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놓인 변기
- 작성일 200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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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놓인 변기
최승철
다알리아 구근이 빨려 들어간다. 변기가 고장 났다. 변기의 구멍에 대고 펌프질을 해도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눌러도 뭉게구름이 흘러갈 뿐 아무것도 뚫리지 않는다. 애인이 두고 간 세탁소의 철 옷걸이를 펴서 변기 구멍을 쑤셔본다. 강물은 앞과 뒤가 없다. 소외도 언젠가 흘러갈 것임을 안다. 하루 분의 비타민 권장량을 입 속에 털어 넣는다. 변기의 손잡이를 돌려 물을 내린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변기 구멍을 뚫어야겠는데 박쥐는 거꾸로 매달린 채 새끼를 낳는다. 이번엔 드릴 용액을 퍼붓고 기다린다. 어느 하류를 다알리아 구근이 막고 있는지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지루한 시간이 돌 속을 흘러 다닌다. 인터넷 지식 검색을 찾아보니 막힌 변기에 양동이 가득 뜨거운 물을 펄펄 끓여 부으면 공기 몇 방울이 올라와 뚫린다고 한다. 도처가 풀잎인 계절 나는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비정(非情)을 손바닥에 놓고 후?, 불어 녹여본다. 푸른 아우성이 기찻길을 달려간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고 아, 아, 오, 오 지상을 간지럽혀 본다. 변기 아래 깊고 깊은 수렁을 건너온 빗줄기 아래 나는 떠나간 애인을 변기 속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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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임주아 긴 여름 방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꿈에 파묻힌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몸은 흉몽일까 올려다본 천장이 자루처럼 불룩했다 놀란 입속으로 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고인 방 드러난 벽에 곰팡이가 퍼져 있었다 악령 같았다 가죽처럼 찢어진 벽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젖은 책이 쪼그려 앉아 빗물을 핥았다 꿈이 늦어지고 있었다
- 관리자
- 2024-12-01
망뭉망 임주아 우리동네 더 망해도 싸다는 건물주 죽을 때를 놓쳤다는 동료 아파트를 염원하는 이웃 옆에서 7년째 책방 하는 나 시급하게 한가한 건 마찬가지 믿음 없이 거룩한 건 매한가지 잡탕밥이다 그래도 밥이지 어려운 말로, 이질적이다 그래도 질적이지 동네연구자들 아닌가 주제 : 내가 망할 것 같애? 망가지고 뭉개져도 망하지 않는 맷집 맷집도 집이다 난로 앞에 모인 망뭉망 동네 사람들 젓가락 들고 차가워지지 말자 왕뚜껑에 고딕체로 있다 후후 불어먹는다
- 관리자
- 2024-12-01
나의 갈색 골덴 점퍼 조성래 1 나의 갈색 골덴 점퍼는 햇살을 막아 주느라 고시원 창문에 1년 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밤일을 하고 돌아와 잠을 청할 때 얼굴로 들이치는 빛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보다 커다란 등으로 해를 가려 주던 나의 갈색 골덴 점퍼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는 동안 그것은 커튼이었습니다 서울은 추웠고 서울은 밝았습니다 겨울에는 낙향을 결심하고서 나의 갈색 골덴 점퍼를 창틀에서 떼어 냈습니다 등 부분에 세로로 길게 색이 바랜 부분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1년은 무색무취 강서구의 찬 공기와 같은 것이었을지 모릅니다만 옅은 레몬색의 그 무늬는 합정과 홍대 어느 구제 숍에서도 볼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나의 갈색 골덴 점퍼는 나의 특별한 갈색 골덴 점퍼가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갈색과 골덴을 좋아하고 겨울이면 기다란 빛 하나 등에 지고서 길을 다닙니다 2 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친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그가 여태 써 놓은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카페의 창문으로 들이치는 빛의 갈피가 종이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돌아온 후에도 나의 눈에 그 빛이 길게 남아 있었습니다 3 인간의 정신에는 큰 창이 나 있고 거기엔 주야로 사철 내내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가끔 커튼이 달리지 않은 채 그 방에 살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내가 보는 책을 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정신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창을 막아 보려고 애를 썼던 옷가지들이 어머니의 방에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응급실, 대학병원, 어머니 머릿속 사진 한가운데 빛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부분을 신경외과 교수가 가리켰습니다 4 소중한 나의 창문은 커튼을 기필코 거부합니다 알 수 없이 무참히 태양은 빛이 나고 하늘은 맑습니다
- 관리자
- 2024-1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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