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 작성일 201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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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김혜나
해질 무렵, 메이는 차문디 언덕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문디 언덕 정상에 자리한 차문데쉬와리 사원1)을 찾는 이들이 새벽녘 태양빛을 받으며 하염없이 오르는 천일(千一) 계단을 메이는 매번 늦은 오후 시간에 찾아가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해 뜨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이소르 관광지를 구태여 저물녘에 찾아가는 데는 그녀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다. 우선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두컴컴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위험천만하게만 느껴졌다. 특히나 외국인 여자라면 유난히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인도 남자들의 끈덕진 눈빛을 메이는 피하고만 싶었다. 훤한 대낮에도 조심스레 다녀야만 하는 거리를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새벽녘에 돌아다니는 것은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경배 드리고 싶은 힌두의 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메이는 그 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고 좋아했지만 그들을 믿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차문디 언덕 위에서 볼 수 있다는 그 장엄한 일출에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딱 한 번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미리 예약해 둔 릭샤2)를 타고 차문디 언덕 정상에 올라가 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언덕 저 너머로 황금빛 태양이 떠올랐으나 하늘은 이미 동이 다 튼 대낮과 같은 상태였다. 이미 날이 밝은 상태에서 언덕 너머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뒤늦게 드러나 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메이는 그때 알게 되었다.
인도 남부, 카르나카타 주에 있는 마이소르 지방에 도착하기 전부터 메이는 차문디 언덕에 대한 풍문을 익히 들어왔다. 마이소르에 도착해 시내를 돌아볼 적부터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된 인도 사람들 또한 차문디 언덕의 일출만큼은 꼭 보러 가라고 귀띔해 주곤 했다. 산기슭의 천일 계단을 따라 걸으며 마주하는 태양은 우리의 심장을 뜨거운 감동에 젖게 만든다면서 말이다. 특히 마이소르 궁전 앞에서 만난 한 노인의 모습이 메이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커다란 은테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손에 쥔 채 궁전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그는 메이에게 차문디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일출을 이야기해 주며 그 순간의 감격에 담뿍 젖어들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고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저 먼 차문디 언덕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 가던 순간에는 메이에게도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떠오르는 태양빛을 말로 전해 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 노인이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3)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현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메이 또한 그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인도의 성자나 현자를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기대와 환상을 그 노인에게 덧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1) 차문데쉬와리 사원 : 복을 빌어 주는 것으로 인기가 있는 차문디 여신을 모신 힌두 사원이다.
2) 릭샤 : 소형 엔진을 장착한 삼륜차로, 인도의 보편적인 교통수단.
3) 에리얼 글룩리크,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김영사, 2004.
오전 요가 강습을 마치고 나왔을 때, 부고를 받았어.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의 부고는 아니었지. 나와 함께 요가 수련을 하고 있는 동료 강사의 아버지였고, 장례식장은 대전이었어. 아주 가까운 관계의 요가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 수요일이었고, 목요일인 내일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니깐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에 잠시 다녀와도 될 것 같았어.
버스터미널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전철역 방향으로 걸었지. 그런데 내 발걸음이 평소와는 달랐어. 내 안에 얕은 떨림과 흥분이 자라났어. 왜일까? 나는 지금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가는 것뿐인데, 어딘가 먼 휴가지로 떠나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겨우 한 시간 반 거리의 대전에 가는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나에게는 어디론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듯한 느낌이 배어들었어. 그래, 떠남, 떠남이었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 중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떠남,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것의 정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오빠는 그토록 많은 여행을 떠나는 거겠지, 라는 생각까지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대전으로 가는 차표를 사서 버스승강장으로 나아갈 적에는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어. 승강장으로 나가기 전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도 한 잔 주문했지. 이내 커피가 담겨 나온 컵을 손에 들고 버스승강장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밀어젖혔어. 버스에 올라 차표에 적힌 좌석 번호를 확인한 뒤 그 자리에 가 앉았고.
어느새 버스가 출발해 도로 위를 달려 나가고 있었어. 차창 밖 풍경들이 마치 물 흐르듯이 지나쳐 갔어. 문득 오빠가 떠올랐어. 오빠와의 기억이라거나 오빠의 모습이 아닌, 오빠라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떠오르는 거였어. 그러고는 마치 만트라4)를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서 낮게 웅얼거렸어. 이제 다시는 편지하지 않을 거야, 선언이라기보다는 좌절에 가까운 울음과도 같은 소리였어. 이제 다시는 편지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마지막 편지일 거야. 그러나 그것은 확언이라기보다는 바람에 더 가까웠지. 언젠가 또다시 오빠에게 편지하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것이 마지막 편지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는 ‘대전’이라는 도시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이고, 지방 어느 도시를 가건 서울에서 지나쳐 가는 도시이기에 나는 왠지 그곳에 자주 가본 것만 같았지만 실제로 그곳에 내려 두 발을 딛고 걸어 본 적은 없었던 거야. 그랬구나, 나는 대전에 처음 가는 거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지금의 이 설렘이 얼마간 이해가 되었어. 처음 가보는 곳이니 당연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양 두려움을 동반한 기대와 설렘이 찾아오는 거겠지. 생전 처음 마주하는 도시의 모습, 그 순간의 내 상태 같은 것이 자꾸만 되새겨졌어. 그곳은 어떤 곳일까, 나는 상상했어. 버스는 점점 어둠 속으로 깊이 나아갔어. 나도 따라 그곳으로, 더 깊이, 더 나아갔어. 그래, 그랬어…….
