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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69,924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정세랑





그 드레스는 2013년 7월, 캐나다 데이 세일 기간에 밴쿠버의 작은 창고에서 픽업되어 한국으로 수입되었다. 디자이너 드레스이긴 하지만 신인 디자이너의 드레스라 할인 폭이 컸다. 택에 붙은 가격은 만 오천 달러, 최종 할인가는 삼천 오백 달러였다. 사이즈는 4. 하지만 살짝 크게 나온 데다가 코르셋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어서 55에서 77까지 입었다.


1
드레스는 한참을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하지 않은, 기하학적인 선의 드레스였다. 수제 레이스도 비즈나 세퀸도 없어서 마치 종이접기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샵에서 괜히 들여왔나, 하고 후회를 할 즈음 첫 번째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드레스를 입고 나올 때 특수효과 넣어 주잖아요. 갑자기 더 예뻐 보이게. 그거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 효과 없네. 그냥 나네요.”
여자는 화장도 머리도 하지 않고 찾아와서는 아주 건조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까 것 다시 입어 보시겠어요?”
“아뇨, 이걸로 정할게요.”
“최초로 입으시는 거예요. 아시죠? 드레스 수명은 일곱 번 안팎이 끝인 거.”
샵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여자는 특별히 인상 깊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2
“너무 조이지 말아 주세요. 쉽게 기절하는 편이라…….”
두 번째 여자는 긴장하면 종종 미주신경성 실신을 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드레스를 볼 때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코르셋 부분이 얼마나 숨쉬기 좋을지를 따졌다. 여자에게 조이는 옷은 도움 될 리 없었다. 상대적으로 가슴통이 여유 있게 나온 수입 드레스 위주로 고르다가 그 드레스를 골랐다. 그래도 그렇게 편하진 않았다.
몇 번의 위기가 있긴 했지만 기절하지 않고 무사히 식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벗으며 들이켠 숨이 달콤했다. 이제 살겠다,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도우미 분이 웃었다.
후에 드레스와 코르셋을 입은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숨은 쉬고 있는 건지 신경이 쓰여서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배우들은 저걸 얼마나 오래 입고 견뎌야 했을까, 정말 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자꾸 딴생각을 했다.
한 명이 기절하는 장면이 나오자 여자는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해 버렸다.


3
전혀 결혼할 계획이 없었는데, 스카프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냥 스카프가 아니었다. 운명의 스카프였다. 세 번째 여자는 그 스카프를 한 날이면 칭찬을 잔뜩 받았다. 색상과 무늬, 크기와 소재가 여자에게 완벽했다. 바탕색은 하늘색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매도 톡톡하게 살아 있었다. 원피스에도 블라우스에도 티셔츠에도 다른 매력으로 어울렸다. 그래서 외근처가 여러 군데였던 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스카프를 잃어버리자 매우 상심하고 말았다.
똑같은 스카프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구매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백화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재고를 구할 수가 없었다. 같은 무늬의 다른 색상은 남아 있었는데 그건 여자가 원하는 스카프가 아니었다. 해외 직구 시도는 실패했다. 여자는 결국 포기했고 옷장을 다섯 번 열면 세 번 한숨을 쉬었다.
포기하지 않은 건 여자의 남자 친구 쪽이었다. 수통의 국제전화와 간절한 이메일들로 남자는 똑같은 스카프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한 달 동안 온 유럽 사람들을 귀찮게 하며,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여자를 사랑하는지도 깨달았다. 그래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스카프와, 두 사람이 데이트했던 거의 모든 장소에 혼자 다시 가서 사진을 찍고 편지를 써서 만든 앨범으로 프러포즈했다.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스카프가 두 장이야?”
“혹시나 또 잃어버리면 속상할 테니까.”
“너무하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하하하.”
남자는 여자가 감동해서 울 줄 알았는데 전혀 울지 않아서 조금 섭섭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고른 이유는 아무 장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하늘색 스카프를 거즈를 대고 조심스럽게 다려, 벨트 모양으로 접었다. 드레스와 스카프는 원래 세트였던 것처럼 어울렸다.


