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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원만 빌려줘

  • 작성일 2018-10-01
  • 조회수 3,375

[단편소설]



이만 원만 빌려줘



안보윤




1


(김동주 차량 블랙박스 음성 기록)
아저씨. 여긴 우주정거장이에요.
그래.
난 우주에 처음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예요. 아저씬 뭐 할래요?
그냥. 아무거나.
아무거나 어떤 거요?
그냥. 토스터나 주전자. 그런 거.
안 돼요. 우주에는 꼭 필요한 것만 갖고 갈 수 있단 말예요.
그럼 전기밥솥.
좋아요.
(침묵)
아저씨.
왜.
아저씨. 말을 해야죠.
……맛있는 흑미밥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거 말고요.
보온 중입니다.
아저씨 그냥 사람 하면 안 돼요? 밥솥 말고.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데?
밥 먹었니.
밥 먹었니.
영어 학원 다녀왔니.
다녀왔니.
세수할 땐 귀 뒤도 닦아야지.
그런 거야?
그럼요. 치카치카 할 때 혓바닥 닦는 것처럼.
그래.
다시 해봐요. 숙제 다 했니.
다 했니.
친구랑 싸우진 않았고?
…….
아저씨 친구랑 싸웠어요?
……안 싸웠어.
근데 왜 그런 얼굴이에요?
내가 어떤 얼굴인데?
전기밥솥 같은 얼굴이요.


2


아주 어릴 때 깨달았어요. 내가 불행한 인간이란 사실을.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사자도 토끼도 꽁치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죠. 주머니에 무심코 밀어 넣은 껌 종이처럼 내 인생 곳곳에 불행이 쑤셔 박혀 있었어요. 돗자리 밑에 박힌 세모꼴 돌멩이. 딱 그래요. 아무리 예쁜 해변에 피크닉 바구니를 펼쳐 놓고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온몸의 감각이 돌멩이에만 집중되니까. 사실 불행이란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불행해지는 거거든요. 다만 귀찮죠. 아주 귀찮아요.
가정사가 복잡했다거나 부모에게 학대당했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8시 뉴스에나 나올 법한 일들. 보험금과 열등감과 섹스가 뒤엉킨 날것 그대로의 사건들. 그런 걸 가지고 한가롭게 불행하다고 말하진 않죠. 끔찍한 사건 자체니까. 적어도 난 그런 사건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성실하게 감정을 재단할 만큼의 여유가 내겐 있었거든요.


불행한 아이가 성장하는 방식은 간단해요. 계속, 줄곧 깨닫는 거죠. 나는 불행한 아이구나. 나는 불행한 청소년이구나. 불행한 어른이 되었고, 이제 불행하고 가난한 노인이 되어 가고 있구나. 불행을 애착인형처럼 끌어안고 다니는 삶을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하면 차라리 편안해져요. 무슨 재수 없는 일이 생기든 이럴 줄 알았어, 어쩔 수 없지 하고 담담해지거든요. 기대도 분노도 억울함도 만족감도 없는 삶. 불행은 삶에 무언가가 얹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에요. 소소하면서도 냉혹한 박탈이 시작점이죠.
아무튼 불행은 그런 식으로 내 몸에 스며들어 있어요. '그날'이 내게 특별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예요. 내가 강원도 펜션에서 양은대야에 불붙인 연탄과 번개탄을 포개 두고 침대 위에 눕기까지 촘촘히 박음질되어 있는 불행의 그림자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날 죽기를 원했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 불행히도, 죽지 못했어요. 그게 그날 있었던 일의 전부죠.


알 것 같다니 뭘요? 내 불행을요? 하, 그것 참, 시답잖은 소리네요.


사람들은 자신의 거짓말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리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에요. 내가 듣기엔 개소리거나 개수작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지금까지 매일 같은 소리를 들었어요. 부모, 선생, 정신과상담의, 생명의 전화에서조차 그러더군요. 나는 당신의 처지를 이해해요. 지금 어떤 심경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힘든 시절을 지나왔어요. 매일 수확 가능한 작은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전부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죽는 건 결코 답이 아닙니다.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히세요.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은 고난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입니다. 죽음이 아닌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한 걸음만 내딛어 보세요. 내가 도와줄게요.
웃기지 않아요? 불행이란 건 말이죠, 주머니에서 꺼내 놓는 순간 형편없이 초라해지는 거예요. 나를 칭칭 감고 있는 투명하고 질긴 막 같은 거라 누군가가 알아채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오직 나만이 내 불행을 감각할 수 있어요. 타인의 동의나 이해 따위가 필요한 영역이 아니라고요. 은밀하고 절대적인 내 세계의 문제니까 나만 아는 게 당연해요.


