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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피로와 친구들

  • 작성일 2018-10-01
  • 조회수 4,395

[단편소설]



자피로와 친구들



이상우




리사이클 숍의 문을 닫고, 가로등불이 스민 강가를 걷던 자피로는 열일곱 번째 가로등불이 꺼진 것을 보고선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 앞에 샛노란 DHL 로고 붙은 소포 박스가 하나 배달되어 있었다. 오마르 하이얌의 수식 시집 '평행오변형' 독해본이였다. 이주 전, 바닷가의 양로원에서 인후암으로 생을 마감한 전직 교도소장 페포 자비나스의 비밀서가를 뒤져 훔쳐온 물건이었다. 이를 위해 자피로는 시낭송 모임에 가입했지만, 모임의 회장이자 페포의 아들 펠리코 자비나스와 친해지기까지는 석 달이 걸렸다. 모임에서 유일하게 시집을 출판한 경력이 있는 펠리코는 자피로가 태어나서 처음 써봤다는 시를 읽고선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했고, 셋째 날에는 밤새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며 채찍으로 몸에 자해를 가했다. 여하간, 결국 그 둘은 친해졌고 아버지 자비나스의 장례식이 있던 날 추도시를 읽던 펠리코는 눈물을 훔치던 자피로와 눈을 마주치고선, 시인 특유의 자기도취에 빠져 그 놀라운 힘에 의해 거의 세자르 바예호라는 악령에게 영혼을 점령당한 듯이 오롯이 따위의 상투적인 구절들을 방언처럼 울부짖다 관을 걷어차 버린 뒤, 굴러 떨어진 아버지 시신을 짓밟으며 춤을 췄는데 자피로는 그 틈을 타 자비나스 가문의 비밀서가에 잠입해 '평행오변형'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온갖 수식과 도형들로 가득한 '평행오변형'을 독해해 낸 기사단의 전언에 따르면, 이 유고 시집은 대체로 오마르 하이얌이 페르시아의 밤보다 어둡고, 태양의 움직임보다 섬세한 것에 대해서 아마도 꿈에서 본 것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며, 이 시집으로는 하산과 하사시인들이 숨겨 둔 니잠 알 물크의 '뱀별 십자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년에 이른 오마르는 해시시에 중독됐거나 치매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한다 했다. 리사이클 숍 다락에서 자피로는 '평행오변형'의 독해본을 펼쳐 넘겨보다, 이전 이후의 시구들과 아무런 연속성도 없이 오른손 손바닥이 그려진 쪽을 발견하고선 그 위로 자신의 손을 마주 얹어 두어 보았고, 그가 손을 올려 두기 전부터 예상했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종이의 감촉에서 종이의 소름처럼 그와 같이 이곳을 펼쳐 보고 손을 얹어 보았을 이들의 온기가 희미하게 착각되고, 손을 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다락 너머의 밤을 인내하던 자피로가 다시 한 번 더 손을 얹으며 예의 그 미세한 온기의 결을 따라 방향을 비튼 채 그림의 손과 자신의 손을 엇갈리려 할 때, 그림의 손이 그보다 먼저 그를 마중하여 깍지 껴주었다. 아무래도 환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이 버려진 터널을 향하는 숲의 오솔길로 지나가며 나뭇잎끼리 부딪쳐 흘린 그늘의 물결에게서 기차소리가 베여오고 몸에 관한 기억을 잃은 듯이 조금도 자세하지 않은 몸으로 빛이 유려한 길을 잃어버린 몸처럼 좇아갈수록 몸의 감각은 이렇게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오솔길이 아니라 저 멀리 어둡기만 한 터널로부터 숲을 열어젖히는 움직임으로 기차가 전멸시킨 풍광이 되어 나타나 여태껏 사람들이 지각해 온 색상들은 모두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자피로는 골목을 지나 강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새벽에 눈 뜬 자피로는 아직 어둔 방의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낯선 이는 창이 없는 자리에서 창밖을 보는 자세로 얼굴을 비켜 있었고 자피로는 다음날 온몸이 비로 흠뻑 젖은 남자가 리사이클 숍에 방문했을 때에야 새벽의 일을 기억해 냈다. 고양이용 장례식 관을 찾는다며 가게 바닥에 물기를 질질 흘리며 돌아다니던 남자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발아래로 물이 고일 때까지 흐느끼다 돌아갔는데, 휘청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 골목의 화창함 속으로 증발되듯 사라져 가는 남자를 지켜보던 자피로는 다락에 올라 '평행오변형'을 펼쳐 보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뒤져 봐도 손바닥 그림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또 새벽에 자피로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전과 같은 각도로 얼굴을 비켜둔 낯선 이의 체구가 낮에 본 남자와는 달랐고, 자피로는 몸도 움직일 수 없이 졸음처럼 기울어진 어둠의 깊이에서 어떤 표정이라도 나타나길 기다리다 결국 또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잠들어버렸다. 나이젤은 자피로가 소속된 기사단에 의해 구금당했던 강령술사로, '평행오변형'을 들고 자피로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부둣가의 어시장 뒷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콜라 캔을 차고 있었다. 항만조합원이 대다수인 동네 사람들은 나이젤을 행려병자라 부르며 아이들에게 가까이하지 말라 했지만, 어느 날 우연히 나이젤이 차에 짓밟혀 죽은 비둘기의 영혼을 끄집어내 하늘로 내보내 주는 것을 본 아이들은 그를 닥터 스트레인지라 부르며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어시장 한구석의 카페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얼음에 재운 닥터페퍼 한 모금씩을 마셨고 '평행오변형'을 훑어본 나이젤이 말해 주길, 제가 처음으로 강령술을 접한 곳은 베이루트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곳을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도 그곳의 화질, 보다 명확히는 어떤 음질이 항상 기억보다 앞서 있어요. 