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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꿈의 귀환

  • 작성일 2016-06-07
  • 조회수 2,429

[단편소설]



꿈의 귀환



김희선



미항공우주국이 꿈을 기록하는 장치의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67년 가을이었다. 그들은 꿈에서 나타나는 뇌파를 기록하여 영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이 장치를 ‘꿈 레코더’라고 불렀는데 이런 관심의 계기에는 한 권의 일기장과 이와 관련된 소련 측 자료가 있었다. 일기는, 소련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이 짙은 푸른색 표지의 공책에 적어 내려간 1961년 4월 한 달간의 기록이며, 이때 가가린은 지구인 최초로 성층권 밖으로 날아가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가가린이 기록에 남긴 것은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냉전시대 치열한 첩보전의 극적인 결과물로 획득된 그 일기장을 검토한 나사의 과학자들은 처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맨 처음 소련이 우주 유영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워졌던 그 연구는 1970년대 초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단되었으며, 가가린의 일기장을 비롯한 자료들은 나사의 극비문서로 분류되어 깊고 거대한 금고 속에 보관되었다.
어쨌거나 나사의 오래된 과학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가린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타고 있던 유인 우주선은 자동 항법 장치로 운전되었고, 그렇기에 가가린이 굳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긴, 잠들지 않고는 우주선을 결코 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가린보다 앞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온 떠돌이 개 라이카는 지상으로 귀환한 후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태양의 뜨거운 열선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가가린 역시 비행을 시작하기 전 그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나긴 작별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다만 과학자들의 계산 착오로 가가린은 착륙하기로 한 지점에서 250마일이나 떨어진 어떤 황막한 땅에 떨어졌고, 그래서 그는 낙하산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그 음산한 초원을 오래도록 헤매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착륙한 그 우울한 땅이 지구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는데, 그를 발견한 소련 우주국의 과학자들은 그가 발견되었을 때 잠이 덜 깬 상태였으며 눈동자는 확대되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고 기록했다 한다.
중요한 것은, 가가린이 우주에서 잠들어 있던 한 시간 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이 꾸는 꿈의 거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측정된 가가린의 뇌파는 분명히 그가 어떤 꿈의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가가린은 꿈을 꾸지 않았다고 했고, 나중엔 불안한 표정으로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횡설수설했다. 소비에트 연방 우주국의 과학자들은 그가 꿨던 꿈을 알아내기 위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지구 밖 우주의 텅 빈 푸른 공간에서 인간이 꾸는 꿈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둥근 초록색의 지구 위에서 꾸는 꿈과는 다르리라.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우주선 안에서 시간은 상대성 원리에 따라 조금 더 천천히 흘렀을 테고 별빛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바로 저기 머리 위 성층권 밖에선 인간의 무의식 역시 평소와는 다른 깊은 울림을 자아낼 것이라는 게 모두의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어쨌든 소련에서는 우주 공간에서 꾼 가가린의 꿈을 알아내기 위하여 대규모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방법은 실로 다양했는데 그 총책임자는 심리학자이자 뇌신경과학자인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였다. 그는 가가린의 우주 비행이 성공하기 몇 년 전 「꿈 분석에 있어서의 외삽법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서방의 심리학자나 뇌신경학자들에게까지 유명해진 사람이었고, 언제든 그것을 적극적으로 임상에 적용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현재의 꿈을 완전히 분석한 데이터베이스만 있다면 그 자료를 역으로 적용하여 과거의 꿈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 꿈 분석의 외삽법이었고, 그렇기에 이론적으로는,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의 꿈이든 당시의 뇌파 기록만으로 그 사람이 꿈꾸었던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가가린이 현재 꾸고 있는 꿈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은, 마치 메르카토르 투영법에 의하여 지도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메르카토르 투영법을 이용해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극과 남극으로 갈수록 지도의 면적은 한없이 확장되고, 결국 영원히 북극점과 남극점을 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어느 정도 정확한 지구의 모습을 나타내려면, 먼저 지구 표면의 각각의 구역을 그린 여러 장의 지도를 만든 후, 서로 겹쳐지는 부분을 동일하게 표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가린의 꿈 역시 한 장의 지도로 표현할 수 없었다. 꿈은 평면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지구처럼 타원형인 것도 아니었다. 꿈은 굴곡지고 텅 빈 우주의 모양을 닮았다. 단지 두 개의 극점만 지닌 지구와는 달리 셀 수 없이 많은 극점을 지녔고, 각각의 극점으로 다가갈수록 무한히 확장되며 관찰자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심령술사와 정신분석학자, 뇌신경과학자, 시베리아에서 온 샤먼 등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그들이 감지하는 가가린의 꿈의 지도를 그렸고,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이면 각자가 작성한 부분적인 지도의 조각을 들고 회의실에 모여 겹치는 부분과 빠진 부분을 표시하며 하나의 거대한 지도를 만들어 갔다. 유물론자들의 제국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이런 기이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솔직히 그리 썩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 인류가 발명한 거의 모든 것이 실제로는 기괴하고도 기이한 실험의 산물이었으니 말이다.
그 시기 가가린의 공식 직함은 우주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의 교관이었다. 적어도 기록상으론 그랬다. 그러나 나사에서 나중에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가가린은 머리에 수많은 전극을 부착한 채 등받이가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 뇌파를 측정 받거나 불분명한 어조로 자신이 간밤에 꾼 꿈을 구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꿈꾸는 일 이외의 다른 어떤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연구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의 방은 작고 텅 비었으며 사방 벽은 온통 회색이었다. 벽이 회색으로 칠해진 것은 몰로디노프의 연구 결과 때문이었다. 몰로디노프는 그의 또 다른 논문 「꿈과 색깔의 상호관계 고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은 꿈을 꾸려면 반드시 회색 방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회색은 어둠과 밝음의 중간 지대로 인간의 정신을 데려가고, 무의식은 빛과 그림자의 그 부드러운 혼돈 속에서 꿈을 자아낸다는 것이 논문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가가린은 매일 밤 열 시면 자신에게 할당된 회색 방에 들어가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방엔 여러 대의 녹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카메라 렌즈는 밤새도록 잠자는 가가린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했다. 머리에 전극을 부착한 가가린은 언제나 부동자세로 누워 있었고, 아침까지 단 한 번도 뒤척이지 않았다. 아침이면 무수하게 많은 전극들을 머리에서 떼어내지도 못한 채, 가가린은 몰로디노프와 마주 앉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꿈은 한 치의 가감도 없이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각각의 꿈의 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보내졌다.


