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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모텔 부흥회

  • 작성일 2022-03-01
  • 조회수 2,706

[단편소설]



감귤모텔 부흥회



백가흠




1.


57회 기도회는 제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 나는 제주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렌터카를 찾고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석윤 형, 그럼, 이번 모임에 참석자가 우리 둘뿐이라는 거예요?”
원희가 조수석에 앉으며 씩씩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신앙심이 없어서야.”
내가 차에 시동을 걸며 답했다.
“우리처럼 모임에 간절하지 않은 거죠.”
그렇게 57회 모임은 열리지 못했다. 나와 원희를 빼고는 아무도 제주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 그럼 연락책인 나한테 먼저 얘길 했어야지, 일정을 취소하고 알려주지도 않으면 어떡해?”
찬일 형과 통화를 하다가 나는 버럭 화를 냈다.
“흥식이가 얘기한 줄 알았지. 경수, 훈이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야. 이번에는 그렇게 됐으니까 둘이 잘 놀다 와. 그리고 네 말대로 연락책인 네가 미리 연락하고 챙겼어야지, 형한테 뭐라고 그러면 어떡해?”
찬일 형이 점잖게 나를 나무랐다. 찬일 형은 우리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고 멤버들의 구심점이었다. 의료기기 사업을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근래 영역을 서비스업까지 확장해서 사업을 더 키우고 있었다.
“……그러게 형에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흥식이가 연락을 나한테 해야 했는데, ……어쨌든 알았어요. 여기까지 헛걸음한 거 같아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형.”
나는 어느새 풀이 죽어 찬일 형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통화한 내용을 원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번 모임이 무산된 게 내 탓 같았다. 다행이라면 급할 일이 나도 원희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은 제주에서 예정되어 있던 사흘을 함께 지내기로 했다. 회비로 예약한 스위트룸은 취소한다고 환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정이 쉬웠다.
“사람들이 약속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 그러다 큰 화가 내릴 거야. 우리는 복을 받을 거고.”
원희가 말하며 ‘커커컥’ 하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웃을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 웃음소리가 웅장했는데 웃음의 마무리가 언제나 확실했다. 그는 키가 190cm, 몸무게는 110kg을 훌쩍 넘는 거구였다. 그는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땀을 흘렸다. 겨울에도 반소매만 입고 다닐 만큼 열이 많았다. 생김새는 우락부락했지만 성정이 순한 사람이었다. 아니, 나는 그를 그렇게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모임이 있을 때만 가끔 보았고 따로 단둘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그를 십여 년 동안 56회 만났지만, 개인적인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해안가를 뒤로 하고 우리는 숙소까지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중산간 도로를 타고 한라산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속력을 내자 제주라는 공간이 주는 흥분이 나도 모르게 일었다.
“그런데 우리가 관광할 것도 아닌데 숙소를 왜 이렇게 멀리 잡았대요?”
“글쎄, ……위치는 멀어도 괜찮은 곳일 거야.”
원희가 물었고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숙소 예약은 내가 했다. 원희의 말에 순간 일었던 흥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풍경들이 느리게 뒤로 밀려났다. 심기가 불편해서 그런지 제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원희와 단둘의 여정이 어색한 것도 이유였다. 우리는 중간에 쉼 없이 숙소로 향했다. 우리는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게 불안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그와 사흘을 뭐 하면서 지내야 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 모임도 계속 하기 힘들겠어. 나쁜 자식들.”
나는 속으로 생각하던 말을 무심코 뱉고 말았다.
“나쁜 형들이야.”
나는 슬쩍 말을 바꾸었다. ‘57회 제주기도회’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모임이었는데, 오지 못한 멤버들에게 서운했다.
“이만하면 오래 만났죠. 나이도 먹었고 이제 취미도 다들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해요.”
우리는 한 시간 반 만에 감귤모텔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주변에는 편의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주차장 입구에는 남선초등학교 축구부 전지훈련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좁은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버스 옆에서는 남선초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짝을 이루어 머리로 공을 주고받으며 헤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놀란 듯 연습을 멈추고 멀찍이 비켜섰다.
“뭐 이런 데 숙소를 잡았대? 얘들은 또 뭐야.”
원희가 차에서 내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나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축구부 아이들은 우리 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도 이럴 줄 몰랐지.”
나는 말을 하고선 화들짝 놀랐다.
“형이 예약했어요?”
“어, 어. 그게, 새로 지은 곳이라기에. ……이렇게 외진지 몰랐네.”
