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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의 영역

  • 작성일 2019-09-02
  • 조회수 1,986

[단편소설]



순정의 영역



함정임




삼계탕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해주 출신이라고 그는 말했다. 만난 지 13개월 뒤에 그는 조부모와 부모의 존함을 그녀에게 알렸다. 조부 박현복, 조모 오순정. 부... 모... 그날 둘은 혼인 신고 차 구청에 갔다. 그의 제안이었다. 결혼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의 제안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동료이자 부부였던 그의 부모가 미국 유학 중에 안데스 산중으로 지질 탐사 갔다가 타고 있던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두 살 때 고아가 되었고, 조부모를 부모처럼 여기고 자랐다. 4·19 기념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조부모 집이 있었다. 그는 그 집에서 스물다섯 살까지, 23년간 살았다. 프랑스 유학 7년, 이후 귀국해서 분당과 여기저기에서 살았던 8년 동안, 그는 1년에 서너 번 조부모 집에 갔다. 귀국 직후 서울과 수도권의 여러 대학으로 강사 생활을 전전하면서, 거기에 이혼 과정이 겹치면서 발길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다. '특별한 일 없으면 오지 말라'는 조부모의 뜻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란, 외국으로 장기간 떠나거나 함께 살 사람을 데려오는 경우를 의미했다. 오순정 할머니는 육이오 전쟁 통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박현복 할아버지는 조부모와 부모가 고향집에 남아, 영영 생이별 상태로 살았다. 그들은 가슴 속이 폐광처럼 새카맣게 뚫린 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믿음을 속절없이 품고 살아온 노인들이었다. 노인들 손에서 자란 그는 노인의 감각에 익숙했다. 반길 때는 격하게 뜨거우면서도 몇 달이고 길어지는 무소식에 안부를 재촉하지 않는 담담함은 실향한 황해도 사람의 정서였다. 그가 파란 철 대문 옆에 부착된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뜰 오른편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감나무는 지붕 위까지 무성하게 뻗어 있었고, 손바닥만 한 잎사귀들이 그늘을 드리워 성하의 땡볕을 가려 주고 있었다. 감나무 옆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었다. 아래층에는 2가구가 세를 살고 있었고, 위층에는 그의 조부모가 살았다. 그녀는 감나무는 물론 그 옆 계단까지 분당의 옛집과 너무 흡사해 잠시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착색판화처럼 과거 한 시기, 사적인 장면이 예상하지 않은 장소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분당의 옛집은 남편 없는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녀의 엄마가 처음 마련한 집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봄부터 졸업하던 겨울까지 6년간 그 집에 살았다. 그 집도 처음엔 단층집이었는데, 집에 관한 한 빛과 바람이 잘 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엄마의 지론에 따라 거실과 창을 넓게 설계해 2층을 올렸고, 아래층은 세를 주었다. 계단의 위치와 높이도 두 집이 판박이처럼 같았다. 그가 계단을 밟고 올라갔고, 그녀도 뒤따랐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동안 그녀는 분당 옛집의 계단을 밟는 기분이었다. 고속도로 변의 주택가였던 마을도 그녀의 옛집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지 오래였다. 계단 끝에 이르러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 보였으나,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 숨을 고르며 주위를 일별했다. 오래된 골목 네거리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신주와 줄 지어 선 은행나무와 가로등. 골목을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의 긴 담이 이어져 있었다. 나중에 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조부모의 집은 처음 이사 왔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크기와 구조로 담을 맞대어 골목을 이루던 이웃집들은 재개발 업자들에 의해 신속하게 다세대 주택으로 탈바꿈했다. 그의 조부모 집만이 40년 세월을 짊어진 채 고립된 성채처럼 변화와 맞서고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열기 전에 속으로 셋을 세고는, 할머니할아버지 저, 왔어요! 하고 외쳤다. 마침 현관 옆 괘종시계에서 정오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삼계탕을 끓이고 있다가, 할아버지는 건넌방 책상에서 문중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할머니는 젖은 두 손을 닦을 새도 없이 그를 얼싸안았다. 어서, 어서 오라, 내 새끼, 내 보물단지! 할머니의 목소리와 제스처가 유별나게 커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에 이북 억양이 뼈처럼 박혀 있었다. 그가 할머니 품에서 빠져나오며 그녀를 슬그머니 앞으로 밀어 세우자, 할머니는 그녀의 얼굴을 투박한 두 손으로 덥석 감싸 쥐며 쪽, 소리가 나도록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당한 입맞춤에 당황했고, 표정을 감추려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아주 오랜만에 구경하는 거침없는 환대라는 듯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닭살은 푹 익어 부드러웠고, 국물은 진했다. 숟가락을 들면서 할아버지는 새 식구를 맞이할 때면 할머니가 삼계탕을 끓인다고 말했다. 넷은 빙 둘러 앉아서 뜨거운 삼계탕을 먹었다. 아들네는 창졸지간에 잃었지만, 두 딸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들딸 셋씩 낳고 잘살고 있었다. 큰딸네는 미국에서, 작은딸네는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직장의 해외 파견으로 나갔다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예 눌러 앉았다. 할머니는 미국고모가 어쩌고, 미국사촌이 저쩌고, 뉴질랜드 고모집이 어쩌고저쩌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쉴 새 없이 그녀에게 들려주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제지하려다가 허허, 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반은 알아들었고, 반은 흘려보냈다. 할머니는 지칠 줄 모르고 말을 하면서도 닭 가슴살을 찢어 그녀의 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다.