일본인 적군파들이 저희 집 건너 건너편 건물에 숨어 살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도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 하루 종일 틀어 놓는 라디오 소리가, 당신은 아마 들어 본 적 없을 주파수의 불안정한 소음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것이 심상의 화질마저 뭉개뜨려 놓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제가 고개 숙이고 쏘다니던 거리에 흙먼지가 자욱했던 것인지 아니면 음질로 오염된 기억의 착시 탓에 그렇게 자글자글한 입자들로 거리가 균열된 채 떠오르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당신네 기사들이 저를 추적할 때 밝혀졌다시피 저의 부모님은 쿠르드족으로 그 시기 레바논에 잠입했던 다른 페쉬메르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집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낮이면 그 거리에서 어깨에 로켓 런처를 이고 다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저녁이 되어 슈퍼마켓에 들러 파인애플 맛 아이스크림을 구경할 때면 얼굴은 볼 수 없이 소리로만 존재하는 일본어를 들을 수 있었지요. 여름이 끝날 무렵 구름이 막 개어 근교의 들판으로 소풍 나갔던 광학이론 시간에, 돌이켜보면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평범했던 동시에 비정했던 일라이어스 선생님이 각기 다른 자세로 들판에 누운 학생들에게 '감정교육'의 마지막 장을 불어로 읽어 주었던 일을 저는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마치 그 모습이 그대로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지요. …Ils se la contèrent prolixement, chacun complétant les souvenirs de l'autre ; et, quand ils eurent fini. C'est là ce que nous avons eu de meilleur. Oui, peut-être bien C'est là ce que nous avons eu de meilleur. 여덟, 아홉 명쯤 되는 무국적의 학생들은 한 명도 선생님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귓속을 근사히 채워 오는 불어의 어감들이 늘 지나오던 들판을 생전 처음 보듯 부풀어 오르게 만들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낭독이 끝나고도 말없이 풀잎 사이를 둥글게 벌려 놓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제가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짓게 되는 바로 그 장면이기도 합니다. 두 다리를 쭉 펴거나 슬쩍 엇갈린 채 반쯤 누워 편히 앉아 있는 그들의 자연스런 윤곽들이 바람에 팔랑이는 옷과 같은 너비로 넓어지는 모습 말이지요. 훗날 그들도 제가 그랬듯 그 책을 찾아보았을지, 그들에게도 길을 걷다 가판대 서점에 들러 선생님이 읽어 줬던 책을 찾아, 알아듣지 못했던 문장들을 명료한 의미로서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어 볼 기회가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C'est là ce que nous avons eu de meilleur(그때가 제일 좋았지)' 'Oui, peut-être bien C'est là ce que nous avons eu de meilleur(그랬나? 맞아 그때가 제일 좋았어!)' 그때라는 관념, 어쩌면 방어적 강박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기억이 빛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시간들을 모조리 집어삼켜 냈기 때문인지,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그 이후의 거리는 온통 어둡기만 합니다. 실제로 곧 그 거리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기도 했으니까요. 창백했던 밤들. 공습 그리고 빈 거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매일 들려오던 라디오 소리마저 사라진 거리에서 부모님은 저를 남겨 둔 채 터키로 떠났고 저는 날마다 빈집들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쳐다 써야 했지요. 천성이 겁쟁이였던 제가 부모님과 달리 페쉬메르가가 되길 거부해 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인지 영양실조 탓에 몸에는 두드러기가 나고 두통이 일어 고개 숙이면 머리칼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내리는 저를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자신이 저조차 처음 보는 사람으로 제가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어 가는 거리에 헤르메스주의자가 나타난 것은, 일본인들이 남겨 둔 브라운관으로 NHK의 적군파 특집보도가 방송됐던 날이었지요. 저는 그들이 숨어 살던 집에서 그들이 남겨 둔 브라운관을 통해 그들의 얼굴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에서야 그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음에도 그리고 분노라기보다 공포가 깃든 젊은 얼굴의 이들이 여기에 숨어 지내던 이들과 같은 자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죄를 박제해 두듯 현상수배 된 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지요. 