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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 작성일 2021-07-01
  • 조회수 2,841

[단편소설]



수영장



이소정




판을 다시 만난 곳은 수영장이었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치 물속에 표지판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수영장은 구 소방서를 개조해 만든 청소년수련관 안에 있었고 담쟁이넝쿨이 화상 환자의 핏빛 거즈처럼 건물의 반을 덮고 있었다. 판은 늘 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소방서가 옮겨간 것이 그것 때문인 것처럼 말했다.
더럽게 불을 못 끄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묻자 판은 그냥 알아요, 나는, 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세상의 모든 소방관들에 대해 생각할 때도 있다며 내 어깨를 쳤다. 해봐요, 라고 했다. 나는 소방관이 아니었다. 될 마음도 없었다. 체력 테스트가 문제구나, 라며 판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판과 함께 담쟁이넝쿨을 바라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차마 구하지 못한 사람과 목숨은 구했지만 인생의 절반을 날려버릴 만한 흉터가 남은 사람 중 누가 더 그들의 마음을 찢어 놓을까 궁금했다. 생각을 하는 동안 계절은 또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담쟁이넝쿨은 불타올랐고 종종 우리는 영영 구조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그 앞에 서 있었다.
수영장은 오래된 지린내와 소독약 냄새의 완벽한 콜라보였다. 월요일은 문을 닫았고 자유 수영은 이천 원이었다. 수영강습이 많은 주말에는 입장이 제한된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료였다. 우리는 항상 입장이 가능했다. 그냥 그랬다.
평일이라 한산하군.
평일의 수영장은 한산했고,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은 일관된 하늘색 타일의 지루한 동어반복 같았다. 수영장 물은 늘 사분의 삼쯤 차 있었고 약간 따뜻할 정도로 데워져 있었다. 수영장 물을 도대체 언제 가는지에 대해 판과 실랑이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했고 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라고 했다. 우리는 자주 그 일로 싸웠는데 그때마다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우리는 하루 정도 작정하고 수영장에서 밤을 새울 계획도 갖고 있었다. 별이 뜨면 수영장이 천문대 같을 거야, 판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별관 수영장 천장은 거대한 돔이었다. 돔은 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을 말했지만 나는 돔을 말할 때면 늘 물고기가 떠올랐다. 수영장을 볼 때도 그랬다. 그건 『우리나라의 물고기들』이라는 책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책을 쌍둥이에게 읽어 준 적이 있다. 생각보다 자주 그랬다. 『우리나라의 물고기들』의 구성은 단순했다. 참돔, 감성돔, 돌돔, 자리돔처럼 같은 종에 대한 사진을 주고 그 옆에 간략한 설명과 삽화를 곁들이는 식의 담백한 책이었다.
돔은 가시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런 것처럼.
수영장에서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목소리가 울려 왕왕거렸다. 이런 얘기를 그때 쌍둥이에게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의 판처럼 못 들은 척했을까? 나는 이제 그 일을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내 옆에는 대답 없이 돔 모양의 천장을 바라보며 수영을 하는 판이 있고, 판은 물고기 돔 같다. 아니면 부록에서 봤던, 제주에서 돔을 잡을 때 사용했다는 테우라는 배 같다. 투명한 돔 모양의 천장으로 구름이 배회하자 수영하는 판의 몸 위로 전혀 다른 방식의 모자이크가 새겨졌다. 판이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나는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판! 판! 너 진짜 몇 살이야?
5학년이요.
한참 후 판이 대답했다.
몇 살?
판은 할 수 없다는 듯 수영장 바닥에 발을 대려고 애쓰면서 오!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판은 늘 5학년이었다. 어제도, 그저께도, 작년에도. 가끔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 판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처럼 보였다. 판은 아주 작았고 너무 말라 수영을 할 때면 물 위에 꼭 종이인형을 띄워 놓은 것 같았다. 5학년은 아직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고, 나는 그 사실이 안심이 됐다. 아저씨 심심해요, 그날에 대해 말해 줄래요?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판은 또 졸랐다.
잘 들어 마지막이야. 이제 나도 점점 희미해져.
마지못해 들려주는 것처럼 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좋아했다. 다시 그날을 이야기하면 다시 그 시간을 사는 것 같았고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마지막이야!
네, 네.
판이 대답했다. 하지만 판도 나도 진짜 마지막을 몰랐다. 사람들이 언제 마지막이라고 하는지, 마지막 순간에 뭘 해야 하는지, 마지막을 알 수 없을 때는 뭘 떠올려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늘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닌 게 되는 것처럼. 마지막이 영원히 복기라도 되는 것처럼.
판은 이제 몸을 뒤집어 배영을 하고 있다. 나는 사각의 수영장 모서리에 앉아 발만 첨벙거렸다.


