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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기 전에

  • 작성일 2009-07-28
  • 조회수 1,473

붙기 전에

고영민


『창비시선 300 기념 시선집』이 그만 변기에 빠져 버렸다

화장실 찬장 선반 위에 올려놓고

볼일을 볼 때마다 내려 들춰보던 책이 쏟아지면서

보기 좋게 변기 속으로 골인을 했다

재빨리 끄집어냈는데도 책 가장자리가 온통 젖어

낱장들이 하나로 붙어 있다

방에 들어와 붙어 있는 낱장을 떼어 낸다

김수영과 정철훈을 떼어 내고, 정철훈과 허수경을 떼어 내고

허수경과 장석남을 떼어 내고, 장석남과 나희덕을 떼어 내고

고은과 김용택을 떼어 내고, 김용택과 이은봉을 떼어 내고

이은봉과 박형준을 떼어 내고, 박형준과 강신애를 떼어 내고

손택수와 임영조를 떼어 내고, 임영조와 하종오를 떼어 내고

김선우와 이시영을 떼어 내고, 이시영과 장대송을 떼어 내고

문태준과 안도현을 떼어 내고, 안도현과 유안진을 떼어 내고

조말선과 유홍준을 떼어 내고, 유홍준과 최영숙을 떼어 내고

최영숙과 이병률을 떼어 내고, 이병률과 박연준을 떼어 내고

이재무와 신경림을 떼어 내고, 신경림과 이진명을 떼어 내고

이진명과 문인수를 떼어 내다가 그만

낱장이 조금 찢어졌다

다시 손끝을 가다듬어 후, 후 입으로 바람을 불어 말리면서

백무산과 정끝별을 떼어 내고,

정끝별과 김경미를 떼어 내고, 김경미와 나를 떼어 내고

나와 김기택을 떼어 내고, 김기택과 김선태를 떼어 내고

마지막으로 김선태와 해설을

간신히 떼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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