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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 주세요

  • 작성일 2021-10-01
  • 조회수 6,308

[단편소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 주세요



임솔아




112주차│진도가 안 나가요│하연│2021.08.15.


다들 어디까지 가셨어요? 저는 셋째이모가 외삼촌을 죽인 곳까지 와 있어요. 더 나아가기가 심적으로 부담스러워요. 이후에 뭐가 또 오나요? 비행기 떨어진 곳까지 간 분 계신가요?






113주차│밑줄을 그으면 밑줄이 튀어나옵니다│지유│2021.08.21.


책을 읽을 때 나는 CCTV가 됩니다. 책 속의 세계는 아무리 핍진할지라도 나는 그저 보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독백이 들려온다거나, 내가 유일한 목격자인 양 상황을 알아채게 될 때에도. 책이 나에게 얼마나 깊이 관여하든, 그로 인해 내 자신이 얼마나 바쁘게 변화하고 있든, 나는 책 속의 인물을 상상할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진심에 호소한다 한들 그가 겨눈 총을 내려놓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합니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문장은 책 바깥으로 튀어나와 버립니다. 어느 문장이 나의 손과 물리적으로 관계를 맺고 책으로부터 멀어져 나에게 성큼 다가와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 문장을 밑줄이라는 것으로써 포획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밑줄은 어딘가 사냥과 닮았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서 읽을 때에 다른 이가 그어 놓은 밑줄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나는 책 속에서 이탈되는 걸 느낍니다. 밑줄이 곧으면 곧아서, 밑줄이 휘청이면 휘청여서. 기름기가 묻은 볼펜 자국의 밑줄일 때에는 밑줄만 보이고 문장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리고 창문 안을 비추던 카메라가 빠르게 뒤로 물러섭니다.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던 것일까, 책을 읽는 사람을 읽으려고 했던 것일까. 모르는 사람이 밑줄을 긋는 것을 나는 보고 있습니다. 나는 책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습니다.






┕ Re : 113주차│1권 438쪽 11째줄│진영│2021.08.21.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영화에서는 오페라 극장이 나올 때마다 무대보다는 좌석의 배치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듯해요. (ex. 1층 일반석에 앉아서 2층 박스석의 뒤늦게 나타날 귀족을 주시하는 장면) 그럴 때에는 무대에서 어떤 공연이 펼쳐지든 아무 상관이 없죠.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인물이 2층 박스석으로 총을 쏘는 게 아니라면요.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뮤지컬을 보러 가면 사람들이 말쑥하게 차려입잖아요. 저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뮤지컬을 보러 가진 않고요. 어떤 문화들은 익명의 관객이 스스로를 전시할 수 있을 때에 가까스로 지속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책에도 이런 요소가 분명 있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공연을 하고 있을까요?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요? (저는 2층 박스석 커튼 뒤에서 밀서를 운반하고 싶어요.)






114주차│제안합니다│하연│2021.08.22.


다음주 114주차 과제로는 마피아 게임 하면 어때요? 우리가 서로 나이나 직업 같은 걸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몇 명은 진실을 말하고, 몇 명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동안 우리가 읽었던 책에서 인물을 절묘하게 훔쳐오는 거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제빵사가 될 수도 있을 테고, 페르난두 페소아가 되어 상자에 원고를 모아 둘 수도 있을 거예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다음주는 지유 님이 과제를 낼 차례인 건 저도 아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에 제안 정도는 자유롭게 해볼 수 있는 것이죠?






111주차│329쪽부터 338쪽까지│혜리│2021.08.27.


뒤늦게 올려요.
A4용지 한 장을 펼친다. 작가가 책에서 제안한 대로 329쪽부터 338쪽까지를 함께 그려 보기로 한다. 이 페이지에는 사진, 악보, 시, DIY 매뉴얼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이 페이지들을 장소화한다면 어느 장면을 어디에 배치해야 할까. 똑같은 페이지를 읽고 우리가 상상한 공간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1층 오른쪽 벽에 창문이 있고, 창밖으로 폭설이 내리고 있으며, 창문 아래에 벽난로가 있다는 데에 우리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벽난로 왼쪽에 놓인 피아노 위에 악보가 놓여 있어야 하는지, 벽난로 속에서 악보가 불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식탁 위에 몇 개의 접시가 놓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유 님은 한 개의 접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하나의 접시는 바닥에 깨져 파편으로 흩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영 님은 두 개의 접시가 온전히 식탁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접시가 깨졌다는 사실보다 두 개의 온전한 접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공통점과 차이점은, 소통의 불가능과 불가능으로 가능해지는 소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불가능으로 가능해지는 소통은 어쨌거나 소통의 영역이다. 당신과 나, 타자와 내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문장을 통해 같은 상상을 하지 않게 될지라도 미묘한 같음 속에 있다는 것. 만약 이 책이 이런 면만을 확인하게 했다면, 상상력의 폐쇄성을 답습하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 페이지들의 진짜 매력은 아무래도 소통 불가능성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상상한 장면과 타자가 상상한 장면이 불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의 소통에 불일치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를 대화하게 한다. 우리가 함께 그린 그림에는 세 개의 접시가 있다. 접시는 두 개뿐일지라도 두 개의 접시는 식탁 위에 있고, 한 개의 접시는 파편이 되어 있다. 악보는 피아노 위에 놓인 채로 벽난로 속에서 불타고 있다.






