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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계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8,595

[단편소설]



물질계



김멜라




1. 은하수


죽음은 어떤 공간이어서, 계속 걸으면 나오는 길이다. 그러니 찾아오고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론 물리학 논문을 썼다. 이때의 공간이란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언어적 요소일 뿐 동네 카페나 누구네 집 화장실처럼 실제로 들락거리는 장소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내 이론의 핵심은 특정 물질의 '있음과 없음'은 단지 확률의 차이이며 모든 것이 '있는 동시에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물질계의 모든 존재는 얼마 정도 죽어 있는 상태이며 동시에 완전한 죽음은 불가능하다(관찰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갈 만한 배짱과 능력이 없어 나 자신조차 이해하고 있는지 불분명한 어느 독일 과학자의 수식을 인용하는 것으로 논문의 결론을 대신했다.
나의 두 번째 지도교수인 블랙베어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아인슈타인 흉내는 그만 냅시다."
학교 연구실에 러닝머신을 가져다 놓고 내가 갈 때마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그는 욕구 불만과 학문적 호기심의 차이, 망상증 환자와 사고실험의 차이를 강조하며 물리학은 정신분석학이 아니고 통계 그래프도 아니며 찢어진 블랙홀로 오가는 시간 여행도 아니라 했다.
"달리기예요. 달리세요. 살이 처지면 생각도 처집니다."
블랙베어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는 남보다 이른 나이에 미국 남부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 지역 물리학회에서 수여하는 '뉴 피지컬 리뷰' 상을 수상한 사람이었다. 곰처럼 덩치가 크고 곰처럼 굵은 흑발에다 곰보다 더 달콤한 것에 환장하는 그를 학생들은 블랙베어라 불렀다.
핑크색 아령을 들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블랙베어가 내게 말했다.
"파워, 섹시, 유혹은 현실에서 하세요."
블랙베어는 내 논문의 소제목들을 나열하며 이것들이 파워, 섹시, 유혹이란 말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블랙베어는 러닝머신의 경사도를 두 단계 높였고 나는 블랙베어가 입은 비둘기색 팬츠에서 고개를 돌려 책장에 놓인 뉴 피지컬 리뷰 상의 은색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관찰된 작위와 관찰되지 않은 무작위'를 구상한 것은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죽음을 뜻하는 한국어 표현의 '돌아가다'와 영어의 'Pass Away'를 언어학적 예시로 든 것은 스물다섯(나의 아버지가 죽은 나이)이었으며 내가 이 논문 때문에 첫 번째 지도교수에게 목이버섯 따귀를 맞은 건 스물아홉(어머니가 두 번째 결혼을 한 나이)이었다.
버섯은 찹쌀탕수육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두 병째 마신 중국술로 인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빙의된 상태였고, 내가 논문의 첫 문장을 고치지 않겠다고 하자 정치국 상무위원은 목이버섯을 들어 올리던 젓가락을 내던졌다.
"기본이 안 돼 있어!"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인용하며 지도교수를 바꾸든가 내 머리통을 바꾸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했다. 한때는 그가 쓴 과학 에세이 '마르크스와 물리학(부제: 나는 언제나 결정론을 꿈꾼다)'을 존경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내 머리통을 마오쩌둥의 머리로 바꿔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쇠사슬과 함께 논문 목차를 잃었고 그 후로 두 학기 동안 교수 추천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스물다섯에서 스물아홉의 나이 동안 나는 우주의 어떤 법칙을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행복했고 나 자신이 아름다웠다. 문득 거울을 볼 때면 빛처럼 빛나는 타래가 부드럽게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빛 타래에서 사무용 물풀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서른 살 봄이었다. 나는 이 년 차 연구 조교의 상징으로 입술 끝이 찢어져 다홍색으로 벌어진 상태였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만성 면역력 결핍증 인간이 되어 갔다. 교수들의 고차원적인 자기 자랑과 노골적인 편 가르기에 지쳐 갔으며 이 모든 것을 견딘다 하여도 결국은 헛된 시간 낭비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안이 나를 옥죄였다.
그때 은하수를 만났다.
"옆집 박사들이 그렇게 간다더라. 논문 통과를 다 알아맞힌대."
오 년 차 연구 조교인 AP가 말했다. AP는 근처 대학들을 옆집, 앞집, 뒷집으로 부르며 누가 얼마 만에 논문을 써 통과하는지 학기 말마다 정보를 모았다. 그 정보에 따르면 이대 앞 웨딩드레스 거리 후미진 골목에 있는 '은하수 역학관'에 가면 품격 있는 점쟁이 '은하수'가 언제 논문 심사를 통과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야, 그것도 역학이야."
AP는 말했다. 나는 그냥 같이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으라고.


