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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 밤바다

  • 작성일 2022-01-01
  • 조회수 2,545

[단편소설]



삐에르 밤바다



김태용





우리의 친구,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던, 삐, 잠시, 아니 계속해서, 이제 막 시작했지만, 시작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지, 우리의 친구, 이름을 부를 순간이 오면, 그보다 먼저, 이제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대답 없는 부름이 가능할까, 우리가 들었던 대답들은 모두 부름에 대한 대답이 맞을까, 대답이 없다는 걸 알고도 부를 수 없을까,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부를까, 어떻게 대답을 듣지 않고 부를까, 이런 물음을 지속하다 보면, 최초의 물음은 역방향으로 달려가기 마련이어서, 물음에 저항해 뒷걸음쳐 도망가려 해도, 도망칠수록, 결국, 아포리아의 막다른 골목에 닿아, 골목을 통과하는, 억견의 구조로, 비정언적 물음에 가까운, 이런 언어의 가름끈 같은, 가변적인 개념어에 속지 않고, 속아 주는 척하며, 계속 속이며, 속여 가며, 속임을 당하며, 척하며, 우리의 친구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한, 언어 귀류법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귀류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문제인지 더 되물어야 하지만, 물음 포기에서 가까스로 되살아난, 반짝이는 물음표기로, 이런 물음이 가능하게 되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부름만 가능한 게 아닐까,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계속 부를 수 있는 가능한 발화를 두고,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없는, 어쩌면, 지금까지 여기에 없었던, 여전히 여기에 없는, 발화로만 기억을 불러내는 존재, 목소리를, 가능한 발화의 문턱에, 문장이 될 수 없는 발화의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언어의 기능을 손상시키며, 쓰지 않을 기능을 못 쓰게 만들며, 반영구적으로, 자비로운, 장애의 언어 관절로, 역광의 시간 속에서, 짧은 순간 노출되는, 점진적인, 목소리가, 형상을 불러내기에, 믿기에, 그것이 허구로 위장한, 허구의 결속에 의한 형상의 피부라고 해도, 피부는 부드럽고 거칠어, 상처가 잘 나고 드물게 아물지, 피부는 형상의 모든 것이야, 피부 피구라(figura), 말할수록 형상이 피부화 되는, 우리의 친구는 그랬어, 여전히, 이렇게, 입술의 막을 살짝 벗겨내며, 피 나지, 내버려 둬, 계속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언어의 관절을 뒤로 꺾으며, 푸잌, 웃고 있니, 삐에르 밤바다가 말하길, 나는 댄스 필름을 만들지 않아, 댄스 필름, 나에게 그런 건 없어, 불가능해, 끝났어, 나는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어, 모든 위치에 내가 있어, 너희들은 어떻게 살고 있어,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말은 언제나 대화를 향해 열려 있는 독백이니까, 차는 식기 전에 마셔, 입술에 묻은 스콘 가루 예쁘다, 스콘 가루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 수 있을까,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내가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고 있다고 좀 인정해 주라, 그렇게 우기면서 삶의 영역을 확장하던, 수다쟁이 조약돌, 삐에르 밤바다가 마지막으로 말하길, 안녕, 사랑하는 머저리들, 모두 잘 있어, 우린 언젠가 잠들어, 내가 먼저 잠들고 그다음엔 너희 모두를 잠들게 할 거야, 잠, 그건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의 마지막 도착일 거야, 내가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면, 난 너희들의 꿈속에 잠들어 있을 거야, 날 깨우지 마, 기다려, 기다리지 마, 기억해, 기억하지 마, 기다리고 기억해, 기다리고 기억하지 마, 기다리지 말고 기억해, 기다리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마, 졸려, 비참하지 않아, 쓰라리지 않아, 난 차라리 희망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모두 잘 있어, 머저리들, 사랑하는, 안녕, 이라고, 아니 그건 말이 아니라 문장이었고, 삐에르 밤바다의 여동생인, 처피뱅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물어보기도 전에,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한, 이차정 씨가 건넨, 두 손으로 책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 ‘훈련’ 부분에 꽂혀 있던, 방금 우리에게 도착한, 하지만 여전히 배달 중인, 수신자에 우리의 풀네임(full name)이 적혀 있고, 수신자라기보다는 삐에르 밤바다가 마지막으로 부른 우리의 이름이고, 영원히 발신되지 않을, 눈밭에 쓰러진 로베르트 발저의 사진을 담고 있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감독의 영화 〈백설 공주〉 엽서에, 우리는 그 영화를 같이 볼 기회가 있었지만, 삐에르 밤바다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로 무산되었는데, 삐에르 밤바다가 문자를 보내길, 생각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이 영화는 오로지 나 혼자 보고 싶어 꼭 그래야 할 것 같아 너희들은 약속한 장소에 약속한 시간에 나오지 않기를 약속해 줘 영화를 보는 동안 너희들만 생각할 거야 쉼표 마침표를 쓰지 않은 나의 문자에 얼마나 초조함과 미안함이 담겨 있는지 알겠지 답은 하지 말아 줘, 언어의 보행기를 타고 일방통행로를 질주하는 삐에르 밤바다의 문자에,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 우리 중 누구도 답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테고, 