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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 작성일 2018-09-01
  • 조회수 3,363

[단편소설]



한나



정지향




진아는 한나가 자신을 모른 체한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시작된 뒤에도 교실은 어수선했다. 학생 몇이 청강을 신청하려고 교탁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학과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의 수업이었다. 그다지 들을 만한 강의가 열리지 않는 계절이면 신입생과 재학생이 모두 몰려 경쟁이 치열했다. 수강신청에 성공한 학생들은 느긋하게 자리를 지켰다. 진아는 창가 자리에 반쯤 상체를 뉘고 앉아서 한나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원피스는 너무 짧아 허벅지를 반도 가리지 못했고, 꽃무늬가 지나치게 큰 탓에 신입생이 아니라면 입지 않을 옷처럼 보였다. 한나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높게 묶은 긴 머리도 따라서 궤적을 그렸다.
첫 수업의 과제는 시를 한 편씩 써오는 것이었다. 교수는 신입생을 골라 시를 읽게 했다. 교수가 모든 강의를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신입생들은 밤새 자신이 가진 몇 권의 시집을 뒤적였을 것이고, 뭔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을 것이고, 인정욕구와 좌절을 오가며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은 그다지 욕심이 없다는 얼굴을 꾸미고 앉아 있는 것이다. 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를 읽는 아이들의 귓등을 보았다. 개중엔 쉽게 붉어져 표정을 드러내는 귓등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모두가 집중할수록 읽는 이의 숨은 차츰 더 떨렸다. 창밖으로 나른한 아침의 캠퍼스가 내려다보였다.
한나는 그날 유일하게 산문시를 써온 신입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나가 천천히 클리어 파일에서 시를 뽑아 들었다. 진아는 한나를 대신해 숨을 골랐다. 형제의 손목에 주저흔이 생길 때 너는 조금씩 죽어간다, 는 문장으로 한나의 시는 시작되었다.


한나는 언젠가 채팅창에 이런 말을 적어 넣은 적이 있다.
아픈 언니가 있다는 건 아플 권리를 영영 빼앗기는 거야.
진아는 그곳으로부터 200km 떨어진 도시에서 그 문장을 중얼거렸다. 새벽 세 시나 네 시쯤이었을 것이다.
둘은 같은 온라인 문학회 회원이었다. 한때는 웬만한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보다도 공모전 수상자를 많이 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큰 커뮤니티였는데, 그즈음엔 문학회를 주도하던 선배들이 모두 졸업을 하고 남겨진 이가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진아와 한나는 가장 자주 카페에 들르는 회원이었다. 둘은 백일장 연습용으로 쓴 에세이를 돌아가며 게시했고, 서로 코멘트를 달아 주면서 가까워졌다.
진아는 백일장에 나가면 곧잘 2등 상이나 3등 상을 탔다. 자신이 읽었던 소설과 백일장 수상작을 교묘히 엮어 글을 쓰는 건 진아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사를 맡은 어른들이 고등학생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 그러니까 가족의 해체, 소녀들 사이의 교묘한 알력싸움, 인터넷 중독 같은 진솔한 주제와 단순하고 맑은 묘사,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10대 특유의 긍정 따위에 대해 ─ 진아는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날의 시제에 맞춰 능숙하게 변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진아의 글은 읽기에 따라 건조하고 단단해서 파고들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아는 그런 지적을 들을 때마다 큰 비밀을 들켜버린 듯 불쾌했다. 그녀는 매일 저녁 다문화 가정이나 농어촌 청소년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다운로드해 보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했다.
반면에 한나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가지 이야기만을 반복해서 썼다. 한나의 언니는 다섯 살 위로, 어릴 때부터 심약했고 벌써 몇 번이고 자살 기도를 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 어머니도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한나가 10대가 된 이후로 지겹도록 이어져 온 일이었다. 진아를 글쓰기로 이끈 것이 진아가 읽은 소설들이었다면, 한나를 글쓰기로 이끈 것은 어디에든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욕구였을 것이다. 한나는 "언니가 죽은 지 삼십일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거나 "언니가 입원한 뒤로 집 안에는 끈적한 유령이 떠돈다."고 썼다. 진아는 외동이었고, 언니에 대한 애증과 불안, 질투로 뒤섞인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덕분에 남들이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또래보다 조금 일찍 배웠다. 진아는 최대한 문장이나 구조에 대한 지적을 피하고 한나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했다. 때론 "한나. 눈이 와. 창밖 봤어?" 하고 글과 상관없는 댓글을 다는 것이 더 나았다.