감귤모텔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남겨 먹기 위해 고른 것이었다. 우리는 모임 때마다 회비를 따로 떼어서 모았는데 그것을 내가 관리하고 있었다. 회비로 일정하고 과하지 않게 숙소 비용이나 밥값으로 쓰곤 했다. 나는 이번 모임이 조금 부담됐다. 제주까지 오가는 교통비며, 포커 게임 비용 같은 게 만만치 않았다. 형편이 빠듯해서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많이 돈을 남겼는데, 그것을 원희가 알아차릴까 봐 나는 전전긍긍했다.
“스위트룸이 저렴해서 한 건데. 이미지로 본 거하곤 좀 다르네. ……다른 곳으로 옮길까?”
나는 말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무슨 말이에요, 형. 환불도 안 된다면서요.”
원희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머쓱해진 표정을 감추고 앞장섰다.
감귤모텔은 아담한 무인모텔이었다. 안내대가 없었고 키오스크가 우릴 맞았다. 나는 무인기계가 익숙지가 않아서 우왕좌왕했다. 원희가 대신 한참을 만지작거리자 카드키가 나왔다. 예약한 방은 꼭대기 층 끝 방이었다.
감귤모텔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이 깨끗하고 방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모텔 스위트룸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넓은 거실과 큰 방이 두 개, 무엇보다 모텔이었지만 큰 식탁과 간단한 주방 기구가 있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안 오면 자기들만 손해지. 안 그래?”
내가 모텔 방을 둘러보며 멋쩍게 말했다.
“그럼, 당연하죠, 형.”
원희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예의 그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없었다.



2.


우리는 포커 게임 모임을 기도회라고 불렀다. 포커 게임을 대하는 그 마음이 신께 간절히 올리는 기도하는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포커 게임을 한다고 하면 모두 노름한다고 생각하니 이미지를 생각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우리는 돈을 걸지 않고 재미로만 게임을 하냐면 또 그렇지는 않았다. 포커 게임에 내기가 빠질 수야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노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기도회의 목적이 포커 게임보다 친목에 있었고, 판돈의 규모가 초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포커 게임을 좋아했지만 멤버 모두 여유가 고르지 않았으므로, 판돈은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형편으로 맞춰졌다. 여섯 중 원희와 내가 제일 가난했다. 오지 않은 멤버 넷은 제법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 포커 모임을 시작할 때는 그만그만한 사정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벌써 점심때였다. 새벽부터 움직인 터라 배가 고팠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하릴없이 꽤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풍경은 없었지만, 그도 나도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그나마 발코니가 있어서 답답함이 덜했다. 담배를 피우는 원희는 좋아했지만 나는 은근히 그 공간이 그의 독차지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발코니에 나가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은 아까와는 달리 각자 볼 트리핑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공이 멀리 도망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은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제법 잘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서투른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 대부분은 체격이 작았고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왜 축구를 시멘트 바닥에서 하는 거야?”
내가 한참 만에 말했다.
“그러게요. 전지훈련까지 와서 이런 곳에서 연습을 하네.”
원희가 대답한 뒤 대화는 금세 끊겼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코치나 감독이 있을 만도 했는데 아이들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축구팀이라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아, 전부 다 하는 건 아닌가 봐요. 세 보니 열 명도 안 되네.”
원희가 연신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나는 담배 냄새가 좀 거슬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포커 모임 멤버 중에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원희와 흥식, 둘뿐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형들이 모두 비흡연자여서 흡연 장소가 항상 고려됐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원희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나저나 우리 뭐 좀 먹어야죠. 근처에 식당도 없는 것 같은데 어쩌죠?”
“그럼, 뭐 먹으러 나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좀 걱정이 됐다. 내가 원희보다 몇 살 많긴 했지만 끼니마다 계산을 할 수도 없고 각자 계산을 하자고 먼저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면이나 끓여먹을까요? 제가 나가서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사올게요.”
원희가 말했다.
“그럴래?”
내가 물음으로 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산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원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만 말하고 몸은 그대로였다. 시선을 주차장 볼 트리핑 연습하는 아이들에게 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카드를 내어 주자니 뭘 얼마나 사올지도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나는 좀 망설였다. 먼저 얘기했으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그럼, 다녀와. 나는 좀 씻고 있을 테니.”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네, 형님. 그렇게 하세요.”
원희가 애써 웃었다. 이번에도 그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원희가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내 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원희는 한참 만에 돌아와서 라면을 끓였다.
