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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크로키」외 6편

  • 작성일 2023-09-22
  • 조회수 864

오후의 크로키

전영관


골목은 길고양이 울음처럼 여러 갈래로 번식했다

모노레일로 도는 듯한 산책에서 돌아올 때는

나갈 때의 감정을 밟고 와야 한다


폭발하는 청춘이었을 텐데 

세상이 다 쓴 부탄가스 같이 시시해졌는지  

노인들은 장기판에 몰려 있다

이젤에 야쿠르트 홍보문구를 얹고 있는 

여자는 미대 졸업생이었을까 

예술에서 상술로 전공이 바뀐 

이젤은 당혹감에 시달릴 것이다  


어깨 넓은 청년도 아니고

힙 업(hip up)한 아가씨도 아닌

할머니가 체육관 전단지를 내밀었다

여기 안 오면 나처럼 낡는다는 경고인지

근육 같은 주름을 곁들이며 내밀었다

태워 준다면 

노년의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히치하이킹인 듯 

지나는 청춘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스콘(scone) 부스러기를 터느라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걱정거리가 쏟아진다면 

그 부스러기만큼 가벼웠으면 싶었다 

양지받이인 카페 덕분이겠지만

살리려고 애썼다가 포기했던 

베고니아 이파리가 싱그러웠다 

햇빛을 받을수록 꽃도 많이 핀다더니 

기분이 가라앉을 때 한나절 창가에 앉아 있으면 

힘을 얻을 것 같았다 

베고니아처럼 햇빛만 즐기고 싶었는데

저녁으로 가는 오후가 노을처럼 녹슬어 버렸다






피아노 조율사   



차별이라는 높낮이를 조절한 후에 

순서에 상처받은 사람을 살펴보겠지


하나의 음을 정하면 이전 것은 사라진다

늑골이 어긋나듯 아픈 사랑도 

새 사람을 만나면 지워지는 것이다


애인의 허밍이 음계가 틀려도 웃어 주는 마음처럼 

어긋남을 알아야 조율할 수 있는 것


피아노 교습에 시달리다가

쉼표 뒤에 숨어 있고 싶은 아이를 찾아

가만가만 어르고 다독이는 사람

건반만 누르고 달아나는 아이처럼 이탈하는 음을 

데려와 제자리에 앉히는 사람


가라앉은 마음에는 올라오라고 #을

화가 치솟아 누군가 다치게 할 것 같을 때는 

침착하라고 ♭를 붙여 주는 감정 조정인인데 

조율사 산업기사라는 자격증이 붙었다 

조화보다 규격을 믿는 세상이다


차별받고 억울하고 울렁거리는

생을 조율할 수 있다면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투명우산  



빗소리는 오랜 메일함


선홈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잊어버렸던 곳으로 올라가는 느낌이다

머리맡을 기어다닌다

도망가고 싶은 곳이 아쉬울 때면

엘리베이터가 수평으로 멀리 달리는 느낌이었다

 

발서슴하다가 돌아온 탕아 같은

폭우는 무거운 소포

소나기는 전보라고 생각했다 

들이닥쳐 감정을 떠안기니까 둘 다 이별의 방식이다


도종환의 접시꽃은 병약했는데

베란다의 접시꽃이 건강해서 낯설다

화분에 갇혀 있어서 폭우에 익사할 것이다


거미줄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거미처럼

거미처럼 기어다니는 빗소리들 속에서

불빛 어룽거리는 창밖을 바라만 보았다

투명우산을 쓴 것 같다


빗소리는 몸을 적시지 않고 기어다니다가 

심장을 누른다

알록달록한 우산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니까

비는 속성은 물이라기보다 색깔이다

메일함의 뒷줄들을 들추게 한다


맥주에서 좌회전

파스타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듯

폭우 속 자동차들이 고래처럼 무리 짓는다

붉은 후미등이 두통같이 명멸한다






무한회전 



그는 방(房)에 붙어서 먹고 산다 

또 다른 방(榜)은 매질이란 뜻이다

쪽방에 눌리고 동거에 싫증 난 우리들이라서

발 뻗을 권리를 그에게 찾는 것이다

예비 무속인처럼 우리들이 들어가 

냄새 맡고 만져 보고 응시하면서

붙박이 가구들이 누설할 불운 따위를 확인해야 한다 

그가 배달음식 스티커처럼 덕담을 붙이는 동안 

월세와 출퇴근의 손익분기점을 가늠해야 한다

 

고독은 일인가구의 관리비 같은 것


방을 잡는다는 건 다른 방을 잡아먹는 일 

방에서 방이 생기는 

무한회전에 부동산중개인 그가 터를 잡았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셈이다

 