이마를 덮는 단발머리에 은색 안경테를 쓴 은하수는 평소엔 티스푼 위 간장처럼 조심스럽게 말하다 마이크를 쥐면 사 옥타브의 고음을 내지르는 어느 가수와 닮아 있었다.
"서른넷, 이때 아주 대박 친다."
내 사주팔자를 본 은하수는 그렇게 말했다.
"어떤 대박이요?"
AP가 은하수의 책상에 가까이 붙어 앉으며 물었다.
"뭐든 다, 원하는 건 다 이뤄요. 타고나길 돈 만지는 손으로 타고났는데, 서른넷이 되면 큰 손은 못 돼도 작은 손 정도는 될 거고, 남자도 원하는 사람 골라 사귀다 싫증나 헤어지면 더 좋은 남자가 올 거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나도 모르게 나온 웃음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은하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중년 이후에 망신살이 좋게 와요. 사람들 앞에서 허리 숙이는 일을 하겠는데 그게 정치일 수도 있고, 어느 단체의 단체장일 수도 있고."
은하수의 말에 AP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거 봐, 오길 잘했지, 라고 말했다. 은하수는 내가 물어 본 논문 통과나 유학 얘기는 말하지 않았다. 그 둘만 빼놓고 모든 걸 좋다고 했다.
"근데 이름이……."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던 은하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름에 물이 많네. 잘 쓰면 재물인데 넘치면 홍수라 물을 잘 막아야 돼요."
"홍이요?"
내가 물었다.
"아니, 그건 좋고, 주."
은하수는 주(注)라는 한자가 물을 만드는 수도꼭지인데 이게 잘못 열리면 사주에 물이 넘쳐 알코올중독이나 음독자살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너 어제도 죽고 싶다고 했잖아."
AP는 현상적 비물질 상태를 은유한 나의 말을 오해하며 은하수의 사주풀이에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나보다 내 운명에 더 적극적인 AP가 물었다. 은하수는 오만 원을 내면 물을 제때에 잠글 수 있는 글자를 지어 주겠다고 했다. 홍주라는 이름은 그대로 두고 이름의 한자만 바꾸면 된다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다시 '죄송합니다'.
"바꾸기 싫으면 내 말을 명심해요. 우울증 조심하고 매년 늦가을에 만나는 이성을 조심해요. 중년 이후에 오는 망신살을 제대로 맞으면 나이 든 사람하고 추문이 날 수 있으니 사적인 자리에서 과음하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이번 학기에 내 논문이 통과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은하수의 품격인 것 같았다.


사 년 후 나는 서른넷이 되었고 완벽히 불행했다. 학위 논문은 번번이 심사에서 떨어졌으며 이듬해 가려고 했던 미국 남부 대학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도 탈락했다. 나는 블랙베어의 은근히 비추천을 암시하는 교묘한 추천장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돌려 보았으나 그렇다고 좌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 밑 떨림과 근육통, 헛구역질과 변비에 시달리던 나는 마그네슘 부족이라는 동네 약사의 처방에 따라 하루에 한 번 마그네슘 영양제를 복용했다. 그러다 우연히 지방에서 열리는 '마그네슘 학술 포럼'이라는 세미나에 참석해 겸손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를 가진 어느 마그네슘 전공자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 후 서울에서 그와 딱 한 번 와인을 마셨다. 한 달 후 내가 그의 숨겨 둔 세 번째 애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꼬리를 잡아 머리의 정체를 밝혀내기도 전에 불행의 폭죽이 연달아 터졌다. 대학의 구조조정으로 내가 맡던 교양 과목 강의가 날아갔고 국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연구 공모에도 떨어졌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웬 팔자주름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 누구세요?
제가 흰 머리 뽑아 드릴게요.
돌이켜보니 그 마그네슘과 만난 것이 늦가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오 분 동안 스트레칭을 했다. 여름옷의 삼분의 이를 버리고 화장실 쓰레기통을 바꿨다. 욕실 거울을 닦고 주말마다 동네 김밥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에 삼백 개 이상의 김밥을 마는 주인아주머니를 보며 그동안 내가 읽은 책과 내가 복사한 논문과 내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한글 파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 애썼다. 시금치와 볶은 햄, 깻잎 안에 넣은 참치가 흐트러지지 않게 김밥을 마는 기술보다 내 형이상학이 우월하다는 오만함도 버렸다.
노동으로 인한 근육통과 블랙베어의 성난 이두박근의 차이를 깨달으며 나는 사십만 팔천 구백 원을 벌었고 내 과거와 미래가 김밥이 잘리듯 잘려버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억울해하지 않았다. 다만 김밥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는 육교를 건널 때면 육교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긴 했다.


가로수의 잎들이 노랗게 질려 차도로 뛰어드는 가을이 되자 반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고모는 내가 저장해 두지 않은 휴대폰 번호(고모인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테니까)로 전화를 걸어 어젯밤 너의 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숨을 거두셨으니 네가 사람이라면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라 말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갔다. 사십만 팔천 구백 원에서 남은 십오만 원을 조의금으로 내고 처음으로 죽은 사람의 손을 잡아 보았다. 할머니의 손은 삼 일간 랩에 씌워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 같았다. 나는 완전한 죽음 어쩌고의 내 논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헛소리인지 깨달았다. 설령 죽음이 하나의 공간이고 길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인간도 그 길을 갔다 되돌아올 순 없었다.
그 후 나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졌다. 유리창에 서리가 끼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는 동안 나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고 사람 목소리를 내며 누군가와 통화하지도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집 근처 공원에 가면 녹슨 철봉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다 어느 사주풀이 사이트에서 나의 신년 운세를 보았다.


이제껏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세계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 호기심이 앞으로의 십 년을 좌우한다.



2. 수박 씨


집안 말아먹을 년.
내가 그 말을 들은 것은 아홉 살 여름이었다. 그날은 할머니가 어느 잔치 집에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고 돌아와 매 끼 누가 네 밥을 챙겨 주냐 한두 끼는 알아서 좀 먹어라, 라고 말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할머니의 태도는 유독 차가웠고 할머니는 시궁쥐를 보듯 나를 보았다.
할머니의 냉대의 이유는 자정쯤 밝혀졌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고종사촌이 밤에 수박을 먹다 나에게 씨를 뱉었는데 나는 팔꿈치로 그의 코뼈를 노크했고 그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에게 말했다.
"이 집안 말아먹을 년아, 할머니가 오늘 너한테 왜 밥 안 준 줄 알아? 네가 집안 말아먹을 년이라서 그래. 이 집안 말아먹을 년아."
사촌이 말하길 할머니는 잔치 집에 온 무당에게 내 사주를 보았는데 그 무당은 내가 커서 집안을 말아먹을 팔자를 타고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었다면 사촌의 앞니마저 두들겨 줬겠지만 아홉 살의 나는 내 존재의 비밀을 깨닫기라도 한 듯 몸 안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휴지로 코를 틀어막은 사촌이 나에게 수박껍질을 던지며 욕해도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집안을 말아먹을 년이라는 것을. 내 안의 숨겨진 무언가가 나와 내 집안을 말아먹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리라는 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년월일을 갖고 태어난다. 여기에 태어난 시간을 더하면 사주팔자의 네 기둥과 여덟 글자가 만들어진다.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고 김밥으로 보일 때쯤 나는 김밥을 말지 않는 시간은 오직 전기장판과 사주 명리학에 의지해 보냈다. 도서관에서 빌린 사주팔자 책들을 보며 음양오행을 깨우쳤고 인터넷 동영상으로 백호살과 망신살을 배웠다.


