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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걷기

  • 작성일 2022-07-01
  • 조회수 5,506

[단편소설]



빛 가운데 걷기



김채원





한 노인이 감색 외투를 입고 토란을 파는 가게와 술집을 지나고 있었다. 거리에 쌓인 눈은 이미 다 녹았고, 걷기에도 산을 오르기에도 좋은 날이었다. 노인은 서북쪽에 있는 숲에 갈 예정이었다. 수목장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된 숲이었으므로 수목장을 치른 나무들이 많이 심긴 곳이었다. 희고 고운 가루를 목함에 담아 땅에 묻고 기도하는 사람들. 억양을 지운 말투. 구두약 냄새. 만가(輓歌). 쿠르쿠마. 노인은 그것들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노인이 기억하기에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이 함께 어울려 있었던 적은 없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위해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동안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지는 않을 거야. 당시에 노인은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고 이렇지만은 않을 거야.
그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고, 풀과 흙에서 어둡고 찬 냄새가 났다.
노인은 그와 같은 냄새를 겨울에도 종종 맡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온 얇은 이불이나 새시 문에서, 필요한 모양대로 구부린 환전소 네온사인 간판에서 또는 어째서 몸을 저렇게 망가뜨렸는지 모를 옆집의 절름발이 남자에게서. 양지에서 햇빛을 받으면 몰라보게 건강해질 거라고 했었지, 그 사람. 양지에서 햇빛을 받으면 제가요 몰라보게 건강해질 겁니다 어르신. 그런 걸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런 말을 했었지,
하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가기 전에 노인에게는 몇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것은 좀처럼 변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평소의 약속들로 노인의 하루 일과이기도 했다. 평소의 모습.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때의 모습. 노인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지킬 수 있게 노력했다. 한밤에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기. 세수하기. 창문 열기. 약을 챙겨 먹고 물 한 컵만큼의 청력을 유지하기. 이제 남은 일과들 중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문 앞에 서서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기.
노인은 피아노 교습소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보다 먼저 도착한 학부모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심상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노인은 조용히 자기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고, 그 또한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그를 볼 수 있었고, 그 또한 자신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볼 수도, 가늠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실들을 서로 무시하여 결국엔 우습게 만들었다. 일종의 질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노인은 생각했다. 질서는 삶을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순서나 차례이니 그러므로 삶에 해(害)가 되는 기억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기. 아니,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가 나타나 비탈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손잡이가 달린 종이봉투를 양손에 각각 들고 있어 무게 중심이 기울어질 때마다 넘어질 것도 같아 보였는데 정말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이는 잘 걸었다. 처음 걸음을 배울 때 익힌 모양새를 도로 생각해 내고 있는 탓에 눈썹을 세우고 걷고 있었다. 아이에게 걷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아이의 어머니였고, 노인의 딸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닮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그다지 닮아 있지는 않았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노인은 아이가 들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받아쓰기를 한 과제물과 토마토 화분, 그리고 씨앗 때부터 지켜보았던 토마토 화분에 대한 관찰일지였다. 봄방학이 시작되어 사물함을 마저 비운 것이었다. 노인은 채점 표기가 된 받아쓰기 과제물을 몇 장 꺼내 대강 훑어보았다. 매 장마다 날짜가 다른 시험지에는 전부는 아니어도 올바르게 받아 적은 몇 줄의 문장들이 항상 적혀 있었다. 1) 팥소나 말린 과일을 넣어 2) 한 문제를 또 틀렸습니다. 5) 의자에 바르게 앉아 2) 잘 막아 준 덕분에 8) 여름풀에 이름을 써서 10) 화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노인은 왜 이것들을 매번 사물함에 넣어 두고 집에 가져오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묻지 않고 시험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양손에 봉투를 들고 내내 서 있던 아이가 토마토 화분과 관찰일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줄기가 곧잘 자랐네. 