그들은 곧 매일 밤을 함께 새우기 시작했다. 각자 글을 쓰다가 채팅창으로 돌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 학교에 가선 머리를 흔들며 졸았다.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잠은 이어졌다. 학교 친구들과의 대화가 줄었고 성적은 한 번에 50등씩 뚝뚝 떨어졌다. 진아와 한나는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듯이 서로를 달랬다. 소설만을 생각하자. 그들은 백일장 수상 실적으로 대학에 가고 싶었고 언젠가는 작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 꿈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수록 더 자주 채팅창을 찾았다. 실제로 만난 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한나와 진아는 그즈음 서로를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겼다.
한나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해온 것은 1년 전이었다. 한나는 진아가 자기를 보러 와주길 바랐다. 진아는 한나가 백일장을 다닌다는 핑계를 대고 동네 수영 강사의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나는 그 남자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끝내 고집을 피웠다. 진아는 모아 뒀던 몇 푼의 아르바이트비를 한나의 계좌로 보냈다.
언니, 내가 나중에 갚을게.
한나가 문자를 보내왔을 때 진아는 화가 났다. 그간에도 진아는 그 연애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나는 자존심이 세고 자기가 결정한 일을 쉽게 무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한나가 진아는 한 번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진아는 말하고 싶었다. 한나가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 유일한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는 사실이 진아를 더 화나게 했을 것이다. 울컥울컥 치솟는 응어리를 몇 번 삼킨 뒤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몇 달 뒤 통장엔 한나에게 보낸 것과 같은 금액이 찍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아는 진아대로 낯선 도시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고, 일 년쯤 이어진 그녀의 첫 연애 역시 질퍽하고 서투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나의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것도, 그녀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진아는 다른 문학회 회원을 통해서 뒤늦게 알았다.
그러니 그날 한나가 시를 낭독하지 않았다면 진아는 다시 인사를 건넬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나는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만큼 큰 소리로 웃으며 진아를 껴안았다.
언니, 보고 싶었어.
진아는 한나를 마주 껴안았지만 그 말을 다 믿진 못했다.


*


봄이 가기도 전에 한나와 진아는 부고를 들었다. 얼마 전 예대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던 선배의 부고였다. 그들은 오후에서야 문자를 받았는데 발인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조부모의 장례조차 치러 본 경험이 없었지만 진아는 그 짧은 장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나가 진아의 자취방에 들렀다. 둘은 진아가 가지고 있는 검은색 옷을 모두 꺼내 좁은 바닥에 펼쳐 두고 이리저리 맞춰 보았다. 옷은 계절에 비해 너무 두껍거나 얇았고, 무엇도 장례식에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베이지색이나 흰색의 옷을 적절히 섞어 입어도 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결국 한나는 진아의 검은 원피스 위에 반짝반짝 광이 도는 야구점퍼를, 진아는 여름 블라우스 위에 검은 후드티셔츠를 겹쳐 입었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꼴이 우스웠다.