“무슨 샤워를 그렇게 오래 하세요?"
우리는 첫 끼니로 라면을 먹었다.
“너하고 둘이 오붓하니 좋네.”
“그렇죠, 형하고는 기회가 없었죠.”
내가 말하자, 원희가 라면을 후후 불며 맞장구를 쳤다.
“편의점은 안 멀었어?”
“차로 10분?”
내가 물었고 원희는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답했다. 대화는 끊겼고 우리는 말없이 라면을 쩝쩝 소리 내며 먹었다. 라면을 먹고 나니 더는 할일도 할 말도 없었다.
“형이 창가 방 쓰세요.”
“그럴까.”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이미 창가 방에 짐을 풀고 샤워까지 끝낸 뒤였다. 내심 창문 없는 방을 쓰게 될까 걱정하던 차였는데 샤워를 핑계로 선점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방 두 개 중에 출입문 쪽 방은 창문이 아예 없었다.
“일단 낮잠이라도 좀 잘까?”
“그럴까요?”
“너하고 둘이 오붓하니 좋네.”
“그렇죠, 형하고는 기회가 없었죠.”
우리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편의점은 안 멀었다고 했지?”
“차로 10분? 근처에 골프클럽이 있어요.”
“그렇다고 했지, 참. 그럼, 일단 잘까?”
“네, 그래요, 형.”
우리는 본격적으로 낮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원희도 나도 원하던 바였다. 막상 단둘이 있으니 어색함이 몰려들었다. 남은 이틀이 걱정됐다. 하루만 지내고 그냥 돌아갈까, 고민이 시작됐다.
기도회 모임 멤버는 총 여섯이었다. 나이는 모두 엇비슷한 또래였다. 막내인 원희가 올해 마흔여덟이었다. 나와 흥식은 쉰둘 동갑내기 오랜 친구였고, 찬일, 경수 형은 나보다 세 살 많았다. 훈 형은 두 살 위였다. 물론 모두 친한 사이였지만 모두 친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보아 왔으므로 잘 아는 사이였지만, 잘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원희와 단둘이 있어 보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여러 번에 걸쳐 여행을 겸한 모임이 있었지만, 멤버가 모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피곤이 몰려왔고 의도한 바대로 나는 깊은 낮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는지 깨어 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거실로 나와 보니 원희는 TV를 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나는 미처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말했다.
“저는 안 잤어요. 근처를 좀 걷다 왔어요. 술이랑 먹을 거도 좀 더 사왔고요.”
그때서야 보니 원희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이 나누어서 하지, 혼자서 뭐 그렇게까지 했어.”
“한 잔 드려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가 또 뭘 사왔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둘이 지내려면 돈이 들 텐데 그런 것은 생각 못 했던 터였다. 보통 이런 일은 회비를 걷어 충당하는데 내가 형이라는 사실이 부담됐다.
“형이랑 이렇게 오붓하게 둘이 보는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원희는 오늘만 해도 같은 말을 몇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만큼 서로에게 할 말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강박적으로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회가 없었지. 너는 누구 통해서 모임에 들어왔더라?”
원희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안 나세요? 충렬이 형 학교 후배잖아요.”
“아, 그랬었지, 참.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가물가물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충렬이라는 사람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이름은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생김새나 일화 같은 것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형도 한잔해요.”
원희가 술을 권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양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첫날, 우리는 초저녁부터 저녁을 거르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원희는 이미 거하게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사왔다는 것의 대부분은 한라산 소주였다. 요깃거리는 크래커와 참치통조림이 전부였다. 형들이 있었다면 거나한 저녁을 먹었겠지만, 우리 둘은 그런 호사를 누릴 만큼 사정이 되지 않았다. 원희는 취하는 속도를 맞춰야 한다며 자꾸 술을 권했고, 나는 마지못해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금세 취기가 올랐다. 대화는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취한 와중에 뭔가 얘기할 것을 찾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얘들은 이 시간에도 연습하고 있네.”
발코니로 담배를 피우러 나간 원희가 거실에 있는 내게 말했다. 나는 원희가 웃음기 없이 말을 할 때면 겁이 났다. 꼭 화난 사람처럼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원희가 있는 발코니로 향했다.
“밥은 먹고들 하냐?”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원희가 제법 큰 소리로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들은 다행히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떻게 온종일 저걸 시키지? 감독이 뭐 하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다.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닐 거예요. 스스로 하는 거지.”
원희가 답했다.
“지겹지도 않나 봐.”
“좋아서 하는 일은 안 지겹지.”
