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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떤 세계의 경우

  • 작성일 2016-06-01
  • 조회수 2,479

[단편소설]



어떤 세계의 경우



안보윤



1


테이블에는 거칠게 세공된 유리잔과 검은 넥타이가 놓여 있었다.
지하 바bar의 실내는 어두웠다. 테이블마다 적당히 긁히고 부은 얼굴의 사람들이 주문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작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깨나 허리 근처의 구김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넥타이와 비슷했다. 매듭 자국이 뚜렷한 상체와 달리 다리는 직각으로 반듯하게 세운 채였다. 테이블 간격이 워낙 좁은 탓에 검은 무릎들은 불규칙하게 맞닿거나 통로 쪽으로 불쑥 튀어나갔다.
주원은 불안한 두께의 유리 테이블을, 등받이가 낮은 보라색 소파를 걷어차지 않도록 주의하며 통로를 걸었다. 소파 밖으로 튀어나온 손과 무릎이 몸을 스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향냄새가 밴 건조한 피부가 닿아 올 때마다 주원은 소스라쳤다. 무언가 검고 변덕스러운 것이 제게로 훌쩍 건너올 것만 같아서였다. 불온한 것과 위험한 것,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주원은 최대한 몸을 작게 웅크려 구석으로 피했다. 장례식장에서와 똑같은 행동이었다. 바 옆 골목에 위치한 장례식장에서 주원은 상에서 밀려난 떡 한 접시처럼 오후 내내 굳어 있었다. 딱 그만큼의 무게와 존재감이었다.
화장실 맞은편 그늘진 자리에 앉아 주원은 넥타이를 풀었다. 폭이 넓은 지퍼형 넥타이는 장례식장에 파견된 상조 직원이 빌려준 것이었다. 목에서 막 풀어냈음에도 조문용답게 서늘하고 뻣뻣했다. 완벽한 복장으로 자식보다 더 빨리 장례식장에 도착하는 상조 직원이라니. 그가 진중한 얼굴로 장례 절차를 일러주고 잘못을 바로잡아 줄 때마다 주원은 세상에 다시없을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넥타이를, 주원은 겉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자 백시멘트 가루가 부스스 흩어져 주원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천장에 드문드문 박힌 노란 전구가 필사적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나 사각지대에서 흘러내린 그림자가 한계까지 몸을 부풀린 상태였다. 주원은 가만히 테이블 위로 얼룩진 그림자를 들여다보았다.


*


―……나와나와나의 세계였던 겁니다.
주원은 흠칫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었었는지 오른쪽 뺨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감각이 둔해져 있었지만 턱이 미묘하게 비틀린 느낌은 선명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시멘트 가루가 묻어 나왔다. 뺨과 손바닥이 허옇게 변한 채 주원은 당황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함께였는지 모를 남자의 앞에 빈 유리잔이 두 개나 놓여 있었다. 남자가 손에 들려 있던 세 번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주원에게 건넸다.
―아시겠습니까?
―네? 뭐를요?
―지금껏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나와나와나의 세계에 대해서요.
―모, 모르겠는데…… 중요한 건가요?
―중요한 겁니다.
주원은 말을 얼버무리면서 남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가 주원의 앞에 털썩 주저앉던 장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마르고 상체가 길쭉한 남자였다. 그림자와 노란 불빛으로 얼룩져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다. 저는 당신 일행이 아닌데요. 주원이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문을 추가하며 말했다. 어차피 다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의미의 일행인 겁니다, 우리는.
남자가 갈색 액체를 천천히 흔드는 동안 달각거리며 몸을 부딪는 얼음들을, 주원은 골똘히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서 똑같은 장면을 적어도 열 번쯤 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걸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리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중요해요.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나와나와, 흐음, 그 뭐라는 세계란 말이죠.
―나와나와나의 세계.
―네, 나와나와나의…… 중요한 것치고는 이름이 좀, 유치한데요. 진짜 중요한 건가요?
―유치한 게 아닙니다, 그 세계는. 무시무시하다면 모를까.
남자가 정색을 하며 턱을 문질렀다. 콧잔등과 인중에 노랗게 고여 있던 불빛이 우물쭈물 다른 부위로 옮겨 붙었다. 취한 건가. 주원은 슬그머니 시간을 확인했다. 바에 들어온 뒤로 두 시간 반 정도 지나 있었다. 그 정도면 누나의 직장 동료들이 애도를 표하고 돌아가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시간이었다.
―그 세계에 대해선 언젠가 기회가 될 때 다시 이야기하죠. 제가 그만 돌아가 봐야 해서요.
―그러십시오.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은 오른쪽 옆머리와 어깨에 붙은 가루들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서를 찾아 두리번대는 사이 남자가 빠르게 덧붙였다.
―분명 다시 얘기할 기회가 올 겁니다.
―네?
―당신이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기회를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