해주 전혀 무관하던 어느 고장이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는 순간들이 있다. 할머니는 해주 오씨로 해주에서 태어난 토박이였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일가친척 중 누구도 해주와 관계가 없었다. 뿌리를 찾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녀의 가계도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반도이남, 서남쪽에서 태어나 수도권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직장 생활도 광화문과 홍대 앞을 전전했지 미아리 고개 너머로는 발길이 닿아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해주 사람과 인연 맺기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긴, 기적 아닌 연분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녀는 삶이 해주 쪽으로 당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그쪽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해주는 아니었고 그 위 정주였다. 백기행. 정주 출신, 백석이라 불리는 시인. 대학 졸업 직후 그녀는 홍대 앞에 있는 인문학 전문 출판사에 근무했고, 백석 시 전집 편집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백석의 시들은 엮은이의 해설 없이는 그녀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시에 펼쳐지는 화자의 마음과 화자를 둘러싼 정황은 짐작할 수 있는데, 편편이 박혀 있는 낯선 어휘들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녀는 외국 시를 해독하듯 엮은이의 해제를 확인하며 교정을 보았다. 오순정 할머니와의 만남은 그녀의 기억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백석이라는 낯설고도 정겨운 사람을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할머니의 기습 키스가 처음엔 당혹스러웠다가 가만히 생각할수록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는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을 시집을 찾았다. 그것은 맨 아랫단 구석에 숨어 있듯 박혀 있었다. 몇 년간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아서 먼지가 두툼하게 앉아 있었다. 책을 출간하면서 연구자의 해설을 바탕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하느라 공을 들였던 기억이 생생했다. 초보 에디터 시절이었다. 여우난골족, 박각시 오는 저녁, 흰 바람 벽이 있어, 가즈랑집, 모닥불. 대부분 서북방 뭇사람들의 정서와 말씨가 화인(火印)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시집을 주욱 훑어보고는 제자리에 다시 꽂았다. 말씨는 그 사람의 체취, 음색, 성향, 태도와 관계되었다. 충청남도 보령 출신인 그녀의 엄마는 스무 살까지 고향 마을에 살았으나 평생 반듯한 서울 말씨를 썼고, 가끔 친정 식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거나 친정에 내려갔을 때는 그곳 말씨를 썼다. 오순정 할머니의 말씨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태생지 억양이 강했다. 열아홉 살에 해주를 떠나왔으면서도 해주 말씨를 고수하고 살았는데, 억세면서도 다정하고, 다정하면서도 대쪽 같은 성정과 말씨가 주위를 압도한다는 것을 할머니만 몰랐다.


계단과 아이 그의 조부모 집에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계단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의 조부모는 기어이 계단 아래 감나무까지 힘겹게 내려와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러고는 두 손과 두 발을 번갈아 짚고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꿈은 한동안 비슷한 장면들로 계속되었다. 그녀의 분당 옛집의 계단인지, 그의 조부모 집 계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계단에는 언제나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누구인가? 그녀는 아이를 아는 것 같기도 했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은 늘 일방적이어서, 아이의 눈빛, 아이의 목소리를 알 수 없었다. 누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목소리, 사소한 버릇 같은 것을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아이를 보고 있거나, 스치듯 아이의 곁을 지나갈 뿐이었다. 계단과 아이의 영상은 5초 정도 지속되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무한 되풀이되었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같은 꿈이 거듭될수록 아이의 형상이나 장면이 생생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스미듯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 맡으로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쥐었다. 자취가 묘연해지기 전에 메모 창에 썼다.