저는 습기 찬 화장실에다가나 몰래 사진을 붙여 놓아야 했던 그 사람들이 슬퍼서가 아니라 울음의 행위가, 눈물로 나타난 감각의 구체성만이 당장 저에게서 저를 증명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흘린 눈물만이 이 땅 위로 저를 그려낼 수 있다는 듯이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건물 옥상에서 거짓말 같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헤르메스주의자이자 새장 안에 갇힌 퀘이커앵무 한 마리가 말을 걸어 온 것이었지요. 청사과빛 깃털을 골라내던 앵무새는 자신을 제롬 경卿이라 소개하면서 얼마 전까지 티머시 리어리라는 자의 육체를 빌려 미국 전역에서 영성 운동을 이끌어 왔지만 자신을 눈치챈 블랙팬서 당원들에게 감금당한 이후 앵무새에게로 영혼을 옮겨왔다 말해 왔습니다. 훗날 제가 제롬 경과 긴 여정을 함께했을 때,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앵무새였던 제롬 경이 어떻게 웨더맨들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게 전해졌고 적군파 이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제롬 경을 옥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불어와 아르메니아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앵무새를 보며 오랜 시간 저로부터 저를 앗아갔던 영양실조가 결국 이명과 환각까지 불러일으킨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탱크 바퀴 자국이 길게 팬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환타 캔을 두고 내기사격을 하던 모습이나, 해질녘 이발소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들을 떠올리며 거리 이전의 거리로 떨어져 버리려던 저에게, 제롬 경은 이제 확신을 가장하는 시대가 당도할 것이라고 이 거리로부터 시작되어 이 거리가 끝내 확장해 낼 세기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 부탁해 왔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랄지 경고랄지 어느덧 거리에는 제롬 경이 불러낸 망자들이 살해당한 모습으로 돌아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흔들의자에 앉아 비명을 지르는 노인들의 몸속에서는 분해된 아기들의 팔 다리가 노인의 살갗을 뚫고 나오고 있었지요. 당신이 다른 강령술사를 통해 본 적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꺼번에 대규모의 영을 이동시킨 탓에, 땅바닥과 건물 벽 이곳저곳에 신체가 엇갈린 채 튀어나온 갓난아기들이 입벌려 내장기관을 쏟아내는 광경, 그것이 제가 겪은 첫 집단강령술이었습니다. 그대로 혼절해 버린 저는 다음날 아침 길거리에 버려진 수많은 륙색 중 하나를 주워다 짐을 꾸리고선, 남은 한 손에는 새장을 든 채 거리를 떠났지요. 죽어 본 적 없는 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살아 있다고 자신하는 것인지 우습다며, 또 그런 주제에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든 삶의 자기연민적 서사로서 소비하려고만 하고 있다고, 저는 제롬 경과 함께 카이로로 향하며 가끔은 제가 대화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굶주림이 외상처럼 구축해 낸 가상에 묻혀 단지 앵무새일 뿐인 앵무새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제가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이국들을 구체적인 어휘로 발음해 내는 제롬 경에 매료되어, 그런 제롬 경이 유일하게 궁금해하는 다음 세기가, 제가 나고 자랐던 저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자 이제 미래라 단정지어져 버린 그 세기가 저 또한 궁금해져 믿고 따라 보기로 했습니다. 제롬 경은 종종 중세의 유리창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교회당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이 애초에 각자가 한계로서 지녔던 지리적 특성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하는 제작 과정에 있어서, 한계점 혹은 불가능성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나가 스스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미감으로 오히려 진일보한 양식들의 놀라움을 알려주곤 했습니다. 보트를 훔쳐타거나 입국심사관의 증조부 영혼을 소환해 내는 등 긴 여정을 거쳐 카이로에 도착해서도 피라미드보다는 힐튼 호텔을 선두로 나일강변을 낀 건물들의 유리창을 한 장 한 장 품평하던 제롬 경은 올드 카이로에서도 묘지에는 들어서지 않고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창틀을 한참이나 감상했지요. 우리는 구시가지에서 헝가리인 부부가 운영하는 호스텔에 묵으며 엠티브이로 바닐라 아이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거나 해적판 DVD를 통해 프렌즈를 보았고 가끔 제롬 경은 새장에 거꾸로 매달려 차라리 자살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가도 또 어떤 때는 홀린 듯 하루 종일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카이로에서의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제롬 경이 만날 사람이 있으니 시타델로 가보자고 하여, 그곳에서 독일의 에이스 전투조종사이자 나치당 소속 공군기술부장이었던 에른스트 우데트의 영혼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들은 별빛이 똘망한 모스크를 배경으로 상아색 벽담길을 거닐며 독일어로 이야기 나눴어요. 잠시 대화가 중단됐다 싶어 에른스트 국장을 바라보면 에른스트 국장이 저에게 빙그레 웃어 줬고, 왼손으론 하늘을 가르키곤 오른손을 들어 아마도 전투기를 시늉하는 듯 허공을 배회하다간 다시 왼손을 부슬거리며 전투기 아래로 떨어지는 폭탄들을 묘사하더군요. 