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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눈

  • 작성일 2020-03-01
  • 조회수 2,624

[단편소설]



고양이 눈



최정화




여기는 경성의 북쪽에 자리 잡은 구릉 지대로,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고양이 눈을 닮았다고 해서 묘안정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공동묘지였다고 하는데 안성에서 온 어떤 이가 묘지건 뭐건 상관할 바 없이 일단 몸 누일 곳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심정으로 움막을 지어 살았다. 오갈 데 없는 몇몇이 더 모여들어 그 옆에 따라 움막을 짓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묘지 전체가 하나의 촌을 이루게 되었다. 근처에 고양이들이 많아 번식기의 울음소리만이 귀에 거슬릴 뿐, 그것도 몇 번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집이라고 하기에 영 무색하다. 문 대신 거적을 둘러 출입구를 만들고 한구석에 땔감, 또 한구석에는 물동이가 세간의 전부다. 그래도 부실하나마 내 집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주방도 화장실도 없지만 누울 곳이 있다는 게 어딘가. 작년까지만 해도 내게는 시장에 어엿한 가게 하나가 있었으니 오 년간 그 가게에서 두부를 팔아 움집이나마 장만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이 움집도 넘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월삯을 지불하는 조선숙으로 가게 될 것이다.
구릉의 자락은 강가 모래밭이어서 모래 먼지가 많다. 바람이 꽤 강하게 불어오는데 건조한 공기라 얼굴이 트고 모래에 섞인 현실의 장면들은 늘 선명하지 못하고 부옇다. 눈꺼풀에 모래 알갱이가 끼어 들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늘 꺼끌꺼끌하다. 그것도 처음에만 거슬렸을 뿐 곧 익숙해지고 말았다. 눈물이 흐르면서 모래 알갱이가 흘러내리면 눈꺼풀에서 뭔가 사라진 듯 시야가 맑아져 눈앞의 풍경이 제법 선명하게 보이면 그때야 흐릿하게 보였구나, 라고 알아챈다. 선명한 세상이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그리고 다시 모래 알갱이가 들어와 흐릿한 세상이 원래 그런가 보다 살다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맑고 선명한 세상을 보곤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시장으로 나서는 길에 그림자군(群)을 만났다. 시장 입구에는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들을 만났으니 서운한 일이다. 잽싸게 도망친다고 있는 힘껏 내달렸지만 요 며칠 먹은 게 없어서인지 다리가 땅을 박차질 못한다. 후들후들 종아리가 떨려 오고 몇 걸음 채 가지 못해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이 옷깃을 잡아채자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당겨진 옷에 목이 조여 왔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보았지만 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덩치들에게는 그 모습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지 낄낄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둔중하고 무거운 몽둥이가 머리를 내리쳤다.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무슨 깡으로 다시 나타난 거냐?"
그림자군이 던진 말들이 화살처럼 몸에 와 박힌다. 하지만 움찔할 기력도 없어서 그저 땅바닥에 몸을 맡기고 흙냄새만 맡을 뿐이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을 뭘로 들었냐?"
누군가 축 처진 몸뚱이를 질질 끌어 다시 잡아 올렸다. 낚싯대에 걸린 생선처럼 허공으로 번쩍 솟구쳐 오른다. 눈앞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흰 구름이 얇게 떠 있다.
"맞고 싶어 몸이 아주 근지러운가 보니 어디 한번 원 없이 맞아 봐라. 내 실컷 때려 주지."
구둣발이 날아와 배 속 깊숙이 박혔다. 발이 날아와 등 위에 박혔다. 내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대한 손바닥이 뺨을 후려갈겼다.
몸을 웅크릴 힘도 없이 바닥으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뜨였다가는 그땐 정말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몸조심해!"
마차가 지나갈 때처럼 땅이 크게 울렸다. 흙먼지가 가볍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부연 모래 바람들과 함께, 나의 과거가 지나갔다.
작지만 어엿한 가게에서 과자를 늘어놓고 가라앉은 먼지를 떨이개로 닦아낸다. 아이들이 몰려와 맛만 보게 해달라고, 그러면 어미가 오는 대로 사러 오겠다고 말한다. 하나 집어 주자 거짓말이라며 과자만 받아 도망친다. 할머니 하나가 허리춤에서 꺼낸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 주고 깨과자 두 봉지를 사간다. 두어 개 더 넣어주자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몸이 욱신거린다. 요즘은 현실에서 맞고, 또 잘 때도 맞는 꿈을 곧잘 꾸었으니까 이 고통이 꿈인지 현실인지 혼돈스럽다. 눈앞이 뿌옇고 선명하지 않은 것을 보면 꿈인 듯도 하고 이곳의 모래 바람으로 현실이 꿈보다 뿌연 순간이 더 많으니까 현실인 것도 같다. 두 눈을 깜빡여 보다가 다시 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만다.