계단이 비어 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벽의 넓이가 달라진다. 아이는 감나무에 기대어 서 있거나, 계단 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가 거기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주위의 온도가 달라진다. 가로등은 저물기만큼 어둠을 잠식하고, 아이는 어둠과 빛의 경계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다. 계단은 빛의 테두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나는 아이를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눈 속의 사냥꾼 그것은 그녀가 아는 그림이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서 직접 보았고, 잡지에 단상을 쓴 적도 있었다. 피터 브뤼헬의 〈눈 속의 사냥꾼〉.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플랑드르 화파의 그림이 오순정 할머니의 화장대 옆에 떡하니 액자로 걸려 있었다. 물론 복제본이었다. 그 그림이 새삼스럽게 눈에 띈 것은 화장대를 구성하고 있는, 아니 오순정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가족사진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쩌다 잘못 끼어 붙박여 있는 객식구처럼 생뚱맞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 속의 사냥꾼〉의 출처는 이듬해 여름, 그녀가 두 번째 삼계탕을 먹으러 간 날 오후에 밝혀졌다. 할머니는 설거지를 마친 그녀에게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사진들에 대하여 장시간에 걸쳐 들려주었고, 다음에 올 때에는 그녀의 사진도 한 장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녀는 다음까지 갈 것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할머니와 셀카를 찍어 즉석에서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눈 속의 사냥꾼〉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그가 중학생 때 처음 외삼촌을 따라 유럽 여행을 갔다가 보내온 그림엽서였다. 할머니는 처음엔 어린 녀석이 애틋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몇 날 며칠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자세하게 그림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상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바'가 있어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았다. 25년 전 일이니, 그때 할머니는 환갑이었다. 그날 이후 〈눈 속의 사냥꾼은〉은 봄이나 여름이나 할머니의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림이 보여주는 세계와는 동떨어져 살아온 할머니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평소에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오로지 할머니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꺼내곤 했다. 대개 질문의 형식이었다. 이 그림의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콱, 사로잡았을까요? 그림이나 사진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푼크툼이라 부르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어떤 것일까. 할머니는 화장대 맨 아랫서랍을 열더니, 두툼한 사진첩을 꺼내 주었다. 거기에는 사진이 아니라 〈눈 속의 사냥꾼〉과 같은 그가 유럽에서 보내온 엽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프랑스 태피스트리, 덴마크 도자기, 플랑드르 회화, 헬레니즘 조각, 르네상스 건축물, 에펠탑, 유람선 들이었다. 대개 그녀가 현장에서 직접 보았거나 화집이나 미술사 책에서 본 작품들이었다. 엽서 뒤에는 그가 정성들여 쓴 글이 희미하게 바랜 채 새겨져 있었다. 연필과 볼펜, 만년필로 쓴 짤막한 안부 편지들이었다. 20여 장쯤 되었고, 유럽 여러 나라 언어로 그들의 출처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 할머니가 읽을 수 있는 언어는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와 평생 교육자로 은퇴를 했지만, 할머니는 그 옛날 '계집애'는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조부의 완고한 교육관으로 학교의 문턱조차 밟아 볼 수 없었다. 매일 한 살 터울 사촌언니랑 문안차 할아버지한테 달려가서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고 떼썼는데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니, 고 이상하게 내 맴을 붙잡는 거이 머이냐 하면······.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 〈눈 속의 사냥꾼〉에서 '이상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바'를 요약하면, 할머니의 고향 마을 정취가 세세한 풍경 속에 담겨 있었는데, 특히 산 아래 빙판 위에서 팽이를 치고, 썰매를 타는 아이들은 예닐곱 살 때의 자신을 떠오르게 했고, 그림 오른쪽 맨 아래, 흰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여인은 열아홉 살 이래 만나지 못한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정지된 시간 속에 오직 기억에 의지해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 그 장면만큼 구체적인 것은 없었다. 사냥개를 이끌고 산속으로 사냥을 갔으나 이례적인 폭설로 헛수고하고 빈손으로 귀가하는 사냥꾼들과 그 아래 깨알같이 펼쳐져 있는 삶의 풍경들. 자연의 이변과 역사의 재앙 속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시간은 흘러간다. 할머니와 나란히 〈눈 속의 사냥꾼〉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브뤼헬의 계절 연작 중의 하나인 〈새덫이 있는 겨울 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물론 그림엽서였다. 브뤼셀에 출장 갔을 때 사온 것이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눈 속의 사냥꾼〉 옆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시월 아침 투명한 아침 햇살이 거실 깊숙이 비쳐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거실 창가로 옮긴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옆에서 취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미국고모는 할아버지의 투약 시간을 재느라 현관 옆 괘종시계로 눈을 돌렸다. 10시 32분.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할머니는 나물을 다듬을 때면 흥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흥이 많은 분이었다.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흥에 겨운 나머지 할머니는 나물을 다듬던 손을 놓고, 가사에 맞춰 동작을 지어 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인정의 노래 강사를 따라 익힌 동작이었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랑 손을 잡고 춤을 추곤 하던 노래였다.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할머니의 노랫소리는 할아버지의 귓불을 스치고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잘린 감나무에서 돋아난 연두색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잘못 본 것인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노랫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든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할머니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할아버지가 들으라는 듯이 목청을 높였다. 할아버지는 잠든 듯 고요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할머니의 앙증맞은 제스처에 미국고모가 여전하시네, 라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고, 나물 데칠 물을 끓이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고는 눈길을 돌려 할아버지 얼굴 위에 하늘거리는 연둣빛을 보고는 창밖의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편안하게도 잠이 드셨네. 미국고모는 파란 하늘에, 맑게 쏟아지는 햇빛에, 싱그럽게 들고나는 바람결, 노인의 여전한 흥 바람에 감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요해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 미국고모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했고, 할머니는 노래를 멈추었다.