장례식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주원은 찜찜한 마음을 털어버리지 못했다. 백시멘트 가루가 폐포 가득 차올라 단단히 굳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무얼 알고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걸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남자가 알지 못할 것도 없었다. 주원은 최근 석 달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단기간 내 가장 많은 정보가 유출된 인물이기도 했다. 주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소한 기록들이 맹렬히 자가 증식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주원이 평생 기억을 되감아도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빈소 입구에 반듯하게 서 있는 직원과 마주한 뒤에야 주원은 안주머니를 뒤져 넥타이를 꺼냈다.
주원은 천천히 옷깃을 정리하며 빈소1과 빈소2를, 빈소3과 빈소6을 둘러보았다. 습자지처럼 얇은 벽을 경계로 대여섯 개의 죽음이 맞물려 있는 곳. 그럼에도 슬픔의 단면이 거칠어지진 않는 기묘한 곳. 주원은 한 번 더 어깨를 털고 앞이마를 닦았다. 슬픔을 짓눌러 놓은 공간치고는 지나치게 예의바르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영정 앞에 다시 자리 잡은 주원 때문에 친척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호기심 어린 시선과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반응이 섞여 있었으나 이제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왔니.
주원의 어깨를 슬쩍 누르며 주원의 누나가 옆에 앉았다. 사람들을 배웅하고 온 참인지 옷자락에 텁텁한 배기가스 내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주원은 딱딱한 표정으로 주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과, 그 앞에 수북이 쌓인 국화들을 바라보았다. 저 수북한 조문의 흔적 중 주원과 관계된 사람의 것은 단 한 개도 없을 것이었다.
―어디 가 있었어?
―그냥 여기저기. 누나 직장 사람들은 다 다녀갔어?
―그럭저럭.
주원의 누나가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 역에 도착했어, 라는 문자가 주원의 자리에서도 보였다. 직장 동료와 시댁 식구들, 대학교와 중·고등학교 동창, 매형의 직장 동료들이나 조카의 친구 부모들. 앞으로도 주원이 자리를 피해 줘야 할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빈소 입구가 발소리로 소란해지자 주원은 슬그머니 일어나 쪽방으로 스며들었다.
세상에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이 아직도 널 기억하겠니. 걱정하지 마, 누가 물어보면 내가 아니라고 해줄 테니까. 누나는 그렇게 큰소리쳤지만 정작 조문객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매형의 반응은 특히 신경질적이어서 일찌감치 조카를 데리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계단참에서 큰 소리로 싸우던 매형과 누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냥 쪽지 한 장일 뿐이잖아. 주원이 듣기에도 누나의 목소리는 불신과 모멸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설령 진짜 주원이가 그런 거라고 해도, 쪽지 한 장일 뿐이잖아. 화를 못 참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한 줄짜리 메모일 뿐이라고.
―당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 쪽지 한 장에 처남의 썩어 빠진 인성이 드러났단 생각은 안 해? 그 쪽지 한 장에, 유가족이 목을 매달 정도로 상처받았던 건 생각 안 해? 당신도 당신 동생이랑 똑같은,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었던 거야?
―내 동생이 아니라잖아!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그거 외에 뭘 믿으란 거야!
주원은 쪽방과 로비와 주차장과 장례식장 근처 골목들을 번갈아 돌며 조문객을 피했다. 흡연실 의자와 셔터를 내린 가게 앞에 오래 머물렀다. 불 꺼진 휴게실과 화장실 좌변기 칸 안에서 깜빡 잠들 때도 있었다. 지금 주원이 아버지 장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뿐이었다.


*


남자는 이제야 바에서 나온 듯했다.
골목 끝 모퉁이에 선 채로 주원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새벽 두 시였고, 이번만큼은 조문객 시선을 피해서가 아니라 바람을 쐬러 나온 참이었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주원은 비치되어 있던 슬리퍼를 신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던 발이 냉기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밤바람이 표적을 정해 둔 것처럼 정교하게 주원의 몸을 긋고 지나갔다.
남자는 두꺼운 고무를 덧댄 가게 출입문에서 삼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남자 머리 위로 곧게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 덕분에 주원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창백하고 푸른 불빛이 남자의 인중과 턱에 달라붙어 익숙한 인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남자는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채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태연했다. 춥지 않나. 발가락을 옴죽거리며 주원은 그의 모습을 살폈다. 옆면이 지저분하게 긁힌 구두 한 짝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이 먼저 눈에 띄었다.
주원은 남자가 뚜껑이 반쯤 열린 맨홀에 한 다리를 쑤셔 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리가 빠진 건지 일부러 집어넣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남자가 구두 한 짝을 손에 쥐고 주저앉아, 무언가를 흥얼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은 구멍에 파묻힌 허벅지 아래 부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남자가 단조로운 리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고 있거나 흥얼대는 노래에 맞춰 박자를 헤아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취했구만.
주원이 짧게 읊조렸다.
―저만큼 취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맨홀에서 한쪽 다리를 빼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듯했다. 양팔을 지지대 삼아 빠지지 않은 다리에 우쩍 힘을 주면 끝이었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가볍게 수축하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전부였다. 주원은 차게 식은 몸 이곳저곳을 손바닥으로 부비며 몸을 돌렸다. 남자의 흥얼거림이 조금 더 커졌다. 주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우수수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쏟아져 나와 밤바람에 흩어졌다.