지난밤을 꼬박 새워 술을 마셨다던 한나는 버스에 올라타선 곧 잠이 들었다. 버스는 꽉 막힌 강변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두어 번 시간을 맞춰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는 했으나 그간 벌어진 거리를 줄이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한나는 동기들과 매일 술자리를 가졌다. 기숙사 폐쇄 시간을 넘겨 밤을 새우는 일도 예사인 듯했다. 때론 선배들과도 어울렸지만 주로 학생회를 바쁘게 이끌어 가는 이들로 진아가 친하게 지내는 부류는 아니었다. 학교 앞 술집 거리에서 마주칠 때면 한나는 예의 진아를 끌어안고 "언니랑도 마시고 싶어, 언니랑도 마실래." 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의 그 도시는 한나의 고향이기도 했다. 더러운 터미널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 한나가 앞장 서 택시 정류장으로 걸었다. 낯선 소도시의 밤거리에 봄비가 어지럽게 쏟아지는 중이었다. 터미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번화가에 아울렛과 이마트, 전통시장이 뒤얽혀 있었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제야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실감했다. 한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진아가 한나의 팔뚝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중소 규모의 병원에 딸린 작은 장례식장이었다. 홀을 채운 사람들은 모두 한나와 진아의 또래들이었고, 그래서 그건 괴상한 엠티나 개강 총회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입은 흑백의 옷이 기묘한 느낌을 더했다. 상복 차림의 유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앞치마를 맨 아주머니 두 분이 홀을 지켰는데, 그들의 얼굴에서는 특별한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조문을 온 아이들 중 누구도 그 아주머니들이 선배의 가족인지 혹은 고용된 이들인지 알지 못했다.
영정 사진 속 선배의 모습은 진아와 한나가 기억하는 모습과 꼭 같았다. 대학 입학 즈음 찍은 증명사진인 듯했다. 단발머리에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이 통통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하고 향을 피웠다. 홀로 들어서자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문학회 사람들이 손짓을 했다. 선배들이 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직접 카운터로 가서 밥을 받아 왔다. 저녁을 거른 참이었는데도 국에 만 밥이 껄끄러워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한나와 진아는 술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다른 테이블의 모든 대학생들처럼 소주를 땄다.
문학회 회원들은 각기 다른 도시에 흩어져 살았고 고교생 백일장이 열리는 날에만 서로 만났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도착해 함께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고 김밥천국에서 아침을 먹었다. 진아와 한나에겐 매일같이 앉아 있던 교실의 풍경보다도 그들의 고교 시절을 더 정확하게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터미널에 내렸을 때 곧장 느껴지던 낯선 냄새와 사투리, 이방인으로서의 감각, 자주 온라인으로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과 모인다는 설렘, 그리고 백일장 시상식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쓸쓸함. 그들은 이미 한 시절을 몇 가지 상징으로 기억하는 데에 익숙했다. 그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냥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동안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일어난 변화였다.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생각을 확인한 것은 담배를 피러 나간 자리에서였다. 비가 그친 눅진한 공기에 포근한 여름 냄새가 설핏 섞여 스쳤다.
신춘문예 투고를 많이 했었거든. 걔가.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어제 밤중에 그랬대.
누군가 또 그렇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또 누군가,
떨어졌다나 봐.
하고 기어코 말을 맺었다. 그 뒤론 다시 다들 조용했다. 진아는 잠깐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조그마한 몸집을 생각했고, 그 생각이 불에 덴 듯 뜨거워서 본능적으로 익숙한 얼굴을 찾아 눈을 돌렸다. 한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발인 보고 갈 거야?
다시 홀로 들어왔을 때 한 선배가 물었다. 한나는 끝없이 하품을 해대고 있었고 진아는 더 이상 무거운 공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올 손님은 없는 것 같았는데도 그때껏 몇몇 대학생들이 홀을 서성이며 일을 돕고 있었다. 한나와 진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에 돌아오기로 했다.
집에 갔다 올래?
택시를 기다리고 서 있는 동안 진아가 재차 물었지만 한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시내의 모텔촌으로 향했다. 붉은빛 에나멜 소재로 외벽을 꾸민 곳이나 팝콘과 디브이디를 제공한다는 입간판을 세워 놓은 곳은 어쩐지 적당치 않아 보였다. 한나와 진아는 약간 낡아 보이는 모텔을 골랐다. 자그마한 주차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서자 카운터 안쪽에서 졸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그 방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고 이불의 무늬는 허옇게 바래 있었다. 진아는 이전에도 모텔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좁고 어두운 곳은 처음이었다. 한나가 빼곡히 출장 다방 광고가 프린트 된 곽티슈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둘은 취기에 겨우 세수만 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진아가 일어나 누런빛이 도는 전등을 껐다.
그건 아픈 거야. 신춘문예 같은 거 때문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벽 쪽으로 돌아누운 한나가 짐짓 화를 내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나도 그 언니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건 안 돼.