약속을 지켜야 했고, 파기되어야만 약속 이행이 가능한 메시지로 각인된, 제목만 볼 수 있는 영화였는데, 영화와 약속이라는 두 개의 시간 종속 명사를 숙고한 이후, 각자 몸의 부피가 달라질 정도의 시차 속에서, 잠시 소원했다 다시 만난 우리는, 〈백설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암묵적 금단의 이미지가 되어, 그 영화는 그렇게 잊혔는데, 보지 않았어도 꼭 본 것 같아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봤을 수도 있지만, 당연히 우리 중 누군가는 나일 수도 있고, 그 영화를 봤어도 보지 않은 것만 같을 것이기에, 금단 섬망의 이미지로 가득한, 〈백설 공주〉 영화 엽서에 기록된, 삐에르 밤바다의 악필의 춤을 본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고, 삐에르 밤바다가 피드백루프 같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한, 벌써 이 년 하고도 칠 개월 전이다, 인천 공항 근처의 비즈니스호텔 카페에 모여 앉아, 잠들기 전보다 훨씬 오래전에 기록되어 숨겨 둔, 엽서의 글을, 겨우겨우 해독하고 나서, 그러니까 우리 중 하나인, 자신의 포르노 다이어리를 태우는 퍼포먼스를 하다가 왼손에 화상을 입은, 상처가 깊었지만, 피부 이식을 거부하고, 붉게 부풀어 오른 켈로이드를 남은 생의 운명의 지도로 읽는, 개념미술가 테스트 윤이 직접 만든 작업 노트를 펼쳐 연필로 삐에르 밤바다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그리듯이, 점묘의 글쓰기로, 크림색 노트 지면의 결을 파며, 어느 연약한 짐승의 잘못 기록된 이력을 지우듯, 써 내려가는 동안, 또 다른 우리 중 하나인, 액체 라디오를 만들기 위해 온갖 화약 약품과 슬라임에 파묻혀 사는, 미니 용광로로 금속을 녹이며 명상에 빠져들기도 하는, 지구는 푸른 구체가 아니라 은빛 스모그라고 믿는, 사운드 아티스트 긍지와 어둠은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고, 마지막 남은 우리 중 하나인, 정신세계의 추출물 언어를 디자인하고자 구체시를 만드는, 하지만 아무리 디자인을 해도 받침 활자가 있는 한글로는 예쁜 구체시를 만들기 힘들다는 핑계로 창작력의 한계를 모면하는, 그러면서도, 예쁜 구체시를 포기하면 안 예쁜 구체시가 어떤 가변의 형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아 계속 구체시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느슨하게 작업을 하는, 나, 전기올빼미 장존삽은, 언젠가 삐에르 밤바다와 함께 작업 공간을 다 덮어버리자는 충동으로 천을 사러 방산시장에 갔다가, 우리는 당시 작업 공간을 공유하며 대화 없는 사랑을 나누었지, 밤은 왜 그렇게 길고 부드러웠는지, 하지만 돌아보면 밤은 언제나 짧았고, 밤이 아니라 밤 같은 낮이었기에, 대화 없는 사랑은 불가능했지, 마음에 드는 천을 찾지 못하고 허기져, ‘죽만 50년 집’에 들어가, 단팥죽을 먹을 때, 삐에르 밤바다는 얄밉게도 단팥죽의 새알심만 골라 빼먹었는데, 오물거리는 입이 정말 호랑지빠귀 부리 같아서, 손이든 입으로든 비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나의 손은 너무 부끄럽고, 나의 입술은 너무 차가우니까, 삐에르 밤바다의 아랫입술과 턱 사이에 묻은 팥죽 얼룩을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유아기의 역사를 거슬러,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는, 나누었다기보다는,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삐에르 밤바다의 말을 들었다는, 흘러넘치는 말을 턱받이로 받아 주고 싶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없는, 망각의 영역에 머물던 불변의 사실을, 테스트 윤긍지와 어둠, 그리고 점점 우리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은, 이차정 씨에게 말하게 되었는데, 죽집 벽에 써진 낙서를 보다가, 삐에르 밤바다가 말하길, 난 참 못 써, 내가 말했었나, 난 너의 글씨에 질투를 느껴, 참을 수 없어, 너의 손에서 너의 글씨를 훔칠 수 없을까, 너의 손은 너의 글씨만큼 좋지 않아, 이렇게 나는 나의 질투심을 극복해, 언제나 나는 글씨가 엉망이었어, 글씨를 보면 사람 마음을 알 수 있단다, 남몰래 흠모했던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한동안 매일 밤 손글씨 연습을 했지, 하지만 글씨는 언제나 내 손끝에서 풀어진 실처럼 빠져나가 숫자 7에서 8에 다다르려는 혹은 무한대가 되려는 ∝ 표시를, 그 순간 삐에르 밤바다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모양을 그렸고, 그리며, 춤을 추었지, 연습이 부족했던 것일까, 내 마음이 그런 것일까, 나의 연습은 충분했어, 충분하지 않았어, 충분했어, 연습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 삐뚤어졌고, 내 아까운 감정이 침울한 흥분 상태로 떨어지려고 했어, 어쩔 수 없잖아, 나의 손은 이토록 길고 아름다운데, 연습할수록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난 알았지, 안다고 착각했지, 나는 포기했고, 글씨가 춤을 추게 내버려 두었지, 하지만 너도 알잖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한 거야, 변화란, 나아감이란, 춤으로 말하면, 시간과 힘의 통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표면을 확장하며 몸의 지도를 그리는 거잖아, 통제, 통제 속에서, 부단하게, 훈련, 훈련하며, 자유로울 틈 없이,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결국 엉망이 된다는 것을, 내가 잘못한 걸까, 충분히 연습을 해야 했지만, 연습을 게을리한 것은 결코 어떤 경우에서라도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고, 진정성이라 말했으니, 진정성이란 언어의 잔여물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한동안 나의 전부였던 글쓰기 연습을, 연습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는 없잖아, 나는 계속 글씨를 썼고, 잘못 쓴 글씨를 잘못 쓴 것처럼 여기기도 했지, 진정성은 그럴 때 힘을 발휘하더라, 냄새를 맡은 거야, 결국 난 진정성의 유혹에 넘어갔지, 달콤한 