113주차│이번에도│문경│2021.08.27.


저는 이번 주도 못 했어요. 죄송.






모두에게│지유│2021.08.28.


처음 모임에 참석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몇몇 분이 먼저 도착해 계셨는데,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각자 책을 뒤적이거나 핸드폰만 봤습니다. 그날 저는 여러분께 제가 짜온 독서 모임 계획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제 계획대로 모임을 이끌어 나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고, 우리의 모임에 대한 저의 성의를 표현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어 갑니다. 저는 이제 쉬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일 텐데, 제가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인지라 글로 대신합니다. 다음주부터 저는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동안 많이 배웠고 감사했습니다. 과제는 이번 주까지만 제출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Re : 지유 님께│하연│2021.08.29.


어떤 이유에서 탈퇴하려 하시는지 조금만 더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 이유가 안 적혀 있어서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다른 분들도 저와 비슷할 것 같은데. 우리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했지만, 지유 님이 제일 연장자이기 때문에 모두들 지유 님을 어려워하리라 짐작됩니다. 그래서 제가 큰 용기를 내어 총대를 메고 지유 님께 여쭈어 봅니다. 지유 님이 모임에서 나가면 다들 서운할 거예요. 오프라인 모임에 나오기 어려우시다면, 온라인에서라도 참여를 하시는 건 어때요?






114주차│진영│2021.08.30.