*


그날 아침 아내는 오믈렛을 만들고 있었다. 쌍둥이는 숟가락으로 경쟁하듯 식탁을 마구 두드렸다. 한 명이 시작하면 무조건 다른 한 명이 따라하는 게 쌍둥이의 룰 같았다.
그만 하지 못해!
아내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쌍둥이는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버릇이 없었다. 오히려 아내가 분개할수록 그 일을 더욱 즐겼다. 나는 아내의 말을 늘 못 들은 척 넘겼다. 하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는 있지만 동시에 둘은 힘들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비트코인 시세를 확인했다. 비트코인은 개장과 폐장이 따로 없었다. 낮과 밤이 없었다. 쥐새끼들처럼 돈을 퍼갔다. 아내는 그런 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베이컨, 양파, 양송이, 피망, 토마토를 미리 볶아 소를 만들었다. 식용유를 팬 전체에 코팅하듯 바르고 버터를 크게 한 숟갈 떨어뜨렸다. 싱크대에 바짝 붙어 서서 내용물이 고루 익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중간중간 쓰다 남은 버터를 은박지에 싸두고 계란물을 풀었던 볼을 싱크대에 던지듯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내는 앞치마에 물기 묻은 손을 닦고 정신을 집중해 스크램블 된 계란을 럭비공 모양으로 접으려고 노력했다.
삐—익!
그때 아파트 안내방송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낡고 오래된 주공아파트 인터폰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분리수거 날짜를 공지하거나 옥상에 고추를 말리지 말라는 경고, 어떤 날은 주차선 가운데 주차한 입주민을 찾는 방송이 이어졌다. 소매치기가 가방을 낚아챌 때처럼 매번 소리는 거칠다 못해 신경질적이었다. 쌍둥이는 으윽- 거리며 귀를 막았다. 기다렸다는 듯 숟가락 장난을 멈췄다. 그게 다였다. 귀에 거슬리는 삐- 이후 방송은 없었다.
누가 실수로 스피커를 켰나 봐.
아내가 말하자 무슨 신호처럼 아이들은 동시에 식탁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바닥에 콩 자루를 쏟아 부은 것처럼 거실을 뛰어다녔다.
늦었어. 좀 잡아 앉혀 봐.
아내의 말에 나는 아이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젓가락으로 콩을 집을 때처럼 잘 되지 않았다. 판은 늘 이 타이밍에서 웃었다. 젓가락으로 콩을요? 애들 이름이 뭐예요? 라고 물었다. 나는 매번 아이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판을 향해 애매하게 웃었다. 기억은 공간, 시간, 인물 순으로 사라진다고 했다. 나는 반대였다. 공간과 시간 속에 인물들이 흐릿했다. 마치 물속에서 말을 할 때처럼 나는 누군가의 이름 앞에서 자주 숨이 찼다.