― 그러니까 한 마디로 사주가 무엇이냐, 사주는 계절학입니다. 지구가 태양계에 속해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오든 부처가 오든 그건 변치 않는 진리란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 볼까요? 쉽게 말하는 거 좋아하시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 봄에 태어난 사람은 봄의 계절성을 갖고 태어나고 그 계절성이 그 사람의 대학, 취직, 연애를 좌우한다는 말입니다.


계절성이란 무엇일까. 계절성이 어떻게 취직을 좌우할까? 논문 통과도 좌우할까?
나는 감색 개량한복을 입은 남자의 '돈, 피, 섹스, 그리고 백호살'이란 동영상 강의를 보며 생각했다. 부산 사투리의 억양이 남아 있는 그의 말에 따르면 2008년 3월 16일 오전 11시에 태어난 사람은 그날의 기온과 습도, 일조량, 바람의 세기 등이 미래의 돈, 공부, 연애, 건강 상태를 좌우했다.
죽은 할머니는 말했다. 네 아버지가 한창 밭 갈 시기에 태어난 소띠라 평생 일만 하다 죽었다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이며 우리는 단지 그 덩어리의 일부분을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할 뿐이라고.
나는 전기장판 위에 누워 할머니의 운명론과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사주를 만세력 사이트에 입력해 보았다. 슈뢰딩거와 보어, 하이젠베르크의 사주까지 모조리 입력해 보았다.


한때 나는 과학의 세계를 신뢰했다.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작용하는 중력과 계산 가능한 마찰력을 믿었다. 물리학의 기호들, 가령 위치를 나타내는 'p'와 운동량을 뜻하는 'q'의 수식이 나무에 매단 해먹을 보는 것처럼 편안했다. 원소들의 핵 원자 반응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고 비록 알아주는 사람이 적을지언정 나의 연구가 의미 있는 일이라 믿었다.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람들은 '원자'라고 하면 드라마 속 숙종이나 연산군의 아들을 떠올린다는 것을. 빨간 도포를 입고 아장아장 걷는 아역배우의 연기를 헬륨이나 칼륨의 원자 반응보다 사랑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랑과 완전히 멀어진 세계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블랙베어의 말이 맞았다. 파워, 섹시, 유혹은 현실에서 하는 것이다. 목이버섯의 말이 맞았다. 차라리 나에겐 주사위 놀이가 어울렸다. 그게 내 운명의 수준이었다. 세상은 나에게 상자 속 'p'와 'q'의 도구를 쥐어 쥐고는 상자 문을 닫고 내가 그 상자 안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사람에겐 저마다 사주팔자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그 키워드를 찾아내는 것이 사주팔자 해석의 첫 관문이다. 나는 내 사주팔자의 키워드를 쉽게 알아냈다.
'말아먹다.'
부모 없이 자란 초년 운을 지나 나는 집안을 말아먹는다는 무당의 저주를 피해 과학의 물리법칙 세계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아먹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어 연구실 조교로 내 젊음을 말아먹었다. 내가 김밥 집에서 김밥 말이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내 인생을 말아먹는 것을 피하려 선택한 일종의 방어 수단이었다. 사주에선 그런 걸 액땜이라 한다.
말아먹는 걸 피하고 싶으면 일단 뭐든 말아라.
나는 이런 말장난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치한 것과 간절한 것의 차이 정도는 알았다. 나는 간절히 내 사주의 결핍과 과잉을 조절하고 싶었다. 인생을 말아먹기 쉬운 내 사주는 목화토금수의 음양오행 중 수(水)가 가장 많았고 한눈에 봐도 온통 물바다였다.



3. 레즈비언 사주팔자


그날따라 녹인 초콜릿을 가득 넣은 식빵이 먹고 싶었다. 나는 어느 대학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에 참석해야 했고 그 세미나의 두 번째 논문 발표자가 조교 AP의 친구 선배의 남편이었다. 그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에 따른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현실적 암울성'이란 글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K대 응용과학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가 남아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세미나가 열리는 대학의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 앞 빵 가게에서 초코 빵을 샀고 그 빵을 학교까지 걸어가며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명색이 세미나 참석자인데(망신살을 조심해야지) 길에서 초코 빵을 뜯어 먹을 순 없다는 생각에 학교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의 횡단보도를 건넜다. 멀지 않은 곳에 고가도로가 보였고 그 아래로 벽돌만 한 초코 빵을 뜯어먹기에 적당한 후미진 골목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세미나에는 꼭 참석할 생각이었다. 조교 AP의 친구 선배의 남편을 만나 연구소 자리가 남아 있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내 입은 할 수 있었다. 초코 빵을 먹는 데만 쓰라고 있는 입이 아니었다. 나는 고갯길을 따라 걸었고 온 길을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한 번씩 뒤돌아보았다. 그때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은하수 철학관.'
'선녀보살'과 '흑진주 작명소', '백일홍 명리학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은하수 철학관'.
나는 설탕이 듬뿍 든 밀가루 덩어리를 삼키다 그 간판을 보았다.


사주, 작명, 예언 적중. 나의 대박 운은 언제 오는가.


