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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 작성일 2019-10-01
  • 조회수 2,719

[단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원재운




부에나 수에떼 리조트

조시 피브레루는 소파에 앉았다. 창고 작업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근면하다는 평을 날릴 바에야 한쪽 팔을 잃겠다고 다짐한 조시 피브레루였고, 이 마음가짐이 그에게 안겨 준 것은 원만한 결혼, 빠른 승진, 임직원과 지인들의 신뢰 및 극소수의 질투였다. 이 중 극소수의 질투야말로 지배인인 조시 피브레루가 창고에 직접 뛰어들어 무거운 짐을 나르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자신의 피곤한 성격을 탓하며 조시 피브레루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피곤한 성격 탓에 피곤했던 하루와 피곤해진 어깨를 갖게 된 조시 피브레루가 앉은 곳은 리조트 로비에서 경관이 가장 멋진 자리였다. 로비 건물의 한 면은 바다 쪽으로 완연히 트여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뻗은 지붕 아래엔 수영장이 대양과 이어지듯 자리했다. 낮이면 햇살로 옷을 지어 입은 파도가 샹들리에 불빛처럼 넘실거렸고, 밤이면 신이 손수 빚은 별들이 해면과 지붕 사이에 누웠다. 이 모든 것들이 보이는 위치를 고른 건 조시 피브레루였다. 조시 피브레루의 견해에 따르면 리조트는 쉬었다 되돌아가는 장소였다. 목적지일 수도, 집일 수도 없었다. 오롯이 쉬었다 되돌아가는 곳다워야 했다.
소파는 대체로 투숙객들의 차지였다. 지금처럼 구름이 잔뜩 낀 밤만 아니라면 그랬다. 덕분에 조시 피브레루는 부담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괜찮은 소파였다. 침잠하는 모래알이 된 기분이었다. 느닷없는 휴대전화 진동만 아니었다면 해저 어딘가에 닿아 잠들고 말았을 것이다. 아빠, 내일 오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오늘 엄마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해가 뜨면 만나요! 제 엄마의 휴대전화로 보낸 자식의 메시지에 조시 피브레루는 미소를 그렸다. 기꺼운 중에도 도로 떠오른 것만은 조금 아쉬웠다.
더 편해 보려 뒤척이던 조시 피브레루의 눈동자에 카운터가 비쳤다. 카운터를 지키는 두 사람은 루 레온 테핀고트와 마리아 헨더슨. 잠깐, 테니슨이었나. 아무튼 둘은 근면한 조시 피브레루가 보기에도 근면했다. 늦은 밤인지라 당장 그들의 근면함을 증명해 줄 손님은 없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조시 피브레루는 실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다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루 레온 테핀고트와 마리아 헨더슨 혹은 테니슨의 모습이 흔적처럼 남았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빨라졌다.
조시 피브레루는 남은 손으로 소파를 쓰다듬었다. 역시 괜찮은 소파였다. 집에 드러누울 때만은 못했지만 편한 것은 분명했다. 물론 소파의 특별함은 편안함보다도 번지듯 눈에 담기는 절경에 있었다. 그래서 흐린 밤에는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맑은 한낮이었더라도 조시 피브레루에겐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 조시 피브레루의 세계엔 늘어지는 안온함은 있어도 황홀한 신비감은 없었다. 절경은 물론, 그에 얽힌 전설까지도. 눈을 뜬 조시 피브레루는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는 시야에 잠시나마 카운터의 두 사람이 스쳤다. 눈동자가 멈춘 곳에는 금세 비를 토할 듯한 구름과 드문드문한 불빛에 물든 해변이 있었다.
그렇다. 저 투몬 해변 북쪽에 있는 사랑의 절벽······ 차모로 족장의 딸과 스페인 청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두 사람을, 정확히는 청년을 질투한 차모로 족 전사의 밀고와 추격······ 죽어서라도 함께하기 위해, 차모로 족의 혼인 서약을 따라 두 사람은 머리카락을 한데 묶은 채, 영원처럼 버티고 선 절벽 위에서······ 같은 이야기였다. 실화는 아닐 것이다. 말하는 사람마다, 동네마다 내용이 판이했다. 같은 차모로 족 연인이었지만 신분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스페인 청년이 질투와 추격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같은 것은 연인이 서로의 머리카락을 묶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결말뿐이었다.
왜 굳이 죽어서 함께해야 한단 말인가. 조시 피브레루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타인의 질투를 원동력으로 삼는 자신의 방식에 흡족해했다. 피곤해질 때도 있었지만, 쌓이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 또한 조시 피브레루는 알았다. 잠시 후, 조시 피브레루는 직원 휴게실 구석에서 마리아 헨더슨인지 테니슨인지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왼손 끝으로 스며든 푹신함이 어깨까지 타고 올랐다.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루 레온 테핀고트의 말에 따르면 남은 한 건의 예약은 한국에서 오는 패키지 투어 손님들이었다. 괌을 찾는 한국인은 연간 총 관광객의 사 할 이상이었다. 자연히 이 리조트를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조시 피브레루는 몇 마디 한국어를 알았다. 밥 먹었어요? 같은 말이 인사로 쓰인다는 것은 조금 우스웠다. 하루 한 끼는 꼭 자국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습성도 그랬다. 조식 뷔페에 김치는 빠진 적이 없었다. 조시 피브레루는 가이드가 누구냐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뜻밖의 사고 따위만 없다면 루 레온 테핀고트 혼자서도 잘 해낼 것이기에, 조시 피브레루는 마음 놓고 살집 오른 몸매의 마리아 헨더슨인지 테니슨인지를 불러냈다. 참으로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뻐근했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젊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신비한 전설에 귀를 기울였던 어린 시절까지.
차모로 족은 세상이 조상들의 영혼, 타오타오모나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타오타오모나는 부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수호신이었다. 일상을 지켜주고, 일을 도와주고, 위험과 난관을 해결해 주었다. 부족원들은 저마다의 수호신에게 애정 어린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역경에 부딪힐 때면 그들의 이름을 뇌었다. 차모로 사람들과 영혼 사이의 연결은 이처럼 돈독했으나, 스페인 군함의 상륙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뿌리내린 기독교는 타오타오모나를 간악하고 교활한 유령, 악령이라고 했다.
유령과 악령을 섬기는 자, 마녀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조시 피브레루가 아홉 살일 때였다. 아홉 살이었기에 마녀란 말은 본디 이 섬에 없었다는 것도, 마녀란 자가 정말 악을 신봉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름도, 성별도 몰랐다. 다들 마녀라고 부르니까 그렇게 불렀다. 사납게 풀어헤친 머리칼과 옷가지, 짝이 맞지 않는 신발, 꾸준히 중얼대던 입술 따위들이 그가 마녀임을 증명했다. 막 아홉 살이 된 제 자식을 떠올리며, 조시 피브레루는 마녀에게 시나브로 다가서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다. 마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내기였다. 동네 아이들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장대한 모험이자 도전이었고, 어린 시절의 조시 피브레루 또한 지금처럼 근면한 자신이길 원했다. 여직원 엉덩이를 만지듯 긴장 넘치는 모험과 도전에도.
조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말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내가 말했었지. 타오타오모나가 된 내게 새 이름을 주지 않음으로 자신을 위로하려는 당신을 나는 이해해.
마녀 뒤로 다가가던 조시 피브레루는 뒷걸음질을 했다. 동시에 조시라는 이름은 흔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타오타오모나를 위한 축제는 식민지화와 함께 기독교 성자들을 기리는 감사제로 바뀌었다. 축제날이면 조시라는 부름에 반응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절대로 조시 피브레루를 부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만질 수 없는······ 을 만져 주는 것이 사랑······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주지. ······없더라도 불러 줄 수 있을 테니까. ······은 안지 못하더라······ 머리카락은 묶을······ 까. 하지만 이름이 없는 ······ 는 점점 증발하고 있어. 이건 ······킬 수 없어.
본인이 타오타오모나라니. 조시 피브레루는 태어나 처음 무참한 추위를 느꼈다. 축제날 아침의 소처럼 턱이 떨렸다. 악의 신봉자가 아니라 악 자체였던 걸까. 이가 딱딱 부딪치며 들려오는 목소리 군데군데를 잡아먹었다.
하지만 당신 손에······ 다행이라고 생각해, 조시. ······젠 팔도 흐려져, 지쳐······ 질 거야.
당신, 손에, 다행, 지쳤다는 말은 아홉 살의 조시 피브레루에게 남아 있던 어린아이 특유의 과단성을 일깨웠다. 조시 피브레루는 마침내 행동했다. 그리고 비명을 토하며 달렸다.