그다음에는 전투기였던 오른손을 권총 모양으로 바꾼 뒤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대고 쏘았고요. 저는 비행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눌 동안 별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제가 볼 수 있는 곳들이 지닌 시점을 상상해 내려 했으나 이내 바로 그 시선으로금 압사당하리만큼 초라해져 고개를 숙여버렸지요. 그들은 장미십자회나, 적그리스도의 재림 이를테면 히틀러나 후세인 등으로 대표될지도 모를 현상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무함마드 알리가 맘루크들을 몰아넣고 학살한 골목을 걸으며 터미네이터2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제롬 경이 말해 주었습니다. 더불어 에른스트 국장이 저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알려줬는데, 그 말이 곧 제가 견습 강령술사로서의 의식을 치르게 되리라는 의미일 줄은 당시로선 알 수 없었지요. 그날 제가 꾼 꿈은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부모님이 식탁에 마주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고 복도로 나와 조심스레 손바닥을 난간의 손잡이와 스쳐가면서 계단을 따라나서면 건물 밖에서 에른스트 국장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는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저의 꿈속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제자리에서 가만히 저를 향해 웃어만 보여 제가 앞장서 그를 안내해야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어느 곤충, 날파리 같은, 학술적 종을 댈 수 없는 벌레들이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띄곤 했는데 매일 식은 식감의 샌드위치를 팔던 카페테리아 앞에서나 치즈색 고양이들이 잠든 탁아소 줄무늬 차양 아래에서, 그들의 한없이 얇은 날개 위로 파르르 빛의 궤적을 그리던 물결무늬가 날개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까지 넓어질 때마다 그와 같은 수백의 날갯짓이 접었다 펼쳐내는 거리가 제가 단 한 번도 기억해 본 적 없던 선명한 모습으로 아스러지곤 했어요. 경이로움, 공포,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한 각도로 무한히 순환해 오는 감정들 혐오, 설렘, 분노 따위에 사로잡혀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꿈에서 곤충을 처음 보았기 때문인지 넋을 놓다가도 눈앞을 어지럽히는 그들을 손으로 쳐내려 하면 에른스트 국장이 제 손목을 붙잡고서 고개 저었고, 저는 그제서야 그들이 비행기일지도 모른다고 깨달았습니다. 차양 아래를 무수히 부수며 허공의 영토를 두고 벌이는 공중전만큼이나, 런던 상공을 파티장처럼 화려히 수놓았던 폭격기의 불빛들만큼이나 치열하고 어마무시한 관성에 힘입어 타인의 꿈속으로까지 꿰찔러져 버린 에른스트 국장의 원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우리가 멀리 교각이 보이는 길목을 지날 때, 에른스트 국장이 말해 오길 '나는 어릴 적에 구름을 제가 움직이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고 있을수록 움직였으니까요.' 저에게 꿈결로 발음된 억양을 설명할 재주는 없습니다만 그의 말들을 제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국장은 달빛이 환한 밤에 전투기를 몰고 나가 구름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는 그 자신이 생의 바깥에 있는 것 같았다며, 그곳에서 적군기들을 폭파시킬 때마다 추락하는 기체들이 구름을 경계 삼아 마치 육체에게로 진입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러다 구름을 맞닥뜨리고 유리창이 수증기에 의해 물방울로 가득 분열되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울음을 마주하며 어째선지 슬픔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이야기했지요. 일본인들이 살던 건물로 들어서며 그들의 얼굴이 어떨지 궁금한 동시에 두려웠으나 에른스트 국장이 이곳에 와 있듯 제롬 경 또한 이 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용기가 나더군요. 저는 앞장서 계단을 올랐습니다. 일본인들은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눈앞의 층지고 해진 계단을 따라 기억과 동일한 음조의 일본어가 보이거나 잡힐 듯한 덩어리, 마치 행인과 같은 형질로 제 주위를 배회하곤 했습니다. 제복 코트를 걸치고서 제 뒤를 따라오고 있을 에른스트 국장과 꼭 닮은 질량으로 말이지요. 소리로, 음성의 군중을 줄줄이 내보내며 관처럼 닫혀 있는 문들을 지나 옥상에 도착할 때까지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를수록 자세해지는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되찾은 계단 아래의 거리가 제가 떠나온 날과 같은 모습으로 무너져 있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뒤를 돌면 마주치게 될 비겁한 그리움이 정체모르게 낯익은 냄새처럼 막연한 희망을 모두 한데 뒤섞어 놓은 감상으로 거리를 물들여 놓아, 제가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서였지요. 마침내 옥상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주 깨끗이 손질된 새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찌나 관리가 잘 되었는지 그 얇은 쇠살마다 햇살이 미끄러지며 빛을 내고 있더군요. '구름은 거대한 영혼 같아요.' 