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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을 넘는 법

  • 작성일 2024-06-01
  • 조회수 461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정답을 찾으려 하는 과학자들의 시도를 그리고 있음에도, 예외적으로 아멜리아 브랜든이 연인인 에드먼즈를 향해 항로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은 예외적이다. 아멜리아가 사랑에 대한 직관을 주장하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조셉과 아멜리아는 밀러 행성에서 뼈아픈 실수를 했고 지구 시간으로 20여 년을 낭비했지만, 아멜리아는 그 예외적인 시간적 흐름의 경험을 통해서 당장의 물리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인과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물론 〈인터스텔라〉의 주제의식이 물리 법칙의 객관성보다는 마음의 주관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주관성에는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고차원의 수학적 방정식과 같은 실체적인 물리 법칙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것에 가깝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처럼, 먼 거리를 뛰어넘어서 한 입자의 작용이 다른 입자에게도 즉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가 명확한 거시세계의 인과관계를 뛰어넘어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양자역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핵심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특수한 감정이 아득히 먼 우주의 거리를 뛰어넘어서 어떠한 확답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아멜리아의 직관처럼 말이다.1)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라면 이를 우연의 일치가 마치 놀라운 정신적 연결성에 의해 발생하는 ‘동시성(simultaneity)’의 개념으로 설명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사건들은 시간이라는 매개를 바탕으로 서로에게 상호 매개적(intermedial)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머피에게 신호를 보낸 ‘유령’이 블랙홀에 진입한 미래의 조셉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우리가 선형적인 시간관에 의해서 편의적으로 분리하는 과거와 미래라는 각각의 시간성이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시간의 상대성에 의하여 상호 매개적으로 서로를 결정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조셉이 거의 지구 시간으로 90년의 세월이 흘러 머피와 재회하는 시간의 상대성을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재회의 장면은 단순히 물리학적으로 상대성 원리를 재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시공간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강한 감정적인 얽힘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간다면, 우리는 3차원의 세계를 물질적인 부피로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3차원적 공간에 위치하는 존재 역시 텅 빈 대상이 될 것이다. 시간이란 그 부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적 사건과 그에 대한 관측을 통해서 비로소 3차원 세계의 존재들에 의미의 응집성을 준다. 마치 인간의 형상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형상이 텅 빈 공간에서 허물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력처럼 말이다. 시간은 3차원적 공간을 4차원의 시공간(spacetime)으로 확장하며, 시공간이야말로 우리가 단순한 인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에 논리적인 틀과 구조를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 

   물론 우리는 같은 중력장에 놓인 지구 환경에서 〈인터스텔라〉의 영화적 연출과 같은 극적인 시간의 상대성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간이 시공간에 대한 의미화의 조직 논리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시간의 상대성의 개념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물질적 시공간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심리적인 시공간까지 적용된다. 시간에 대한 주관적 경험과 인식상의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어쩔 도리 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의 상대적 질량을 체감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실시간의 소셜 커뮤니티에 접속해 있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쉼 없이 가속한다. 그 안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정보 형태로 취득하지만 ‘실시간’이라는 인식 역시 허상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사후적으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우리는 일본 설화 속 주인공 우라사마 타로(浦島太郎)처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긴 시간의 흐름을 일시에 경험하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응집성을 잃고 3차원 세계와 우리의 삶으로부터 휘발되어 버린다. 

   시간을 다루는 시도로서 소설을 포함하는 이야기 장르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아주 느리게 반영하는 의미의 조직화다. 마치 요술램프 속에 램프의 요정 지니를 가두어 두듯, 어떻게든 소설이 전개하는 세계 이해 속에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담아 두려는 시도 말이다. 그렇기에 소설은 정보가 아니라 서사(narrative)라는 구조를 통해서 조직되며, 그 의미는 전체 서사의 구조를 가급적 풍성한 의미 체계로 확장하여 받아들이게 될 때 차별화된다. 서사는 온갖 자질구레한 설정과 무의미하게 배치되어 있는 파편적인 요소들을 시간이라는 축으로 연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를 4차원적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 편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경험하는 세계의 응집성보다 강력한 것은, 실시간으로 그 모든 응집성을 용해하는 현실 세계의 확장성이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 장르가 우리 시대의 뻔한 시대착오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주관적인 세계가 너무나도 빠른 시간의 가속 속에서 질량을 잃어 가며 부피만을 팽창시키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정확히 현실의 물질세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가속하는 사회적 시간에 허덕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하는 그 누구도 돌볼 수 없는 파편화된 사회적 현실에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멈춘다는 것은 마치 열역학 제2법칙을 역전한다는 발상처럼 무모해 보인다. 