직원 휴게실 문틈으로 날카로운 비명이 새어들었다. 손을 거둔 조시 피브레루는 창고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근면한 사람답게 신속히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얼빠진 얼굴로 비상벨을 누르려던 루 레온 테핀고트의 손을 붙잡았다. 카운터를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긴 조시 피브레루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먹구름은 끝내 비를 뿌리고 있었다. 바람마저 심했다. 빗방울 몇 개가 조시 피브레루의 이마를 스쳤다. 소파를 막 지나쳤을 때, 멀리서 휘청거리는 사람이 보였다.
조시 피브레루는 아홉 살이던 그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다가오는 여자야말로 유령이나 악령, 아니면 마녀 같았다. 옅은 쪽빛 원피스는 구겨지고 찢긴 데다 곳곳이 붉었다. 신발은 신지 않았다. 넘어졌다가도 일어나길 반복하며 여자는 조시 피브레루와의 거리를 착실히 좁혔다. 가까워지자 어릴 적 마녀와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누구와도 묶을 수 없을 만큼 짧았다. 마구잡이로 잘려 나가 있었다. 아까만 해도 허리에 닿을 만큼 길고 정갈한 머리칼이었다. 아까만?
해가 적당히 기운 때에 찾아온 일가족이었다. 가녀린 체구의 여자는 양쪽 손목에 똑같은 모양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백금으로 된 구슬 팔찌였다. 오후의 햇빛 탓인지 팔찌는 파도 위 물거품처럼 하얗게 반짝였다. 그래서 조시 피브레루는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잠시 놓치기까지 했다. 미안합니다, 라고 한국말을 하자 아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생각대로 한국인 가족이 맞았다. 단란해 보이는 셋이었다. 제 아내에게도 저런 팔찌를 하나 사다 줄까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조시 피브레루였다.
여자는 계속 넘어지면서도 계속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다 못해 조시 피브레루를 지나쳤다.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조시 피브레루는 여자를 붙잡으려던 손을 거뒀다. 대신 최대한의 친절함을 발휘하며 말했다.
밥, 밥 먹었어요?
발을 멈춘 여자가 조시 피브레루를 향해 돌아섰다. 엉망이었다. 광대뼈 근처가 달궈진 듯 붉었다. 반대편 눈은 부풀어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몸 곳곳에는 피멍이 들었다. 아까와 비교해 그대로인 것은 양쪽 손목에 채워진 팔찌뿐이었다. 조시 피브레루는 손수건이 있는가 싶어 제 주머니를 헤집었다. 없었다.
살려······ 주세요.
세찬 빗소리 틈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시 피브레루가 모르는 말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자, 여자는 헬······ 헬······ 하며 숨을 헐떡였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 조시 피브레루는 예측했지만, 들리기로는 그저 지옥······ 이었다. 리조트는 쉬었다 되돌아가는 곳이고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못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시 피브레루는 남편과 아이의 행방을 묻고 싶어졌다.
쓰러지는 여자의 저편에 관광버스 한 대가 멈췄다. 조시 피브레루는 여자를 부축하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살폈다. 가이드가 누군지는 몰라도, 도움을 주기 전에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조시 피브레루는 생각했다. 여자를 지탱한 왼쪽 어깨에 언뜻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시 피브레루는 주무르는 대신 긁적였다.



델타항공 DL633

비상시 안전교육을 마친 에바 초이는 활주로 쪽을 내다보았다. 분주했다. 기장의 방송으로는 이십여 분 남짓 출발이 지연된다고 했다. 출발하는 항공기들의 항공로 분리기준 축소, 출발 집중 시간대를 피해 이륙시간을 분산시키는 등 공항 측은 충분히 힘썼다. 다만 항공기 한 대가 뜨고 내리는 데에는 공항의 노력 말고도 여러 조건이 필요했다. 개중에는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에바 초이는 다시 날씨를 확인했다. 비행경로에는 지장이 없었다.
날씨 화면을 접어 두고 승무원 스케줄러를 띄웠다. 에바 초이로서는 귓속이 아려 오는 일정이었다. 오사카 경유 후 괌에 도착하기까지 일곱 시간 남짓 동안 에바 초이에게 배당된 휴식시간은 없었다. 항공운항과에서 군대식 문화를 겪으며 에바 초이는 반드시 외국계 항공사에 취직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다짐을 이뤄낸 에바 초이를 반긴 것은 동양인은 일하길 마냥 즐긴다는 편견에 근거한 일정표와 계절처럼 자연스레 찾아든 중이염이었다.
이륙 전에 남은 것은 승객들의 안전띠 점검 정도였다. 승무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에바 초이는 부사무장을 찾았다. 국내 항공사는 특정 인원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운영했다. 반면 외국계 항공사의 대부분은 그날그날 새 팀이 꾸려졌다. 에바 초이의 회사도 마찬가지였는데, 탑승 전 회의 때 보니 F2 승무원 중 에바 초이가 최선임이었다. 이코노미 클래스를 총괄 관리해야 했다. 처음이었다. 부사무장과 내내 붙는 것보단 낫다고 에바 초이는 생각했다. 부사무장 마이클 모건은 몇 번 같이 비행한 적이 있었다. 그로 말하자면 아서 왕 전설 속 호수의 여왕인 모건 르 페이를 언급하며 자신의 성이 모건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승무원 중 누구도 그런 것으로 부사무장의 권위가 호화로워진다고 여기지 않았다.
부사무장을 찾아낸 에바 초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륙하기 전까지만 쉬고 싶다고 말했다. 예전 비행 때는 취녕, 너 잘 못 들을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라고 먼저 물어 왔던 마이클 모건이었다. 마이클 모건은 사무장에겐 본인이 말해둘 것이고 기내식 배급 때가 되면 호출 버튼을 눌러 줄 테니 푹 쉬라며 에바 초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륙하면 내려올게요. 그리고 에바라고 불러 주세요. 아니면 초이. 마이클 모건이 멀어지자 에바 초이는 어깨를 두어 번 털어낸 뒤 벙크로 향했다.
이층 침대 구석에 누운 에바 초이는 전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도 일 년 정도 지났다. 그날에도 이미 전 남자 친구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했던 계절은 지나 있었다. 전 남자 친구는 에바 초이에게 더는 관심이 없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라고 에바 초이는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전 남자 친구가 만든 것인지 헷갈렸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전 남자 친구는 말했다. 진영아, 난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월급을 중심으로 세상을 꾸리는 건 싫어.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잖아. 에바 초이는 가까이 놓인 둥근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새하얀 얼굴에 키가 큰 너를 배신한 여자들과의 추억을 일주일에 나흘간 술을 마시며 곱씹어대는 것으로 굴러가는 너의 세상은 어떤 건데? 라고 묻지 않았던 자신에게 되물었다. 왜 그랬니? 돌이켜보면 전 남자 친구는 여자들에게 받은 상처를 떠올리며 그래도 그녀들을 사랑했고 또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가 불콰해지면 엿가락 같은 몸은 부러질 듯 흐느적대다 침대 위로 쓰러지곤 했다. 잠든 얼굴을 보며 이런 순정파가 또 있을까, 하며 사랑스럽다는 듯 쓸어내렸던 최진영의 모습을, 에바 초이는 천장에 붙어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러니? 지금의 최진영이라면, 그냥 귀싸대기를······.
에바 초이는 눈을 떴다. 천장과 침대가 뒤집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달팽이관에 귀신이라도 붙었나 싶은 생각에 에바 초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벙크에서 자던 중 누군가 깨워서 일어났는데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비행기는 예전에 여행 중 사고로 죽은 이의 관을 싣고 간 적이 있는데, 시신은 내렸으나 혼백은 남아 기내를 배회······ 같은 이야기는 항공사마다 있었다. 괴담을 믿거나 무서워하는 승무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에바 초이는 아니었다. 차라리 귀가 간지러울 때면 전 남자 친구가 자기 욕을 뱉고 있으리란 쪽을 더 믿었다. 그러고 싶었다.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에바 초이는 차분히 기내를 돌아보았다. 분주했다. 이륙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일이 끝나 있었다. 기내식 배급은커녕 일회용 식기를 거두는 중이었다. 눈을 비비려던 에바 초이는 새로 덧칠한 마스카라 생각에 손을 멈췄다. 잠이라도 푹 잤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카트를 밀던 동료 하나가 에바 초이에게 많이 아프다더니 괜찮으냐고 물었다. 명찰을 흘깃 살폈다. 엑스트라 비행으로 탑승한 엘레나였다.
에바 초이는 괜찮다고 답하며 엘레나가 밀고 온 카트를 받았다. 호출 버튼을 누르지 않은 데다 예비 인력까지 투입하며 본인을 중환자로 만든 마이클 모건을 원망하느니 제때 일어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게 편했다. 아마 또 누군가에게 떠들어대고 있었을 것이다. 모건 르 페이. 호수의 여왕이자 이상향의 땅 아발론의 주인. 그곳은 과실과 곡식이 절로 자라나는 천국의 대지. 먼눈으로도 별의 운항과 의미를 알 수 있어 걱정과 번민이 없는 세계. 그러니 나의 영토에 들어오라는 식의 마이클 모건······ 몇 번이고 말해 주고 싶었다. 헤이, 일단 그 여자는 이름이고, 너는 성이잖아, 스투피드.