4) 만트라 : 가르침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주문으로 진실한 말(眞言) 혹은 성스러운 문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가 행자들은 요가 수련 전후에 스승과 신에 대한 경배의 의미로 만트라를 외우기도 한다.
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았다. 어른도 아이도 아니고,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메이는 생각했다. 남자이면서 여자인, 노인이면서 아이인, 서양인이면서 동양인인 사람. 그에게서 요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메이는 평안함을 느끼곤 했다.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자연히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강렬한 신체 단련으로만 다가오던 아쉬탕가 요가5) 수련의 시간이 마치 하나의 요람처럼 느껴졌다. 포근한 담요로 감싸인 요람이 가만히 흔들린다. 흐름을 타는 아이, 희고 보드라운 살결, 작고 말랑한 뼈……. 그 움직임의 물결을 느끼며 메이는 요가를 해나갈 수 있었다.
인도, 마이소르에 온 지 어느덧 석 달째였다. 마이소르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고 짐을 풀던 즈음에는 더디게만 흐르는 듯했던 하루 또 하루가 어느 순간부터 정처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요가 선생님은 오늘도 아무런 말이 없다. 원래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메이와 소통하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이의 생각으로는 둘 다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요가 수련을 하는 데 딱히 말이나 대화가 필요하지는 않았기에 메이 또한 그에게 말을 붙이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메이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아쉬탕가 요가의 동작들만 연습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이따금씩 메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게 다였다. 설사 메이가 잘못된 요가 동작을 취하더라도 결코 그녀에게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고 조용히 떠나갈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럼에도 메이는 종종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자신의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옳은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쩌면 메이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의 몸이 어떠한 상태인지 아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까지 알고 있지 않을까, 메이는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가 메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듯 메이 또한 그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요가를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케이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머릿속으로 또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문장들을 그녀는 쓰고 또 썼다. 오늘도 선생님이 계속 똑같은 자세만 도와줘. 아쉬탕가 요가에는 연속된 순서가 있고, 선생님이 늘 도와주는 것은 ‘마리챠아사나’6)라는 거야. 마리챠아사나에는 A, B, C, D까지 총 네 개의 순서가 있는데, 그중에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마리챠아사나 D였어. 그게 가장 어렵고 불편한 자세야. 그래서 나는 내가 마리챠아사나 D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나를 도와주길 원해.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마리챠아사나 C 순서를 하고 있을 때 다가오는 거야. 나는 그게 이상해. 나는 이미 마리챠아사나 C를 할 줄 아는데, 그 동작에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데, 그는 늘 이 자세만 도와주고 가버리는 거야. 그리고 내가 원했던 마리챠아사나 D는 전혀 도와주질 않아.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좀 더 요가를 수련해 보면, 1년, 2년, 3년…… 매일 수련해 나가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까? 그것이 성장이고 깨달음일까?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오빠, 그것은 나중의 일이잖아. 나는 아직 성장하지 않았잖아. 나는 아직 어리잖아. 나는 아직 어둠 속에 있잖아. 그래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잖아. 나는 너무 답답하기만 한데, 두렵기만 한데, 먼저 이 길을 가본 사람이라면 나에게 좀 말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해답을 가르쳐줄 수 있잖아. 나를 여기서 건져 올려줄 수 있잖아. 그러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지. 삶은 언제나 해답이 없어. 그래서 나는 더욱더 그 답을 갈구해. 해답을 찾기 위해 요가를 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승을 찾아가지……. 그러나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아. 오빠조차도…… 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떠나가 버렸어. 오빠의 마음이 어떤 거였는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어. 때로는 그것이 더 용서가 안 돼, 오빠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피 흘리면서, 그 피를 바라보면서…… 들이마시고…… 오빠를 증오하지……. 검붉은 피보다 더 탁하게 물들어 가는 내 오장육부를 바라보면서…… 온몸으로, 내 안에 핏물을 쏟아 부으면서……. 하루, 또 하루……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5) 아쉬탕가 요가 : 아쉬토Astau는 여덟, 앙가Anga는 나뭇가지, 요가Yoga는 결합을 뜻한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 제시된 요가의 여덟 가지 측면을 나뭇가지에 비유한 용어로 지혜와 영성의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이 인간 존재가 깨달음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아쉬탕가 요가’는 파타비 조이스(K. Pattabhi Jois, 1915~2009)에 의해 인도 마이소르 지방의 아쉬탕가 요가 연구소(KPJAYI)에서 전파되어 온 수련 체계를 뜻하기도 한다.
