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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의 황혼, 종말의 미래 - 박민규의 『더블』에 부쳐

  • 작성일 2011-03-03
  • 조회수 1,417

 

[기획특집] 2011년 경향진단·소설

 

포스트의 황혼, 종말의 미래

- 박민규의 『더블』에 부쳐

 

강동호

 

 

갈 길이 멀다는 거 알지?

어디로 말입니까?

 

- 「루디」 -


 

 

 

 

I.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오늘날 비평은 어떻게 문학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사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뜬금없이,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걸 모르는 걸까? 하지만 가야 한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역사철학적 목적론에 대한 탈근대 특유의 냉소와 회의가 가득한 오늘날에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확실히 공허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미래에 대한 목적론적 강박만큼 오늘날 우리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없지만, 역사적 텔로스에 대해 전적으로 함구하는 일만큼 우리에게 심한 낭패감을 안겨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승인과 거부 양자에 내포되어 있는 근본적 불가능성이 근대적 시간성이 지니고 있는 마력과 같은 지배력(수행성)을 이루는 핵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사정은 이렇다. 칸트의 진실이 사드에게 있듯, 문학사에 대한 목적론적 조감도는 겉으로 봤을 때, 명확한 목적의식 아래 작품들을 선별해서 도열시키려는 저 완고한 리얼리즘적 문학사에서 더욱 전경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정은 정반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의 영역에 내재적 자율성이라는 이념형을 부여하려는 초기 아방가르드의 완강한 무정부주의적 태도 역시, 목적론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부정신학의 논리처럼, 철저하게 역사의 목적지에 대한 거부를 바탕으로 그 곳을 하나의 텅 빈 공간으로 실체화한다. 말하자면, 그 텅 빈 공간은 영구 혁명을 추동하는 하나의 내부적 요소로 잠입하고 있다. 오늘날 아방가르드적 영구 혁명과 관련된 이념적 피로감은 저 숨겨진 목적론의 부인할 수 없는 흔적을 폭로하는 시한폭탄과 같다. 혁명의 영구성이라는 무정부주의적 시간 형식은, 연속적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의 점층적 시간관에 대한 저항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권태의 정조는 아방가르드의 미적 혁명 역시 실은 목적지로부터의 끝없는 지연과 연기(延期)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밀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던의 지루한 연기(演技)는 끝이라는 가상적 소실점을 기준으로 영원히 쭉 늘어져 버린 근대적 시간성의 앙상한 몸뚱이를 결정적으로 노출시키는 어떤 위기 상태인 셈이다.