진아는 이불을 끌어서 한나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래. 모르면 그냥 말 안 하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진아가 어두운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한나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는 잘 채비를 하듯 베개를 다시 돋았다.
둘은 발인에 맞추어 가지 못했다. 몇 번 깨어 뒤척이다가 완전히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열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문학회 친구 몇이 남긴 문자엔 질책이 묻어 있었다. 둘은 공범의 기분으로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볕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그 도시엔 여전히 그네 의자가 있는 카페가 남아 있었다. 10년 전쯤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다. 진아와 한나는 치렁치렁한 조화 넝쿨 아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시내를 좀 걸었다. 어느 소도시에나 있는 유흥가 거리가 펼쳐졌다. 문 닫은 술집들 사이사이로 오락실, 아트박스, 코인노래방 따위가 보였다. 그 언니도 이런 델 다녔겠지, 진아는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한나는 스니커즈를 질질 끌며 진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닥엔 지난밤 비에 젖은 전단지가 곤죽이 되어 눌어붙어 있었다. 지금쯤 학교에서는 수업이 한창일 것이었다. 진아는 몇 년 전의 한 시절로 돌아간 듯 기시감을 느꼈다.


*


그날 이후 한나는 자주 진아의 자취방에 들렀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선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잦아져서 진아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단순하게 바꾸고 한나에게 알려주었다. 진아는 그즈음 장편 공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지칠 때까지 소설을 쓰다가 잠드는 생활이었다. 아침에도 눈이 떠지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소설은 젊은 뮤지션들에 관한 것이었다. 진아는 스무 살 내내 홍대 앞 공연장과 그 주변의 술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자기가 만든 세계 안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혼자 긴 글을 쓰는 일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드물게는 살면서 어떤 일에도 이렇게 집중해 본 적이 없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는 교양 수업엔 전혀 들어가지 않고 전공 수업만 오갔다. 남은 시간에는 소설을 읽고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소설을 읽기도 했다. 낮부터 시작된 음주는 자주 새벽까지 이어졌다. 혼자 마시다가 사람들과 함께 마셨고, 함께 마시고도 모자라 혼자 또 마셨다. 밤중에 돌아온 한나는 고양이 같았다. 소리를 별로 내지 않고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도 진아는 잠에서 깨어 꿈인 양 살금살금 오가는 한나를 보곤 했다.
진아와 함께 누워 있을 때면 한나는 자주 K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K는 한나가 듣는 소설 창작수업 강사이자 그들의 학교 선배였다. 진아와 한나는 한때 K와 동문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시를 준비할 정도로 그의 소설을 좋아했다. 정확하게 계산된 작품의 스타일에서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K는 호방한 성격으로,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과 어울려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자주 수업 뒤풀이를 갖는 모양이었다. K가 학부 시절부터 다녔다는 오래된 술집들이 한나와 동기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다.
한나는 그 수업에 낼 소설을 세 번이나 고쳐 썼다. 소설은 물론 한나의 십대 시절에 관한 것이었다. 사춘기 이후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한 언니가 여섯 번째의 시도를 성공했다는 것이 첫 문단의 내용이었다. 한나는 그것을 아주 건조하게 묘사해서, 마치 화자가 언니의 여섯 번째 시도를 축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묘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슬퍼하는 것도, 애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어법. 진아는 한나가 지난봄 다녀온 장례식의 몇 장면을 사용한 것을 알아챘다.
네가 쓴 소설 중에 제일 좋아.
진아는 진심으로 말했지만, 한나는 한동안 탈고를 하지 못하고 합평 순서를 뒤로 미뤘다.
결국 학기가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한나는 소설을 제출했다. 수업 뒤풀이에는 진아도 불려 나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여럿 남아 있을 거라는 진아의 생각과는 달리 술집에는 K와 한나 둘뿐이었다. 막걸리와 전을 파는 학사주점이었다. 한지에 싸인 전등이 희미한 빛을 내뿜었고 그 아래로 아이들이 먹고 간 자리 그대로 술잔이며 수저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저랑 제일 친한 언니예요.
한나가 엉거주춤 신발을 벗고 있는 진아를 발견하고 말했다.