자료1. 문서번호 1023-1-1
1962년 5월 23일 오전 8시 30분. 전날 밤 유리 가가린의 꿈
녹취 및 주해: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나는 해변을 걷고 있다. 발아래 부드러운 파도가 일렁이고 공기는 따뜻하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행복한 기분에 빠져든다. 여기가 어디지? 아, 생각났다. 그곳은 아내와 함께 여행했던 크리미아의 해안도시 얄타임에 틀림없다. 아내는 얄타의 바닷가를 사랑했다. 잠깐, 그런데 내 발밑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것은 파도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모래바람이다. 백색의 미세한 모래 입자들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고개를 들자 하늘은 온통 검은색. 나는 문득 내가 걷고 있는 이 땅이 사실은 달의 표면임을 알아차린다. 멀리 지구는 푸른 에메랄드 덩어리처럼 내 앞에서 빠르게 자전한다. 그보다 더 멀리선 빛나는 여러 개의 고리를 지닌 토성이 휙 지나간다. 목성은 그 자신의 깊은 바다를 드러내며 천천히 달 쪽으로 다가온다. 그때 움푹하게 꺼진 달의 바다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온다. 그녀는 흑진주처럼 검고 빛나는 피부를 가졌고 긴 다리에 엉덩이는 한껏 올라붙어 말처럼 탄탄하다. 물에 젖은 검은색 고수머리가 지구에 반사되어 오는 태양 광선에 빛나고 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자신의 젖은 몸을 밀착시킨다. 나는 그녀의 둥글고 커다란 가슴을 움켜쥐고 근육질의 단단한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그러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손에 잡히는 길고 부드러운 갈색 털.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안고 있는 것은 한 마리 개다. 개는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나를 올려다보는 개의 눈은 크고 둥글고 갈색이다. 쿠드랴프카. 미안해. 나는 소리친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검고 적막한 진공이 소리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갑자기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엄청나게 환한 빛의 기둥이 솟구친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나는 고통에 가득 차 눈을 뜬다.
(주: 쿠드랴프카는 최초로 우주에 보내졌던 개의 이름이다. 흔히 알려진 라이카는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 그 개의 종명種名에 해당한다. 주지하다시피 쿠드랴프카는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뜨거운 열기와 우주 공간에서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자료2. 문서번호 1023-1-2
1962년 5월 23일 오전 10시. 유리 가가린과의 대화
질문 및 기록자: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평소 아내와 섹스를 얼마나 자주 합니까, 유리 알렉세예비치?
-내가 그런 것에까지 대답해야 하나요?
-당연하죠. 당신의 꿈의 지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제길, 좋아요. 발렌티나와 나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섹스했어요. 적어도…….
-적어도?
-적어도 그 빌어먹을 우주선을 타기 전까진 말이에요.
-우주를 다녀온 후 당신의 성생활에 어떤 문제가 생기기라도 했나요?
-이제 발렌티나와 나는 섹스하지 않아요. 발렌티나는 언젠가부터 나를 만나러 오지도 않죠. 하긴, 사실 지금은 그녀와 섹스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지만요.
-왜 더 이상 할 수 없죠?
-훗. 이봐요, 이 좁아터진 회색 방에서 머리엔 전극을 잔뜩 달고 아내와 그 짓을 하라는 거요, 지금?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수간獸姦의 욕망을 느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요?
-미치겠네, 정말. 당신들, 내가 혹시 그 가여운 쿠드랴프카의 엉덩이에 내 물건을 쑤셔 박고 싶어 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십 분간 대화 중단. 유리 가가린은 심하게 흥분했다. 그는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방 안을 이리저리 걷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앉았다. ※조치사항: 의학팀에 연락하여 유리 가가린의 분노 반응 지수를 체크할 것.)
-제기랄. 미안해요. 내가 잠깐 흥분했어요. 쿠드랴프카, 불쌍한 놈이죠. 아니 사실 난 그 개를 실제로 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래요, 우주로 나가기 직전에 내가 생각한 게 뭔지 압니까? 그건 발렌티나도, 내 어머니도, 내 딸들도 아니었어요. 그저 쿠드랴프카만 생각했어요. 그 개새끼처럼 나도 타죽고 말 거라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쿠드랴프카, 더럽게 재수 없는 개였죠. 그저 다른 개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주선에 올라타야 했으니까요.
-좋아요. 그럼 쿠드랴프카 얘긴 여기서 그만둡시다. 참 이건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당신은 서방에서 만들어진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 있습니까, 유리 알렉세예비치? 비밀을 지켜줄 테니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포르노그래피? 아니, 그런 건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레오니드, 정말 궁금한 게 뭔지 압니까?
-뭐죠?
-쿠드랴프카 말입니다. 그 개는 과연 텅 빈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기는 했을까요?
-글쎄요,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르겠군요. 만약 원한다면,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질의를 해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아니, 괜찮아요,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난 단지 우리가 모두 그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세요. 오늘 아침의 대화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이 남자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는 너무 빨리 대답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체 그가 우리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그는 우주선에서 꿨던 자신의 꿈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다. ※조치사항: 보안위원회에 가가린의 집을 비밀리에 수색하도록 할 것.)