동영상 그녀의 사진 폴더에는 동영상들이 일련번호로 저장되어 있었다. 20여 개가 넘는 동영상 중에 그와 그녀가 찍힌 것은 없었다. 할아버지의 영상이 셋, 그 외 할머니의 영상들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요양원이 아니라 감나무 집에서 1년 남짓 투병하다가 88세에 영면했다. 그녀로서는 84세 할머니가 87세 할아버지를 간병하는 감나무 집의 일상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나, 할아버지를 향한 할머니의 광기에 가까운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영원히 잠을 자고 싶어 했고, 할머니는 그 잠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잠을 자게 해달라고 애원하다가 화를 냈고, 할머니는 잠들면 안 된다고 달래다가 화를 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은 혼자 화장실에 걸어가 변기에 앉아 시원하게 똥을 누는 것이었고, 누구의 방해도 안 받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이었다. 그와 그녀는 매주 감나무 집에 갔다. 같이 갈 때도 있었고, 혼자 갈 때도 있었다. 할머니의 저 마음, 저 행위는 무엇인가. 장례식 기간 동안 할머니는 예상외로 덤덤했다. 식사도 잠도, 모든 절차도 순리에 따랐다. 나흘 밤낮 홀쭉하게 초췌해진 것은 그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그는 그녀가 담은 할아버지의 동영상을 보면서 비로소 혼자 조용히 추모했다. 할머니는 동영상을 보면서 오열했다. 장례식 동안 억눌렀던 울음보가 터져서 영상을 돌리고 돌려 울음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울다가 웃다가 땅거미가 지도록 할아버지를 보고 또 보았다. 할머니는 동영상 생활자가 되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동영상을 찍었다. 할머니는 그녀가 "자, 동영상 촬영입니다."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방송인처럼 즉시 자세를 가다듬고 촬영에 임했다. 일부러 동영상을 찍으러 감나무 집에 간 적은 없었다. 밥상 앞에서, 만두를 빚다가, 묵을 쑤다가, 쑥을 뜯다가, 밤을 줍다가, 입원 중에, 퇴원하고 귀가 중에, 자동차 안에서, '오순정의 영역'이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즉흥적으로 찍었다. 폴더 속의 오순정 할머니는 묵을 쑤고, 만두를 빚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한식 때에는 할아버지 묘위에 주저앉아 잡초를 뜯었고, 추석 때에는 할아버지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밤나무 아래에서 밤을 주웠고, 한여름에는 병원에 입원했고, 그러는 사이 심장은 인공심장으로 교체되었다. 그녀의 동영상은 만두 편을 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만두 할머니는 지금 소를 만드느라 한창이다. 배추김치를 종종종 썰고 있다. 조금 전에는 온 힘으로 두부 덩어리를 치대어 으깼다. 턱밑까지 숨이 차도록 힘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다 못한 그가 자기가 하겠다고 해도 그 일만은 당신이 해야 한다고 맡기지 않는다. 만두는 소를 만드는 사람의 손맛이라고 믿고 있다. 두부를 으깨고, 김치와 돼지고기, 숙주와 당면, 파를 섞고, 다지는 할머니의 손과 팔목은 뭉툭하다 못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다. 교장으로 은퇴를 한 할아버지의 온화하고 품위 있는 모습과는 달리 할머니의 손과 팔뚝에는 보기 흉하게 굳은살이 배어 있다.