6) 마리챠아사나 : 위대한 현인 마리치의 이름을 딴 요가 자세이다. 팔로 다리를 감싸고 등 뒤에서 손을 맞잡아 척추를 늘이거나 비트는 등의 동작들이 총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 마리챠아사나 A, B, C, D라고 부른다.
오전 여덟 시, 요가 수련을 마친 메이는 요가원 건물 밖으로 나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푸른빛이 감돌던 새벽녘의 어스름이 모두 물러나고 대낮처럼 환한 빛이 온 거리에 만연해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요가를 통해 어지러운 상념과 혼탁한 마음을 모두 비워낸 것이 아니라 그저 기운이 다 빠져나가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되새겨 볼 여력이 없는 거였다. 심지어 단지 기운이 없는 건지 허기가 지는 건지조차 분간이 되질 않았다.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숙소로 가는 길 식당에 들러 이들리7)와 와다8)를 주문했다.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음식이기에 직원은 주문과 동시에 곧바로 그것들을 집어 포장해 주었다. 메이는 계산을 치르고 음식이 담긴 봉투를 받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가 매트와 가방을 방바닥에 부려 놓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땀에 젖은 옷부터 좀 갈아입고 손을 씻고 소변도 본 뒤에 식탁에 앉아 차분하게 음식을 먹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극심하게 몰려드는 허기부터 어떻게든 채워야만 했기에,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제일 급했기에,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먼저 할 수가 없었다.
음식이 담긴 봉투의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메이의 손은 재빠르게 그 음식을 집어 입안으로 옮겨 넣기 시작했다. 들짐승이 다른 짐승의 살점을 물어뜯기라도 하듯 숨도 쉬지 않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수저도 포크도 필요하지 않았다. 식당 직원이 포장해 준 삼바르9)와 처트니10)를 빵 위에 들이부은 뒤 손으로 대충 뒤섞어 입안으로 밀어 넣기만 반복했다. 그것을 모두 먹어치우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메이는 그것이 무슨 맛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냥 빵이고, 튀김일 뿐이었다. 아니, 입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무언가일 뿐이었다.
이미 이인분의 음식을 먹어치운 셈인데도 메이는 계속 허기가 졌다. 책상 위에 과자가 남아 있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위 난삽하게 올라와 있는 물건들을 손으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과자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책상 서랍까지 일일이 다 열어 보고 옷장도 열어 봤지만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다 먹어치웠거나 일부러 사다 놓지 않은 게 분명했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 먹었거나, 사놓지 않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미 충분히 먹었잖아, 참아야 해. 특히 과자와 초콜릿, 빵과 케이크는 더 이상 먹지 말아야 해. 참아야 해, 견뎌야 해, 라고 생각할수록 메이에게는 그것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들고 방문을 열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건물에 자리한 편의점으로 들어가 오트밀 쿠키, 초콜릿 쿠키, 코코넛 쿠키들을 한 움큼씩 집어 들었다. 과자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다크 초콜릿과 아몬드 초콜릿 봉지도 더 집었다. 지금 다 먹지는 않을 거야. 메이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웅얼거렸다. 그냥 맛만 볼 거야. 그리고 조금씩 나누어서 먹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다 먹지 않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7) 이들리 : 발효시킨 쌀 반죽을 쪄서 만든 빵으로 주로 남인도에서 아침식사용으로 먹는다.
8) 와다 : 렌틸콩 가루와 삶은 감자로 만든 반죽을 튀긴 것으로 이들리와 함께 아침식사로 먹는다.
9) 삼바르 : 렌틸콩과 채소, 향신료를 넣어서 끓인 인도식 스튜.
10) 처트니 : 과일이나 채소를 향신료에 섞어서 만든 인도식 피클 또는 소스. 빵이나 밥과 함께 먹는 게 일반적이며, 아침식사용 빵은 주로 코코넛 처트니와 함께 먹는다.