아, 스튜어디스. 일을 좀 줄이시는 게 어떨까요. 스케줄 과한 분들이 자주 오십니다. 기체 소음도 문제지만, 비행이 잦으면 귀가 기압 차에 적응을 잘 못 해요. 몸은 닳습니다. 소모품이에요. 성능이 떨어지면 곧 만성이 되는 거죠.
의사는 펜을 연신 돌려댔다. 내리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의사의 펜대를 보며 최진영과 에바 초이를 오가는 일에 관해 생각했었다. 그리 어려웠나 싶었다. 취녕, 취녕 하던 마이클 모건을 비롯한 동료들이 떠올랐다. 우스꽝스러운 발음이었다. 에바 초이는 가슴팍의 명찰을 슬쩍 들어 내려다봤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에바, 이브에서 유래한 이름, 최초의 여성. 이 회사 최초의 한국인 직원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 자신의 모든 걸음은 늘 나 자신에게 최초니까. 이 네이밍 센스가 마이클 모건의 센스와 별다를 게 없음을 깨달은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래,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지.
한국어로 혼잣말을 내뱉는 것은 최진영이 아닌 에바 초이만의 버릇이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버릇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일기장을 들킨 기분으로 에바 초이는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에바 초이는 손이 빈 것을 알았다. 어느새 자신은 카트를 제자리에 두고 복도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누나,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요? 황당함을 미소로 가리며 에바 초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작은 아이였다. 뭔가를 숨기듯 뒷짐을 지고 선, 아홉 살쯤 되었을까 싶은 아이였다. 에바 초이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누나가 안내해 줄 테니까 잘 따라오세요. 알았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화장실로 안내해 준 뒤, 에바 초이는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여러 일을 했다. 이코노미 클래스 관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식사를 내주고, 음료나 마실 것을 주고, 쓰레기들을 걷고, 면세품 판매에 관해 안내한다. 순조로웠다. 변수라면 방금 아이처럼 도움을 청하는 승객에 대한 안내, 그리고 예측불허 혹은 천만뜻밖의 상황 정도였다.
에바 초이가 네 번 정도 반복하여 읽었던 회사 매뉴얼에는 다양한 사례들이 실려 있었다. 이를테면 기내에서 자위 등 음란행위를 벌이는 승객이 있다면 즉시 해당 승객에게 경고하고 근처의 피해 승객으로부터 격리하며, 착륙하자마자 공항 경찰에 인계해야 했다. 참고로 실사례 때, 그러니까 자위를 한 승객과 맞닥뜨린 승무원이 취한 행동은 담요를 갖다 준 것이었다. 물론 승무원은 친절해야 했다. 하지만 부디 이거라도 덮고서 하시라는 친절함은 다른 승객들과 뉴스를 접한 이들을 분노케 했다. 해당 승무원은 해고되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에바 초이가 상상할 때면 앞에서 자위하는 사람은 늘 일 년 전의 전 남자 친구였다. 에바 초이를 포함해 자신을 배신했다던 여자들을 떠올리면서. 그래서 곧바로 생각하기를 그만두곤 했다. 어쨌든 기내에서의 자위는 비행기에 머무는 귀신보다 무서웠다. 에바 초이는 어떤 승객이 어떤 음란행위를 해도 놀라지 않고 철저히 매뉴얼에 적힌 대로 침착히 응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승객이 자신을 부를 때면 에바 초이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곤 했다.
한 승객이 손을 든 것은 오사카에 들렀던 비행기가 다시 떠오른 뒤였다. 여정의 반 이상이 지나니 승객 대부분은 잠이 들었다. 그래서 슬쩍 손을 든 승객이 더 잘 보였다. 에바 초이는 걸어갔다. 창가 쪽에 앉은 백발의 백인 남자였다. 남자는 눈가에 기다란 주름을 잡으며 뒷자리에서 자꾸 뭔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에바 초이는 알겠다고 답하고는 뒷자리를 보았다. 아까 화장실로 안내해 준 아이였다.
네 번 정독한 매뉴얼에는 어린아이가 아슬아슬하게 기내반입 물품 규정을 통과할 만한 날붙이로 종이를 자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쓰여 있지 않았다. 가위였다. 날 바깥이 플라스틱으로 덮인 어린이용이었다. 길이가 규정 이상이면 검사대에서 압수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이는 크고 작게, 제각각으로 잘려 있었다. 꽤 여러 번의 가위질이 오갔을 터였다. 뒷짐을 지고 섰던 아이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었는지 에바 초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의 바로 옆자리에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았다. 여자가 머리를 기댄 곳에는 챙을 구부린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 모자 바깥으로 꼬부라진 머리카락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모자 때문에, 여자는 늘어진 머리카락 탓에 눈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손을 쥔 두 사람의 가슴팍은 느리게 오르내렸다. 에바 초이는 작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아까 그 누나예요. 기억나요?
네. 왜요?
아이는 에바 초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신의 손과 가위, 종이에만 집중했다. 매뉴얼을 참고할 수 없는 상황, 에바 초이로서는 전에 없던 친절함을 발휘할 때였다.
정말 미안하지만, 종이 자르고 노는 건 비행기에 있는 동안만 멈춰 주면 좋겠어요.
가위는 검사대에서 길이 다 쟀는데요. 종이는 안 버리고 챙겨서 내릴게요.
요즘 아이들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에바 초이는 돌발 상황에 맞설 때 친절함보다 자제력이 더 필요함을 잊지 않았다. 아이가 자르는 것은 세계지도였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가르고 있었다. 바다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는 비행기 기체의 소음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너무나도 작아서, 부서지는 지도를 보며 에바 초이는 하마터면 최진영으로 돌아가 백인 남자에게 귀싸대기를 날릴 뻔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무서워 봐야, 검사대를 통과한 가위라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혹시 누가 가져갈까 싶어 화장실까지 챙겨간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인데, 이 정도는 참아 줄 수 있지 않은가. 귓속이 심히 간지러웠다. 자제력을 긁어모아 보았지만, 뭐든 당장 집어넣어 후벼 파고 싶었다.
취녕, 무슨 일이야?
마이클 모건이었다. 에바 초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었다. 아이를 발견한 마이클 모건은 헤이,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크고 투박한 손에 아이는 몸을 움츠렸다. 에바 초이는 마이클 모건에게 저것은 검사대를 통과했으니 수거할 필요가 없으며, 내가 잘 타일러 집어넣게 하겠다는 내용의 말을 재빠르게 뱉었다. 마이클 모건은 에바 초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중에 매뉴얼을 확인해 보란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이는 마이클 모건이 사라진 방향과 에바 초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위를 슬며시 감췄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뺏어갈 건가요?
아니에요. 우리는 뺏어가면 안 돼요. 검사받은 물건이니까. 다만······.
에바 초이는 아이가 받아들일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퍼뜩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아이는 차분한 눈빛으로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 초이는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위질하는 건 안 좋은 거예요.
그런가요?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에바 초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세상에······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일은 없어요.
아이의 눈이 커졌다.
그럼 무서워서 어떻게 살죠?
아이의 질문이 끝나자 옆자리의 여자가 퍼뜩 고개를 세웠다. 무슨 일이냐 묻는 여자에게 에바 초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자는 아이에게 비행기에 어떻게 가위를 가져왔느냐, 또 뭘 자르고 있었느냐고 낮게 윽박질렀다. 아이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여자가 팔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고 하얀 구슬이 알알이 연결된 팔찌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에바 초이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조금만 주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를 혼내지는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돌아선 에바 초이는 저편에서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마이클 모건을 발견했다. 에바 초이는 생각했다. 그러게. 누군가는 상관하고 싶어 하는데, 계속.
어떻게 사는 걸까.
혼잣말과 함께 비행기가 덜컹거렸다. 에바 초이는 넘어질 뻔한 것보다 간지럽다 못해 먹먹해진 귀가 더 신경 쓰였다.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흔들린다는 안내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가 못 일어나 놓고는 귀신 탓하는 것보단 아파서 드러눕는 편이 훨씬 사람답지. 다행이었다. 잘 살아가고 있구나. 잘 닳아 가고 있구나.



서울 32사 6132

콩, 너는 죽었다.