자기 불행을 누군가 이해해 주길 갈망하는 사람이 더 처절하게 불행해지는 이유가 그거예요. 불행을 전시할수록 인간은 고독해지죠. 타인의 불행을 제멋대로 구경하고 평가할 순 있겠지만 불행의 무게와 밀도를 온전히 감각할 수 있는 건 본인뿐이에요. 타인이라고 분리되어 있는 지점에서부터 그건 당연하잖아요? 나는 동병상련이니 소울메이트니 그딴 소리 안 믿어요. 만약 내게 손가락이 없고 당신에게 발가락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의 불편과 불행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과연 같은 처지라고 말해질 수 있나요? 피아니스트의 잃어버린 손가락과 마라톤 선수의 잃어버린 손가락이 같은 무게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지금 당신이 하려는 일은 무의미해요.
그 사람 이름이 김동주라고 했죠. 김동주 씨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음의 이유를 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어떤 일을 겪고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게 왜 중요하죠? 당신이 기사를 내든 책을 내든 아무도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텐데. 내 불행이 나만의 것인 것처럼 김동주 씨의 고통도 그 사람만이 알 거예요. 이해하는 척 공감하는 척 감성팔이 문장이나 늘어놓는 건 자기만족에 불과해요. 가장 촌스러운 방식의 자기만족이죠.


뭐, 됐어요. 경찰조사 내내 읊어댄 걸 새삼 숨길 이유도 없고. 불행이 개인의 영역이듯 타인이 어떤 일로 만족감을 얻든 절망을 얻든 내 알 바 아니죠. 사례요? 됐어요, 그딴 거. 이따 집에 갈 때 택시비나 줘요. 여기서 일산까지 이만 원쯤 드니까 그걸로 퉁치죠.


아무튼 불행해서였어요, 김동주 씨를 만난 건.


오픈 채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내가 골라 내민 제일 뾰족한 면만을 상대가 인식하죠. 명백히 목표가 같은 사람들만이 한 채팅방에 모여요. 나는 불행을 내밀었고 김동주 씨가 반대편 날을 잡았어요. 만남이 성사된 조건은 단순했어요. 김동주 씨도 나도 끝을 원했죠.
김동주 씨의 첫인상은, 음, 뭐랄까, 단정한 느낌. 모든 것이 정돈된 건조한 이미지였어요. 자살을 처음 시도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특유의 비장함이 사람을 서늘하고 단정하게 만들죠. 죽음이 얼마나 더럽고 조잡하고 육체적인지 모르니까 쓸데없이 속옷도 갈아입고 면도도 하고 공장 다림질 자국도 안 빠진 새 옷을 입고 오는 거예요. 속옷을 갈아입는 것보다 관장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인데 말이죠.


사실 난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함께 죽자고 말해 오는 사람을 적어도 세 번, 네 번 정도 만났어요. 아무 곳에서나 만난 사람과 이런저런 얘길 하다 죽어버리자고 의기투합한 적도 몇 차례 있었고요. 그런데 실제로 죽어버린 사람은 김동주 씨가 유일하네요.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거의 다 가짜였거든요. 가짜들은 지독히 들뜨고 흥분한 상태로 약속 장소에 나와요. 당연하다는 듯이 술을 권하고 가볍게 약을 권하고 구질구질하게 섹스를 요구하죠. 마지막 소원이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데, 어차피 죽어 없어질 몸뚱이 어쩌고 하기 시작하면 말짱 꽝이에요. 그런 인간들은 대부분 싸구려 모텔에 들어가서 배가 고프네 술이 고프네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파 누워야겠네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죠. 그런 인간들 때문에 더 불행해지거나 절망적이 되진 않았어요. 한심하고 귀찮았달까.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적도 몇 번 있지만, 말했잖아요, 불행을 인정하면 담담해진다고.


김동주 씨는 그들과 달랐어요. 현실과 연결된 수많은 실이 있다면 김동주 씨는 그걸 차근차근 모조리 잘라내며 걸어온 사람 같았죠. 실밥 뭉치처럼 적당히 무겁고 언제 흩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무감했어요. 보자마자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진짜구나. 이번에는 진짜, 끝을 낼 수 있겠구나.
욕심이 생겼어요. 진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좀 사치스러워도 되지 않나 싶고. 사치스럽지 않더라도 남들 보기 그럴듯하게, 적어도 지질이 궁상으로 죽고 싶진 않았어요. 강원도로 가자고 했더니 그 사람, 왜냐고 묻지도 않던데요. 그래서 나 혼자 떠들어댔어요. 나는 이번에 기필코 죽어야겠다고. 그런데 전철역 앞 대실 삼만 오천 원짜리 싸구려 모텔 방에서 죽긴 싫다고요. 강원도로 가서 적어도 십오 평 이상의, 벽지와 침대보가 새하얀 객실을 잡고 싶다고. 두껍게 썬 도미회와 소주를 먹겠다고. 죽기 직전엔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도 한 것 같아요. 한 통을 혼자, 전부 다 먹겠다고요.


