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호텔 해운대

  • 작성일 2019-10-01
  • 조회수 3,184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단편소설」



호텔 해운대



오선영





KBS 라디오 문학관 방송듣기
? KBS 라디오 문학관에서 오디오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저희가 들려드리는 노래를 잘 들으시고 특수효과음 자리에 들어갈 단어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은 문제이니 귀 기울여서 들어주세요.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신 분 중 열 분을 뽑아 모바일 커피음료권을 보내드리구요, 특별히 한 분에게는 특급호텔 숙박권을 드립니다. 뽀송뽀송한 침구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 마시는 모닝커피 한 잔, 상상만 해도 기분 좋으시죠?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세요. 자, 음악 나갑니다."
아침 방송 디제이의 달콤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나운서 출신의 진행자는 정확한 발음과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로 수많은 고정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옆집 언니처럼 사근사근하면서도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적당히 지적으로 보였다. 가끔씩 멘트 실수를 하거나 광고를 잘못 보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럽게 승화시켰다.
음악퀴즈가 나오면 지각이다. 라디오 방송은 보지 않아도 되는 시계와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광고가 나오고 음악이 흐르며 게스트가 등장했다. 엄마는 왜 아침부터 시끄럽게 라디오를 켜놓았냐며 잔소리를 하지만, 수정에게 그것은 출근준비를 안내하는 사내방송과 같았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땡땡땡 푸른 밤 그 별 아래······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땡땡땡 푸른 밤 하늘 아래로."
노래가 나온다. 익숙한 멜로디에 수정은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떠나요오, 둘이서어 모든 거얼 훌훌 버리고오~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에~ 수정은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올리다가 스마트폰을 찾아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정답 제주도! 언니 제주도 가고 싶어요. 회사 생활에 찌들어 있는 직장인에게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밤하늘을 보여주세요. 제발요!〉
수정은 이전에도 라디오방송에 사연과 퀴즈 정답을 보내 당첨된 일이 있었다. 모두 지역방송사의 프로그램이었다. 청취자가 한정된 지역프로그램은 참가하는 사람이 적었고, 그만큼 퀴즈 당첨확률이 높았다. 특급호텔 숙박권, 대형 전자제품만큼 값이 나가는 상품은 아니어도 지역 소극장 관람권이나 새로 생긴 해수탕 입장권, 특정 시기에만 구입할 수 있는 햇과일 등은 실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디제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음악이 나가는 동안 많은 분들이 답을 보내주셨는데요. 퀴즈 정답은 바로 '제주도'였습니다. 1988년 발표된 최성원 씨의 곡을 2004년 성시경 씨가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들으셨어요. 모바일 커피음료권을 받으실 분은요,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가 2057, 6737 분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정리해서 게시판에 올려놓을 테니 확인해 주세요. 자, 대망의 특급호텔 숙박권을 받으실 분은 두구두구두구 바로오오 휴대전화 끝자리 5136분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5136은 수정의 휴대전화 끝자리였다. 가운데 네 자리가 다르지 않다면 호텔숙박권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인 것이다. 노란 블라우스에 오른팔만 끼운 채 수정은 트램펄린 위의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지각은 생각나지 않았다. 제주도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갈매기, 해변을 따라 늘어선 아기자기한 카페들, 챙이 넓은 모자와 커다란 꽃무늬가 프린트 된 빨간 원피스, 테가 동그란 미러선글라스가 수정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쇼퍼백을 들고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15인치 캐리어를 꺼내 공항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이 전부인 부장은 이번 달에만 수정의 지각이 세 번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 아이나 몸이 아픈 시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지각을 자주 하냐고 빈정거렸다. 그 말은 수정에게 하는 동시에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한 최 디자이너를 겨냥한 문구이기도 했다. 부장은 출판사 발전에 여직원들이 도움 되는 일이 없다며 여사원과 남사원 간의 임금 차등을 주장했다. 제 부인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몸이 아픈 조부모를 간병했기 때문에 자신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수정은 담임선생에게 혼나는 중학생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부장이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만이 이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괜찮나?"
