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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 작성일 2013-05-01
  • 조회수 6,367


구두

 

최정화

 


 

 

최정화-소설삽화

 

 

 

   그때 딱 잘라 여자를 돌려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습니다. 어째서 바보처럼 그 여자에게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한 걸까요?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요. 하긴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웠거든요. 삼일 동안 폭설이 내렸고 그러고도 날이 풀리지 않아 쌓인 눈이 거리에 꽁꽁 얼어붙어 도시 전체가 온통 얼음산이었습니다. 여자의 양 볼과 코끝이랑 귓바퀴가 새빨갛게 얼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 누구라도 여자를 그냥 되돌려 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실은 미리 도착했는데, 시간을 맞추느라고 이 근처를 한 시간이나 배회했지 뭐예요.”
   여자는 어딘가 저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구두를 벗었어요. 디자인은 세련되었지만 오래되어 모서리가 다 닳아 빠진 검정색 가죽구두였어요. 뒤축의 굽이 다 닳아서 현관 바닥의 타일과 부딪치며 울리는 짜랑짜랑한 마찰음이 귀에 거슬렸어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고 여자가 그걸 봤어요. 여자는 내 반응에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죠.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당당히 고개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여자가 벗은 구두는 축이 망가져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약간 비뚜름하게 놓였습니다. 산 지 적어도 오 년은 지나 보이더군요. 부도가 나서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그 당시에는 꽤나 유행을 했던 브랜드의 상품으로 매우 세련된 디자인이었어요. 하지만 발볼을 둘러싼 가죽은 잔뜩 늘어났고 발 등에 달린 금속의 술 장식은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솔질을 한 탓인지 다른 부분은 광택이 났지만 구두코는 다 해져서 허연 속가죽이 드러날 만큼 닳아 있었습니다. 일부러 연민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아닌 거라면 여자가 경제적으로 딱한 처지에 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거실을 둘러보곤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어요.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여자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타인의 집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퇴근했을 때나 아이들이 하교 후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문을 들어서며 느끼는 안락함에 대한 기대, 혹은 새집에 이사와 첫발을 들이는 이의 설렘 같은 게 묻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으신가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 여자는 마치 내 집을, 우리 집을, 내 남편과 내 아이와 나의 집을, 자기 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웃음을 지을 리 없지요. 네, 바로 그 미소가 “여기는 이제 내 집이고, 지금부터 나는 너가 될 수 있어.” 하고 말하고 있었어요. 정확히 그 말이었어요. 소리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난 정확히 알 수 있었지요.
   순간 어찌나 당혹스러웠던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 여자를 집에서 일초라도 빨리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죠. 그 생각을 들킬까 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어요. 난 뒤돌아섰고 그 여자는 성큼성큼 집 안에 들어왔어요. 난 침입 당했다고 느꼈어요. 그 여자의 발이 내 집 거실 위에 놓이는 순간부터 몹시 불쾌했어요. 이 모든 것이 지나친 반응이고 과도한 경계심일까요? 아니에요, 그 여자의 다음 행동을 보셨다면 선생님도 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여자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습니다. 그게 뭐 대수냐고요? 제가 친정 일로 몇 번이나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았지만 자기 옷을 옷걸이에 건 사람은 그 여자가 처음이었어요. 보통은 옷을 벗으면 두어 번 개켜서 자기 옆에 놓죠. 몇 분 후에 나갈 생각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여자는 이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아니, 나갈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아아, 하필이면 저는 왜 옷걸이를 거실에 두었을까요, 제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여자는 거실로 들어서서 티브이를 마주보고 탁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바깥쪽에 앉았고 그러자 마치 여자가 집주인이고 제가 면접을 보러 온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화로 얘기를 들으셨다시피, 제가 삼 주간 집을 비우는 동안 집안일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청소랑 세탁, 식사를 챙기고, 아이들 과제를 좀 봐주시는 정도니 일이 어렵지는 않으실 거예요.”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작정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면접을 보려고 한 시간이나 추운 거리를 배회했다는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었죠.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면접은 일단 진행을 해야겠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자에게 전에 가사도우미 일을 몇 년이나 했는지 물었습니다. 여자는 조금 망설이더니 처음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처음이지만, 집안일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칠 년간 저는 전업주부였답니다. 밖에 나가는 일이라고는 장을 보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일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일을 하시려는 이유는 뭐죠?”