4
네 번째 여자는 결혼 한 달 전부터 남자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전셋집을 구하면서 날짜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휴가도 내지 못하고 두 번의 이사와 결혼 준비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싱크대가 문제였다. 젖어서 썩어 들어간 싱크대 아래에서 끊임없이 바퀴벌레가 나왔다. 한국 바퀴벌레가 맞나 싶게 커다랬다. 방역 업체를 불렀더니 싱크대를 통째로 갈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을 원망하고, 외국에 있어서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집 주인을 욕하면서 약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 친구는 청첩장을 나눠준다는 핑계로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바퀴벌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일부러 야근을 하고, 일찍 퇴근한 날은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는 잠만 겨우 얕게 잤다. 그 큰돈을 들인 집에 들어가기 싫다니 상황에 너무 화가 났다. 바퀴벌레 문제를 나 몰라라 하는 남자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 상태에서 자잘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맡아 하다가, 결혼식 이틀 전에 터지고 말았다.
“지난 한 달 같은 날들이 이어지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다.”
남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맨손으로 썩은 싱크대를 뜯어내며 사과했다. 여자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해 상한 얼굴로 드레스를 입었다.


5
다섯 번째 여자는 어렸다. 스물세 살이었다. 모든 것은 어른들이 결정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 쪽 집안에서 서둘렀는데 흔히 말하는 ‘알아주는 집안’이었으므로 여자의 부모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딸의 결혼에 동의했다.
“어리고 깨끗하지.”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피부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마음속에서 의문들이 부글거렸지만 아직 표면까지 떠오르진 않았다.


6
여섯 번째 여자의 목 뒤에는 타투가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머리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나이트메어 머신(Nightmare machine)’이라는 장난스러운 문구였는데, 샵에서 시험 삼아 머리를 업스타일로 틀어 올리자 아주 잘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 쪽이 돌연 비난을 해왔다.
“너는 그거 할 때 결혼할 생각은 하나도 안 했냐? 진짜 보기 싫어. 철들었으면 레이저로 지우든가 했어야지.”
스물다섯 살에 한 타투였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원래는 업스타일을 하지 않거나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셈이었지만, 남자의 갑작스러운 짜증에 그 온건한 계획들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2주 동안의 팽팽한 신경전 끝, 식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자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랑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고 다들 보라고 해.
44명의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워킹으로 입장했다.


7
어느 쪽 친구가 더 많이 오는지 내기를 했다. 신랑 쪽도 자신이 없지 않았는데 신부의 압승이었다. 사진을 두 번에 나눠 찍어야 할 정도였다. 일곱 번째 여자는 사람을 좋아했고 파티를 좋아했고 결혼식도 해본 중 가장 큰 파티라고 생각했다. 드레스는 그 파티에 잘 어울렸다.
부부는 스무 번가량 집들이를 했는데, 집들이를 끝내고 나니 이사 갈 때가 다시 찾아왔을 정도였다.


8
여덟 번째 여자는 칼럼니스트였다. 여자는 결혼해서 사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혼잣말을 했다.
“이제 환멸에 대해서는, 웬만큼 쓸 수 있겠군.”


9
두 사람 다 대학원생이었던 아홉 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 했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실용적인 성격들이었다. 그간의 저금으로 학교 앞에 투 룸을 구해 깔끔하게 꾸몄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상의해서 생략했던 그 모든 과정을 결국 다 해야만 했다. 자포자기 상태로 드레스를 골랐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0
위약금을 물고 대여가 취소되었다. 혼전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질병 때문이었다.


11
열한 번째 여자는 최대한 많은 것을 누리고 싶었다. 웨딩플래너의 제안들을 웬만해선 거절하지 않았다.


12
열두 번째 여자는 최대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심지어 결혼반지마저도 원하지 않았다. 여자는 가는 실반지가 아니면 좋아하지 않았다. 돌출된 부분이 있는 반지는 세수할 때 얼굴을 긁고, 니트의 올을 잡아채기 마련이었다. 평소에 빼고 있다가 외출할 때 특별히 찾아 낄 것 같지도 않았다. 취향과 성향의 문제였다.
“하지만 다이아는 꼭 했으면 좋겠구나.”
시어머니로서는 며느리 될 열두 번째 여자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면서 다이아를 살 수 있는 기회는 다시없을 텐데 말이다. 열두 번째 여자는 취향은 확고했지만 고집은 세지 않았으므로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열심히 조사해 종로에서 가장 저렴한 가게를 찾아냈다.
“제일 작고, 제일 등급이 낮은 다이아몬드면 돼요.”
종로의 귀금속점 사장은 열두 번째 여자가 매우 가난한 신부라고 오해해 버렸다. 그리하여 여자가 반지를 찾으러 왔을 때 자랑스럽게 두 단계 등급이 높은 다이아로 만든 반지를 내놓았다.
“그렇게 등급이 낮은 다이아는 국내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여자는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금방 간파했고, 반지를 찾으러 간 날 입은 옷이 가난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고른 것도 반짝이지 않아서였다.