  


   세계의 끝을 넘어가는 소설 


   우다영의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깊은 밤을 원한다』(문학과지성사, 2023)는 최근 경향에서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하여 말하는 소설들이 모여 있다. 이 소설집의 시도가 대범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은 우리 시대의 냉소와 비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예정된 세계의 끝을 향해 가는 무기력함을 전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탐문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여러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은 우리 시대의 ‘세계-없음(worldlessnees)’이다. 반대로 이 소설집은 세계가 우리에게 응집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시대에 다른 해답을 찾으려는 탐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계인식을 애써 종합하려 하지 않는다. 삶은 이해의 범주라기보다는 수많은 정보의 병렬이며, 대책 없이 확장되어 가는 세계의 부피에 비하여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실감이야말로 중요해진다. 

   대표적으로 소설 「긴 예지」는 세계의 끝에 대하여 종말론이나 묵시록, 재난 서사나 파국의 상상력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소설은 종말이 닥쳐오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그 결정된 미래를 회피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모이게 된 ‘예지자’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미래를 이해하고 그것에 접근하는 소설적 방식이다. 예지자들은 점점 더 강력하게 대두되는 미래에 대한 예지가 수적으로 증가해 간다는 사실, 더 많은 예지자의 예지가 공통적인 멸망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래에 더 강한 힘을 가진 사건이 존재할 때, 그 특정 사건을 적중하기 위해 쏘아진 화살처럼 뻗어 나가는 예지력은 그와 비례하게 상승한다는 겁니다. 만약 블랙홀처럼 강력한 미래가 우리 앞에 있다면, 그게 정말 세상의 종말이라면 예지자들이 넘쳐나는 현상이 설명되겠죠.”(161쪽) 

   미래가 예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지가 미래를 결정하는 이러한 인식은 흥미롭지만, 반대로 이를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에 대한 극복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당장의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다 보면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낙관론적 미래주의를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예지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구체화되는 계산식이며, 그렇게 계산된 데이터들의 종합이 결과적으로 미래를 반영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해석적 전망이 아니라, 사실상 현재의 우리 현실이 발생시키는 여러 파생적 예측들로 이루어진 미래학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예지가 곧 미래가 된다는 논리는 마치 예지자의 존재를 양자 컴퓨터처럼 활용해서 우리 세계의 주어진 미래를 양자역학적으로 계산하는 과정에 가깝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는 이제 모두가 알 것이다. 서로 다른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양자 중첩의 상태가 관찰자의 관측과 함께 하나의 사실로 결정되듯이,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의 끝은 아주 자연스럽게 수많은 우연의 반복 속에서 중첩되어 있던 미래의 가능성이 차츰 파괴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미래만 남게 된다. 이는 사실 우리 우주에 정해진 결말을 앞당겨 인간의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 우주가 질량을 잃어 가며 차갑게 얼어붙는 빅 프리즈(Big Freeze)처럼, 세계는 측정할 수 없이 팽창한 나머지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질량의 응집성을 잃어 가고 있다. 예지가 지속적인 중첩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비로소 관측되어 결정될 것이다. “모든 것은 우주의 먼지일 뿐이었다. 인간의 성장과 죽음은 육신과 정신이라는 놀라운 확률의 질서를 잠시 유지하다가 대부분 철과 인으로 분해되어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순환계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죽지 않고 또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다.”(181쪽) 