그림자군이 골목을 빠져나가자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고 가끔 새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적막. 그리고 다시 새소리. 맑은 새소리 사이로 어떤 소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사람의 소리다. 잠자코 귀 기울인다.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목소리다. 어디 숨어 있었나 싶게 우렁찬 목소리가 몸 안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이 시장 골목을 떠나지 않을 거다!'
'나를 죽이면 죽였지 여기서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끝내 이곳에서 살아남겠다!'
내 말을 저기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가 들었다. 엉덩이를 적시는 차가운 비 웅덩이가 들었다. 저 골목 끝에서 환하게 빛나는 해가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들었다. 잊지 말라고,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이 목소리를 기억하라고 내가 나 자신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봤자 나를 꺾지 못한 거다. 하지만 그 말이 자장가로 들렸는지 몸에서 스르르 기운이 빠져나가며 까무룩 잠에 들고 말았다.
일어났을 때는 한밤이었다. 팔과 다리가 저려서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여름이기에망정이지 겨울이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았다. 다시 살았다. 그렇다면 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오른쪽 무릎을 세웠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에게 묻고
'암암, 물론이지.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라고.'
나에게 대답했다.
온 힘을 모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가벼웠다. 그럼 평소에 내 무게 말고 뭘 더 짊어지고 있었기에 그리 무거웠는가, 나 말고 다른 누구의 삶이 나를 내리눌렀나. 어쩌면 허공에 붕 뜬 것처럼 가벼운 몸을 이끌고 비틀비틀 걸었다. 내 몸뚱이가 고작 이 정도의 무게였구나 실감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의지와 용기는 탱천하는데 발목과 다리는 그 마음을 몰라주고 심하게 후들거린다.
이 비루한 몸뚱이에 싣기에 나는 너무 용감하구나. 굽힘없이 강하구나.
내게는 생명력과 의지, 밟아도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투지가 있다. 너희들의 폭력에 굴할 내가 아니다. 너희는 내 몸에 폭력을 가했지만 정신에는 더 강인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고작 그게 너희들이 떼로 몰려와 내게 저지른 짓이란 말이다.
폭력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 더 북돋는 것, 나를 더 타오르게 한다. 나를 절대 굴복시키지 못한다.
아무도 없는 시장 골목을 비칠비칠 걸어 빠져나왔다.
셔터가 내려진 골목의 절반 정도는 새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즈음 시장 골목에는 점포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주인은 먼데로 떠나는 일이 잦았다.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새로 문을 연 가게를 얼씬거렸다. 새 가게의 주인들은 대개 일본 사람들 하수의 조선인들이었다. 비슷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절대 비슷한 사람이 아니다. 그네들은 일본 사람이다. 조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서 작은 군대를 조직했다. 그들이 그림자군이었다. 근처에 얼씬거리는 시장 사람들이 있으면 몰매를 때려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들은 한복이 아니라 개량된 신식 옷을 입고 있었다. 위아래로 검은 옷에, 머리에도 검은 두건을 쓰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차럼 어둡고 검다 해서 그림자군이라고 불렀다. 멀리서 낌새를 치고 운 좋게 도망칠 때도 있었지만 잡히는 날에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기 일쑤였다.
가게를 빼앗긴 건 작년 일이다. 어떤 자가 시장 점포를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고용한 자들이 그 가게를 인수받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상황인지 시장 사람들은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가게 주인이 진짜 가게 주인이었지만 이제 가게 주인은 보이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곳에 따로 있고 다른 사람이 가게 주인을 하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가게에는 나타나지도 않을 거면 왜 가게 주인을 하는 거냐, 가게 주인도 아닌데 왜 가게 주인 일을 하고 있느냐 물었다. 가게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가게 주인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진짜 가게 주인이라면 왜 가게 일을 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것이다. 진짜 가게 주인 일이 그거라고, 가게를 사서 가게 주인 일을 할 사람들을 찾는 거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른 수 없이 나도 가게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든 시장을 떠나 새 가게를 차리는 대신 그저 시장을 얼씬거렸다. 시장 사람들은 물건을 살 량도 아니면서 자꾸 나타나는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대부분 새로 들어선 상점의 주인들이어서 내가 전에 여기서 장사하던 사람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좀도둑으로 여기고는 괜스레 매대 위의 물건들을 세어 보고 허리춤에 손을 넣어 액수가 맞는지 확인해 보곤 했다. 쳇. 배를 굶었을지언정 매대 위의 물건들에 손을 댈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배를 굶는 것은 사실일 뿐 내게는 고통이 아니다. 배를 굶거나 굶지 않거나 그뿐. 그 사실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뭐 하는 일이냐 묻는다면 나도 딱히 대답할 말을 없다. 가게 주인 일을 하지도 않을 거면서 가게 주인이 된 상황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가게를 잃고도 떠나지 않는 이유 말이다.