2


아버지 집에서 쉬다오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 온 것은 주원의 누나였다. 당초 일주일 예정으로 학교에 제출했던 병가는 주원의 뜻과 관계없이 무한정 길어지고 있었다. 일 년쯤 푹 쉬시는 것도 방법이겠고오, 하며 말을 늘인 교감선생은 마무리말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일 년 휴직계를 신청하니 이미 휴직처리 되어 있다는 행정과의 답변이 돌아왔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 찾아올 텐데 신경 쓸 거 없어.
주원의 집 냉장고에 김치며 반찬들을 차곡차곡 쟁여 넣느라 주원의 누나는 내내 등을 돌린 채였다.
주원은 오차 없이 완벽한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누나의 어깨와 팔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집 현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와 비상키, 장례식 때 들어온 조의금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 돈 봉투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주원이 몇 차례나 거절한 것들이었다. 주원의 지인 중 누구도 장례식에 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봐도 주원과 무관한 돈이었다. 아버지 집에 촘촘히 드나들며 마지막까지 수발을 든 사람도 누나였다.
―그 동네 땅값이 갑자기 치솟았잖아.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별장 지어 놓고 노닥거리다 보니 아버지 집이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더라고. 오래된 데다 별나게 지어지기도 했으니까. 수시로 찾아와서 땅을 팔아라, 공사를 새로 해라 유난들을 떠니까 그냥 무시해. 아버지 집은 팔 생각도, 뜯어고칠 생각도 없어.
―누나.
―보기 좋은 집은 아닌데. 그래도 오래 보니까 정이 들더라, 그 집이. 너도 지내다 보면 편안해질 거야. 주변 풍경도 괜찮으니까 머리 비우고 쉬기 딱 좋지.
주원의 누나는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빈 통을 챙겨 일어났다. 아래서 매형이 기다린다고 했다. 네 매형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현관에 서서, 부츠 지퍼를 올리고 바짓단을 정리하고 옷깃을 오래도록 매만지던 누나가 비로소 주원과 마주 섰다.
―진실이란 건 때론 엄청나게 힘이 없는 모양이야.
돌려줄 작정으로 주원이 들고 나온 봉투와 여타의 것들을, 주원의 누나가 힘주어 밀어내며 고백했다.
―나는 분명히 너를 믿고 있는데, 그런데도 가끔 그 사진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의심이 자꾸 피어올라. 그래서 내가, 널 보기가 미안해서 그래.