지난밤, 꿈을 꾸었어. 대개의 꿈보다는 선명하고 대개의 현실보다는 흐릿한 순간들이 이어졌어. 꿈속에서 그 사람, 요한을 만났어. 꿈속이지만 그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어. 그의 모습을 보자 뭔가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뛰었어. 그와 동시에 가슴 가득 설렘이 차올랐지. 그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어. 그래서 나는 우리가 정말 헤어지긴 한 건지 의심했어.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와 나는 분명히 헤어진 상태였어. 그래, 우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요한의 집에 있고, 그는 침대에 누워 있어.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반팔 티셔츠 차림에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어. 그가 나에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말해.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앉아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는 그의 다리에 손을 갖다 댔어. 그리고 그의 한쪽 다리를 길게 늘어트린 뒤 들어 올렸지. 세상에, 살이 쪘어……. 내가 말했어. 내 말에는 놀람과 경이가 들어 있었어. 그의 얼굴에 다소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어. 나는 믿을 수 없었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른 쪽 다리를 다시 들어 올려 보았어. 반대쪽 다리에도 어김없이 살이 올라 있었어.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놀라 물었지. 그러자 그의 얼굴은 마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장군과도 같이 의기양양해졌어. 그리고 그것이 무슨 특급 비밀이라도 되는 양 입을 앙다물었어. 나는 위로 들어 올린 그의 다리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어 보았어. 그리고 그의 허벅다리 바깥쪽과 안쪽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어. 정말로, 살이 찐 거였어. 눈물이…… 흘렀어. 기적이 있다면, 이런 거구나. 나는 그만 그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모아 한쪽씩 주무르기 시작했어. 아주 조금일 뿐이지만, 예전보다 살이 오른 그의 다리는 주무르기 훨씬 편했어. 물리적으로 편한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편했어. 뼈와 가죽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그의 몸이 행여나 부서질까 봐 조심해야만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그의 종아리를 눌러도 내 손에 그의 뼈가 닿지 않았어.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아프다며 소리를 내지를 일도 없었어. 도대체 어떻게 살이 찔 수 있지? 신에게 감사드렸어. 신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정말이지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어.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어.
사랑해.
나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오직 그 말만이 차올랐어. 나는 많이 놀랐어. 나는 이미 그와 헤어졌는데, 그를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이 나보다 더 먼저 그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어.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지. 떨리는 이 심장을, 설레는 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사랑해…… 그 사람을…… 아직도, 너무나 사랑해, 오빠…….
이른 저녁부터 케이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메이에게 허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낮 시간에 충분한 양의 음식을 먹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저녁은 먹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메이는 몰려드는 허기를 물리칠 수 없었다. 집 안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그마한 방 한 칸에 화장실만 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주방도 없고 냉장고도 없었다.
메이는 다시 편지 쓰기에 집중해 보려 했지만 한번 일어난 식욕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메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윗옷을 걸친 뒤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때마다 길가에 나와 음식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에게서 고비 만추리안11)과 야채 초우멘12) 그리고 차파티13)를 달라고 말했다. 후식이 될 만한 것도 필요할 듯해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편의점에 들러 머핀과 초콜릿도 좀 더 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할 거야……. 메이는 노점 상인에게 계산을 치르고 주문한 음식을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책과 노트북, 화장품과 필기구가 난삽하게 올라와 있는 책상을 치우거나 정리할 정신도 없었다. 메이는 밖에서 사온 음식들을 방바닥에 부려 놓고 그대로 주저앉아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초우멘 그릇에 만추리안을 붓고 양념이 골고루 배게 섞은 뒤 입으로 넣었다. 차파티도 꺼내어 그 위에 초우멘과 만추리안을 올리고 꾹 꾹 싸서 먹었다. 포장 그릇에 남아 있는 잘게 썬 야채와 양념까지 메이는 손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먹어치웠다. 순식간이었다. 허무했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고 또 먹어도 메이는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다. 메이는 봉지에 들어 있는 머핀과 초콜릿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 머핀과 초콜릿이 들어와 있지만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냥 사물이었다. 머핀과 초콜릿이라고 불리는 사물들이 입안에 들어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을 뿐 그 어떠한 맛도 향기도 느낄 수 없었다. 머핀과 초콜릿을 모두 씹어 삼키고 났을 때, 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으로 가서 머핀과 초콜릿, 아이스크림, 식빵, 감자 칩 봉지를 집어 들었다. 한 번 살 때 충분히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에 잡히는 대로 바구니에 다 쓸어 넣고 계산해 달라고 말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우선 식빵 위에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올려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배 안에서 내장기관들이 뒤엉키는 소리가 났다. 왼쪽 어깨 견갑골 부위와 무릎 아래 혈 자리에서도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메이는 더 먹어야만 했다. 그녀는 머핀과 감자 칩을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식빵 위에 올린 뒤 싸서 먹었다. 끈적한 달콤함이 온몸 가득 차오르는 순간, 메이는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을 순간적으로 멈췄다. 입안에 들어온 음식들이 갑자기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메이는 방바닥에 부려 놓았던 비닐봉지를 집어 입안에 있던 음식을 뱉었다. 음식과 침을 모두 다 뱉었는데도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더럽고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 앞에 주저앉아 목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방금 먹은 음식들이 입 밖으로 나와 변기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이 먹은 게 다 똥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메이는 목구멍 안으로 더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음식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눈과 콧구멍에서도 뭔지 모를 액체들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가 가진 모든 구멍에서, 심지어 모공에서까지 온갖 오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쓰레기통이구나, 여기는……. 내 안은, 진짜 더럽구나……. 메이는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한번 비어져 나온 울음 또한 쉽게 멈추려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역류해 올라오는 듯했다. 몸에서 나오는 오물들이 바닥에 쌓이고 쌓여 종내에는 그녀의 몸까지도 오물 자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존재하기 싫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태에서, 이 순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메이는 도망치고 싶었다.
