다,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인도에 와서 생활해 나가며 메이는 진짜 현실을 깨달았다. 내 삶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구나. 나는 결코,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없구나.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나의 자아는 항상 나를 따라오는 거구나……. 벗어날 수 없구나…… 이 거친, 더러운 마음으로부터, 악마의 본성, 핑갈라14)로부터…….
케이를, 죽이고 싶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를 죽여야만, 죽여 버려야만 이 모든 분노와 절망과 갈등과 고통이 끝이 날 것이다. 죽이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메이는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살의를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온몸을 떨었다. 그동안 메이는 알지 못했다, 자신에 대해서, 자기 안의 살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제껏 살아 왔다. 이 살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케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깨달아버렸다. 메이는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누구든 죽여 버리고 싶어.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아…….
메이는…… 죽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사라질 것 같은 자기 안의 욕구, 그 살의를 비워낼 수 없다면, 이것이 끝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해갈되는 욕망이라면, 그 대상은 바로 메이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를 죽여야 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 핑갈라를 무찌르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거야. 내 안의 악마를 없애기 위해, 나를 죽여야만 하는 거야…….
그것은 어떠한 결심도 결정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죽여야 해, 죽어야 해…….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메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저물 무렵이 되어 공기가 싸늘했다. 겉옷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반팔 차림이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옷을 챙겨올 정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메이는 그대로 집 앞 대로변으로 나아가 도로 위를 지나는 릭샤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이 그저 차문디 힐로만 가달라고 말했다. 릭샤왈라15)는 그곳이 여기서 제법 멀다고, 왜 이 늦은 저녁 시간에 그곳에 가려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문디 힐, 차문디 힐, 이라고만 계속 되뇔 뿐이었다. 릭샤왈라 또한 마치 혼잣말 하듯 말했다. 지금 시위 중인 거 너도 알잖아. 시내의 도로는 시위대에 점령되었어, 우리는 그곳을 지나가지 못할 거야. 메이는 다시 말했다. 차문디 힐로 가줘, 차문디 힐……. 제발. 운전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릭샤를 몰기 시작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위험해도 할 수 없어, 나는 아무 책임 없어, 네가 원한 거야. 메이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더 대답하지 않았다. 릭샤 안으로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숨이 막혔다.
마이소르 버스승강장 앞 사거리는 정말로 난리 벅적이었다. 도로는 차단되어 차나 릭샤, 오토바이 등은 지나갈 수 없었다. 모든 도로에 방어벽이 둘러져 있고 가장자리마다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 안 사거리도 사람들로 빼곡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시행된 화폐개혁으로 사람들은 절망하고 신음했다. 정책에 따라 고액권인 500루피와 1000루피의 사용이 전면 중단되고 하룻밤 사이에 현금 80퍼센트 이상이 무효화 되었다.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인데 구권을 예금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유예기권은 겨우 한 달이었다. 그렇게 돈을 입금할 수 있는 기회라도 가진 사람들은 그나마 행운아였다. 이 거리에 몰려나온 저 사람들 대부분이 은행 계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은행 계좌가 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해댈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화폐개혁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법으로 취득했거나 유통되는 검은 돈, 즉 지하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급진적인 정책을 몰아붙이는 모디 총리의 퇴진을 위해 시위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법망을 피해 돈을 모으고 탈세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정부의 정책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또 다른 정책을 펼칠 것이다. 그들의 쫓고 쫓기는 싸움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그 흔한 은행 계좌 하나 없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온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지폐들을 불태우며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연일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정부는 개의치 않았다. 생명이 무엇일까? 인권이 무엇일까? 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메이는 인간의 생명이 한갓 풀 한 포기보다 더 가치 없이 느껴졌다. 저 사람들을 빗자루로 쓸듯 다 쓸어버려도 될 것만 같았다. 인권을, 생명을, 그토록 하찮게 만든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이라고 메이는 생각했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아무런 인권도 생명도 없는 존재. 삶이 죽음보다 못한 존재. 아무것도 아니지, 인권은. 쓰레기보다 못하지, 생명은.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메이는 알고 있었다. 비선실세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고유권한인 계엄령이 곧 실시될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들에게…… 시민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가진 권한이라는 것이 인간의 목숨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권한은 무엇인가?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나.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저렇게 쉽게도 죽이는데, 살인이 대체 뭐지? 왜 살인하면 안 되지?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보다 쉽고 간단한데. 죽으면, 혹은 죽이면 되는데. 죽여 버리면 되는데.