유리 가가린의 꿈의 지도는 조각조각 그려져 덧대어졌다. 지도의 이음매는 불완전했으며 한 장으로 크게 펼치면 도저히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알 수 없는 울퉁불퉁한 왕국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의 꿈에서 한없이 억압되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리비도에 물결치는 28세의 백인 남성을 보았다. 그들은 보고서에 유리 가가린이 포르노그래피에 빠져 흑인 여자를 떠올리며 밤마다 자위를 할 것이 틀림없다고 적어 내려갔다. 심령술사는 목성과 토성이 십자 모양으로 만나는 날, 유리 가가린이 자신의 꿈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이며 그때 인류는 미지의 존재와 조우할 것이라는 예언을 멋들어진 고대의 글씨체로 휘갈겨 썼다. 뇌신경과학자들은 우주에 머물던 한 시간 사십 분간 그의 뇌세포가 태양광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방사선에 의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지만, 곧바로 묵살되었다. 유리 가가린은 결코 다치지 않았어야 했다. 그는 소련 우주 개발 계획의 살아 있는 신화이자 증인이었다. 유리 가가린은 안전하고 건강하며 지극히 정상이었고 비행교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어야만 했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유리 가가린의 영혼을 위하여 개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자료3. 문서번호 1023-1-3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의 일기(일부)