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있다고 들었다. 읽은 책은 무협이나 추리소설 정도인 허용택에게 시인이나 시는 낯설었다. 성이라도 달라서 다행······ 인가. 실없는 의문을 무시하며 허용택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붉은 신호 아래로 몇몇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핸들을 놓은 허용택의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방석을 바꾸면 엉덩이의 땀띠가 좀 나아질까 싶었다. 흐트러진 바지춤을 정리한 허용택은 조수석 앞에 붙은 사진과 이름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미러에 매달린 묵주가 달가닥댔다.
택시기사는 이름을 드러내고 다녀야 했다. 불합리했다. 이 생각이 든 건 며칠 전의 꼬마 탓이었다. 콩, 너는 죽었다. 아세요? 꼬마는 얼마 전 학교에서 배운 시라고 말했다. 재미있어서 전문을 외웠다고도 했다. 곁에 엄마로 보이는 여자만 없었다면······ 아무 관심 없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주지 않겠니? 라는 뜻을 천박하고도 완강한 어휘로 전했을 허용택이었다.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라 말하는 꼬마의 머리를 여자는 묵묵히 보듬었다. 꼬마가 아니라 여자에게 말한다는 심정으로 허용택은 입을 열었다. 아, 전 다른 사람이라서요. 잘 모르겠네요. 허허. 그때의 일은 심히 불만스러웠고, 허용택의 가슴에 불합리로 남아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 콩이 쥐구멍으로 들어가게 됐게요?
숙련된 운전사답게, 유연한 발목으로 차를 출발시키며 허용택은 새로이 품은 다짐을 되새겼다. 어쩌다 보니 며칠 전의 꼬마 승객을 태웠던 동네에 또 왔고, 연립주택 단지와 초등학교 사이를 지나며 잊었던 불만과 불합리함의 맹렬한 구르기를 느꼈으며, 마침내 다짐했다. 안락의자 탐정이 되겠다고. 결단코 심심해서가 아니었다. 숙련에 이르려면 반복이 필수였고, 뭐든지 반복되면 무료해지는 법이었으며, 허용택은 택시 운전석에 앉기 전부터도 숙련된 운전사였다. 라디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시부터, 네 시부터, 여섯 시부터······ 어느 디제이가 무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지, 해당 프로그램의 요일별 꼭지는 어떻게 되는지 외운 것을 넘어, 사연의 앞만 들어도 뒤가 짐작되기 시작하고부터 허용택은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안락의자 탐정이었다. 허용택은 몇 편 읽었던 추리소설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구석의 노인. 작중에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노인이었다. 노인은 치즈케이크와 우유, 손에 쥔 끈과 함께 항상 다방 구석에 앉아 있었다. 강마른 손가락은 정교하고 복잡한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 하길 반복했다. 추리력은 폴리 버튼이란 기자가 찾아올 때만 발휘되었다. 그녀에게 사건의 내용을 전해들은 노인은, 신문기사와 관계자 진술과 정황증거만을 토대로 범인과 진상을 파악했다. 이외의 방법은 없어. 내가 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노인의 말버릇이었다. 방석이 얼마나 좋았기에 그 노구가 늘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을까. 어쨌든 안락의자 탐정을 자처하기로 한 허용택의 결정은 권태의 해소 및 배출구를 마련코자 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승객과의 사이에서 피어나 굴러다닐지 모르는 불만스러움과 불합리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허용택은 힘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허용택은 다짐 후의 첫 손님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니까······ 왓슨과 처음 만나자마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냐고 물었던 셜록 홈즈처럼, 일단 외양을 살펴보았다. 남자다······ 라는 생각이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아 허용택은 조금 좌절했다. 콩, 너는 죽었다······ 하지만 자신의 추리력을 탓하기엔 아직 일렀다. 허용택은 고개를 흘끗 들어 묵주를 한 번 쳐다보았다. 콩알만 한 나무 구슬을 엮어 만든 묵주였다. 아주 작은 단서까지 긁어모아 완전한 하나로 엮는 것이 바로 추리였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운전하며 허용택은 조수석을 곁눈질했다. 홈즈라면 눈을 감은 채 상대의 어투와 화법만 듣고도 살아온 동네를 알아맞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 뒤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홈즈는 상대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만, 자신은 상대가 어디로 갈지를 안다. 목적지까지는 약 십오 분 정도 거리였다.
남자. 삼십대 중후반. 많아도 사십 초반이다. 평범한 인상에 평범한 체구다. 머리카락엔 연한 곱슬기가 돈다. 목이 늘어난 반소매 니트에는 보풀이 적잖이 일어나 있다. 한 손엔 책 하나 크기의 종이봉투를 쥐고 있다. 청바지나 신발에 뭐가 묻지도 않았다. 단지 하얀 운동화에 때가 좀 탔을 뿐이다. 정보를 정리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홈즈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네는 눈으로 보기만 할 뿐,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야. 환청이 허용택의 좌절을 완성했다. 콩, 너는······ 남은 방법은 대화였다. 허용택은 에어컨 온도를 낮추며 말했다.
어, 날이 꽤 덥네요. 어디 휴가 안 가십니까?
남자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대답했다.
기사님은요.
허용택은 남자의 짧은 반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아마 이럴 것이다. 나는 별로 당신과 말 섞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조용히 하거나 혼자 열심히 떠들어라. 이미 좌절의 완성을 겪은 허용택으로서는 오히려 반가웠다. 일단 성격만은 파악한 셈이었다.
저야 뭐, 처자식들 먹여 살리려니 휴가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살았죠. 그래도 이번만큼은 어떻게 해볼까······ 하고 있습니다.
허용택은 굴러다니는 것의 뿌리를 알고 있었다. 불균형이었다.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를 택시 태워 보낼 때 차 번호를 기억해 두는 게 매너라는 이유는 뭔가. 택시기사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범죄자가 택시기사로 위장하여 일을 저지른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허용택은 기사식당에서 기분 나쁜 일을 겪은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았고, 자신 또한 그런 경험이 없지 않았는데, 시를 읊는 꼬맹이를 만났다. 그래서 휴가 계획은 물론 처자식도 없는 허용택이지만 거짓말에 미안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정보는 애초에 불균형했다.
한숨을 쉰 남자는 손에 쥔 종이봉투를 두어 번 흔들며 말했다.
안에 든 게 비행기 표입니다. 아이 것까지 세 장이에요. 지금 주러 가는 거고요.
벌써 준비하셨네요. 얼마나 좋은 데로 가십니까?
괌이에요. 신혼여행으로 갔던 곳입니다.
집에 가서 딱 그 표 보여주면······ 아이도 좋겠지만, 사모님이 특히 좋아하시겠어요.
아마 좋아하겠죠. 선물도 하나 샀으니까요.
이야, 선물까지. 뭘 준비하셨습니까? 저도 참고 좀 해보게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용택은 거듭 눈을 굴렸다. 남자의 옷에 보풀은 있어도 먼지나 때는 없었다. 이 더위에도 땀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남자를 태운 곳은 주택가였다. 정리하면, 남자는 집에서 막 나온 듯한 행색이었다.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이 부분을 천연스레 파고들 궁리에 몰두한 허용택을 향해 가벼운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기사님은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허용택은 핸들을 쥐고 있던 두 손 중 오른손을 슬며시 뗐다. 분명 처자식이 있다고 말했는데.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쳐나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허용택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연스럽게 백미러를 만지작거렸다. 묵주 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간파당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애 같은 질문을 던져 올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애 같은 질문을 던진 남자도 택시기사 아저씨에게서 탁월한 답을 기대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어진 남자의 말은 장황했다. 허용택은 남자의 성격이 애초 파악한 것과 사뭇 다름을 실감하며 다시금 탐정으로서 마음을 다잡았다. 냉철함으로 장황함을 헤쳐 가며 이야기의 맥을 관찰했다.
남자는 손에 잡힌 것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물건이 아이의 배에 맞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으나 아내가 울었다. 아내는 남자가 물건을 던진 행위, 아이를 맞춘 결과에도 분노했지만 가장 화를 낸 부분은 집어 던진 물건에 있었다. 남자가 파악하기로는 그랬다. 결혼 예물이 담긴 보석함이었다. 흐느끼던 아내는 튕겨나듯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갔다. 조용해졌다. 모든 소리도 함께 나가버린 것 같았다. 남겨진 남자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벌건 국물과 기름기가 남은 냄비를 그대로 둔 채 방으로 돌아갔다. 보석함은 뚜껑과 몸통이 분리되었다. 쏟아진 예물들은 마치 흐트러진 뇌수 같았다. 아내는 아마 친정으로 갔을 터였다. 백금으로 맞춘 반지와 목걸이를 주워섬겼다. 팔찌를 쥐었을 때, 남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예물로 맞춘 장신구 중 아내가 가장 자주 차고 다닌 것이었다. 팔찌를 들여다보며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에 다투기 시작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보석함을 내려놓은 남자는 장롱을 뒤졌다. 찾아낸 상자를 열어 안에 담긴 편지들을 꺼냈다. 유물을 발굴하고 조사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완성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더군요.