K가 진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진아는 한나 곁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취한 두 사람이 진아의 잔을 마련하고 식은 소주를 따라 주었다.
진아 씨,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냐면, 오늘 한나 소설을 읽었는데, 한나는 병원에 가야 하거든요. 병원에 가는 게 나쁜 게 아니거든요. 응, 그러니까. 한나가 진아 씨 얘기를 했어요. 둘 다 예전엔 병원에 다녔었다면서요.
진아는 한나와 한나의 동기들이 그토록 K를 따르는 이유를 금방 눈치 챘다. K는 말을 시작할 때도,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곧잘 추임새처럼 상대의 이름을 불렀고, 그건 얼마만큼 계산된 것 같았지만 꽤나 다정하게 들리기는 했다. 진아가 한나를 쳐다보았다. 한나는 약간 눈이 풀려서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얘긴 왜 해?
진아가 쏘아붙이자마자 한나가 뭘, 하고 받아쳤다. K는 한나에게 치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진아는 소주를 넘기고 다시 잔을 채웠다. 진아는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전화를 걸어와 나오라고 졸라대던 한나가 이젠 자기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나와 진아는 한때 약을 먹었다. 처음엔 한나가 시작한 일이었다. 그 애는 부엌 찬장에서 엄마와 언니가 먹는 약을 몰래 꺼냈다. 개중엔 우울증 치료제와 진정제, 수면제도 있었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패니드 계열의 약도 있었다. 한나는 인터넷으로 성분을 확인하고 마음대로 조합했다. 그러고는 채팅창에 과열된 문장을 늘어놓았다. 문장의 흐름이 너무 빨리 바뀌는가 하면 꿈처럼 몽롱하고 알 길 없는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진아는 한나를 다그친 끝에 한나가 새벽마다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아는 한나가 걱정되었지만, 한편 한나가 말하는 '몽롱한 느낌'이나, '샤프하게 집중이 되는 느낌'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진아는 자기 주변의 별 볼일 없고 조용한 세계에서 조금 더 멀리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한나는 더 이상 찬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약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기 첫 번째 시도에서 그다지 책임감이 없는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진아는 자신이 집중에 문제를 겪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패니드를 손에 넣었고, 수면제 역시 어렵지 않았다.
진아에게 그건 별로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한나와 진아는 그 시기 동안 글을 쓰는 대신 지나치게 각성되거나 몽롱한 채로 별 볼일 없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해댔다. 한나에겐 자기의 상처를 드러내는 기묘한 방식이었겠지만, 진아는 한때의 치기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취기 때문인지 한나와 K는 진아의 눈길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적절하지 않은 눈빛과 적절하지 않은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요?
한나가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고,
아니, 몇 번 이야기해요.
K가 답했다. K가 한나의 손을 잡고는 남은 한 손으로 가방을 뒤져 펜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한나의 손바닥 위에 병원의 이름을 적었다. 진아는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병원의 이름을 다 적고 나서도 한나의 손을 놓지 않던 K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든 한나가 서로 눈을 피하지 않던 순간을.
그날 이후로 한나는 자주 K를 만났다. 한나는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진아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방에서 빌려온 책을 진아에게 보여주는가 하면 그의 작업 테이블에 어떤 메모들이 붙어 있었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K는 다른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내내 한나 생각을 했다거나, 작가들과의 술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나 소설에 대해 말했다는 둥 자주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나는 그 모든 것이 별일 아니라는 듯 굴었다. 진아는 언제나 그랬듯 한나를 말리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 진아가 눈을 떴을 땐 막 욕실에서 나온 한나가 발가벗은 채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한나는 진아의 시선을 느끼고 막 씻어낸 말간 얼굴로 돌아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흘러나온 노란 불빛이 한나의 몸을 비췄다. 엉덩이에도 살이 별로 없어서 허벅지와 거의 구분 없이 나지막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예쁜 몸이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언니, 있잖아. 이거 보여?
한나가 다가와서 마른 배를 내밀었다. 옅은 흰 선이 배꼽 아래로 나 있었다.
별로 티 나지 않지?
한나가 물었고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이 말이야. 임신할 때 생기는 거래.