어느덧 저를 앞지른 에른스트 국장이 난간에 기대 말했지만, 고개 들어 보아도 어디에서도 구름을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 저는 방금 전 에른스트 국장의 목소리가 에른스트 국장의 것이 아니라 제롬 경의 것이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새장 안에는 제롬 경 대신 눈, 코, 입 없이 시체빛 살가죽으로 얼굴이 뒤덮인 아기가 갇혀 있었으니까요, 에른스트 혹은 제롬 경은 새장을 열어 아기를 난간 위에 올려 두고선, 두 손아귀로 아기의 얼굴을 붙잡아 두 엄지손가락을 쑤셔 넣어 샘물처럼 피가 터져오르는 두 눈알의 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음엔 코, 입, 귀의 구멍을. 온통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되어 서서히 눈알을 굴리고 코를 벌름거리며 입벌려 무언가 말하려는 아기의 새빨간 얼굴을 저는 난간 밖으로 밀어버렸는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창밖을 지나가는 층적운이 마치 꿈으로부터, 아기가 머리통부터 떨어져 터져버린 거리로부터 반사되듯 붉게 물들고 있었고 새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나이젤과 자피로가 나란히 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얼음이 녹은 유리잔의 그림자가 투명하게 번져 오고 있었다. 그 후 아기의 얼굴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매번 실패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기억나는군요. 하얗게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해지다가 다시 어둠에 파묻히는 유리잔의 그림자를 지켜보던 자피로에게 나이젤이 말했다. 그건 바로 눈 녹은 베네치아 거리에 서 있는 당신의 얼굴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자피로는 자신의 방에 의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피로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나이젤이 눈앞에서 유령처럼 흐려지며 했던 말을 되뇌었다. '영혼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단지 이렇게 반사될 뿐이지요.' 잠 든 자피로가 또다시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자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젤의 영향 때문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이전과 다르게 자피로는 손발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것을 느꼈고, 당장 행동을 취하기보단 그자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여주길 기다렸다. 그동안 이토록이나 오래 의자에 앉은 이를 관찰해 본 적 없어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의자에 앉아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는 아무래도 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의자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자피로는 누운 몸을 조금씩 끌어올려 벽에 등을 기댄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갑작스레 달려들 경우를 대비했다. 창문이 없는 자리에서 창문 밖을 감상하듯 의자에 앉아 있던 이의 한편이 순식간에 환해지고 번개가 친 것처럼 번쩍거리던 이가 반 박자 늦게 허리를 세우며 자피로를 돌아봤을 때, 마침내 자피로는 새벽만 되면 자신의 방에 들어와 고뇌하던 이가 발 킬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발 키머와 자피로가 서로를 마주한 처음에는 잠시간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다가는, 둘 모두 서로에게 왜 자신의 집에 있는 건지 물었고 둘 모두 자신이 자신의 집에 있다고 대답했다. 서로에게 다가가 촉감을 나눠 볼 엄두는 내지 않고서 둘은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이어 갔는데, 간혹 조금 전과 같이 환해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하던 발 킬머가 지금 그곳에도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는지, 발 킬머 씨 옆에는 창문이 있습니까? 나에겐 당신도 창문 옆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라며 발 킬머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만든 러그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이 걸려 있는 거실의 구조를 묘사해 줬고 자피로 또한 침대만 있고 창문도 아무것도 없는 자기 방을 설명해 줬지만 각자의 어둠 속에서 자라난 서로를 아직 믿지 않았다. 자피로는 나이트가운 앞섬을 여미는 발 킬머에게 어릴 적부터 당신이 우상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차림새로 보아 그곳 또한 잠들 시각인 것 같은데 왜 매일 거실에 나와 밤새 앉아 있는지 물었고, 발 킬머는 자신이 지워지길 바라는지 기억되길 바라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잠에 들 수 없다고 대답했다. 배트맨다운 고민이네요. 발 킬머는 조엘 슈마허를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한 대 갈기고 싶고, 친구들과 다크나이트를 보고 온 아들이 며칠간 자신을 경멸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이야기하면서도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산타페 거리를 대칭으로 미끄러트리는 빗물은 자피로에겐 보이지 않았다. 발 킬머는 거실에 앉아 비오는 산타페 거리를 걸었고 비오는 힐사이드 공원을 어슬렁거렸고 비오는 공업단지의 굴뚝을 바라보았다. 