목적론적 역사의 표면적 패배와 심층적 승리를 동시에 공표하는 도플갱어들(모던과 포스트모던)의 저 현기증 나는 이중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불가능성에 더해 우리를 더욱 뼈아프게 만드는 것은, 문학의 미래를 논하는(혹은 논하지 않는) 과정에서 비평에 달라붙는 어떤 악순환적 낭패감의 근원이 다름 아닌 비평이라는 글쓰기가 지니고 있는 근대적 성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현기증 나는 이중주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비평(혹은 비평적 시선)의 존재론적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 우리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시작한 근대의 황혼을 지나, 또 다른 황혼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황혼의 황혼, 그러니까 탈근대의 황혼이라는 시간 말이다. 탈근대의 황혼은 성찰적 근대의 표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성에 지면하게 되는 시간으로, 즉 목적론적 역사의 연쇄적 표상 형태(과거-현재-미래)가 서로 뒤섞여서 더 이상 구별 불가능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우리를 내몬다. 근대와 탈근대가 마치 분리될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리하여 가장 저항하고 싶은 타자가 자기 자신의 실재를 시연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문학/비평) 극단의 낯섦과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II.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최근 소설과 소설 비평에서 빈번하게 목격되는 종말론적 예감이 아닐까. 2000년대 이후의 일부 소설들은, 근대 이후의 이후, 그러니까 포스트의 황혼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금 직면하게 된 존재론적 함정은 저 권태로운 시간에의 종속, 종말에의 종속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말에 대한 천착은 근대에 대한 탈주적 혁명으로서의 탈근대에 대한 강력한 환멸의 징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종말’에 대한 사유가 근대적인 소설의 기본적인 인식 구조를 완전하게 전복하는 거부의 제스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적 시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은폐된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랭크 커머드가 제시한 흥미로운 사례처럼, 인간은 시침의 소리마저도 똑과 딱이라는 시간적 종결 구조로 재편해서 인식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라는 완결된 구조로 개진된 시간의 분절은 소위 근대 소설의 시간관으로 세속화된, 종말론의 흔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은 불가피하게도, 단순히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만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종말론이 결국은 ‘론(論)’으로 수렴되는 한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려는 인간의 모종의 심사에는 근대의 비밀스러운 쾌락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쾌락은 다름 아닌 처음과 끝을 통째로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세계의 끝을 목도하고 있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정당화를 실현한다. 마치 포르트-다 놀이를 주재하는 프로이트의 손자처럼, 저 반복의 주문에는 처음(포르트)과 끝(다)이라는 통시태적 구조 속에서 질서의 부재를 통어하려는 근대적 주체의 강한 수행성이 개입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역사의 종언과 인간의 동물화를 끊임없이 말하는 김훈의 소설들이, 그 데카당적 마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의문을 남기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의 소설들이 때로는 불편함을 안기는 것은 단순히 그 전언들 속에 담겨 있는 마초적·파시즘적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종말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그 전언을 감당해 낼 1인칭의 공간, 더 정확히 말하면 에세이스트적 시선이 마련될 근대적 조건을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종말론적 담론의 근대적 쾌락이 샘솟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의 쾌락은 완전한 세계의 절멸이 아니라, 절멸의 지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훈의 (역사에 대한) 반복은, 어쩌면 저 진정한 의미의 종말에 저항하는 가장 현명하면서도 근대적인 제스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하면서 목적론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와 같은 종말론적 시간의 역설과도 일전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은 그저 근대적 시간관에 대한 완벽한 거부, 혹은 종말에 대한 승인에서 수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의 불쾌한 협업 관계를 목도한 이상, 그저 근대 이후의 새로운 단계의 출현을 거듭 소망하거나 상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오히려 저 소망이 실질적으로 즐기고 있는 근대적 쾌락을 폭로하고, 미래에 대한 사유가 분만하게 될 불가피한 낭패감(아포리아)을 재전유하기 위한 새로운 서사적 시간의 형식을 발견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은 근대적 풍경의 시퀀스에 시간의 균열을 일으키고 새로운 상상의 (불)가능성을 그 내부에서부터 솟아나게 해야 한다.

 

 

III.

 

우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박민규의 『더블』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그것은 그의 소설이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블』로부터 근대와 탈근대가 동시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교착 상태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유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실제로 박민규의 텍스트가 체현하려는 것은 근대를 내파하기 위한 새로운 시간성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놀라운 것은 박민규의 그러한 시도가 표면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음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곧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종말론은 일반적인 종말론과 달리 삶을 단순히 구원(파멸)으로 향하기 위한 기착지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반대다. 박민규가 현상시키고 있는 종말은 종말 이후의 상태, 말하자면 『핑퐁』에서 직면하게 된 역설적 시간성과 관계가 깊다. 즉 세계의 언인스톨 이후에 배태된 시간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싸움의 풍경은 실상 종말이 영원히 유예되고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데, 이 유예된 시공간이 바로 박민규의 텍스트를 기저에서부터 이루는 어떤 근본 형식인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세계가 파국의 기운으로 미만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종말론적 혼돈 상태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리하여 일견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파노라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민규의 소설적 공간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배경음은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와 불안, 그리고 그것에 은밀히 기생하고 있는 주이상스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텍스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선험적 운명으로서의 종말에 대한 인정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권태라는 정조다.