   “남편이 사고를 당했어요. 저만 빼고 말이죠. 전 그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전라도에 있는 외삼촌댁에 머물고 있었어요. 이 주에 한 번씩 집에 들렀는데, 그러기를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전화를 받았죠.”
   여자는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느꼈고, 자기 스스로도 그걸 느꼈는지 손바닥을 한쪽 얼굴에 갖다 대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거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여자의 눈이 반짝였고 표정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교통사고였어요. 흔한 일이죠.”
   여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이제는 과거를 다 극복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연기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어요. 따뜻한 차라도 대접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러자면 물을 끓이고 차를 타고 그걸 마시고 하는 동안 면접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일부러 음료를 내지 않았던 거예요. 형식적으로 면접을 보고 되도록이면 집에서 빨리 내보낼 셈이었죠. 하지만 여자 쪽에서 제게 음료를 내올 것을 요구하더군요.
   “죄송하지만, 뭐 좀 마실 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목이 너무 말라서…….”
   전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건너갔어요. 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램프를 켰어요.
   거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막내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고 있었어요. 물론 아이는 순순히 답했고요.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막내의 볼을 쓰다듬거나 자기 무릎 위에 앉혀 놓았을 거예요. 그 생각을 하니 안절부절 못하겠더군요. 물이 다 끓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 결국 미지근한 물에 매실액을 타서 거실로 내갔지요. 추운 그 겨울 날씨에 찬물을 대접한 겁니다. 여자는 딱딱하게 언 막대기 같은 손가락으로 컵을 들고는 꿀꺽꿀꺽 냉수를 잘도 마시더군요. 저는 죄책감과 함께 묘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때 초인종이 울리는 바람에 여자의 사정 이야기를 더 듣지는 못했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이 다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완전히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사실 시간이 허락했다고 해도 거기까지 캐묻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남편은 그날따라 일찍 퇴근했습니다. 늘 저녁을 먹고 오는데 그날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저녁을 찾았어요.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죠. 식구들만의 저녁시간이 시작되었으니 여자는 이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 거잖아요. 그러나 그런 제 계획은 남편의 한마디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도록 하시지 그래?”
   남편에게는 몸에 밴 친절 같은 게 있었어요. 내가 처음 남편을 좋아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의 결과, 목적이나 의도로 친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습관적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처음으로 남편의 그런 성격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예상대로 그 여자는 식사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우리 식구들과 그 여자가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을 먹는 상황이 벌어졌죠. 여자가 저녁상 차리는 걸 돕겠다고 하는 걸 저는 굳이 말렸습니다. 여자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은 이 집에 면접을 온 가사도우미일 뿐이라고요. 그러니 우리 식구처럼, 아니 안주인처럼 굴지 말라고 말입니다.
   결국 주방에선 나 혼자 저녁상을 차리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그 여자가 티브이를 보면서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흘끗 본 순간 내 의도와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어 간다고 느꼈어요. 그들이 한 가족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거든요. 그래요, 선생님 말씀대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 끔찍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최대한 식탁을 차리는 시간을 단축해야 했지요. 실은 저녁 메뉴로 남편이 좋아하는 해물탕을 하려고 낮에 장을 봐두었는데, 그냥 점심때 먹었던 찌개를 다시 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식사 준비를 마치고 둘째를 불렀어요.
   “아빠한테 식사하시라고 해.”
   아이가 제 아빠의 팔을 당기자, 남편은 여자에게 "식사하러 일어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저한테는 그 말투가 지나치게 다정스럽다고 느껴졌어요. 저는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나에게 쓰는 말투와 똑같았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두부 버섯 찌개다.”
   아이는 식탁 의자에 올라가 엉덩이와 어깨를 흔들어 대었습니다.
   “수선 떨지 말고 어서 자리에 앉아.”
   나는 괜히 아이에게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화장실 좀 갔다 와서.”
   둘째 녀석이 화장실로 달려가자 여자가 그 뒤를 좇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디 가세요?”
   스스로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걸 느끼고 전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아, 저도 화장실에.”
   “저쪽에 있어요. 반대쪽으로 가시죠. 저기 보이는 방 바로 옆이에요.”