유혹은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야, 불충분했을지도 모를 연습에서 비롯된 엉망의 활자들을 자유로운 글맵시라는 멋부림으로 위장했을 뿐이야, 이런 것도 재현이라면, 가짜 재현이야, 가짜 재현이면 안 되나, 재현이란 언제나 가짜이고, 우리는 가짜 재현으로 태어나 가짜 재현으로 죽어갈 텐데, 가짜 재현이면 안 되나, 안 돼, 절대로, 듣고 있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말은 언제나 대화를 향해 열려 있는 독백이니까, 난 글씨를 못 써, 안 써, 삐에르 밤바다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났지만, 목소리의 잔향 속에서 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이후의 상황과 풍경을 계속 이어 말했고, 삐에르 밤바다의 어투를 흉내 내며, 오래 전부터 그랬지, 우리 모두 삐에르 밤바다의 말이 남긴 궤적을 따라 자신의 언어를 기입하고 있었지, 한번 기입되면 지울 수 없었고, 이제 삐에르 밤바다의 새로운 말을 들을 수는 없고, 떠났고, 계속 돌아오는데, 여기에 없음으로 다시 돌아오며, 다시 돌아와 지금 나타나며, 지금 나타나며 여기에 없는,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어, 말하면서 정작 내가 아끼는 장면은, 영원히 머릿속에서만 재현하며, 그것이 가짜 재현이라도, 말하지 않았기에, 모두의 얼굴이 입 없는 가면을 쓴 것만 같은, 의심의 시선을, 허공에 터지는, 말의 유희로 흘겨보며, 계속 무언가 꾸며 말해야 했는데, 삐에르 밤바다는 코끝을 찡긋거리다, 수만 명의 입안을 들락거렸을 구부러진 숟가락을 다시금 단팥죽 그릇에 넣어 휘저으며 마지막 새알심을 건져 자기 입에 넣으려다가, 웃으며, 너는 내가 말할 동안 새알심만 쳐다보더라, 나의 입에 들이댔지, 나는 감기 시럽을 먹을 때처럼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입을 벌렸고, 숟가락이 내 입으로 들어왔지, 입안에는 새알심만 남고, 숟가락은 물러갔고, 삐에르 밤바다는 잠시 숟가락을 든 채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하려다, 아니, 그만두자, 라고 말했고, 나는 말해지지 않는 삐에르 밤바다의 말과 함께, 어쩌면, 아니, 그만두자, 라는 말이 삐에르 밤바다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며, 의심이 언어의 저편으로 물러가도록, 새알심을 씹으며, 씹을수록, 삐에르 밤바다가 마지막 새알심을 나에게 양보한 것에 마음이 녹아, 새알심은 달고 쫄깃쫄깃하다, 씹을수록 그렇다, 아무러면 어떠냐, 영원히 이렇게 새알심만 씹으며, 씹다가, 이가 하나씩 빠지고 분홍빛 잇몸만 남아도, 삐에르 밤바다가 내 입에 넣어 준, 그게 그러니까 입에 잘 들어가게 생겨 가지고, 새알심의 맛과 쫄깃함을 음미하며, 늙어 죽어가면서, 후회와 분노의 시간을 최적화시키며, 많은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다는, 내 서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차정 씨가 먼지라도 묻었는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반응인지, 통이 넓은 검은색 스트라이프 정장 바지를, 이차정 씨는 자신이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 같다, 탁탁 털며, 삐에르 밤바다와 유사한 코끝 찡그림을 만든 뒤, 클라우디블루 래글런 코트 주머니에서 록시땅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에 순식간에 바르고, 빰빰 거리더니, 누구 담배 있냐고 묻기에, 그 순간 나는 빰빰이란 글자로 구체시를 만들어 볼까, 삐에르 빰빠다는 또 어떤가, 라는 생각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 잠재적 발화 상태의, 언어의 난기류 속을 돌아다니는 광증의, 지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비선형적 연결망은 또 무엇인지,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쁘고 슬퍼,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고,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또 다른 생각과 언제나 교환 가능하지, 그러니까 생각보다 말이, 말보다 목소리가, 목소리의 움직임이 중요한 거야, 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어, 라고 했던 삐에르 밤바다가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며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고, 떠올려야 했고, 우리의 생각은 언제든 가루로 만들어도 좋다는 신호로, 테스트 윤이 〈더북소사이어티〉 에코백 속에 손을 넣어 뒤적뒤적하더니, 연초 파우치를 꺼내, 담배를 말 준비를 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탁자에 놓인 콜드브루 두 잔과 자몽주스와 루이보스티가 식어 갈 동안, 『중력과 은총』과 〈백설 공주〉 엽서, 그리고 삐에르 밤바다의, 마지막 악필의 문자 증명, 실패한 유서인지 아닌지, 테스트 윤이 받아 쓴, 옮겨 적은, 번역한, 서로의 입술의 부들거림과 혀의 마찰소리에 반응하며, 이차정 씨의 무언의 읽기 지휘 속에서, 함께 읽은, 사력을 다한 필사의 텍스트, 이건 삐에르 밤바다의 목소리 글과 얼마나 닮았고 다른지, 멀어지고 있는지, 이 모든 언어의 잔해 주변에 떨어진, ‘LOOK OUT’ 연초 가루의 떨림을, 우리는, 아직 이차정 씨는 우리가 아니지만, 이차정 씨는 우리가 될까, 테스트 윤이 분홍색 혀를 내밀어, 담배 필터에 침을 능숙하게, 테스트 윤의 침이 삐에르 밤바다의 침과 섞여 화학 반응을 일으킨 적도 있을 것이다, 바르는 것을, 누군가의 셀피를 보듯, 셀피에 담긴 심연을 응시하는 것처럼, 바라볼 때,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을 빛내며, 눈물만큼 눈을 빛나게 하는 것도 없지, 긍지와 어둠이 입을 열어, 삐에르 밤바다의 피부 피구라 언어의 선택과 배치, 몽타주와 프레임을 흉내 내며, 포커스가 흐려진, 말을 시작하니, 들어 줘, 담배 필터에 침을 바를 때와 우표에 침을 바를 때 다른 혀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삐에르 밤바다가 유일할 거야, 내가 또 이렇게 말하면, 삐에르 밤바다가 되살아나 말하겠지, 우표에 침을 발라도 보낼 엽서가 없지, 필터에 침을 발라도 