내가 이렇게 썼던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던가. 곳곳이 비었습니다. 달콤한 말을 썼을 때의 제가, 들었을 때의 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알맹이가 없었어요. 다 조각나 있었어요.
허용택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전 언제부터 손에 잡히는 걸 집어던지기 시작했던 걸까요.
목적지까지는 몇 분 남지 않았다.
구석의 노인은 폴리 버튼에게 진상을 추리해 들려줄 뿐이었다. 명확한 물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다방에만 앉아 있는데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범인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애초에 노인의 추리가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노인은 폴리 버튼의 마음에 들 만한 매듭, 혹은 묵주를 하나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었다.
그거 가정폭력입니다. 주의하셔야 해요. 요즘 같은 때엔 특히.
허용택은 계속해서 남자를 향해 말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대체로 품는 불만이 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팔십 퍼센트가 종교를 믿어요. 선과 악은 단지 경계 앞에서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니,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놓으라느니, 그저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이렇게 말하는 종교를 그 많은 사람이 믿습니다. 하지만 범법자들을 용서하라고 하면 개중 대다수는 또 화를 벌컥 내죠.
말하는 내내 창밖을 보던 남자가 허용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눈빛을 느낀 허용택은 자신의 다짐에 담긴 숭고함을 돌연 알아차렸다. 승객은 승객이 되는 순간 승객일 뿐 무엇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허용택이 승객을 추리하는 순간 승객은 여러 승객 중 하나가 아닌 단 한 명의 의뢰인이 되었다. 단순한 문제의 반복 출제자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자 탐구 혹은 희구의 대상. 허용택에게는 놀라운 발견이었고 동시에 놀라운 자신감을 주는 깨달음이었다. 자신감으로 온몸을 채운 허용택이 의뢰인을 향해 말했다.
즉 용서해 주지 않는 게 불만이다, 이겁니다.
셜록 홈즈여, 보라. 비록 당신보다 느리더라도 나는 해냈다. 허용택은 자신의 말이 남자의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 굴러다니게 될지를 상상했다. 꽤 즐거웠다. 가학적 즐거움은 아니었다. 굴러다니던 콩이 묵주처럼 무사히 엮일지, 그냥 쥐구멍으로 들어갈지는 남자에게 달려 있으나, 허용택은 자신의 말이 남자에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씀 듣고 보니 신혼여행지를 다시 가는 게 좋은 결정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양도 의미도 잃은 파편 같은 것들은 버리세요. 그리고 새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저라면 그렇게 합니다. 사실 달리 방법도 없고요.
지금 보니 사진하고 별로 안 닮으셨네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남자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눈은 이미 아까처럼 밖을 보는 채였다.
차에 묵주도 거실 만큼 독실하신가 본데, 종교인은 쉽게 못 할 말을 하시고 말이죠.
제 말이 그랬습니까?
종교인에겐 논리가 필요 없으니까요. 그 필요 없는 논리를 열심히 구축해 가며 범죄자들 처지에서 생각하신다는 건, 글쎄요. 분명 마음이 아주 넓으신 거겠죠. 저기서 세워 주세요.
허용택은 몇 십 미터쯤 더 간 뒤에 차를 세웠다. 남자는 카드를 꺼내 허용택에게 내밀었다. 결제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안내음만이 차 안을 울렸다. 카드를 받아든 남자는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으려던 남자가 손을 멈추고는 말했다.
제가 당신이라면 그런 장난질은 당장 그만둘 겁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차 문을 세차게 닫았다. 차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묵주가 달각였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허용택은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남자가 탄 곳과 내린 곳은 며칠 전 허용택에게 콩, 너는 죽었다······ 라고 말한 꼬마가 제 엄마와 함께 타고 내린 곳 근처였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여자의 얼굴이 허용택의 머릿속을 스쳤다.
병신 새끼.
말을 마친 허용택은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다방 구석의 노인을 생각했다.
폴리 버튼은 다시 사건 취재를 나갔다. 노부인이 살해되고 팔백 파운드의 돈이 사라졌다. 현장에서 폴리 버튼은 경찰이 외면한 것을 찾았다. 창문을 고정한 끈의 매듭은 그녀가 어디선가 많이 본 형태였다. 정말이지 아름답고 정교한 매듭이었다. 폴리 버튼은 노인이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방으로 향했다. 피해자와 피의자의 관계는 둘 중 하나야. 전혀 모르거나, 아주 잘 알거나. 노인은 늘 다방에 있었다. 누굴 만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어쨌든 몇 번이나 노인의 추리에 기댔던 자신도 노인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인 앞에 앉고도 폴리 버튼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노인은 평소와 같았다. 가느다랗고 주름진 손가락이 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매듭을 하나씩 묶어 갔다. 여태껏 폴리 버튼이 본 어떤 것보다 복잡한 매듭이 만들어졌다. 폴리 버튼은 목을 아래로 구부린 채 말했다. 제가 당신이라면 매듭짓는 버릇은 그만두겠어요. 대답은 없었다. 한참 뒤 폴리 버튼이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사건 현장의 매듭이 노인의 매듭이란 보장은 없었다. 노인이 펼쳐 보였던 추리들이 진실이란 보장은 없듯이 말이다. 콩은 쥐구멍까지 들어가기에 죽음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허용택은 꼬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 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콩은요, 타작당하는 게 너무 싫어서, 차라리 쥐에게 먹히려고 구멍으로 들어간 거예요.
마침내 허용택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엉덩이에 땀띠가 돋고서는 이리 유쾌해 본 적이 없었다.



상호초등학교 후문

심주란은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슈팅! 하는 외침에 심주란은 부심처럼 깃대를 앞으로 내지를 뻔했다. 자가용 하나가 흠칫하며 속도를 죽였다. 심주란은 작은 동작으로 묵례를 보냈다. 다행히 골은 들어가지 않았다. 상파울루의 홈 경기여서인지 갈수록 코린치앙스가 밀리는 양상이었다. 서운했다. 갈수록 가려운 발뒤꿈치도 서운했다. 심주란은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목을 몇 번 꺾기도 했다. 시야 끄트머리로 가볍게 파손된 두 대의 차량과 무거운 표정의 두 사람이 스쳤다. 두 사람은 삼거리 한복판에 패한 팀 선수들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저들에 비하면야······. 심주란은 자신을 다독였다. 효과는 별로였다. 외려 어젯밤부터의 서운했던 순간들이 심주란의 머릿속을 스쳤다.
시작은 서운하지 않았다. 녹색어머니회 아침 교통정리 대행, 이만 원에 구해 봐요. 바로 옆 동네였다. 네 번째 면접 탈락의 위업을 거둔 심주란이 자신에게 건넬 위로의 치킨 값을 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위로부터 모자, 호루라기, 하늘색 정복 셔츠를 착용하고 하의는 검은색 정장 바지 혹은 치마에 구두. 고용주는 복장과 깃발과 이만 원을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 입어야 차들이 그나마 말을 들어요. 몇몇 주의사항이 이어졌다. 심주란은 연신 주억였다. 까만색 하의랑 구두는 있으시죠? 심주란은 믿어 보시라며 가슴을 두어 번 쳤다. 누군가의 취업 후기에서 보았다. 마지막 인사 전에 가슴을 쳐 보였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그 동작이 마음에 들었다더라고요. 고용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화가 잘 안 되냐고 물었다. 아무튼 아침에 한 시간 짬을 내는 거로 이만 원이었다. 심주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봉지에 담긴 녹색어머니회 정복은 경찰복을 닮으려다 말았다. 나름 귀여웠다.
무사히 돌아온 심주란은 첫 번째 서운함과 직면했다. 상파울루 FC와 SC 코린치앙스의 축구 경기를 깜빡했다. 취업전선의 최전방을 내달리는 한 명의 산업역군으로서, 내일의 텅 빈 일정을 고려하면 새벽을 견디며 코린치앙스를 응원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그랬었다. 갑자기 생겨난 일거리에 판단은 유보되었다. 심주란은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날 수 있겠냐고 자신에게 물었다. 회의적이었다. 돈까지 받아온 마당에 취소할 수는 없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끝에 심주란은 일어섰다. 통 쓰지 않았던 무선 이어폰을 충전기에 꽂아 두고, 옷과 깃발 등을 갈무리한 뒤 이불을 덮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난 심주란은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까만 하의를 입으라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챙 넓은 모자와 하늘색 셔츠 아래로 면접을 위해 산 검은 치마와 구두까지 갖추니 조금 더 경찰 같아 보였다. 근무지까지는 버스 두 정거장 거리였다. 걷기로 한 심주란은 집을 나서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즐겨찾기 목록에서 가장 최근 저장한 페이지에 접속했다. 새로이 알게 된 한 인터넷 방송인은 국내 매체가 중계권을 따내지 않은 해외 축구 리그 경기의 화면을 가져와 제 목소리를 입혀 송출했다. 심주란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저작권침해행위에 동조했다.