도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와 릭샤가 지나다닐 수 없도록 방어벽을 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가 탄 릭샤의 운전사는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몇몇 릭샤와 오토바이들이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마구 지나다녔다. 메이가 탄 릭샤 또한 사람들 틈으로 나아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서너 대의 오토바이와 메이가 탄 릭샤가 서로 부딪칠 뻔했다. 메이의 심장이 뛰었다. 메이는 두려웠다.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인도의 급진정책으로 인한 시위 현장에서 한국인 여행자 한 명이 사망했다고 뉴스에서 언급이라도 해줄까? 지금 내 지갑 속에는 여권도 신분증도 없는데, 내가 죽으면 이 많은 인도인들 중에 내 신원을 확인해 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누군가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이라도 해줄까? 이곳은 인도의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지방 소도시일 뿐인데……. 내가 죽고, 뉴스에 내가 사망자로 알려지면, 케이가 나를 알아볼까? 내가 죽은 것에 그가 충격을 받기는 할까? 케이가 놀라면 좋겠어. 아주 조금이라도, 그의 삶에, 그의 기억에, 그의 심장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그가 나로 인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나에게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좋겠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에게 각인되고 싶어.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어, 나를 잊지 않으면 좋겠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메이는 기억할 수 없었다. 운전사가 릭샤를 세우고 이곳이라고 말했다. 메이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계산을 치르고 릭샤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와본 그곳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메이는 돌아보았다. 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이어진 천일 계단이 눈앞에 드러나 보였다. 여기가 아닌데, 나는 저 계단의 위쪽, 차문디 언덕의 정상으로 가달라고 했는데, 왜 이곳에 온 거지? 메이는 타고 온 릭샤를 다시 찾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계단의 꼭대기, 차문디 힐의 정상 부근에 미리 봐둔 장소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만 했다.
저물 무렵이었다.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계단길이 시작되는 부근에 자리한 장사치들은 하나 둘 노점을 접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메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산속은 위험해 보였지만 메이는 그 위험을 느낄 수도 없었다.
메이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슬리퍼 차림에 윗옷도 없이 나온 터라 맨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그래도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런지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깨끗했다. 메이는 슬리퍼를 벗어 양손에 하나씩 든 채 맨발로 계단을 올랐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감촉이 차다 못해 시렸다. 그 시림이 발바닥을 통해 회음부로, 심장으로, 머리 꼭대기로 전해져 왔다. 아, 아아……. 신음이 나왔다. 심장이 찢어져 그녀 몸의 구멍들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머릿속 골수가 산산이 부서져 심장의 피와 함께 온갖 내장기관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듯했다. 몸 안의 오물들이 뒤엉키고, 쏟아지고, 비어져 나왔다……. 메이는 걸을 수 없었다. 돌계단 위에 양 손바닥을 짚어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거대한 난디16)상을 지나 정상 부근에 다다를 즈음, 바로 그곳, 메이가 늘 보아 오던 커다란 바위틈이 드러나 보였다. 그 바위 틈새로 나아가면 편편한 돌무더기가 나오고 그 아래가 바로 절벽이었다.