메이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서 도망쳐서, 자신이 속했던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이곳에 왔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로 가면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꼭 다른 사람이지는 않아도 됐다. 그냥 ‘나’만 아니면, 지금의 내 모습만 아니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온갖 고통과 절망을 먹는 행위로 덮어씌우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만 아니면, 무엇이 되든 어디에 있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만 같았다. 그랬다,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인도에 와서 생활해 나가며 메이는 진짜 현실을 깨달았다. 내 삶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구나. 나는 결코,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없구나.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나의 자아는 항상 나를 따라오는 거구나……. 벗어날 수 없구나…… 이 거친, 더러운 마음으로부터, 악마의 본성, 핑갈라14)로부터…….
케이를, 죽이고 싶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를 죽여야만, 죽여 버려야만 이 모든 분노와 절망과 갈등과 고통이 끝이 날 것이다. 죽이고 싶어, 죽여 버리고 싶어……. 메이는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살의를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온몸을 떨었다. 그동안 메이는 알지 못했다, 자신에 대해서, 자기 안의 살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제껏 살아 왔다. 이 살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케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깨달아버렸다. 메이는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누구든 죽여 버리고 싶어.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아…….
메이는…… 죽고 싶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사라질 것 같은 자기 안의 욕구, 그 살의를 비워낼 수 없다면, 이것이 끝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해갈되는 욕망이라면, 그 대상은 바로 메이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를 죽여야 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 핑갈라를 무찌르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는 거야. 내 안의 악마를 없애기 위해, 나를 죽여야만 하는 거야…….
그것은 어떠한 결심도 결정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죽여야 해, 죽어야 해…….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메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저물 무렵이 되어 공기가 싸늘했다. 겉옷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반팔 차림이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옷을 챙겨올 정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메이는 그대로 집 앞 대로변으로 나아가 도로 위를 지나는 릭샤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이 그저 차문디 힐로만 가달라고 말했다. 릭샤왈라15)는 그곳이 여기서 제법 멀다고, 왜 이 늦은 저녁 시간에 그곳에 가려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문디 힐, 차문디 힐, 이라고만 계속 되뇔 뿐이었다. 릭샤왈라 또한 마치 혼잣말 하듯 말했다. 지금 시위 중인 거 너도 알잖아. 시내의 도로는 시위대에 점령되었어, 우리는 그곳을 지나가지 못할 거야. 메이는 다시 말했다. 차문디 힐로 가줘, 차문디 힐……. 제발. 운전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릭샤를 몰기 시작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위험해도 할 수 없어, 나는 아무 책임 없어, 네가 원한 거야. 메이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더 대답하지 않았다. 릭샤 안으로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숨이 막혔다.
마이소르 버스승강장 앞 사거리는 정말로 난리 벅적이었다. 도로는 차단되어 차나 릭샤, 오토바이 등은 지나갈 수 없었다. 모든 도로에 방어벽이 둘러져 있고 가장자리마다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 안 사거리도 사람들로 빼곡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시행된 화폐개혁으로 사람들은 절망하고 신음했다. 정책에 따라 고액권인 500루피와 1000루피의 사용이 전면 중단되고 하룻밤 사이에 현금 80퍼센트 이상이 무효화 되었다.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인데 구권을 예금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유예기권은 겨우 한 달이었다. 그렇게 돈을 입금할 수 있는 기회라도 가진 사람들은 그나마 행운아였다. 이 거리에 몰려나온 저 사람들 대부분이 은행 계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은행 계좌가 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해댈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화폐개혁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법으로 취득했거나 유통되는 검은 돈, 즉 지하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급진적인 정책을 몰아붙이는 모디 총리의 퇴진을 위해 시위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법망을 피해 돈을 모으고 탈세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정부의 정책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또 다른 정책을 펼칠 것이다. 그들의 쫓고 쫓기는 싸움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그 흔한 은행 계좌 하나 없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온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지폐들을 불태우며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연일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정부는 개의치 않았다. 생명이 무엇일까? 인권이 무엇일까? 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메이는 인간의 생명이 한갓 풀 한 포기보다 더 가치 없이 느껴졌다. 저 사람들을 빗자루로 쓸듯 다 쓸어버려도 될 것만 같았다. 인권을, 생명을, 그토록 하찮게 만든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이라고 메이는 생각했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아무런 인권도 생명도 없는 존재. 삶이 죽음보다 못한 존재. 아무것도 아니지, 인권은. 쓰레기보다 못하지, 생명은.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메이는 알고 있었다. 비선실세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고유권한인 계엄령이 곧 실시될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들에게…… 시민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가진 권한이라는 것이 인간의 목숨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권한은 무엇인가?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나.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저렇게 쉽게도 죽이는데, 살인이 대체 뭐지? 왜 살인하면 안 되지?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보다 쉽고 간단한데. 죽으면, 혹은 죽이면 되는데. 죽여 버리면 되는데.