상파울루 대 코린치앙스 무편집 다시 보기 영상의 화질은 별로였다. 심주란은 볼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며 생방송 시청하는 기분으로 새벽 네 시의 경기를 즐겼다. 경기 결과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인터넷 방송인은 능변이었다. 원정경기를 온 팀답게 코린치앙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둘 놓았군요.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더라도 수비 시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중이 돋보이는 대목이죠. 최전방에는 빠른 선수들을 배치했고요. 아마 코린치앙스는 날 선 역습을 계획해 뒀을 겁니다. 말대로였다. 심주란이 도착할 즈음, 수세에 몰리던 코린치앙스는 상파울루의 측면 수비 실수를 틈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회심의 슈팅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다. 서운했다.
걸음을 멈춘 심주란은 한꺼번에 맞닥뜨린 서운함에 순서를 매길 수 없었다. 학교 후문과 연립주택 단지가 횡단보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연립주택 단지 쪽의 한 개 차선은 밤샘 주차된 차량으로 가득했다. 상당수는 출근으로 사라지겠지만, 아직이었다. 결과적으로 왕복 사차선 도로는 삼차선이 되어버렸다. 저편으로 연결된 삼거리 한가운데에는 두 대의 차량이 키스하듯 범퍼를 맞댄 채 멈춰 서 있었다. 정면충돌한 것치고 큰 사고는 아니었다. 곁에 선 두 명의 운전자 모두 말짱해 보였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심주란은 문득 느껴진 소양감에 지난밤 챙기길 잊은 물건을 떠올렸다. 발뒤축에 뭐라도 넣거나 붙여야 했다.
심주란은 구두를 벗었다.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가렵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물집이 잡힐지도 몰랐다. 발뒤축을 조심하며 구두를 신는 심주란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두드렸다. 심주란은 꺾일 뻔한 발목을 간신히 추스르고는 몸을 돌렸다. 자신과 비슷한 옷차림의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심주란은 얼른 이어폰을 뺐다. 아, 안녕하세요. 전 오늘 아르바이트로 왔어요. 말하고 보니 굳이 밝혔어야 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자신은 모로 봐도 초등학생 아이를 가진 학부모로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적어도 심주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신 것 같았어요. 원래 제가 교문 앞에 서기로 되어 있는데, 혹시 처음이시면······ 바꿔드릴까요? 말을 마친 여자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손목의 팔찌가 슬쩍 흘러내렸다. 심주란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가볍게 인사한 여자는 때마침 바뀐 신호를 따라 멀어져 갔다. 숨을 크게 내쉰 심주란은 깃발을 손에 쥐고 호루라기를 확인한 뒤, 이어폰을 도로 꽂았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는 여전히 중계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머잖아 심주란은 여자의 제안이 진심 어린 배려였음을 깨달았다. 코린치앙스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둘 기용했듯, 주택단지 쪽에만 둘을 배치하는 게 합리적인 전략일 것 같았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등학생은 물론 바로 근처 학교의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다수였다. 일터로 향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실종된 차선은 차가 빠져 봐야 한두 대여서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고지점은 다른 차들의 전진을 훌륭하게 방해했다. 적잖은 차량이 삼거리를 아등바등 돌며 경적을 울렸다. 주택가가 뱉어낸 사람들은 횡단보도로 몰려든 자동차에 질 수 없다는 듯 정체된 차량 사이를 파고들었다. 심주란을 알아주는 건 작달막한 아이들뿐이었다. 저학년일수록 심주란의 안내를 잘 따랐다. 이런 세계의 질서를 수호하는, 고아하고도 고단한 아르바이트라니. 돈을 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심주란의 눈은 신호등을 쫓고 손은 깃발을 휘둘렀으며 입은 호루라기를 불었다. 고단해질수록 발뒤축의 가려움이 점점 심해졌다. 이만 원과 이어폰만이 심주란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후반 종반에 이른 경기는 일대의 상황과 썩 어울렸다. 즉 답답했다. 코린치앙스를 응원하는 심주란 입장에서는 그랬다. 상파울루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었다. 일대의 상황과 어울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경기를 해설하는 인터넷 방송인은 축구에 해박했다. 그런데 그 해박한 지식을 뽐내느라 흐름을 놓치곤 했다. 화면을 볼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문제였다.
앞서 실수가 한 차례 있긴 했지만, 상파울루의 양쪽 측면 수비수, 사이드백 선수들이 굉장히 좋네요. 최근의 브라질 축구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창의성과 개인 기량을 바탕으로 선보였던 공격의 화려함, 어찌 보면 화려하기 위한 공격을 펼치던 경향이 줄었죠. 대신 유럽의 체계 잡힌 전략, 전술적 유행을 따르려 합니다. 지금의 상파울루를 설명하려면 사이드백의 진화 과정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네요. 사이드백은 과거 좌우 측면 후방에 박혀 수비에만 몰두했었지요. 점점 전진하면서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라운드 중앙까지 짓쳐들어옵니다. 허리 싸움에 가담하고, 패스할 길을 열고, 공간을 만들어요. 이건 뭐 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했다고 볼 수 있······.
심주란은 자신이 듣는 게 경기인지 강의인지 헷갈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때 사이드백은 선수들이 제일 꺼리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근래 이적 시장은 달라진 세태를 확연히 반영했다. 역사상 가장 비싼 사이드백 열 명 중 다섯 명이 이번 여름 이적 시장에서 탄생했다. 스스로 어떻게 뛰어야 할지 아는 사이드백 선수는 유수의 구단이 탐을 냈다. 심주란은 고개를 떨궜다. 정장 치마와 구두가 보였다. 취업전선의 최전방이 아니라 그라운드의 최전방이었다면 심주란도 스스로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축구의 전략, 전술은 각 위치의 선수들이 다른 동료들과 어떻게 더 효율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가를 늘 염두에 두고 발전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수십 년 단위가 필요한······ 골! 심주란은 깃발을 놓칠 뻔했다. 이 망할 인간은 공이 문전 앞에서 도는데도 상황을 전달하기는커녕 강의만 해대고 있었다. 심주란은 주머니를 뒤졌다.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이어폰이 조용했다. 액정 화면에는 이 동영상은 저작권 침해 신고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라는 문장뿐이었다. 후반전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골로 승부가 갈릴 가능성이 컸다. 심주란은 경기 결과를 찾아보려 했다. 어디선가 고성만 들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사고현장 쪽이었다. 참패한 팀 선수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삿대질을 벌이고 있었다. 심판 판정이 애매했거나, 상대 선수의 플레이가 너무 거칠었다면 경기 후에 언쟁이 이는 일은 흔했다. 문제는 경기장 안의 다툼이 밖으로 번지는 경우였다. 밖에서의 갈등은 주로 관중들의 몫이었다. 서넛의 싸움이 수백의 교전으로 불붙기도 했다. 물론 삼거리의 두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저 몇몇이 눈을 흘길 뿐이었다. 심주란도 가는눈을 떠가며 두 사람을 보았다. 손가락을 따라 춤추는 두 입술이 구수한 육두문자를 연신 조립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지나치는 차량의 소음, 친구를 만난 아이들의 말소리도 귀를 막은 이어폰에 흐릿했으니 그럴 만했다. 심주란은 실없이 웃었다. 그 인터넷 방송인이 눈앞의 현장을 봤다면 아마 이랬을 것이다.
두 차량을 보세요. 유려한 곡선의 하얀 슈퍼카와 얼룩말 무늬같이 생채기가 난 검정 승합차군요. 꼭 지금 경기 중인 상파울루와 코린치앙스의 유니폼 같네요. 같은 연고지의 두 팀이지만 저 차들만큼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상파울루는 도시 상류층의 지지를 얻어 삼십년대에 이미 팔만 석 이상 규모의 경기장을 지었어요. 반면 코린치앙스의 주요 팬 층은 노동자들입니다. 인기는 많은데 홈구장은 낙후되고 수용 인원도 적어서, 다른 구장을 빌려 홈경기를 치르곤 했죠. 코린치앙스 팬들은 상파울루 팬들에게 너희는 경기장도 없냐는 비아냥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최근에야 월드컵을 치르고자 브라질 정부 측이 나서서 경기장 개수를······ 헛소리 말고 중계를 해봐, 좀.
심주란은 이어폰을 잡아 뺐다. 무심코 올려다본 햇빛은 퍽 예리했다. 일을 마치고 경기 결과를 찾아봐도 괜찮을 듯했다. 쭉 서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비틀던 심주란이 신음을 흘렸다. 발뒤꿈치의 가려움은 이제 아픔이 되어 있었다. 입술을 일그러뜨린 심주란을 향해 건너편 여자가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었다. 손목의 팔찌처럼 새하얀 미소였다. 심주란은 힘겹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자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주란은 억지 미소를 얼굴에 남긴 채 옆을 돌아보았다. 손을 든 아이 하나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와 심주란은 거의 동시에 손을 숨겼다. 자신이 녹색어머니회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은 심주란에게 아이가 말을 걸어 왔다.