인도 이름? 가루다.17) 왜 그 이름을 했어? 그냥, 어디든 가보고 싶어서. 그럼 나는 비슈누18)라고 할래. 왜? 비슈누는 가루다를 타고 날잖아. 나 혼자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지만, 오빠와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비슈누는 남자 이름이잖아, 차라리 락쉬미19)라고 하지 그래. 상관없어. 비슈누는 여성성도 가지고 있잖아. 사실 나는 비슈누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여신인 줄만 알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그게 바로 힌두의 신들이잖아. 그 말은 꼭, 너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물론 있지. 사실, 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나는 남자들이 너무나 싫었거든. 어렸을 때 남자애들이 나를 자주 놀리면서 때렸는데, 그들은 그게 다 장난이라고만 말했어. 나는 그게 너무 이해되지 않고 괴롭기만 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가 좀 더 자라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내 몸을 만지는 남자 선생님들을 많이 보게 됐어.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목덜미를 더듬거나 귓불을 주무르는 건 예삿일이었지. 겨울날 옷 좀 따듯하게 챙겨 입으라며 내 목도리의 매듭을 고쳐 주는 척하면서 가슴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 미친놈도 있었어. 진로 상담을 하자며 단둘뿐인 상담실 안에서 생리는 잘하고 있는지, 브래지어는 착용하는지, 남자와 성관계를 해본 적은 있는지 물어보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그래서 나는 남자라면 그저 여자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때리거나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쓰레기들 같았어. 자연스럽게 남자들을 멀리하게 됐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어. 아직까지도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남자들 옆자리에는 절대로 앉질 않아. 요가원이나 사우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 갈 때도 무조건 여성 전용부터 찾아보게 돼. 이제는 나도 다 커서 남자들이 나를 함부로 만지거나 때리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남자들이 싫어. 내가 어렸을 적에는 작고 힘이 없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무턱대고 나를 때리거나 만질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좀 커서 어른이 되니까, 나름대로 힘이 생기고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니까 나를 함부로 때리거나 만지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그들이 더 쓰레기 같아. 작고 약한 존재라면 더 괴롭히고, 크고 강한 존재들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인간쓰레기들인 거야……. 그래서 나는 남자들이 내 옆으로 오는 것 자체가 마냥 두렵고 싫어.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와 냄새까지도 참을 수가 없어.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어.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어, 요한을 사랑하게 된 건……. 그는 성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어. 무리도 아니지, 그는 아주 작고 마른 사람이었으니까. 남자로 태어났지만 대개의 여자들보다 훨씬 더 작고 마른 사람이었으니까. 여자보다 더 예쁘고 연약한 사람…… 그게 요한이었어. 어쩌면 나는 그에게서 남성성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었어. 그가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아프든 아프지 않든…… 나는 그냥 그가 좋았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내 감정을, 내 사랑을…… 조절할 수가 없었어……. 이 핑갈라, 끊임없이 나를 치고 올라오는……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불길…….
노을이 붉게 번지며 온 하늘을 덮어씌웠다. 메이는 샌들을 돌계단 위에 놓아두고 매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바위 틈새로 나아갔다. 크고 편편한 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무서워……. 모든 것이 무서워. 이 길도, 저 하늘도, 나 자신까지도…….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 다리가 후들거려 메이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맨살에 닿는 바위의 감촉은 너무나 차가운데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태양은 너무나 뜨거워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려워, 저 불길이, 저 불길이 시작된 곳이…… 너무나 두려워. 근원을 잘라야 해. 사라져야 해, 불길 속으로, 저 너머로, 나는 나아가야 해. 울고 있는, 울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보여. 그는 죽었을까? 죽어서, 그토록 사랑하던 그의 하나님 곁에 앉아 있을까? 하나님이 그에게 쉼을 허락해 주셨을까? 윤희야, 너는 자주 말했지. 내 대신 네가 죽고 싶다고. 단 하루 만이라도 내가 남들과 같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스도와 같이, 네가 죽어서 나에게 새 생명을 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네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정말로 죽고 싶었어. 내가 죽으면, 너는 알게 될 거야. 사랑하는 이의 존재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게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윤희야, 내가 너보다 먼저 죽을 거야. 나의 죽음으로 너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거고, 그러면 너의 생명이 끝날 때 너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는 다름 아닌 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까지도 너는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윤희야, 나의 죽음이 먼저 너에게 가르쳐줄 거야,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의미를……. 그것이, 너를 살게 할 거야.
오빠는 이곳에도 발을 디뎌 봤을까? 오빠가 쓴 여행 책에서 이곳, 차문디 언덕을 소개해 놓은 것을 보았어. 천일 개의 계단과, 계단 중턱의 난디상, 차문디 언덕 정상의 차문데쉬와리 사원 풍경까지도 상세히 소개해 놓았잖아. 그럼 오빠도 이 바위를 한 번쯤은 보았을까? 이 틈새로 걸어 나와 발을 디뎌 보았을까? 내가 왜 그토록 많이 이곳에 찾아와 맨발로 이 길을 걸었는지 오빠가 알까? 이 길을 걸으면, 오빠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어. 오빠가 맨발로 밟곤 했던 그 길을 나 또한 맨발로 밟으면 오빠와 내 몸이 하나로 섞이는 것만 같았어. 흥분이 일고, 물이 흘러나와 속옷이 젖었지. 모든 것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뭉그러지는 것 같았어. 오빠와 하나가 되고 싶어. 누군가와 섞이고 싶어. 그러면 내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뭐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저 하늘이, 저 태양이, 저 구름이, 저 땅이…… 하나가 되는 거야, 나랑……. 여기 이곳, 차문디 언덕에서 오빠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저기 저 언덕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신에게…… 오르는 거야……. 내 신발을 가지고…… 거기로 갈게.