옆자리의 최 디자이너가 말을 걸었다. 자신은 너무 많이 겪은 일이어서 이제 익숙하다며 수정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수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각을 한 건 제 잘못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지각과 맞바꾼 제주도 특급호텔 숙박권이 있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덧붙이고 싶었다. 신라호텔? 롯데호텔이나 해비치호텔인가? 특급호텔이면 5성급 호텔임이 분명한데······. 혀끝을 간질이는 초콜릿 같은 단어들을 애써 입속으로 삼켰다. 달콤한 호텔들이 초콜릿 속에 박혀 있던 알사탕처럼 녹지 않고 남았다. 색색깔의 사탕알갱이가 입안을 굴러다녔다. 수정은 혓바닥 위에 사탕을, 아니 호텔을 올려놓고 천천히 녹여 먹었다. 아이스커피 속의 각얼음을 깨물듯 아삭아삭 소리 내는 법이 없었다. 선홍색 혓바닥이 주황색, 보라색, 연두색으로 물들자, 텀블러 가득 생수를 받아 꿀꺽 하고 삼켰다. 수정의 유일한 입사동기이자 밤 수유에 시달리느라 다크서클이 점처럼 짙어진 최 디자이너에게 제주도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였다.


작은 회사였다. 사장을 포함해 전 직원 7명뿐인 부산의 작은 출판사였다. 수정의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우와, 출판사 다니면 책 많이 읽으시겠네요? 저처럼 책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재미있는 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열 명 중 여섯, 일곱 명이 동일한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수정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화학회사 직원은 화학물품 좋아하고 파스타집 알바생은 삼시세끼 파스타만 먹어요? 라고 역질문을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묻는 사람들이 그녀의 직업과 '책'에 대한 호기심, 일종의 좋은 의미의 관심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책이란 물품에 대한 인식이 '돼지국밥'이나 '웨지힐'과 같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기에 수정은 대형 인터넷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목록에 있는 책 제목들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줄줄 읊으며 상대의 호의에 응답했다.
부산에 출판사도 있어요? 출판사는 다 서울이나 파주에 있는 줄 알았는데.
두 번째로 많이 듣는 말이었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출판사와 작가 이름을 따져 가며 책을 샀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은 알람서비스에 맞춰 초판을 구매했다. 특정 출판사의 북클럽에 가입하고, 분기별로 뽑는 서포터스에 지원했다. 회원들에겐 책보다 예쁘고 눈길을 끄는 굿즈들이 메인상품처럼 따라왔다.
수정은 두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어색하게 웃었다. 첫 번째 질문을 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지만 입 꼬리를 활짝 당겨서 웃었다. 앞선 질문이 그녀의 직업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뒤의 물음은 그녀의 직장을 얕보거나 무시하는 의미로 들리기도 했다. 마치 회사라면 삼성이나 현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듣보잡' 회사가 있었나, 라는 식으로. 콜라는 코카콜라와 펩시만 있는 줄 알았는데 815콜라라는 것이 있었냐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수정은 지역문화예술계의 상황과 작은 출판사의 중요성, 문화의 획일화와 대형화에 저항하기 위한 여러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필요성과 중요도에 대해 말하곤 했다.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추면서, 때론 상냥하고 다정하게, 어느 구절에선 웅변조로 장엄하고 강단 있게. 질문보다 몇 배나 긴 답변이 기차에 매달린 화차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대답을 들은 질문자는 갸우뚱하던 표정을 고치고 수정의 말에 수긍했다. 수정은 질문자의 변화된 태도를 보며 뿌듯해하다가, 문득 회사명 하나로 제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화차가 없어도 기차 이름을 알 수 있는 KTX처럼, 명함 한 장으로 더 이상의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그러니까 이 땅의 콜라 역사를 바꾸기 위해 태어난 815콜라의 가치와 의의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815콜라가 코카콜라나 펩시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실 수정도 처음에는 두 번째 질문자들과 같은 질문을 했었다. 지역 국립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 학생이던 수정은 전공을 살려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방대학교 인문대학 출신의 이력을 가지고 전공을 살리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그나마 학과에 맞춰서 직업을 구하는 건 교직이수를 해서 국어과 임용시험에 통과하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영학과, 경제학과 복수전공을 하면서 취업준비를 하거나, 일찌감치 학과공부는 접어두고 9급 공무원 시험에 집중했다.
그렇기에 수정은 전공과 유사한 계열에 취업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동기들은 낙타 등에 앉아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한 그녀를 부러워했다.
"운이 좋았지, 뭐. 니도 잘 될끄야."