길게 썼다가 지웠어요. 다른 핑계를 대려 했어요. 제가 다음 달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더는 참석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적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핑계를 대어 그럴듯한 이유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적어도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어색해할 일은 없겠죠. 빤한 거짓말이라는 걸 빤히 알더라도 굳이 제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이 모임에는 있었거든요. 저는 우리의 이 암묵적인 약속을 존중했고 안전하게 여겼으니까요.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저는 주로 들었던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의 친교적 발언과 강경한 의견들을 고루 경청만 해왔죠. 그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는 종일 말하는 사람이에요. 일방적으로 떠드는 일이 직업이랍니다. 고등학교 교사거든요. 반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저는 1반에서 한 얘기를 2반에서도 합니다. 3반에서도 하고 4반에서도 해요. 같은 시, 같은 소설, 같은 퀴즈, 같은 농담. 구구단 같아요. 눈을 감고도 줄줄 읊을 수 있어요. 일 년이 지나가고 학년이 바뀌어도, 작년에 했던 수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을 내내 쳐다본다는 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에야 알았어요. 한 교실에 스무 명 남짓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 도열해 있으니까, 적어도 마흔 개 정도의 눈동자가 저를 쳐다보지요.
꼬마 적부터 낯가림이 심했어요. 명절 때마다 만나는 친척들이 낯설어서 큰집에 갈 때마다 책을 싸들고 갔어요. 방구석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걱정의 대상이 되지만, 방구석에서 가만히 웅크려 책을 읽고 있는 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기특한 아이가 되니까요.
교사도 학생에게 낯을 가릴 수 있다는 건 상상을 못 했어요. 그런 교사를 본 적이 없어서요. 아니, 교사에게 무관심했으니까요.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만 해도 곧 적응될 줄 알았어요. 처음이니까 긴장이 돼서 불편한 거라고, 곧 익숙해지겠거니 했어요.
저도 교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교과서에 코를 박고 싶어요. 앞머리를 눈 밑에까지 기르고서, 다리를 떨면서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하고 싶어요.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그때는 교사라는 직업이 괜찮아 보였어요. 동기들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유럽여행을 갈 때에도, 과방에 모여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광화문에 시위를 하러 갈 때에도, 저는 같은 트레이닝복 두 벌을 번갈아 입으며 학교 도서관에서 임용고시 준비를 했습니다. 고시는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합격했어요. 여섯 해 동안 실패를 했어요. 매번 최종면접에서 떨어졌거든요. 면접관에게 낯을 가리는 바람에.
검은 트레이닝복은 접힌 자리마다 잿빛으로 바래 있었어요. 고무밴드는 이리저리 뒤틀려 있었고 엉덩이와 무릎은 늘어나다 못해 저의 못난 체형을 다 드러내며 너덜거렸어요. 새 트레이닝복을 사 입어도 그만이었지만, 그 트레이닝복을 쓰레기통에 후련하게 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칠 년이나 입게 되었어요. 마침내 그것들을 버리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짓이요. 이십대를 도서관에 버린 걸로 충분했어요.
다른 선생님들은 교사가 되자마자 승진을 준비하거나 소개팅을 하며 결혼을 준비하거나 부동산이나 주식을 시작했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안 하기로 했으니까요. 현재를 즐기기 위해 살기로 했으니까요. 넉넉한 월급이 있었고, 퇴근 후의 삶과 방학기간이 있어서 얼마든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었어요. VIP석 티켓을 끊어 뮤지컬을 봤어요. 한 공연을 열 번도 봤어요. 구구단처럼 공연 대사를 줄줄 읊게 되자, 더는 보기가 싫어졌어요. 와인바에서 와인을 종류별로 마셨고, 1:1 필라테스 레슨을 받았고, 방학에는 해외여행도 다녔어요. 그렇게 5년 정도 보냈더니 더는 할 게 없었어요. 뭘 해도 구구단처럼 될 테니까. 매년 똑같은 현재가 반복되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싫은 건 아니에요. 성의 없게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최선이 반복되어도 매번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뿐이에요. 서 있다는 표현이 제게는 정확해요. 교사는 서 있는 직업이니까요. 제가 서 있는 동안 현재도 서 있어요. 계속 서 있으면 몸의 어딘가가 점점 불편해져요. 종아리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목이거나 등이거나 배일 때도 있어요. 제 몸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싶어 하는데 교단은 너무 좁아요. 시간이 더 지나면 불편하다는 감각이 서서히 마비되고요. 내가 내 몸을 소외시켜요. 내가 나의 시간을 교묘한 핑계들로 소외시켜요. 미래를 바라보며 고시 공부에 매진했을 때에는 미래에 묶여 있는 것 같았는데, 현재를 즐기는 현재 역시 현재에 묶여 있을 뿐일 줄은 몰랐던 거예요.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은 점점 늘어나요. 학생들은 해마다 바뀌지만 언제나 같은 나이에 멈추어 있고, 사진 속 내 모습이 변해 가는 건 내 눈에만 보여요. 교사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농담으로, 여고괴담 속 유령이 바로 우리라는 얘기가 오가요. 지금까지의 이런 제 모습이 앞으로의 제 모습일 테지요. 정년이 되어 퇴직할 때까지.
저는 할머니가 되어도 낯을 가릴 거예요. 낯을 안 가리려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일 년 일 년이 지나갈 거예요. 이제야 좀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느낄 때면 학생들은 졸업을 하겠죠. 미래에도 현재에도 신물 나게 머물러 본, 저 같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저는 이 모임이 좋았어요. 다들 별로 안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저의 낯가림을 일정 정도는 내버려두어도 되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요. 저는 이 모임에서만큼은 낯가리는 제 자신을 존중해 줄 수 있었어요.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어도 괜찮은 유일한 관계였어요.
이제는 모르겠어요. 우리가 왜 이 모임을 지속하는지. 낯을 가려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삼키려고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침묵으로 모두를 그저 동조하려고, 동조를 하면서 그저 지속하려고.
스물여덟 살 때였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어요.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식당으로 갔어요. 두부조림을 한 입 베어 물었어요. 상했더라고요. 여름이었거든요. 일 년 전 여름에도 상한 음식을 베어 물었다는 게 기억났어요. 상하지 않은 음식을 골라 먹고, 도서관 앞 벤치에 잠깐 앉아 있었어요. 시계를 봤고, 7시 23분을 가리키자 가로등을 봤어요. 가로등 불이 일제히 켜졌어요. 계절마다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이 바뀌었고, 저는 정확히 그 시간마다 가로등이 켜지는 걸 보곤 했어요. 그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어요.
“외롭네.”