1962년 5월 30일
꿈을 꾼 직후에 가가린은 언제나 심하게 불안해한다. 그는 마치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은 모습으로 잠에서 깬다. 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눈을 뜨면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미치지 않았다. 의학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명료하다.


1962년 6월 1일
오늘로 벌써 이십팔 일째다. 유리 가가린이 꿈속의 빛의 기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의 모든 꿈은, 그 어떤 상황에서 시작해도 결국은 지구의 중심에서 솟구치는 엄청나게 밝은 빛의 기둥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조사하고 있다. 어쩌면 유리 가가린은 과거에 극도의 공포 속에서 밝은 빛에 노출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재나 폭발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그가 태어난 고장인 스몰렌스크 일대의 사고 기록을 모두 검토하게 했다.


1962년 6월 3일
오늘 가가린은 위험한 발언을 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 중 일부를 공식적인 기록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가가린은 아침부터 활기차 보였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가가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그럼요, 즐겁고말고요. 이 거지같은 세상도 이제는 모두 끝이니까요. 그거 아십니까?” 나는 유리 가가린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동공의 크기는 정상이지만 확실히 그의 눈빛엔 광기를 지닌 인간만이 지니는 묘한 열기가 어려 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 역시 짐짓 즐겁게 대답한다. “이 거지같은 세상이 모두 끝이라니요? 흠, 기발한 생각이긴 하지만,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없소. 어쨌든, 당신이 즐거워 보이니 나도 안심이군요.” “이봐요,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소? 아니, 당신은 당신이 정말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느냐, 이 말이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가가린에게 말했다. “나는 당연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당신 역시 살아 숨 쉬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마주 보며 서로 대화하고 있지요. 그러니 말조심하시오, 유리 알렉세예비치. 그런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발언은 삼가는 게 좋을 거요.”
그러자 유리 가가린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엔 배를 잡고 엎드려 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그는 문득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미안합니다,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내 말에 신경 쓰지 마시오. 그냥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 해본 말이었어요. 우리들의 대화는 기록에서 빼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문제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는 다시 원래의 그의 표정, 우울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펜을 잉크병에 꽂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런 대화를 기록하는 것은, 나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1962년 6월 5일
아침 이른 시간, 시베리아에서 온 샤먼의 면담 요청이 기다리고 있다. 퉁구스족의 사제라는 그 남자는 언제나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자기 부족의 수호신이라나. 어쨌든, 그는 기분 나쁜 인간이다. 몽골인종 특유의 길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쏘아볼 때면, 그가 마치 내 영혼의 깊숙한 곳이라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싶어 섬뜩해지기 때문이다. 흐루쇼프의 소수민족 정책 덕분에, 한때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던 저 남자와 같은 존재들이 세상을 다시 돌아다니고 있다. 물론 그가 샤먼들이 지녔다고 주장하는 어떤 힘, 그러니까 우리들 무의식의 깊고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는 능력 같은 걸 지니고 있을 리는 없다. 그는 영적인 힘을 지녔다고 인민을 선동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이 일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샤먼이 내게 처음 꺼낸 말이었다. 나는 좀 놀라서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그러자 샤먼은 공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차피 당신들은 개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칠 용의 같은 건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자 나는 화가 났다. 유리 가가린의 꿈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의 꿈은 군데군데 비어 있고 섬망증 환자의 헛소리처럼 두서라곤 없다. 그런 가가린의 꿈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지도는 마치 대항해 시대 이전에 그려진 세계지도처럼 허황되다. 게다가 각각의 지도의 조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의 새로운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가린의 꿈을 객관적으로 읽어낸 후 그 정확한 꿈의 지형을 2차원의 평면으로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저녁 회의 때마다 이 점을 수시로 강조하지만, 결국 다음날 그들이 제출하는 것은 자신들의 주관과 무의식이 잔뜩 투사된 한 장의 초현실적인 풍경화일 뿐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그들의 기묘한 풍경화를 들고 다시 지도를 그려야만 했다. 그렇게 지도는 힘겹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두겠다니?
