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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자 우리는 랭보를 안고 낡은 욕조가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 작성일 2006-04-21
  • 조회수 98

비가 오자 우리는 랭보를 안고
낡은 욕조가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김경주


                      오래된 무덤을 발굴한 사람들이 어둠속에서

                        밝은 곳으로 그것들을 끌어내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일 막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1막 독백


썰물이 지나가고 갯벌 위에 남은, 게들의 떨어진 발들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그때 촛불을 들고 있었고 바다 속에서 하나의 막이 흘러왔지요


2막 귀신(歸身)


어둠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덜 자란 손가락을 꼭 붙잡고 있었지

왕은 쌍둥이가 없지 하나의 왕이 태어나면 하나는 죽어야 한다지  

하나의 왕은 사람이 되고 하나의 왕은 귀신이 되는 거지

 

귀신은 생을 연민하는 몸이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해 몸은 시간을 찾아 떠돈다


3막 여관


여관의 바닥으로부터 물이 천천히 차오른다

마치 오래전부터 물에 잠겨있었던 듯.

서서히 물무늬 공기처럼 가득 쌓인다

물빛 한 조각을 열면 바닥에 빛이 가득하다


사내            밤이 되면 벌레들이 불빛을 찾는 건 하루 종일 거리를 떠돌았기 때문이에요.

                  저를 그냥 벌레라고 생각하세요.

김씨            그래요. 벌레가 많긴 하군요.

사내            사람들은 벌레가 징그럽다고 생각할 뿐, 벌레의 날개에는 관심이 없죠. 

사내            벌레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부르지 않아요.

김씨            그렇군. 이보게 그런데 무언가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나?

사내            기다리는 중이에요.

김씨            당신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사내            밤마다 저는 물속을 천천히 걸어 다니곤 해요.

김씨            이상하군. 내 아들도 그랬는데...

                  혹시 당신은 내 아들이야?

사내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집을 나갔어요.

김씨            그렇지. 아들은 오래전에 집을 나갔지.

김씨            자넨 버림받았나?

사내            그 사람은 당신의 아들이구요.

김씨            그렇지 그건 내 아들이지.

김씨            <얼굴이 점점 이그러지며> 내가 웃고 있나?

사내            아니요 울지 마세요.              

                

사내            보세요. 죽은 새가

                  땅에 내려와 눕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맴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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