가령 「끝까지 이럴래?」에서 돌출되어 있는 것이 지구 종말 때문에 발생하는 ‘파산자’들의 소란이 아니라, 오히려 무력감, 아니 차라리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애덤스와 창 사이의 부조리한 대화가 직접적으로 상연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형해와 같은 시간성이다. 종말 직전의 인간이 체감하는 혼란에 가까운 빠른 시간과 전혀 달리, 애덤스와 창이 느끼는 시간은 슬로 비디오의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이것은 박민규의 종말론이 일반적인 종말에 대한 욕망과 구별되는 시간적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데리다의 말처럼 속류 종말론은 ‘속도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죽음을 앞둔 노년의 삶이 유년의 삶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박민규의 상대적 시간성은 속도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를 뜻한다. 아니, 그것은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기에 차라리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시간이다. “눈을 떴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키고 난 후에야 애덤스는 시간을 확인한다. 2시 35분. 제기랄, 하는 그의 표정에 실망이 가득하다.”(173쪽) 3시 10분으로 예정되어 있는 지구 종말의 순간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싶은데, 그의 시간은 여전히 그 직전의 시간에서 느리게 정지해 있다. 즉, 애덤스와 창의 삶은 저렇게 종말 직전의 순간에 영원히 정박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점차적으로 권태가 텍스트를 읽는 독자를 압도하고 온몸을 장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박민규의 인상적인 단편 「루디」가 시작되는 지점 역시, 온갖 지루함으로 채색되어 있는 역사 종말 이후의 풍경이다. “다시 이어지던 산과 산…… 나무…… 길……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나무 사이의 도로를 마치 스윕을 하듯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내 차는 낸시가 떠민 스톤만큼이나 느린 속도로 그 위를 달리고 있었다.”(50쪽) 보그먼의 시야에 포착된 저 지루한 풍경은 어느새 자연화되어 버린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알래스카의 광막한 스투디움 속을 보그만이라는 왜소한 (탈)근대적 주체가 마치 컬링의 움직임처럼, 무중력 상태에서 느릿느릿 흘러간다. 아내와 이혼한 후 알래스카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소위 이 시대의 성공한 인간 보그만의 지루한 평범성은, 어느새 괴사해 버린 역사철학적 종말 상태를 환기한다. 그 박제된 풍경의 지루함은 제법 농도가 진해서 풍경 안의 어떠한 특이점도 용해시켜 버릴 정도라서 “느슨한 자세로 선 남자의 손에…… 라이플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그는

 

그저 사냥을 나온 사람이겠거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배경의 산이며 나무…… 알래스카의 분위기에 나는 너무 오래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50쪽)


 

루디가 들고 있는 라이플이 하나의 풍크툼이 되어 관찰자(보그먼)의 삶을 찔러대는 순간에야 비로소, 평온한 알래스카의 분위기가 돌연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주위의 풍경이 놀랍도록 참신하고 거룩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레, 그랬다.”(51쪽) 보그먼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루디의 총성은 보그먼의 지루한 삶을 한순간에 비상사태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다. 그런데 그러한 비상사태는 어떤 예외적 사건에서 발생하는 흥미진진한 일탈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루디와 동행하게 된 보그먼의 여정에서 폭력은 삶의 급격한 일탈을 가져오게 만드는 사건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그의 생을 이루는 권태로운 시간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피가 튀고, 똥과 오줌이 난무하는 자극적인 장면들이 텍스트를 가득 채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 기분이 권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다만 권태의 층위에 있어서 루디의 등장 이전과 이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하거니와, 루디를 만나기 이전의 권태가 지루한 역사의 정지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자로부터 비롯되는 권태, (하이데거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간을 죽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얕은 권태라면, 루디를 만난 이후의 권태는 시간을 죽이는 것으로도 끝낼 수 없는 깊은 권태(tiefe Langweile)에 가까운 것이다.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는 무대 위로 내던져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부조리한 영원의 시간성처럼, 역사의 끝이라는 것이 실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존적 체험의 양식이자 시간의 형식으로서 권태가 그의 텍스트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다.