13
열세 번째 여자는 신부 대기실에 들어온 사촌 언니를 반겼다. 사촌 언니는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으면서 속삭였다.
“결혼 생활 안에서 너를 변호해 줄 사람은 없어. 너밖에 없어. 그게 안 되면 언니한테 전화해.”
사촌 언니는 변호사였다. 열세 번째 여자는 의아했으나 이후 이어진 결혼 생활에서 언니의 말뜻을 이해했다. 열세 번째 여자 말고는 아무도 열세 번째 여자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았다. 수없는 요구들을 해올 뿐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사람은 스스로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 사촌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다.


14
열네 번째 여자는 재혼이었다. 한 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꽤 희망적이었다. 성격이 잘 맞으니까 말이다. 각자의 성격은 결혼이라는 기계를 굴러가게 하는 핵심 부품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애초에 맞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굴러가야 할 텐데.
아니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작업복을 입듯 드레스를 입으며 여자는 가볍게 생각했다.


15
“언니, 결혼 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친한 후배가 물어 왔을 때 그렇게 대답한 열다섯 번째 여자는 놀라고 말았다. 반사적인 대답일 뿐이었는데 그 대답을 곱씹으니 불명확했던 감정들이 갑자기 명확해졌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권을 아무도 존중해 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하지만 형부가 잘해 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 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당위로요?”
“응, 갑자기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대뜸 다시.”
“예를 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을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 번째 여자는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16
열여섯 번째 여자는 그 드레스를 입고 알코올중독자와 결혼했다. 남자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치료를 받았다 재발하고, 퍽치기를 두 번 당해 한 번은 입원하고, 두 번째 치료가 실패하고, 겨울에 길에서 자다가 입이 돌아가서 다시 입원했을 때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라 병 탓인 걸 알면서도 더 이상은.
“아마 다음에 소식을 들으면 부고겠지.”
이혼 수속이 끝나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에서 죽지 마.”
결혼 생활은 지옥이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17
열일곱 번째 커플은 애주가들이었다. 술값이 너무 많이 들어서 결혼했다. 여전히 식비보다 주류비가 더 많이 들지만 집은 따뜻하고 안전하고, 서로밖에 다른 술친구는 특별히 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근사한 주류 장식장도 샀다. 온도를 칸칸이 맞출 수 있다. 애주가일 뿐 폭음은 하지 않고, 애초에 튼튼한 간을 타고났다. 튼튼한 간의 유전자를 언젠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지만 임신 중 금주해야 할 걸 생각하면 여자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는다.


18
청첩장을 주는 날이었다. 친구 다섯 명을 불러 저녁을 사줬는데 한 사람은 동성애자였다. 갑자기 그 애가 불쑥 말했다.
“나는 이제 결혼식 안 가. 축의금도 안 낼 거야.”
반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오긴 와야지.”
“야, 넌 내지 마. 아님 기분만 내게 5천 원만 내.”
집에 오는 길에 열여덟 번째 여자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축의금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훨씬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결혼은 겉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보호의 문제니 말이다. 여자의 친구는 너무나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성 결혼이 얼른 가능해져야 할 텐데, 관련 뉴스를 따라 읽을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결혼 안 하고 같이 살기만 하면 많이 다른가?”
언젠가 다른 친구가 물었을 때였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난 다음 단계로 안 가는 느낌이더라. 다음 단계가 없는 느낌이고.”
“촌스럽잖아, 결혼.”
“그래도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건 차이가 너무 커.”
“그렇지……. 미안하다.”
“니가 왜 미안해?”
“몰라. 미안해.”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왔는데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신경 쓰였다. 친구의 우울을 감지하고 있었다. 변화가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변화가 느린 사회라서 친구가 지쳐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 해도 섭섭해 하지 말아야지. 여자는 마음먹었다.
친구는 사진을 찍을 때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
“아니야, 와준 것만 해도 고마워.”
잠깐 손을 잡았다 놓았다. 장갑 위에 감촉이 오래 남았다.


19
프리랜서인 여자는 출근하는 남편 앞에서 문어 춤을 추었다.
“비켜. 이 타코야키야.”
“뭐라고, 어떻게 그렇게 한마디로 나를 토막 칠 수 있어?”
남편이 돌아올 때에는 어떤 춤을 출지 고민해 볼 참이었다.