담배를 물 입이 없어, 삐에르 밤바다가 했던 무의미한 말이, 하지 않았던 무의미한 말이, 부췌의 언어가, 왜 되살아나고 있을까, 되살아나 우리를 사로잡아 흔들까, 흔들릴까, 삐에르 밤바다의 말을 불러낼수록, 삐에르 밤바다가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것만 같아, 눈앞에서 삐에르 밤바다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말들이 더 많았지만, 저들끼리 부딪치기만 하는 말들이었지만, 삐에르 밤바다가 눈앞에서 물러가면, 나 홀로 어둠에 익숙해지면, 그 말들이 되살아나, 되들려, 되울리며, 자꾸만 듣기에서 발화의 세계로 옮겨가게 만들어, 불투명한 말의 주인, 삐에르 밤바다, 라는 파도 같은 언어의 말 물결은 그런 것일까, 미안해, 내가 왜 이런 말을 흉내 내고 있을까, 왜, 이차정 씨는 삐에르 밤바다를 우리에게 데려온 거지요, 아니, 다시 말해요, 왜 우리를 다시 삐에르 밤바다 앞에 소환한 거지요, 엽서를, 우표를 붙이지 못한, 엽서에 담긴 삐에르 밤바다의 해독이 필요한 글씨를, 글씨라는 잠재적 목소리를, 영원히 중력과 은총으로 봉인할 수 있었는데, 라고 나와 테스트 윤이 묻고 싶었지만 망설이고 있던, 누군가 말해 주길 기다리던, 우리의 예쁘고 야무진 입술을 열어, 날카로운 치아는 되도록 숨기고, 하지만 또 그런 질문은 하지 않기를 바랐던, 결코, 우리의 복잡한 감정을 무대화시키며, 긍지와 어둠이 말했을 때, 이차정 씨는 긍지와 어둠을 향해, 밤의 심연 속으로 날아가는, 무리에서 이탈한, 영원히 이탈하라, 눈먼 꼭두쇠를 무심히 바라보듯, 무슨 말이에요, 걔는 담배를 피지 않았어요, 말한 뒤, 시선을 돌려, 테스트 윤이 담배를 탁자에 톡톡 치는 것을 보며, 정말 잘 마시네요, 맛있겠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나요, 암스테르담 갔을 때 이후로는 처음 펴요, 이거 이상한 거 아니지요,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라고 말한 뒤 미소를 지어 보이자, 테스트 윤이 흐뭇해하며 완성된 담배를 내밀었고, 짧은 손톱의, 깔끔하게 정돈된, 기다란, 베이지색 손가락으로 담배를 받은 이차정 씨는, 테스트 윤의 켈로이드 손을 안 보는 척 보면서, 같이 갈래요, 라는 신호를 테스트 윤에게 보냈는데, 테스트 윤은, 아니요, 전 담배를 피지 않아요, 담배 마는 것만 좋아요, 라고 사실대로 말했고, 그건 정말 사실이어서, 얼마 전까지 흡연자였던, 긍지와 어둠과 나는, 유혹을 물리치고,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잠자코 있었고, 역시 이상해, 그럼 저 좀 나갔다 올게요, 라고 이차정 씨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의 회전문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다가, 다시 우리 자리로 돌아와, 라이터 주세요, 라고 말하자, 테스트 윤이 라이터는 없어요, 라고 말했고, 이차정 씨가 긍지와 어둠과 나를 쳐다보자,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고, 이차정 씨가 정말 이상해, 라고 말하며, 자리를 빠르게 지나쳐, 카페 카운터로 가 라이터를 빌리려다, 성냥을 받아, 아, 성냥이 있네요, 마치 우리의 귓바퀴에 성냥을 긋듯이, 이차정 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고, 자신이 원하는 법정 선고를 얻어낸 자의 걸음으로, 우리 옆을 스치며, 봐라, 이게 성냥이라는 거다, 성냥을 든 오른손으로 탁자를, 탁자의 모서리를, 탁자 모서리는 이럴 때 힘을 발휘하지, 살짝 치며, 걸어가, 회전문에 올라타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장면의 반복을, 우리는, 우리에게 우연히 내맡겨진, 우리와 무관한 세계의 이미지 조각을 외면하듯, 바라보다가, 유리라는 끔찍한 투명 매체를 통해 선명하게 보이는, 이차정 씨의 뒷모습과 옆모습, 뒤틀린 형상이 점점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자, 무너져 내리는 정신의 기하학 모서리를 만지며, 각자의 심연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연초 파우치를 정리한 테스트 윤이 오른쪽 검지로 자신의 왼손에 그려진 운명의 지도인 켈로이드를 살짝 긁었고, 나는 성냥과 켈로이드, 라는 제목을 떠올렸고, 그 제목은 다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제목인 〈성냥공장 소녀〉로 이어졌고,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지만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제목밖에 없고, 언젠가 삐에르 밤바다라는 이름만 남고 그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될까, 이름마저 사라지면 어쩌나, 그건 우리가 기억한다고 기억되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하는 심연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긍지와 어둠이, 우리 오늘 밤 함께 〈성냥공장 소녀〉를 볼까, 삐에르 밤바다가 좋아한 영화였잖아, 왜 그 영화가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오늘 밤은 혼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계속 돌아눕고 뒤척일 것만 같아, 내가 너무 성급한가, 아직 오늘 밤이 오려면 멀었는데, 하면서 다시금 눈물이 고일 것 같은 눈을 반짝이자, 나는 심장이 출렁거리는 느낌을 잠재우기 위해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고, 감정을 억누르며, 되도록 차갑게, 구체시의 마지막 활자를 맞추듯, 밤은 곧 올거야, 라고 말했지만, 어떤 것도 얼어붙게 못하는 말이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기 전에, 테스트 윤이 이번에는 왼손의 켈로이드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성냥공장 소녀〉 말이야, 삐에르 밤바다는 말했지, 너 〈성냥공장 소녀〉 알아, 난 그 영화를 좋아해,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그 영화를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런 건 잘 설명이 안 돼,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설명이 안 되는 일을 계속 생각하는 것, 그건 취향과는 다른 차원 