나도 정말 그게 궁금했다. 나의 대박 운은 언제 오는가. 나는 은하수로 걸어가며 다짐했다. 오만 원, 아니 십만 원을 내서라도 나의 대박 운을 찾으리라. 나도 이제 사주를 좀 알았다.
사주에 수가 많아 물난리가 나면 수를 막는 토(土)를 써서 조절해야 했다. 수는 어둠, 응집, 겨울, 가라앉음, 핵, 씨앗, 풀어내야 할 그 무엇, 휴식, 죽음 같은 휴식을 뜻했다. 나의 수는 세미나에 가서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연구소 자리를 구걸할 바에야 평생 후미진 골목에서 이천구백 원짜리 초코 빵이나 뜯어 먹으라 명령했다.
저 은하수가 그때 그 은하수일까. 이대 앞 웨딩드레스 거리에서 흐르던 그 은하수가 맞을까. 은하수의 은테 안경은 그대로일까. 티스푼 위 간장처럼 다소곳해 보이던 입술과 귀 뒤로 꽂은 단발머리는 그대로일까.
나는 마지막 초코 빵을 입에 넣고 입가를 털었다. 쉼 호흡을 한 번 하고 은하수의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글자와 마주했다.


암자에서 묵언 수행 중


나를 맞이한 건 붓글씨 펜으로 써서 붙인 흰색 종이였다.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어느 암자에 있다는 말도 없었다. 나는 눈 밑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현기증이 났다. 은하수 옆에는 백일홍과 선녀 보살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오직 은하수가 필요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고가도로를 지나는 차들을 보았다. 한 대, 두 대, 백서른두 대까지 보았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말아먹을 수 있었다. 뱃속에서 초코 빵이 요동쳤다. 아랫배가 부글거렸다.
안녕, 이리 와. 급히 변을 보기에 적당한 후미진 골목아.
내 사주의 수들이 초코 빵을 반죽하며 나를 조롱했다. 나는 짧은 보폭으로 뛰었다. 너무 급히 뛰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중간에 멈췄고 그사이 화장실을 찾았다. 편의점과 부동산이 보였지만 오르막을 오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가다리 밑 굴다리로 갔다. 거기서라도,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했다. 낮고 캄캄한 굴다리 어딘가에 움푹 팬 좁은 구멍이라도 있지 않을까. 휴지도, 칸막이도, 하수처리 시설도 없는 굴다리였지만 그대로 바지에 볼일을 보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바지에 싸는 게 나을까. 식은땀이 났다. 머릿속에 망신살의 주사위가 굴러갔다. 그때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즈비언 주팔자


그것은 '잠만 자실 분, 빈 방 있어요'라는 전단지 옆에 붙어 있었다. 낯설지만 오래 꿈꿔 온 듯한 단어들이 내 심장을 두들겼다. 낮고 컴컴한 굴다리 한구석에서 '레'와 '사'의 글자가 해맑게 튀어 올랐고 오징어다리처럼 잘라 놓은 전단지 아랫부분에는 휴대폰 번호와 함께 한 장씩 뜯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뜯었다. 그다음 내 몸은 두 가지 물질이 일으키는 국소적 파동에 전율했다. 하나는 내 손 안에 구겨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중력에 저항하며 엉덩이와 바지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


이틀 뒤 나는 레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주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삼 분 뒤 답장이 왔다.


상담 주제, 궁금한 점을 보내시면 참고해 상담합니다.
상담료 이만 원. 선불.


삼십 초를 고민한 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어떻게 만나나요? 혹시 이번 주 수요일 가능한가요?


삼 초 뒤 휴대폰이 울렸다. 레사였다.
"직접 만나고 싶으세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았다.
"직접 만나는 거 말고 뭐가 있나요?"
"전화로 해도 되고 이메일도 있고요."
"어떻게 다른가요?"
"네?"
"세 개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은하수를 만났을 때처럼 죄송하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 나도 사주를 좀 알았다.
"이메일은 이만 원, 전화는 삼만 원, 직접 만나는 건 오만 원이요. 상담 시간은 사십 분이고, 차 값은 각자 내는 걸로."
차 값이라고 하는 걸 보니 카페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말하는 레사의 목소리는 어딘가 기묘하고 쓸쓸하게 들렸다. 마치 시 플랫과 미 플랫을 오가는 저음의 관악기 소리처럼.


다음날 나는 논현역 근처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갔다. 사람들이 없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나는 레사를 기다리는 십오 분 동안 두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휴대폰을 보고 있을까, 손은 어떻게 하고 있지, 머리카락은 어느 쪽으로 넘기는 게 나을까 따위를 고민하며 레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을 일 분 남기고 레사가 나타났다. 레사는 나를 한 번에 알아보고 출입구부터 내가 앉은 테이블까지 곧장 걸어왔다. 흰색 운동화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레사는 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음료 안 시키세요?"
긴 우산을 벽에 기대어 세워 두며 레사가 물었다.
훗날 내가 레사와 더 가까워졌을 때 나는 레사에게 어떻게 나를 한 번에 알아보았느냐고 물었다. 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한테 전화해서 만나자는 여자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 앉거든.'


우리는 둥근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다. 레사는 키가 크고 얼굴이 긴 편이었다. 머리카락은 감고 말리는 데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처럼 짧았는데 푸들의 털처럼 고불거렸다. 심한 곱슬머리인 것 같았다.
"어떻게 절 아셨어요?"
레사가 물었다.
"전단지 봤어요."
"어디서?"
"미아리 고개요."
"설마."
레사가 말했다. 설마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설마, 그럴 리가? 설마, 거기까지?
나는 레사의 '설마'를 쉽사리 해석하지 못하며 레몬 페퍼민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사도 잔을 들어 두유 라떼를 마셨다. 그런데 컵을 들어 올리는 레사의 오른손에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정확히 오른손 약지 손톱에.
설마, 둘리일까. 하지만 정말 둘리였다. 레사의 약지 손톱에는 분홍색 혓바닥을 반쯤 내밀고 있는 초록색 얼굴의 둘리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쪽이세요?"
레사가 물었다.
"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
"레즈시냐고요."
레사가 물었다. A형이세요? B형? 별자리가 뭐예요? 신발 치수가 어떻게 되죠? 마치 그런 것을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었다. 속에서는 열이 났다. 설마, 그럴 리가.
레사는 컵 안에 든 두유 거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대면 상담은 그만뒀거든요. 하도 좆같은 일이 많아서."
나는 레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에 당황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사는 자기의 라떼 잔을 테이블 끝으로 밀며 말했다.
"지금이 열 시 이십 분이니까 정확히 열한 시까지 상담하고 끝낼게요."