도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와 릭샤가 지나다닐 수 없도록 방어벽을 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가 탄 릭샤의 운전사는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몇몇 릭샤와 오토바이들이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마구 지나다녔다. 메이가 탄 릭샤 또한 사람들 틈으로 나아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서너 대의 오토바이와 메이가 탄 릭샤가 서로 부딪칠 뻔했다. 메이의 심장이 뛰었다. 메이는 두려웠다.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인도의 급진정책으로 인한 시위 현장에서 한국인 여행자 한 명이 사망했다고 뉴스에서 언급이라도 해줄까? 지금 내 지갑 속에는 여권도 신분증도 없는데, 내가 죽으면 이 많은 인도인들 중에 내 신원을 확인해 줄 사람이 있기는 할까? 누군가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이라도 해줄까? 이곳은 인도의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지방 소도시일 뿐인데……. 내가 죽고, 뉴스에 내가 사망자로 알려지면, 케이가 나를 알아볼까? 내가 죽은 것에 그가 충격을 받기는 할까? 케이가 놀라면 좋겠어. 아주 조금이라도, 그의 삶에, 그의 기억에, 그의 심장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그가 나로 인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나에게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좋겠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에게 각인되고 싶어.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어, 나를 잊지 않으면 좋겠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메이는 기억할 수 없었다. 운전사가 릭샤를 세우고 이곳이라고 말했다. 메이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계산을 치르고 릭샤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와본 그곳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메이는 돌아보았다. 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이어진 천일 계단이 눈앞에 드러나 보였다. 여기가 아닌데, 나는 저 계단의 위쪽, 차문디 언덕의 정상으로 가달라고 했는데, 왜 이곳에 온 거지? 메이는 타고 온 릭샤를 다시 찾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계단의 꼭대기, 차문디 힐의 정상 부근에 미리 봐둔 장소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만 했다.
저물 무렵이었다.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계단길이 시작되는 부근에 자리한 장사치들은 하나 둘 노점을 접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메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산속은 위험해 보였지만 메이는 그 위험을 느낄 수도 없었다.
메이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슬리퍼 차림에 윗옷도 없이 나온 터라 맨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그래도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런지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깨끗했다. 메이는 슬리퍼를 벗어 양손에 하나씩 든 채 맨발로 계단을 올랐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감촉이 차다 못해 시렸다. 그 시림이 발바닥을 통해 회음부로, 심장으로, 머리 꼭대기로 전해져 왔다. 아, 아아……. 신음이 나왔다. 심장이 찢어져 그녀 몸의 구멍들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머릿속 골수가 산산이 부서져 심장의 피와 함께 온갖 내장기관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듯했다. 몸 안의 오물들이 뒤엉키고, 쏟아지고, 비어져 나왔다……. 메이는 걸을 수 없었다. 돌계단 위에 양 손바닥을 짚어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거대한 난디16)상을 지나 정상 부근에 다다를 즈음, 바로 그곳, 메이가 늘 보아 오던 커다란 바위틈이 드러나 보였다. 그 바위 틈새로 나아가면 편편한 돌무더기가 나오고 그 아래가 바로 절벽이었다.