아줌마······ 가 아니네요. 알아줘서 고마워. 눈물 날 것 같네. 근데 왜 이걸 해요? 일이야. 돈 벌어서 너희 어머니 팔찌 같은 예쁜 것 좀 사려고. 우리 엄마는 돈 안 받는 것 같던데요. 그건 건너가서 여쭤 봐. 저분이 너희 어머니 맞지? 네. 미인이시네. 피부도 고우시고.
심주란은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물었다. 민망함을 극복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심주란은 아이가 더 말을 걸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호등이 푸르게 변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이는 심주란의 마음을 읽은 듯 대화를 이었다.
저 사람들은 왜 싸우는 거죠? 차들이 키스해서 그래. 꼭 엄마랑 아빠 같네요.
아무렇게나 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심주란은 아이가 떠올린 것이 키스 쪽인지, 싸우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함부로 전진했다가 뒤쪽 공간을 내주고 만 사이드백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심주란은 새삼스레 사위를 살폈다. 낮은 연립주택 쪽과 달리 건너편은 장쾌했다. 학교 저편까지 빼곡한 건물들은 마주하거나 등지며 서로를 떠받쳤다. 주택가에서 학교로, 그리고 건물로 향하는 사람들의 흐름이 왠지 낯설었다. 한 시간 가까이 봐온 모습이 생경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네 번째 면접 탈락을 안겨 준 기업의 간판을 발견한 탓이라고 심주란은 생각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정답인 것 같으면 엄마한테 말해서 저 팔찌 하나 줄게요. 우리 엄마, 똑같은 게 두 개거든요. 아빠가 얼마 전에 비행기 표랑 같이 사왔어요. 여행 가나 보다. 좋겠네. 네, 내일 괌에 가요. 재밌게 잘 다녀와.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거죠?
심주란이 네 번째 면접에서 탈락한 이유는 늦어서였다. 옆 동네의 커다란 건물인 만큼 쉽게 찾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심주란은 큰 건물만 바라보며 걸었다. 처음 보는 골목을 몇 차례 만난 심주란은 그제야 자신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휴대전화로 길을 찾아보았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면접이 시작된 뒤였다. 결국 탈락을 안겨 준 것은 심주란 자신이었다.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던 심주란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길이 덜 든 구두를 신고 가려움에 몸부림치는 발이 보였다. 심주란이 아직도 브라질 프로축구를 챙겨보는 이유는, 체계적이고 잘 짜인 전술로 승리만 목표로 삼는 유럽 축구보다, 개개인의 창의성으로 화려하기 위해 공격하는 정통 브라질 축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죽어라, 상파울루. 차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를 향해 심주란은 입을 열었다.
그건,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하는 거야.
그렇군요.
한 마디를 남기고 아이는 걸음을 옮겼다. 심주란은 뒤늦게 깃발의 방향을 바꾸려다 몇 발짝 멀어진 아이를 불러 세웠다. 아이에게 다가선 심주란은 한 손으로 깃발을 내밀어 차량의 움직임을 막고, 남은 한 손으로 열려 있는 아이 책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언뜻 보인 가방 속에는 공책 몇 권과 어린이용 가위가 들어 있었다. 아이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심주란에게서 멀어졌다.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건너편에 도착한 아이는 여자에게 뭔가 말을 건넸다. 여자는 이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이의 머리를 세심히 쓰다듬었다. 제 엄마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아이는 기울어지는 그림자처럼 교문 너머로 스르르 사라졌다.
아홉 시가 되자마자 심주란은 횡단보도를 건너가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는 사거리를 가리키며 저 사고 탓에 더 힘든 날이었다며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제 팔찌 하나를 그쪽한테 주면 안 되겠냐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심주란은 되는 대로 얼버무렸다. 갈 때는 택시를 타도 치킨값은 충분하다는 생각만 났다. 심주란을 가만히 쳐다보던 여자는 살포시 웃으며 그럼, 하고 몸을 돌렸다. 돌아서 걷는 여자의 팔 끄트머리에 심주란은 시선을 빼앗겼다. 어쩌면 행복은 저 여자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심주란은 생각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저쪽 사고에 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심주란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온 사람을 훑어보았다. 보험조사원 같았다. 일대의 교통체증에 출동이 늦은 듯했다. 그래도 너무 늦었다. 심주란이 도착하기 전에 일어난 사고였다. 공교롭게도 양측 차량 모두 블랙박스가 고장이라 큰일이라고 보험조사원은 말했다. 심주란은 경기 결과를 찾아보고 싶었다. 마지막 골의 주인이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심주란의 입은 자신이 목격자라 말하고 있었다. 이어폰은 주머니 속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누군가의 해설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상파울루와 코린치앙스의 대결 같은 더비 매치는 늘 뜨겁습니다. 오죽하면 관중들이 폭력이나 총기사건을 수시로 일으켜 서로를 다치거나 죽게 만들곤 하죠. 심할 때는 그날의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축구 경기 때문에 사망한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하나뿐이겠죠. 자신이 응원하고 싶은 쪽을 응원하는 것. 어느 쪽을 응원할지, 당신은 정하셨나요?
심주란은 가슴을 두어 번 쳤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결정했다.



오션 프런트 프리미어 룸 309

아이의 눈썹에 가녀린 빛줄기가 닿았다. 가위를 내려놓은 아이는 손차양을 만들며 창밖을 보았다. 밤새 모질게 내리던 비는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햇빛에 어둠은 수평선부터 아이 쪽으로 여유롭게 물러나고 있었다. 저 또한 되돌아올 걸 아는 것 같았다. 아이는 아랫입술을 살짝궁 내밀었다. 아무래도 저 태양은 어젯밤의 폭우를 기억하는 듯했다. 또 비가 올지 모른다며 겁먹은 모습이었다. 덕분에 빛과 어둠의 진퇴는 느렸다. 지독히도 느리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한숨을 쉰 아이는 밤새 켜두었던 스탠드를 껐다. 그리고 줄곧 만지작거리던 작업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분, 취미라는 건 간단히 말해 내가 좋아하는 행동이에요. 즐기고, 웃으며 할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은 산에 올라가는 게 취미거든요. 좋으니까 힘들었던 것도 잊고 또 하게 되고요. 여러분 각자, 자신만의 취미를 발표해 볼까요? 아이는 노래하는 것도,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도, 피아노를 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취미라 할 것이 숫제 없진 않았다. 단 아이의 취미를 취미라 부르려면 취미란 단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재정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아이는 어린아이 특유의 과단성으로 재정의를 망설이지 않았다.
저의 취미는 자르는 것입니다. 재밌지는 않아요. 힘도 들고요. 가위로 선을 따라 종이를 오리다 보면 배가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 선을 침범해 버리면, 손가락이 엇나가면······ 하는 생각에 배가 막 간지러워요.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을 때처럼 괴로운 건 아니고, 벅벅 긁는다고 시원해지는 것도 아닌데, 간지럽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간지러워서 힘든 건지, 힘들어서 배가 간지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하다 보면 힘든 걸 잊게 돼요. 그래서 전 집에 있는 것들을 잘라요. 자를 수 있는 것 중 잘라도 혼나지 않을 만한 것으로요. 이것도 취미 맞죠?
아이의 마지막 질문은 선생님을 향했다. 선생님은 그날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침대 쪽으로 걸었다. 바다로부터 밀려온 어둠 탓에 침대 위의 엄마는 윤곽만 흐릿했다. 아이는 모로 누운 엄마의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멍이 든 곳은 베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의 코 밑으로 손을 뻗었다. 숨이 가늘게 나들며 아이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손을 거둔 아이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동시에 엄마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자세를 바꿨다. 아이와 엄마는 어찌 누웠다가도 잠결에 엎드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엄마는 잠을 자주 설쳤다. 닮은 것은 더 있었다. 임신 후 찾아든 변비에 엄마는 힘들어했다. 아이는 그래서 자신도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는 거라 믿었다. 이제는 부서진 조각처럼 남았지만, 부른 배를 안고 변기에 앉아 울먹이던 엄마를 아이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아이는 엄마 배 속에 머물렀던 시절 중 기억나는 것들을 자주 이야기했다. 그즈음의 이야길 할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즐거워해서였다. 되게 비좁았어. 다리를 펴고 싶었는데 꾸물꾸물밖에 못 했어. 엄마와 아빠는 환히 웃었다. 둥글게 생긴 계단을 올라가는데 숨이 찼어. 도무지 끝이 안 나서, 힘들어서 더 움직이지 말라고 엄마 배를 찼어. 미안해.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때로는 아이가 했다던 이야기를 거꾸로 들려주기도 했다.