레사가 해석한 내 사주팔자는 이러했다. 나는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나무 없는 산인데, 겨우 있는 나무라고 해봤자 춥고 어두운 땅에 있는 나무라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고 했다. 부모 복이 없고 대인 관계도 좁아 무엇을 하든 남보다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노력해 원하는 것을 이루어도 마음은 공허할 거라 했다.
열세 살 봄부터 학업 운이 들어와 공부에 재미를 붙였겠지만 이 운도 작년까지가 끝이라 공부로 뭘 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 놀랐다. 정확히 나는 작년 가을부터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그렇다고 직장 다닐 사람은 아니고, 관에 뿌리가 없어서 직장 다녀도 상사가 상사 같지 않아서 때려치울 거예요. 사업 운은 좀 있는데 물건을 만들어 파는 건 아니고 스스로 시장을 만들거나 교육하는 게 맞는데 말재주가 없어서 이것도 오래 못 해요. 그래도 몇 개 추천하면 네일아트나 그런 쪽 가면 잘 맞아요."
네일아트라고 말할 때 레사는 잠시 내 눈치를 보았는데 내 손톱과 머리 스타일을 빠르게 훑었다.
"거기도 썩 어울리진 않네."
레사가 말했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서른넷에 대박이 난다던데."
"누가 그래요?"
"예전에 본 데서요."
레사는 내 사주팔자를 띄워 놓은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대박이라고 보면 대박인데, 근데 워낙에 얼어붙은 사주라 화가 들어와도 어떻게 못 해요. 봐요,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겨울 산에 또 서리가 내리는 풍경인데 거기다 대고 화가 들어오면 어떻겠어요?"
"어떤데요?"
"진흙탕 되는 거죠."
레사가 말했다. 레사의 말에 따르면 나는 따듯함과 빛을 간절히 바라는 사주이지만 막상 화(火)가 들어오면 내 고유의 성질이 흐려질 뿐이었다. 내 고유의 성질이란 꽁꽁 얼어붙은 겨울 산이며 사람과 동식물이 살 수 없는, 그저 엽서의 한 풍경으로 담기 좋은 절대 고독의 설산이었다.
"하는 일이 뭐예요?"
레사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냥…… 뭐 좀 써요."
"작가?"
레사가 물었고 나는 웃었다. 아니라는 뜻이었는데 레사는 그렇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글 쓰는 운은 좀 있어요. 워낙 움직이질 않는 성향이고, 반복적으로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런 거 맞아요. 잘 갔네요."
나는 웃었다. 뭘 좀 복사한다고 했어야 했나, 김밥을 만다고 했어야 했나.
"어디 쪽? 방송은 안 맞을 텐데. 혹시 영화?"
"네…… 뭐……."
"그렇지. 티브이는 화 쓰는 데라 안 맞고 수 쓰는 영화가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왠지 레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레사의 오른손 약지 손톱에 붙어 있는 둘리 스티커가 마음에 들었다. 심한 곱슬머리와 짧은 머리 길이도 좋아 보였다. 미 플랫과 시 플랫을 오가는 저음의 목소리와 목 부분이 약간 늘어난 티셔츠도.
"그럼 시나리오 쓰고 그러겠네요? 어떤 거? 멜로나 코미디는 아니겠고, 범죄나 살인? 약간, 아무도 안 보는?"
'약간, 아무도 안 보는?'이라 말할 때 레사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레사의 취향을 가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사도 끄덕였다. 슬슬 열이 오른다고 했다. 슬슬 열이 오른 레사가 말하길 자기는 글재주가 없는 데다 화가 지나치게 발달해 생각을 글로 쓰기 전에 말로 다 해버린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하려는 말까지 해버려 누굴 만나고 나면 기운이 다 빠져나간다고.
"어쩐지……."
레사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 지었는데 왼쪽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떻게 보면 꽤 어울리는 그런 보조개였다.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레사가 말했다.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남자 복이 좋다던데."
"풋."
레사가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비웃어도 되는 건가. 나는 당황했지만 음료를 마시는 척 컵을 들어 올리며 표정을 감췄다. 레사는 허리를 세우며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나한테 솔직하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러면 내가 사주를 못 풀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시간낭비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할 뻔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레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카페의 여자 화장실 칸이 한 칸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자리에 앉아 레사를 기다렸다. 잠시 후 손에 물기를 묻힌 레사가 테이블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냉면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


내가 무엇으로 집안을 말아먹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기꾼이 되기엔 말을 못 했다. 돈을 탕진할 만큼 술과 도박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범죄자가 되기엔 망치, 칼, 올가미 따위의 도구를 잘 다루지 못했고 그 흔한 운전 면허증조차 없었다.
대체 내가 무엇으로 집안을 말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넌 커서 집안을 말아먹을 년이래.
코피를 흘리는 고종사촌이 말할 때 나는 내 운명의 암호가 밝혀진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거대한 빙하가 내 가슴에 거꾸로 박혀 그 어떤 빛이 와도 녹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도 안다. 내가 집안을 말아먹을 년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아빠가 죽고 엄마도 떠났겠지.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흘렀다. 나는 콧물 훌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으로만 숨을 쉬며 내 운명의 빙하 속에 갇혔다.