*


너도 들었니? 판?
판은 물 위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 오후 뉴원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했을 거야.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괜찮아.
늘 그렇듯 판은 조금 상심한 것 같았다. 처음 내 이야기를 듣고도 판은 믿지 않았다. 지금도 판이 그 일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판은 이제 팔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물 위에 떠 있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생존 수영 시간에 배웠어요.
판은 진짜 나뭇잎처럼 둥둥 떠 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썩은 나뭇잎처럼. 판은 일주일에 한 번 생존 수영 수업을 위해 청소년수련관에 왔다고 했다. 수요일 아침마다 판은 등교와 동시에 수영복을 챙겨 스쿨버스를 탔다. 판은 몰랐다. 그저 지루한 수업이 아니어서 좋았다고 했다. 낡고 해진 수영복이 조금 걱정됐지만 어차피 같은 반 아이들은 판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버스 창으로 파란 하늘이 지나가잖아요. 여름의 끝자락이었는데, 건물 옥상에서 빨간 잎 하나가 차창으로 떨어졌어요. 돌아보니 정항우케익과 올리브영이 있는 건물이었어요. 건물 옥상에 나무 한 그루가 불타오르고 있었어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붉은 잎이 파란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데 물고기 한 마리가 내게 헤엄쳐 오는 것처럼. 중국 단풍나무였어요.
판의 좋은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판에게 생존 수영은 다른 의미로 판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판은 생존보다는 실존을 원했다. 생존 이후의 실존을 말이다. 생사 확인을 해줄 동사무소 복지과 직원의 정기적인 방문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동정심을 종종 자신의 인품으로 착각한다고도 했다.
판, 우리 이제 밥 먹을까?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요.
수영복을 갈아입는 라커룸에서 수영강사는 조용히 판의 몸에 난 멍 자국의 개수를 셌다고 했다. 그건 계단에서 넘어진다거나 축구를 하다 생길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는 신고했고 판은 수업이 끝나고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처음 판은 사고라고 했다.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어 길을 건너는 위기 탈출 게임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금방 들통이 났다. 그런 일은 없었다. 거짓말 때문에 이후 판은 위센터에서 심리 상담을 받았다. 판의 아버지는 아동학대와 주취폭력으로 집행유예를 받았고 판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센터장은 판이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며 오랜 방치의 결과로 학습부진이 심각한 상태라고 평가하고 사인했다. 그녀는 판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고 그것만으로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겹도록 그런 아이를 봐왔다. 안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직업윤리 때문에 판을 만났다고 했다.
아버지가 때릴 때 어땠니?
대답이 없자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니? 라고 물었다. 판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착하구나. 상처 좀 보여줄래?
상처는 없어요.
왜 없니? 넌 매일매일 아버지에게 맞는 아이야.
저기요, 아줌마, 고통은 늘 정면으로 마주해야 해요. ……제대로 맞기만 하면 돼요. 잘못 맞으면 상처가 나고 더 아파요. 나는 이제 그걸 알아요. 그걸 터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요.
그녀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후 꽤 긴 시간 동안 판은 홀로 상담실에 앉아 파란 하늘을 봤다. 물고기가 다시 헤엄쳐 오지는 않았다고 했다.


*


붉은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욕조에서 오래 첨벙거렸다. 아내와 나는 저녁 뉴스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그건 시계가 7시 20분을 가리킬 때쯤 나온 속보였다. 뉴원에서 누출 사고가 있었고 처리 중이라는 짧은 자막이 다였다. 이후 숨 가쁘게 뉴스가 전송됐다. 뉴원은 발전소 사고 이후 상황 파악이라는 명목으로 12시간 만에 공식발표를 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백색비상이 발표되고 예비현장지휘센터를 발족했다며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아나운서는 평상시와 같이 생활할 것을 당부했지만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뉴스를 보던 아내는 놀란 목소리로 아침이야, 라고 말했다.
뭐?
아침에 아파트 안내방송 말이야. 이게 그거였나 봐.
방송은 없었어.
그래, 그런데 왠지 이거 같아.
아내는 불안한 듯 거실을 서성거렸다.
확실해! 오늘 아침 어린이집 차를 기다릴 때 들었어, 관리소장이 출근 직후 서둘러 퇴근을 했다고 말이야.
다른 일이 있었겠지.
그때 뉴스는 재앙이라는 말을 처음 내보냈다. 몇 분 후 공영방송으로서 단어 선택이 적절치 못했다는 사과 자막이 나왔다. 나는 창밖을 봤다. 재앙이었지만 폭발 같은 건 아니었다. 찢어지는 폭발음도,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목욕탕 굴뚝의 치솟는 연기도 없었다. 저녁 식탁 위에는 아이들이 먹다 남긴 밥과 미처 뚜껑을 닫지 못한 김치통이 그대로였다. 식은 콩나물국과 진미채, 계란말이가, 아이들의 숟가락에 들러붙은 흰 밥풀들이 오히려 처참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8시, 청색비상이 발효되자 아내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관리소장의 친척이 국회의원이라고 했어.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혼자 퇴근을 할 수 있지? 라고 중얼거리며 창가 쪽으로 갔다.
하늘이 온통 핏빛이야.
꿈을 꾸듯 아내는 말했다. 그건 아주 잠시 그랬다. 하늘은 이내 검붉은 오디색으로 변했다. 서둘러! 내가 말하자 돌아선 아내의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한여름 잘 익은 오디를 먹으면 입술이 검게 변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아내는 그렇게 보였다.