수정이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비록 전 직원이 7명뿐인 소규모의 출판사지만 '편집자' 혹은 '에디터'로 불리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동경하던 작가를 대면하고, 취미였던 독서가 밥벌이가 되었으며, 모니터 속의 활자들이 물성을 지닌 책으로 나오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수정이 막연하게 꿈꿔 온 일이었다. 20대의 남은 희망사항이라면 박봉의 월급이 오르고 야근수당이 나오는 일, 그리고 오랜 연인인 민우가 취업에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스마트폰 액정 위로 '02'로 시작되는 전화번호가 떴다. 수정은 스팸전화나 광고인 줄 알고 빨간색 거절 버튼을 눌렀다. '051'로 시작되는 지역번호, '010'이 달린 휴대전화 번호가 아닌 곳에서 전화가 오는 일은 잘 없었다.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조용히 화장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당신의 아침 구성작가입니다. 휴대전화 뒷자리가 5136분 맞으시죠?"
수화기 건너편에서 정확한 표준어 발음이 들렸다. 출판사 합격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정은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잡고 공손하게 답했다.
"네에."
구성작가와 대화를 할수록 자신의 부산사투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어쩜 저렇게 정확하고 깔끔하게 표준어를 구사하는지. 내용물보다 포장지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처럼 그녀는 구성작가의 발음과 억양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구성작가를 따라서 말끝을 살짝 올려 대답했다. 수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겐 똑같은 '부산사투리'로 들릴 테지만 말이다.
"〈호텔 해운대〉, 일박 숙박권이구요. 원하시는 날짜와 요일은 호텔 고객센터로 직접 연락하셔서 예약하시면 됩니다. 2인 조식 포함 상품이며 수영장을 포함한 부대시설은 따로 계산하셔야 해요. 차액을 지불하시면 룸 업그레이드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저기, 작까님. 제주도가 아니라 해운대요?"
설명을 듣고 있던 수정이 말꼬리를 싹뚝, 자르며 물었다. 그 바람에 리드미컬한 부산 억양과 센 발음이 날것으로 드러났다.
"네, 청취자님.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특급호텔 〈호텔 해운대〉 숙박권입니다."
그러니까, 특급호텔이란 게, 제주도가 아니라 부산 해운대란 말인가! 수정은 앞장과 뒷장을 바꿔 책을 출판했을 때처럼 머리가 띵, 하고 아파 왔다. '제주도의 푸른 밤'을 실컷 틀어 놓고 해운대 호텔 숙박권을 주다니. 청취자를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니 방송국 놈들 이상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전화를 끊고도 수정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콜릿 호텔이 염전 위의 소금이 되어 입속을 굴러다녔다. 짜고, 짜고, 짠맛. 혓바닥의 짠맛이 입천장과 잇몸, 사랑니까지 구석구석 들러붙었다. 입안이 소금강이 될 듯해서 그녀는 종이컵에 믹스커피 두 포를 뜯어 부었다. 달고 느끼한, 무게감 있는 액체로 소금들을 덮어버려야 했다.



*


화요일, 수요일 연차를 내었다. 지난주에 수정이 편집 담당을 했던 단행본이 무사히 출간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는 편집부장의 육촌의 아는 이웃이라는 60대 수필가였다. 부장은 수정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교정을 보고 피드백을 하라며 당부했다. 책은 작가의 인생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잠언록을 가장한 인생 성공기였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마음을 비웠다, 울적한 날에는 아내와 함께 홋카이도 노천온천에 몸을 뉘었다, 다정한 이웃과 함께 18년산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와 같은 문장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종이를 좀먹고 있었다. 이런 책을 사 보는 사람이 있기나 하나, 싶었지만. 금요일에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정도로 책이 팔렸다. 그들이 책을 끝까지 정독할지는 의문이지만.
물론 수정이 담당했던 모든 책들이 저와 비슷한 건 아니다. 지역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의 첫 시집은 정말 좋아서 책장을 넘기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사려 깊으면서 유머와 재치를 겸비한 시편들은 기존의 시 문법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수정은 그즈음 만나는 지인들에게 박의 시집을 추천하고 다녔다. 하지만 작은 출판사의 재정상 대형 광고와 홍보를 하기 어려웠고, 인맥도 학맥도 쑥맥인 박의 시집은 물류창고 구석에 박스째 놓여 있어야 했다.