11) 만추리안 : 야채나 치즈를 작게 잘라 기름에 튀긴 뒤 인도식 양념에 버무려 볶아낸 음식. 고비는 콜리플라워이며, 가장 대표적인 만추리안 재료로 쓰인다.
12) 초우멘 : 기름에 볶은 중국식 국수 요리로 인도, 네팔, 티베트 등 남아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먹는다.
13) 차파티 :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얇게 만들어 구운 인도식 빵.
14) 핑갈라 : 요가경에 의하면 인체에는 ‘나디’라고 불리는 72,000개의 에너지 통로가 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다’와 ‘수슘나’, ‘핑갈라’라고 불리는 세 개의 통로이다. 수슘나는 척수를 통해 중앙으로 흐르는 에너지이고, 이다는 수슘나의 왼쪽에 자리하는 음의 에너지, 핑갈라는 오른쪽에 자리하는 양의 에너지이다. 이다는 하강하는 에너지이자 달의 기운을 상징하며, 핑갈라는 상승하는 에너지이자 태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따라서 핑갈라는 불과 같이 타오르고 역류하며 나쁜 에너지를 증식시키는 악마성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릭샤왈라 : 릭샤 운전사.
16) 난디 : 쉬바 신이 타고 다니는 수소(牡牛).
17) 가루다 : 힌두 신화에 나오는 조류 신으로 비슈누 신과 주종관계를 맺어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
18) 비슈누 : 힌두교 유지의 신. 창조의 신 브라마, 파괴의 신 쉬바와 함께 힌두교 삼주신 가운데 하나이다.
19) 락쉬미 : 비슈누의 배우자로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신 가운데 하나이며, 그녀 또한 가루다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소개 / 김혜나

1982년 서울 출생. 2010년 오늘의 작가상 · 2016년 수림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제리』,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중편소설 『그랑 주떼』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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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김유담 너는 길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냥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도 너는 꼿꼿이 서서 녹색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유령이 저렇게까지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너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네 모습이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 같았다. 나는 미니스커트에 가죽 코트를 걸쳐 입고 부츠를 신은 네 모습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법정에 가는 옷차림치고는 좀 요란하다 싶기도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최대한 후줄근하게 입는 게 낫지 않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너는 옷차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아차차 하고 깨닫는다. “안 늦었지? 강남은 올 때마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긴장돼.” 원래 키가 큰 편인 데다 굽 높은 부츠까지 신은 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를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사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했다. “밥, 어디서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반갑다는 인사 대신 내가 꺼낸 말이었다. “이 근처에 오면 꼭 가고 싶었던 맛집 있어. 거기 가보자. 서초동에 해운대암소갈비 분점이 있더라고. 해운대에서 먹었던 갈비를 여기서 먹을 수 있다니, 설렌다. 고기 괜찮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너는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괜찮아?”라고 묻지 않고, “괜찮지?”라고 묻는 것은 네 아버지의 질문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괜찮제?”였다고, 기억한다. “갈비는 좀 헤비하지 않나? 간단한 걸로 먹어. 사실 나 점심 생각도 없어.” 너를 좇아가며 네 뒤통수에 대고 내가 말했다. “중요한 날이잖아, 든든하게 먹고 들어가자.” 너는 뒤돌아선 채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재판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미리 만나 밥을 같이 먹자고 한 건 너였다. 너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떼를 쓰듯 말하는 너를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들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너와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다. 서로의 집을 격의 없이 오갔고, 계절마다 같이 나들이를 다녔다. 매년 봄 진해에 가서 벚꽃을 봤고, 여름이면 남해로 휴가를 다녀왔으며, 가을마다 가야산 단풍 구경을 빼먹지 않았다. 겨울에는 무주에 가서 스키도 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계절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명소를 찾고,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의 아버지 지론이었다. 네 아버지는 좋은 것을 누려 왔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너희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내 아버지는 학교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축이었고, 네 아버지는 그 학교에서 가장 부유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너의 조부는 부산 지역에서 이름난 유지

  • 관리자
  • 2024-03-01
손상

손상 지강숙 차가 안개를 헤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반쯤 열린 철문에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민호가 머뭇거렸다. 방금 지나온 캠핑장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민호는 할 수 없이 철문 안으로 차를 전진시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니 샛길이 나 있고 길 끄트머리에 숨어 있던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편에는 미니버스 크기의 캠핑카 한 대가 서 있었다. 희수가 자세히 보려 차창을 내렸을 때,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차를 한쪽으로 몰았다. 희수는 차에서 내려 소나무 숲 건너 언뜻 보이는 캠핑장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는 여기 두시고, 저어기 계곡 건너편이 조용할 거예요. 남자는 캠핑카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맞은편에 간신히 텐트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였다. 