열매가 열리면 따서 한번 먹어 보자. 노인이 말했다. 아이는 노인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별로 없어 보였다. 들어 달라고? 노인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들어 줄 수는 없어.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지게 된다. 둘 다 이리 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두 개 다 네가 들고 가야 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 다 여기에 두고 가버려도 되고.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그것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정문을 벗어나 좁은 보행로를 따라 걸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개학식을 제외하고 방학식이나 종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노인과 아이는 핫도그 가게에 들러 핫도그를 사먹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설탕을 뿌린 핫도그와 오렌지 주스를 나누어 먹으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고 앰프를 통과하여 나오는 가게의 음악소리를 들었다. 오늘처럼 가게 직원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만 들리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직원에게 유독 슬픈 일이 있는 날이었다. 노인과 아이는 그때마다 말없이 가게에 좀 더 머물렀다. 하지만 오늘은 핫도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자꾸 졸아서, 실은 그렇게 졸았던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피로한 기색이어서 노인은 핫도그를 포장해 달라고 고쳐 주문한 뒤 포장된 핫도그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아이는 졸지 않고 또 잘 걸었다. 양손에는 여전히 종이봉투를 든 채였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핫도그를 주었다. 자신도 절반을 잘라 나누어 먹었다. 아이의 입가와 머리카락에 묻은 설탕 알갱이를 손등으로 털어 바닥에 떨어지게 했다. 발로 밟지는 말고. 아이는 그렇게 했다. 아이가 양치를 하고 몸을 씻는 동안 노인은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아이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마치 시간을 세듯이 이미 오래전에 외워 둔 주기율표를 외웠다. 별다른 이유는 없이 심심해서였다. 탄소. 질소. 산소. 플루오린. 네온. 나트륨. 마그네슘. 마그네슘은 원자번호 12번 원소, 플루오린은 그저 불소일 뿐인데 왜 어렵게 플루오린이라고 외워야 하냐고 물어 본 학생이 있었지. 뭘 물어 20번까지만 외우면 되는 거였는데…… 걔가 그걸 다 외웠던가?
노인은 물에 불은 아이의 손톱을 깎아 주고 낮잠을 재웠다. 그러고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명종 알람이 있는지, 유선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는지 확인하고 다시 집을 나섰다. 물론 잠에서 일찍 깨어나더라도 아이는 노인을 찾거나 제멋대로 거리로 나와 울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아이는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지낼 수 있게 되는 아이는 있었다. 이곳 어디엔가 버스에서 잘못 내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만을 만나게 되어 혼자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버스에서 잘못 내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분명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움을 줄 생각이 있는 사람들만을 만나게 되었더라도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거야. 그가 도움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을 거야. 그가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어?
노인은 담장을 허물고 있는 단지 근처를 지나쳐 걸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소음이 이어져 기압이 높지 않음에도 귀가 먹먹했다. 자선공연을 하는 남자의 곁을 지날 때쯤 노인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쾌하고 즐거운 노래였는데 음조를 지키지 않고 불렀기에 만약 누군가 귀를 기울인다면 장난에 가까운 혼잣말처럼 들릴 것이었다. 노인은 자동차가 줄지어 세워져 있는 공용주차장에 몸을 숨기고 포도 향이 나는 담배를 가볍게 깨물어 피웠다. 노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죽음을 몰아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주차장 바닥에 여러 차례 으깨져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순식간에 눈부시게 환해져, 그와 동시에 교각 아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또한 상상했다. 핫소스 병. 등대. 나무껍질. 상점들. 가지요리. 사이다 자판기.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들. 자두를 증류해 만든 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의 강의를 듣기. 그곳에 두꺼운 이론서를 두고 뒤돌아 자리를 떠나기.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시끄럽게 문을 열기. 모든 것이 사실 같았다. 노인의 머리가 어지러워 계속 흔들거렸다.
이런 곳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정말 운이 좋아.