 

 

IV.

 

박민규의 텍스트가 죽음과 종말의 기운으로 가득하면서도 결국 그 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울러 박민규의 소설에서 승화(sublimation)의 미학보다, 탈승화 혹은 끝없는 아이러니의 효과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불치병을 선고받은 ‘나’의 이야기를 그린 「근처」가 형상화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아이러니의 존재태다.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그것은 방황이며, 찢김이며, 근본적으로 종결이 예정되지 않는 유랑이다.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近處)일 것이다”(45쪽)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특정한 목적지가 아니라 ‘근처’라는 매우 애매한 지대를 텍스트의 욕망은 계속해서 맴돌 뿐이다.

그러므로, 저 종결이 없는 유랑길에 내던져진 자들의 흥미진진한 권태를(권태가 흥미롭다니!)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의 텍스트에 다가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로 중 하나일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목적론에 지배받는 종말론을 새롭게 전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독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끝까지 이럴래?」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환기하는 흥미로운 형상이 발견된다. 그 형상은 한 평자가 지적한 것처럼 “내일은// 인류의 마지막 날이었다”라는 불가능한 문장의 방식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다.1) 비평가의 해석처럼 이 문장은 “‘내일’이라는 ‘종말’은 인류의 모든 ‘이었다’가 중첩된 결과”라는 사실, “다시 말해 지극히 하찮은 하나의 ‘이었다’ 안에도 이미 ‘내일’은 들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해석에 의거한다면, 이 텍스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이질적인 시간이 완전하게 균질화되어 버린 시공간, 비평가의 말로 표현하자면 ‘피로’로 점철된 공간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텍스트에 날인되어 있는 또 하나의 특이한 흔적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그 흔적은 시간성의 역설적 균질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성에서 이탈해 있는 서술자의 시선이다. 피로를 가중시키는 것은 ‘관찰’과 더불어 이 관찰이 은연중에 노출시키는 텍스트의 바깥이라는, 기괴한 서사적 시간성의 구조다. 아울러 텍스트에 새겨져 있는 외부에 대한(혹은 외부로부터의) 인식은, 텍스트의 시간적 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떤 반복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환기시킨다. 「끝까지 이럴래?」 전체를 옥죄고 있는 권태는 바로 이러한 반복의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반복인가? 여기서 우리는 ‘내일은 인류의 마지막 날이었다’라는 박민규의 문장을,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였던 유명한 테제,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무의식]이 존재했던 곳에 내[주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과 겹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을 과거 시제를 통해 표현한 박민규의 모순적인 문장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테제 역시 무의식(es)이 있었던 시간(과거)과 주체(Ich)가 있어야 할 시간 사이를 이어붙이면서 묘한 시간적 불협화음을 발생시키고 있다. 무의식이 본래 무시간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감안한다면, 우리는 프로이트의 명제가 다소 기묘한 시제상의 모순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로이트의 이 모순이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것은 무시간성의 대상(무의식)을 시간 형식(의식) 속에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반복이라는 경험의 형식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soll Ich werden”에서 주체(Ich)가 당위를 나타내는 동사와 결합하면서 일종의 미래 시제 속에 놓이는 이유는, 현재가 무시간성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과거라는 시제(Wo es war)의 형태로 변환되어 미래의 시점에서 체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나온 길을 다시 지나가야 하는 것처럼, 반복의 경로를 통해 무의식은 미래의 시제로서 사후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종말(“인류의 마지막 날”)이라는 무시간성의 상태 역시, 어떤 전도된 형식으로서 경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종말이라는 무의 지평, 그 무시간적인 상태의 것을 날것으로 체험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종말을 미래의 한 시점(“내일”)으로 투사시키면서, 그것을 다시 과거라는 시간 형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내일은 인류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 멸망이라는 전적인 타자성의 상태는 오로지 과거의 형식 속에서 발견된다. 어떻게? 바로, 불가능성(모순)의 방식으로. 그렇다면 내일은, 그리고 미래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과거의 반복적인 회귀 속에서 발견되는, 현재에 대한 해체의 한 조짐에 불과하다. 이 때 과거는 미래의 지평에 머물게 되고, 미래는 과거의 지평으로 귀속되기에 이른다. 전자의 메커니즘에서 반복의 불가피성이 제기된다면, 후자의 메커니즘에서는 미래의 불가능성이 제시된다. 미래(종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불가능성이라는 형태로 반복될 뿐이다.