이미 알고 있던 감정이었지만 입 바깥으로 튀어나온 건 처음이었어요. 이후로, 가로등이 켜지는 걸 볼 때마다 제가 뱉은 말이 떠올랐어요. 어떤 말은 웬만해서는 입 바깥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그동안 탈퇴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탈퇴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 Re : 114주차│지유│2021.08.30.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저도 압니다. 저 외에 그 시간을 외우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 시간은 일몰 후 10분 뒤로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동쪽에 가까울수록, 위도가 적도에 가까울수록 일몰 시간이 빠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서 가장 먼저 가로등이 켜질 겁니다. 서쪽으로 점점 번져 가다가 약 16분 뒤에 서울시 가로등이 켜집니다. 이 연쇄작용을 상기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적도를 따라 가로등이 켜지는 광경을 상상하면 몇 분 사이에 아주 멀리까지 가게 됩니다. 이런 상상이 저와 상관은 없지만, 이런 반복이 매일 일어나고 있음을 상상하는 것은 제게 중요합니다.
저는 매일 정오에 기상합니다. 핸드폰으로 일몰과 일출 시간을 확인합니다. 그 시간에 저는 일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할 테지만, 일몰과 일출 시간이 매일 바뀐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후 3시에 가게 문을 엽니다. 발주한 물건들이 차례대로 도착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요리라 부를 수 있겠지만, 요리는 제 일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 백 명이 먹을 음식을 만들려면 파트를 나누어야 합니다. 직원분들이 차례대로 출근하고, 담당한 것들을 처리합니다. 세척과 손질은 직원이 하고 저는 칼질과 플레이팅을 맡습니다. 칼질을 반복하면 칼질이 칼질처럼 안 느껴지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땐 내 손목도 내 손목이 아니게 되고, 내가 당근인지 칼인지 손목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때 손끝을 베기 쉽습니다. 손끝을 베면 칼을 도마 위에 놓게 됩니다. 손끝을 보게 됩니다. 비로소 내가 나로 돌아옵니다. 현재가 현재로 돌아와 있습니다. 수돗물에 손끝을 내밀면 따갑고 시원합니다.
밤 10시에 직원들이 퇴근합니다. 저는 가게에 남습니다. 새벽 4시까지 소설을 씁니다. 텅 빈 가게는 소설을 쓰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고객의 장소였던 홀이 그 시간만큼은 저의 장소가 되고, 저는 테이블 사이를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에는 테이블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서성이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쓰는 소설에는 소설을 쓰는 제가 나오기도 하고, 칼질을 하는 제가 나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실은 한 사람이지만, 한 사람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태안에 있는 어머니 집에 갑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는 아파트를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바닷가에 집을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이 폐가로 남아 있어 헐값에 매입을 했다고 합니다. 마을도 있었다던데, 지금은 없습니다. 드문드문 빈집들이 있고, 개 농장이 있고, 들개가 많습니다. 저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킵니다. 쌓인 먼지를 털고 욕실의 곰팡이를 닦아냅니다. 잡초를 솎아내고 텃밭에 물을 줍니다. 장마철에는 한 번씩 보일러를 돌리고 겨울에는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 둡니다. 매주 관리를 해도 다양한 사체들이 고즈넉이 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마귀. 지네. 파리. 매미. 귀뚜라미. 꼽등이. 나방. 벌. 거미. 노린재. 잠자리. 메뚜기. 바퀴벌레. 딱정벌레. 돈벌레. 무당벌레. 노래기. 물방개. 빗자루로 쓸어서 한꺼번에 쓰레받기에 담아 버린 후에 나는 이 벌레들의 이름들을 검색합니다. 초등학생처럼 습성을 공부하고 한살이를 연구합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돌아와 이 집에서 다시 사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청소를 마치면 식탁에 앉아 이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한 책을 읽습니다. 다 읽고 나면 제 집으로 돌아옵니다. 넷째 주 휴일에는 요양원에 면회를 갑니다. 어머니를 담당하는 간호사와 이야기합니다. 처음 요양원에 들어가셨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간호사와 잘 지냈던 듯합니다. 세탁실에 찾아가 빨래를 함께 개고 식사 시간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부축하며 도왔다고 합니다. 간호사에게 유일하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어르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삶이 이제야 다 끝이 났다고, 훌훌 털어버리고 편안히 눈 감을 날만 기다리며 살면 된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합니다.
이제 어머니는 간호사에게 막말을 합니다. 나물이 반찬으로 등장할 때에는 고추장과 참기름을 가져오라 하고,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가져오라 합니다. 환자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겠다고 합니다. 치매가 악화된 것이리라 예측했지만 간호사는 그런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또래의 룸메이트가 들어왔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분은 첫날부터 반찬 투정을 하였다 합니다. 이런 밋밋한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고, 나는 도저히 못 먹겠다며 항의를 했던 모양입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분과 제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상대적으로 건강한 축에 속해서 발언권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요양원에 와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있고, 여러 요양원을 전전했기 때문에 요양원에 대해 불평하는 것으로 자신의 경험을 과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제 어머니가 이 도발을 받아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저는 요양원 멤버들 사이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셰프가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집은 3층짜리 전원주택이 되어 있습니다. 간호사는 위기 상황마다 어머니와의 면회를 제안하고, 저는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문자에 답하지만 방문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간호사에게 정중히 사과를 합니다. 어머니와 저의 지긋지긋했던 관계가 다 끝난 것도 같지만, 또 다른 지긋지긋함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면회를 한 마지막 주 월요일은 특히 모임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면회가 끝이 나면 어머니와의 대화를 곱씹게 되지만, 모임이 끝이 나면 모임에서의 대화를 곱씹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대화를 곱씹어야 한다면 제가 선택한 대화를 곱씹고 싶었습니다. 간호사가 제게 요양원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듯, 이 모임에도 제게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임 안에 저를 제외한 모임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모임이 끝나면 뿔뿔이 헤어지는 척을 하다가 따로 모여 식사를 하러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나이를 밝히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를 하기로 약속했어도, 제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 책을 읽기 위해 이 모임에 참석해 왔습니다. 모든 것이 반복되는 지금일지라도 다음 책이 남아 있다는 게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말씀드렸던 대로 이 게시물이 114주차 과제이자 저의 마지막 과제입니다.