내게는 해선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같은 게 있었다. 납득이 안 되면 볼기짝이 터지도록 맞아도 물러섬이 없었다는 게 나 자신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구역에서 그리 순순히 쫓겨날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난을 벌였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떠나지 않을 뿐. 그렇게 내 가게 주변을 맴도는 것이 돈을 벌어 주지는 않지만 내 유일한 직업이라고 해도 좋았다.
계속 시장엘 갔다. 그즈음의 나에게는 그 얼씬거리는 일이 나 자신의 정체성이라도 찾아 주는 듯했다. 얼씬거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그 결심만이 있었다. 매일 시장엘 갔다.
그림자군에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얻어터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순간은 시장 골목을 얼씬거리는 동안 찾아왔다. 때때로 나 자신이 죽음에 아주 가까이 갔다고 느꼈다. 얼씬거리는 나 자신이 귀신이나 유령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무서워서 내 발뒤꿈치를 만져 본 적도 있었다.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그 중간다리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내가 살아 있는지 모르는 산 사람 같기도 하고 죽었는지를 모르는 죽은 사람 같기도 한 그 심정은 아주 외로운 것이었다. 비칠비칠 걸으며 내 몸뚱이가 무겁고 아프다고 느낄 수 있는 지금의 나보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조차 없는 그 순간이 더 외로웠다. 죽은 이조차 이렇게 외롭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리는 도축업자다. 근방의 조선숙에서 살고 있었고, 가족들과 먼데 떨어져 혼자 지내고 있다. 그래도 구김살이 없이 늘 웃는 얼굴이다. 나는 그가 왜 웃고 있는지가 늘 궁금하다. 반대로 그는 내게 묻는다. 왜 늘 그리 인상을 쓰고 있어? 인상 쓸 일이 무어 있다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도축업자라면 어쩐지 잔인한 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고리가 두 손에 붉은 돼지 피를 묻히고 웃는 모습을 떠올리면 인간이 정한 선악의 가치라는 것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짐승들의 목을 따고 살을 가르고 장기를 떼어내고 살점을 바를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또 딸린 식구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하고자 함 이상의 의미는 없다.
고리도 원래부터 도축 일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유과를 팔던 가게 바로 옆, 시장 끄트머리에서 나란히 순대를 팔았다. 가게라고 하기엔 무색한 좁은 평수의 자리였는데 솥 하나 놓고 작은 테이블에 앉은뱅이 의자 서너 개가 전부였다. 그때가 좋았지, 라고 말하는 고리의 얼굴은 마치 전생에 태평성대를 이룬 왕 같다.
내가 그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만족이라는 것이 결과가 아니라 능력이라는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만족한 결과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만족하는 능력. 고리는 능력자였고 나에게 있는 분노가 없었다. 그것이 고리의 웃는 얼굴이 뜻하는 바였고 그 능력이 없는 내게는 늘 의아한 일이었다.
"가게를 되찾고 싶지 않아?"
물으면 고리는 또 과거로 돌아가 왕과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그때가 좋았지."
그뿐이었다. 거기서 생각을 딱 멈추고 제 하던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래도 고리를 만나면 죽이 잘 맞고 통하는 데가 있어 즐거웠다. 고리는 요즘 온종일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손질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다면서 이게 다 아카마 기후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아카마 기후?"
처음에는 그게 사람 이름인 줄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카마 기후는 가게 주인을 하지도 않을 거면서 가게를 사들이고 있는 그자의 이름이었다.