종말의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서의 종말’이라는 형식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은 미래에 대한 섣부른 실존적 기투와는 큰 차이가 있다. 아마 이것이 속류화된 방식의 종말론의 분위기와 박민규의 텍스트의 그것이 차이를 빚어내는 흥미로운 원천에 해당할 것이다. 사이비 종말론과 달리, 진정한 의미의 종말론은 무의식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혼잡한 시간 형식 속에서 영원히 미제로 남겨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누구도 전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주재할 수 없는 것이다. 카프카의 비의적인 아포리즘처럼 “메시아는 그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때에야 비로소 올 것이며, 그는 자기가 도착한 그 다음 날에야 비로소 올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 날에 올 것”이다. 다시 말해 박민규의 종말론처럼 끊임없이 현존하는 영원성, 이른바 불가능한 현존에 대한 체험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V.

 

그리하여 이 체험은 서사적 차원에서 현상되기 마련인 근대의 선형적 시간관과 더불어, 종말론이라는 전도된 형태의 목적론을 해체시키는 어떤 단초를 제공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이럴래?」의 서사적 사건의 원인이라 할 수 있었던 ‘층간 소음’의 시간적 위상을 다시 따져 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애덤스가 살인자였다는 사실과,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실제로 가죽공을 벽에 던지는 장면으로 인해 일부 해석자들은 층간 소음의 실질적인 제공자가 애덤스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독해는 어떤 착시에 가까운 오해를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강력한 증거는 사실 소설의 첫 페이지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애덤스는 정말이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143쪽) 만약 이 문장이 애덤스의 입에서 발화된 것이었다면 그것의 진위 여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나, 이것이 3인칭 서술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더군다나 그러한 시선이 텍스트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자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초의 소음과 애덤스가 무관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오해는 그 자체로 중요한 텍스트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순간적인 착시(마지막 장면의 행위를 최초의 자리에 위치시키려는 욕망)가 근대적인 소설을 읽는 독자가 의당 전제하고 있는 서사적 인과성에 대한 욕망을 폭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즉, 가죽공을 벽에 던진 애덤스의 행위와 더불어 발성된 말(“이게 다 당신을 닮아서야, 안 그래? 거실 오른쪽의 벽을 향해 그는 소리친다”, 172쪽)은 층간 소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를 제출하지는 않는다. 다만 애덤스의 적의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 즉 독자의 편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애덤스의 과거로(혹 그는 아내를 살해하고 벽에 묻어버린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에드가 앨런 포의 그림자를 느낀다) 눈을 돌릴 수 있다. “끝까지 이럴래?” 층간 소음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어야 할 사람은 실제로 자기였다는 애덤스의 고백처럼, 이 말에는 지구 종말의 순간까지 애덤스를 괴롭혔던 어떤 끈질긴 억압의 자국이 일종의 흔적처럼 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은 실제의 사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층간’이라는 가시화될 수 없는 틈의 구조(혹은 형식) 자체에서 비롯된다. 층간 소음의 정체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순전히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층간 소음의 원인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애덤스나 창에게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이럴래?”라는 표현은 애덤스가 처한 종말의 시점에서 발견된 그 선험적 틈(‘층간’), 데리다였다면 원-흔적(arche-trace)이라 불렀을 어떤 상태와 대면했을 때의 난처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애덤스와 창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적 틈이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종말)라는 연쇄적 시간을 균열시키는 또 다른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전통적인 소설의 서사적 인과성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성 자체를 무화시키는 하나의 구조적 이미지인 셈이다.