한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병원에 갔다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엄마랑 목욕탕에 갔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난 발만 담그고 걸터앉아 있는데, 엄마가 손끝으로 이걸 가만히 쓰다듬는 거야. 근데 난 몰랐어. 이게 임신을 해서 생기는 건 줄은.
진아가 잠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곤?
그게 다였어. 그냥 이렇게 쓰다듬었어.
한나는 남의 몸을 만지듯 천천히 손끝으로 자기 배를 훑었다. 진아는 할 말을 얼른 찾지 못하고 한나를 보았다. 한나는 잠깐 그렇게 침대에 앉아 있다 풀썩 일어나서 옷을 찾아 입었다. 진아에게 꼭 들어맞는 티셔츠가 한나의 몸 위에서 원피스처럼 넉넉했다.
술 마실까. 우리.
한나가 말했다.
둘은 편의점으로 가서 소주와 맥주를 샀다. 아르바이트생은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브라를 하지 않은 한나의 가슴께를 노려보았다. 원룸 건물로 들어가려는 진아를 한나가 끌었다. 거기에서 오 분 거리에 지방하천이 있었다. 한나는 정자 위로 뛰어올랐다. 노인들이 자주 모여 낮 시간을 보내곤 하는 장소였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2인용 소파와 너덜너덜한 안락의자 따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아가 한나를 따라 정자 바닥에 앉았다. 둘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캔의 빈틈으로 소주를 부어 넣었다. 한나는 진아가 틀어 둔 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은 진흙 같은 내천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가물었던 탓에 물 냄새가 비렸다. 강가에 자란 긴 잡초 사이로 막걸리 병 몇 개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집에 전화 잘 안 하지?
진아가 물었고, 한나의 머리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무렵 한나는 집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숙사에는 짐을 챙길 때만 들어갔고, 늘 과방이나 동아리 방의 2층 침대 그리고 동기들과 진아, K의 집을 오가면서 쪽잠을 잤다. 그런 생활방식은 옷차림에서도, 걸음걸이에서도, 아무데나 주저앉은 모양새에서도 차츰 짙게 느껴졌다.
한나의 엄마는 언니에게 연락이 닿지 않을 때만 전화를 해온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언니의 집에 찾아가 보라는 것이 용건이었다. 한나의 언니는 잦은 입원과 시시로 찾아오는 무기력 때문에 육 년째 대학에 붙어 있었다. 언니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 한나의 엄마는 발작에 가까운 걱정을 했다. 매시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이었다.
어차피 내가 안 가보면 엄마가 직접 가보니까, 상관없어.
한나가 진아의 생각을 다 읽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진아가 한나의 허벅지 곁에 풀썩 누웠다. 두어 마리의 바퀴벌레가 정자 천장의 틈으로 몸을 숨겼다.
왜 어떤 사람의 일 년은 이렇게 길까?
진아가 중얼거렸고, 한나가 누운 진아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


가끔 안고 싶고, 만지고 싶었는데 진아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에게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좋아한다거나 혹은 욕망을 느꼈다거나, 어쨌든 그런 식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냥 한나가 곁에 있을 때, 한나의 살 냄새를 맡을 때 그쪽으로 손을 뻗고 싶었다. 그건 한없이 말갛고 단순한 욕구였고, 그래서 때때로 마치 그냥 저질러 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진아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둑으로 막아 둔 저수지에 물이 차는 것처럼 감정은 천천히 차올랐다.
갑자기 여행을 결정한 것은 여름방학 중의 어느 새벽이었다. 한나와 진아는 아침 첫 지하철을 타고 터미널에 도착해 강원도의 한 도시로 향했다. 외박을 나온 군인들이 몇씩 짝을 지어 읍내의 피시방과 당구장, 술집을 오갔다. 둘은 민박 간판이 세워진 낡은 주택에 들어갔고 보름 치 방값을 흥정했다. 그러고는 집 앞의 두 마리 치킨 가게를 단골로 삼았다. 술을 마시고 차도 사람도 없는 밤거리를 오래 걸었다. 빛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루살이가 득시글했다. 주인 내외가 아홉 시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밤중에는 목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과에는 홀수로 꼬인 애들이랑 짝수로 꼬인 애들이 있다는 거지.