┕ Re : Re : 114주차│문경│2021.09.01.


다 귀찮아요. 이 글 쓰는 것도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침대에만 누워 있었는데요. 잠이 또 안 오더라고요. 제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잠을 못 자거든요. 지금 오전 열 시란 말예요.
이렇게 지낸 지 오래됐어요. 사 년 됐나? 아니, 오 년 됐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츄러스랑 애플파이랑 수정과. 계피향 나는 음식들. 영화관에서 팝콘 라지 사이즈랑 콜라 라지 한 통 혼자 다 먹기. 그러고선 활명수 따 먹기. 배달 음식 도착했다는 초인종 소리. 눈 오는 날 슬리퍼 끌고서 목욕탕 가기. 눈 오는 날 목욕탕에서 나오자마자 맥주 한 캔. 강아지 발바닥 냄새. 월급날!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여름날 빗소리.
좋아했던 것들인데요. 이제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하는 건가? 아무 느낌도 안 드는 게 안 좋아하는 거 맞죠?
제가 원래 누군가를 돌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유년 시절부터 하수구에 빠진 다람쥐도 구조하고, 친구 집에서 좁은 철창에만 갇혀 사는 고양이도 구조하고, 비둘기랑 참새도 구조하고. 그 동물들이 또 절 그렇게 좋아라 했어요. 그래서 좀 일찍 알았죠. 진짜 돌보려면 진짜 능력이 필요하단 걸요. 저 간호학과 졸업했어요. 막상 해보니 수술처럼 누군가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못 하겠더라고요. 그건, 뭐라 해야 하나. 살리려다가 해칠 수도 있다는 무서움이 든다고 해야 하나. 뒤늦게 회계사무소 취직하고 밤에는 PC방에서 카운터 아르바이트 했어요. 주말에는 튜터 했고요. 서른 둘이 됐을 때 퇴사하고 땅 보러 다녔거든요. 그땐 또 방방곡곡 여기저기를 다니니까, 내가 막 복부인이 된 거 같고 그랬어요. 모아 놓았던 돈으로 구미에 임야를 매입했어요. 계획관리지역에 있는 임야 이백 평 정도. 거기에 컨테이너로 동물보호소를 지었어요.
갑자기 더 얘기하기 싫어졌어요.
아침에 커튼을 걷다가, 창문을 열다가, 칫솔에 치약 짜다가, 냉장고 열다가,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가, 설거지하다가, 약봉지 뜯다가, 청소기 돌리다가, 세탁기에서 빨래 꺼내다가, 책 읽다가, 운동 나가려고 옷 갈아입다가, 휴대폰으로 게임하다가, 컬러링북 색칠하다가, 취업 공고 사이트 접속했다가, 1000피스 퍼즐을 900개쯤 맞췄다가……. 더 하기 싫어졌어요. 매번. 언제나. 뭘 하든. 더 하기 싫어.
병원도 가고 상담도 받았거든요. 자꾸 말해 보라는 거예요. 왜 더 하기 싫어지는지. 더 말하기도 싫어. 더 말하기 싫다고 하면 숙제를 내주더라고요. 문항 몇 백 개에 답을 체크해 오라고. 저도 해보려고 하긴 했거든요. 답하기 싫은 문항들은 건너뛴 것뿐이거든요.
이해해 주세요. 이 모임은 안 그래도 되어서 좋았거든요. 우리가 처음 모였던 날에 제가 그랬잖아요. 나 자기소개 하기 싫다고. 앞으로도 하기 싫을 거라고. 그랬더니 진영 님이 그랬잖아요.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나이, 출신대학, 직업, 고향, 사는 동네, 가족 구성원, 또 뭐더라. 아무튼 그런 것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습관처럼 물어보거나 말하게 되었던 정보들을 이 모임에서는 숨겨 두자고요. 앞으로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기대된다고요.
약속이 다 지켜졌다고는 말 못 하죠. 말 안 해도 알게 되는 게 있으니까. 진영 님이 고등학교 선생님인 건 진작 알고 있었어요. 진영 님 차를 얻어 탔을 때 조수석에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고등학교 마크가 엄청 크게 찍혀 있더라고요. 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주차 출입 스티커에도 같은 마크가 있었고. 오우, 티처, 그랬죠. 학생들 앞에서는 낯가림 어떻게 하나 싶긴 했어요. 하핫. 다 알아도 서로 아는 체를 안 한 거. 저는 그게 좋았거든요.
나이, 품종, 몸무게, 모견과 부견의 몸무게, 털 길이, 애절한 사연. 그런 게 중요하거든요. 유기견 입양인데도요. 사람하고 똑같거든요.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서류심사를 통과하거든요. 제가 회사 다닐 때는 자기소개서 첨삭 과외도 꽤 했거든요. 거기에 사실만 적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실만 적으면 바로 탈락이죠. 다 조금씩은 지어내고 조금씩 지어내다 보면 조금이 많이가 되고 많이가 거의가 되고 그런 거죠. 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도 회계사무소 다니는 줄 알거든요. 어떤 친구는 제가 간호사인 줄 알걸요. 저는 그 일들을 관뒀다는 말만 안 했을 뿐인데요. 제가 입양공고에 강아지들 개월 수랑 몸무게를 좀 적게 적었거든요. 동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데다가 저 좋자고 한 일도 아니었거든요.