커커컥, 원희가 말하더니 웃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빙 둘러서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가슴으로 트리핑한 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볼을 보내면 마찬가지로 헤딩이나 발로 볼을 트리핑한 후 다른 사람에게 볼을 보냈다. 내가 지켜보는 내내 공은 한 번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을 정성스럽게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나는 아이들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은 것을 원희에게 대신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졌다. 급하게 마신 술에 취기가 올라왔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풍경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3.


원래 우리는 야구를 했었다.
“지나고 보니 야구도 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원희가 괄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우리는 야구 얘기를 했다. 각 팀의 전략과 이번 시즌 예상 순위 같은 것을 화제 삼았다. 원희와 나의 유일한 공통 관심사였다. 그러다 원희는 흐지부지 해체된 야구팀 멤버들을 하나 둘 소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원희는 술을 마시는 차원도 달랐는데 거구답게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한라산 소주를 맥주 컵에 부어 마셨다. 마실 때마다 소주 반병을 들이켰다. 그의 속도에 맞추어 술을 마시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잔을 들 때마다 나와 건배하기 위해 잔을 내밀었다. 점점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안 피곤해?”
“그래도 제주까지 왔는데 형하고 진하게 한잔해야죠.”
말을 걸기 무섭게 그가 잔을 들어서 나는 점점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취기가 돌자 옛일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니까 십오 년 전 즈음이었다. 서른일곱, 나와 흥식이 제일 먼저 야구를 시작했다. 우리는 대학 동창이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한강공원 망원지구에서 캐치볼을 했다. 집에서 꽤 먼 한강공원까지 간 이유는 거기에 잔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나만 그랬다. 캐치볼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나는 바쁜 흥식에게 매달렸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캐치볼을 어쩌다 보니 거의 매일 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재미가 생겼다.
“형, 원래 포지션이 어디였죠?”
나는 말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주로 외야 봤지.”
“아, 참, 그랬죠.”
원희가 과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흥식도 캐치볼을 좋아했지만 나와는 달리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야구를 하다가 일을 하러 갔다. 내 공을 받아 주고 던져 주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 무렵 우리는 홍제동에 살고 있었다. 하루 사는 게 버거운 나날이었지만 야구는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야구를 잘하고 싶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시간이 많았고 어렸다. 그게 우리의 무기였다. 내 자취방은 천변 근처에 있었고, 흥식의 자취방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흥식의 집 앞마당은 바로 북한산 자락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풀리지 않는 인생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래도 야구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원희가 과거에 취해 말했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흥식은 그 무렵 고향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고향친구가 부탁했던 것을 별생각 없이 들어준 것뿐이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나는 십여 년째 신춘문예에 도전 중이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항상 뒤늦은 도전 중이었고, 다음 차례는 야구였다. 나는 가끔 들어오는 대필 아르바이트 같은 일로 겨우 생활비를 벌었고, 흥식은 이자를 갚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주말 일용직 잡부 같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있었다. 우리의 미래는 없었고 오직 날아오는 공을 뒤로 흘리지 않기 위해 인생의 모든 사활을 걸곤 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미래였다.
“형은 통산 홈런이 몇 개예요? 홈런 쳐봤던가?”
원희가 비아냥거리듯 말해서 신경이 좀 거슬렸다.
“하나도 못 쳤지. 사회인 야구에서 홈런 쳐본 사람이 몇 되나.”
나는 가진 열정과는 달리 야구에 소질이 없었다. 창단 구성원인 것이 무색하게 팀이 구성되자마자 바로 백업이 되었다. 게임이 있는 날에도 나는 게임에 뛰지 못하고 주로 캐치볼을 하는 게 전부였다. 공을 던지고 받는 것은 제법 자신이 있었는데 게임은 달랐다. 아무리 사회인 야구 게임이라고 해도 가만히 서서 캐치볼을 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배트로 친 공의 속도는 어마무시 했다. 나는 공이 무서웠다. 날아오는 타구를 잡기는커녕 피하기 일쑤였다. 투수가 전력투구하는 공은 캐치볼 하는 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래서 타석에서도 나는 매번 패자였다.
흥식의 실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러 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게임에 빠지지 않았다. 우리는 벤치에서 열심히 팀을 응원했다. 게임에 뛰지 못해도 행복했다. 곧 야구가 우리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야구를 잘하기 위해 캐치볼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겉으론 여전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점점 야구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나는 취해서 흥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잤냐?”
흥식이 한참 만에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일하고 있었지. 제주라며?”