"식초 뿌려 먹어요. 그쪽은 목이 귀해서 신걸 많이 먹어야 돼요."
레사가 나에게 식초가 담긴 플라스틱 병을 건네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어요?"
"다 있지. 금은 매운맛, 토는 단맛, 목은 신맛."
레사는 은근히 반말을 썼다. 어떤 때는 존댓말.
"난 여름엔 냉면으로 살아요."
레사는 긴 눈매로 냉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둥글게 말린 면을 양념장에 골고루 비비며 진심으로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 염색한 적 있어요?"
레사가 물었다.
"아뇨."
나는 거짓말을 했다. 실은 이삼 년 전부터 새치 때문에 검은색으로 머리를 물들여 오고 있었다.
"살짝 해도 괜찮아요. 브라운 계열로. 검은색보다 밝은 색 옷을 입는 게 좋고요. 음악 듣는 것도 좋은데 가사 있는 거 말고 없는 걸로 들어요. 누구 만나면 말이라도 따듯하게 하고, 안부도 묻고. 아, 밥 먹을 땐 밥만 먹어야지."
레사가 말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한 장 뽑아 가볍게 입가를 닦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사주를 보는구나.
나는 육수 주전자를 들어 레사의 빈 컵에 육수를 따라 주었다. 우리는 사주에 대해 얘기하며 냉면을 먹었다. 금(金)이 예쁘게 자리한 사람은 피부가 좋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야기와 열두 동물의 십이지지에 왜 고양이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냉면을 다 먹은 다음 가게를 나와 나는 레사에게 내 몫의 냉면 값을 건넸다.
"뭐야, 이상하게."
레사가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제가 차를 살게요."
"그러시든지."
'요'라는 끝음절은 들릴 듯 말 듯 흐리면서 레사는 검은 장우산을 들고 걸어갔다. 나도 레사를 따라 걸어갔다. 오후 한 시의 태양이 우리의 머리 위에 내리쬐었다. 어디선가 자전거 벨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몸의 어딘가가 달콤하고 불안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떨어져 걷는 나에게 레사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레사는 해가 내리쬐는 길 위에 서서 우산을 펼쳤다. 그것은 우산이라기보다 파라솔에 가까웠고 펑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덮었다.


레사는 한여름, 정오의 시간에 태어났다고 했다. 사주에 온통 화(火)뿐이라 물 한 모금, 바람 한 점이 절실하다고.
"이걸 잘 느껴 봐요. 이 더위, 열기. 이게 내 사주예요."
레사의 사주는 나와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모두 레사를 찾고 레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만 정작 레사는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이제는 재만 남았다고 했다.
더위 때문인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레사의 목소리 때문인지, 나는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팔과 어깨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녹색 카펫이 깔린 테이크아웃 카페가 나타났다. 고층 빌딩 사이 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레사는 주문대로 걸어가 레몬에이드 두 잔을 시켰고 나는 카페 앞 벤치에 앉았다. 빌딩 유리에 비친 흰 구름이 마치 누군가 그린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담배 피워요?"
레사가 밤 껍질 색 가죽 지갑을 열며 물었다.
"아뇨."
"피우지 마요. 사주에 금이 없어서 폐가 약해."
레사는 가죽 지갑 안에서 담뱃잎을 꺼냈고 다른 주머니에서 사각형 종이를 꺼내 필터와 담뱃잎을 넣고 담배를 말았다.
"난 말아 피워요."
레사가 말했다. 무엇이든 '말아먹는 것'에 관심을 갖는 나는 레사의 담배 말기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런 것도 액땜이 될까.
레사는 혀를 내밀어 종이에 침을 묻히더니 종이 끝을 꼬집어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 후 허공에 길게 내뿜었다.
"사람이 말이죠. 뭐가 알고 싶으면 뭐가 알고 싶은지 정확히 물어야 돼요. 진짜 궁금한 게 뭐예요?"
레사가 말했다. 나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물었다.
"제가…… 서른네 살에 대박이 난다고……."
"아, 진짜."
레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으로 날 꼬집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죠, 나 이 짓 접었다고. 근데 그쪽한테 연락이 왔고, 나도 뭔가 예감이 있어서 나오지 않았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은하수의 영어 명이 밀키웨이라는 것과 레사의 단골 카페라는 그곳의 이름이 '밀키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빌딩 벽에 그래피티로 그려진 카페 이름을 바라보았다. 레사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 끝을 비비며 말했다.
"내 전단지 보고 연락하는 사람은 두 부류예요. 하나는 레즈랑 쓰리썸 해보려고 수작부리는 새끼, 다른 하나는 레즈로 국을 끓여먹든 뭘 하든 관심 없는 아줌마. 근데 그쪽은 둘 다 아니죠, 그럼 뭘까요?"
"뭘까요."
내가 말했다. 레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겨울 생들이랑은 뭘 하기가 힘들고 한 번 말할 거 세 번 네 번 말해 줘야 겨우 못 이기는 척 자기 마음을 새 발의 피 만큼 보여준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날 욕하는 말 같았다.
"사람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레사가 물었다.
"마음고생 해본 적 있느냐고요."
나는 질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고생이야 늘 하고 있지.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고 레사는 두 번째 담배를 말았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레사의 담배 연기와 빌딩 유리에 비친 비현실적인 구름을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 후 레사는 다시 검은 우산을 펼쳤다.
"이제 어디로 가요?"
나는 레사의 우산 아래 서서 물었다.
"불의 여자와 물의 여자가 만났으니 뭘 해야 할까요?"
레사가 말했다. 나는 또 현기증이 났다.