누구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닌데요. 구미는 좀 외지니까 자원봉사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서 동물들을 다 돌볼 수가 없었어요. 직원을 고용했으면 당연히 인건비를 줘야 하는 거잖아요. 새끼 동물들은 자꾸 전염병에 걸리고, 파보랑 홍역은 빨리빨리 치료를 해줘야 하는데, 보호소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너무 적었어요. 제가 사비를 쓰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해서 동물들한테 사연들을 좀 만들어 줬어요. 그래야 SNS에서 RT도 많이 되고, 후원금도 들어오죠. 동물들을 살리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거예요.
연극성 성격장애래요. 애니멀 호더래요. 제가 털이 하얀 개만 골라서 구조를 한대요. 근데요. 그 글이 올라오고 나서 보호소를 둘러봤더니, 까만 애랑 얼룩덜룩한 애랑 누런 애들이 곳곳에 누워 있는 거예요. 한 번 더 둘러보았더니 진짜로 하얀 애들이 많은 거예요. 전 하얀 개만 고른 적이 없거든요. 맹세코 없거든요. 세상 모든 개를 구조하면 좋지만, 유난히 안쓰러운 개들만 데려왔는데. 그 개들이 어째서 다 하얀 걸까요. 진짜 지금도 모르겠어요. 우연이었을까요? 누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건지……. 말이 된다는 상황이 저는 더 말이 안 되는 억지처럼만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어디까지 말해야 될까. 어디까지 말해야 연극성 성격장애가 아니게 되나.
지유 님이 그랬죠. 책을 꼭 페이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요. 모든 페이지를 차례차례 읽어야 책을 읽었다고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고요. 권위에 사로잡힌 독서, 라고 했잖아요. 작가의 의도 말고, 우리 마음대로 읽자고요. 이 모임에서 같이 읽기로 한 책 중에서 제가 페이지 순서대로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어요. 표지만 본 것도 있고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한두 줄씩만 읽은 것도 있고.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다 만 것도 있고, 번역자의 해설 부분만 읽고 참석한 적도 많아요. 그것도 온전한 독서라고 믿기로 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저 서른아홉이에요. 지유 님이 아니라 제가 나이가 제일 많죠. 제가 철이 없어서 겉보기에 좀 어려 보일 수는 있었겠어요. 저의 보호소는 아무튼 이 년 만에 문 닫았고요. 동물들은 다른 보호소에서 데려갔어요. 땅은 되팔았어요. 이 년 사이에 땅값이 많이 올랐더라고요. 직원들 밀린 인건비 주고 병원에 밀려 있던 치료비까지 치르고도 남았어요. 내가 복부인 같은 기분을 조금 느끼긴 했는데, 진짜 복부인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거든요. 웃기는 일인데 그렇게 됐어요. 저 보호소를 관둔 돈으로 지금 먹고살아요.
돈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다시 예전처럼 일해 봐라, 예전의 너라면 다시 할 수 있다.
저도 알거든요. 근데 뭘 위해서요. 행여나 좋아했던 것들이 다시 좋아질까요. 모임이 끝나고 매번 하연 님이 밥 먹으러 가자고 했고, 지유 님만 빼고 우리가 함께 밥을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지유 님에게도 호감이 있었고 언젠가는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막연히 기다렸어요.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이 모임은 안 없어졌음 좋겠어요. 그동안 안 관둔 게 이것뿐이라서요. 이건 안 관두고 계속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꼭 완독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보기 싫은 면은 서로 좀 안 보고 지내도 되고, 좀 건너뛰고 대충 살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어때서요. 대충 때문에 제가 지금껏 버텼는데요. 어떤 부위에 대해서는 너무 꼼꼼하게 곱씹어도 사람이 돌아버릴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그만 하고 싶다는 게 뭔지도 잘 알아요. 제가 그 마음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겠어요. 하핫.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는 것만 독서는 아니니까. 그만두지 않고 엉성하게 같이했으면 좋겠어요.