김동주 씨는 내가 얘기하는 걸 듣고만 있었어요. 내가 이전 사람들을 평가했던 것처럼 그 사람 역시 나를 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불행하고 말 많은 여자 정도면 정확했을까요. 버스터미널로 가요. 속초행 고속버스를 타요. 제 말에 그 사람, 자기에게 차가 있다고 말했어요. 낡고 작은 차인데 기름이 없다고. 김동주 씨 되게 미안한 표정으로 그러더군요.
― 이만 원이 전붑니다.
― 이만 원이요?
― 네. 이만 원. 그게 제 전 재산입니다.
― 이만 원이 전 재산이라 죽으려는 건가요?
― 아뇨. 이만 원이 생겨서 드디어 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내가 내겠다고 했죠. 기름 값도 톨게이트비도 숙박비도 밥값도 전부 내가 내겠다고. 그 사람, 또 미안해하면서 말하더군요.
― 그럼 저기, 마지막 식사는 만두전골로 안 되겠습니까.
― 만두전골이요?
― 오래 끓여서 만두피가 바닥에 눌어붙은, 타기 직전의 뜨거운 만두전골이 먹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재미없는 소리도 했네요. 최후의 만찬으로 졸아붙은 만두전골이 먹고 싶다고. 결국 먹지는 못했지만요.


3


누구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으신 겁니까.
미성년자 유괴범 김동주? 자살자 김동주? 어느 쪽이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도 아직 모르겠으니까요. 제 친구 김동주와 유괴범 김동주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느 쪽이 진짜 김동주인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친구 김동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솔직히 제가 아는 건 그쪽밖에 없으니까요. 동주와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했지만 같은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휴일도 함께 보냈으니 거의 평생을 함께했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적어도 동주의 인생에서 보자면 평생이죠.
동주는 둔하고 예민한 성격이었습니다. 설명이 모순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동주는 세상사에 둔하고 요령 없고 고지식한 성격이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유순했고요. 그런데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몹시 예민하고 과격하게 변모했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성격이 바뀌었달까요. 사회적 입지나 이해득실 같은 건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무모하고 비논리적이었죠. 제가 짐작할 수 있는 유괴범 김동주는 그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뭔가 동주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한계점까지 몰고 갔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한 편의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습니다. 같이 근무를 설 때도 있었고 주간 야간을 번갈아 할 때도 있었어요. 편의점주는 게으르고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발주업무를 떠넘기거나 자기가 잘못 주문 넣은 걸 우리에게 덤터기 씌워도 동주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최저시급을 맞춰 준 적도 없고 툭하면 술을 마시고 들어와 우리가 연장근무를 해야 했어요. 폐기를 앞둔 도시락과 삼각김밥 같은 게 식대 대신이었는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비싼 걸 먹을까 봐 마누라를 시켜 진열대를 싹 걷어가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일투성이였습니다. 저는 그곳이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언젠가 점주가 만취해 들어와 컵라면을 끓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고꾸라졌을 땐 쌤통이다 싶었어요. 코뼈든 팔꿈치 뼈든 어디 한 군데 부러졌다면 차라리 측은하기라도 했을 겁니다. 바닥에 엎어져서도 돼지처럼 꽥꽥대는 점주를, 동주가 부축해 창고 겸 탈의실로 데려갔어요. 동주는 그랬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면박을 주면 주는 대로 일을 계속했죠. 만만해 보였는지 점주는 유난히 동주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하루는 점주가 술에 잔뜩 취해서, 같이 야간조를 하고 있던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너희는 평생 그 꼬라지로 살 거다.
제가 조끼를 벗어던졌습니다. 마음 같아선 점주 얼굴에 금고를 내던지고 싶었는데 그럴 용기까진 없었어요. 우리는 가난했고 예정되어 있는 지출만으로도 허리가 휘었습니다. 그래도 더 참을 수는 없더군요. 창고에서 짐을 싸면서 동주는 평소처럼 덤덤히 있겠거니 생각하니 속이 터졌습니다. 그래, 너는 여기서 평생 그러고 살아라. 점주한테 할 수 없다면 동주에게라도 퍼부어 주자고 작정하고 저는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점내가 아수라장인 겁니다. 진열대 물건들이 전부 쏟아져 있었어요. 즉석식품 코너에 선 동주가 말끔하고 차분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햇반이며 카레, 스튜 따위를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습니다. 물건이 터질 만큼의 강도는 아니었지만 모서리가 다 찌그러져 상품성은 사라져 있었죠. 동주가 점주에게 묻더군요.
― 이런 것도.
점주가 멍하니 동주를 바라보았습니다.
― 버러지가 이런 것도, 할 줄 압니까.


일구가 돌아온 건 그즈음의 일이었습니다.
정일구라고 중학교 때 늘 붙어 다니던 공동의 친구였어요.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고 같은 입시제도 하에 굴려졌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친해져야 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다만 일구에겐 시원치 못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일구는 어머니라 부르던 사람과 둘이 살고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그분이 췌장암 3기 진단을 받았거든요. 대단치 않은 일상이었던 만큼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당시 엇비슷한 가정환경에 미성년자였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두 차례 감행한 수술은 빚만 남긴 채 실패했고, 극도로 쇠약해진 그분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세보증금을 일찌감치 뽑아 쓴 터라 일구는 잠잘 곳조차 없었습니다. 처음엔 저희 집과 동주네 집에 번갈아 신세를 지더니 몇 달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숙식을 제공하는 지방 육가공 공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간 수술과 항암치료로 진 빚은 물론이고 호스피스 병동 자체가 돈 덩어리였으니까요.