20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스무 번째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내 부모에게 속았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오랫동안 속아서 똑같은 삶의 궤도를 선택해 버렸나?


21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스물한 번째 여자의 남편은 빈정거렸다.
“그렇게 매사 우울해서 어떻게 사니? 차라리 약을 먹어라. 응?”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너는 이해 못 해.”


22
“이렇게 추운 날에는 발가벗고 안고 있는 게 최곤데.”
여자는 실수로 너무 크게 말해버렸다. 골목에 둘만 있는 줄만 알고서. 지나가던 사람이 흠칫했고, 두 사람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번화가의 어두운 골목이었다.
“그럼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결혼하면 굳이 애써 만나지 않아도 겨울 내내 껴안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여자는 전자책 유저였고 남자는 스님처럼 옷이 없었다. 덕분에 아주 작은 집에서 매일 껴안고 있을 수 있었다.
맨살과 맨살 사이의 온기, 그것을 위해.


23
결혼의 여러 가지 속성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편이지만, 그토록 빚잔치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빚을 기억하느라 드레스의 디자인 같은 것은 하얗게 잊고 말았다.


24
“어머, 임신한 거야?”
엠파이어 라인의 원피스를 입었을 뿐인데 거래처 사람이 물어 왔다. 결혼하고 해를 넘기자, 여자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선을 쉽게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 왔다. 여자는 타고난 개인주의자였다. 그런 여자에겐 일가친척들이 덕담이랍시고 명절마다 하는 말들이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왜 다른 사람의 생식과 생식기에 대해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지 기이할 정도였다.
더 좌절할 때는 젊은 세대의, 충분히 개인주의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세대의 사람이 비슷한 말들을 할 때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기성세대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자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말들을 할 때, 여자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그이의 이름을 지웠다. 너는 이제 그만 만나야 하겠구나, 질린 채 생각했다.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이민을 가는 걸까? 눈을 뜨면 모르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도시였으면 했다.


25
마트 앞에서 크게 싸웠다.
“와, 홈패션 배우고 싶어. 수강료도 안 비싸고 좋다.”
여자가 마트 문화센터의 수업 소개 게시판을 보다가 말했을 때, 남자가 쏘아붙였다.
“요리부터 배워.”
한 번은 그냥 넘어갔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 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인 게 많았다.
“다시 말해 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32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33
남편이 문득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냐고 물어 왔다.


34
어릴 때부터 성실했던 서른네 번째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곁에 있던 사람과 쫓기는 마음으로 결혼했다. 몇 년이 지나고서야 이 숙제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찾아왔다. 미혼인 여동생과 통화하다가 여자는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스무 살 넘으면 어른인데 너무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 입을 모아 내가 부족한 존재라 해서 정말 부족한 줄 알았어. 결혼을 해야 어른 취급 받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래서 착각한 게 아닐까, 꼭 해야 하는 숙제로. 너는 나처럼 생각하지 마.”
“뭐야, 언니 결혼했다고 속 편하게 말하기냐?”
“속 편한 소리니?”
“모르겠어. 나도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하는데, 사회가 너무 기혼자 중심인걸.”
“사회는 바뀔 수도 있어.”
“어쨌든 지금은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옛날 선생님 같잖아.”
“손바닥을 때리려나?”
“뺨을 안 때리면 다행이지.”


35
서른다섯 번째 커플은 신혼 내내 저녁마다 나라 걱정을 했다.
“신혼부부가 나라 걱정하느라 섹스 할 시간이 없네.”
“이게 출산율 저하의 이유군.”


36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운전을 하던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나처럼 가부장이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당신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 지난 제사 때 생각해 봐. 나는 조퇴하고 가서 아홉 시간 일했지. 당신은 퇴근하고 와서 한 시간, 절 몇 번 하고 과일 집어먹고 사촌 동생들이랑 논 게 다잖아.”
“그럼 두 사람 다 조퇴했어야 했다고?”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하청이라고까지 말하면…….”
“아홉 시간 일한 며느리들은 제사 지낼 때 아무도 절도 안 하고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지.”
“몇 년 전에 며느리들도 절하는 걸로 바꿀까 했는데 큰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시고…….”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두 사람은 말없이 라디오의 패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37
평생 비혼 커플로 살려고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유학을 가게 되면서 배우자 비자를 받기 위해 혼인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엄마가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식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촬영만이라도 하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효도하는 셈치고 드레스를 빌려 대충 촬영을 했다. 엄마는 그 사진을 단체 채팅창에 뿌리는 모양이었다.
출국 전 송별회 겸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이야기를 토로하니 다들 결혼 축하를 해와서 떨떠름했다. 하려고 한 게 아니야, 축하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야, 설명하기도 좀 그랬다.
그런데 한 친구가 슬며시 속삭였다. 여자와 비슷하게 오래 동거 중인 친구였다.
“야, 나도 공무원 아파트 당첨 확률 높이려고 곧 신고할 거야.”
“너도?”
“심란해하지 마. 실리가 걸려 있었잖아.”
우리가 어쩌다가, 하고 둘이서만 웃었다.