사주팔자의 여덟 글자 중 일(日)에 해당하는 위 글자는 자기 자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 아래 글자는 인생의 배우자를 가리키는데 두 글자의 역학 관계로 그 사람의 부부 궁합을 알 수 있다.
가령 자기의 글자가 수(水)이고 그 아래가 화(火)이면 이 사람은 부부 금슬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수는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고 화는 위로 퍼지려는 성질이 있어 그 두 개가 위아래로 만나면 자연스레 궁합이 좋은 것이다.
레사는 호텔에 가자고 했다.
"체크인 할게요."
레사가 말했다. 레사가 프런트 앞에 서서 신용카드를 내밀 때 나는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해 머리를 매만지다 괜히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호텔 방에 들어선 레사는 자연스럽게 카드 키를 리더기에 꽂았다. 실내 온도를 낮춘 후 양말을 벗었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나는 그동안 침대 끝에 걸터앉아 창밖만 보았다. 회백색 건물 벽에 붙은 '생선구이 백반'이란 간판이 보였다. 어디선가 굴착기로 땅을 파는 공사 소음이 들렸다. 문득 그날 아침에 읽은 '오늘의 운세'가 떠올랐다.
'자기의 주장이 강해질 수 있는 날이니 상대에게 받으려고 하기보다 베푸는 마음을 갖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인내심을 발휘하면…….'
얼마 후 샤워가운을 입은 레사가 욕실에서 나왔다.
"이제 좀 살겠네."
레사는 가방에서 작은 튜브에 담긴 로션을 꺼내 얼굴과 손에 바른 다음 거울 앞에 서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안 씻어요?"
거울을 통해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레사가 물었다.
"괜찮아요."
"긴장 풀어요. 안 잡아먹어."
레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말을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긴장 풀어요. 안 잡아먹어.
그곳은 대학의 입학시험 면접장이었고 나는 장학생으로 뽑히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 서 있었다. 떨리긴 했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뛰어난 과학자가 되리라는 확신. 나에 대한 믿음. 나는 나 자신을 말아먹지 않을 거라는 의지.
"그럼 발만 씻고 올게요."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 레사의 고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거울에도 한 올, 샤워기 아래에도 한 올. 나는 물이 튄 변기 뚜껑을 휴지로 닦고 그 위에 앉았다.


그토록 재미있던 책이, 논문이, 이론이, 수식이, 어째서 단 한 글자도 보기 싫어진 것일까. 레사의 말대로 공부 운이 다한 걸까. 내 학업 운을 만들었던 목(木)이 이제는 다 시들어 내 본래의 성질인 겨울 산으로 돌아간 것일까. 절대 고독으로?
내가 과학의 세계를 좋아했던 이유는 내 마음 따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동일한 물리 법칙이 작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내가 울고 싶은지 어떤지와 상관없이 물의 부력은 내 부피만큼 나를 밀어낸다.
"저기요."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레사를 불렀다.
"말해요, 들려."
"나 지금 샤워해도 돼요?"
레사는 샤워가운을 입은 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뭐야, 귀엽게."
레사가 말했다. 나는 귀엽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 빨개진 얼굴로 욕실 문을 닫았다. 바지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변기 위에 앉아 생각했다.


사주팔자의 목화토금수의 기운은 수도의 온수조절처럼 감으로만 파악한다. 디지털 온도계로 정확한 수온을 설정할 수 없으니 뜨거운지 차가운지, 아니면 미지근한지, 오직 피부의 감각만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오행의 성분을 숫자로 바꿔 좀 더 명확하게 나타낼 수는 있다. 가령 내 사주의 성분을 '목7, 화10, 토9, 금0, 수106'으로 수치화하고, 십 년씩 바뀌는 대운에 따라 그 변화를 그래프로 만들어 시각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목(木)이 생기이고, 힘이고, 어린아이이고, 교육이고, 새벽 세 시 반부터 다섯 시 반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해석이 해석자의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면 사주는 데이터의 패턴을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이 될 수 없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실험 조건을 공유할 수도 없다.
나는 속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듯한 물이 발등을 감쌌다. 그리고 언젠가 내 몸을 감쌌던 빛의 타래, 그 빛의 타래를 떠올리며 물속에 잠겼다.


레사는 트윈 베드 중 어느 쪽을 쓸 거냐고 물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레사는 창가 쪽 침대를 택했다. 우리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불 끌게요. 괜찮죠?"
레사는 베드 테이블 위에 놓인 리모컨으로 조명을 껐다. 흰색 린넨 커튼 사이로 바깥의 빛이 실내로 새어 들어왔다.
"안 벗을 거예요?"
레사가 물었다. 나는 안 벗겠다고 했다.
"벗는 게 좋을 텐데."
"벗으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볼 거 없어요. 눈 감고 있으면 돼."
나는 하는 수 없이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목욕을 했고 휴대폰 전원을 껐으며 창문 커튼을 주간 시사지의 두께만큼만 열어 놓았다. 준비 완료. 이거면 된 건가? 다른 뭐가 더 필요한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우리는 서로의 호흡을 느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나는 레사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해요."
레사가 말했다. 나는 눈을 떴다.
"눈 뜨지 말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나는 레사가 알려준 방법대로 숨쉬기에 집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자는 생각도 하지 말고, 없고, 없고, 없는 것의 세계로, 호흡으로.
어디선가 갈치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쉬."
레사가 소리 냈다. 내 머릿속 생선구이 냄새를 알아차리는 듯 레사는 말했다.
"생각이 들면 생각이 드는 대로, 그 생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대로. 애써 떨쳐내려 하지 말고."
나는 내 배꼽 아래에 집중했다. 레사는 꼭 그곳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숨은 온몸으로 마시며 온몸으로 내보내는 거라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마실 때는 부푸는 풍선처럼 내쉴 때는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음과 양, 물리와 둘리, 비냉과 물냉, 우리의 트윈 베드.
나는 문득 남산도서관 연체일이 떠올랐다. 이거 끝나고 남산에 가자고 할까. 도서관에 책도 반납할 겸.
"쉬."
레사가 소리 냈다. 나는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내 이산화탄소로 채워진 풍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걸렸다.
"쉬."
레사가 소리 냈다. 나는 숨을 쉬었다. 숨만 쉬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마가 둥근 여자 아이가 나타나 팬티를 내리고 오줌을 쌌다. 쉬― 쏴아― 노란 오줌방울이 흙바닥에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었다. 쉬― 쏴아― 초록색 둘리 스티커를 손등에 붙인 아이는 오줌을 싸며 어깨를 떨었다. 그다음 빙긋이 웃으며 자기의 팬티를 끌어올려 달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어디 갔니? 아빠는 어디 있어? 왜 혼자 있는 거야?