우리, 그러니까 동주와 저는 비교적 무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일구를 보면서 다행이라고 안도한 때도 있었어요. 부유하진 않지만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건강했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대학 등록금을 보태줄 만큼의 여력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일구가 왜 저런 일을 떠맡아야 하나 불만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분, 일구 친어머니가 아니었거든요. 일구에겐 친부모가 따로 있어 그분과는 호적상 어떤 연관도, 공적인 어떤 책임도 없었습니다.
일구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 물을 때마다 각기 다른 설명을 했습니다. 어느 때는 일찍이 섬에서 상경한 자신을 돌봐주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어머니가 된 거라고 했다가, 어느 때는 어머니의 이복자매라고 했다가, 어느 때는 부모에게 학대받는 자신을 데려다 임시보호 해준 은인이라고 말했어요. 어느 쪽도 진실 같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일구는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붙여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일구에게 그분은 어머니이자 이모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던 셈입니다. 일구는 오로지 인간적인 이유로만 그분에게 얽매어 있었는데,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죠. 온정주의에 사로잡혀 인간답게 사는 삶을 포기하다니.


일구의 일로 동주와 크게 싸운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죽게끔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호스피스 병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구는 신약이 나오거나 조금이라도 효과적인 치료법이 나왔다 하면 득달같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즈음 그분은 비쩍 마른 나무토막에 가까웠어요. 벼락을 맞아 쪼개지고 불탄 나무도 그처럼 비루하진 않을 겁니다. 새까맣게 말라죽은 몸에 수액을 꽂은 손등이나 발등만 비정상적으로 퉁퉁 불어 있었죠. 아이러니하게도 일구는 그분과 똑같은 몰골이었습니다. 일구는 매일같이 빚을 지고 돈을 벌어 빚을 갚고 또 새로운 빚을 지고 그걸 갚기 위해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습니다. 그분을 좀먹는 게 암세포였다면, 일구를 좀먹는 건 그분이었어요.
― 왜 죽질 않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분명히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악의는 없었습니다만 솔직히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만 죽어줬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으니까요. 암의 전이속도가 급격히 빠르다고, 순식간에 말기가 되었다고 말했으면서 그분은 사 년이 넘도록 죽지 않았습니다. 동주와 제가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고 동반입대를 했다 제대해 복학하는 동안 일구는 지방의 육가공 공장에서 매일같이 닭 내장을 뽑고 뼈를 바르고 더께처럼 쌓여 가는 빚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억울했어요. 일구가 미치게 불쌍했습니다.
― 이제 좀 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 뭐?
― 일구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제 말에 동주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 일구는, 가장 사람답게 사는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고 있어.
― 넌 일구 친구라는 놈이 그런 소릴 하냐. 인정이 전부가 아냐, 현실을 봐야지. 지금 일구는 중졸에 떠안은 빚만 수천만 원에 변변한 기술도 없어. 늙어 죽을 때까지 닭 내장이나 뽑으며 살라는 거야? 그분이 진짜 일구를 위한다면 그만 가주셔야지. 산 사람은 살게 해줘야지.
와르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습니다. 동주가, 언젠가 편의점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 책상 위의 책과 시디들을 바닥으로 내던지고 있었습니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책장, 옷장까지 전부 쏟아버린 다음에야 동주는 제게 말했습니다.
― 일구가 지금껏 필사적으로 지켜 온 삶을 네가 뭐라고 부정해? 타인의 삶이란 건, 우리가 그렇게 아무 말이나 막, 함부로 해도 되는 그런 게 아니야. 일구가 선택한 삶은 그런 게 아니야.


동주와 싸운 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분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느라 일구는 한 달에 한 번 겨우 서울로 올라왔는데, 마침 일구가 올라온 날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염치는 있군, 그런 몹쓸 생각을 하며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오래 병원에 있었는지 의사와 간호사들이 조문객으로 내려올 정도였습니다. 그 모든 상황이 제겐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상주로 선 일구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병이 발발한 순간부터 늘 그 순간을 각오하며 살아온 셈이니까요. 오히려 동주가 상주처럼 보였습니다. 동주는 오래, 아주 오래 울었습니다.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끊임없이 향을 살피고 일구를 끌어안아 토닥이면서, 일구 대신이라는 듯 내내 울었습니다. 납골이 끝난 뒤 일구는 공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사망보험금으로 빚은 어찌어찌 처리했습니다만 돈 한 푼 없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였으니 일구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겁니다. 일구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고, 반년 만에 자살했습니다.