이러한 틈에 대한 형식적 사유는 박민규의 텍스트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탁월한 이미지, 혹은 문장의 형태로 형상화시킨다는 점에서 박민규는 특유의 미적 완성도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루디」에서

 

 

“왜 일을 어렵게 만들지?”(54쪽)

 

“끝까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만.”(63쪽)

 

“쉽게 끝낼 ‘일’을…… 왜 질질 끌고 지랄이었어? 내가 물었다.”(82쪽)


 

와 같은 불가해한 말들로 발성되기도 한다. 루디가 거듭 강요하는 저 불가해한 ‘일’은 완수되어야 하지만, ‘끝내’ 완료될 수 없는 것으로 계속 ‘질질’ 지연되기만 한다. 여기서 그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루디의 그 일이 무엇인지, 혹은 도대체 왜 그 일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보그먼의 대응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가해한 부조리가 반복의 형식으로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광기가 섬광을 일으키는 시점은 루디의 폭력에 신음하던 보그먼이 어느새 도플갱어와 같이 루디의 말을 그대로 모방하는 순간이다. “쉽게 끝낼 ‘일’을…… 왜 질질 끌고 지랄이었어?” 그리고 이에 대한 루디의 대답(“끝이…… 안 나니까, 하고 놈이 말했다/ 또 우린// 러닝메이트니까……”, 82쪽)은 어느새 보그먼과 루디가 분리될 수 없는 운명에 나포되어 있다는 것을 확증하면서, 그 섬광을 더욱 극화시킨다. 그렇게 더블의 구조가 결국은 끝없는 반복을 야기하고,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권태의 시간을 낳게 될 것임을 암시하기에 「루디」의 부조리성은 더욱 극대화된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것도 여전히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루디와 함께라는 것.//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함께라는 것.”(82쪽)

 

 

VI.

 

우리가 여기서 눈치채야 할 사실은 보그먼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사의 차원에서 어떤 거대한 비약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층 놀라운 것은 그 비약이 독자의 입장에서 거부감 없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수용 가능성의 원천은 앞서 말한 것처럼, 순전히 이미지와 형식의 수준에서 발견되는 구조적 활력 때문이다. 실로 우리는 이것을 불가해성과 불가능성 사이에 벌어지는 이상한 침범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가는 길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박민규의 텍스트가 구현하고 있는 이러한 구조적(해석학적) 개방성은 정전에 가까운 모든 근대문학들이 감당해 내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체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텍스트는 차라리 모든 해석들이 무화되는 자리로 스스로를 시종일관 이끌고 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의 현대적인 존재태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어떤 이들은 그의 행갈이가 일종의 시적인 응축과 확산의 효과를 일으킨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진단은 시적인 것에 대한 부차적인 이해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단편 하나하나를 완결된 작품(work)으로 간주하고 읽어 나간다면 텍스트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한 해석의 툴을 이용하여 그의 작품들이 내장하고 있는 전언들을 포획하려고 할 때, 아무리 그 결론이 매력적이라도 늘 모종의 허기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가령, 「루디」를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고, 「근처」와 「누런 강 배 한 척」과 같은 고전적인 작품들로부터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내면만을 도출해 낸다면, 박민규의 텍스트들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 풍성함은 사라지고 명쾌하지만 어딘지 앙상한 근대적 해석판본들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바로 같은 이유 덕분에 알레고리적인 조감도 하에서 그의 텍스트들을 읽어낸다면 우리는 비로소 비약에 가까운 영감을 주는 이미지들과 마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텍스트들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시간성을 견뎌내면서 독자를 텍스트의 심연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평안하게 여겼던 시간선에 근본적인 균열을 일으키는 이미지들을 텍스트 위로 돌출시킨다. 벤야민의 맥락에서 그 이미지들은 “시간적이지 않고 형상적(bildish)”(「역사철학테제」)이라는 점에서 정지 상태의 변증법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변증법은 하나의 전언이나, 문장으로 수렴되는 지양의 길을 따르지 않고, 변증법이 절대로 포괄할 수 없는 어떤 잔여적인 빈 구멍을 제출한다.2)