발 킬머는 비오는 레스토랑 주차장에 서 있었고 비오는 테니스 클럽 탈의실에 앉아 있었고 비오는 호숫가에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발 킬머는 비오는 산타페 나무농원의 낙우송 아래 기대어 있었고 비오는 페이스트리 전문 빵집 앞에서 진열대의 사과잼을 구경했고 엉엉 눈물을 흘리며 치과를 나오는 남자 아이를 빗속에서 응원했다. 영화 속에서 존재하는 일처럼요? 아니. 존재를 겹쳐 놓는 일처럼. 자피로가 '평행오변형'에 그려져 있던 손바닥을 떠올리며 발 킬머의 오른손을 살펴볼 때, 발 킬머는 서른여섯 살이고 말론 브란도와 함께 정글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이미 영화의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된 말론 브란도가 발 킬머에게 카메라 바깥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둔 채 한 손을 들어 올려 카메라 너머를 가리켰을 때, 줄리어드 연기 학원에 최연소로 입학한 발 킬머는 열일곱 살이고 애리조나 근처의 별장 마당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차가워지는 몸 밖에서 부엌의 쿠키 냄새가 달콤했다. 빗소리만 가득한 풀장 근처를 천천히 걸으며 아벨 페라라에게 보낼 편지에 적을 문장을 고르다가는 이내 선베드에 누워, 거실의 가족들이 자신을 두고 나누는 농담을 엿들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차도 한 대 사고 싶었고 그 차 안에서 편지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벨 페라라 영화의 주연으로 발탁돼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상상을 하거나, 동생 웨슬리를 리무진에 태우고 비벌리 힐스의 파티장들을 순회하는 상상, 유럽의 호텔 테라스에서 포르투갈 혹은 폴란드의 신출내기 감독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 배트맨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찬사 둘 모두를 얻을 자신은 있었다. 그것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무엇이든, 얼마만큼의 고통이든 언제나 얼마든지. 스물여섯 살의 발 킬머는 샌디에이고 해병항공 기지의 술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 톰 크루즈라는 꼬맹이가 광기어린 눈빛으로 욕망을 재능인 양 가장하고 있었다. 조금도 닮지 않은, 오히려 정반대의 눈매였음에도 톰 크루즈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동생 웨슬리를 떠올리게 했고, 발 킬머는 촬영이 끝나면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면서 피닉스의 꼬리로 휘갈겨진 듯한 노을이 불러온 저녁에는, 리복 운동화를 신고 별빛처럼 자연스레 다운타운부터 부둣가를 이은 주택조명을 감상하며 언덕배기까지 조깅했다. 가끔씩 분노와 슬픔의 형태로 현재를 찢어낼 듯이 솟구쳐 오르는 장래를 간신히 참아낼 때마다 괜찮다고 아직 조금 더 불행할 수 있다고 주문하면서 아벨 페라라의 영화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는데 그럴 때면 이미 극장을 채운 기립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부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밀려오는 샌디에이고의 파도소리처럼. 관객이 없는 극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리무진 안에서 마흔다섯 살의 발 킬머는 더 이상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라디오에서 마침내 삶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말론 브란도의 부고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는 말론 브란도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응시하던 카메라 바깥에서 눈을 떼어, 아들 잭 킬머를 바라보았다. 콤플렉스이기도 했던 자신의 투박함 곳곳이 아내 조앤의 예민한 곡선이 우아하게 녹아내린 자태로 파리 패션 위크의 생로랑 런웨이를 날아오듯 걸어오고 있는 천사를. 잭 킬머는 카메라 안에 다소 거만한 자세로, 긴장 어린 표정을 치기로도 숨기지 못한 채 슈퍼스타가 될 자질을 갖춘 이들 특유의 어설프고도 외로운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자기가 한때 스스로를 확신하며 존재해 온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들을 지켜보던 쉰다섯 살의 발 킬머는 조용히 상영관을 나와 불 꺼진 비상구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징후와 세기를 꼽으며 아핏차퐁 위세라테라쿤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아들의 인터뷰가 커다란 창밖으로 초록빛 잎사귀들이 아열대처럼 쨍쨍한 아틀리에에서 진행되었는데, 좁고 어두운 비상구 계단을 내려오며 발 킬머는 입구에서 잠시 머금었던 극소량의 불빛이 잔상이 되어 어둠 속으로 얼룩질 때 평생 이곳에 머물러 온 것 같다고 기이하게 휘어지다 사라져 버리는 무늬들로 극장도 바깥도 아닌 곳에서, 발작처럼 보이지 않는 비를 맞고 있는 발 킬머를 지켜보던 자피로는 거실에 나와 샤워가운을 입고 무너지고 있는 자가 비 내리는 그 자신의 존재들로금 스스로 익사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톰슨의 카페' 인기 메뉴 부동의 1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피자오믈렛이다. 밀크티가 두 번째고, 세 번째는 블루시티 도넛. 염소치즈 플랑은 열네 번째쯤이다. 제이콜 톰슨 주니어는 매주 화요일이면 세계 최고의 염소치즈 플랑을 만들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시장에 나섰으며 가장 좋은 재료들만 엄선해 본인의 쉐보레 조수석에 실어 날랐다. 재료의 컨디션을 생각해 가게로 오는 길에는 마르크 아믈랭의 드뷔시 연주만 재생했고, 부엌에 도착해 재료를 펼쳐 놓기 전까지는 담배도 피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톰슨의 카페' 인기 메뉴 1위는 피자오믈렛이고 그것은 압도적이다. 