고리는 그가 환자라고, 대단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살이 무르는 것도 탈이 나는 것도 아니라 가게를 사들이는 병이라니 어째 그런 병이 다 있는가 물으니, 욕심은 분명 병이지, 엄청난 병이야, 라며 고개를 훠이훠이 저었다. 따져 보면 간단했다. 쓰지 않을 것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필요가 없는 것을 모으고 있다. 아카마라는 자의 큰 욕심 때문에 고리는 도축업자가 되어 가족과 떨어져 여인숙 신세를 지고 있고 나는 매일 그림자군에게 얻어터져 가며 시장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고양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날은 점심시간 즈음 도축장을 찾아갔다. 끌려가는 소와 돼지들이 연신 울어대고 또 한쪽 구석에서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놈이 무릎을 꺾으며 기절한다. 가죽이 벗겨진 피부에서 피어오르는 후끈한 김에 정신이 몽롱해진 탓인지 아니면 이 광경을 너무 많이 본 탓인가, 어째서인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깡통 가득 담긴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려 뒷마당으로 뛰쳐나갔던 게 고작 몇 달 전인데 어느새 익숙한 광경이 되고 말았다.
고리는 도축장 한가운데서 갈고리로 속의 내장을 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가 내가 손을 번쩍 들어 보이자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돈 좀 있냐고 묻는데, 오늘 먹을 밥도 없는 이에게 무슨 돈이 있겠나. 갑자기 웬 돈타령이냐 물으니 고리는 좋은 소식이 있다며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갑을 벗어 앞치마 주머니에 걸쳤다.
예전 순댓집 옆자리가 났는데 거길 빌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유과를 팔던 상인이 나간다고 했다.
"그자는 왜 나가는데?"
"자릿세를 내지 못한 거지. 다른 이유랄 게 있나."
"왜 매달 내던 자릿세를 내지 못하게 되었는데?"
"자릿세가 오른 거지 뭐. 아카마 기후라는 자, 처음에는 자릿세를 낮춘 뒤에 석 달에 한 번, 또 여섯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이렇게 크게 삯을 올려 받고 있어. 유과 장사로 석 달 버티기도 힘들었네."
좀 전보다 표정이 밝아졌다.
"자네 인단 장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어? 이건 아주 고급 정보야."
"인단 장사?"
인단이라면 그 작고 동그란 은색 입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인단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소화가 안 될 때 한 알, 기분이 울적할 때 한 알, 몸이 부었을 때 또 한 알, 배변이 신통치 않을 때 또 한 알. 입안에 박하향이 퍼지며 막힌 데가 뚫리는 것이 위력이 있었다.
"중간상을 소개해 줄 수 있을 것 같네. 우리 집 단골인데, 며칠 만에 갑자기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살이 붙어 온 거야. 전에는 일인분을 시키더니 이제 2인분을 먹고도 하나 더 포장해 가고, 아주 여유만만이더라고."
오만한 말인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인단 장수가 될 수도 있었다. 순대 접시를 두 개 주문해 비우고 얼굴에 살을 붙일 수도 있었다. 대단한 장인 정신이 있어서 꼭 유과만을 팔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카마 기후라는 이름까지 들은 이상, 그 이름을 알게 된 이상 내 삶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그자를 향해 난 뭐라도 해야 했다. 그 얼굴을 내 보고 말겠다.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원스레 대답이 없자 고리가 내 표정을 살핀다.
"그런데 자네 눈이 아픈가?"
"눈?"
토막민들이야 언제나 질병을 달고 산다. 기침, 가래, 소화불량에 피부에는 늘 크고 작은 딱지가 앉아 있고 피부병에 걸린 자들도 부지기수다. 코를 킁킁거리는 축농증 환자들, 이가 썩어 턱이 부어 있는 이들, 정신에 문제가 있는 듯 보이는 이들도 있다. 안질환에 걸린 사람들도 심심치 않다. 봄이면 더욱 그랬다. 결막염이나 트라코마 같은 안질이 산에 끼어 있는 구름처럼 머물렀다. 그나마 나는 타고나기를 눈이 건강하게 태어나 안질환으로부터는 자유로웠는데 고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다.
"아니, 아니, 눈이 아니라 코야. 늘 코가 막혀 있다고. 숨쉬기가 불편하지만 그래서 냄샐 못 맡는데 때로는 그게 축복인 듯도 싶고."
근처에 분뇨장이 있어서 늘 불쾌한 냄새를 맡아야 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막힌 코를 킁킁거리며 답하자 고리는 고개를 저었다.
"내 눈이 이상한가? 자네 눈의 검은자위가 검게 보이지 않아."