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릿빛 얼굴을 한 샤먼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매우 불온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요. 개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개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더 이상 이 연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개의 정령? 이봐요, 우리는 그 발언 하나만으로도 당신을 사상 검증 위원회에 출두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두시오.”
시베리아의 샤먼은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폴리네시아의 어느 부족의 신화를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우주가 한 마리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만들어져 있다고 믿고 있지요. 그 부족에게 한 과학자가 웃으며 이렇게 질문했어요. 그렇다면 그 거북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 걸까요? 그러자 부족장은 말했다더군요. 그 거북은 또 다른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북은 또 한 마리의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서 있는 거구요. 그렇게 거북들은 한없이 많은 다른 거북들의 등 위에 서 있습니다. 거기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오직 거북들의 무한한 연속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이게 그 과학자의 질문에 대한 부족장의 대답이었고, 바로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던 말이기도 합니다.” 샤먼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아니, 잠깐. 오히려 시간은 영원히 남아돈다고 보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요. 어쨌든, 상부에 대한 보고는 당신이 알아서 해주길 바랍니다,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조용히 짐을 꾸려 자신의 고향인 시베리아로 떠났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대체 시간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어쨌든, 샤먼은 그렇게 떠났다. 나는 그의 최후의 발언 역시 공식적인 기록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지금 연방 우주국엔 극도의 초조와 불안이 감돌고 있으며 그 어떤 작은 문제도 뇌관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그들은 모두 유리 가가린의 꿈의 지도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완성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미합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첩보가 입수된 탓이다.


1962년 6월 10일
피곤하다.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된 한 남자가 서 있다. 저게 정말 나란 말인가?
빌어먹을 유리 가가린의 꿈의 지도는 그저께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러나 난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연구는 기이한 난관에 부딪쳤다.
가가린의 지도는 비록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극점과 위도, 경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방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에 가가린이 우주에서 꾼 꿈을 대입하는 순간, 지도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주선에서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측정된 뇌파를 우리는 정확하게 지도 위에 표시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백 번도 넘게 지도 위에 나침반을 두고 방위를 측정했으며 위도와 경도를 살피고 또 살폈다. 그렇게 측정된 그의 뇌파가 가리키는 지점은 꿈의 지형 중에서도 드넓은 바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나 해구와도 같은 깊고 어두운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는 그곳에서, 지도는 언제나 2차원의 평면을 허물어뜨리며 안쪽으로 서서히 함몰하고 만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거기서 꿈은 모호하고 흐릿해졌으며 지형은 사라지고 그 경계는 둥근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치다가 천천히 심연의 한가운데로 가라앉았다. 마치 블랙홀처럼 지도는 유리 가가린의 꿈을 빨아들였고 결코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지도의 수축과 함몰을 막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일단 함몰이 시작되면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한 장의 지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유리 가가린은 자신의 꿈이 지도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우리들과 같이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런 식으로 지도가 완전히 사라지면 가가린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현재 우리는 지도의 기이한 소멸 현상에 대하여 연방 이론물리학 연구소에 질의를 보낸 상태이며, 그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가가린의 꿈의 지도를 들여다본다. 창밖엔 침엽수림이 어둡고 짙은 청록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문득 지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낀다.