나는 잊고 있었던 화가 불쑥 튀어 올랐다.
“그니까, 너도 나, 무시하냐? 기도회가 취소됐으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 줬어야지.”
나는 그에게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나는 찬일 형이 얘기한 줄 알았지.”
“너, 나한테 그러면 안 돼, 인마.”
나는 흥식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바빴어. 정신이 없었다.”
흥식은 몇 년 전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 사실이 그와의 오랜 우정을 흔들고 있었다. 흥식은 여전했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그가 예전만큼 편하지가 않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잘하고 와. 모처럼 쉬고 좋잖아.”
흥식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 싶지만, 돈이 없다. 부자들이 기도회 참석을 안 하니, 먹을 것도 없고 어디 가기도 부담스럽다.”
나는 취기에 그만 솔직하게 말을 하고 말았다. 아차 싶어 원희를 슬쩍 쳐다보았다.
“회비 써,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테니.”
가난했던 흥식은 비트코인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노력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아쉽네. 제수씨, 애들은 잘 있어? 본 지 너무 오래됐네.”
“그럼, 잘 있지. 그래, 석윤아, 나 지금 좀 바빠.”
“보고 싶다, 친구야. 옛날이 좋았다. 캐치볼 하던 거 기억나냐?”
내 물음에 흥식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래, 나중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나, 지금 마감 중이야.”
흥식은 내 주정을 받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원희와 나의 대화도 다시 끊겼다. 정적이 오래 흘렀다. 흥식은 얼마 전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떡집이었는데, 왜 하필 떡집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내가 왜?”
나는 조금 전에 흥식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움찔했다.
“돈이 없어도, 돈이 없다고 왜 흥식이 형에게 그러냐고요. 내가 형한테 뭐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디 가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뭐 같네.”
원희의 음성이 순간, 한 옥타브 높아졌다.
“너한테 뭐라고 한 게 아니고. 흥식이랑 오랜만에 통화가 돼서 그냥 투정부린 거지. 거슬렸다면 미안하다.”
원희는 화를 참느라 씩씩거렸다. 나는 자리가 불편해져서 슬쩍 일어섰다.
“어디 가요? 저랑 한 잔 더 해야죠.”
“아니, 어딜 가긴. 화장실에 가지.”
나는 뜨끔해서 얼버무렸다. 밤은 깊어지고 우리의 어색함도 낮보다 더 깊어지고 있었다.
새삼 야구할 때가,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리워졌다. 어느 날 흥식이 고향 선배인 찬일 형을 데려왔다. 얼마 후에 찬일 형이 경수 형을 데려왔고, 경수 형이 훈이 형을 데려왔다. 캐치볼 멤버는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나와 흥식을 빼고는 모두 직장이 있어서 주말에만 야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수소문해서 사회인 야구팀을 만들었고, 팀원을 소개받고, 소문을 듣고 지인의 지인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솔직히 어떻게 야구팀이 만들어졌는지 나는 잘 모른다.
사회인 야구 초급 리그에 가입하고 막상 야구 게임을 시작하자, 나는 두려워졌다. 타자가 친 공이 내게 오지 않기를 바랐다. 투수가 던지는 공이 꼭 내게로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캐치볼도 야구에도 흥미를 잃었다. 팀원 대부분은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그때, 우리는 그래도 젊었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이십대의 어린 후배들을 영입했다. 우리는 게임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기기 위해 들어온 나이 어린 친구들은 팀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10년을 모두가 버텼다. 그 무렵 기도회가 결성됐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달랐으니 팀이 될 수 없었다. 야구팀은 흐지부지 해체됐고 한때 야구는 못 했지만 케치볼에 열정적이었던 몇몇은 포커 게임을 시작했다. 야구공 대신 카드를 주고받았다.
“옛날이 그립네, 정말.”
“옛날도 아니에요. 얼마나 지났다고.”
원희는 내가 한 말 때문인지 잔뜩 꼬여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단둘이라 쉽게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나는 그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투수 앞 3루타 기억나? 투수 앞 땅볼을 운 좋게 잡아서 1루에 던지면 공을 뒤로 빠뜨려, 다시 주워서 2루로 던지면 그걸 또 빠뜨려서 좌익수 앞까지 굴러가, 상대 팀도 우리가 불쌍했는지 홈까지는 들어오지 않더라. 농구도 아니고 30대 0으로 지는 날도 있고, 우리, 야구 진짜 못 했는데.”
나는 말하면서 키득거렸다. 하지만 원희는 웃지 않았다.