어쨌든 부장이 신경 쓰던 잠언록이 잘 나왔고 수정은 연차를 낼 수 있었다. 민우는 주말도 아닌 어정쩡한 화, 수요일에 호텔을 꼭 가야 하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수정은 그의 뜻을 이해하지만 주말은 추가요금이 있다고 설명했다. 택시 할증료만큼 두려운 '추가요금'이라는 단어 앞에서 민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디데이가 잡혔다. 수정은 주말 내내 '호캉스'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제주도가 아니어서 잠시 실망했지만, 공짜로 〈호텔 해운대〉 숙박이 어딘가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수 있으니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수험생인 민우에게도 큰 무리가 없을 듯했다. 생각해 보면 수정은 부산에서 28년째 살고 있지만 해운대 특급호텔에서 자본 적이 없었다. 피서철 해운대 앞바다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해운대 겨울바다를 찾은 일 또한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듯 그렇게 해운대를 찾았다. 부산의 북쪽에 있는 수정의 집에서 해운대는 너무 멀었다.
서울로 대학을 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이런 대화를 했었다.
"니 가로수길, 이태원 가봤나? 평창동은?"
"그게 어딘데."
"니는 그것도 모르나. 왜 미니시리즈 보면 남녀 주인공이 가로수길에서 브런치 먹으면서 데이트하잖아. 주말연속극에서는 평창동입니다, 하고 전화 받고. 서울 사람들은 다 그기 가는 줄 알았는데."
"몰라. 내는 학교랑 기숙사만 왔따 갔따 한다. 술도 학교 앞에서만 마시고. 강남 한 번 가봤는데 정신이 없더라."
"그게 뭐꼬? 서울 가면 좀 다를 줄 알았더니. 벨로네."
"뭐라카노, 니는 부산 산다고 맨날 회 처먹고, 밀면이랑 돼지국밥 먹다가 시원소주 마시면서 롯데 응원하고, 해운대 가서 바다수영하나."
"그게 뭐꼬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야."
수정이 손사래를 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내가 부산이 고향이라니까, 꽈선배들한테 이 질문을 을매나 받는지 아나. 창문만 열면 바다 보이는 줄 안다니까. 그니까 니도 그딴 거 묻지 말라꼬."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친구는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산, 해운대, 회, 밀면, 돼지국밥, 롯데.
친구와 헤어지고 수정은 두 사람이 나누었던 단어들을 다시 불러내 보았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의 추억처럼, 부산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낱말들을 별 하나마다 짝짓기 하였다. 그것들은 제게 무척 익숙하고 낯익은 것이면서, 낯설고 먼 것이었다. 축구공, 연필처럼 질감을 가진 물건처럼 여겨지다가,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리는 미세먼지나 바람 같았다. 명확한 얼굴을 가진 듯하면서 정확히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는 복면강도 같은 존재였다. 부산, 부산이라. 수정이 두 입술을 붙였다가 떼면서 '부산'을 부를수록, 그것은 어느 먼 타국의 지명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었다.


초록색 검색창에 '호캉스'를 입력했다. 호캉스 준비물, 장소, 시기 등이 연관 검색어로 떴다. 그중 호캉스 준비물을 눌렀다. 샤워용품은 호텔에 구비되어 있으니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치약과 칫솔은 없는 곳이 많으니 꼭 가지고 가라, 생수는 보통 2병을 주는데 부족하면 근처 편의점에서 사라(ps-호텔은 생수도 비싸다) 등의 글들이 나왔다. 게시글 밑으로 메탈 소재 캐리어와 명품 로고가 찍힌 비키니 사진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정은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처럼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고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찍었다. 〈호텔 해운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조식당 위치와 로비, 수영장과 피트니스 클럽을 확인했다. 능숙하고 세련되게, 모든 것이 익숙한 단골손님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 이미 호텔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구김 하나 없는 새하얀 시트 위에 민우와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딱딱하던 손끝이 말랑해지면서 두 뺨에 살짝 열이 올랐다. 특별한 밤을 위해 큰 맘 먹고 ck속옷도 구입했다. 다리와 겨드랑이 제모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톱만 하던 상상이 주먹만큼 커지더니 열기구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열기구를 탄 수정과 민우 앞으로 상상과 망상, 열망과 욕망이 무지개처럼 펼쳐졌다. 그녀는 각기 다른 색깔과 표정을 지닌 빛들에 첨벙, 하고 몸을 던졌다. 파도의 날개를 따라 빨강에서 보라까지 마음대로 헤엄쳐 다녔다. 그러다가 홀로 한 상상임에도 괜히 겸연쩍어져서 엄마가 있는 거실을 향해 헛기침을 했다.
