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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 작성일 2011-06-01
  • 조회수 1,109

한강대교 북단에서 남단 방면 여섯 번째 교각에서

주영중


당신의 얼굴은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당신의 연주는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모든 게 사라지고 어느 순간 당신의 기타에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니

당신의 기타 소리에 범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The Messiah Will Come Again?

에 대한 불가해한 변주





얼굴에서 막 떠난 얼굴이, 무한의 기울기로 잠긴다

공중에서 잠시 정지한 물방울들, 격전을 위해 아주 잠시

조준점을 정렬하고 각도를 바꾸며, 하늘을 뒤덮는 그 무수한 점들


홍수 통제소의 긴박한 움직임과 잠수교의 수위, 그리고

이런저런 댐들의 범람에 대해 흥분한 목소리로 전하던

노란 우비를 입은 리포터, 노랑은 위험 노랑은 순수, 노랑은……

범람,

강이 게워낼 노란 토사물들,

뒤집힐 퇴적물들,


범람! 이라 발음하자 비로소 몸을 드러내는 홍수통제소

오늘만은 당신 바깥에 있을 것, 메시아네버윌컴어게인

당신의 기타는 이렇게 울고 있었죠? 하지만 감사해요, 기다릴게요

무너질 게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게워진 것들이 다시 귓속으로 흘러드네요, 풀잎들이 엽록소를 뱉어내고

달팽이들이 흔들리는 밤, 어지럽게 쏟아지는 시야

차라리 눈을 감을 것, 침묵하던 젖은 입술이 달팽이처럼 꿈틀거린다


범람하라,

내 안을 향해 범람하라, 어차피 예언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어쩌면 나는 노랑이 뱉어 놓은 노랑, 노랑이 다시

노랑이 될 때까지, 흘러 넘치는 물들이 층층으로 쌓여 대리석이 될 때까지

내부를 뒤집는 나일처럼, 모세혈관 속 고운 흙까지 철저히


비와 비 사이, 검은 상공을 거니는 낮은 그림자들

여긴 바리케이드를 친 경계의 다리, 오늘의 리비아처럼 순교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오늘의 이집트처럼 염결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숭고한 자세로 소요하는 곳

사나운 바람처럼, 휙 하고 찾아올 불온한 안녕

결코 안녕인 세계,

이 도시가 잠시 회오리쳤던 건 그 때문일까요


경계 위로 사산아들이 범람하고, 그 사이로 낯선 얼굴들은 흘러가죠

고음과 저음의 울렁이던 연주는 이제 끝나 가요, 비닐처럼 찢겨 나간 기분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군요, 곧 마취제를 맞은 환자처럼 편안해질 겁니다

심장을 들썩이던 작은 광기는, 자장가의 달콤한 꿈속으로 사라질 거예요

그러니 이 밤은 다시 복원할 수 없는

혼돈의 밤,

가속이 붙은 비행체들의 굉음이 희미해지고

고양이들이 개처럼 울부짖는 밤, 사이렌의 울림 끝에서


고양이들은 기타 속에서 산다, 혹은 고양이는 고양이처럼 운다

라고 읊조려요, 고요하게 떨리는 당신의 수염

고양이는 고양이가 될 때까지, 흘러가야 할 테지만


비닐처럼 흘러가야 할 테지만, 술에 취한 어린 고양이들이 다시

흥겹게 기타를 연주하는, 그런 저녁을 상상해요

도시의 끝으로 빠져나가는 처연한 소리들, 얼굴들은 또 한 겹 흘러가는데

신호등 속으로 들어가 깜박이는 사람은

교통표지판 속으로 들어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곧 고요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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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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