서둘러! 물속에 너무 오래 있으면 네 입술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배가 고프네, 라며 판은 수영장 밖으로 나왔다. 판의 손발이 어제보다 더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 곧 미쉐린의 심벌이 될 것 같았다. 판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나는 잠시 그것이 판의 눈물인 듯 착각이 들었다. 나는 수건으로 판의 몸을 닦았다.
미진이 엄마 보러 갈까? 판이 말했다.
그 여자 미친 여자야.
알아요, 그런데 안 보면 보고 싶어.
판은 엄마가 없었다. 네가 엄마가 없어서 그래, 라고 말하자 그래요, 난 엄마가 없어요, 그래도 우리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판이 나를 쏘아봤다.
신이 왜 엄마와 아빠를 주고 매번 한쪽을 망가뜨리는지 알아요?
왜?
신은 완벽을 사랑하지 않아요.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요. 결핍이 있어야 자신이 더 많이 자주 호명될 테니까.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애들을 자꾸 괴롭히는 거예요.
우리는 수영장을 나와 텅 빈 도시를 배회했다. 발밑으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전단이 굴러다녔다.


1,000만 명 가운데 100명꼴로 발생하는 소아 갑상샘암이 인구 200만 명 도시에서 17배에 달하는 3,300명에게 발병. 수산물 오염도 CSS-1377 수치 치솟아 전량 폐기…… 그곳은 안전한가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1. 마스크 쓰기 2. 긴 소매 옷 입기 3.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바로 벗고 버리기 4. 자주 샤워하기 ……비 맞지 않기.