고리야말로 안질환에 걸린 것은 아닐까?
"검지 않다면 어떻게 보이는데? 붉게 보이는가, 아니면 푸르게?"
나는 농담으로 넘기고 막걸리를 한 사발 목구멍으로 부었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지니 이만한 음식은 없었다. 고리는 여전히 진지하게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막걸리를 급히 먹었는지 딸꾹질이 났다.
"예전의 검은색이 아니라 호박색이고, 뭐랄까 좋게 말하면 빛나는 듯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다른 세계 사람 같네. 얼핏 보면 서양인의 눈 같다고 할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서양 사람 눈과는 또 다르고."
고리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리 저리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아."
좀처럼 어떤 일에 집착하는 일이 없던 고리가 주막 주인에게 거울까지 빌려왔다. 길고 둥그런 모양의 거울이었다. 내 얼굴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세수를 하기도 어려워서 물에 비친 내 모습조차 가물가물하다. 보물 상자를 열 듯 거울을 받아들고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타원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눈은 고리의 말대로 아무래도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선인과 같은 검은색이나 진한 갈색이 아니라 엷은 노랑과 연두가 섞인 흐린 색이었다. 서양 사람의 눈도 아니었다. 홍채가 동그랗지 않고 길쭉하고 끝이 뾰족한 타원형이었다. 거울 면으로 빛이 쏟아지자 홍채는 더 가늘어졌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보였다.
고리는 내가 너무 많이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지 슬퍼했다. 아프지도 않고 보는 데도 아무 이상이 없으니 의원을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내 눈이 이리 된 것을 발견한 것은 고리뿐이었다.
"아프지 않은가?"
"전혀."
"아프지 않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고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담 다행이고."
고리와 나는 헤어졌다. 도축장에서 버리는 고기를 좀 얻어온 터라 아주 기분이 좋았다. 토막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를 따라 걷는데 인단 장사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고리의 제안에 다시 귀가 솔깃했다. 지금처럼 굶지 않아도 되고 움막을 처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카마 기후의 얼굴을 본댔자 잃어버린 식료품점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쩐 일인지 다시 상인이 되고자 하는 생활인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솟질 않았다. 이런 마음을 딱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아니라 아카마 기후를 만나고자 하는 의지인 듯했다. 아픈 것도 상관없고 앞일 걱정도 들지 않았다. 밥을 먹고 걸어 다니는 이 몸뚱이가 내 움막집의 거적처럼 느껴질 때조차 있었다. 고리의 말마따나 그를 만나서 해결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단 장수가 될 테냐?'
꽁꽁 언 발을 내딛으며 내게 물으면,
'그럴 수는 없다, 아카마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겠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은 쓸쓸하고 조용했지만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있어 거역할 수가 없었다.
걷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에는 마치 둥글게 무덤처럼 솟아오른 토막촌이 보였다. 밤에 보면 영락없이 공동묘지 같아 섬칫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원래도 공동묘지였고, 간혹 그 안에서 죽어 발견되는 이들이 있으니 여전히 공동묘지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주막에서 남은 반찬이라며 청국장을 들고 오는 길이어서 내 걷는 길이 공동묘지로 향하는 길이든 사천으로 향하는 길이든 상관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적어도 오늘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힘이 났던 것이다.
비실비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데 저 멀리서 그림자군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검은 옷, 손에 든 몽둥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기분 좋은 날인가 했더니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묵직하게 가라앉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자군이 내 앞에 섰다. 그들 중 하나가 멱살을 잡고 나를 들어올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청국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맞는 건 맞아 줄 수 있지만 모처럼 얻은 식량이 떨어지자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멱살을 쥔 그림자군의 손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자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자가 내게 다가와 발을 들어올렸다. 나는 또 그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뒤로 벌렁 자빠져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다음 사람은 나무 몽둥이를 힘껏 들어올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몽둥이를 놓치고 도망쳤다. 그 뒤에 나를 향해 달려들려던 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군 무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일제히 달아나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본 게 대체 뭘까?


경성제국대학교에서 온 위생조사부들이 찾아왔다. 우리 토막민들을 줄지어 세워 놓고 저희들끼리의 선언인지 우리들에게 하는 설명인지 모를 연설을 했다. 연설의 핵심은 자신들이 조선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랑이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고 특권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 사랑으로 여기 묘안정에 찾아왔으며 식민지 국민의 얼굴을 밝게, 대륙 발전 기지로서 조선의 건전한 발달에 도달하고자 한다고 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피를 뽑아가는 사랑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사부는 작은 간이 천막을 설치한 뒤 세 사람씩 안으로 들여 신체 사이즈를 재고 눈을 보고 이를 보고 피를 뽑았다. 우리 토막민들이야 병에 걸렸다고 해도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형편에 먹는 것도 허술하니 또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검사가 아니라 치료를 해달라!