1962년 6월 15일
지난밤 모든 기록들을 다시 살피다가, 나는 우리가 그간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간과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나의 연구는 3차원 공간구조를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꾼 꿈은 4차원의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그가 빠르게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시간의 흐름은 분명 이곳과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미친 듯이 새로운 방정식을 전개해 나갔다. 새벽이 올 즈음 드디어 가가린의 꿈의 지도가 둥근 구의 형태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나는 감탄했다. 새로 만들어진 지도는 정말로 지구를 닮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지구 그 자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신비로운 4차원 지도에서 지구는 하나가 아니다. 그건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자기 안에 무한히 많은 또 다른 지구를 내포한 형태로 나타난다.
더 이상의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유리 가가린이 통상적인 아침 면담을 위해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 앞에서 멈칫한다.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지구의 영상 앞에서 허둥대는 나를 보며, 그는 가만히 서 있다. “축하합니다, 레오니드 미하일로비치. 이젠 당신도 알고 말았군요.” 한참 뒤에 유리 가가린은 이렇게 말하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나는 있는 힘껏 책상을 내리친다.


*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밀이 해제된 자료들에 따르면, 현재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의 수기는 여기까지만 남아 있다. 그가 유리 가가린을 상대로 행했던 꿈에 관한 연구는 중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우주국은 “꿈에 대한 연구가 과도하게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이유로 실험의 중단을 발표했고, 책임 연구자였던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를 스몰렌스크 근교의 삼림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했지만, 이는 누구나 알다시피 일종의 유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이후 일어난 유리 가가린의 수수께끼에 찬 죽음은, 이 기이한 실험에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아우라를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유리 가가린은 말 그대로 소멸했다. 마치 그 자신이 꿨던 꿈의 지도처럼 말이다. 실험이 중단된 뒤 대령으로 진급한 가가린은 본업인 공군조종사의 길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새로 개발된 전투기인 미그기의 교관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8년 3월 27일, 모스크바 상공에서 217킬로미터 떨어진 하늘 한복판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파편들이 별 모양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는데, 그때 유리 가가린도 자잘한 불꽃이 되어 지상으로 하락했다. 그가 조종하던 미그기는 공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폭발했고, 가가린은 무슨 이유에선지 비상탈출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역시 스몰렌스크 오지의 삼림연구소에서 자취를 감췄다. 처음에 그는 그야말로 열렬히 시베리아 삼림의 조성 비율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약 2년간 소장으로 재직하며 남긴 통계자료는 그런 그의 꼼꼼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그곳 삼림의 78퍼센트는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22퍼센트 정도가 자작나무 군락지로 덮여 있다는 것이다. 그간 광대한 넓이 때문에 숲의 조성 비율 조사는 꽤 오랫동안 지지부진한 상태였는데, 몰로디노프는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을 십분 발휘하여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마침내 거의 완벽에 가까운 통계자료를 만들어냈으며, 그것은 아직까지도 러시아 삼림연구소의 중요한 학술자료로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스몰렌스크 삼림연구소 인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중 일부는, 아침마다 두툼한 방한복에 사슴가죽 장화를 신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던 한 남자의 모습을 기억해 내곤 한다. 남자는 큰 키에 약간 구부정한 자세였고 언제나 한 손엔 두꺼운 식물도감을 들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자신들에게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숲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곧 돌아올 사람처럼 그의 연구실 페치카 위에선 커피물이 끓고 있었고, 연구소에서의 하루하루를 기록해 온 일기장도 그대로 펼쳐진 채였다. 행방불명된 삼림연구소장의 수색은 일주일 만에 종결되었으며, 따라서 그에 관한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적인 기록은 ‘1965년 1월 23일 사망’이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추운 겨울날 깊은 숲 속에서 일주일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