해고당한 천사인 듯이 그는

후미진 집을 한적하다고

비좁은 거실을 청소하기 편하다고

역까지 30분인데 5분이면 충분하다면서 

에덴 입장권을 남발한다


나뭇가지를 가볍게 옮겨 다니는 새가 부럽다면

이사에 지쳤다는 증거다 

부동산중개인 그가 달콤한 제안을 할 것이다

방을 구하려면 그의 능란한 포장술을 즐겨야 한다

고객에게 눈총받아도 구겨지지 않는 표정의 그도 

귀가할 때는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정기검사 



차는 휘발유를 폭발시킨 엔진의 힘으로 

에어컨 찬바람을 만든다

시처럼 비효율적으로

피를 태워 냉기를 채우는 방식이다


주행기간 2년 동안의 내 번민(煩悶)은 

심장을 태웠다는 뜻의 번(煩) 때문인지 

매연으로 취급받았다 

나아질 것 같아서 했던 개조사항은 

불법으로 판정되었다

해 보려는 희망도 규격이 있는 것이다


질병은 아픔에 시달리는 일

절망은 아팠던 곳이 모두 다 기억나는 일이다

엔진부터 변속기까지 차가 전반적으로 고장 났다

갈 때는 차 생각 없이 더위만 불평했는데

돌아오는 내내 불안했다

체력관리 못 해서 비만을 겪어야 하는 양

수리접수 대기시간 같은 일들을 떠올렸다 


냉커피를 저으며 

세상에서 제일 멀리 나는 북극제비갈매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자신을 어쩔 수 없어서 욕망하고 후회하는

자신에게 패하고 낙담하는

인간은 고소공포증을 가진 새 아닐까

언젠가는 내려앉을 자리를 찾을 것이다

 

집에 박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무뚝뚝한 토르소가 되는 것 같다

폐차는 자르고 뜯어내는 방식이다 

사형수가 되었는데 사형방식을 고를 수 있다면

고통은 관심 없고

유족이 보기에 사체가 덜 흉한 것을 고를 것이다






매화 알람  



급속냉동은 기술이지만

해동은 예술이다

사랑을 알아야 할 수 있다


겨울을 겪은 3월의 햇살은 

파란만장 나이 먹은 여자의 귀밑머리처럼

히마리 없고 

보였다가 안 보인다


사람을 잃었는데 

알코올솜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늘함이 날아가듯이 

다 잊었다며

이제 겨울은 갔다고 달력을 보았다 

다음 주를 떠올리기보다는

지난 약속들을 되짚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마지막이란 말을 이별 앞에 붙이기보다는

이번 주에 못 가면

화엄사 매화를 못 본다는 뜻으로 정했다


앞서가는 여자의 목도리 없는 목덜미가 허전해 보여

깃을 올려보는 3월 

칼바람 앞에 포근했던 캐시미어 목도리들이 

간지러워 보인다


벌 받고 돌아선 사춘기인 양 

다 치렀다고 산뜻하게

습설(濕雪)은 잊고 카페 갔다


외로운데 

벗어나고 싶지 않을 때는 시를 썼다






넷플릭스 



왕가위 감독 영화의 독백처럼 

내 곁을 비우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고독할 만큼 멀어지면 싫고

가까워지면 부담스러운 그만큼의 거리를 원한다고

욕심부릴 수는 없었다


연애를 못 한 사람은 목련 숭어리를 보며 그 안의 알몸을 상상할 테지만

애인의 화장을 기다리는 일도 될 것이다

담배 피우는 양조위가 떠올랐다

우는 여자의 등*을 보면서 파도나 생각했다


이 동네는 집배송센터인 양

뚱뚱한 택배상자 같은 연립주택들이 모여 있다

인간이라는 애증의 내용물들을  

봄바람이 4월의 입구로 배달할 것이다

영화만 종일 반복시청해서인지

햇살을 조명 방향이라 느꼈다

나의 유일한 이웃은 층간소음이었다

남겨진 가족들을 어루만져도 놀라지 않도록

죽는다면 손이 따듯한 귀신이 되고 싶었다

혼자 있으면 

벽의 곰팡이가 나를 향해 컹컹 짖었다


편의점 가는 길에 가로수 전지작업을 구경했다

전부가 어딘가로 밀리는 것 같아도 

구름은 우리 운명처럼 

서로 다른 속도로 밀려간다

잘려나간 가지들이 묶인 채로 실려 갔다

바람은 무단횡단하고 있는데

발목이 야윈 여자들이 또각거렸다


천사도 인간의 신호등 아래에서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 화양연화 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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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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