갑자기 들려온 두 사람의 목소리에 꿈속에서 도로 끌려 나온 듯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을 때, 노인은 두 사람이 대화를 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잠시 겹쳐진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이내 서로를 비껴갔다. 노인은 대화를 나누지 않은 두 사람 중 지금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작은 키에 주름진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예전의 직장 동료와 마주친 것이었다. 노인은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했다. 우연히 그를 만난 것이 재미있어 들떠 보였다.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 됐다.
노인이 말했다.
할 얘기라니. 뭔데?
동료가 전화를 끊고서 의아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았다. 지난번에 하구에서 운 좋게 발견한 고무줄 말인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 생각밖에 안 나. 노인이 그 자리에서 할 말을 지어냈다.
고무줄은 뭐고, 그게 뭐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
동료가 물었다.
그 고무줄 생각밖에 안 나. 그게 문제고, 그게 다야.
노인이 대답했다.
동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이것 봐. 정확하게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듣지…….
노인과 동료는 다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우연히 또 만나게 된다면 반갑겠지만 영영 또 만나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노인은 동료와 함께 일했던 시간들 말고, 동료가 평소에 여러 번 말했던 용어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이가 들면 되돌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어가 느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퇴직 교사를 대상으로 모집한 구청의 기간제 교사 채용에 지원하여 작년에 같은 고등학교에서 일했다. 정부의 지원 사업 중 하나였고 계약 기간이 짧았으므로 일 년도 채 안 되어 출근할 수 없게 되었지만 노인은 6교시에 화학 과목을 가르쳤고, 동료는 방과 후 남은 학생들에게 지구과학 과목을 가르쳤다. 학생들의 수업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노인은 동료가 날씨와 기온과 구름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정작 동료는 전기보일러나 교반기, 그것 외에 증강현실에 대한 이야기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열과 기온의 원리를 알아내어 인간이 일정 온도를 넘어서는 공간에 놓이면 호흡이 가빠진다는 것을 밝혀내도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정상적인 온도를 가진 공간에서도 매일 호흡이 가쁜 사람이 있어. 저기압의 영향으로 눈이 내려 날씨가 따뜻하다고 해도 내 몸이 추우면 추운 거고 그게 다 뭐겠어 반면에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배경에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인데 가상현실과는 달라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온통 진짜인 것도 온통 가짜인 것도 아니고 반쯤만 가짜여서 더욱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데 배우면 돈도 꽤 벌 거야 되게 흥미로워. 군용 항공기와 관련된 잡지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다고 했다. 항공기 계기판에 전방 표시 장치로 가장 처음 증강현실이 적용되었다고.
당시에 노인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고 자신의 아버지가 일장기를 매단 군용 항공기를 몰았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나가듯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언제인가 아버지를 파일럿이라고 속여 자랑했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0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도 노인은 몇 마디의 말,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내뱉은 몇 마디의 말과 목소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병가를 낸 적도 있어, 겁이 나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나는 일부러 병가를 낸 적도 있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어째서인지 노인은 아버지의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했어야 했냐니, 하고 속으로 반문한 뒤에 이어서 그다음 말을 생각하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여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고 난 뒤에는 더는 아무도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이상하거나 슬픈 일은 아니었다. 일부러 버릇을 들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일이었다. 그런 일들은 여기저기에 목숨만큼 많았다. 아버지는 계기판에 겹겹이 뜨는 붉은 가상 불빛들을 현실과 겹쳐서 보았겠지. 좋았을까. 타오르는 불길 같았을까. 덜 무서웠을까. 더 무서웠을까.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노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풍경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살한 딸의 눈에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다시금 생각해 보려다가 관두었다. 노인은 양지를 걷고 있었고, 폐에 염증이 생기지도 않은 채로 잘 지냈고, 아직 할일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저녁에 읽다 만 책도 마저 읽어야 했고 면도도 해야 돼. 내 눈에 보이는 것들과 아마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야.
노인은 중얼거렸다. 나는 그걸 알고 있어.