공항에는 한국문화박물관이 있었어.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엄마와 아빠는 거기 들렀어. 결혼식이 워낙 정신없었기에 살짝 지치고 예민했지만, 엄마와 아빠는 거기 있는 유물들을 둘러보며 그날 처음 맘 편히 키득거렸지. 전부 복제품뿐이었어. 석가탑 복제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설펐고. 그런 가짜 중에······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죄를 없애는 방법을 설한 불교 경전이란 게 있었어. 엄마와 아빠는 그 앞에서 서로에게 지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로 했어. 별것 아니었어. 그냥 둘 다 작은 실수 때문에 거짓말을 한 거였어. 아주 사소한 실수고, 거짓말이어서 서로를 탓하기는커녕 웃고 말았었지.
이야기를 마친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태아적 일을 기억한다는 게 대단히 신기하다고 덧붙였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공항 박물관에서의 일을 그렇게 기억한다는 게 대단히 신기했다. 자신이 어찌 말했었나 돌이켜도 회색의 안개를 휘젓는 기분만 들었다. 그나마 확실한 한 가지는, 죄를 없애는 방법을 설해 놓은 유명한 불교 경전이라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 경전의 이름은 학급문고에 꽂혀 있던 책을 통해 알았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앞에 선 모습을 기억하는 대로 떠올렸다. 가장 큰 아쉬움은 두 사람의 얼굴과 몸에 낀 안개가 유독 진하다는 점이었다.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었다. 분명 둘 중 한 사람은 죄를 없애는 방법이 적힌 경전 앞에서 휴대전화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호텔 예약이······ 날짜가 잘못됐어.
한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건 아무 생각 없이 휴대전화로 예약확인서를 열어 본 덕분이었다. 다른 한 사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액정 화면을 훑었다. 정말이었다. 도착일보다 하루 뒤부터 숙박이 잡혀 있었다. 한 사람은 가까운 벤치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몸을 숙였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모습을 향해 더디 걸었다. 발을 멈춘 한 사람은 손을 제 머리보다 높이 들었다. 마치 몸을 숙인 사람의 뒤통수를 내리후릴 모양새였다. 숙였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 다른 한 사람의 손은 숙였던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느 사람의 손목에 백금 구슬 팔찌가 있었는지도 희미했다. 아이는 이번에도 떠올리지 못했다. 팔찌를 직접 보면 혹 생각날까 싶어 아이는 엄마의 손목을 살폈다. 그리고 빈 한쪽 손목을 발견했다. 고개를 갸웃한 아이는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더블 침대 밑과 커다란 옷장, 이인용 소파, 휴대용 수납장과 커튼 밑, 변기 뚜껑까지 열어 가며 찾았으나 어디서도 팔찌는 보이지 않았다. 잘려 나간 엄마의 머리카락만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안개 속을 헤치는 기분을 느끼며 아이는 발을 멈췄다. 어느새 아이는 밤새 작업했던 테이블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밖으로 한 사내의 모습이 아이의 눈에 비쳤다. 리조트에 막 왔을 때 이상한 발음의 한국어로 아이를 웃겼던 사람이었다. 그때 본 가슴의 명찰에는 조시······ 뒤는 읽지 못했다. 조시로 말하자면, 아빠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자신을 두고 달려 나갔던 엄마를 방에 데려왔고, 가장 빠른 한국행 항공권을 두 장 예약해 줄 테니 엄마가 깨어나면 전하라고 어떤 한국인 아저씨를 통해 말해 주었으며, 돌아온 아빠가 방문 너머에서 질러대던 고함이 점점 작아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아이는 자신이 조시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조시는 멀끔히 정돈된 정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자세가 어딘가 특이해서 아이는 조시를 차분히 응시했다. 보아하니 휴대전화를 귓가에 댄 채였다. 바다를 등진 탓에 얼굴은 역광에 가렸다. 검붉은 아침 햇빛 속에 숨은 것은 정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빛살이 하얗게 투명해지면 하늘로 뻗도록 손질된 제 몸을 마음껏 드러낼 터였다. 나무들 사이를 가로지른 조시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렸지만, 아이로서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행복한 기분일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아이는 조시의 뒷전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별안간 돌아선 조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멀어지는 조시를 좇으려는 듯 창틀 너머로 조금씩 상체를 내밀었다. 몇 걸음 안 가 멈춰 선 조시는 바다를 향한 채로 야트막한 나무 곁에 섰다. 아이는 내뻗었던 제 몸을 되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한 곳에 박혀 있었다. 조시가 돌아선 순간부터 보였던, 몸에 가려져 있던 반대쪽 손, 정확히는 손목이었다. 아이에게는 매우 낯익은 팔찌 하나가 조시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크기가 맞지 않아 팔찌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했다. 가장 빠른 한국행 항공권 두 장의 값을 아이는 가늠하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가 정신을 잃기 전 팔찌로 비용을 치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는 고민을 끝냈다.
여전히 통화 중인 조시는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 선 채였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알아채긴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는 볼 수 있었다. 리조트 여직원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 조용하고도 느린 걸음 탓인지 풍만한 살집이 더욱 눈에 띄었다. 물론 아이는 여직원의 몸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이의 시선은 여직원의 오른손에만 머물렀다. 뭔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얼핏 봐선 자신이 밤새 쥐고 있던 것과 비슷한 물건 같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다만 플라스틱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래선지 볕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여직원의 손을 살피던 아이는 어언간 맑아진 햇빛에 조금 놀랐다.
뻗어난 나무들은 어젯밤의 비 덕분인지 제각기 탐스러운 과실을 꿰차고 있었다. 몇몇 열매는 설익은 빛깔로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껍질이 깨지거나 벗겨진 것도 왕왕 보였다. 어느 껍질이 어느 열매의 것인지 불분명했다. 멀쩡한 열매 하나가 여직원에게 밟혔다. 둔탁한 파열음에도 조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못 박혔던 여직원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의 거리는 겁먹은 태양과 느긋한 어둠의 진퇴처럼 좁혀졌다. 아주 느렸다. 동시에 빠른 듯도 했다. 속살이 드러난 열매를 보며 아이는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탔던 때를 떠올렸다. 콩, 너는 죽었다······. 콩을 타작하는 이유는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였다. 타작하고 타작하면 알맹이는 분리된 껍질과 섞여 나뒹굴 테고, 더 타작하다 보면 어떤 알맹이는 속이 빈 껍질에 쏙 들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서로의 껍질을 바꿔 쓰는 콩들도 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와 자신의 기억이 달랐듯이. 콩이 쥐구멍으로 굴러가는 진짜 이유는 그게 싫어서일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니잖아, 라면서.
청명해진 하늘로부터 비행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일은 없어요. 사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취미를 발표했던 날 저녁, 집으로 전화를 건 선생님은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를 캐물었다. 가위로 뭔가를 끊임없이 자르는 행동은 정서불안 증세의 일종일 수 있다고도 말했다. 엄마는 그날 아이를 안고서 아빠 앞에서는 가위로 뭔가를 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선생님의 상관은 그렇다 쳐도, 아빠까지 상관하는 것을 엄마는 견딜 수 없어 하는 듯했다. 그래서 아이는 가위를 쥐고 싶을 때도 아빠가 눈을 뜨고 있으면 참았다. 아이는 조시의 손목을 다시 쳐다보았다. 차라리 횡단보도에 섰던 누나에게 주는 게 나았을 테다. 참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포옹하다시피 가까워진 저 두 사람은 어떨까. 밤새 내린 비와 투명해진 햇살을 머금고 싱그러운 쪽빛을 피워 올리던 야트막한 나무 한 그루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이는 검붉었던 역광을 떠올리며 창문을 닫아걸었다. 걸쇠를 놓지 않은 아이의 눈길이 침대 쪽을 향했다. 창문이 닫히는 찰나 설핏 들려온 기척은 아득해서 어젯밤 방 안을 채웠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손에 힘을 뺀 아이는 어젯밤처럼 쪼그려 앉았다. 잠시 그렇게 했다. 이윽고 아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창문 너머는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이 밤새 작업한 결과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껍질 같았던 오대양은 사라지고 육대주만 남은 세계지도였다. 육대주는 서로의 굴곡을 채우며 둥글게 붙어 있었다. 하나가 된 땅덩이 위로 포근한 빛줄기가 쌓였다. 한참을 절벽처럼 멈춰 섰던 아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빛발에 젖은 아이의 손이 여린 속살을 긁적였다.
















원재운

작가소개 / 원재운

2016년 신춘문예에 「상식의 속도」로 초출.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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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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