4


(김동주 차량 블랙박스 음성 기록)
엄마가 올까요?
오겠지.
우리 엄마 되게 바쁜데.
이럴 때 바쁜 엄마는 없어.
이럴 때가 어떤 때인데요?
아이가 무서워할 때.
나 별로 안 무서운데.
여긴 우주정거장이잖아. 깜깜한 우주에 혼자 있으면, 외롭고 무서운 거야.
나 혼자 아닌데. 전기밥솥이랑 같이 있는데.
고장 났어.
아. 그럼 외롭겠다.
(침묵)
아저씨.
……보온이 취소되었습니다.
아저씨 고장 났다면서요.
그러니까 취소.
우리 엄마한테 돈 많이 달라고 했어요?
응.
얼마요?
이만 원.
그건 조금이잖아요.
많아. 한 끼를 먹기에 충분히 많아.
한 끼만 먹어요? 왜요? 내일이랑 모레도 밥 먹어야 되잖아요.
한 끼면 돼.
왜요?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많으면 살고 싶어지니까.
아저씨 죽어요?
……이만 원으로 뜨거운 만두전골을 먹을 거야. 그거면 됐어.


잠깐만요, 붕대를 좀 갈아야 해서요. 그날 손가락에 화상을 좀 입었는데 물에 닿거나 옷에 쓸리거나 해서 좀처럼 낫지를 않네요. 뭐, 그렇죠. 누구는 죽었는데 그깟 화상이 대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길어 봤자 오 센티미터쯤 될까요. 불붙은 연탄에 슬쩍 스친 거라 2도 화상에 그쳤죠.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에요, 계속 물집이 잡히고 표피가 벗겨지고 살갗이 찢어져요. 진물이 나고 때로 피도 흐르고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되는 한,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그 사람, 정말로 죽었군요. 경찰서에서 참고인 진술할 때도 뉴스에 나올 때도 별로 실감이 안 났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뉴스에 나오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달까. 소파에 누워 남의 세계를 마냥 구경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죽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을 만난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예요. 궁금했어요. 남들은 어떤 불행을 움켜쥐고 사는지. 멀찌감치 서서 구경이나 해볼 작정이었죠. 그러다 보면 있거든요. 진짜 불행에 잠식된 사람이. 섹스하고 싶어서 불행을 연기하는 사람 말고 정말이지 불행 그 자체인 사람이 말예요.


소독약 냄새가 지독한 남자를 만난 일이 있어요. K. K라고 해볼까요. 어차피 이름 같은 건 듣지도 못했고, 들어 봤자 기억도 못 하니까요. 처음엔 K가 의사나 장의사인 줄 알았어요. 뭐 비슷하잖아요, 죽어가는 사람 만지는 일이나 죽은 사람 만지는 일이나.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까 아무것도, 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람. 오전 일곱 시부터 공장에 나가 하루 열여덟 시간을 일하고 나면 온몸이 젤리처럼 변한다더군요. 말랑말랑하고 사랑스러운 젤리 말고 오래되어 꾸덕꾸덕하고 끄트머리가 잿빛으로 부스러지는 그런 젤리요.
젤리라니. 나는 그 반대라고 말했어요. 기껏 취직한 직장에 사흘도 출근할 수 없을 때, 깊은 우물 속에 누가 머리부터 처넣는 것처럼 무한한 압박에 시달릴 때, 자욱하게 차오른 어떤 감정 때문에 온몸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 나도 거대한 젤리가 되어버린다고요. 눈곱을 떼려고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아예 눈뜨는 걸 포기하는 그런 거대하고 쓸모없는 젤리. 어느 곳에 몸을 걸치든 줄줄 흘러내려 기어코는 바닥에 고여 있는 질척거리는 존재요.
― 섞였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말했어요. 섹스를 원한다면 이쯤에서 고백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했죠. K는 아니었어요.
― 섞인다면 그쪽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요.
그가 말했죠.