그렇게, 이 빈 구멍을 내속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텍스트 내에 어떤 서사의 시간적 단절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단절의 순간을 풍크툼으로 경험할 때 박민규 텍스트의 종말론적 시간의 개성이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까 불가능성의 표상으로, 아니 프로이트의 용어로 더 정확히 말하면 표상의 대리자(Vorstellungsrepräsentanz)라는 형태로 반복해서 스쳐 지나가는 말과 이미지들에 의해 시간성의 단절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VII.

 

이것은 종언과 종말의 시대에, 문학의 미래에 대해 간신히 말할 수 있는(혹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윤리적 태도가 아닐까? 이 시대의 미래, 더 정확히 말해 근대 문학 이후를 말하는 것과 관련된 어떤 윤리적인 태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박민규의 텍스트를 따라서, 종말론적 권태가 드러내는 양면성에 대한 적극적 수용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미래나, 혹은 종말 이후를 직접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의 단절을 통회 우회적으로 사유하는 것 말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어쩌면 “미래는 오직 절대적 위험의 형식으로만 예견될 수 있다. 미래는 구성된 정상성과 단절을 만들어내며, 오직 괴물성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드러나고, 현시된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그렇다면 비평은 바둑판에서의 훈수(혹은 그 훈수를 몰래 지휘하는 벤야민의 꼽추난쟁이) 같은 것일 수 없지 않겠는가(훈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나의 이 부정적인 수행성의 근대적인 특성을 어떻게 벗겨낼 것인가). 문학의 미래나 그것의 종말을 직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불가능성으로서의 종말’을 사유할 때, 비로소 간신히 도래하는 저 미래의 섬광을 관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종말 ‘이후’에 도출될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예견하는 행위와 달라야 하며, 미래에 비추어 현재를 특권화시키는 목적론적 사고와도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종말이라는 사태를 과거 속에 존재하는 경험의 범위 한도에서 재사유하는 일은, 종국적으로는 짝패처럼 존재하는 모더니티의 저 간교한 목적론적 데칼코마니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10년 단위로 반복되는 문학사의 단속적(斷續的) 계승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진전이나 종말로의 직선적 수렴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야흐로 모더니티의 바깥이라는 끈질긴 환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목적론의 외부를 상상하거나 고집할 것이 아니라, 목적론의 내부를 서성이면서 그 안에 나 있는 또 다른 틈을, 벤야민이라면 역사라고 불렀을 그 불가해하고도 불가능한 시간을 반복해서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문학의, 소설의 미래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위와 같은 불가해성과 불가능성을 이중으로 떠안음으로써, ‘더블’로 앓음으로써 간신히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미래를 사유하는 새로운 시간의 형식(문학사)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는 여전히 “죽은 것들은 묻히고// 산 것들은 눈을 털며/ 자리를 떠야 할 시간”(「슬」, 296쪽)을 가리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더더욱, “갈 길이 멀다는 거 알지?”(「루디」, 56쪽) 그렇다면 어디로? 알게 모르게, 조만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언제나 이미) 알게 되지 않겠는가.

 

《문장웹진 3월호》

 

 

 

 

1) 조효원 「피로의 종말론」,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2) 이를테면 「아스피린」에서 하늘에 떠 있는 아스피린은 라캉이 지적한 「대사들」(한스 홀바인)의 해골처럼 텍스트의 안정적인 표면을 찢어버리는 외상이다.

 

 

 

 

 

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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