따라서 만약 21세기 초반에 제기된 물리학자 앨런 디멘트의 기이한 주장이 아니었다면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와 그가 행했던 유리 가가린의 꿈에 대한 연구는 조용히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란 실로 거대하기 그지없는 흐름이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우주비행사의 꿈 따위에 주목할 여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주가 사실은 어느 머나먼 경계의 표면에 실재(實在)하는 정보들의 3차원적 투영에 불과하다는 홀로그램 우주론을 펼치며 스티븐 호킹과 십여 년에 걸쳐 논쟁해 온 이론물리학자 앨런 디멘트는, 2016년 12월 31일 정오, 역사에 길이 남을 강연을 했고 그러자 곧바로 온 세상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그의 강연을 단 한 번이라도 듣는다면 그 괴이한 이론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의 생과 우주의 존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 끝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빠져들었다. 과학 사이트인 <엣지>에 업로드 된 뒤,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서 정보의 바다를 떠돌고 있는 그 유명한 강연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지구는 유리 가가린의 꿈에 불과하다.>
거의 두 시간에 달하는 긴 분량을 일반인들이 보기 쉽도록 간략하게 편집한 요약 버전은 유튜브에도 올려졌다. 이론물리학 강의라는 특수성과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조회수 1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킨 그 동영상에서, 하얀 턱수염을 기르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앨런 디멘트는 이렇게 말한다. “꿈의 지도가 함몰한 것은 유리 가가린의 의식의 소멸과 연관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양자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요. 알기 쉽도록, 하늘로 던져진 공을 예로 들어 볼까요?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손에 쥐고 있던 공을 청중에게 던진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던진 그 공을 한 남자가 받는 장면이 슬쩍 지나간다.) 자, 보세요. 난 저 남자에게 공을 던지고 그러면 그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서 그의 손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사실 공이 그리는 궤적의 수는 무한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저 공은 우주 끝까지 날아갔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공의 운동을 관찰하는 순간, 공의 궤적은 하나로 고정되고 가능했던 모든 경로는 다른 확률의 세계로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만든 꿈의 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도 자체는 아마도 가가린이 꿈꾸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가능성들의 총합이겠지요. 그러나 우주에서의 꿈을 어떤 한 점에 고정시키는 순간, 그것은 언제나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곤 했습니다. 즉 그 지점에서 가가린의 의식은 소멸되고 말았던 거지요. 그건……그의 세계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지도가 함몰하는 그 순간은 바로 가가린의 의식 속에서 세계가 소멸되는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동영상 속에서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본다. 잠시 후 누군가가 손을 들고 질문한다. “가가린의 의식 속에서 세계가 소멸된다? 그건 무엇을 뜻하죠?” 앨런 디멘트 박사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어 간다. “그건 지구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는 우주에서 끔찍한 광경을 보았던 겁니다. 바로 자신의 세계이자 우주 전체인 지구가 소멸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기지로 귀환한 뒤 꾼 꿈에서 매일 나타나던 그 장면, 눈부신 섬광의 불기둥. 그건 바로 지구가 폭발하여 반으로 쪼개지던 영상이었지요.” 이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거기에 흐르는 것은 묵시록적인 고요였다. 어찌나 조용한지 누군가가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디멘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이겁니다. 즉, 그는 귀환하지 않았다는 것. 돌아올 지구 같은 건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깊은 잠에 빠진 채 그는 텅 빈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지구를, 당신들과 나, 세상 모든 것을 꿈꾸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그의 꿈은, 누군가가 깨우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계속되겠지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들, 이 세상, 우주, 인류 같은 것들도 한없이 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고요. 그리고 그런 영속을 위해 소련의 이론물리학 센터는 유리 가가린을 영원한 잠으로 인도해야만 했던 거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몰로디노프의 꿈 연구가 중단된 이유이며, 그가 마지막에 깨달은 것이고, 유리 가가린이 공중에서 산화한 뒤 박물관에서 밀랍인형처럼 누워 있게 된 이유인 것이지요. 또한 나사가 더 이상 ‘꿈 레코더’에 관한 연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만약 꿈을 기록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고정하게 된다면, 우주를 떠받치기 위해 무한히 계속되는 거북들의 탑과 같은 우리 존재도 하나씩 사라지게 될 거라는 걸, 나사는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겁니다.