다른 사람.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라던가요.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했을 때 유일하게 자길 지지해 준 친구라고 했어요. 방학 때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자기가 사는 곳에 와 일을 도와줬대요. 고등학생 때는 양식장에서 고기를 훔쳐다 실내낚시터에 파는 일을 했고, 성인이 된 다음에는 위험물 취급하는 창고나 냉동고 같은 데서 함께 일했다고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둘이서 뭐든 했다고 자랑처럼 떠들어댔죠.
― 많을수록 좋잖아요, 돈은.
K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딱히 공감하지 못했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의지가 살아 있는 삶이라니, 그건 참 건강하죠. 내게 돈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어요. 돈을 손에 쥐고 그걸로 뭘 할까 고민하는 일도, 돈을 쓰기 위해 외출하는 일도 내겐 버거운 날이 많았으니까. 가까스로 상태가 좋아졌을 때 하는 일이라곤 나를 낭비하기 위해 길거리를 떠도는 게 전부였어요. 타인의 불행을 훔쳐보거나 내가 저절로 죽게 되기를 기다리거나. 나를 이 세상에서 소거하는 일에서조차 나는 무기력했어요.
― 내가 돈을 줄까요. 나는 돈이 많아요.
내가 물으니까 K가 웃더군요.
― 그 친구는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무례하게 돈 봉투를 내미는 일 같은 건 안 했다고, K의 삶에 참견하는 말 한마디 보탠 적이 없다고 했어요. 대신 불쑥불쑥 공장 숙소로 오리털이불이나 빨래건조대, 전기밥솥 같은 게 배달됐대요. 24개들이 두유 한 박스나 홈쇼핑에서 파는 모짜렐라핫도그 패키지가 배송된 일도 있다나요. 그런 친구가 자기에게는 있다고, K는 몇 번이나 말했어요.
― 좋은 친구네요.
― 좋은 친구죠. 그래서 난 그 친구가 늘 두려웠어요.
― 왜요? 뭐가 두려워요?
― 나도 좋은 사람으로 있어야만 하니까요. 나도 그 친구처럼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그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충동적인 인간인지, 적어도 그 친구한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 인간은 누구나 다 나약해요.
―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다 비겁한 건 아니에요.
K가 옆에 놓인 냅킨을 끌어다 잘게 찢기 시작했어요.
― 나는 사실, 도망치고 싶었어요. 책임이고 도리고 다 내던지고 멀리 도망가 혼자 살고 싶었어요. 발골 작업을 하다가 뼛조각이 얼굴에 튀거나 온몸을 내내 소독해도 닭 비린내가 빠지지 않을 때면 이게 사는 건가, 나는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혼란스러웠어요.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원했던 게 아니에요. 그 친구처럼 악독한 점주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외국어 학원을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해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는 사람에게 쏟아 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예정된 죽음을 다만 유예하는 데 그칠 뿐인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나를 위해서 살 수 있다면.
― 삶에 대한 욕구는 비겁하지 않아요. 그게 없는 삶이 오히려 더 부끄럽고 불행하죠.
― 과연 그럴까요. 내가 나로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주길 바라는 삶이 어떻게 비겁하지 않죠. 그건 비열하고 파렴치해요.
테이블 위가 찢어진 냅킨과 분진으로 엉망이 되자 K는 그걸 한 손바닥에 쓸어 담았어요. 그러고는 웃더군요.
― 그러니까 섞인다면 친구 쪽이 좋아요. 그 친구랑 섞인다면 나는, 적어도 내가 쓰레기라고 자조하며 살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친구가 나를 믿어 주는 반의 반 만큼이라도 내가 나를 믿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K는 살아 있을까요. 적어도 나와 만난 날은 살아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날 우리는 죽기 위해 만난 게 아니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나는 이후에 K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삶도 있더군요. 타인의 신뢰가 족쇄가 되는 삶, 그럼에도 그 족쇄가 풀릴까 봐 스스로 또 다른 족쇄를 만들어 자신을 구속하는 애처로운 삶이. 불행이 이처럼 다채로워요. 능수능란하게 얼굴을 바꾸고 거침없이 우리 삶을 파고들죠.


김동주 씨 얘기를 해야겠죠. 그래요. K와 어쩐지 닮아 있던 김동주 씨를 만난 얘기를. 경찰조사를 받을 때 제 입장은 미묘했어요. 처음에 경찰은 저를 공범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거든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김동주 씨가 어린아이를 유괴해 부모에게 돈을 요구한 뒤 도주 중이었다는 사실을. 아이를 유괴한 차에 그대로 저를 태웠다던가요. 그렇게 낡고 작은 차로 말이죠.
경찰이 물었어요. 김동주 씨를 만났을 때 이상하거나 수상한 점이 없었냐고요. 없을 리가 있겠어요? 같이 죽으려고 만난 사람이 이상하지 않으면 그게 더 무섭죠.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무사히 부모 품으로 돌아갔다고 했어요. 다행히도. 적어도 그들은 가공된 불행에서 도망칠 수 있었어요. 경찰이 말하더군요. 그건 몹시, 아주 몹시 수상한 일이라면서요.
― 왜 아이를 유괴해서, 기껏 유괴까지 해서는 그대로 돌려보냈는지, 왜 아무것도 하질 않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이겁니다.
그럼 아이를 유괴해 아무것이라도 하는 게 덜 수상하고 당연한 일인 걸까요. 아무튼 경찰이 묻더군요. 제법 분개한 어조였어요.
― 그놈이 요구한 돈이 얼마인 줄 압니까?
― 얼만데요? 엄청나게 많은 돈인가요?
― 아뇨, 아주 형편없이 싼 금액이에요. 이만 원, 고작 이만 원 때문에 아이를 유괴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였구나. 나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김동주 씨가 내게 이만 원밖에 없다고 했구나. 적어도 내게 있어 그는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강원도로 가는 동안 김동주 씨는 말이 없었어요. 날이 저물어 고속도로는 벌써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었고, 중간에 휴게소가 나왔지만 우리는 차를 세우지 않았어요. 저녁도 먹지 않은 채 계속 도로 위를 달렸죠. 내비게이션으로 펜션 주소 하나를 찍은 뒤론 어딘가 망연해졌어요. 김동주 씨는 지쳐 보였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죠. 나는 다시금 젤리가 되어 가고 있었어요. 김동주 씨를 만나러 시내로 나간 것을 끝으로 나는 불행에 잠식당해 내 몸의 통제력을 잃은 참이었어요.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도 없는데 괴상한 하이 톤의 목소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김동주 씨를 물었죠. 그건 공격에 가까운 질문들이었어요.
― 왜 죽고 싶어요?
내가 물었어요.
― 당신은요?
김동주 씨가 되물었죠.
―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서요.
― 나도 그렇습니다.
― 나는 불행하고 쓸모없는 젤리 인간에 불과해요. 당신도 그런가요? 당신의 지난 삶도 구차하고 쓸모없어요?
― 나는.
김동주 씨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어요. 교통표지판에 쓰인 속도를 준수하고 있는데도 낡고 작은 차는 심하게 덜컹거렸죠. 도로 위로 얼룩 같은 게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길 반복했어요. 늙은 고라니거나 빛의 그림자거나 했을 거예요. 가로등을 서른 개쯤 지났으려나. 김동주 씨가 불쑥 그러더군요.
― 나는 내 지난 삶이 부끄러워서 죽습니다.