같지 않니, 취향은 언제든 바뀌는 거지, 그리고 대화 상대가 달라지면 취향도 바뀌는 거지, 넌 나랑 취향이 같아서 좋아, 넌 나랑 취향은 다르지만 좋아, 넌 취향이 분명해서 좋아,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야, 취향 같은 건 존중하지 않아도 좋아, 동시대의 취향, 취향 공동체, 췌언의 톱니로 갈아버리고 싶은 말들이야, 취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허공으로 흡수되기 쉬운 말의 잔여물일 뿐이야, 얼마든지 편법이 가능하지, 읽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게 취향이야, 그렇지 않니,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말은 언제나 대화를 향해 열려 있는 독백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누군가가 나에게, 너 역시 취향 오염물에 불과하다고 하면 나는 등을 돌리겠어, 등을 돌리면서 더 어두운 구석으로 옮겨가겠어, 작은 빛이 스며들 때까지, 그리고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성냥공장 소녀〉를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지 계속 생각하겠어, 사유하겠어, 생각과 사유는 분명 다른 것 같단 말이지, 생각이 먼저고 사유가 그다음일까, 생각은 사유를 위한 준비 운동일까, 사유에서 생각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사유에 빠진 생각은 또 어떤 걸까,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나는 생각해, 나는 사유해, 나는 생각 당해, 나는 사유 당해, 나는 사유 당해도 싸, 나는 사유 당해 마땅해, 생각의 취향, 취향을 위한 사유, 취향이 사유로 극복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취향은 사유가 아니다, 취향은 사유다, 사유하는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취향은 사유로만 극복될 수 있다, 사유는 취향으로 완성될 수 있다, 사유는 취향이다, 넌 어때, 계속 사유하게 만드는 것, 너에게도 그런 게 있겠지, 근데 너 손에 난 상처 예쁘다, 내가 좀 더 정신적이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심미안과 능력을 갖췄다면 네 손에 난 상처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어, 이해 바깥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까, 이해를 위한 말, 이해 바깥은 말의 장소가 될까, 우리는 말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갈 필요가 있어, 거기 어딘가에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이 상영되고 있어, 삐에르 밤바다는 이렇게 말하며, 끝나지 않을 말을 끝내는 척하면서, 오랫동안 내 왼손의 켈로이드를 바라보았지,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좋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삐에르 밤바다는 정색하며 표정을 바꾸더니, 너희도 잘 알 거야, 상대방을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특유의 표정으로, 음색까지 바꿔 가며, 도대체 삐에르 밤바다는 목소리가 몇 개인지, 셈할 수나 있는지, 테스트 윤의 격한 말에 긍지와 어둠과 나는 맞아, 옳아, 그랬지, 라는 눈빛을 보냈고, 테스트 윤이 이어 삐에르 밤바다의 말을 전달하며,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너도 함부로 허락하지 마, 여기서 테스트 윤은 왼손의 켈로이드를 오른손으로 가렸고, 그사이 나는 또다시 무용한 문장을 추출하며, 지친 켈로이드가 오른손이라는 이불을 덮고 잠든다, 어떤 방향도 지시하지 못하는 문장이 얼마나 많은지, 테스트 윤의 목소리에 다시 집중하며, 삐에르 밤바다의 난독증 같은 말을 내가 흉내 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근데 내 입에 달라붙은 이 말들은 어쩌란 말이야,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오는 사람도 있어, 눈물 없이 입으로 우는 사람도 있어, 삐에르 밤바다의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지웠어, 지워졌어, 아무래도 우리는 오늘 밤, 오늘 밤 우리는, 〈성냥공장 소녀〉를 봐야 할까 봐, 하지만 어디서 봐야 할까, 이곳에서, 나의 공간에서, 긍지와 어둠의 공간에서, 테스트 윤긍지와 어둠을 바라보았고, 긍지와 어둠은 나를 바라보았고, 전기올빼비 장존삽의 공간에서, 테스트 윤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긍지와 어둠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성냥공장 소녀가 유황 머리 천사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기라도 한 듯, 두리번거리며, 이차정 씨가 돌아와 대화와 침묵의 형식을 바꿔 주기를 기다릴 때, 우리가 이전처럼 같은 작업실을 공유했다면, 함께, 오늘 밤, 우리의, 오늘 밤에, 〈성냥공장 소녀〉를 함께 보며, 무언가를 함께 보고 읽고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라고 우리의 친구 삐에르 밤바다는 말했지, 지난 시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각자의 생활공간에 유폐된 우리는, 저마다 우리 입에 달라붙어 있는, 물결치는, 삐에르 밤바다의 먼 귀엣말로, 밤을 기다리며, 밤이 오지 않기를, 기다리며, 정작 기다리는, 기다리고 있는 게 맞겠지, 이차정 씨가 돌아오지 않기에, 우리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고, 이차정 씨가 앉아 있던 의자에 놓인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바라볼 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언젠가 무언가 있었다는 것이고, 언젠가 무언가 있게 될 거라는, 나의 고유한 생각을 확장하고 싶었지만, 이 생각 역시 삐에르 밤바다의 언어의 궤도에서 맴돌고 있으니, 삐에르 밤바다가 말하길, 우리가 오물이라면 언어는 걸레가 되고, 우리가 눈물이라면 언어는 수건이 되고, 우리가 걸레라면 언어의 오물을 