노인이 저녁에 읽다 만 책의 중간 대목에는 달걀말이를 좋아하는 당직관이 등장하는 짤막한 꿈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지루하고 이야깃거리가 전혀 되지 않는 소재였는데 일단 쓰여 있으니까 언제라도 읽을 수 있었다. 노인은 아직 그 부분까지 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부분을 읽게 된다면 잠들기 전, 혹은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에게 그 부분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직접 읽어 보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공이 꾸고 있는 꿈속에서 사흘에 한 번 당직을 서야 하는 공무원의 이름은 제방이었다. 그는 도심에 살고 있고 사흘 만에 또다시 당직을 서게 된다. 정해진 번차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만이랄 것은 없고 당직을 설 때 다만 그는 자동응답기를 켜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안에 있는데 자동응답기를 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규칙을 어기고 몰래 자동응답기를 켠 채 즐겁게 당직을 선다. 당직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가 일하는 기관으로 밤새 전화를 건 사람이 없었기에 자동응답기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아침이 된다. 그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전날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달걀말이를 꺼내 데워 먹은 뒤 얼음을 띄운 차가운 백차를 마신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분풀이로 건물 복도의 유리창이 깨져 있다거나 도난당한 서류 묶음이 있다거나 하는 연락은 오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방해 없이 환한 낮에 잠들고,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가 완전히 잠들면 꿈의 주인인 주인공이 깨어난다.
노인은 요즘 책을 오래 읽는 것이 버거워 하루에 두 장 정도밖에 읽지 못하므로 이 이야기를 나중에야 읽게 될 것이었다. 나중에 읽을 수 있다면 나중에 읽으면 되었다. 동료와 짧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 노인은 한동안 혼자 걷는 사람들 틈에 섞여 조금씩 변하는 햇빛의 방향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카페에서 달려 나와 개미집에 우유를 붓는 아이들을 보았다. 더는 운전을 하기 싫다며 손님에게 내려 달라고 말하는 살찐 운전수를 보았다. 손님은 오른쪽 차 문을 열어 두고 운전수의 뒷목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다. 두 사람 다 택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들의 머리 위로 햇빛이 비추어 이들을 더 잘 보이게 했다. 노인은 그러한 장면으로부터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또다시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손가락과 소매에 밴 담배 냄새가 이제는 다 날아갔을 거였다. 얼마나 미운가. 노인은 생각했다. 어렵게 노력하여 죽은 그 애가 나는 얼마나 싫은가. 그런 것은 무료한 시간을 잘 보내다 갑자기 두 발을 구를 때의 기분처럼 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잘 알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노인은 딸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 나갔다. 한겨울이 아닌데도 어느새 해가 금방 져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전반적인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음에도 아주 나빠지고 있다고 느꼈다.
딸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중전화 박스와 수화기, 전단지 글씨들. 업소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누구게요, 하고 묻다가 욕을 듣고 돌아서서 무감한 얼굴로 매일 거리를 돌아다니던 교복을 입은 나이대의 모습. 결말을 연습하듯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돌아다니거나 넘어져 발을 질질 끌며 돌아오던 모습. 한번은 같은 곳에 계속 장난 전화를 걸다가 업소 주인에게 걸려 보복을 당할 뻔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위험하게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들어 놨어야 했는데 아니야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대답을 들었는데 내가 그걸 가볍게 잊어버렸어. 이렇게 될 줄 알 수밖에 없었지만 그야 잘은 몰랐으니까. 어느 날 결혼하여 같이 살고 싶은 남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도, 뱃속에 그 남자의 아이는 아닌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도 나는 물어 보았다. 그게 좋은 것인지. 행복한지. 부지런히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복용량을 늘리고 이런 감정적인 일들을 만드는 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너의 무엇을 내가 도울 수 있는지. 그런 게 아니야 아빠. 그냥 내가 구걸을 하는 거지, 나한테. 이건 어때. 이건 좀 괜찮아? 아니구나…… 그럼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이러면 조금 더 살고 싶어?