징집당하는 게 아닌가 두려움에 섞인 말들이 천막 밖에서 들려왔다. 윗도리를 벗었는데 갈빗대와 배꼽 사이에 뿌연 갈색 흔적이 여섯 개 나 있었다. 모르는 새에 난 상처인 줄 알았는데 만져 봐도 전혀 통증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흔적은 유두와 같은 간격으로 줄선 듯 바로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조사부원 앞에 서자 기묘한 표정으로 내 가슴팍을 들여다본다.
"피부병을 앓고 있나?"
"피부병이야 늘 앓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부병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텐데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조사부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 얼굴을 내 가슴 가까이 들이밀고 희귀 동물이라도 보듯 큰 눈을 깜빡이고 있다.
"자네 보기에는 내 눈이 어떤가?"
조사부원은 옆 사람을 검사하고 있는 동료를 불렀다.
"내가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부스럼이 난 거 아닌가? 부스럼이 져서 딱지가 앉은 거야. 그래서 마치 유두가 여섯 개인 것처럼 보이네. 꼭 동물들처럼 말이야. 특수 병이라 할 건 없어 보이는데."
"그런가?"
조사부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사부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갈라진 천막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림자들의 모양이 달라졌다. 내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내 눈에도 꼭 짐승의 유두처럼 보였다. 내 배 위에 난 여섯 개의 갈색 흔적 말이다. 부스럼도 딱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피부와 동일한 질감이었고 색깔이 조금 더 짙어지고 위로 돋아 오른 돌기였다. 그것은 엄연한 유두였다. 다만 사람의 것이 두 개라면 내 것은 여섯 개였다.
하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조사원은 내게 상의를 도로 입어도 좋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혀를 길게 내밀라고 했고, 냄새가 지독하다는 듯 코를 잠깐 찡그렸을 뿐 거기에서는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째서 유두가 여섯 개가 되었는가. 이것은 토막촌에 새로 돌기 시작한 전염병인 모양이다. 동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활개 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어도 사람이 동물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조사원들의 반응을 본다면 아직 활개를 치기 시작한 병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첫 희생자 되는 것인가, 다들 모르는 병이니 약도 써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가,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며칠을 드러누워 앓았다.
두려움과 무력감에 잠에 빠져 있다가 일어난 게 며칠이 지나서였는지 알 수 없다. 자꾸 엉덩이 근처가 근질근질해 가지고 치질이라도 걸린 거 아닌지 싶어 바지를 벗어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번엔 엉덩이 사이에서 꼬리뼈가 돋아 오르고 있다. 일전에 묘안정을 급하게 내려가다 한 번 크게 넘어진 일이 있었고 그때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었는데 그때 다친 부위가 부어오른 것은 아닌가도 싶었지만 벌써 보름도 더 전의 일이다.
곧 나아지겠지 싶어 며칠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내보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손을 넣어 만져 볼 때마다 뼈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제는 아예 바지를 뚫을 기세로 불쑥 튀어나왔다. 아직 동물의 것처럼 길진 않지만 부어오른 살이 아니었다.
분명 꼬리였다.


"그자의 얼굴을 봐서 무엇 하려고?"
라는 게 고리의 질문이었다. 글쎄, 그건 나도 대답하기 어렵다. 그 사람의 얼굴에 뭐가 써 있겠나. 그저 너나 나와 같이 둥그런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려 있을 테지. 얼굴을 본댔자 뭘 알 수 있으려고. 그래도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꼭 얼굴을 본다기보다는."
"아까는 그렇게 말했잖아. 얼굴이 보고 싶다고."
고리는 내가 왜 아카마 기후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고리가 내 마음이 궁금하듯이 나도 매사에 태평한 고리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어떻게 닥친 일들에 의문이 없이 그저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뭐라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치고 올라왔다.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도울게."
고리가 내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너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어. 대체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정으로서 그렇게 할게. 왜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리 할게."
고리가 말했다. 그것이 고리였다. 고리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카마 기후가 사는 곳을 알아봐 줘."
그릇에 막걸리를 콸콸 쏟아 붓고 단숨에 들이켠다.