   마치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수명과 그 멸망의 시기를 계산하듯이, 예지자들의 예지는 우리 세계가 향해 가는 끝에 대한 계산이다. 여기에는 해석이나 전망이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의 구성원인 각각의 인간들 역시 서로를 향한 인력(引力)을 잃어 가고 있으며, 국가와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접근 방법과 그 구성적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세계의 끝을 계산하는 예지자들이 단순한 계산기 역할로부터 벗어나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는 다른 미래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양자컴퓨터를 통해서 이전에는 없던 방정식을 찾아 계산을 확장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따라서 예지자들은 이제 다양한 예지를 찾아내고 중첩시키려 한다. 이를 위해서 ‘레마’라고 이름 붙인 인공지능이 탄생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를 중첩시키며 시뮬레이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우주의 끝을 이론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빅 프리즈는 그중 하나의 가설이며 엔트로피의 끝을 상징한다. 빅 립(Big Rip)이나 빅 크런치(Big Crunch)와 같은 대표적인 가설들도 존재한다. 빅 립은 결과적으로 우주의 끝과 함께 모든 입자가 찢겨져 나가게 될 것이며, 입자들은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빅 크런치는 빅 바운스(Big Bounce)라고도 불리는데, 팽창했던 우주가 다시 튕겨지듯이 한 점으로 모이게 되고 모든 질량이 합쳐서 다시금 거대한 압축과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측한다. 빅 바운스를 그나마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과정은 새로운 빅뱅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우주는 다시 태어났다가 소멸하길 반복하는 시나리오로 이어질 것이다. 

   ‘레마’를 통한 미래에 대한 예지의 중첩만으로는 멸망을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효주는미래뿐만 아니라 과거 인류의 삶까지 시뮬레이션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마치 빅 바운스처럼 세계의 팽창 속에서 열적 사멸로 접어드는 세계의 끝을 다시 붙잡아 끌어당기기 위한 강한 중력을 발생시키기 위한 행위로 읽힌다. 레마가 미래에 대한 예지와 중첩하려는 과정 중에, 효주는 과거에 대한 경험적 시뮬레이션을 무수히 반복하게 된다. 미래와 과거를 양쪽으로 함께 펼쳐서 읽어 나가는 무한한 우주에의 독서 과정이 ‘긴 예지’라는 형태의 새로운 방정식의 계산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긴 예지’라는 제목에 함축된 것처럼 효주가 수없이 태어나서 죽기를 반복하면서 경험하는 모든 인간 삶에 대한 이해는 쉽게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의 질량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이 시간의 경험이 반복될수록 하나의 삶에 응집되어 있는 시간은 빠르게 휘발되고, 다시 다음 삶이 펼쳐진다. 인류의 모든 과거의 삶을 읽어낸다는 것은 사실 계산할 수 없이 많은 모든 것의 중첩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란 곧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일자(一者)에 가깝다. 우리는 그것을 결국 ‘신’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다. 효주는 과거에 대한 반복적인 시뮬레이션 속에서 형성된 ‘신’이 자신을 통해 잉태되어 알로부터 깨어날 것임을 알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도래한 미래의 ‘신’이 이 모든 상황을 안배했으며, 동시에 과거를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시간의 상대성조차 초월하여 모든 시간이 한 점에 모이는 통합적 순간이 있다. 그것은 결국 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세계의 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제 비로소 효주는 자신이 예지자로서 수행하게 된 그 모든 예지와 무수히 반복되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신을 돌보고 신은 인간으로부터 자애를 터득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었다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었다. 신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깃들었다. 신은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암시이며, 기나긴 예지이며, 곧 세상이었다. 효주는 마침내 자신이 모든 삶을 떠돌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시선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207쪽) 



   이 지점에서 「긴 예지」는 세계의 끝에서 왜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이 탄생하는지를 설명하는 메타소설이 된다. 세계는 점차 질량을 잃으며 끝을 향해 가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시선에 의해서만 새로운 질량을, 중력을, 응집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세계가 점점 더 압축되며 평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긴 시간을 매개로 관찰의 시선을 확보하는 것으로, 그것이 곧 스스로 잉태하여 새로운 세계를 다시 탄생시킬 ‘신’이며, 곧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소설은 개념적으로만 가능한 네겐트로피 현상이다. 물론 실제 우리 삶의 시간은 엔트로피를 거스를 수 없으며 무질서를 향해, 무의미를 향해 간다. 물리 법칙을 따르는 우리의 현실은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어떠한 물질적 수단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의 이야기 형식은 수없이 많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그 자체로 빅뱅처럼 세계를 다시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 또한 소설이 우리 시대가 모르는 미지의 미래를 중첩시키는 방식이다. 소설은 여전히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가 위치한 세계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수많은 삶에 대한 관측 속에서 시간적 연결을 통해 의미를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신과학으로서의 SF


