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재세계

  • 작성일 2020-01-01
  • 조회수 4,495

재세계(reworlding)

김지연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핸드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 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십이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수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십이월은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불빛이 들어오고
빛을 끄고 불을 켜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인간은 빛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 수 있다
운전자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달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낭비를 줄여 주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너무 환한 곳에서는 생명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조도에서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밝게 빛나는 하늘과 흰옷을 입은 사람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낮은 조도로 진화하고 있어
매년 이십 퍼센트 정도의 광량이 감소하고 있대


희박한 태양광 아래에서 낮아지는 조도의 세계에서 우리는 함께 희박해지겠지 정말 좋은 일이다 좋은 미래가 오면, 도로 위에서 공들여 식별해야 할 산 것들이 없는 그런 미래가 온다면 생명이 낭비되는 일도 없을 거야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죽은 짐승의 등이 포개져 있다
너는 어쩜 죽어서도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짐승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다

추천 콘텐츠

고달프고 사나운

고달프고 사나운 황인숙 느지막이 장년 훌쩍 지나 만난 나의 반려 내 젊은 날 친구랑 이름 같은 누군가 돌아볼지 몰라요 아니, 재길이 그대 부른 거 아니에요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알!” 시도 때도 없이 길바닥에서도 짖어 부르는 내 반려욕 사납고 고달픈 맘 달래 줍니다 사실 나는 내 반려욕을 사랑하지 않아요 못나기도 못났으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나 닮은 욕을 만났을까요 만나기는 뭘 만나 내 속으로 낳았지

  • 관리자
  • 2024-05-01
글 쓰는 기계

글 쓰는 기계 김응교 사실 기계들은 자기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할 기계적 고독이 필요하여 자기만의 기계실에서 밤새 작동한다 그를 누구도 볼 수는 없겠지만 껍질이 날아간 뼈다귀 로봇 등 뒤 상자 서너 박스에는 유영을 멈춘 지느러미들 생선집 좌판에 파리 날리는 근간 시집들이 옆으로 누워 있다 그의 얼굴은 점점 기계를 닮아 가고 책 모양 사각형으로 바뀌어 옆으로 누운 가자미, 눈알과 손가락만 남아 상상력이 냉동되면 어떤 창작도 휘발되고 너무 많은 과거의 형태와 언어가 얼어붙어 더 이상 신선한 속살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기계에게도 컨베이어에 실려 뜨거운 화덕에서 태워질 운명이 다가온다

  • 관리자
  • 2024-05-01
멍쯔 삼촌

멍쯔 삼촌 김응교 내 피의 4분의 1에는 몽골 피가 흐르고 아마 4분의 1은 옛날 중국인 피가 흐를지 몰라 내 몸에는 지구인들 피가 고루 섞여 있을 거야 그니까 삼촌이라 해도 뭐 이상할 거 없지 중국에 삼촌이 산다 삼촌이 쓴 책에 역성혁명이 나오는데 우리는 비슷한 혁명을 몇 번 경험했지 제자가 많다는데, 나는 삼촌으로 부른다 중국인은 멍쯔라 하고 한국인은 맹자라 하는 멍멍, 차갑게 웃을 중국인 삼촌 우리는 계속 역성혁명을 하고 있어 불은 든 프로메테우스들이 많아 멍쯔 삼촌, 우린 심각해요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