닦고, 우리가 수건이라면 언어의 눈물을 닦고, 걸레는 언젠가 수건이었고, 수건은 언젠가 걸레가 되겠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언어가 될 거야, 언어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방금 말한 언어는 무엇으로 닦아내야 할까, 닦을수록 오물이 되는, 닦을수록 눈물이 번지는, 언어도 있겠지, 겨울이고, 우리는 드라이빙 중이고,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 난 글씨를 쓰고 입김을 불어 지울 거야, 지워지지 않아, 지금이 겨울인가, 내가 삐에르 밤바다의 말을 흉내 내며, 지금이 겨울인가, 라고 묻자 긍지와 어둠은 『중력과 은총』의 낱장을 넘기며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시도하고, 테스트 윤은 자신의 작업 노트에 무언가를 쓰려고 시도하고, 하지만 긍지와 어둠은 아무것도 읽지 못할 것이고, 테스트 윤은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고, 나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할 것이기에, 나의 생각은 독백이 되지 못하고, 독백이 되지 못하는 나의 생각은 어떤 대화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예상과 달리, 나의 예상이 빗나갈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찾게 되지, 라고 삐에르 밤바다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고, 긍지와 어둠은 『중력과 은총』에서 저울이라는 단어를 찾아 겨울이라고 읽었고, 테스트 윤은 노트에 겨울이라고 받아 썼고, 결정적으로 회전문을 통과해 들어온 이차정 씨가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의 생각과 말을 멈추게 하는 몸짓으로 의자에 앉으며, 이제 겨울인가 봐요, 라고 말하면서, 양팔로 어깨를 감싸며,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싸며, 삐에르 밤바다라면, 오른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려고 시도하겠지, 몸짓을 만들기에, 삐에르 밤바다가 만들고 싶어 했던, 결코 만들 수 없었던, 머릿속에서 빈혈 영화처럼 반복적으로 상영되고, 재상영 되는,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이라면 이차정 씨의 몸짓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니, 삐에르 밤바다를 향해 물었지만, 여기에 없음으로 지금 다시 돌아온, 먼 목소리로 나타나는, 삐에르 밤바다는 대답이 없고,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끊임없이 나와 테스트 윤긍지와 어둠이 대답해야 하는, 대답을 지연시키는, 유예시키는, 물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다, 록시땅 립글로스를 입술에 바르고, 빰빰거리고 있는, 이차정 씨에게, 많이 추운가요, 라고 내가 묻자 이차정 씨는, 이제 안 추워요, 라고 대답하고, 담배는 좋았나요, 라고 긍지와 어둠이 묻자, 별로였어요, 역시 담배는 입에 물기 전이 좋아요, 이차정 씨의 말을 들은 테스트 윤이 자신이 담배를 잘못 만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 어린 표정을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라고 묻자,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이차정 씨가 미소를 지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미소였다, 테스트 윤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시작했는데, 그 말은 예상치 못한, 우리의 기대 이상의 말이었는데, 우리가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이차정 씨의 말은 이렇게 시작되는데, 담배를 피울 동안 걔를 생각했어요, 오해 말아요, 내가 걔를 걔라고 부르는 건 걔가 나의 고유한, 절대적인 걔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 서로를 걔라고 불렀어요, 이제 나를 걔라고 부를 걔가 없어요, 오해 말아요, 걔만 생각하고 싶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아주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난 책임질 일이 있고, 나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사람들의 삶이 나의 분석력과 논리적인 목소리에 달려 있기에, 난 누구처럼 무책임한 일에 무모하게 매달리는 성격이 아니니까, 전화를 받았고, 기다리던 소식을 들었는데, 설명하기에는 길지만, 제 의뢰인이 승소할 수 있는 증인 채택이 성사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고, 기쁜 소식이었는데, 아무튼 이제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야 할 테니 내일 오전까지 푹 쉬고 오라는 보스의 전언까지 들었는데, 전화를 끊고 나자,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에, 불안감의 정체가 걔 때문인지, 당신들 때문인지, 오랜만에 빨아들인 담배 연기 때문인지, 당신들을 만나기로 결심한, 솔직히 엽서를 발견하고 반년 넘게 고심했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그 순간 이차정 씨가 말을 멈추고, 나를, 테스트 윤을, 긍지와 어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는 뚫어졌다, 멀리 바다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젖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걔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처음이었어요, 어디서부터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걔와 대화를 나눴던, 그런 게 대화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걔에게, 나한테 등을 돌리고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걔한테, 