- 몇 년 동안 만드셨어요?
- 허허, 맻 년인지 모르지. 한, 오십 년? 거진 한 오십 년 되얐갔지.
- 그럼 35세 때부터 만드신 거네요?
- 아니, 그게 아니네, 그러니까니 열대엿 살 때부터니까니, 한 70년, 70년 되갔어, 만두 빚기 시작한 기.
-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 나? 그전에 우리 엄마가 하는 거이 보고 배왔지.
- 이게 황해도식이군요.
- 그래, 황해도식이야.
- 해주.
- 그래, 맞아, 해주. 거기서는 기냥, 만두를 해서 기냥, 겨울에 거 춥디않아. 쪄 가지고 기냥, 얼려서두 놓구, 바깥에두 놔두메는 기냥, 얼어. 춰니까. 쪄 가지고 광우리로 하나씩 광에다 놓구는 기냥, 보름 내두루 기냥, 할아버지랑 계시니 손님이 오는 게야, 세배 손님들이. 그러면 만두 그렇게 해놓고 기냥, 대접해, 사람들이 오메는······.


향토음식요람에는 황해도를 비롯해 서북도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 먹던 만두는 '편수만두'라 명명하고 있다. 보자기의 네 귀를 잡아 싼 네모난 형태가 주이고, 납작하거나 둥근 형태도 있다. 여름 만두는 채소 위주로 넣어 담백하게, 겨울 만두는 육류를 넣어 푸짐하게 빚는데, 할머니가 해주에서 어릴 적 먹고, 배운 만두는 둥근 모양의 겨울 만두였다. 지역마다 만두의 내용과 형식이 다르듯, 같은 지역이라도 집집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만두이다. 할머니의 만두는 그의 아버지와 고모들이 함께 살았던 때에는 의정부와 수유동 일대에서 집집마다 널리 퍼졌다. 그는, 아버지가 하던 대로, 명절 전후 사흘 동안 할머니의 만두 심부름을 했고, 그것이 그에게는 명절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오순정 할머니의 만두 후속편이 내년에 계속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의정부 그녀가 홍대 앞에서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는 할머니와 통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부터 미국고모는 아침 7시에, 뉴질랜드고모는 저녁 7시에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아침 9시에 알람을 설정해 놓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식사부터 잠까지 거실에서 모든 것을 했다. 거실 가운데에는 접이식 2인상이 놓여 있었고, 할머니는 그 상에서 밥을 먹고, 성경을 읽고, 때로는 깔판을 깔고 화투를 쳤다. 그와 통화 후에는 몸단장을 하고 성당에 갔다. 할머니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모들의 독려에 따른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시기였다. 성당의 장례식, 특히 자매님들의 나눔 봉사가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였다. 할머니는 평생 처음 책에 쓰인 단어에 대하여 생각하고, 문장의 뜻을 헤아려 외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은 성당에 다녀온 직후였다. 전화를 먼저 걸어오는 경우는, 그것도 일요일 아침에 통화를 하고도 다시 찾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통화는 평소 길어도 10분을 넘지 않았는데, 30분째 계속되고 있었다. 의정부 홍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의정부 친구들 아홉 중 마지막으로, 이제는 의정부에는 아무도 없다고 애석해하는 내용을 되풀이 전하고 있었다. 그는 조부모로부터 귀가 닳도록 의정부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그중 몇몇은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한때 조부모의 집은 일요일이면 의정부 사람들로 꽉 찼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실향민들이었다. 그들은 여름에는 냉면을 해먹고, 겨울에는 만두를 빚어 먹으며, 1박 2일 화투 놀이를 하며 왁자하게 보냈다. 고스톱이 시작되면 그는 농구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가거나, 책상에서 헤드폰을 껴야 했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 중 반이 저 세상으로 떠났고, 그녀가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는 다섯 사람 생존해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자 홍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오순정 할머니 외에는 생존자가 없었다.


