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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쉬었네

  • 작성일 2012-05-01
  • 조회수 643

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쉬었네

이진명

단추를 보네

셔츠의 일곱 단추

맨 위 목단추 하나는 풀었지만

아래로 여섯 단추는

일렬로 자로 잰 듯 여며 있네

너무 단정히 반듯이 꼭바르게

지하철 문 열리고 닫히자

앉아 있는 내 앞에 와 선 왜소한 청년

청년이 내 눈앞에 무심히 친

결 곱고 질감 좋은 소라색 셔츠

셔츠에 박힌 조그마한 눈 납작납작한

상아빛 연한 애기 별 여섯

모두 맑은 광택이 감돌아 있네

외따로 젖혀진 목단추 반 감춰진 그곳에서도

광택은 내리고

이토록 단정할 수 있을까

이토록 깨끗할 수 있을까

이토록 일렬로

이토록 틀림없이 여며질 수 있을까

이토록 바를 수가 있을까

없는 것처럼 바를 수가

잠긴 게 이토록 가벼울 수가

아름다울 수가 완전할 수가

위대할 수가

저절로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했다

스물은 넘었을까 이제 막 스물일까

스물 삶의 안쪽에도 녹슨 체인은 철컥거리겠지

마른 안구를 비비며 나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선릉역에서 내려 사람들을 만나

다시 약속장소 청주로 가야 하는데

천둥, 번개 같은 것

돈이나 일, 내일의 꿈에는 초점 한번 못 맞추고

지하철 칸에서 겨우

남의 셔츠 단추에나 초점을 맞춰

단추 여섯을 셌다가 일곱을 셌다가 하며

셔츠의 단추라는 게 북두칠성하고 상관있나 별 일곱을 달게

상상력도 없는 창작을 하다가

어디로 뭘 하러 강변을 지나

잠실나루를 지나 신천을 바라며흘러가는 것인지

그러나 단정한 셔츠 단추의 스물 청년이여

그대의 단추와 초점을 맞추며 나는 쉬었다네

그대의 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뚫려

어디로 뭘 하러 흘러가지 않고 나를 끊어 쉬었네

단추로 맺혀 빈 빛에 앉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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