*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진실이니 왜곡이니 거창한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굳이 따지자면 질 나쁜 해프닝이 운 나쁜 사람에게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방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통해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시작점은 무더운 날 벌어진 자녀살해 사건이었다.
5월이 되자마자 끈질겨진 햇빛이 8월에는 광란하듯 쏟아지고 있었다. 폭염과 폭력의 기록이 경쟁하듯 이어졌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에는 무더위로 죽어버린 사람과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불쾌지수와 공격적이 된 동물들 이야기로 가득했다. 자녀살해 사건도 그런 뉴스 중 하나였다. 요약된 기사에는 살인적인 더위 속 대로 한복판에서 아버지가 딸을 때려죽인 사건, 이라 기록되었으나 실제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집에서 휘두른 스패너가 여학생의 뇌를 일차적으로 망가뜨렸다. 집에서 뛰쳐나가는 여학생을 아버지가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리면서 여학생의 갈비뼈와 팔이 부러졌고, 비틀대며 대로로 나가는 동안 뒤에서 걷어차고 머리채를 휘어잡는 통에 발목인대가 끊어지고 비장이 터졌다.
그럼에도 여학생은 꾸준히 걷고 기어 대로로 나갔다. 밤 11시쯤 벌어진 일이었으나 열대야가 계속된 만큼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박혀 있었다. 여학생은 지하철역 앞 택시 승강장에 도착해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보도블록에 주저앉았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틀어박았다. 앞으로 길게 쏟아진 머리칼이 여학생의 처참한 얼굴을 숨겨 주었다. 아버지는 거기까지 쫓아와 여학생의 뒤통수를 두 차례 후려갈겼다. 여학생은 크게 휘청인 끝에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거리의 누구도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고 여학생을 위해 구급차나 경찰차를 불러 주지 않았다. 뒤통수 두 대는 결정적이고 살인적인 폭력이라 칭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가정과 골목에서 쏟아진 폭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여학생에게 욕설을 퍼부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여학생은 두 시간 동안 택시 승강장 보도블록에 앉아 있었다.
택시들이 몇 차례 경적을 울리다 다른 손님을 태우고 떠났다. 어느 남자가 여학생 다리 아래 흥건히 쏟아진 무언가를 보고는 소변을 보았다고 생각해 혀를 차며 지나갔다. 그것은 여학생이 앉은 자리에서 끊임없이 게워낸 피였다.
사건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한 건 택시 승강장 가벽에 붙은 애도의 쪽지들 때문이었다. 여학생의 반 친구들과 선생이 택시 승강장에 찾아와 국화꽃을 놓고 갔다. 여학생이 오래 앉아 있었던 보도블록에 그녀가 좋아했던 초콜릿과 웨하스를, CD와 책을 두고 갔다. 택시 승강장 가벽에 여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과 편지를 붙이고 갔다. 사진 속 여학생은 말간 얼굴로 웃고 있거나 거대한 모자에 짓눌린 채 키득대고 있었다. 사건을 알게 된 시민들이 여학생의 앳된 얼굴을 더듬어 보고는 그 위에 애도의 쪽지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세상으로 나오는 건 비극적인 일이었다. 애도의 물결은 승강장 가벽을 수 겹의 메모지가 촘촘히 뒤덮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주원 역시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학생이 죽은 택시 승강장이 주원의 퇴근길에 위치해 있어 남들보다 더 빨리 사건에 대해 알았다. 주원은 가벽을 차곡차곡 덮어 가는 색색깔 메모지를, 보도블록에 쌓여 가는 국화와 선물들을 전부 지켜보았다. 더 이상 놓을 곳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합판으로 단을 쌓아 향초와 화분과 쿠키 상자를 쌓아 나갔다. 택시는 승강장에서 삼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손님을 태웠다. 애도의 마음이 겹겹이, 단단히 일어서면 벽이 된다는 걸, 주원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함께 애도를 표하고 싶었으나 주원은 노란 포스트잇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빈약한 돛단배에 올라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써야 하는지, 어떤 말을 쓸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원은 다만 퇴근할 때마다 택시 승강장 앞에 멈춰 서 여학생을 위해 기도했다. 가벽에 붙은 애도의 기록들을 일일이 읽어 삼켰다. 금세 떨어질 것처럼 팔랑이는 쪽지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주기도 했다. 그러다 주원은 다른 쪽지와 달리 험악한 글씨체로, 그보다 훨씬 험악한 내용을 휘갈겨 놓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살해당한 여학생이 들어서는 안 될,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이었다.
그런 말은 여학생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사람도 들어서는 안 됐다.
오롯이 악의에 찬 한 문장을, 주원은 힘껏 노려보았다. 쪽지를 잡아 뜯을 셈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기이한 윤리가 그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자유 표현이라면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훼손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이것을 욕하고 훼손할 권리가 나한테 있는가.
뺨을 거칠게 후려 맞은 것처럼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맥박이 시끄럽게 뛰었다. 어쨌든 주원은 손을 내렸고, 쪽지는 살아남았다.