이번 호캉스는 민우를 위한 이벤트이기도 했다. 수정과 민우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수정이 국어국문학과, 민우는 사회학과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문학과 영상예술' 수업에서 같은 조였고, 과제를 위해 도서관과 영화관을 드나들다가 사귀게 되었다. 독립영화, 예술영화 마니아인 민우는 종종 젊은 여자 시간강사를 시험하는 듯한 질문을 했었다. 객기와 오만이 적당히 섞인 복학생의 태도가 수정에겐 지적이고 패기 넘쳐 보였다. 민우와 함께 '영화의전당', '서면CGV ART관', '모퉁이극장'을 순회하며 취향과 취미를 공유했다. 가끔씩 부산에서 상영하지 않는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의 독립극장을 찾았다. 1+1 하는 편의점 삼각김밥과 캔커피를 들고 대구행 고속버스에 올랐을 때, 그녀는 자신처럼 창백한 영혼을 지닌 그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수정이 먼저 취업을 하고, 민우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예전처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다섯 시간 동안 영화평을 주고받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수정은 여전히 핑크빛 로맨스 안에 있다고 믿었다.
"in부산 하고 싶다, in부산."
민우가 부산시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보고 와서 말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부산에서 살고 있는 민우는 앞으로도 부산에서 쭉 살고 싶어 했다. 'in서울', 'in수도권'을 외치며 타 지역으로의 취업을 꿈꾸는 이가 있지만, 지방에 사는 20대가 똑같은 희망사항을 지닌 건 아니었다. 민우에게 'in서울'은 'out부산'의 다른 말이었다.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살아온 터전에서 추방됨과 동일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부산시 공무원 채용인원은 해마다 줄고, 경쟁률은 해마다 신기록을 세웠다. 수정이 퇴근 후, 애정하는 감독의 신작영화를 보러 가자 해도 민우가 행정법 특강 운운하며 거절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래서 수정은 이번 호캉스를 잘 보내고 싶었다. 공부에 지친 민우에게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주고 싶었고, 살짝 멀어진 듯한 두 사람의 관계도 회복하고 싶었다. 서비스가 좋은 특급호텔에서 푹 쉬고 나면 민우도 힘내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우리 캐리어 어디 있는데? 접때 엄마 중국 여행갈 때 들고 간 거 있잖아."
수정이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즈기 베란다 창고 함 봐라."
주말연속극 재방송을 보고 있던 엄마가 턱 끝으로 베란다를 가리켰다. 창고에는 파란색 김장봉투 대(大)자에 들어 있는 분홍색 캐리어가 있었다. 엄마는 비닐 입구를 몇 번이나 돌려서 꽁꽁 묶어 놨다. 수정은 새로 붙인 네일 스티커가 떨어진 줄도 모른 채, 묶인 김장봉투를 푸는 데 집중했다. 캐리어는 깨진 부분 하나 없이 깨끗했다. 먼지만 털어서 사용하면 되겠네.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캐리어를 제 방으로 옮겼다.
〈청춘산악회 10주년 기념 중국 장가계 여행〉
수정의 눈에 파란색 잉크로 선명하게 박아 놓은 문구가 들어왔다. 이게 뭐야! 가방이 엄마 지인들로 구성된 산악회 기념여행용으로 만들었단 걸 깜박했다. 수정은 돌하르방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랍에서 캐릭터 스티커를 가져와 글자 위에 붙였다. 스티커는 붙이면 붙일수록 더 조잡해졌다. 스티커를 떼어내고 매니큐어용 아세톤과 화장솜을 가져왔다. 하얀 화장솜에 아세톤을 흠뻑 적셔 글자 위에 문질렀다. '청춘산악회'가 '저주사악회'로 변하더니 '주회'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분홍색 캐리어 커버도 함께 벗겨졌다. 공기구멍이 뚫린 현무암처럼 분홍색 캐리어 위로 하얀 동그라미들이 생겼다.