┕ Re : Re : Re : 114주차│능원│2021.09.01.


수평적인 모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수평적이라는 느낌을 가진 적이 저는 없어요. 우리 중에 누군가를 일부러 소외시키거나 일부러 마음 상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고 있지만 모두가 마음 상하지 않고 이 모임을 좋아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고요.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은연중에 누군가를 싫어할 수도 있고, 이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요. 지유 님을 빼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갔지만, 밥을 함께 먹기 위해서는 아니었어요. 하연 님이 우리 모임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자리였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예요. 하연 님이 눈물을 보이면, 하연 님 덕분에 이 모임이 잘 꾸려지고 있다는 말을 멤버들은 번갈아 해드리면서 하연 님을 달래곤 했어요. 이것 역시 지유 님이 모르셔도 되는 이야기지만 지유 님에게 말씀드려 봅니다.






┕ Re : Re : Re : Re : 114주차│하연│2021.09.01.


비님이 오시니까 얼큰하게 끓인 칼국수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들에다가 지글지글 튀긴 파전도 생각나고요. 칼국수나 끓일까 하다가, 냉장고에 넣어 둔 막걸리 생각이 나지 뭐예요. 막걸리에는 칼국수보다 파전인 거 다들 동의하시죠? 부침가루에 얼음 넣어서 쫀쫀하게 반죽하고 오징어도 제가 좋아하는 몸통만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었어요. 10년 전만 해도 계란프라이 반숙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젠 인터넷으로 레시피 검색 안 해도 뚝딱 만들어요.
어때요? 이건 제 말투 같아요? 선입견하고 매칭시켜 드렸는데. 근데 저 비 오는 날 칼국수나 파전 먹는 거 안 좋아해요. 이런 음식은 이런 날씨에 먹어야 한다, 그래야 뭘 좀 아는 거다, 이런 사람들. 뭘 아는 거 맞아요? 세뇌죠 그냥. 잘 세뇌된 걸 뭘 좀 안다고 착각하는 거죠. 비 오는 날 파전 같은 거 안 먹는 사람도 이 정도 레시피는 누구나 쓸 수 있잖아요?
처음엔 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상적이긴 하죠. 나이, 직업, 가족구성원. 그런 얘기 안 하는 거.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는 거. 근데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게 있는데, 갑자기 추구한다고 이상이 짠 하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십 년씩 알고 지낸 친구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으니까 다들 날씨 얘기만 했잖아요. 오늘 유난히 구름이 어떻다는 둥 해가 길어졌다는 둥. 저만 답답한 건 아닌 것 같던데요. 지유 님은 책을 국회도서관에서만 빌려 오시더라고요. 로고 박힌 차키도 매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요. 발주 전화도 꼭 쉬는 시간에 하시던데요. 지유 님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셰프는 아니지만, 지유 님 레스토랑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건 맞잖아요. 지유 님이 무슨 책을 썼는지도 우리는 다 알잖아요. 나이부터 이력까지 빤히 다 보이는데. 말을 안 해도 주눅이 들죠. 지유 님이 눈치 준 적 없으셔도 우리는 다 지유 님 눈치를 보게 마련이죠. 페이지 순서대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도 지유 님인데, 페이지 순서대로 책을 다 읽어 오는 사람도 지유 님이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지유 님한테 왜 약속을 깨고 약력을 밝히느냐고 따지지는 않잖아요. 저도 없는 말은 안 했고요.
이 모임에서야 알았어요. 아,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할 수 없을 때, 저렇게 돌려서 말하는구나. 제 딸이 삼십이 개월인데요. 말을 안 해요. 언어지연이라고 하더라고요. 말을 안 하면요.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해요. 엄마가 애한테 소홀했다는 둥, 유튜브만 보여준 거라는 둥,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는 둥. 근데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잖아요. 말만 점잖게 한다고 점잖은 게 아니잖아요.
제가 지유 님을 배제시킨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는 모양인데, 아닌 거 다들 아시잖아요. 전 그냥 총대를 메게 된 거죠. 제가 매번 총대 역할 해왔던 건 아시잖아요. 지유 님이 모임 그만 하겠다고 처음 글 올리셨을 때에도, 문경 님이 따로 제게 연락하셨거든요. 온라인으로라도 모임을 지속하자고 누가 말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지유 님이 책을 매번 다 읽어 와서 늘 과제를 안 하는 문경 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눈치 보이고 불편하다고도 말하셨어요. 독서 모임이 아니라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온 것 같다고 능원 님도 그러셨고요. 읽고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왜 익명 모임에서 활동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잖아요. 지유 님이 말하면서도 책 읽듯이 문어체를 쓴다고, 그래서 입을 열 때마다 비문이 튀어나올까 봐 검열을 하게 된다고 소민 님도 그러셨고요.
다수가 언제나 옳을 리는 없다고, 몇 주 전 모임에서 책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하지만 이번 상황은 어쩐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소수가 매번 약자인가. 강자인 소수와 다수의 약자로 구성된 모임에서는 누가 약자인가. 따돌림을 당하면 강자도 약자로 위치가 변하는가. 지금 여기에선 강자가 약자의 정체성을 함께 지니게 되는, 묘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네요. 다른 분들은 지금 약자의 편을 들고 있는 걸까요, 강자의 편을 들고 있는 걸까요? 저와 함께 식사하러 갈 때는 어땠나요? 그때는 제가 강자로 보였나요, 약자로 보였나요?
자기 정보를 감추는 쪽이 더 편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 자기 정보를 감출 필요를 전혀 못 느껴서 은연중에 공개 아닌 공개를 하는 사람, 감추거나 드러낼 만한 정보랄 것도 딱히 없는 저 같은 사람. 다르다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일정 정도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지유 님에게 우리 이야기를 전달한 사람이 누구일지도 빤히 알지만 말하지는 않을게요. 진영 님은 정규직 교사라는 사실을 항상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데 감추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비슷한 종류의 노력을 하고 있을 지유 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밖에 없겠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진영 님은 멋있게 말씀하셨는데, 승진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결혼을 하고 자기 가정을 꾸린 사람들의 묵묵한 노력들은 무시되어도 좋을 속성이 전혀 아니지 않나요.