   그래요, 아마도 전 여자가 우리 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남편과 첫째, 둘째 녀석이 나란히 앉았고 저는 그 맞은편 한가운데에 앉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먼저 돌아온 건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안쪽 자리, 남편의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곧 둘째가 후닥닥 뛰어와서는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쓰기 시작했어요.
   “난 아줌마 옆에 앉아서 먹을 거야.”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어요. 입안이 말라 물을 들이켰습니다. 남편은 제 속을 모르고 허허 웃고 있고만 있었지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손은 깨끗이 씻고 온 거야?”
   아이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더니 여자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씨익 미소를 던졌습니다. 나는 아이의 손바닥을 찰싹 내리치고 싶은 걸 참느라 왼손으로 식탁보를 쥐었습니다. 숟가락을 든 오른손이 조금 떨렸습니다.
   “금방 갔다 올게요, 아줌마.”
   여자는 아이의 엉덩이를 살짝 때리는 시늉을 했고 둘째는 재빨리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식탁 앞에 나타났죠.
   아이는 집게손가락으로 옆자리 의자를 가리켰습니다. 저더러 건너가 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옆자리로 비켜 앉았고, 아이는 여자 옆자리에 앉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자 쪽으로 의자를 바싹 당겼습니다. 제가 속이 좁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전 그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마치 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여자는 그걸 즐기고 있을 테고요. 나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의자에서 일어설 때 여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어요. 여자는 재빨리 밥그릇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라지면 여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테니까요. 자신의 불행한 과거는 잊고 내 행세를 하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남편의 느리고 온화한 저음이 나를 악몽에서 다시 현실로 구출해 내었습니다.
   “왜 더 먹지 않고.”
   남편이 고추장아찌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입맛이 없네.”
   나는 거실로 건너갔습니다. 티브이를 틀고 소파에 앉았습니다. 식탁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볼륨을 줄이고 화면을 응시한 채 주방 쪽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72년 5월생이에요.”
   “내 생일도 5월인데.”
   첫째가 말했습니다. 마치 생월이 같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식구가 될 수 있다는 듯한 다정한 말투였습니다. 나이를 묻는데 어째서 생월까지 대답한 걸까?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줌마도 쌍둥이자리예요?”
   첫째는 요새 별자리와 그리스 신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글쎄, 별자리는 모르겠는데.”
   “생일이 며칠인데요?”
   “15일.”
   “15일?”
   “스승의 날이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그럼 황소자리예요.”
   어서 저들의 만찬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무슨 얘기가 나오든 배를 잡고 깔깔 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신의 전문 분야가 나오자 첫째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황소자리의 성격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자기 방에서 『12별자리 운세』를 가져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다 먹고 읽어 드리는 게 어떠니?”
   첫째는 들떠서 아빠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맡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충실히 해낸다. 평상시에는 거의 화를 내지 않지만 한번 성이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격한 면이 있다. 관능적인 쾌락을 좋아한다.”
   첫째가 읽기를 멈추었습니다.
   “몸의 감각기관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다고 써 있네. 아줌마, 관능적인 게 뭐예요?”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자는 머뭇거리더니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 댔습니다. 한낮의 단잠은 금방 깨기 마련이죠. 나는 음흉한 그 여자의 성격을 아이의 별자리 책이 경고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지요. 여자는 본색을 감추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고 말 겁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주방을 맴돌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슬그머니 사라지려는 것이 통쾌했습니다. 여자는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아이를 빼고 다들 눈치 챘을 거예요. 여자는 식탁 밑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숟가락을 주운 뒤 얼굴을 들었습니다. 마치 그러고 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나 봅니다. 하긴 해결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남편이 그사이 좋은 대답을 준비해 두었으니까요.
   “인기가 많다는 거야.”
   침묵이 어색해진다 싶은, 적절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인기요?”
   “그래. 반에서 여자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은 남자 아이가 있지? 또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고 말이야. 그런 걸 어려운 말로 관능적이라고 해.”
   “아줌마 인기 많았어요?”
   “그럼.”