수정은 점점 커지는 하얀 점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두 눈이 뻑뻑해지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팩을 메고 호텔에 가고 싶지 않았다. 손잡이가 긴 캐리어를 끌며 호텔 로비로 폼 나게 입장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스티커를 다시 붙였다. 분홍색 캐리어에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이 찰싹찰싹 달라붙었다. 여행 가는 게 기쁜지 어금니가 보이도록 과장되게 웃고 있었다.



*


약속장소는 서면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 앞이었다. 민우가 오전 공부를 해야 해서 평소와 같은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정은 준비해 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뒤, 분홍색 캐리어를 끌고 서 있었다. 마치 부산으로 휴가를 온 관광객처럼 보였는데 수정은 그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 멀리 민우가 보인다. 수정은 민우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점차 표정이 굳어졌다. 민우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 초록색 학원 가방을 또 메고 나타난 것이다. 저놈의 백팩! 힘들면 거북이처럼 가방 속으로 머리를 숨기겠다는 건지. 그는 어딜 가든 학원 가방을 애착인형처럼 끼고 다녔다. 검은 면바지에 남색 후드티셔츠, 뒤축이 닳은 아디다스 운동화. 수정은 민우의 차림을 훑어보다가 얇은 면바지 위로 그의 야윈 다리가 드러나자, 입을 우물거려 굳은 표정을 풀었다.
"자기야, 지하철 타러 가자."
민우가 수정의 분홍색 캐리어를 번쩍 들고 앞장섰다.
"해운대역까지 몇 코스고?"
수정이 검지손가락으로 2호선 노선표를 따라가 보았다. 서면, 전포, 문현, 지겟골 ··· 센텀시티, 벡스코, 동백, 해운대. 16개의 역을 통과해야 했다. 수정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연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탄 뒤 서면까지 왔었다. 이제 2호선을 타고 해운대로 가야 한다. 오늘 하루 부산시 지하철을 다 타는 것 같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지쳤다. '우리 택시 탈까?'라는 말이 그녀의 목구멍을 간질였다. 민우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데 택시비를 내라고 할 순 없었다. 그것은 오롯이 말을 꺼낸 수정의 몫이었다. 호텔 '추가비용'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던 민우처럼 수정도 택시비 앞에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16개 역을 지나 해운대역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처럼 2호선 지하철이 역사 안으로 안착했다. 평일인데도 해운대역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았다. 민우와 수정은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듯 단말기에 띡,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역을 벗어났다.
"으음, 바다내앰새!"
출입구를 나오자 수정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짭조름한 바다향, 철썩이는 파도소리, 백사장에는 하얀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닐 것 같았다.
"바다는 무신, 저까지 한참 걸어가야 된데이."
민우는 그런 수정의 모습이 귀여운지 피식 웃었다. 역사 앞에는 때에 찌든 살찐 비둘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텔 해운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3번 출구로 나와 라마다앙코르 해운대호텔을 끼고 직진했다. 다행히 보도블록을 재정비해서 캐리어를 끄는 데 불편이 없었다. 양옆으로 돼지국밥집과 밀면집, 순대가게가 즐비했다. 편의점과 치킨집, 호프집, 노래방도 줄줄이 이어졌다. 문틈으로 돼지국밥, 밀면, 순대, 치킨 냄새가 새어 나왔다. 오묘하게 섞인 음식 냄새는 식욕을 자극하는 듯하면서 입맛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잔가지처럼 난 골목 사이로 모텔과 여관, 여인숙 간판들이 한낮에도 불을 밝히고 있었다.
쌔앵, 빨간색 포르쉐가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열심히 걷던 수정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붉은 꽃무늬 원피스가 땀에 젖어 다리에 척척 감겼다. '바다의 왕자'와 '해변의 연인'을 틀어 놓은 노래방 유리창을 거울삼아 원피스를 고쳐 입었다. 민우는 말없이 캐리어를 끌고 앞서 갔다. 플라스틱 바퀴가 달그락거리며 시끄럽게 울었다. 그의 초록색 학원 가방과 그녀의 분홍색 캐리어가 보색 대비를 이루었다. 언뜻 보면 민우는 호캉스가 아니라 독서실에서 고시원으로 이사 가는 수험생처럼 보였다. 한참을 걸어 씨클라우드호텔까지 오니 해운대 주도로가 나타났다. 횡단보도 건너편은 정말 해운대 '바다'였다.