“형은 그게 웃겨요? 형은 그때 그렇게 져도 아무렇지 않았죠? 그러니까 형,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에요.”
순간.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형 같은 멤버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형 같은 사람이야 그냥 가끔 놀러 나왔지만, 우리는 이기고 싶었다고요.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실력도 점점 나아졌고요. 해체할 무렵에는 이기는 날도 꽤 됐으니까. 물론 실력이 늘었기 때문에 야구팀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달랐어요.”
그가 말하는 우리 중에 나는 없었는데, 내가 말하는 우리에는 나도, 원희도, 기도회에 오지 않은 멤버도 모두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올라오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찬일, 경수 형은 후배들에게 진짜 잘해 줬어요. 가끔 용돈도 주고, 밥이랑 술도 사주고. 훈 형은 야구 장비 같은 것도 많이 나누어 주고요. 야구도 잘했지만 후배들 게임에 뛰라고 뒤로 빠져 주기도 하고. 흥식이 형은 물질적으로는 좀 그랬지만, 항상 후배들 마음으로 따뜻하게 챙겨 주고요.”
“어째, 나는 그런 선배가 아니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형이 어떤 선배인지는 형이 더 잘 알죠. 안 그래요? 형은 글 쓴다고 항상 좀 삐딱했잖아요. 우리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일반적인?”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더 얘기해 보았자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곧바로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옹졸해 보일까 봐 나는 잠자코 더 앉아 있었다. 15년여가 지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데뷔도 하고 책도 두 권 냈지만, 스스로 작가라기에 무리가 있었다. 나는 그간 변변한 직업도 없이 겨우겨우 힘들게 살아 왔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글 쓴다고 티내든?”
원희의 말을 머릿속으로만 되씹다가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뱉었다.
“형은 흥식이 형하고는 달랐죠.”
“걔가 무슨 글을 썼어? 나하고 같아?”
“썼죠. 형은 그것도 몰라요?”
단호한 원희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모르는 일이었고, 기억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니까, 내가 잘 아니까 묻는 거 아냐.”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원하지 않았던,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썼던 상황으로 나는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흥식이 형, 잘 안다면서요? 그 형은 형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 안 해요.”
“데뷔도 안 했는데, 걔가 무슨 글을 썼다고 자꾸 나하고 떡집 하는 애하고 비교하고 그래?”
“비교라고요? 데뷔요? 그게 중요해요? 글 쓰는 사람이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요? 나는 잘은 모르지만, 형은 정말, 그게 잘못됐어. 그리고 형이 떡집을 알아요? 떡집 하려면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준비해야 해요.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데, 형처럼 게으른 사람이 알기나 알아?”
원희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말했다. 눈을 부라리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너 말이 짧다? 형한테 그래도 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그가 좀 겁이 나서 점잖게 말했다.
“나도 꼰대지만 진짜, 형은 안 되겠네. 저한테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원희가 벌떡 일어섰다. 세워 놓았던 빈 소주병이 좌르르 쓰러지며 데구루루 요란하게 굴렀다. 나는 움찔했다. 화가 금세 가라앉았다.
“그렇다는 거지, 왜 그래.”
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진짜, 다른 형들 아니었으면 형은 나한테 벌써 맞았어요.”
듣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리였다. 쉰두 살이 되어서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신선했다. 갑자기 야구 경기를 할 때가 떠올랐다. 공이 몸 쪽으로 약간만 향해도 나는 놀란 나머지 타석에서 벗어났다. 나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서 있다가 공이 포수 글러브에 들어간 뒤에 힘없이 스윙하곤 했다. 언제나 도망갈, 타석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안타를 칠 수가 없었다. 원희의 말이 꼭 내게 날아오는 강속구처럼 느껴졌다.
“그만 하자, 잘 알았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아오는 공을 치려면 공에 달려들어야 하는데 언제나 난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했다.
“형, 삐쳤어요? 술 먹고 하는 소리에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원래 이런 데 와서 이런저런, 기분 나쁜 얘기도 하고, 풀고 그런 거지. 그러지 말고 이거만 먹고 자요.”
원희가 남은, 쓰러지지 않고 유일하게 서 있는 소주 한 병을 가리켰다.
“어차피 너 혼자 마시잖아. 혼자 먹고 자.”
“애처럼 왜 그래요, 정말. 화 풀고, 바람도 좀 쐬어요.”
원희가 나를 밀며 발코니로 향했다. 완력이 너무 세서 어찌해 볼 도리 없이 나는 발코니로 떠밀렸다. 원희가 담배를 빼 물었다.