진아가 이미 했던 말을 또 반복하면서 웃었다.
응. 안 꼬인 애들은 없다는 거지. 홀수로 꼬이면 존나 멀쩡한 척을 하고 짝수로 꼬이면 그냥 미친년인 거지.
한나가 따라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아는 몇몇을 소환해서 그 애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드러내고 과장하는지 평가했다.
그래도 짝수로 꼬인 애들이 좋지 않냐. 미친년이라도.
응. 짝수로 꼬인 게 좋아, 아닌 척하는 애들은 싫어. 그래도 짝수로 꼬인 애들은 내면화를 했다는 거거든.
근데 너도 멀쩡한 척하잖아.
이렇게 꼬였다가 저렇게 꼬였다가 계속 꼬이는 거지, 언니는 안 그랬냐.
한나가 정색했다. 진아가 정적을 깨려고 웃었다. 한나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아는 K에 대한 소문을 생각했고 ─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그것을 한나에게 말해버리고 싶었다. K가 출강하는 몇몇 학교에 걸쳐 떠도는 뒷이야기는 꽤나 자세했다. K가 왜 지방에서 온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보이는지, 아이들이 낸 소설에서 어떤 냄새를 맡는지, 칭찬에 목이 마른 아이들을 어떻게 끌어들이는지. 그리고 왜 그가 그렇게 자주 "문창과 수업은 교실 밖에 있는 것 같아요." 하고 너스레를 떠는지.
K의 연락이 뜸해지면서 한나는 자신과 K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K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너무 성급히 그의 집에 따라갔었던 것은 아닐까, 한나는 자주 후회했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할까?
한나가 말할 때마다 진아는 조용하고 은근하게 말리느라 애가 탔다.
그럼에도 진아는 자신이 한나에게 K에 대한 소문을 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나는 그 구체적인 소문 속에서 분류되고 정형화된 소녀들 중 하나였다. K가 좋아한다는 마르고 작은 체구, 긴 머리 역시 한나와 꼭 같았다. 소문과 한나를 하나하나 맞춰 보자면, 그 애의 얼굴에서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평소에는 높다가도 웃을 땐 낮아지는 독특한 목소리가 모두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진아는 생각했다. 한 사람에 대한 소문이 이렇게나 넉넉히 흘러 다니는데 어떻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알아보려고만 하면, 손을 뻗으면 바로 거기에 모든 이야기가 있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한나와 또 다른 여자애들이 살아가는 세계 사이에 단단한 막이 있어 좀처럼 뒤섞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나는 뒷마루에 앉아 맨얼굴에 햇볕을 쏘이며 낮 시간을 보냈다. 둘은 배낭에 잔뜩 싸온 책을 반도 읽지 못했고, 숙소 텔레비전 곁에 놓여 있던 96년도 판 바둑 잡지나 99년도 판 컴퓨터 따라잡기 같은 책을 더 자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한나는 문득문득 진아를 돌아보며, 언니, 우리 이렇게 통닭만 먹고 살아도 될까, 여름 과일이 먹고 싶다, 하고 실없는 말을 뱉었다. 그럴 때 한나의 얼굴은 오래 울고 난 사람처럼 힘없이 맑았다.
개강을 하루 앞두고서야 그들은 돌아왔다. 날이 조금 차가워져서 터미널 앞 등산복 할인 매장에서 집업 점퍼를 하나씩 사 입었다. 처음 들어 본 국산 브랜드로, 검은 바탕에 빨간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다. 둘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한나는 터미널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말했다.
언니, 나 다음 주에 워홀 간다?
진아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휴학을 신청하고 비행기 표를 끊어 둔 것은 벌써 한 달 전, 이라고 한나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끝내 가는 날은 알려주지 않아서 진아는 속이 상했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돈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런 면에서는 운이 좋은 거지. 어쨌든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될걸.
한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발 코를 아스팔트 위에 쿡쿡 찍었다.
아, 놀러 오면 되지 뭘 그래.
한나가 입을 꾹 다문 진아의 어깨를 밀치며 웃었다.