화투 이런 맹꽁이, 아직도 쇼당이 뭔지 몰라! 저녁 일곱 시 반이면 틀니를 빼고 잠자리에 드는 할머니는, 혈육들이 와서 1박을 할 때면 열 시가 넘도록 화투판을 접지 않았다. 까무룩 내려앉던 기력도 화투판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미국고모와 뉴질랜드고모는 귀국하는 날부터 출국하는 날까지 체류 일정을 화투치기에 중점을 두었다. 둘이 함께 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할머니는 끼니 때 외에는 밤이 늦도록 둘이 앉아 맞고를 치기도 했다. 그와 그녀를 찾는 경우는 짝을 맞추기 위해서였는데, 그나 그녀나 도무지 고스톱 치는 룰이나 셈법에는 젬병이었다. 그래도 그보다 그녀가 좀 나았는데, 아주 아쉬울 때만 할머니는 그를 끼워 넣었다. 할머니는 성의 없이 친다고 그를 타박했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녀를 경계했다. 그는 뭐든지 애를 쓰지 않으려고 했고, 그녀는 뭐가 되었든 애를 쓰고 보았다. 그는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려 했고, 그녀는 그 분위기 속으로 녹아들려고 했다. 화투는 만두처럼 지역마다 집집마다 규칙이 달랐는데, 할머니는 의정부 쪽에 수유동 쪽을 섞은 오순정법의 창시자였다. 패대기, 폭탄, 피박, 광박, 쇼당. 특히 할머니의 쇼당에는 아무도 못 당했다. 특히 그녀는 도무지 쇼당에 맥을 못 추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쇼당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화술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녀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화투치기 경력이 쌓여 가도 쇼당 앞에서만은 장님처럼 깜깜했다. 미국고모에게 쇼당의 발생 조건(세 사람(1, 2, 3) 중 1, 2가 이길 수 있는 팽팽한 상황에 이르러 판에 가져갈 패가 없고, 3이 1, 2가 원하는 패를 쥐고 있는 경우. 어떻게 해도 질 수밖에 없는 3은 패를 공개하고 1, 2가 받을 것인지 묻는다. 1, 2 중 하나가 받으면 패한 사람이 쇼당을 낸 3의 몫까지 덮어 쓴다. 둘 다 받지 않을 경우 무효 판)에 대해서 청해 듣고도 할머니의 쇼당 앞에서 헛갈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맹꽁이, 그래서 쇼당을 받을 거야, 말 거야!


프라다 가방 그러니까 그 가방은 그녀의 엄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다녀가면서 놓고 간 것을 그녀가 들고 할머니한테 갔는데, 크기도 색깔도 생김새도 야무지다고 할머니가 마음에 쏙 들어 하는 바람에 두고 왔다. 할머니는 한동안 가방 이야기로 그녀에 대한 품평을 거듭했는데, 듣다 못한 미국고모가 지난번에 사다 드린 프라다 가방은 왜 사용하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할머니는 창고로 사용하는 건넌방 벽에 프라다 가방 진품을 먼지가 앉도록 걸어 놓고, 모조품을 애지중지 들고 다녔다. 할머니의 취향은 자신에게는 분명했고, 남들에게는 애먹이는 숙제였다.


시집 그녀가 시집들을 챙겨다 주기 전까지 할머니는 성경책을 읽고, 쓰고, 외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더 맹렬히 화투에 매달렸다. 그것이 정신을 온전히 붙들고 있기 위한 최후의 안간힘이라는 것을 곧 모두 알게 되었다. 화투는 할머니가 티브이 일일드라마보다 더 집착하는 놀이판이었다. 티브이 일일드라마와 화투, 그 둘은 젊을 적부터 할머니 삶의 활력소였다. 기뻐도 슬퍼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 온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자꾸 헷갈리고, 더욱 집요해지고, 아주 멍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다. 미국고모는 큰 글씨 성경책을 가져다 놓았고, 뉴질랜드고모는 매달 전래동화책을 보냈다. 그녀는 시집을 선택했다.