전단 속 알 수 없는 숫자와 글자들을 밟고 우리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꺼내 먹었다. 음식들은 아직 먹을 만했다. 운이 좋으면 치킨이나 피자 같은 것들이 식탁에 그대로 있을 때도 있었다. 판은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래 피자랑 치킨은 식은 게 더 맛있어요, 라고 말했다. 치킨과 피자는 그렇다 쳐도 김빠진 콜라는 영 아니었다.
오늘은 어느 집에 들어가 볼까? 신김치 같은 게 먹고 싶어. 아주 짠지가 된.
아저씨 집에 가면 안 돼요?
불쑥 판이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멀리 귀환곤란구역 표지판을 쳐다봤다. 붉은 글씨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으니 유턴 해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네?
……안 돼.
왜요? 가보고 싶어요. 아저씨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싶어.
우리 집엔 아무도 없어.
아저씨 지금 장난해요? 이 도시에는 아무도 없어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다고요!
판이 소리쳤다. 회전교차로의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도시의 꺼지지 않는 신호를 지켜 길을 건넜다.
다른 집은 다 돼도 우리 집은 안 돼.
그러니까 왜요?
그러니까 왜?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대출이 많아…… 딱 현관까지만 우리 집이야, 우리 나이가 되면 집이 그냥 짐이야. 판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짓말이었다.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들어가는 것처럼 집으로 가는 길이 익숙할까 봐 두려웠다. 거짓말이었다. 판을 따돌리고 나는 매일 집으로 갔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방치된 재활용 쓰레기들이 보였다. 연두색 고무공이 신발장 아래 처박혀 있었고 슬리퍼가 벗어 던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마치 그 집을 처음 가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목욕탕 입구에는 물기를 닦고 던진 수건과 갈아입은 빨랫감이 뭉쳐져 있었다. 아이들 방문을 열자 읽다 던져 둔 책과 장난감이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똑같은 침대에 똑같은 시트, 똑같은 베개와 잠옷. 똑같은 두 개의 물건들이 불필요한 삶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후로 그건 언제나 선택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서는 아내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나올 것 같았다. 화장대에 아내의 가죽시계가 그대로 있었다. 아내는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시계에 대해서는 탐을 냈다. 때가 되면 새로운 시계를 하나씩 샀고 나는 늘 그걸 물욕으로 치부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다. 집 안을 다 돌아볼 때까지 울지 않았다. 냉장고에 붙은 아이들의 그림이나 가족사진 같은 것을 볼 때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거실에는 한쪽 면이 꺼진 소파가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놓여 있었고 그곳에 앉자 눈물이 났다. 거푸집처럼 꼭 맞는 어떤 시간이 나를 가만히 껴안는 것 같았다.
시간이라는 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교문을 나올 때 아내가 쓸쓸한 목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치 아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그 말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처럼.


구시가지 쪽으로 가보자. 거기 시장도 있어.
긴급보호조치 지정구역은 사고 발생지로부터 30km였다. 도시 외곽으로 높은 담장이 쳐졌다. 판은 마름모꼴 모양의 철조망을 막대기로 툭툭 치며 걸었다. 더 이상 신간이 들어오지 않는 시립도서관을 지났다. 판은 심심하면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다. 가끔 어떤 페이지들을 찢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돌아온 판이 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하고 신이 나서 뛰어온 적이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요.
개구리는 이상한 파란색이었다. 머리부터 물갈퀴까지 모두 비닐처럼 얇고 투명한 피부에 둘러싸여 있었다. 언제나 그런 것들이 있었다. 작고, 미끄럽고, 축축한 것. 이제 막 태어난 것 같은 것들.
만져 봐요.
싫어.
징그러워서 그래요?
아니.
무섭구나?
놀리듯 판이 말했다.
아니.
그럼 왜요?
살아 있으니까.
왜 살아 있는 게 싫어요?
죽을 거니까.
그게 무섭다는 거예요.


*


8시 15분 적색비상이 선포됐다. 집은 고요했지만 더 이상 고요는 고요하지 않았다. 이후 안전 매뉴얼에 따른 혼란스러운 대피가 이어졌다. 저녁 8시 30분. 도시의 모든 사람이 차를 몰고 나왔다. 민방위 경보, 방송의 긴급속보, 휴대전화 재난문자, 차량 가두방송이 온 도시를 덮쳤다. 그에 비해 대피 요령은 간단했다.


1. 집 안의 모든 전원을 차단할 것.
2. 개인물품과 귀중품, 평소 먹는 약, 갈아입을 옷, 휴대폰 및 충전기를 챙길 것.