애도의 현장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가 주원을 보았다. 여학생의 죽음을 네 번이나 보도했을 정도로 기자는 꾸준한 사람이었다. 지속적인 관심과 정직한 호소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애도의 벽은 아름답고 숭고한 건축물이었다.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기자는 색색의 애도들을 카메라에 담다가 일그러진 얼굴로 멈춰 서 있는 주원을 발견했다. 가벽에 붙인 쪽지를 힘껏 누르고 있는 주원의 얼굴은 저절로 카메라 셔터를 누를 만큼 인상적이었다. 주원이 떠난 뒤 그의 쪽지를 클로즈업해 촬영한 기자는 경악했다.
그것은 추악하고 저열한 기록이었다.
추모 현장을 오염시킨 장본인은 기자의 카메라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기자는 신속한 보도를, 두려움 없는 고발을 신념대로 실행했다.
기사 속 주원의 얼굴은 흐리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주원의 학생들은 그가 입는 옷과 쌍가마인 탓에 늘 미묘하게 뻗쳐 있는 머리카락과 납작한 뒤통수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오른쪽이 살짝 솟은 불균형한 어깨와 팔뚝 핏줄이 솟은 위치와 ㄱ자로 휘어진 왼손 약지도 알아보았다.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라는 직업이 세상에 알려지자 비난의 수위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주원은 온라인상의 무엇을 확인해 볼 여력조차 없었다. SNS에서 쏟아지는 폭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원의 수업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흰 마스크를 쓰고 앉아 오로지 주원을 노려보는 데만 몰두했다. 일정한 박자로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주원을 위협했다. 교탁을 치워버리거나 앞문을 잠그는 건 예사였다. 책상을 전부 돌려 주원에게 등을 보인 채 자습을 진행하는 반도 있었다. 복도에서 작고 날카로운 것이 날아드는 일은 흔했고 주원의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학생도 있었다. 주원은 쉬는 시간마다 게릴라처럼 교무실로 뛰어든 학생들이, 자신의 책상에 빼곡히 포스트잇을 붙이는 광경을 견뎌야 했다. 샛노랗게 비어 있는 포스트잇이 주원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우리 학교가 덕분에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주원을 불러다 앉힌 교감선생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학부형들 항의도 항의지만, 나는 백오십 년 전통의 우리 학교가 이런 난장판이 됐다는 게 참을 수가 없어요. 선생이 한 몰상식한 짓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떤 피해를 보고 있는지 아십니까?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추모를 하려고 거기 갔었어요. 그 쪽지에 손을 댄 건, 사실 그건…….
―이걸 봐요.
책상 위에 놓인 주원의 사진을 교감선생이 가볍게 밀었다. 험악하게 구겨진 주원의 얼굴. 핏발 선 눈과 요철이 심해진 얼굴 근육이 모자이크 없이 놓여 있었다. 택시 승강장 가벽에 붙은 알록달록한 메모지가 주원의 검붉은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이런 겁니다, 진실이란 건. 눈앞에 이런 게 떡하니 있는데 무슨 말이 먹히겠습니까? 이게, 선생이 말하는 추모의 얼굴입니까? 선생 눈에는 그래 보여요?


*


주원의 아버지가 도심 외곽에 건물을 지은 건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집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모양새였다. 새카맣고 길쭉한, 굳이 특징을 찾아내자면 올바르게 각이 잡힌 삼층 건물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남매를 데리고 와 건물을 보여줬을 때 주원은 불탄 담뱃갑을 떠올렸다. 대학 신입생이 되자마자 서둘러 배운 담배가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탓이었다.
후에 주원의 누나는 그날 그 건물을 보며 거대한 도미노 골패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뒤로 척척 세워진 골패들이 한 번에 와르르 넘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고. 흡족한 기색의 아버지 표정과 달리 그런 식의 불길하고 두려운 장면이 눈앞으로 척척 걸어 들어오더라고.
언제부터 이것을 스스럼없이 집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까.
주원은 여전히 불탄 담뱃갑 같기도, 도미노 골패 같기도 한 건물 앞에 서서 생각했다. 누나의 걱정과 달리 아버지 집 앞뒤로 늘어서 있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인 모습으로 설계된 현대식 건물들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화사한 건물, 원목으로 만든 가늘고 긴 선베드와 테니스 코트가 바투 선 아버지 집을 한층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주원은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처럼 검은 집에 꽂혀 지냈다.
딱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을 먹었다. 햇빛이 드는 곳에 기대 잠들었다가 어두워지면 길고 좁은 정원을 내다보았다. 타르처럼 끈적끈적한 어둠이 눌어붙어 있어 정원은 거대한 돌계단으로 보였다. 무엇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집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뾰족한 모서리가 주원의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집 안의 가구들은 실제로도 날카롭게 각이 져 있었다. 모서리를 갈아내고 싶어질 때마다 주원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문병을 갔을 때 아버지는 깜짝 놀랄 만큼 졸아들어 있었다.
가죽이구나. 주원은 병실로 들어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아무렇게나 묶어낸 긴 가죽 같았다. 오래 써서 이곳저곳 구멍이 뚫린 가죽 주머니가 아버지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난 이 병원이 마음에 든다.
아버지는 오랜 입원생활을 변명하듯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말했다.
―사방이, 딱 떨어지는 사각형이, 멋지지 않냐. 멋진 곳이다. 느이 누나가 좋은 곳을 골랐어. 각이 이렇게, 이렇게 뚜렷하게 진 건 어떻게 봐도 괜찮다. 아주 좋아. 군대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꽉 각을 잡아서, 그게 최고 좋은 거라고.



