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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 작성일 2017-10-01
  • 조회수 2,258

축제

김은지


술을 마시고 손을 맞잡고
가장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았다


형이 잘못 사는 얘기
그녀가 잘못 떠난 얘기
질투, 못지않은 억울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난


손잡은 사람 이야기에 울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한 명이 뛰어나와
이거 십오일 전에 삼켰던 약이 명치에 걸려 있었나 봐 라며
토해 낸 알약을 보여줬다


우리는 모두 기뻐 일어나
술상을 가운데에 두고 박수를 치며 춤을 추려는데
창가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리로
“이제 그만 잡시다. 좀.”
옆집 사람의 한 마디


잠에서 깼을 때
우리가 꺼낸 알약은 보이지 않았다
꾸벅 꾸벅
약이 놓여 있었던 것 같은 곳을
쓸어 보았다


화순 세제골 처이모네 목탄 보일러, 증기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연통 위로, 줄기줄기 늘어진 시래기 배춧잎, 주름 사이로


기어가는, 하늘 뭉게구름에도 구멍 숭숭 뚫어놓고, 잎맥만 남아 파리하니 속이 다 비치는, 헛웃음에 한 백년은 늙어버린


손금에 고였다가, 솜털을 적셔 갈앉히다가 볼에 스미고, 까무룩 빛나다가 이내 날아가는, 물비린내 덜 여문 가을빛에


보일 보일 끓어오르다, 고롱고롱 맺혔다 풀어지는 담배연기로, 왕겨가루 폴폴 날리는 처이모부 밭은기침에, 공연히 궁싯대는


배추흰나비, 잔털 빽빽한 애벌레 물 마시러 마당에 내려서, 앉은 자리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운주사 臥佛은
누가 파먹었나? 눈알 가득 고이는 새벽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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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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