"자요?"
레사가 물었다.
"아뇨."
나는 내 상상 속 아이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난 졸리네."
레사가 말했다. 나는 눈을 떴다.
"나 좀 잘게요."
레사는 가부좌를 한 다리를 풀고 누웠다. 잠시 그렇게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더니 옆으로 돌아 팔베개를 하고 나를 보았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레사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는 레사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생겼다.
호흡 명상을 하자더니, 명상 지도 자격증도 있다더니, 레사는 정말 잤다.
나는 잠든 레사를 보며 레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말했다.
서른넷에 대박이 난다던데, 남자 복이 좋다던데, 재물운도 좋고, 중년 이후에 큰 손은 못 되어도 작은 손 정도는 될 거라던데.
레사는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없어요?
몰라요. 난 모르겠는데? 난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요.
레사는 말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사기꾼과 자기의 다른 점이라고.
내가 집안을 말아먹는대요.
나는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없어요?
없어요.
레사는 말했다. 사주팔자 명리학은 자기에게 적용하는 성찰이고 수양이지, 남에게 악담을 퍼붓는 게 아니라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면 그게 모여 사주팔자가 된다고.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고, 봄에는 꽃이 피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눈이 내려 땅에 이불을 덮어 주듯 음기를 모으고. 다시 봄이 오면 그 음기를 양기로 쓰고. 그렇게 음과 양, 빛과 어둠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운이 좋고 싶으면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어디 가서 신발 벗으면 뒤축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귀찮아도 양치질 하고 자고, 남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것을 내가 남에게 해주고.
나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볼까요?
뭘요?
사주팔자.
글이나 써요.
레사는 말했다. 어떤 것을 알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알고 나면, 나중엔 그걸 써 먹고 싶을 때가 올 텐데 그런 함정에 빠져 무얼 하겠느냐고.
"더 좋은 게 있어요. 내가 알려줄게."
레사는 시원하고 깨끗한 호텔에 가자고 했다. 호흡 명상을 하자고 했다. 숨 쉬는 법을 알려준다더니, 자격증도 있다더니, 레사는 잠이 들었다.


*


― 날도 좋은데 산책 명상 할래요?
어느 토요일 오후, 레사가 문자를 보냈다.
― 산책 명상이요?
― 걸으면서 하는 거예요. 내가 알려줄게요.
우리는 남산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반납할 겸. 레사는 나에게 편한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했다.
"남산에 책 빌리러 오는 사람도 있구나."
레사는 나의 도서관 회원 카드를 보며 말했다. 반납함에 책을 넣은 후 우리는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다. 길에 깔려 있는 고무 재질의 탄성 바닥재가 내 발을 밀어 올려주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돌과 나뭇잎들이 젖어 있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양손을 모으고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빠르게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통통한 엉덩이를 돌과 돌 사이에 비집어 넣을 때 물음표 같은 꼬리가 흔들렸다.


레사는 요즘 별자리 공부에 빠져 있다고 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의 목성과 화성의 각도를 설명하며 나중에는 우주물리학을 공부해 사주팔자와 별자리 점성학, 그리고 우주물리학이 융합된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라 했다. 운명에 대해 고민하고 해답을 찾는 전 세계인을 위한 영화가 될 거라고.
"이 년 후에 목 들어오니까 그때 확 불태울 거야."
레사는 미장센이 뛰어난 어느 감독과 감정 표현이 디테일한 어느 신인 배우의 사주를 찾아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의 궁합이 자기와 잘 맞을 거라면서.
"근데 시나리오 쓸 사람이 없네."
레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보폭을 조금 빨리해 걸었다. 그때까지 나는 레사에게 내 진짜 직업을 말하지 못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과학보다 영화에 더 가깝긴 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어떤 과학은 한 편의 영화 같으니까.
죽음은 어떤 공간이어서 계속 걸으면 나오는 길이다. 나는 쉬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을 산책하고 때론 다람쥐를 만나며 레사와 호흡했다. 어느 날은 내가 레사에게 물었다. 레즈비언이 되는 사주팔자도 타고나는 것이냐고. 레사는 말했다. 설명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고. 나는 레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레사는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듯 나의 마음속 빙하를 녹여 주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내가 잠들 때까지 내 등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그렇게 십 년 동안 레사와 나는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작가소개 / 김멜라

2014년 단편소설 「홍이」로 제6회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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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G112

    뒷부분도 재밌지만 앞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표현들이 계속 연결되면서 톡톡 튀네요. 밤에 슬쩍 보다가 쭉쭉 빠져서 배터리가 다 닳아 화면이 나갈 때까지 읽었습니다. 말아먹는 것도 마음에 들고, 비현실적인 논문과 희화화된 할머니의 장례식, 계속 애매모호한 것들이 퐁퐁 터지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 그런데 어쩌면 가장 애매한 것인 사주팔자가 주인공의 인생을

    • 2018-12-16 11:22:19
    G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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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112

      (헉 댓글 수정이 안되네요;;) 슬금슬금 밀어 가며,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만 반응에서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촉매처럼 작용하는 것까지. 이거 말고도요! 배경적인 요소들을 일부러 구체화하려고 해서 조금 어색한 느낌은 받았지만, 읽고 있으면 슬그머니 창피함을 공유하게 되는 재밌는 소설이었습니다~

      • 2018-12-16 11:27:45
      G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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