답이 되었나요?
이후는 당신이 뉴스에서 본 것과 동일해요. 우리는 늦은 밤 펜션에 도착했고, 너무 늦은 밤이기 때문에 겨우겨우 체크인을 끝냈어요. 주변에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는데 펜션 뒤쪽에 야외바비큐용 물품들이 쌓여 있었죠. 우리는 거기서 번개탄과 숯, 연탄을 훔쳤어요. 개밥이 담겨 있던 넓적한 양은대야도 훔쳤죠. 수면유도제는 내가, 라이터는 김동주 씨가 갖고 있었어요. 연탄에 불을 붙이고 나란히 누운 데까지는 예정대로였어요. 가물가물 잠이 들려는 찰나에 김동주 씨가 벌떡 일어나더군요. 젤리가 된 몸에 수면제까지 쏟아 부었으니 나는 그를 말릴 힘이 없었어요. 김동주 씨는 연기로 자욱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어요.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연탄이 더 활활 타올랐죠. 팔을 허우적대다 연탄에 손가락을 덴 건 그때였어요. 비명을 질렀을까요. 비명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기괴한 소리 정도는 냈을 거예요. 그러니 김동주 씨가 나를 돌아봤겠죠.
김동주 씨는 내게 뭐라고 말했어요. 아주 진지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죠. 나는 다만 그의 움직이는 입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이미 젤리가 된 내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거든요. 연탄 아래 깔았던 번개탄에 그제서 불이 붙었는지 폭죽처럼 연기가 쏟아져 나왔어요. 김동주 씨는 양은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뜨거웠을 텐데 그런 기색조차 없었죠. 위로 솟구치는 연기 때문에 김동주 씨의 머리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그가 그냥 떠났다고 생각했어요. 다음날 일찍 펜션 주인이 나를 깨우더군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면 위험하다고요. 몇 시간 지난 뒤엔 경찰이 찾아왔죠. 펜션에서 3km 떨어진 도로 귀퉁이에서 김동주 씨가 발견되었다면서요. 낡고 작은 차, 양은대야 속 연탄, 자살 사건과 유괴 사건. 그런 말들이 내 주위를 맴도는 동안 내가 궁금해 했던 건 한 가지뿐이었어요.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결국 만두전골은 먹지 못했네요. 오래 끓여서 만두피가 바닥에 눌어붙은, 타기 직전의 뜨거운 만두전골을, 김동주 씨는 끝내 먹지 못했어요.


6


죽을 것 같다, 고 일구는 말했습니다. 저는 그게 일종의 말버릇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있잖습니까,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깜짝 놀라 죽을 뻔했다, 그런 식의 말버릇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일구의 반응을 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빚과 병간호로 고된 삶을 살았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군대에 갔으니, 그 삶이 죽을 것같이 힘든 게 당연하잖습니까. 그래그래, 나도 죽을 것 같다, 임마. 그렇게 말하면 일구는 큰 소리로 웃곤 했습니다. 죽을 것같이 힘들다가, 내가 벌써 죽어버린 건 아닌가 의심되다가, 사실은 내가 죽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 제대할 때가 된 거라고. 꼴에 유경험자라고 저는 잔뜩 잘난 척을 하며 그렇게 녀석을 위로했습니다.


일구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동주와 제가 상주이자 친구이자 조문객이었어요. 군에서는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그에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일구는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하지 않은 채 산속에서 자살했습니다. 입대 초기부터 관심병사로 분류되어 있던 탓에 그의 상담 기록에는 입대 전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개인의 문제, 라고 군은 못을 박았습니다.
동주는 장례식 내내 얼이 빠져 있었어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밥도 먹고 움직이기도 하는데 영혼이나 마음 같은 걸 누가 한 손으로 쑥 잡아 뽑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푸석푸석한 가죽 주머니 같은 게 동주 대신 벽에 기대져 있는 느낌이었어요. 동주는 좁은 빈소에서 일구의 영정 사진만 주구장창 바라봤습니다.
일구의 죽음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저는 솔직히 동주가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동주는 일구에게 정성을 다했으니까요. 죽을 것 같다는 일구의 말을 저처럼 웃어넘기지 않고, 일구의 삶을 마음대로 평가하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할 수 있는 한 그를 지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걸 누가 뭐래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동주는 가까스로 취업한 회사가 도산하면서 얼토당토않은 빚을 지고 있었어요. 사원들이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연명해 온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면서 전 사원이 빚쟁이가 됐죠. 동주는 신입사원이라 큰 빚을 지진 않았습니다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타격이었습니다. 일용직 일을 해 빚을 갚는 와중에도 동주는 핸드크림과 크레인기사 자격증 문제집을 사서 군에 있는 일구에게 보냈습니다.