"그저 얼굴을 보겠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직업이 없는 나보다는 시장에 붙박이 일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고리 쪽이 알아내기 쉬울 것이다. 옆 상점의 주인들과도 인사나 담소 정도는 나누는 사이였으니까. 더군다나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부유한 일본인들의 세간을 도와 일하는 조선인 하급이었다. 그들을 통해 아카마 기후의 사는 곳과 행선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닷새쯤 뒤에 고리가 나를 불렀다. 이 주일에 한 번, 후이전러우에 아카마 기후가 들른다고 일러줬다. 19일 오후 2시.
후이전러우는 중앙역 앞에 있는 청요릿집이다. 후이전러우라고 쓰인 붉은 간판에 황금색 글씨를 지나다니면서 여러 번 보았지만 내가 거길 들어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일은 없었다. 그 안이 어찌 꾸며져 있는지 상상해 본 일도 없었다. 태어나서 내가 본 것은 시장이 전부였다.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자랐다. 시장 바로 옆으로 뻗은 시가에조차 들어갈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 나다.


출입구에는 작은 분수가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동상의 머리에서 물이 떨어져 내렸고 그 물이 빛을 받아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났다.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번쩍이는 비단이 깔려 있고 옥빛 접시에 담긴 푸짐한 음식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갖가지 향신료가 풍미를 자극해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내가 그동안 알아 온 세상이 세계의 일부, 그것도 아주 약간이라는 생각에 얼떨떨해져 있었다. 천국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장 가격이 낮은 자장면을 시켰다. 노란 고무줄을 연상케 하는 시장의 자장면과 전혀 달랐다. 윤기가 나고 부드럽고 통통한 면발을 비비는 동안 나는 내가 왜 거기 있는지 잠시 잊었던 것 같다. 너무 맛있어서 아카마 기후에 대한 분노조차 잠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맛 때문이 아니라 포만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자장면이든 아니든 일단 배부르다는 감각을 실로 오랜만에 느꼈다.
배가 부르자 스르르 졸음이 쏟아졌다.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에 고리가 일러준 대로 두 시경에 아카마 기후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배가 불렀다는, 그 말뜻이 무엇인 줄 이제 알았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이제 괜찮다'는 말이었다. '더 원하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거를 모조리 잊고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서서히 사라졌고 아카마 기후가 나타날 시간이 다가오자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단무지를 씹으며 그 마음을 달랬다.
기후가 등장한 것은 두 시가 조금 넘은 십오 분경이었다. 그가 들어섰을 때, 마치 나는 그전에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알아보았다. 키가 큰 젊은 사내와 함께 나타난 그는 어린아이로 착각할 정도로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쥐처럼 반짝이는 눈에 둥그런 안경을 쓴 노인이었다. 앞으로 살 날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흰 피부 위에는 검버섯이 군데군데 눌러앉았고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거동하고 있었다. 후이전러우의 단골인 모양으로 늘 앉던 좌석인지 미리 예약해 둔 것인지 몰라도 테이블을 찾아가는 동선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노인이 주문한 음식이 상 위에 펼쳐졌다. 노인의 앞자리에 펼쳐진 갖가지 음식들은 그들이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시장 사람들이 굶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세상의 많은 음식들이 여기 아카마 기후의 테이블에 몰려 있었다. 다른 이들의 몫이 그자에게로. 그래서 우리들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이었다.
기후의 정면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조선인으로, 키가 훤칠하고 꽤 잘생긴 용모를 하고 있었다. 한복이 아니라 신식의 양복 차림이었고 기후와는 일본어로 대화했다. 시장을 관리하고 아카마 기후에게 상인들을 연결해 주는 소개업자인 모양이었다.
"다음 달이면 이 가게도 사들일 수 있습니다."
소개업자가 말하자 아카마 기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머리에 힘이 없어서 떨리는 것인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고기튀김을 하나 집어 우물거리며 씹었다. 소개업자는 음식에 손을 대지는 않았고 가지고 온 문서 같은 것들을 그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했고,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카마 기후는 '요이' 아니면 '이에' 이 두 단어만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좋다,
아니다.
허망했다. 그게 내가 시장에서 쫓겨난 과정의 전부였던 것이다. 아카마 기후의 한 마디. '요이'. 이 가게도 사들일 수 있다는 소개업자의 말에 성의 없는 중얼거림에 가까운 한 마디 답변. '요이'.