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라고 말하자, 걔는 몸을 반쯤 돌려 말했어요, 맞아, 하지만 난 제정신을 싫어해, 시간이 지났고, 시간이 지났는데, 그때의 내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말이 걔의 등에 꽂은 칼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고, 걔의 목소리가 들려온 거예요, 하지만 난 제정신을 싫어해, 그 말을 할 때 걔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할 수 없어요, 난 보지 못했으니까, 반쯤 돌린 몸만, 몸의 실루엣만 눈앞에, 아름답고 슬픈 몸으로, 지금 생각하니 무척 아름답고 슬픈 몸이었어요, 그때는 그 몸을 경멸하기만 했지요, 하지만 난 제정신을 싫어해, 라는 목소리를, 온몸으로 말하는, 온몸이 입이 된, 몸입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목소리는 멀지 않은,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들려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들의 말이, 걔의 목소리를 불러온 거예요, 내가 왜 당신들을 찾았는지, 걔의 책들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는지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 하루 동안만이라도, 처음으로 걔가 되어 보자고 결심했어요, 제정신을 싫어해 보자고, 댄스 없는 댄스 필름, 난 그런 건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제정신을 싫어해 보자고, 어릴 적 내가 걔보다 무용을 잘했어요, 그걸 걔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무용을 포기했어요, 내가 계속 무용을 했다면 나는 제정신을 잃게 되었을까요, 댄스 없는 댄스 필름에 다가갈 수 있었을까요, 걔를, 그리고 당신들을 이해해 보려 해요, 오늘 하루만, 아닌 오늘 밤까지만, 곧 밤이 오겠지요, 그건 이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머뭇거리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닌데, 말을 할수록 말의 확실성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이미 걔의 목소리가 내 안에 가득 찬 것일까요, 이런 물음도 나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나는 걔가 남긴 책들을 버리지 않았어요, 시간이 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읽어 보고 있어요, 그렇게 그 책을, 그 엽서를 발견한 거예요, 난 그 책을 그대로 덮을 수도 있었어요, 그럴 수 없었고, 『중력과 은총』이라니, 나는 평생 걔가 남긴 책을 읽을 거예요, 읽어야 해요, 내 삶의 숙제, 숙제가 너무 많아요, 난 숙제라면 빠르고 정확하게 해치워야 하는 사람이지만, 공부라면 자신 있는 사람이지만, 무용의 삶을 포기한 뒤로는 이 세계가 요구하는 공부에만 매달렸는데, 내가 믿었던 세계는 걔와 당신들이 믿었던 세계와 다른가요,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요, 나는 잠시 동안 제정신을 잃을게요, 말을 할수록 제정신을 차려야 하는 삶에 익숙한 나지만, 오늘은 말을 할수록 제정신을 잃어 볼게요, 가능하다면, 가능하도록, 당신들이 불렀던, 부르고 싶은, 그 이름으로 연기를 해볼게요, 날 봐요, 내가 삐에르 밤바다예요, 내 입이 그렇게 말해요, 내 입이 내 몸이에요, 삐에르 밤바다가 되려는 이차정 씨가 긍지와 어둠과 나와 테스트 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는 또 뚫어졌다, 뚫어진 우리는 잠시 넋을 잃고, 회전문과 그 옆의 자동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 정장을 갖춰 입고 각자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 이곳에 우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물러나야 할까, 우리가 믿었던 세계에서 퇴장해야 할까, 세계가 무대라면, 우리는 무대의 모서리에 몸의 일부를 문지르고 있었나, 몸의 일부가 입인지 귀인지, 아니면 한없이 연약한 부위인지, 나의 생각을 가루로 만들고 싶어 나는 입을 열어, 곧 밤이 올 거예요, 당신이 삐에르 밤바다라면, 오른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나는 어떤 희망의 대가를 치르듯 말했고, 내 목소리의 떨림이 나에게도 전달되었고, 이차정 씨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려고 시도했는데, 이전보다 팔이 길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고, 점점 기이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변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또 다른 피부 피구라가 될 수 있을까, 어느새 테스트 윤긍지와 어둠이차정 씨의 몸짓을 따라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처음 자신과 비슷한 형상물을 마주한 아이가 되어, 오른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려고 시도했고, 입술을 빰빰거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이차정 씨가 이번에는 고개를 뒤로 젖혀 턱으로 허공을 찍으며, 우리는 이 몸짓도 따라 했고, 안 그럴 이유가 없다, 나와 같이 가요, 라고 말하자, 긍지와 어둠이, 당신이 삐에르 밤바다가 되면 우리도 삐에르 밤바다가 되어야 해요, 라고 말했고, 뒤이어 내가 당신이 삐에르 밤바다가 되면 우리도 삐에르 밤바다가 되어야 해요, 라고 따라 말했고, 테스트 윤이 같이 가요, 난 이미 삐에르 밤바다예요, 라고 말하자, 우리의 친구 삐에르 밤바다의 목소리가 들렸고, 삐에르 밤바다가 말하길, 우리는 가짜 재현으로 태어나 가짜 재현으로 죽어갈 텐데, 가짜 재현이면 안 되나, 안 돼, 절대로, 듣고 있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나의 말은 언제나 대화를 향해 열려 있는 독백이니까, 삐에르 밤바다의 목소리와 함께, 삐에르 밤바다가 되려는, 하지만 삐에르 밤바다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차정 