“아니, 그런데 지금 몇 시야? 얘들아, 이제 들어가 자.”
원희가 주차장에서 가슴 트리핑, 컨트롤, 패스 같은 연습을 하고 있던 십여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원희를 말렸다. 아이들은 하던 연습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원희도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애들 억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머쓱해졌다.
“오전, 오후 정식 연습 외에 원하는 아이들만 하는 거래요. 아까 형 잘 때 나가서 빵이랑 우유랑 과자랑 이런 것들 좀 잔뜩 사다 줬거든요. 아이들이 기특해서요. 쟤들 나이에 뭘 알까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견한 거야. 쟤네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지 패스나 가슴 트리핑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 힘들고, 싫은 것도 열심히 노력하는 거지. 어린데 우리보다 나은 거지.”
원희가 하는 말이 나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엄청나게 지난 것 같았는데 초저녁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너희는 잘들 될 거야.”
원희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피우던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끄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를 집어 휴지통에 버렸다.



4.


“형, 그런데 이혼은 왜 했어요?”
원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나는 원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정확히 이유를 말하기가 어려웠다. 전 아내와는 6년을 함께 살았다. 사는 동안 많이 싸웠고 서로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서로에게 좋은 판단이라고 여겼다.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 형수님이 굉장히 인성 좋은 분이셔서, 이혼했다고 했을 때 놀랐다고 흥식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뭐냐, 이혼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거야? 나도 모르는 이유를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거냐?”
나는 원희의 말보다도 흥식과 원희가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에 발끈했다.
“한 번도 직접 얘기한 적이 없어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뭘, 화까지 내고 그래요.”
“설사 무슨 이유가 있다 해도, 내가 왜 너희들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나도 정말 몰랐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사는 게 팍팍해서 그랬을 것이다. 원하는 삶이 서로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도움이 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혼은 아내가 먼저 요구했고 나는 응한 것뿐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거 알아요? 형하고 나하고만 빼고, 가끔 네 명이 따로 보는 거?”
전혀 내가 알지 못하던 사실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만 빼고 모두 골프 치잖아요. 좀 됐지.”
골프를 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줄은 몰랐다. 이번 기도회가 무산된 것이 그 이유 때문인 것만 같아서 나는 불쑥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변하냐, 재수 없게.”
“변해야지요. 그게 정상이죠. 봐요, 우리만 그대로잖아요. 다들 한가락들 하는데.”
아무리 내가 별 볼일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자기와 같은 취급을 하는 데 또 기분이 언짢아졌다. 갑자기 원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비교를 그만두었다. 무슨 유통을 한다고 했던 것도 같고, 장사한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어쨌든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흥식이 이놈은 문창과를 나와서 무슨 골프야? 글은 안 쓰고.”
내가 욕할 수 있는 사람이 흥식밖에 없어서 한 거였는데 또 원희의 화를 돋우었다. 우리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서로에게 화에 화를 더하고만 있었다.
“문창과 나온 거하고 골프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형,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 콤플렉스라고요. 나는 흥식이 형 보기 좋더만, 플렉스.”
원희가 중지, 약지는 접고 엄지, 검지, 새끼손가락을 편 채 양손을 내게 흔들었다.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나를 약 올리는 게 분명했다.
“원희, 너, 뭐라는 거야? 네가 흥식하고 나하고 어떤 관계인지 알아?”
나는 결국 원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나도 술에 취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뭐라 하긴요, 형도 정확히 알아들었잖아요. 형은 콤플렉스고 흥식 형은 플렉스라고요. 그리고 형이 한 말이 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원희가 눈을 부라리며 맞받았다. 커커컥, 느닷없이 원희가 웃었다. 나는 그의 웃음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아휴, 진짜 내가 말을 말아야지.”
원희가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주에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나는 어디에라도 화풀이해야만 할 것 같았다. 흥식에게 전화를 걸려고 보니 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 바람도 쐬고 원희랑 저녁이라도 먹어. 올라와서 보자.’
흥식은 문자와 함께 20만 원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자 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참자. 잠이나 자자, 내일 일찍 올라가야지, 정말.”