실제상황은 간단하지 않았다. 통신은 폭주했고, 두절됐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미처 출발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라디오를 켰다. 단출한 차림이었고 쌍둥이는 밤 외출에 신이 났다.
놀이터에 나간 아이가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아이는 다섯 살이고, 파란색 줄무늬 티셔츠에 노란 샌들을 신었…… 아니, 나이키 운동화예요. 아니 샌들…… 나이키…… 나이키!
라디오를 통해 여자는 미친 듯이 울었다. SUV 차 안에서 아내는 다급하게 뒷좌석의 아이들을 확인했다. 아이들은 안전벨트를 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애벌레 모양의 젤리를 뜯어 먹었다. 아내는 부스러기가 남는 과자를 잘 사주지 않았다. 아내는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불과 몇 십 분 전 아이들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상 대피 매뉴얼이 발표되자 아내는 욕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억지로 건져냈다. 나는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 시간에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안심이 됐다.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돌아올 것처럼 우리는 가볍게 아파트 현관문을 닫았다. 지난 몇 년간 몇 번의 지진 대피가 있었다. 그때마다 별다른 일 없이 상황은 정리됐다.
다행이야.
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자 아내가 중얼거렸다. 마치 새로 뽑은 차 안에 아무런 부스러기도 흘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런 작은 일에 큰일을 숨기는 건 아내가 상황을 처리하는 방식 같았다.
집으로 가라고 해주세요. 빨리! 제발, 엄마가 기다린다고…… 두희야! 두희야!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차량용 라디오를 통해 삐-익 소리가 끔찍하게 흘러나왔다. 살면서 누군가의 불행이 그만큼 지척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후 재난방송에서는 냉철한 집단 이성을 강조했다. 국가 운명공동체 존폐의 차원에서 긴급 비상회의가 이어지고 있으며 유일한 대책은 긴급한 대피뿐이라고 했다. 국가 차원의 주민소개로 확대 정비와 주민 운송 수단 확보, 보호소 운영 등의 대책이 마련됐다고 했다. 몇 분 후에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확산할 수 있으니 풍향의 직각 방향으로 되도록 멀리 대피해야 한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다행히 당분간 비 소식이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여러 번, 가족의 안부는 일단 대피 후 구호소에서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이 현대적 재앙은 무색무취가 특징이었다.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으며 어떤 징후를 통해 인지한 순간은 이미 당한 후였다. 더 이상 방송에서는 두희야를 울부짖는 감정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 차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시간은 아주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


판과 나는 화학단지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언제나 걷다 보면 그곳이었다. 거대한 배관과 검은 연기가 구불구불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구시대적인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철조망 경계 가까이 갔다. 바닥에는 석회 가루가 잔뜩 뿌려져 걸을 때마다 버석거렸다. 뜨거운 공기가 커다란 공처럼 바닥에서부터 부풀어 올랐다. 입안에서 모래 알갱이가 씹히는 것 같았다. 미진이 엄마였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방독면을 쓴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꽃무늬 치마가 바람에 날렸다. 그녀는 우리만 보면 방독면을 벗고 소리를 질렀다.
미진이, 우리 미진이 좀 찾아 줘요! 나는 그곳에 못 가요. 아직 그곳은 안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개요?
나는 항상 그렇게 물었다.
아니, 미진이, 우리 미진이를 나는 한 번도 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미진이 엄마는 개엄마였다. 사고가 있던 날, 그녀는 자신의 딸 같은—아니 딸이라고 했다—미진이를 깜박 잊었고, 그 사실을 대피소에 도착해서 알았다. 그건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시츄 미진이를 그녀는 평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장 가족이 필요한 순간 가족을 버리고 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매일 가족을 찾아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체육관에 임시로 설치된 수백 개의 다닥다닥 붙은 텐트 중 하나에서 생활했다. 각 구호소의 대피 명단이 매일 업데이트됐지만 미진이는 없었다. 개는 없었다. 지금 당신 개가 중요해? 그게 중요해? 당신이 사람이야? 사람들은 그녀를 욕했고 한밤중에 그녀의 텐트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미칠 듯이 두려웠다. 그들에겐 무색무취한 공포보다 미진이 엄마의 눈물이 훨씬 더 다루기 쉬웠다.
아줌마,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잊어버리고 살아요.
어쩌면 그건 그녀에게 한 말이기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또 그 말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할수록 그 일은 더욱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기에 어쩌면 그 말은 이미 오래전에 이 도시에서 죽은 말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당신은 그게 돼요?
미진이 엄마는 악을 썼다. 정부는 대형 축사의 소와 돼지들을 모두 안락사 시켰다. 가축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었고 한 구덩이에 묻혔다. 애완동물들은 자생 능력이 부족해 굶거나,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아 일찌감치 죽었다고 했다. 살아남은 동물들도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잊어요.
그게 돼? 어떻게 그게 그렇게 쉽게 돼? 당신은 부모도 없지. 자식은 더더욱. 있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그럴 수 없지! 그건 인륜이거든! 버린다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미진이 엄마는 여느 때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매번 인륜이라는 말이 인류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당신은 그게 돼?
미진이 엄마가 주먹으로 철조망을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어제도, 그제도, 작년에도.
……한번 버려진 걸 또 어떻게 버려 ……어떻게 그래.