3


배달된 즉석식품 상자를 집 안으로 들여놓으려던 주원은 어정쩡하게 제자리에 멈췄다. 웬 남자가 문 앞에 쌓인 상자 중 하나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마르고 상체가 길쭉한 남자였다. 앞집에 삽니다. 남자가 인사 비슷한 걸 주원에게 건넸다. 앞집이라면 그나마 단조로운 지붕과 한 가지 색으로 된 외벽을 지닌 집이었다. 주원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남자가 상자를 집 안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이전에 뵌 적이 있었던가요? 주원은 상자에 발이 찍히지 않게끔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모서리라면 집 안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원이 물러선 공간에 남자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상자들을 차례차례 들여놓은 뒤엔 당연하다는 듯 뚜껑을 열어 새우볶음밥 두 개와 냉동만두를 끄집어냈다.
주원은 아버지를 만나러 왔던 오래전 여름과 겨울을 더듬었다. 이웃이니 한 번쯤 마주치거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을지 몰랐다. 기억 어디에도 남자의 얼굴은 없었으나 말을 할 때 이상하게 비틀리는 턱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가늘고 좁은 코 아래로 떨어지는 노란 그림자 같은 것이 특히 익숙했다. 남자가 이죽거리듯 입술을 움직였다.
―기억력이 형편없으십니다.
―예, 뭐……
―그래서, 생각은 좀 해보셨습니까?
―뭘요?
―나와나와나의 세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


똑바로 주방을 찾아 들어간 남자는 프라이팬을 꺼내 새우볶음밥을 익히고 전자레인지에 만두를 해동시켰다. 싱크대 안쪽에서 간장과 식초를 끄집어내는 폼이 자기 집처럼 익숙했다. 이 집에 자주 오셨나요? 주원이 묻자 남자는 팔을 크게 휘저어 계단 위 할로겐 등과 천장 조명들을 가리켰다.
―전부 제가 단 겁니다.
―조명 기사세요?
―번역갑니다. 낮에 번역을 하고 밤에는 소설을 씁니다.
―그런데 왜?
―허리도 시원찮은 노인네가 사다리 위에서 조명을 갈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웃사촌이니 도와야지요. 종종 와서 밥도 얻어먹고 했습니다. 장례식장도 다녀왔어요. 그쪽은 기억 못 하는 모양이지만.
주원이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장례식장에서의 장면은 대부분 머릿속에 없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주원이 줄기차게 마주한 건 방수 페인트를 누덕누덕 칠한 주차장 바닥과 텔레비전을 뜯어낸 자국만 남은 휴게실, 친척들의 옷가지와 가방 등이 잔뜩 쌓인 쪽방 등지였다. 주원과 가장 많이 얘기하고 얼굴을 마주한 사람은 상조 직원이었다. 상조 직원의 얼굴이라면, 고지식해 보이는 은테 안경과 얇은 입술과 두 개로 쪼개져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에 대해서라면 주원도 얼마든지 할 얘기가 있었다.
남자가 상단 싱크대에서 푸른 접시를 꺼내 볶음밥을 담았다. 간장종지를 찾지 못해 잠시 헤매는가 싶더니 종이컵 상단을 가위로 쓱쓱 잘라 종지를 만들어냈다. 같이 드시죠. 남자가 식탁에 앉아 권하는 바람에 주원은 손님이 된 기분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던 날선 모서리들이 남자의 손 아래서는 더없이 유순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와나와나의 세계는 말입니다, 단 한 명의 인간으로만 채워진 세계를 뜻합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 세계인데요?
―내 소설 속에.
남자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다가가더니 제일 아래 계단 상판을 뜯어냈다. 주원이 놀라 일어나자 안에서 술병을 끄집어내서는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술 보관 창곱니다. 따님 몰래 만드신 건데 결국 한 병도 못 마시고 가신 모양이네요. 남자가 유리잔 두 개에 술을 따라 이번에도 손님에게 권하듯 주원에게 건넸다.
―내 소설 속 세계는 이렇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한 명뿐인데 그의 전생과 현생과 미래가 전부 뒤엉켜 지표면 위로 쏟아져 나와 있는 상태인 겁니다. 그가 삼천 번쯤 죽고 환생하길 거듭했다면 삼천 명이 동시에 튀어나와 제각각 살아가는 거죠. 세계에 깔려 있는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는 나인 셈입니다. 나는 나에게 영향을 받고 또 다른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게 얽히고설켜 점점 더 엉망인 세상이 됩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나는 나를 돕거나 위로하고 반대편에서 나는 나를 괴롭히거나 죽입니다.
―뭔가 복잡한데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 싸움이 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이 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때렸습니다. 그럼 때린 사람도 나, 맞은 사람도 나가 되는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들을 말렸다면 그것도 나, 누군가 본척만척 도망쳐 버렸다면 그것도 나. 모든 게 철저히 돌고 돌아 나에게 오는 겁니다. 부메랑처럼.
―부메랑처럼?
―반드시 돌아오죠. 어떤 식으로든.
주원은 유리잔에 담긴 맑은 액체를 조금 마셨다. 순식간에 혀뿌리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주로 막걸리를 마시던 아버지가 숨겨 놓은 술이라기엔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무엇보다 술병이, 더없이 둥글었다. 남자는 무얼 알고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까. 주원은 남은 볶음밥을 숟가락 뒷면으로 꾹꾹 눌러 으깨다 마지못해 고백했다.
―그 때는, 도와주지 못해 미안했어요.
―그 때?
―장례식장 옆 술집에서요. 맨홀에 다리가 빠진 걸 봤는데, 그게 그냥 앉아 있는 건지 다친 건지 분간이 안 가서.
―무슨 소립니까. 맨홀에 빠진 건 당신이에요. 나는 골목 끝에서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 당신을 보고는 취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돕질 않았어요.
―그건 내 얘기에요. 당신을 구경한 사람도, 취했구나 생각한 사람도.
―납니다.
―나예요.
달각, 하고 빈 유리잔이 식탁에 놓였다. 해가 기울고 있는지 길고 납작한 빛이 스며들어 주원의 발목 근처에서 일렁거렸다. 아버지의 집은 채광을 꼼꼼히 따지지 않은 데다 마음 내키는 대로 창문을 내는 바람에 덩어리진 햇빛이 서너 개씩 굴러다니거나 그물코처럼 얇게 저며진 햇발이 일조량의 전부이거나 했다. 가까스로 스며든 햇빛 끄트머리에 하얗게 일어난 먼지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농담입니다.
남자가 도무지 농담이라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맨홀에 다리가 빠진 건 나고 구경만 하다 돌아가 버린 건 당신입니다. 꽤 곤란했던 건 사실입니다. 맨홀에 빠지면서 다리가 골절되고 양 손목을 삐는 바람에 꼼짝할 수 없었거든요. 몸을 일으키는 그 간단한 동작이 되질 않더라 이겁니다. 바 주인이 문을 닫고 나오는 새벽 네 시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고독하고 무료해서 노래를 부르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맨홀 뚜껑이 활짝 열려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사정인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지나친 게 처음도 아닐 텐데요.
―뭐라구요?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상황은.