노인은 웃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 네 마음에 들어?
노인은 물었다.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대답이 듣기에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마음에 안 들어.
노인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학술 사전에 적혀 있던 오래된 자료의 배열과 자신의 수업 노트를 아무렇게나 복기하고 되풀이하며 익숙한 길을 따라 계속 걷기만 할 뿐이었다.
파열강도는 재료가 파열되지 않고 압력을 견디는 능력의 크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어진 두께의 용기를 파열하는 데 필요한 수압과 같다. 인장강도는 재료를 잡아당겨서 측정할 수 있으며 시편이 파열되기까지 필요한 최대 응력을 말한다. 저항이란 전기가 흐르기 쉬운 전도성의 역수 개념으로 저항이 크면 부도체 즉, 절연체이다. 전기의 절연체는 유리, 에보나이트, 고무 따위이며 열의 절연체는 솜, 석면, 회(灰) 따위이다. 칼륨과 나트륨은 성질이 거의 같지만 그것은 완전히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벤젠에 칼륨이 닿으면 쉽게 불이 붙지만 나트륨이 닿으면 대체로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충돌. 통과. 증명. 반발. 평형 실험. 원자의 구조에서 질량수가 A보다 B가 더 크고 원자번호가 같으면 중성자 수 또한 A보다 B가 더 크다.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왜 당연하냐 하면 그렇게 정의되어 있으니까. 6CO2+6H2O→ C6H12O6+6O2와 같은 반응식을 보면 이것이 광합성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려우면 외우면 된다. 어렵지 않아. 화학은 결국 물질 실험이니 실험의 정확한 목적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목적을 지우고 결과지만 보고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나는 이것들을 다 배웠다. 배워서 알아, 알고 있어.
연립주택이 모여 있는 단지로 돌아와 현관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도 노인은 이전에 암기한 용어들을 되풀이하여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먼저 노인에게 인사했다. 노인의 집은 일층이어서 계단을 몇 칸 오르지 않고도 서로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현관문은 안전고리가 걸린 상태로 얼마쯤 열려 있었고, 여자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듯 반대편을 보고 서 있었다. 노인은 입을 다물고 여자에게 목례를 했다. 여자는 아이의 언어 치료를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교회를 통해 소개받았는데, 노인도 아이도 더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무언가를 믿는 일에 별다른 소질이 없었다.
문 열고 잠깐 인사는 했어요. 그런데 이 고리를 안 풀어 줘서요.
여자가 말했다.
노인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이르게 오셨네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미안합니다. 여자는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와 있었다. 아이를 혼자 두고 밖에 다녀오실 때가 있나 봐요. 여자가 물었다.
네. 잠깐이어서요, 선생님. 담배를 피워야 해서.
노인이 대답했다. 몸이 좀 피곤했다. 노인은 여자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에게 문을 마저 열어 달라고 했다. 아이가 발판을 밟고 올라서서 안전고리를 풀어 주었다. 일찍 깼어? 안으로 들어오며 노인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초인종 소리 때문에 일찍 깼겠다. 수업 끝나고 더 자자. 아니면 밤에 자기로 하고 이따가 간식을 먹든지. 아이가 고개를 돌려 아직 뜯지 않은 새 과자를 가리켰다. 열에 녹인 초콜릿을 카스텔라 위에 씌워 다시 굳힌 과자였다. 알겠어. 저거 먹어 보자. 이따가. 아이는 과자 봉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이따가. 노인이 짧게 웃고 다시 말했다.
