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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야를 향해 달리는 사마르칸트 기병대의 교리문답

  • 작성일 2009-09-28
  • 조회수 1,245

혁명 전야를 향해 달리는 사마르칸트 기병대의 교리문답

―리산과 나

신동옥


가장 긴 밤의 오후가 밝았다

말하라, 못 다한 노래는 얼마나 되는가

그대가 남겨 둔 피오르드 그리고 시계탑

가장 긴 밤의 오후를 노래하는 회한의 손가락

무현금(無弦琴)

하르모니움

하프

하품 속에 음악 같은 눈발이 달그락달그락 퍼붓는다

 

*

 

12음계의 담배 연기, 그리고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그대〉

그것을 밝혀 볼 등잔을 찾아/두 손 들어 어둠 속을 헤매었으나

 

밖에서 들리는 그 한마디는 「눈먼 〈그대 속의 나〉」*

 

담배 연기의 12음계, 그리고

 

*

 

물살에 떠가는 우편함 그 텅 빈 본적(本籍)과

심장을 끝없이 담금질하는 세 치 혓바닥과

묻지 말아야 할 대답의 끝없는 기갈과

메마른 雨氣의 이마와

목젖을 가린 채 귓불을 후려갈기는 바람의 앙다문

깃대여

 

*

 

어째서 나는 죽었고 죽었음에도 죽음은 계속되는가

 

감당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질시(嫉視)해 버려서 오늘은 발등이 검푸르다

 

*

 

담배 연기에 스미는 새벽의 궁기(窮氣)가 시리다

아, ‘궁디’가 시리다

 

*

 

 

 

―리산 is Real

―沃 is OK

 

*

 

부서진 시계탑과 칼자루와 머리카락이 고르게 다져진 땅 위에

그대가 서 있다 한국

 

(한국말로)

―리산, 음악을 사보타주하고 나면 오들오들 떠는 맑은 손톱만 남을까?

―아니, 술잔을 사보타주하고 나면 그대와 담배 연기와 음악과 혁명 전야가 남겠지

 

*

 

소금을 다오 그대를 삼투하는 가시가 될 테다 칼을 다오 찌르고 훑고 터트리고 홅아 내고 망가뜨리고 끝끝내 망가져 엉망진창의 가시울에 살아남은 덤불이 되어 숲을 기루어 막아서는 너무나 맑은 노래에 취해 버린 발바닥이며 그래, 제 눈알을 찌른 자의 바늘이 벽에 기둥에 기타에 꽂혀 말라 오그라들어 단단한 씨앗이 되어 완벽에 이르도록 도사리는 묽고 붉고 푸른 스스로의 비등점을 향해 달리는 눈발을 그 모든 알리바이에 깃든 날카로운 결정(結晶)을……

 

리산, 나는 적당한 공기와 온도와 지질(地質)의 변화가 스스로를 바꾸어 줄 순간만을 기다리며 창틀 너머로 시든 이파리를 떨치는 식물과도 같이, 적당한 담배 연기와 주정(酒精)과 노래의 변주가 스스로를 바꾸어 줄 순간만을 기다리며 쇠잔한 팔을 꺾는 꾼과도 같이

 

*

 

나부낀다, 나부끼네, 나부낀다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분다오

어째서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음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

 

―리산, 음악이 멈추었군요

―이 밀지(密旨)를 처리하게

 

 

 

―리산, 이 사발통문에는 ‘오독’이 묻어나는 것만 같군요

―이물스러운 출렁임이라고 해 두지. 음악 곁엔 자폭을 위한 앰플이 함께 한다네. 길 위에서는 걷는 발바닥이 살아남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그나저나 이 낙타는 새벽이 되도록 쉴 생각이 없는 것 같구만

 

*

 

―리산, 빙산 아래서 외뿔고래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건 자네의 잔이 비었기 때문이라네 沃, 좀 더 달려 보게

 

*

 

달그락달그락, 혁명 전야를 향해 달리는 사마르칸트 기병대

 

알타이, 알타이 눈은 내리고

우랄, 우랄 눈은 내려 쌓이고

파미르, 파미르 눈은 퍼부어도

 

달그락달그락,

이제 다만 고요히 도사릴 시간

말발굽經을 들추어 교리문답을 음송해야 할 시간

 

―오마르

―카이얌, 카이얌

 

―오마르, 오마르

―카이얌

 

가장 긴 밤의 오후는 저무네.

 

* 이탤릭체 부분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에서 가져왔다. 오마르 부르면 카이얌, 카이얌 하고 가장 긴 밤의 오후의 눈발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마르

―카이얌, 카이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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