*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다 같이 가. 조용히 있을게.
아내는 뒷좌석에서 터닝메카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쌍둥이를 불안하게 쳐다봤다. 조용히 해,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떠들지 않았다. 과자 부스러기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여러 번 흘리지 마, 라고 소리쳤다. 아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정작 놀라는 건 나였다. 긴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꾸역꾸역 차들이 늘어 갔다.
안 되겠어! 먼저 가. 이대로는 다 제시간에 도착 못 할 거야.
비상 깜빡이를 켜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다행히 얼마 전 대형마트에서 새로 산 쌍둥이의 자전거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반으로 접힌 전문가용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지난해 오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같이 타다 방치한 내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맞춰 안장 높이를 조절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뾰족한 안장을 아내는 불안한 듯 쳐다봤다. 빨리 타! 아내는 망설였다. 억지로 차에서 끌어낸 쌍둥이가 울기 시작했다. 매달리는 아이들을 사납게 떼어내 자전거에 앉혔다. 안전모를 씌웠다. 아이들을 한번 안아 줄까 생각했지만 그만뒀다. 마지막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앞만 보고 가. 전화할게. 길이 뚫리면 중간에서 만나면 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빨리 와, 라고 말했다. 소실점처럼 자전거가 점점 더 작은 점이 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시내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돌리려고 했다. 사방에서 클랙슨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멀었지만 나는 사고지역을 관통해 도시 외곽의 해안도로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다시 만나야 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목이 말랐다. 생수가 있었지만 그걸 마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중앙선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차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차는 한동안 단단한 진흙 속에 발을 집어넣고 걷는 것처럼 좀처럼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일일이 돌아다니며 사정했다. 죽고 싶어요? 미쳤어요? 사람들이 말했다. 그렇게 천천히 도시의 경계지역에서 멀어졌다. 다행히 사고지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차량은 서서히 줄었고 어느 순간 도로는 텅 비었다. 군데군데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주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천천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최대치로 올렸다. 아버지를 찾아 구치소에 갔다 사고 소식을 듣고 갑자기 튀어나온 판을 치었다. 차는 오래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판, 그날 넌 죽었어.
아저씨도요?
……그래.


노을이 우리를 가만히 덮쳤다. 머리 위로 대형 전광판에서 영상과 자막들이 뒤엉켜 송출됐다. 화면은 드론을 띄워 촬영한 폐쇄지역을 천천히 비췄다. 텅 빈 도시가 화면 가득 나타났다. 불 꺼진 도시와 문 닫힌 상점들, 은행과 공원이 차례로 스쳐갔다. 페인트가 벗겨진 도시는 한 가지 색깔로 통일됐다. 주유소는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고 주택의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의자들이 녹슨 자판기 옆을 지켰다. 드론은 시 외곽의 넓은 들판으로 계속해서 날았다. 우리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것을 바라봤다. 폐기물들이 일련번호를 붙인 검은 포대에 담겨 줄지어 서 있는 도로와 학교와 집, 논밭을 지나 빈 옥수숫대가 흔들리는 곳에 이르자 화면에 검은 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드론이 빙글빙글 돌며 지상으로 바짝 몸을 낮추자 여러 개의 소실점이 점점 커졌다. 점점 가까워졌다. 점점 불어났다.
그곳에는 너무 많은 미진이들이 있었다.
너무 많은 배고픔과 추위와 공포가 옥수수 밭에서 드론을 쫓아 달려 나왔다. 개와 고양이와 소와 닭, 염소들이 버려진 시간 속에서 버려진 것들이 제시간을 다하고 있었다. 나무와 꽃과 강물이, 폐허를 공격하는 시간의 불복처럼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었다. 미진이 엄마가 미친 듯이 미진이를 불렀다. 하지만 그건 모두 미진이이기도 했고 전혀 미진이가 아니기도 했다.
판은 5학년처럼 울었다. 미진이 엄마는 가방에서 전지가위를 꺼내 철조망을 자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찢어진 세계의 한 페이지가 너덜거리며 바람에 펄럭거렸다.