아이는 여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주방에서 겨울 배를 먹기 편하게 잘라 물과 함께 여자에게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여자가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과 전자기기를 꺼내며 쟁반을 밀어 옆으로 두었다. 아이가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천천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작은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노인은 띄엄띄엄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인은 방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이가 연습하는 문장을 함께 따라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아이는 발화 길이가 짧아 길고 복잡한 문장을 단번에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이의 문제이고, 날짜를 알 수 없는 질병이라고 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적절하지 않다. 읽기 쓰기 학습에 어려움이 있다. 이해 언어에 비해 산출 언어가 부족하다. 또래와의 상호작용이 어렵다. 그러므로 또래 아동이 치료 대상 아이의 언어 문제를 모방하지 않도록 담당 교사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게 왜 질병이야 왜 따돌려? 저 아이는 병자가 아니다, 생각하면서도 노인은 매달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아이를 치료 받게 했다. 아이도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여자는 아이의 상태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선천적인 뇌 손상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니 이러한 상태가 영구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노인은 여자의 말을 듣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장소에서 그들과 함께 줄을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이따금 떠올려 보았다. 상상 속에서 아이는 몸집이 자라 있었고 그 옆에 노인은 없었다. 문이 열려 있는 건물 앞에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차례가 되면 응당 안으로 들어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노인은 앉은 자리에서 잠시 졸았다. 노인이 졸고 있는 사이 아이의 수업이 끝났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인은 눈을 떴다. 노인은 여자에게, 아이가 대부분의 활동을 잘 따라 주었지만 이번에도 종종 제시된 단어를 반복하기만 하고 문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몇 번 들었던 말이어서 노인은 그 말을 한 번 더 들었다. 제시된 단어가 무엇이었냐고 노인이 묻자 여자가 대답했다. 모자였어요.
모자로 무슨 문장을 많이 만들 수 있나요?
두 사람이 연달아 모자라는 단어를 말하자 아이도 뒤따라 그 단어를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노인은 그것을 보았고 여자는 아이를 등지고 있어 보지 못했다.
모자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생각보다 많이 있어요.
여자의 가방에는 모자와 관련하여 예시로 만들어 둔 문장 카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노인은 아이와 함께 여자를 배웅하고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자의 뒷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노인은 현관문을 닫았다. 모자라는 단어가 어떻다고 생각해. 노인이 물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좋지 않다고 생각해. 잘했어. 모자라는 단어보다는 물이나 눈이라는 단어가 좋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랬다면 많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거야, 네가. 노인은 아이의 편을 들어 주려고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하다가, 자신이 서북쪽에 있는 숲에 갈 예정이었다는 것 또한 생각이 났다. 무릎에서 계속 신경 쓰이는 소리가 나는 것과 병원에 가서 안저 검사를 받기로 했던 것과 같이 점멸하듯 기억이 났다. 조금 전까지 그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어 조금 놀랐다. 정말로 그렇게 되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
노인은 환기를 하기 위해 베란다 창을 열었다. 어느새 구름이 끼어 날이 이전처럼 밝지 않았다. 우산을 들고 개를 산책시키며 자신도 산책하는 여자가 보였다. 개는 왼쪽을 걸었고 여자는 오른쪽을 걸었다. 비 소식이 있었던가.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노인은 얼마간 창밖을 지켜보았다. 베란다 배관 통로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을 보았다. 윗집에서 베란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빗자루로 물을 쓸어내 하수구로 내려 보내는 중이었다. 노인은 물소리를 들으며 서 있다가 거실로 들어왔다. 정오가 한참 지나 오후가 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약속한 간식을 주어야 했다. 약속은 잘못 알아듣거나 잘못 기억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노인은 서둘러 아이에게 간식을 주었다. 빵에 가까운 새 과자와 우유, 속껍질을 벗긴 귤과 생살구 두 알을 접시에 담아 아이 앞에 가져갔다. 아이는 과자를 먹었고 노인은 살구를 먹었다. 집 안이 고요했다. 두 사람 다 씹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 다 먹고 복습을 하자. 노인이 말했다. 아이는 노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노인은 기다리기로 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들만이 남아 있었다.
노인은 벗어 두었던 외투를 앉아서 다시 입으려다 말고 일어서서 다시 입었다. 아이가 과자를 한입에 욱여넣고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그냥 입었어. 안 나가, 나는.
