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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놓인 변기

  • 작성일 2007-02-28
  • 조회수 1,976

들판에 놓인 변기

최승철


다알리아 구근이 빨려 들어간다. 변기가 고장 났다. 변기의 구멍에 대고 펌프질을 해도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눌러도 뭉게구름이 흘러갈 뿐 아무것도 뚫리지 않는다. 애인이 두고 간 세탁소의 철 옷걸이를 펴서 변기 구멍을 쑤셔본다. 강물은 앞과 뒤가 없다. 소외도 언젠가 흘러갈 것임을 안다. 하루 분의 비타민 권장량을 입 속에 털어 넣는다. 변기의 손잡이를 돌려 물을 내린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변기 구멍을 뚫어야겠는데 박쥐는 거꾸로 매달린 채 새끼를 낳는다. 이번엔 드릴 용액을 퍼붓고 기다린다. 어느 하류를 다알리아 구근이 막고 있는지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지루한 시간이 돌 속을 흘러 다닌다. 인터넷 지식 검색을 찾아보니 막힌 변기에 양동이 가득 뜨거운 물을 펄펄 끓여 부으면 공기 몇 방울이 올라와 뚫린다고 한다. 도처가 풀잎인 계절 나는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비정(非情)을 손바닥에 놓고 후?, 불어 녹여본다. 푸른 아우성이 기찻길을 달려간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고 아, 아, 오, 오 지상을 간지럽혀 본다. 변기 아래 깊고 깊은 수렁을 건너온 빗줄기 아래 나는 떠나간 애인을 변기 속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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