누구도 '톰슨의 카페'에 염소치즈 플랑 따위의 메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고, 일 년에 한두 번 블로거들이 주문하긴 했지만 사진이나 찍곤 치워버렸다. 로잔 디자인 대학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하던 제이콜은 방학을 맞이해 떠난 바이크 여행에서 리에주의 한 늪지대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딸린 작은 오두막에서 먹은 염소치즈 플랑에 충격을 받아 대학을 중퇴하고, 늪의 사색가이자 요리사인 흐리스토 디마가 보름달을 보러 나온 악어에게 두 다리를 내어주기 전까지 그의 밑에서 오 년간 수행했다. 삼십 년간 실종처리 되었던 모나코 왕실 소속 수석 요리사로 밝혀진 흐리스트 다마의 요리일기는, 20세기 최후의 미각이라는 전설적인 이력까지 덧붙여져 경매가가 50만 불까지 치솟았지만 제이콜이 그것을 팔지 말지 고민할 동안 이미 가짜 판본이 43만 불에 거래되었다. 사실상 무학력자에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제이콜은 어머니 톰슨의 카페를 이어 받았고 '톰슨의 카페' 인기 메뉴 1위는 피자오믈렛이다. 피자오믈렛은 어머니 톰슨이 그녀의 어머니에게로부터 물려받은 레시피로, 만드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고 먹어 본 적 없는 사람조차 맛을 똑같이 따라 낼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한 음식이었는데 그나마도 귀찮아진 어머니 톰슨이 인스턴트로 대체했지만 손님들은 맛이 더 깊어진 것 같다느니 피자오믈렛의 마태복음이라느니 호들갑을 떨었다. 제이콜은 아침 6시경 카페에 도착해 시장에서 사온 재료들을 조리대 위에 펼쳐 놓았다. 커튼 발을 올린 제이콜이 조리대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꺼낼 때 통유리로 안개 낀 거리가 물빛처럼 흘러왔고 가끔씩 희미한 자동차 전조등이 지나가면 제이콜은 불붙은 담배를 내려놓으며 기도 올리듯 흐리스트 다마의 레시피를 되뇌었다. 두 다리를 악어에게 내어준 채 두 팔로 오두막까지 기어오던 요리사를 떠올리면서. 요리사가 생전에 그런 일을 당할 만큼의 악행을 저질렀길 바라면서. 언제나와 같이 톰슨의 카페 첫 손님은 핵사토르였고 AP통신의 부고 전문 기자인 핵사토르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제이콜이 스승의 내장을 틀어막았던 손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염소치즈 플랑을 준비하든지 말든지 피자오믈렛과 밀크티를 주문했다. 제이콜이 전자레인지에 피자오믈렛을 돌릴 동안 핵사토르는 또 어떤 가여운 죽음이 2진법이 되어 우주를 떠돌다 블랙베리의 진동음으로 나타나길 기다렸는데 제이콜은 핵사토르에게 커피를 내어주며 태국에서의 휴가는 어땠는지 물었고, 설탕 봉지를 뜯던 핵사토르는 그토록 선명한 풍경 속에서 매일 밤 죽은 자들이 꿈속에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첫날부터 하루에 몇 번씩이고 예고도 없이 쏟아지던 비에 젖으며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한 명의 직원이 맨발로 커다란 비를 이용해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모습을 마주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발뒤축을 들어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고, 아유타야에서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 대신 나뭇가지를 지나온 바람이 숨결로 들려오는 사원을 뒷짐 져 어슬렁거리면서 전날 새벽에 나타난 죽은 이들의 몸짓을 따라했고 이 국가의 지리, 위도상의 특수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불러냈음이 분명한 죽은 자들을 떠올리다 보니 노동의 무한한 옆모습으로 마당을 쓰는 사람의 형상이 사원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도, 그늘진 나무 등에 기대어 앉아 스케치북에 크레파스 칠하는 아이에게서도, 가부좌 튼 채 목 잘린 부처상들에게서도 연속되는 것 같았다고, 어지러울 정도로 밋밋한 얼굴을 흘기며 죽은 자들은 꿈속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가 소비에트 출신 원반던지기 선수의 부고 기사를 쓰느라 장례식을 놓쳤던 조카 또한 만나 볼 수 있었다고, 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어? 서로를 마주하기보다 어깨를 스쳐가면서 그저 그렇게 거리와 골목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태국 사람들의 자세에서는 놀라운 균형감이 느껴져서 고작 땅을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물로서의 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내 가는 사람들의 안정감이 시야가 닿는 곳마다 차올라 허리에 두 손을 짚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보잘 것 없이 작게 느껴졌다며, 밀크커피를 마시기 위해 들른 차이나타운의 총포상 앞에서는 얼굴부터 몸 가득 염증과 커다란 붉은 종양이 올록볼록 튀어나온 남자가 길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햇볕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질병 사이로 누런 땀을 흘리던 그자가 혼잣말을 내뱉었고 그의 입 밖으로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의 기이함, 죽은 자들이 꿈속에서 악몽을 거부하던 고갯짓들로 대화 대신 표정을 이어 갔을 때 마치 죽은 자들이 핵사토르 그 자신을 꿈꾸고 있는 것처럼 주체를 잃은 거리에서 조카의 두 손에 들린 모형 기차를 기억해 내면서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고, 그렇게 얼음 녹은 밀크커피의 플라스틱 잔을 뒤늦게 확인하며 총포상 앞 병자의 목소리 안에 머무는 일은, 비가 내리면 지붕에서 물이 새는 30바트짜리 기차의 창밖을 바라볼 때와 동일한 슬픔이었다고 말했다. 순도 높은 슬픔. 