*


아스팔트 위로 천천히 피가 스며들고 있었지만 판은 아직 죽지 않았다. 판은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오래 팔딱거렸다. 판은 작았고 쓰러진 채 나를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판과 눈이 마주쳤을 때, 정작 그 순간 도움이 절실한 사람은 나 같았다. 어떤 이유로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도로는 텅 비었고 공단의 굴뚝들은 여전히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괜…… 찮니?
나는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판을 내려다봤다.
목이, 목이 말라요.
판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차 안에 있는 생수병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차를 향해 걸었다. 운동화 바닥이 끈적거렸다. 판이 내게 원한 것은 고작 생수 한 병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 차로 돌아갔고 그 모습을 판은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엎드린 채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나는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머리에 피…… 피나요.
판은 희미하게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이마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다시 차로 향했다. 운전석 차 문을 열자 따지 않은 새 생수병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맸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백미러에 비친 판의 머리가 살짝, 1~2센티미터 정도 바닥에서 떴다 다시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119에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통화 중이었다. 초과 연결음의 삐- 익 소리만 귀를 찢었다.


그날 타오르는 재를 뿌리는 검은 비도, 끔찍한 비명도 흰 담요를 덮고 길가에 버려진 주검도 보이지 않았다. 매운 떡볶이 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들끓었고, 세탁소의 빨래들은 오래전에 죽은 자의 명부처럼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고요했다는 말이 맞았다. 오히려 너무 무료했다. 지난 평범한 날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날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전광판에서는 이제 사고 이후 인터뷰가 전송되고 있었다. 화면 속 남자는 거의 울 것처럼 말했다. 조금만 더 일찍 대피가 시작됐다면 모두 살았을 거래요. 그의 말 속에는 여전히 평범을 가장한 불안이 묻어났다. 연신 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인질극의 인질 같았다. 그날 이후 모두가 그랬다. 온 나라가 정신없이 겁에 질렸다. 고요한 그날이 지나고 모두 그 고요한 공포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조그만 여자 아이는 수돗물은 마시지 않고 오염된 공기를 피하기 위해 종일 마스크를 쓰고 생활한다고 했다. 또 앞으로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으며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이런 고통이 대물림되는 것이 몹시 두렵다고 말하고는 울었다. 화면은 계속해서 지직거렸다.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요?
……
착한 신?
아니.
……
소방관.


*


하늘을 헤엄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요.
오래 부식된 물마개가 뽑히자 녹슨 배관에서 끄륵- 끄끅 같은 소리가 났다. 흡사 살 속에 단단히 박힌 덫을 빼낼 때 짐승이 내는 소리 같았다. 판은 물의 진동을 느끼고 잠시 휘청했다. 바닥과 천장을 공명하던 소리가 사라지자 수영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늘색 타일 바닥에서부터 작은 소용돌이가 바람개비 모양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판은 내게 손을 높이 쳐들었다. 팽팽한 고무줄을 억지로 잡아당길 때처럼 판의 몸은 늘어났다. 국가대표 수영선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판이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잘 자랐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판은 눈부시게 탄력 있는 몸으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수영장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판! ……판! 판!
대답이 없었다.
판……판.
나는 천천히 수위를 낮추는 수영장을 오래 바라봤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고 자꾸만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판은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조용한 소용돌이만 누군가 입을 모아 부는 휘파람처럼 어떤 음을 만들어냈다.


물이 빠진 수영장처럼 도시는 텅 비었다. ■











이소정
작가소개 / 이소정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장웹진 202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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