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이고 당신들은 또 내가 꾸는 꿈이며 우리는 그렇게 무한히 뒤엉켜 서로를 꿈꾸며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만약 꿈 레코더가 상용화된다면,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꿈으로 고정되고 다른 모든 가능성들은 소멸할 겁니다. 마치 핵융합이 일어나듯 그렇게 연쇄적으로 일어날 소멸은 결국 무(無)에 다다라서야 종결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결말 아닌가요? 비록 누군가의 꿈일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겁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어요.” 사실 어쩌면 이것은 그저 절묘하게 편집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화면 속 남자의 표정과 제스처, 그리고 목소리엔 어떤 절실함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어 했던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지구가 정말로 유리 가가린이 꾸고 있는 꿈에 불과하다면, 어디엔가 진짜 자기 자신, 실재하는 존재들이 엮어 가는 더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삶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 정반대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동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선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에, 앨런 디멘트의 동료이자 작가인 테드 김이 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질문한다. 평소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기로 유명한 테드지만, 영상 속에서 그의 표정은 어둡고 엄숙하다.
“그렇다면, 지구는,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모두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요?”
앨런은 그의 질문에 쓸쓸하게 웃는다. 그가 보여주는 자료 화면은 현란하기 그지없다. “1961년, 양 진영의 냉전이 극에 달했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가 펼쳐 보여주는 그래프는 당시 존재했던 핵무기의 수를 한눈에 알기 쉽게 보여준다. 지구를 수백 번 날려버리고도 남을 엄청난 양이다. “그렇다면 이 핵무기들이 그때 어떤 식으로 제어되고 있었는지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건 인간 본성에 대한 실험이자 하나의 도전이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무기들을 다루었던 방식 말입니다.” 앨런 디멘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강연장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본다. 그게 아직도 거기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눈빛이다.
“우린 일종의 게임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 게임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둠스데이머신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 그대로, 게임은 종말에 관한 하나의 도박이었습니다. 그때 인간들의 잘못이 있다면 아마도 단 하나, 자기들의 이성을 과대평가했던 것뿐이겠지요. 인간은 스스로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듯이, 내면의 파괴적 본능 또한 억제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충동은 오직 에로스와 타나토스 둘뿐이었고, 그 둘은 위태로운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거기에 단 한 가닥의 자극만 가해져도 균형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지요. 아마 처음에 둠스데이머신의 버튼을 누르며, 양쪽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영원한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고 상상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로 이겁니다. 오래전 사라진 지구와 가가린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우리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의 꿈에 불과하다면, 거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계속하여 삶을 영위해 나갈 이유를 내포합니다. 꿈이든, 생시든, 무언가가 존재할 확률은 언제나 제로에 가깝고, 우린 그 엄청나게 작은 확률을 딛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이름을 붙여도 된다면 말입니다.” 그가 말한 희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청중은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켜기까지 한다. 그때 앨런 디멘트가 오른손 검지를 흔들며 장난기 있는 얼굴로 속삭인다. “그러니 여러분, 잠든 유리 가가린을 깨우지 마십시오. 그가 푹 자게 내버려둡시다. 어쨌든, 그가 꿈을 꾸는 이상 우린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영상은 중심을 향해 서서히 어두워진다. 마치 안으로 함몰하는 꿈의 지도처럼.




김희선 소설가(2013)

작가소개 / 김희선(소설가)

- 강원대학교 약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수료.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라면의 황제』가 있다.


   《문장웹진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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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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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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