그 한마디가 내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원인이었다. 내가 평생을 바친 가게에서 쫓겨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사위를 던지듯, 가위 바위 보를 하듯 결정된 일이었다. 고작 2, 3초 정도의 망설임 끝에, 요이.
울분을 가라앉히고자 바람을 좀 쏘일 겸 뒷마당에 나와 서 있는데 소개업자가 뒤따라 나왔다.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한 대 권한다. 침을 퉤 뱉어 주고 싶었으나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담배를 받았다.
"오늘 오신다는 얘기는 미리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오랜만에 피운 담배 연기로 머리가 팽 돌았다.
"이렇게 얼굴을 뵙고 나란히 서 있으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일본인의 하수로 있는 작자가 동지라고 말하니 기분이 나빴다.
"별로 내키지 않는 말이네요. 나는 전에 당신을 본 일도 없고, 이깟 담배를 나눠줬다고 그런 말을 한다면 도로 무르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 너그러운 표정조차 기분이 나빴다.
"죄송합니다. 오늘 아카마를 처분하신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에 제 표현이 넘쳤나 봅니다."
"기쁠 게 뭐 있습니까. 내 보기에는 당신은 아카마의 동지로 보이는데."
하수라는 표현이 기분 상할까 싶어 단어를 바꿨다.
"저에게는 동지가 없습니다."
소개업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전엔 친구가 많았습니다. 적이라는 것은 불명확하고 그때그때 바뀌었으나 친구만은 확실했지요."
그는 잠시 과거의 어떤 시기를 떠올리는 듯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주변 사람들 모두를 나는 친구로 여기고 지내 왔지만요. 하지만 나에겐 친구가 없습니다. 왜인 줄 아시오? 내겐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궤변처럼 들렸다. 친구가 많다면 적이 줄어들고, 또 적이 많아지면 친구가 적어지는 것이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가,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먼저고 그에 반하는 이들이 적이 아니라, 적이 먼저이고 그 적과 함께 싸우는 이들이 친구지요. 그러니 적이 없는 이에게는 친구도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외로우니 어쩌니 하며 마치 사치처럼 그런 말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단것을 잔뜩 먹은 뒤에 쌉쌀한 은단 한 알을 즐기겠다는 겁니까?"
"왜 분노의 화살이 제게 돌아오는 겁니까? 아카마 기후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오? 무엇을 하고자 이곳에 왔습니까?"
그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순간 소개업자의 눈이 빛났다. 동그란 홍채가 점차 타원형으로 얇고 길쭉해졌다. 나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다 쿵 하고 자빠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을 때 그는 다시 홀 안으로 돌아간 뒤였다.
유리문을 통해 홀 안을 바라보자 소개업자는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로 아카마 기후에게 뭔가 설명했다. 하지만 그도 나처럼 배에 여섯 개의 유두를 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바지통 한쪽으로 긴 꼬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설명을 듣던 아카마 기후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소개업자가 주머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 기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기후가 일어나 천천히 걸어 마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팡이는 의자 옆에 그대로 놓아 둔 채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고자 이곳에 왔습니까?
무엇을 하고자 이곳에 왔습니까?


아카마 기후가 내 옆에 와서 섰다. 그가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둥근 미소를 지었다. 입술 옆으로 볼우물이 살짝 패었다. 기후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거칠고 넓적한 손을 올려 내 등을 찬찬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전에 못 보던 녀석인데. 어디에서 왔지?"
기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깨가 내려앉고 배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이 닿자 아카마 기후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아카마 기후 이 욕심 많은 놈, 빼앗아간 가게들을 도로 돌려놓지 못하겠느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이 울음소리를 닮은 고양이 울음소리만이 후이전러우 마당에 울려 퍼졌다.
"시장의 가게들을 죄다 사들여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
마찬가지였다. 내 입에서는 뜻이 전달되지 않는, 울음 섞인 탄성 같은 짐승소리만 날 뿐이었다.
아카마 기후가 내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키모찌 요이, 키모찌 요이."
아카마 기후가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의 손이 내 등에서부터 꼬리를 훑어 내렸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힘껏 뛰어올라 아카마 기후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정화

작가소개 / 최정화

1979년 인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2012년 단편소설 「팜비치」로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2016년 단편소설 「인터뷰」로 젊은 작가상 수상.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 『모든 것을 제자리에』, 단편 단행본 『부케를 발견했다』, 장편소설 『없는 사람』, 『흰도시 이야기』, 경장편소설 『메모리 익스체인지』를 출간하였다.


《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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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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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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