"좀만 더 힘내. 이제 다 와 간데이."
민우가 뒤를 돌아보며 응원했다. 수정은 그런 민우를 향해 두 주먹을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체크인만 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공짜 〈호텔 해운대〉 숙박이 어딘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해운대 주도로에서 왼쪽으로 꺾은 뒤, 100미터를 걸어가 양 갈래 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 또 50미터를 걸어가니 〈호텔 해운대〉가 나타났다. 최근 신관을 오픈한 호텔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수목과 잔디밭, 이름 모를 조각품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자동차박람회에 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화려하고 생경한 외제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수정은 민우에게 다가가서 카카오프렌즈 스티커가 보이지 않게 캐리어 방향을 돌리라고, 배려하면서 짜증이 묻은 말투로 말했다.
"세금 10프로, 봉사료 10프로는 개인부담이어서 지불해 주셔야 합니다. 디파짓은 카드 주시면 오픈해 드리고, 체크아웃 때 결제됩니다, 고객님."
단정한 인상의 호텔리어가 예의바르고 상냥하게 말했다.
"예? 이거 이벤트 당첨돼서 받은 건데요. 제 돈으로 온 게 아니라."
"네, 고객님. 근데 세금을 포함한 부가세는 개별부담이라고 안내되었을 건데요. 주최 측에서는 숙박비와 조식비를 담당하구요. 부가세는 고객님 개별부담입니다."
수정은 앞장과 뒷장을 바꿔서 책을 인쇄했을 때보다 더 머리가 아파 왔다. 전혀 예상을 못 했던 일이었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고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등줄기를 따라 끈끈한 땀이 흘러내렸다. 이번 달 남은 생활비와 다음 달 카드값을 재빨리 셈해 보았다. 데스크 앞에 서 있던 호텔리어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때, 수정의 뒤에 서 있던 민우가 성큼 앞으로 나오더니 네모난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아, 이렇게 든든한 애인이라니! 수정을 대신해 젊은 여자 시간강사의 질문에 답하던 날카롭고 패기 넘치던 민우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어떤 상황도 막아내는 든든한 조원이었다. 하지만 추억 속의 민우를 채 복원하기도 전에 수정은 보고야 말았다. 결제 사인을 하는 민우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그의 목소리에 잔뜩 묻어 있는 물기와 웅크린 어깨를. 저 돈이면 민우가 학원 식당에서 돼지불백을 일주일 이상 먹을 수 있을 텐데······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그렇다고 숙박을 취소하고 나가자는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내가 호캉스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부가세를 내도 호텔 숙박비를 생각하면 남는 장사 아닐까. 그동안 데이트 비용을 담당했으니 민우가 이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수정의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질문과 대답, 의심과 회의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야, 경치 죽이네."
커튼을 걷자 해운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점성이 강한 파란색 바닷물이 출렁출렁 춤을 췄다. 유리창 전면에 채도가 높은 파란색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았다. 바다의 흰 꼬리를 따라가면 아스라한 수평선에 가닿았다. 11층 호텔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해운대 바다는 정말 이국적이었다. 수정은 이 바다가 제가 알고 있는 해운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까칠까칠한 백사장에 앉아서 본 풍경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궁에서 베르사유 정원을 본 태양왕의 심정이 이랬을까. 저 넓은 바다를 내 집 마당처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게.
"오길 잘했제?"
수정이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민우가 수정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안았다. 막 연애를 시작했던 조원 시절처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수정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키스는 달고 부드러웠다. 3자 모양의 갈매기가 파도소리를 물고 날아왔다. 시원한 파도소리에 부가세가 쓸려 내려갔다.


민우와 수정이 호텔 2층의 중식당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자장면 18000원, 황제짬뽕 39000원, 탕수육 42000원, 다행히 부가세 포함이었다. 수정은 예쁘게 원피스를 입으려고 어제 저녁부터 굶었다. 허기가 지다 못해 뱃가죽이 등에 붙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민우의 손을 잡고 식당 앞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텔 해운대〉를 나와 해운대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누가 뭐라캐도 부산 사람한텐 국빱이 최고제."