*


무언가가 죽었거나, 곧 죽게 될 것 같은 8월 한낮이었다.
주원은 가로수 아래 떨어져 돌멩이처럼 굳어 있는 매미를 보았다. 혀를 길게 빼물고 작은 화분 뒤에 누워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만 들썩이는 개를 보았다. 밟히고 다져져 다홍색테이프처럼 변한 지렁이를 보았다. 헐겁게 늘어진 젖가슴을 러닝셔츠로 가리고 선풍기를 따라 돌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다만 무료한 여름 한낮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서면서 주원에겐 일과랄 것이 없어졌다. 윤리 과목은 보충 수업도, 평가 시험 준비도 없어 오롯한 방학을 맞이한 참이었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코와 뺨과 배가 차가워지고 방바닥과 맞붙은 등과 엉덩이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주원은 선풍기 타이머를 맞춰 두고 신호음이 들릴 때마다 천천히 몸을 뒤집으며 시간을 보냈다. 낮은 지나치게 길었고 해가 뜨거웠다. 생수라도 사려고 슈퍼에 나가면 머리카락 끝이 바직바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다만 무기력한 여름 한낮이었다. 주원은 해가 떨어진 뒤에, 거리가 느슨해지고 빈틈이 생길 때를 골라 외출했다. 그 날 역시 그랬다.
주원은 담배 한 갑 때문에 집을 나선 참이었다.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해가 진 뒤에도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어올라 자정이나 되어야 가까스로 숨이 트일 정도였다. 주원은 골목과 골목을 통과해 대로로 나가고 있었다. 지하철역 앞의 오래된 빌라촌은 건물 사이가 좁고 골목이 길었다. 어느 구간은 몸을 세로로 돌려 빠져나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엔 배와 엉덩이 쪽에 이끼가 붙은 곳은 없는지 세심히 살펴야 해서, 출근할 때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을 샛길이었다.
여학생과 마주친 곳은 샛길 한복판이었다.
여학생은 좁은 샛길에 고요히 끼어 있었다. 그저 걸음을 멈춘 것뿐이겠지만 골목이 워낙 비루해 짓다 만 벽 사이에 사람이 끼어버린 것 같았다. 주원은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서 기다렸다. 슈퍼까지 가는 지름길은 이곳 하나뿐이었다. 여학생은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떠 길 끝에 선 주원을 마주 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여학생은 천천히, 그러나 길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꽃게처럼 뒤뚱뒤뚱 뒤로 물러나 어느 빌라로 들어갔다.
담배 한 갑을 사고 십 분쯤 더 걸어 복권방에서 연금복권을 산 뒤 돌아오는 길에 주원은 여학생과 한 번 더 마주쳤다. 여학생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골목에서 막 대로로 빠져나가는 참이었는데, 걸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몇 걸음마다 헛구역질 비슷한 걸 했다. 머리가 오른쪽으로 줄곧 기울어서 졸다 깬 것처럼 퍼뜩 몸을 세웠다 기울어지길 반복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어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산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니? 주원은 그렇게 물었으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작고 흐릿한 목소리였다.
―저 망할 년 저거! 집안 망신을 아주 혼자 다 시키고 자빠졌고!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주원은 담뱃갑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작고 땅딸막한 사내가 주원더러 들으라는 듯이 목청껏 소리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은 여학생이 갈지자로 비틀비틀 움직였는데, 그 걸음이나 휘청이는 각도가 만취한 사람과 몹시 흡사했다.
―거, 냅두쇼! 딸년 단속 잘못한 건 내 알아서 할 테니까.
주원은 바짝 다가드는 사내에게서 얼른 몸을 뗐다. 한밤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목으로 치받치는 것처럼 강렬했다. 사내의 열 오른 몸뚱이가 곁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뿐 아니라 사내의 얼굴과 말투가 지나치게 거칠어, 눈이 마주치면 무언가 검고 변덕스러운 것이 제게로 훌쩍 건너올 것만 같았다. 불온한 것과 위험한 것,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주원은 최대한 몸을 작게 웅크려 구석으로 피했다. 사내가 주원을 지나쳐 대로변으로 나갔다.