말과 눈물 할머니는 깨어 있는 동안 계속 말을 했다. 새벽에 안면과 왼쪽 팔다리 마비가 와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지 사흘 만에 4인실 병실 창가에 자리 잡았다. 맞은편 창가에 자리 잡은 팔십대 노인은 침울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거나, 소리 없이 울었다. 노인은 경찰관 출신으로 풍채가 건장했다. 80세를 넘긴 얼마 전까지 색소폰을 불었고, 노인정으로 봉사 연주를 다니다가 마비가 와서 앰뷸런스에 실려 왔다. 간병인들 사이에 오고간 내용이었다. 병실마다 환자 수만큼 간병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병인들은 연변 출신들로 이루어진 협회원들이었다. 환자의 처음과 끝을 단계별로 간병해 온 터라, 말도 태도도 전문가다웠다. 간병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성실히 임했고, 평가 등급을 높게 받아야만 대학병원의 간병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의사의 지시대로 간호사가 움직이는 것처럼 간병인은 간호사의 관장 하에 움직였다. 만사를 제치고 서둘러 귀국한 고모들은 처음엔 환자와 간병인 사이에서 혼선을 빚었다. 어디까지 보호자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 왼쪽 뇌 손상이면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오른쪽 뇌 손상이면 말을 많이 합니다. 오순정 할머니는 오른쪽 뇌 손상입니다. 전신마비는 뇌와 반대로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왼쪽 팔과 다리 마비는(의사는 차트를 일별한다), 지금 91세이시니까(그가 실제는 88세라고 정정한다), 네에, 그렇더라도, 할머니는······ 네에,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모닥불 할머니는 입원하기 전까지 매일 시를 읽고, 쓰고, 외웠다. 할머니가 어제 병원에서 낭송한 시는 백석의 〈모닥불〉이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할머니의 기억은 가장 먼 곳으로 향했고, 고향 해주의 모닥불 타는 저녁이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할머니의 곁은 간병인이 지켰고, 고모들은 번갈아가며 오갔고, 그녀는 주말 오후에 들러 백석 시를 읽어 주었다. 그녀는 한두 단어를 읊고 할머니를 보았고, 한 행을 읊고 나서 다시 할머니를 보았다.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할머니의 기억에는 한 달 전까지 〈모닥불〉을 외던 사실이 지워지고 없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잠시 멈추었다가 넌지시 물었다. 할머니, 개니빠디가 뭐예요? 할머니는 틀니를 빼서 앙다물려진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개니빠디는 갱애지 이빨이디, 개이빨.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그녀는 몽둥발이를 읽다가 발음이 꼬여 그 부분을 재차 읽었다.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 대목에서 할머니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바람에 호흡이 엉긴 탓이었다. 할머니가 검버섯 번진 뭉툭한 손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뻗었고, 어느 결에 그녀의 등 뒤에 와 있던 그가 할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계단과 아이 한동안 감감하던 계단과 아이 꿈을 꾸었다.


계단에서 일어서려는데 새털처럼 가벼운 그림자가 골목 어귀에서 느껴진다. 이리 와. 나는 식구처럼 다정하게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화가 나 있는 듯하다. 잠시라도 엄마가 그리운 것이다. 나는 아이를 잘 안다고 느낀다. 아이는 고집이 세다. 쉽사리 나에게 오지 않는다. 이리 와. 나는 손짓까지 한다. 보여줄 게 있어. 아이가 발을 끌며 다가온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골목의 가로등들에 불이 들어온다. 초등학교 긴 담장을 따라 어둠이 내린다. 창문마다 저녁 불이 켜진다. 동네가 숨 쉬는 고래처럼 살아 움직인다. 아이는 내게 안겨 잠이 든다. 어둠이 걷히고 계단은 조용하다.


감나무 집 네 갈래 골목의 한 귀퉁이, 파란 대문의 감나무 집에서는 하루 열두 번, 정시가 되면 어김없이 괘종이 울린다. 아무도 없는 거실 접이식 2인상 위에는 성경과 백석 시집이 나란히 놓여 있다.




* 이 글을 위해서 졸작 「조용한 날들의 계단」, 박무부 작사 〈내 나이가 어때서〉, 백석의 「모닥불」(이동순 엮음, 솔출판사, 1998)을 인용했음을 밝힌다.
















함정임

작가소개 / 함정임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광장으로 가는 길」이 뽑혀 등단했다. 소설집 『버스, 지나가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중편소설집 『아주 사소한 중독』, 장편소설 『춘하추동』, 『내 남자의 책』 등을 출간했다.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소설창작담론 아틀리에 미필담을 운영 중이다.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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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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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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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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