민우가 수정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말을 하면서 무언가 미안한 듯 수정의 눈을 살짝 피했다. 수정은 그런 민우를 이해하면서 속상했고, 속상해하는 자신이 속물적으로 느껴지다가 친구의 인스타그램이 떠올라 다시 속상해졌다.
"시험만 붙으면 호텔 쭝국찝에서 탕수육 사줄게."
"아이다, 내 돼지국빱 진짜 좋아한다아이가."
수정이 민우의 손을 꽉 잡으면서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아아는 스타벅스에서 먹을 거데이. 여기 스벅이 씨뷰라서 좋다더라."
민우가 수정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첫 데이트를 하는 연인마냥 두 손을 꼭 잡고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민우의 마른 손이 따뜻했다. 얼큰하게 취한 중년의 남녀가 여관 골목으로 사라졌다. 수정은 자신이 그들과 같은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밤의 해운대는 낮과 또 달랐다. 분주하고 시끄럽던 곳이 적당히 차분하면서 활력이 넘쳤다. 수입맥주를 손에 든 관광객들이 백사장에 들어섰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무리가 싸구려 폭죽을 밤하늘에 쏘았다. 목줄을 한 시베리안허스키가 등산복을 입은 주인과 산책을 했고, 버스킹을 하는 긴 머리 남자도 있었다. 수정은 샷 추가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민우는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카라멜마키아또를 들고 걸었다. 민우가 '여수 밤바다'를 허밍으로 부르자, 수정이 여수를 '부산'으로 바꾸며 따라 불렀다. 바닷바람이 불어와서 한낮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두 사람은 국밥집을 나오면서 다시 손을 잡았다. 다정하고 다정하게, 손바닥에서 땀이 날 정도로 손을 잡았다. 마치 다정한 것 이상은 가진 게 없다는 듯,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들의 소박한 순정이 빛나길 바란다는 듯, 손을 놓으면 모래더미 속으로 빠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눈을 떴다. 수정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딘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얀 시트와 포근한 침구, 주황색 조명과 하늘거리는 커튼, 〈호텔 해운대〉였다. 지난 밤, 수정과 민우는 객실로 돌아와 섹스를 했다. 모텔 대실도, 민우의 자취방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누워도 자리가 충분한 킹사이즈 침대와 적절한 온도, 조도가 낮은 조명까지 있었다. 수정은 평소보다 더 달뜬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의 섹스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수정은 너무 피곤했고, 매일 수험서에 시달리는 민우의 체력 역시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정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아마도 비싸고 좋은 침구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잘 잤나?"
민우가 테라스 앞에 서 있었다. 커튼 사이로 파란 하늘과 해운대 바다가 보였다. 수정이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이자 민우가 커튼을 열었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정은 스마트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조식 먹고 체크아웃 해야겠네. 언제 다시 와볼까. 민우가 원했던 주말 숙박을 하려면 돈이 더 들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호텔 서비스를 더 누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1박2일은 생각보다 짧았고, 호텔에서 즐길 수 있는 무료 서비스는 예상한 것보다 적었다. 천천히 객실 안을 훑어보았다. 호텔명이 나오게 셀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쓰지 않은 어메니티는 캐리어 안에 챙겼다. 민우가 9급 공무원이 되어도 특급호텔에 편하게 올 수 없을 것이다. 민우도 나처럼 매달 카드값에 힘들어할 거고, 퇴직과 이직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월요일이 오면 꾸역꾸역 출근을 하겠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건 서로의 마른 손이지 호텔 카드키가 아닐 것이다. 수정은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민우를 향해 다가갔다.
민우는 여전히 테라스 앞에 서 있었다. 수정이 가까이 와도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섰다. 바다를 보는 것 같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수정이 민우에게 팔짱을 껴도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수정은 보았다. 민우의 눈이 어떤 욕망과 야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다보다 더 멀리, 바벨탑보다 높게 솟아올랐다. 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눈. 수정은 자신이 한 생각을 민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짧은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민우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줄 수 없다는 것도. 수정의 손바닥이 얼음 덩어리를 움켜 쥔 것처럼 차가워졌다. 팔짱을 빼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럼에도 민우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퉁퉁하게 살이 찐 하얀 갈매기들만이 파도소리를 음악 삼아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 본 작품은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작품입니다.















오선영

작가소개 / 오선영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모두의 내력』이 있다.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추천 콘텐츠

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