*


한나의 언니가 학교로 연락을 해 온 것은 그 애가 떠난 지 열흘이 되던 날이었다. 전화는 조교에게서 학생회장에게로, 다시 진아에게로 이어졌다. 진아와 한나의 언니는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났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창가를 따라 늘어선 스탠딩 테이블에 나란히 기대섰다. 진아가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약간 창백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건강해 보였다. 숱이 많지 않은 직모와 쌍꺼풀 없이 긴 눈매가 한나와 비슷했다.
한나는 멜버른에 도착한 이후로 가족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따져 보면, 마지막으로 문자를 받은 사람이 진아였다.
그렇게 훌쩍 떠날 것처럼 해놓고도 한나는 출국 전날 밤엔 진아를 술자리로 불러냈다. 한나의 동기 몇과 선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아는 짜고 단 안주들과, 싱거운 맥주, 그리고 어떤 핑계로 모였든 결국에는 자기 이야기들을 해대고 마는 아이들이 모두 지겨웠고 그래서 또 취했다. 어떻게 한나를 배웅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날 종일 진아는 숙취에 시달렸다. 겨우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선 생수병을 찾고, 그걸 껴안은 채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온전히 깨어난 건 저녁 무렵이었다. 좁은 창으로 붉은 저녁 빛이 드물게 내려앉고 있었다. 인정하고, 호명하고 나서야 차차 편안해지는 관계도 있다는 것을 진아는 그때 알게 되었다. 한나와 술을 마시고 소설을 읽고, 또 마주 앉아 끝없이 K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밤들에도 진아가 인정하지 못하던 사실이었다. 한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바라보자마자 거짓말처럼 진아의 마음은 차분해졌다. 뭔가 둑을 넘어 천천히 흘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한나의 언니는 진아가 내민 휴대폰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처음에 진아가 그랬던 것처럼.
한나는 이렇게 썼다.
언니 나 잘 왔어. 이륙하자마자 앞자리에 앉은 아기가 울기 시작해서 걔네 엄마가 하리보를 뜯어줬어. 왜, 그 작은 곰이 든 봉지 있잖아. 아기가 그것을 입에 물었고 곧 울음을 그쳤고,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아기도 엄마도 잠들어 있었어. 바닥에는 반투명한 곰 몇 개 흩어져 있고 아기 입 사이로 반쯤 녹은 초록색 하리보가 보였어. 아기는 진득한 침을 흘리면서 내내 잤어. 그 흰 볼과 그 침을 보는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숙소 정하고 휴대폰 새로 개통하면 그때 연락할게. 걱정하지 마.
한나의 언니는 말없이 얼음이 든 커피 잔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진아는 한나의 언니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고 곧장 네이버에 접속했다. 그리고 오래전, 그러니까 한나와 진아가 매일같이 카페에서 채팅을 할 때 한나가 사용하던 아이디를 검색했다. 화면에 블로그가 하나 떴다. 음악도, 배경 사진도, 제목도 지정되지 않은 블로그는 황량해 보였다. 댓글이나 방명록 작성이 허락되지 않은 블로그였지만 게시판 접근은 자유로웠다. 짤막한 단상과 메모가 혼란하게 뒤섞인 몇 개의 게시물은 어떤 독자도 상정하지 않고 쓰인 듯 보였다. 진아는 한나 언니의 연락을 받은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나 그 블로그를 찾아냈다. 마지막 업데이트는 그날 아침이었다.
한나의 언니는 진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가 통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나의 엄마였을 것이다. 휘적휘적 다리를 흔들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 역시도 한나와 닮아 있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동안 진아는 한나가 아침에 올려 둔 한 장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좁은 도미토리 침대와 그 위에 어지럽게 널린 소지품들, 그리고 한나가 학교에 늘 메고 다니던 작은 배낭 하나가 보였다. 흔들린 사진 귀퉁이에 체리색 매니큐어가 군데군데 벗겨진 한나의 한쪽 발이 찍혀 있었다. 휴대폰을 쥔 진아의 새끼손톱에도 같은 색의 매니큐어가 반쯤 남아 있었다. 여름 여행에서 천 원을 주고 사서 한나와 진아가 서로에게 발라 주었던 매니큐어였다.















작가소개 / 정지향

2014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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