일구를 화장한 뒤에는 납골당에 맡길 돈이 없어 적당히 숲 속에 파묻었습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요. 동주는 산책로에서 뚝 떨어진 수풀 속에 일구를 묻고, 산책로로 도로 물러나온 뒤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불쑥 그러더군요. 일구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자기라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데 말을 꺼내는 뉘앙스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죠. 일구가 무슨 얘기를 하더냐고.
― 네가 옳았어.
동주가 말했습니다.
― 뭐가?
― 일구가 그러더라. 이전에는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는데, 그런 기색조차 내비친 적 없었는데, 하필 그날 그러더라. 어머니가 죽기를 매일매일 기도한 날이 있었다고.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책상 위 물건들을 모조리 내던지던 동주가 떠올랐으니까요. 그날 이후 우리는 일구의 어머니 얘기를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 어머니 병실에 가면 장조림 냄새가 그렇게 나더래. 침대 간이커튼을 걷으면 간장에 조린 것처럼 새카맣게 변한 어머니가 누린내를 풍기며 누워 있더라고.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말도 마음대로 못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 말이 나오더란다. 이제 가세요. 이제 그만 가세요, 어머니.
― …….
― 병실에 앉아 있자면 그 말밖에 나오질 않더라는 거야. 어머니 귀에 상냥하게 입을 붙이고 어머니 제가 너무 힘들어요, 어머니보다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제발 죽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애원하는 자기가 있더라고. 그토록 친근한 저주가 어디 있겠냐고 묻더라. 처음엔 분명 애정이었는데, 어머니를 끝까지 모실 자신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됐다고. 내가 너무 괴물 같아. 일구는 그렇게 말했어. 괴물 같아. 내가 너무 끔찍해.
동주가 주먹으로 바닥을 툭툭 내질렀습니다. 자갈과 시멘트를 섞어 대충 깔아 놓은 산책로 때문에 손가락 마디가 금세 상처투성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동주가 다시 물었습니다.
― 괜찮다고 했어. 사람은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고, 너무 지치고 힘들면 자기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쏟아낼 때가 있다고. 어머니는 다 이해하실 테니 잊어버리고 힘내라고 말했다. 힘내, 일구야. 난 너를 믿어. 네가 얼마나 성실하고 좋은 놈인지 내가 다 알아.
동주가 바닥을 점점 더 세게 내리치는데도 저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넌 좋은 놈이야, 동주가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손마디는 이미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어요.
― 일구가 웃더라. 숨도 쉬지 않고 웃더라. 한참을 웃더니 그러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죽고 싶어져. 농담인 줄 알았어. 왜냐면, 그 말을 하자마자 그랬거든. 동주야, 나 이만 원만 빌려주라.
― 이만 원?
― 응. 이만 원만 빌려달라고. 저녁으로 뜨거운 만두전골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오래 끓여서 만두피가 바닥에 눌어붙은, 타기 직전의 뜨거운 만두전골을 먹고 복귀하고 싶다고. 이만 원을 줬더니 고맙다고도 했어. 부대 앞까지 같이 가자니까 그건 싫다고 했지. 그게 끝이었다. 일구는 만두전골을 먹지도 않았고, 복귀하지도 않았어. 그 자식이 한 말 중에 진심은, 죽고 싶다는 말뿐이었던 거야.


동주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대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저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 겁니다. 동주가 산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엉망이 된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요. 제가 무슨 말을 했어야, 어떻게 했어야 동주가 유괴범이 되고 자살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동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저는 왜 여기 혼자 남겨져서 이토록 많은 죽음을 견뎌내야만 하는 건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7


(김동주 차량 블랙박스 음성 기록)
저기 있어요. 우리 엄마예요.
…….
우주정거장에서 엄마를 발견하다니 굉장해요.
꼬마야.
우주비행사.
그래. 우주비행사야.
왜요, 전기밥솥 아저씨.
미안하다.
(침묵)
……우리 아이가 아아, 정말…… 여기요, 여기 있습니다, 더 더 드릴게요, 우리 아이가 무사하니 얼마라도 더…… 제가 금액을 잘못 듣고, 잘못 들은 게 분명해서 우선 이만큼을…….
이만 원…… 이만 원만, 빌려주십시오.
아아…… 살아 있어, 우리 아이가 살아……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 합니다.
아저씨 또 고장 났다. 엄마? 엄마도 고장 났어요?
미안합니다.
(침묵)
(침묵)
(침묵) ■

















작가소개 / 안보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 7의 고백』, 중편소설 『알마의 숲』,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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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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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하얀머리

    일찌기 부모님을 여의고 두 동생을 홀로 건사하다사고로 동생들마저 보내고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려결국 가족 곁으로 가버렸다던 어느 젊은이의 유서가 떠오르는군요

    • 2024-05-09 03:09:17
    하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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