38
여자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장군이었다. 축의금을 내기 위한 줄이 식장이 있는 층을 넘어 회전계단을 타고 이어졌다. 화환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리본을 떼고 꽃을 치우고 리본을 떼고 꽃을 치우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꽃은 어딘가에서 재활용될 것이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문이 잠깐 열렸을 때 밖에서 누가 하는 말이 들리고 말았다.
“이런 결혼식은 처음 봐. 양쪽 집안 다 한 재산 챙기겠구먼.”
그런가, 그게 본질인가. 여자는 아득하게 생각했다. ‘화환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라는 문구를 청첩장에 쓰려 했을 때 아버지가 지우게 한 게 새삼 다시 떠올랐다.


39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 결혼했다. 두 사람 다 이타적이고 온유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혼의 어떤 부분들도 상대적으로 쉽게 견뎠다.
다만 여자에겐 새로운 두려움이 생겼다. 여자는 좀 비정상적으로 자주 남자의 죽음에 대해 떠올렸다. 남자의 기분 좋은 팔도, 피부도 언젠가 죽어 없어질 거란 게 이상했다. 이 아름다운 몸이 썩게 된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인데 남자의 죽음에 대해선 좀처럼 그러지 못했다. 가끔 남자가 지나치게 느리게 숨을 쉬며 잠을 잘 때, 코밑에 손을 대보곤 했다. 잠버릇이 시끄러운 사람이었다면 더 안심되었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아주 나중의 일일 거야.”
남자가 말했다.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평안하게 끝까지 잘사는 사람들도 아주 없진 않잖아?”
“그런 경우라 해도 평균수명을 생각해서 일곱 살쯤 어린 남자를 사랑할걸.”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자주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설마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워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 보았다.


40
마흔 번째 여자는 폐백이 점점 길어지자 조바심이 났다. 하객들에게 아직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다. 여름이었다. 관리를 안 했는지, 식장에서 빌려주는 장옷과 머리장식엔 수백 명의 몸 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속이 안 좋아졌다. 여자는 절을 하고, 덕담을 듣고, 대추와 밤을 받아내고…… 그것을 수십 번 반복해서 했다. 덥고 메슥거려서, 안 그래도 지쳐 있었는데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 말걸. 폐백 같은 거 하지 말걸. 드레스만 입고 끝낼걸. 이게 아닌데.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더라? 사람들은 이제 다 갔겠지? 동창들도, 직장 동료들도, 가까운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들도 모조리 가버렸을 것이다. 인사를 오지 않은 여자를 욕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낙심하고 말았다.
문득 상에 잔뜩 차려진 음식 모형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모형을 앞에 두고 나는 진짜 이걸 왜 하고 있지? 전통 혼례를 선택한 것도 아닌데 어정쩡하게 왜?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필경사 바틀비』면서!
결혼을 통해 스스로의 관습적인 면을 인정한 여자는, 자주 ‘이것이 관습일 뿐인가?’ 검토하는 사람이 되었다. 의미를 두지 않는 행동은 되도록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41
스팀다리미가 고장 나서 다림질을 하는데 자꾸 물이 샜다. 그저 물이 샜을 뿐인데, 왈칵 울고 말았다. 다리미에 조그맣게 ‘이 제품은 누수 방지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입니다’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게, 그렇게 서러웠다.
“호르몬 때문인가?”
여자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물이 새는 다리미가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눈물 방지 테스트를 통과한 인생입니다, 그런 스티커가 붙어 있어도 끝내는 울게 된다.