   SF는 과학적 이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적•소설적 시간관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엇보다도 물질세계와 인간의 정신세계를 유추적으로 이해할 경우,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는 우주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그 이해방식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기존의 정신분석과 심리학에 제한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에 대한 과학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러한 정신과학에 기반한 SF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확해질 것이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SF에서는 기술적 매개물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영역을 사유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이론과학의 사변적 성격이 요구된다. 물론 사변적 성격이 엄밀함으로부터 멀어져 유사과학적인 차원으로 압축된다면 그 또한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이러한 시도가 여러모로 흥미로운 SF의 범주를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깊은 밤을 원한다』를 중심으로 정신과학의 SF라 부를 만한 우다영 소설의 특징은 물질세계에 대한 물리학적인 접근과 인간 정신세계의 정신과학적 접근을 교차시키거나 유추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SF가 제안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대한 관성적인 이해를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변형과 확장의 사유가 유기물적 신체와 기계 보철물에 의한 확장, 더 나아가 특이점에 이른 인공지능의 발전, 마인드 마이닝을 통한 인간 정신의 데이터베이스화 등으로 소재화되어 왔다. 반면 정신과학의 SF는 기존 SF의 재현 방식을 비틀어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인간성에 대한 탈각과 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대표적으로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에서는 ‘각성자’라는 특수한 존재들이 세계 도처에서 등장하게 된다.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이 자신의 전생(前生)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거 인물들의 기억을 동시에 각성하게 됨으로써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확장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경우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전생의 삶을 종합적으로 환기할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각성자들은 현생의 정체성과 그 삶에 더 이상 과거처럼 충실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인간 정신의 무의식을 모두 의식화하는 것과 같다. 마치 독립적인 개별 서버가 아니라 거대한 클라우드 서버상의 빅 데이터를 확보하게 된 컴퓨터처럼, 인간의 정신이 하나의 인격체로 환원될 수 없게끔 확장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많은 전생의 삶에서도 반복적으로 수행해 온 특정한 삶의 패턴에 영향 받으며 여전히 그것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정신과학이란 인간 존재가 더 이상 유기물로서의 전통적인 생명의 개념,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학적인 정체성의 개념에 환원되지 않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마치 인류가 우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됨으로써, 지구와 그 내부의 행성생태계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거시적 시선을 확보하게 되듯이 말이다. 이것은 과거를 이해하는 것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시간의 바깥에서 관측하는 것과 같은 시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시선은 「긴 예지」에서 언급된 시선과도 동일하다. “나는 나를 나로 보면 타자로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나를 입체로 만들고 움직이는 시뮬레이션으로 만들며, 세상 속에 반짝 일렁이는 파노라마로 만드는 엄청난 시선이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거의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생의 모든 시공간을 볼 수 있었다.”(114-115쪽) 

   이러한 시선은 단순한 유체이탈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 타자의 삶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신적인 시선, 즉 소설의 시선이기도 하다. 각성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관측자이며 미래를 향해 뻗어 나가는 여러 가능성을 스스로 반복된 패턴을 통해 계산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객관적 인식에 도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물러나거나 그 모든 삶의 의미에 대하여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양쪽으로 모두 흘러가며 동시에 인식된다. 과거를 보는 시선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예지가 함께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은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의 삶을 거듭 경험하고 이해함으로써 세계를 회복시키는 힘이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수용하는 것. 이는 무의식을 우리 의식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주체의 열림이다.(전통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르는) 주체라는 이름으로, 혹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고집하거나 유지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삶의 모습이나 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수용하고, 또한 모든 시간적 흐름을 직시함으로써 시선은 시간을 통한 세계에의 이해와 그 응집력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삶을 4차원으로 펼쳐서 관측하는 시선이며, 세계를 자신만의 소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다. 여기에 바로 시간의 실존성이 있다. “당시 저는 스스로를 특정할 자아도, 세계를 설명할 언어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다만 한 가지, 시간의 개념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의 유일한 직관적 체험이었습니다. 시간은 분명히 존재하는 채로 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그러나 누군가는 더 깊은 밤을 원한다」, 273쪽) 우리가 점차 세계를 잃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라는 실존성이 다시 우리의 삶을 빅뱅처럼 재발명하는 질량의 원점이 되어 줄 것이다. 


1) 예외적이지만 소수의 이론가들은 인간의 의식과 감정이 양자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로저 펜로즈와 스튜어트 해머로프의 “Orecho-Or” 이론은 뇌의 미세소관(microtubule)이 양자적 효과를 이용해 의식을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증명하기 어려운 비과학적인 제안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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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 관리자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 관리자
  • 2024-06-01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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