희수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캠핑카 앞에도 촬영 장비가 즐비한 것을 보니 남자 쪽도 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의 화각을 생각하면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희수와 민호는 텐트와 조리도구, 음식 재료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 번쩍. 캠핑카 앞을 지날 때,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희수는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물에 발을 디뎠다. 백화점의 캠핑 코너는 몇 개의 유명 브랜드를 빼고 대부분 비슷한 물건을 팔았다. 중소 브랜드의 경우에는 전주 매출에 따라 매대 위치가 정해지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매니저들은 타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백화점에서 금지한 가매출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자신의 카드 한도로 모자라면 신입이나 수습 같은 말단 직원에게 구매를 강요했는데, 다음 달에 실적이 없어 취소를 못 하면 직원이 고스란히 빚을 떠안기도 했다. 희수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고생하는 편을 택했다. 밤늦게까지 트렌드를 분석하거나 캠핑 용품의 기능을 공부해 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올렸다. 희수의 언변으로 타 매장에서 텐트를 산 고객이 환불을 받고 희수 매장에서 구매한 일도 있었다. 자산 규모가 미미한 업체임에도 희수의 매대는 작년까지 이벤트 홀 가장 좋은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했다. 매일 저녁 블로그나 유튜브로 유행 아이템을 살펴보고 설명할 말을 다듬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희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희수도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신생 브랜드 P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P사는 입점 행사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의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희수가 봤을 때 기능 면에서 희수의 제품이 훨씬 뛰어났지만 고객들은 희수의 설명에 잠시 멈췄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P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수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대책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 관리자
  • 2024-03-01
킨츠키 클래스

킨츠기 클래스 신주희 유리 조각을 주워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피아노 레슨 중인 그 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집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자유다. 예컨대, 그 애가 아끼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그 인형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거나. 침대에 눕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눕고 싶다면 그래도 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 애의 침대가 좋았다. 늘 좋은 냄새가 나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 시트가 깔려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앙증맞은 침대였으므로. 나는 그곳에 누워 차마 피아노곡이라 말할 수 없는 도, 미, 솔, 솔, 솔을 들으며 끝끝내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가 된다. 길에서 주워 온 유리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 본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그 애의 매끄러운 피아노에 깊은 흠집을 내버리기로. * 수업 준비는 늘 최고이면서 최악이었다. 나는 매일 산산조각이 난 접시나 찻잔, 사발을 들고 온 수강생들에게 그것은 복원 중일 뿐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기를. 끈기를 가지고 다음 수업 예약을 꼭 해주기를. 나는 구차함을 떨쳐내며 테이블 위의 수업 계획서를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지난 수업과는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문장들 사이에서 틈이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 중 하나인 킨(金) 츠기(継ぎ)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틈을 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파편의 경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살려서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나는 틈을 메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내게 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 고작 틈,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망이나 좌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비관을 포기한 사람으로 서른 중반까지 사모님으로 살았지만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꽤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남편의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집 안 곳곳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처참했다. 동시에 처절하게 이를 악물고 살아남고 싶기도 했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일처럼, 눈앞에 던져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끝내 이혼과 재산 분할, 양육권 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시간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깨뜨려 본 사람은 안다. 한번 깨진 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뒤로 알 수 없는 허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공포스러울 만큼 왕성한 소화력과 끝이 없는 식사. 순식간에 불어난 몸이 거대한 틈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틈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항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적

  • 관리자
  •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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