   여자가 명랑하게 답하고 나서, 남편을 보고 싱긋 웃어 보였습니다. 식탁보 밑으로 여자의 손이 남편의 무릎을 쥐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대화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 막내가 밥을 한 그릇 더 달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자기 집 주방이라도 되는 양 솥에서 밥을 퍼다 주었습니다. 여자가 우리 집 식기를 만지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식사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티브이 리모컨의 볼륨을 높였지만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실 옷걸이에 걸린 여자의 외투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외투를 옷걸이에서 빼내었습니다. 갈색의 외투가 흐트러진 모양새로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외투가 어떤 짐승이 벗어 놓은 허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주방에서 내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그 짐승이 사람인 척 우리 식구들을 홀리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몹시 외로웠고 한편으로는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외투를 주워들고 다시 옷걸이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때 급히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아, 정말 죄송해요.”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나는 주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남편은 의자를 뒤로 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어요. 바지에 찌개 국물이 흥건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하마터면 소리 내어 깔깔 웃어버릴 뻔했지 뭐예요. 나는 어떤 종류의 승리감을 느꼈습니다. 술기운이 오르듯이, 내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부의 표면까지 꾸물거리며 순식간에 번져 나오는 그 기분에 도취되었습니다. 이마까지 붉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잔인하게 비웃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 따위 실수를 하다니 조심성이라고는 없다고 핀잔을 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가사도우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죠.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습니다.
   여자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행주를 가져다가 남편의 바지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자 남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그러고는 그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한번 바라보고 따라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내더군요. 나는 남편 뒤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은 여자의 실수에 대해 조금도 힐난하는 기색이 없이 차분하게 행동했습니다. 나는 그런 남편의 침착한 태도에 긴장이 풀렸고 좀 전까지 사로잡혔던 혼란 속에서 조금쯤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정이 아주 딱하게 되었더라고.”
   나는 옷장에서 새 면바지를 꺼내 남편에게 건네주고, 얼룩이 묻은 양복바지를 받아들었습니다.
   “가족들이 사고를 당해서 완전히 혼자가 됐대.”
   남편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거야. 고아였기 때문에 친척도 한 명 없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습니다. 남편을 자극해 보려는 수작인지, 여자에 대한 악감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미리 꾸며 둔 것도 아닌 이야기가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었습니다.
   “정말 안됐네.”
   남편의 무성의한 대답에 다시 한 번 안도하면서, 바지를 갈아입고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까 그 얘길 듣는데 울컥하더라고. 영 기운도 없고 밥이 목구멍에 안 들어가네.”
   내 설명이 스스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던 거구나.”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저 여자 얘기야?”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다거나 하는.”
   “밖에 들리겠어.”
   남편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충고했습니다.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남편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남편은 비합리적인 생각을 싫어했으니까요. 고아 얘기에서 멈췄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만 재빨리 입을 다물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를 떠보려는 의도는 성공한 셈이었습니다.
   “요새 너무 예민한 것 같아.”
   “알고 있어. 그래서 자기 말대로 전주에 가서 쉬다 오겠다잖아.”
   “당신을 위해서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젖은 바지를 팔에 걸치고 천천히 방문 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남편이 뒤따라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남편에게 몸을 맡기며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마음속으로는 킬킬거리고 있었지요. 여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상대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것입니다. 너 따위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너와 나는 바뀔 수 없어. 나는 갑자기 이 상황이 즐겁고 만족스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거실로 나가자 여자와 아이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줌마,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아줌마랑 자고 싶은 거야?”