인도 이름? 가루다.17) 왜 그 이름을 했어? 그냥, 어디든 가보고 싶어서. 그럼 나는 비슈누18)라고 할래. 왜? 비슈누는 가루다를 타고 날잖아. 나 혼자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지만, 오빠와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비슈누는 남자 이름이잖아, 차라리 락쉬미19)라고 하지 그래. 상관없어. 비슈누는 여성성도 가지고 있잖아. 사실 나는 비슈누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여신인 줄만 알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그게 바로 힌두의 신들이잖아. 그 말은 꼭, 너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물론 있지. 사실, 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나는 남자들이 너무나 싫었거든. 어렸을 때 남자애들이 나를 자주 놀리면서 때렸는데, 그들은 그게 다 장난이라고만 말했어. 나는 그게 너무 이해되지 않고 괴롭기만 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가 좀 더 자라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내 몸을 만지는 남자 선생님들을 많이 보게 됐어.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목덜미를 더듬거나 귓불을 주무르는 건 예삿일이었지. 겨울날 옷 좀 따듯하게 챙겨 입으라며 내 목도리의 매듭을 고쳐 주는 척하면서 가슴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 미친놈도 있었어. 진로 상담을 하자며 단둘뿐인 상담실 안에서 생리는 잘하고 있는지, 브래지어는 착용하는지, 남자와 성관계를 해본 적은 있는지 물어보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그래서 나는 남자라면 그저 여자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때리거나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쓰레기들 같았어. 자연스럽게 남자들을 멀리하게 됐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어. 아직까지도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남자들 옆자리에는 절대로 앉질 않아. 요가원이나 사우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 갈 때도 무조건 여성 전용부터 찾아보게 돼. 이제는 나도 다 커서 남자들이 나를 함부로 만지거나 때리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남자들이 싫어. 내가 어렸을 적에는 작고 힘이 없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무턱대고 나를 때리거나 만질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좀 커서 어른이 되니까, 나름대로 힘이 생기고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니까 나를 함부로 때리거나 만지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그들이 더 쓰레기 같아. 작고 약한 존재라면 더 괴롭히고, 크고 강한 존재들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인간쓰레기들인 거야……. 그래서 나는 남자들이 내 옆으로 오는 것 자체가 마냥 두렵고 싫어.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와 냄새까지도 참을 수가 없어.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어.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어, 요한을 사랑하게 된 건……. 그는 성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어. 무리도 아니지, 그는 아주 작고 마른 사람이었으니까. 남자로 태어났지만 대개의 여자들보다 훨씬 더 작고 마른 사람이었으니까. 여자보다 더 예쁘고 연약한 사람…… 그게 요한이었어. 어쩌면 나는 그에게서 남성성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었어. 그가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아프든 아프지 않든…… 나는 그냥 그가 좋았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내 감정을, 내 사랑을…… 조절할 수가 없었어……. 이 핑갈라, 끊임없이 나를 치고 올라오는……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불길…….
노을이 붉게 번지며 온 하늘을 덮어씌웠다. 메이는 샌들을 돌계단 위에 놓아두고 매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바위 틈새로 나아갔다. 크고 편편한 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무서워……. 모든 것이 무서워. 이 길도, 저 하늘도, 나 자신까지도…….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 다리가 후들거려 메이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맨살에 닿는 바위의 감촉은 너무나 차가운데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태양은 너무나 뜨거워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려워, 저 불길이, 저 불길이 시작된 곳이…… 너무나 두려워. 근원을 잘라야 해. 사라져야 해, 불길 속으로, 저 너머로, 나는 나아가야 해. 울고 있는, 울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보여. 그는 죽었을까? 죽어서, 그토록 사랑하던 그의 하나님 곁에 앉아 있을까? 하나님이 그에게 쉼을 허락해 주셨을까? 윤희야, 너는 자주 말했지. 내 대신 네가 죽고 싶다고. 단 하루 만이라도 내가 남들과 같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스도와 같이, 네가 죽어서 나에게 새 생명을 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네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정말로 죽고 싶었어. 내가 죽으면, 너는 알게 될 거야. 사랑하는 이의 존재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게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윤희야, 내가 너보다 먼저 죽을 거야. 나의 죽음으로 너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거고, 그러면 너의 생명이 끝날 때 너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는 다름 아닌 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까지도 너는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윤희야, 나의 죽음이 먼저 너에게 가르쳐줄 거야,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의미를……. 그것이, 너를 살게 할 거야.
오빠는 이곳에도 발을 디뎌 봤을까? 오빠가 쓴 여행 책에서 이곳, 차문디 언덕을 소개해 놓은 것을 보았어. 천일 개의 계단과, 계단 중턱의 난디상, 차문디 언덕 정상의 차문데쉬와리 사원 풍경까지도 상세히 소개해 놓았잖아. 그럼 오빠도 이 바위를 한 번쯤은 보았을까? 이 틈새로 걸어 나와 발을 디뎌 보았을까? 내가 왜 그토록 많이 이곳에 찾아와 맨발로 이 길을 걸었는지 오빠가 알까? 이 길을 걸으면, 오빠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어. 오빠가 맨발로 밟곤 했던 그 길을 나 또한 맨발로 밟으면 오빠와 내 몸이 하나로 섞이는 것만 같았어. 흥분이 일고, 물이 흘러나와 속옷이 젖었지. 모든 것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뭉그러지는 것 같았어. 오빠와 하나가 되고 싶어. 누군가와 섞이고 싶어. 그러면 내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뭐든,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저 하늘이, 저 태양이, 저 구름이, 저 땅이…… 하나가 되는 거야, 나랑……. 여기 이곳, 차문디 언덕에서 오빠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저기 저 언덕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신에게…… 오르는 거야……. 내 신발을 가지고…… 거기로 갈게.