여학생은 택시 승강장 보도블록에 앉아 있었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푹 파묻은 것이 오륙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환히 보였다. 달려간 사내가 여학생의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여학생이 휘청했다. 다시 한 번 더 세게 후려쳤다. 휘청한 여학생이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원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퉁이에 서서 여학생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여학생은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채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태연했다. 아프지 않나. 담뱃갑 비닐을 벗기며 주원은 여학생의 모습을 살폈다. 앞으로 마구 쏟아져 내린 긴 머리칼 때문에 가늠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씨근덕대면서 뛰어나왔던 모습 그대로, 사내는 골목 안쪽 어디로 사라졌다. 여학생은 여전히 자리에 주저앉은 채였다. 무언가를 흥얼대는 것처럼 몸이 가볍게 흔들리기도 했다. 보도블록에 주저앉은 몸이나 벌어진 허벅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여학생이 단조로운 리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고 있거나 흥얼대는 노래에 맞춰 박자를 헤아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취했구만.
주원이 짧게 읊조렸다.
―저만큼 취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여학생이 술에 취해 휘청대고 돌아다닌다면 부모 입장에서야 뒤통수 두 대쯤 때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안 망신이니 딸년 단속이니 사내가 떠들어댄 것도 이해가 갔다. 술이 깨는 건 금방일 것이다. 그때는 양팔을 지지대 삼아 허리에 우쩍 힘을 주고 일어서면 끝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뒤엔 사내에게 다시금 뒤통수를 두어 대 더 맞겠지만 그 정도면 양호했다.
주원은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나 기이한 윤리가 그의 다리를 다시금 붙들었다. 한밤중에 만취한 여학생을 거리에 두고 가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이런 시간에 여학생을 부축해 주느니 돌봐주느니 손을 댔다가 성추행범으로 신고 당하는 건 아닐까. 화를 누그러뜨린 다음 사내가 돌아와서 여학생을 데려가지 않을까. 주원은 머뭇대며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여학생 다리 아래 흥건히 쏟아진 무언가가 보였다. 시큼한 비린내가 뜨거운 공기와 함께 훅 끼쳐 왔다. 뭐야, 오줌을 싼 거야? 주원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랬다. 주원은 돌아섰고, 여학생은 남겨졌다.


*


―반드시, 돌아오는 건가요. 어떤 식으로든. 부메랑처럼.
―나와나와나의 세계에선 그렇습니다.
달각달각. 빈 유리잔이 식탁에 놓였다. 희미하던 빛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짝이 맞지 않는 그림자가 실내를 점령하고 있었다. 계단 위의 할로겐 등이, 남자가 직접 돌려 끼웠노라고 강조하던 할로겐 등이 노랗고 침침한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빛이 뿜어져 나온다든가 둥글게 맺혀 있다든가 하는 활기찬 느낌이 아니라, 깨진 꽃병에서 물이 새어 나오듯 탁하고 두꺼운 빛줄기가 다만 아래로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끝이 나나요, 그 세계는.
―내 소설은.
남자가 계단으로 가 이번엔 아래서 두 번째 계단 상판을 뜯고 새로운 술병을 꺼내왔다.
―별거 없습니다. 나와나와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갑니다. 변함없이.
―계속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 세계일 뿐이니까요.
남자의 턱 밑으로 고였던 노란 불빛이 고름처럼 뚝뚝 떨어졌다. 주원은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느린, 그냥 그런 낙하였다. 빛이 다 흘러내린 뒤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





소설가 안보윤

작가소개 / 안보윤 (소설가)

-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9년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2011), 『우선멈춤』(2012)을 펴냈다.


   《문장웹진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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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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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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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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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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