씨도 정말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라는 애매모호한 절충의 호칭을 허락하며, 우리는, 삐에르 밤바다의 마지막 악필이 담긴 〈백설 공주〉 엽서를 『중력과 은총』에 다시 넣어 봉인하고 책을 덮었고, 탁자 위 찻잔들을 정리해 카운터로 돌려주고,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매섭게 불어, 자연은 내면의 음향까지 잘 흡수하기에, 삐에르 밤바다의 목소리가 갈기갈기 찢어지기 전에, 서둘러 이차정 씨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충전 중이었던 파란색 푸조 전기차에 올라타, 은은한 마르멜로 향이 났다, 테스트 윤이 조수석에 앉고, 긍지와 어둠과 내가 뒤에 앉았는데, 이 위치는 얼마든지 달라져도 좋다, 시동을 켜고 핸들을 돌리는 이차정 씨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고, 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묻지 않나요, 라고 이차정 씨는 묻지 않았고, 인천 대교에 오르자 풍경은 점점 어두워졌고, 이차정 씨가 선루프를 열자, 바닷바람에 우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이차정 씨가 룸미러를 통해 나와 눈이 마주쳤고, 붉고 푸른 어둠에 잠긴 삐에르 밤바다의 눈빛이 떠올랐고, 당신들을 다 바다에 처넣어버릴 거야, 라고 이차정 씨가 말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우리에게,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상태가 정신의 중력을 가볍게 만들고, 은총의 반중력을 느끼게 만든다고, 뒤늦게 깨닫고,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오는 것이지만, 토성의 고리에 매달린 삐에르 밤바다라는 턱받이를 하나씩 걸친, 밤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되어, 이미 도착한 밤을 계속 기다렸고, 잠시 후, 이차정 씨가 익숙하게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는 순간, 우리는 어떤 암묵적 신호를 수신해 왼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며, 밤의 풍경에 모든 것을 맡겨야 했는데, 갑자기 긍지와 어둠이 나한테 등을 보이며 울음을 터트렸고, 테스트 윤이 창문을 내렸고, 나는 앞머리를 쓸어내렸고, 미친 듯이 바람이 불었고, 차가 흔들렸고, 어디 마음대로 계속해 봐, 이차정 씨가 속력을 더 높였고, 점점 빠르게 사라지는 밤의 풍경을 마주하며, 삐에르 밤바다의 말이 흩어졌다, 나는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어, 다시 모이며, 모든 위치에 내가 있어, 울리고, 너희들은 어떻게 살고 있어, 되울리며, 계속 가면 어딘가에 닿을 거야, 우리의 친구 삐에르 밤바다의 이름을 따라,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드는, 만들려고 했지만 만든 적이 없는, 만들지 않았기에,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은 잠재적 상태로 머물러 있으니, 언제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던, 여기에 없는, 여기에 없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기에 없음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 나타나는, 지금 나타나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여기서 없어지는, 하나에서 뻗어 나온 다성의 목소리로, 셀 수 없는 색채의 떨림으로, 지금, 여기에서 없어지는, 여기에서 없어지며, 얇아지고 넓어지는, 피부 피구라, 삐에르 밤바다가, 밤마다, 우리를 향해 돌아누울 것이고, 돌아누워 속삭일 때, 우리가 마주해야 될 가변적 현실 속에서, 이차정 씨는 선루프를 닫고, 조수석의 창문을 올리고, 차의 속력은 유지하며, 입을 열어, 말을 할수록 제정신을 잃어 가며, 내가 무용을 그만둔 이유는 코끼리피부병 때문이었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런 거짓말하기 싫어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싫어, 안 해, 난 삐에르 밤바다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인천 대교 위를 질주하며, 질주할수록 다리 끝은 더 멀어지는 것만 같고, 차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보이는 어둠을 향해, 빰빰, 클랙슨을 울리자,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허구의 결속을 찾아, 물보라 같은 감정의 파고를 넘어, 희망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여기에와 지금을 지우며, 삐에르 밤바다의 언어를 받아쓰기 위해, 삐에르 밤바다의 언어는 삐에르 밤바다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삐에르 밤바다의 언어는 삐에르 밤바다를 지나쳐 언어 자체로 향하고 있지 않나, 언어는 언어 이외의 것을 외롭게 만들어, 언어는 언어를 부를 뿐이니까, 라고 말했던 삐에르 밤바다의 말이, 뒤늦은 부름이, 언제나 부름은 뒤늦기 마련이지만,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렇기에,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부름을 지속하며, 계속 이렇게 시작되어야 하기에, 언어의 관절을 뒤로 꺾으며, 푸잌, 웃고 있니, 삐에르 밤바다가 말하길,













문서정
작가소개 / 김태용

2005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음악 이전의 책』과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 『러브 노이즈』 출간. 한국일보문학상·문지문학상·김현문학패 수상. 현재 〈텍스트 콰르텟〉 멤버로 활동 중.


《문장웹진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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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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