11) 만추리안 : 야채나 치즈를 작게 잘라 기름에 튀긴 뒤 인도식 양념에 버무려 볶아낸 음식. 고비는 콜리플라워이며, 가장 대표적인 만추리안 재료로 쓰인다.
12) 초우멘 : 기름에 볶은 중국식 국수 요리로 인도, 네팔, 티베트 등 남아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먹는다.
13) 차파티 :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얇게 만들어 구운 인도식 빵.
14) 핑갈라 : 요가경에 의하면 인체에는 ‘나디’라고 불리는 72,000개의 에너지 통로가 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다’와 ‘수슘나’, ‘핑갈라’라고 불리는 세 개의 통로이다. 수슘나는 척수를 통해 중앙으로 흐르는 에너지이고, 이다는 수슘나의 왼쪽에 자리하는 음의 에너지, 핑갈라는 오른쪽에 자리하는 양의 에너지이다. 이다는 하강하는 에너지이자 달의 기운을 상징하며, 핑갈라는 상승하는 에너지이자 태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따라서 핑갈라는 불과 같이 타오르고 역류하며 나쁜 에너지를 증식시키는 악마성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릭샤왈라 : 릭샤 운전사.
16) 난디 : 쉬바 신이 타고 다니는 수소(牡牛).
17) 가루다 : 힌두 신화에 나오는 조류 신으로 비슈누 신과 주종관계를 맺어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
18) 비슈누 : 힌두교 유지의 신. 창조의 신 브라마, 파괴의 신 쉬바와 함께 힌두교 삼주신 가운데 하나이다.
19) 락쉬미 : 비슈누의 배우자로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신 가운데 하나이며, 그녀 또한 가루다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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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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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생로랑 낭떠러지 김엄지 1 E는 걸으면서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지갑을 선물하리라. 메탈릭 컬러의. E는 결정했다. 메탈릭 컬러가 여자 친구의 취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거리에 눈발이 날리고, 때늦게 웬 눈인가. 인도로 걸어야 하는데 보도블록을 까뒤집어 놓은 날이다. 찬바람에 흙먼지가, 눈보라가 휘날린다.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보도블록과 공원 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중장비 두 대가 덩그러니 멈춰 있다. E는 카페로 가는 또 다른 길, 크게 우회하여 걷는 경로를 떠올린다. E는 천변으로 내려가 물을 따라 걷기로 한다. 2 축복이라는 건 그저 그런 상황에서 주시는 게 아니야. 핑크빛, 막 그런, 좋고, 그런 게 아니라. 코너로 몰아. 사람을 몰고 몰아서. 상황 중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보증된 건 천국이라는 자리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거. 여기서의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갈등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얼마 전에 급식 봉사하는 분 간증을 들었어. 오늘 밥 열심히 나눠 주고, 내일 밥할 돈을 또 구해야 하는 게 너무 큰 고난인 거야. 밤새 기도를 한대.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그럼 신기하게 다음날 딱 급식할 밥값만 입금되어 있대. 넉넉하게 편안하게 안 해 주는 거야. 하루만 딱. 항상 하시는 일이 그거인 거야. 딱 그거. 하루치. 너무 신기한 거야. 신기한 가운데 이틀치 주시면 안 되나요, 싶은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는 사용할 그만큼만 하시는 거야.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행복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내가 열성분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아. 내가 교회를 못 갈 일이 생기면, 오늘은 교회에 오지 말고 모임에 나가라, 하신다고. 내가 하나님 모를 때는 팝송도 듣고, 이거저거 다 들었는데, 하나님 알고 나서는 찬송가만 들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네가 듣고 싶은 것 들어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알게 됐지. 아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구나. 하나님이 너무 응답해 주시니까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거든. 신학대학 가기 전에 히브리어 띠고 가는 게 좋다고 해서, 히브리어 시작하려는데 그때 또 들렸어. 그 길은 네 길이 아니다, 음성이 들리더라고. 그래서 신학대학원은 안 가기로 했어. 하나님 왜 그러시냐고 물을 때는 답이 없으셔. 사람은 모르는 거야. 하나님만 아시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 딱 그만큼만 알려 주시는 거야. 내가 구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알려 주시고, 들려주시는 게 아니야. 성령이 임한다고 마냥 핑크빛이 아닌 거야.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내 몸으로 보여 주셔. 물집이 똑 떨어지고 그 자리에 반점이 생기는 거야. 나 심장도 멈춰 봤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나를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게 내 숨이었던 거야. E는 카페에 앉아
- 관리자
- 2025-04-01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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