42
국제결혼이었다. 혼인신고가 어찌나 복잡한지 여자는 서류 때문에 고생고생을 했다. 겨우 그 지난한 과정을 끝내고 나니 가족들이 귀국해 식을 올리라고 난리였다. 무려 명동성당에서 식을 올리게 되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를 데리고 교리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남자에게 소곤소곤 통역해 주려 했는데 뒷자리 커플이 “쉿!” 하는 바람에 약간 빈정상했다.
식 당일은 드레스를 입고 무릎을 꿇었다 일어섰다 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굳을 대로 굳은 남자는 일어설 때마다 여자의 드레스를 정리해 주었다.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긴장 상태에서 무심결에 여자를 살피고 있었다. 여자는 그게 너무 고마웠다. 남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남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남자의 종교가 아니었다. 남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아주 적은 수가 참석해 있었다. 한국에서의 결혼은 오로지 여자를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그 와중에 여자의 드레스 자락을 챙겼다. 여자는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너무 긴장한 남자가 결혼서약의 “I will honor you”를 “I will horror you”로 잘못 읽었을 때에도 나쁜 예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너는 나를 무섭게 하지 않아. 너는 나를 언제까지고 무섭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애초에 영어권 외국인이 아닌데 영어로 서약을 하게 한 쪽이 나빴다고, 웃어넘겼다.


43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를 마시면 기운이 나고 세 배 정도 똑똑해지는 기분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미용실에 갔다가 식장으로 이동하느라, 결혼식 날 아침엔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아, 누가 커피 한 잔만 줬으면. 하지 만 커피는 이뇨 작용을 활발하게 만들고,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화장실에 가기가 귀찮았다. 여자는 꾹 참고 있었다.
“신부님께는 다과와 음료를 제공합니다. 지금 가져다드릴까요?”
예식장 직원이 들어와 단순한 메뉴판을 들고 물었다.
“에스프레소요.”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다과는 일괄로 마카롱과 에클레어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직원이 다시 쟁반을 들고 나타났을 때는 식이 시작하기 30분 전이었다. 손님들이 슬슬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여자는 그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향해, 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장갑이었다. 장갑이 지나치게 마찰이 없는 소재였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이 뱅글, 손가락 사이에서 돌더니 드레스의 왼편 엉덩이에서 허벅지까지 커피가 쏟아지고 말았다. 도우미 여사님이 비명을 질렀다.
친구들까지 한꺼번에 달라붙어 물수건으로 처치하고, 다행히 준비되어 있던 처리제를 바르고, 허리 뒤에 달려 있던 장식을 앞으로 옮겨 달았다. 그래도 티는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의 커피.”
포토그래퍼가 여자의 사진을 한 방향에서만 찍어야 했다.


44
드레스는 특수 세탁을 거쳐 지난 재난의 흔적을 거의 지울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남은 부분이 있어서, 본식 드레스로는 수명을 다했다는 판정을 받았다. 바로 폐기된 것은 아니고 드레스 카페로 헐값에 재판매되었다.
3만 원 안팎의 대여비로 한복이나 이브닝드레스, 웨딩드레스를 입어 볼 수 있는 카페는 등장한 지 꽤 되었다. 한동안 유행이 주춤하는 듯싶더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근처의 고궁에서 사진을 찍는 게 코스로 정립되어 근래 이용객이 더 늘었다. 실내 스튜디오도 한층 화려해졌다. 조명을 덧댄 가짜 창문, 시트지로 만든 대리석 기둥, 사시사철 꽃이 핀 매화나무, 골동품 경대, 스티로폼 기와를 얹은 한옥 담.
대개는 한복을 고르기에, 드레스는 한편에서 선택을 받지 못하고 숨이 죽은 채 걸려 있기만 했다. 그 드레스를 고른 건 방학을 맞아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러 온 고등학생이었다.
“와, 이것 봐. 예뻐.”
“그거 입게?”
“응, 우리 친척 언니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이거랑 비슷한 거 입었다?”
“그럼 다 같이 웨딩드레스 입을까?”
드레스 카페 직원이 한 명 한 명 착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드레스에 비해 몸피가 작아서 약간 헛돌지만 끈 없는 브라를 몇 개 받쳐 넣으니 가까스로 지탱이 되었다.
“나 꼭 이런 드레스 입고 결혼할 거야.”
“우리 결혼할 나이까지 계속 이대로면 좋겠다. 부케는 다른 친구들 주지 말고 꼭 우리끼리 주기로 하는 거 어때?”
“나는 절대 결혼 안 할 건데?”
“절대 안 한다고?”
“절대 절대 안 한다고?”
“그럼 네가 마지막으로 받고 끝내버리면 되잖아.”
“그렇네. 간단하네.”
네 사람은 깔깔 웃으며, 수명이 끝난 웨딩드레스들을 입고 탈의실을 나섰다.





소설가 정세랑

작가소개 / 정세랑(소설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판타스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이만큼 가까이』,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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