나는 마치 원희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술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길고 피곤했다. 원희가 보란 듯이 나는 거실을 깨끗이 치웠다. 내일 말끔해진 거실을 보고 그가 오늘 밤 내게 저지른 만행을 복기해 후회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더불어 이제 포커 모임 기도회에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야구 경기를 하는 꿈을 꾸었다. 확 트인 야구장, 외야 초록 잔디 위에 나는 서 있었다. 날아오는 공을 잡으려고 뛸 때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뒤로 공이 펜스까지 굴러갔다. 사람들이 얼른 공을 집어 던지라며 성화였다. 엄청나게 큰 타구가 머리 위로 날아가 펜스 너머로 사라졌다. 야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내게 날아왔다. 놓친 공을 얼른 집어 던지라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다그쳤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천천히 걸을 수는 있었지만 뛰려고 하며 다리가 땅에 붙어버렸다. 그냥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보니 펜스에 문이 하나 있었다. 슬쩍 문을 밀어 보니 깜깜한 암흑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원희가 부르고 있었다. 놀라서 눈을 번쩍 떴더니, 눈앞에 원희가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형님, 놀랐어요? 깨워서 죄송해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깜깜했고 열어 놓은 방문, 거실 쪽이 환했다.
“형님, 커튼 좀 걷을까요?”
내가 대답하기 전에 원희가 커튼을 활짝 걷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형님, 잘 주무셨어요?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처음에 거실에서 혼자 술 마시던 건 생각이 나는데, 형하고도 꽤 했죠? 어제 소주 열 병 사왔는데 다 먹었나 봐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취했어. 나한테 엄청 지랄하고.”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가요? 어휴, 죄송해요, 형님. 제가 술 마시면 더 괄괄해지는 면이 있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마.”
내가 말하자 그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형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올라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아침에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좀 다쳤다네요.”
“무슨 아르바이트?”
“저 카페 하잖아요.”
“아 그렇지. 지금 가려고? 해장이라도 하고 가지.”
나는 원희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예전에 들었을 텐데 기억이 없었다.
“아니에요, 지금 나가려고요. 형님, 심심할 텐데, 먼저 가서 죄송해요.”
“아니야, 나도 올라가야지. 혼자서 여기서 뭐 해.”
“그러지 말고 좀 쉬세요. 글 쓰느라 통 못 쉬었다면서요.”
“내가 그런 얘기도 했어? 기억 하나도 안 난다며.”
“어제 그랬다는 것 아니고요. 평소에 항상 그러시잖아요. 피곤하다고. 어쨌든 형, 잘 쉬다 올라가세요.”
원희는 발코니에 나가 보더니, 택시가 도착했다며 서둘러 모텔 방을 나섰다. 나는 문밖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나는 혼자 감귤모텔에 남았다.
창밖에서 아이들의 목소리,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발코니로 나갔다. 원희가 택시를 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떠나는 택시를 향해 나도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도 공을 멈추고 원희가 탄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석윤아, 어떡하냐. 어떡해.”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희윤이가 무슨 일을 저질러서 잡혀 있다는데, 울면서 전화가 왔다. 오천만 원이 필요하대. 내가 무슨 돈이 있어. 혹시 네가 좀, 알아봐 줄 수 있냐? 어떡하냐, 정말.”
어머니는 엄청 급절했고, 나는 그만 맥이 풀리면서 안도했다.
“엄마, 그거 사기예요. 보이스피싱이라고요.”
어머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사고를 당했다는 동생 걱정뿐이었다.
“엄마, 옆에 아버지 계세요? 좀 바꿔 봐요. 그거 사기라니까요.”
“사기? 아녀, 분명히 희윤이가 울면서 그랬다니까.”
“그 사람 희윤이 아니에요. 엄마, 아버지 좀 바꿔 보세요.”
“너희 아버지, 그 사람들이랑 통화하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통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너한테 한 거야.”
아버지가 그들과 나누는 통화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평소에 남들에게 피해 주니까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잔소리했던 게 떠올랐다. ‘희윤아 울지 말고 얘기해.’ 아버지가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나도 다급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그들이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사이에 아버지와 그들의 전화가 끊겼다. 부모님은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동생이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때서야 나도 마음을 놓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축구 연습에 열심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흥식이 내게 부쳐 주었던 20만 원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한 아이가 발코니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좀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들이 주고받던 공을 멈추고 일제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멋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그저 공을 주고받는 게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야구가 아니었다.
“너희들은 모두 잘 될 거야.”
작은 소리로, 아이들에게는 가 닿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백가흠
작가소개 / 백가흠

197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 『힌트는 도련님』, 『四十四』, 『같았다』, 장편소설 『나프탈렌』, 『향』, 『마담뺑덕』, 짧은 소설집 『그리스는 달랐다』 등이 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장웹진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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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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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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