댓글 8>

진영│우리 모임에서 식상하기 짝이 없는 인격체의 상징으로 교사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말한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저에겐 피부에 박혀버린 기억이에요.

하연│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진영│하연 님이요.

하연│직접 쓴 글 다시 읽어 보고 오시겠어요. 교사가 얼마나 식상한 직업인지를 구구절절 고백해 놓고 이런 댓글을 남기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능원│오해가 생길 것 같은데요.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온 것 같다고 말한 것은 일말의 부러움을 담아 긍정적인 의미로 말한 거였어요. 왜 익명 모임에서 활동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마찬가지였고요.

문경│아무래도 눈치가 보이지 않느냐고 하연 님께서 물어보시니까 저는 그렇다고 답한 것뿐인데요.

진영│하연 님, 위 게시물로 남긴 저의 자세한 고백은 식상하다는 한 마디로 요약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어요.

문경│이거 지금, 마피아 게임의 클라이맥스인 건가요? 저 여태 이 모임에서 눈치 본 적 없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진짜 눈치 보여요.






┕ Re : Re : Re : Re : Re : 114주차│혜리│2021.09.03.


이 모임이 시작되었던 날부터 거의 매일 이 사이트에 접속해 왔다. 오프라인 모임 시간이 되면 모임 장소를 상상하고 어떤 대화들을 나누실지 짐작하며 나는 시간을 보내왔다. 한국어로 적힌 책을 읽고 싶으면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에 간다.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은 친구 때문에 발견했다. 친구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친구의 얼굴을 본 건 너무 옛날이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친구라고 여기고 있다. 시립도서관을 발견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친구다. 본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별관이 나온다. 이 별관 꼭대기층 가장 깊숙한 자리, 52번과 53번 서가에 한국어 책들이 꽂혀 있다. 이 자리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홍보가 안 된 탓도 있고, 가장 외진 자리인 탓도 있다. 한두 번 정도 이 서가를 서성이는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K-pop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나는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곧 서가를 떠난다.
서가에는 동화책이 대부분이지만 문학전집과 신간 소설도 간간이 들어온다. 몇 번 안 되지만, 이 독서 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작은 기적을 만난 것처럼 종일 기뻤다. 그런 날에는 제시간에 과제를 올렸다.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이북을 사서 보기도 하고, 이북이 출간되어 있지 않으면 해외배송을 시키기도 한다. 배송은 빠르면 일주일, 길면 이주일 소요된다. 나는 대부분 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 늦게 읽는다. 아무리 빠르게 읽어도 몇 박자 늦게 과제를 올린다. 이 모임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나를 아주 게으른 사람이라 생각할 것 같다. 송년회가 열릴 때마다 나보고 오라고 하는 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 주는 게, 스웨덴 얘기를 아무도 나한테 묻지 않는 게, 마음에 든다.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 얘기만 묻고 한국 사람들은 스웨덴 얘기만 묻곤 했다.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제 끝이 날 것 같다. 내가 참석하지 못한 모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나는 알 리 없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냄새처럼 본능적으로 전달되는 일들이 있다. 반쯤 유령처럼 떠도는 캐릭터였지만 다들 반쯤 유령 같아서 나 혼자 유령 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이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유령들과 만들어 온 공동체에는 정이 들어버렸다. 유령에도 저마다의 자격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같은 유령이라 여겼는데도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음을 느낀다. 설령 개입을 한다 해도 내게는 자격이 전혀 없는 듯하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창문이 있고, 창문과 책상 사이에 A4용지가 붙어 있다. 111주차에 우리가 함께 책을 읽고 과제로 그린 그림이다. 피아노 위에 악보가 있고 벽난로 속에서 악보가 불타고 있는 그림. 함께 그린 그림이었는데 이 그림은 나 혼자 그렸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렸다던 그림과 나의 그림에는 불일치가 더 많았지만 부분적인 일치를 발견할 때 소소하게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나는 내가 감지해 온 불화를 확인하면서 드러난 일과 내 직감이 일치하는 기쁨을 잠시 맛보았는데, 그 뒷맛은 아주 싸늘했다. 나는 이제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스톡홀름 도서관 별관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52번 서가에 나라는 유령은 없다.






┕ Re : Re : Re : Re : Re : Re : 114주차│소민│2021.09.05.


제가 정신없이 바빴어요. 오랜만에 접속을 했는데 게시판에 글이 엄청 길게 올라와 있네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마피아 게임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처형은 언제 하려나요? 오프라인으로 하려나, 온라인으로 하려나. 혹시 벌써 끝났나요?












임솔아
작가소개 / 임솔아

장편소설 『최선의 삶』,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이 있다.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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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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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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