핵사토르는 그것이 우울이나 외로움 따위의 기타 감정이 일체 섞이지 않은 슬픔 그대로의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챌 수 있었다고, 순수한 결정으로 차오른 슬픔, 수상택시를 타고 도착했던 야시장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옆에 앉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회전목마 앞에 서 있는 노인 그리고 강 건너 호텔 불빛들이 물낯에 스며든 모습이 각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분간 가지 않을 동안 마치 울음의 내부로 초대받은 기분이 되어 어떤 기억이나 전망 없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그러나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축제 같은 슬픔에 서서히 들떠 갔는데 그렇게 가까워질 듯 멀어지고 가까워지길 반복하는 마음의 높낮이로 사람들은 움직이고 팟타이는 식어 가고 관람차는 회전하고 전철을 갈아타고 빗물이 고인 열대나무 아래를 최대한 천천히 걸어 숙소로 돌아오던 길 내내, 그는 알몸으로 욕조에 누워 펑펑 울다 잠드는 자신을 그려 보았으나 막상 따듯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어 본들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며, 다만 젖은 몸으로 욕실을 나와 바람을 유인하여 밤을 거두는 백색 커튼을 마주한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방울의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던 순수한 슬픔이 저 먼 별빛으로부터 출발하여 차가운 커튼 아래로 비밀스레 흘러 넘쳐오는 자살욕구를 물리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나부끼던 커튼이 슬며시 가라앉을 때마다 아주 기다란 감촉이 입맞춤처럼 죽은 자들의 꿈속에서 보이지 않는 죽은 자들로금 사후의 끝없음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제이콜은 자신 또한 경험했을뿐더러 그동안 숱하게 보아 왔던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핵사토르가 여행에 실패했음을, 그리고 그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 내내 감정을 과잉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고, 아직 아무 죽음도 당도하지 않은 블랙베리를 살피던 핵사토르는 피자오믈렛이 나오자, 두 손을 교차하여 성좌를 그은 뒤 다소 인종차별적이며 오리엔탈리즘에 물든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마지막 날 저녁 비가 그친 르부아 호텔의 루프탑 바에 앉아 있었을 때, 아이패드를 든 직원들이 지나가고 옆자리에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일본인 연인들의 시선이 밀려나는 먹구름을 향하면, 기습 폭우 탓에 한 시간 전만 하여도 빗방울에 얼룩진 버스 창가로 과장되어 다가오던 공상과학적 불빛들이 보정 없는 색채로 루프탑 바깥의 도시에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감상한다기보다 바로 눈앞에 스며들면서도 너무 멀어 잡을 수 없는 불빛들을 그저 배경으로 삼은 채 전자담배를 피는 일본인 연인 곁에서 핵사토르는 자신이 미래에서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64층 높이의 바에 앉아 푸른색 칵테일이 담긴 술잔과 저기 먼 아래 직사각형으로 흐르는 시민수영장을 번갈아 보다가는, 그 주위로 징그러이 흩어진 빌딩 불빛들에 집중하다 보니 이 도시 자체가 유적지처럼 느껴졌다며 서서히, 유적지가 될 미래의 유적지들을 미래에서 돌아와 감상하는 기분, 알아들을 수 없는 종류의 외국어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슈트 차림 직원들 사이를 오가는데,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구름의 방향으로 넓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사실은 죽은 자들의 것일지도 모르듯이 불빛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도시가 목이 잘린 채 누운 부처의 석상과 겹쳐져 갔다고 어쩌면 그것이 미래로 돌아가려는 자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됐을 때는, 눈앞으로 무너지거나 부식된 미래의 빌딩들이 나타났으며 한순간이지만 먼지와 바람이 갈라지고 있는 유적지를 걸어 볼 수 있었다고 찰칵찰칵 야경을 찍는 사람들이 카메라 플래시로 무량의 시간 속에서 현재 바깥의 무늬들을 모조리 학살하기 전까지. 천변을 낀 골목에서 중년의 남성이 비둘기의 목을 가위로 자르던 모습, 팁을 더 달라 소리 지르던 뚝뚝 기사의 모습, 총포상 앞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자의 얼굴 등등, 더 이상 처음 보는 사람들과 죽은 자들을, 처음 보는 도시와 죽은 도시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모를 동안 핵사토르는 그제야 여행 내내 그리고 이때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 왔던 모든 감상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의 국가, 외국이라는 픽션의 소유였음을 알아챘다며. 피자오믈렛의 인스턴트 토마토 향내가 기막힌 톰슨의 카페에서 세 사람은 핵사토르가 블랙베리 메시지를 확인하길 기다렸고, 마침내 핵사토르가 블랙베리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자피로가 물었다. 혹시 발 킬머야? 헥사토르가 대답했다. 아무도 죽일 필요 없어.
















작가소개 / 이상우

2015년 『프리즘』, 2017년 『warp』.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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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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