   여자가 막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습니다. 내내 몰랐는데 환하게 웃으니 보조개가 들어갔습니다.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습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좀 전의 실수에 당황한 얼굴이 아직까지 상기되어 있더군요. 저는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조금 전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손님방이 있어요. 거기서 자고 가요.”
   좀처럼 뭔가를 요구하거나 졸라대는 일이 없는 첫째 녀석의 조금은 무뚝뚝한 목소리였습니다.
   “아줌마는 아줌마 집에서 자야지.”
   여자는 허리를 숙여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우리 애들은 낯가림이 없고 정이 많아서 잠깐 만난 사람들도 꽤나 따르죠. 무엇보다 구김살 없이 자라 준 이 아이들이 사랑스러웠고, 모처럼 식탁 앞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행복을 느꼈을 여자에게도 좋은 일이었겠다 싶었습니다. 여자의 미소는 내 일상의 행복을 증명해 주었던 것뿐인데 괜히 마음을 졸인 내가 속이 좁았다고 느꼈습니다. 여자는 아이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은 채 내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습니다.
   “꼭 연락 주세요.”
   “네, 결정 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복도까지 배웅을 할 생각이었으나 여자는 굳이 나올 것 없다며 나를 들여보냈습니다. 배웅은 아이들에게 맡기고, 나는 식탁을 치우러 주방으로 갔습니다. 무언가 큰 행사를 치르고 난 기분이 들어 개수대 턱에 양손을 올려놓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얼른 주방을 정리하고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죠.
   식탁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설거지까지 다 마치고 난 뒤였습니다. 나는 식탁에 기대어 서서 주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주 깔끔한 솜씨였어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내일 오후에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삼 주간 집안일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뉴스를 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현관문을 열어 둔 채 엘리베이터 앞까지 여자를 배웅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만 들어가, 얘들아.”
   여자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습니다. 아이들은 제 아빠가 출근할 때 그렇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겠지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장면이었습니다.
   “괜찮은 것 같아?”
   “나쁠 것 없지.”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내가 면접을 더 본다고 해도, 아니면 그냥 여자를 고용한다고 해도 그저 수긍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막내가 내 무릎을 타고 올라와 앉았습니다. 나는 뒤쪽에서 아이의 작은 등을 꼭 안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준비해 둔 재료로 해물탕을 끓였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잠들어 있었고 남편과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를 나누며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빨리 내려가고 싶어졌어. 외삼촌도 빨리 뵙고 싶고.”
   “그래, 좋은 공기를 마시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돌아오지 않는다고 보채지나 말라고.”
   남편이 허허 웃었습니다.
   “어릴 때 다른 조카들보다 날 특별히 예뻐하셨어. 자기 아들내미보다 날 더 챙기는 바람에 숙모가 날 미워할 정도였지. 날 쌀쥐라고 부르셨는데.”
   “쌀쥐?”
   “너무 하얘서. 외삼촌이 붙여 주신 내 최초의 별명이야.”
   도우미 건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나는 면접 약속이 된 분이 두 분 더 계시긴 한데 추운 날씨에 몇 명이나 오라 가라 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얘기했고, 남편은 여자의 인상이 좋아 보였다며 동의했습니다. 낮에 전화를 걸어 여자에게 다음 주 화요일에 출근해 달라고 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얘기를 나누느라 준비가 좀 늦어져서 남편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남편을 배웅한 뒤 다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현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 때문에 바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여자의 구두가 거기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시고 다시 현관 앞으로 가서 구두 앞에 잠시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구두는 어제 저녁 여자가 벗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조금 비뚤게 놓여 있는 구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게 점점 더 불길한 물건처럼 느껴지더군요. 얼른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구두에 손가락이 닿는 것조차 꺼림칙했습니다.
   그 여자가 내 구두를 탐낸 거라면, 그래서 바꿔 신고 간 것뿐이라면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작 구두 한 켤레쯤은 없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는 생각 말이에요.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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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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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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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정말 코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를 작품입니다. 읽는 동안 숨이나 쉬었는지 모르겠네요...

    • 2013-07-12 09:08:34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13-07-12 09:31:53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