노인이 말했다.
노인은 어쩐지 지칠 대로 지쳐 무언가를 털어놓고 싶었는데 막상 털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아 있는 기분 같은 것만 모래알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도 우산도 세탁물도 화분도 모두 그대로 내버려두고 침대에 금방내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나는 늙고 병들었어. 그것이 아니라면 정반대의 방식으로 여러 대의 티브이를 켜두고 볼륨을 최대치로 키운 뒤에 그 가운데 한순간의 잠도 없이 혼자 앉아 있고만 싶었다.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듣게 되어 귀를 얻어맞은 듯이 어떤 사람들은 내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고 할 거야 숨 쉬는 것보다도 앞서 내부의 소리를 덮어버리고 외부의 소리만을 듣게 되는 것이다.
커튼, 달력, 청구서, 식탁, 전등, 크레용, 해열제, 관엽식물, 두 도막의 양초, 작은 점토 파이프와 같은 여러 사물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다. 그는 수선이 필요한 것들은 수선하고 바꿔야 할 것들은 바꾸었다. 한 달 후, 사월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에, 노인은 내부의 소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아이는 작아진 불씨를 구경하거나 세면대에 물을 받아 얼굴을 담그고 있는 시간이 길어져 노인에게 자주 주의를 받았고 등교하지 않으려는 날이 늘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을 보게 되면 거의 울 지경이 되어 귀를 막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귀를 막는 것을 방해하려는 같은 반 아이를 패버리기도 했다. 아이의 새로운 담임교사는 상담 중 그것이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노인은 작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노인이 생각하기에 발생해야 하는 일은 발생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감추지 않았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노인은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주로 벽을 보고 있거나 바깥에 나와 공원 한편에 외따로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날이 좋다고 생각되어 한참을 걸었다. 관공서에 들러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수급기간 동안 생활비를 어떻게 써야 할지 미래 계획을 세웠다. 가판대에서 구입한 신문에서 노인 아르바이트 공고와 광고를 순서대로 읽고 졸다가 깨어나 광장을 지나갈 때 들리는 수많은 구호소리를 들었다. 수신인이 잘못되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소식을 엽서로 받아 다 읽고 나서야 반송했다. 반송불요가 찍혀 있는 엽서였기에 엽서는 수신인에게 되돌아가지 못하고 우체국에서 폐기처분 되었다. 정비공 시험에 마침내 합격했고, 십 년 전 맥도날드에서 같이 햄버거를 먹어 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노인은 엽서의 내용을 기억해 두었다가 햄버거의 맛이 궁금해져 어느 날 맥도날드에 갔다. 기계로 햄버거를 주문하려다 실패하고 직원을 찾아 주문하여 먹어 보았다. 다진 고기와 치즈, 양파가 들어 있는 햄버거는 맛이 좋았다. 일인분의 식사였다. 탄산이 든 음료는 이가 아파 마시지 못하고 입술만 대보았다. 노인은 햄버거를 반쯤 남기고 정전이 잦은 욕실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 근처 전파상에 들렀다. 전파상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노인들이 알은체하며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사이였다. 다 같이 인사를 했다. 그들은 노인의 운세를 봐주겠다고 했다. 운세가 좋으면 건전지를 한 팩 서비스로 줄게. 운세가 나쁘면 이걸 가져가. 우리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대신 버려 주든지 해줘. 여기서 쓰레기장이 꽤 멀어. 그것은 카세트덱이었다. 보기에 모양도 좋지 않고 값어치도 나가지 않는 물건이었다. 노인은 카세트덱이 무엇인지 몰라 잠자코 있다가 알겠다며 운세를 봐달라고 했다. 점괘를 뽑았다. 안 되겠네. 일진이 사납고 운이 나쁜 날이라고 했다. 하지만 분실물은 가까운 장소에 있다고 하니 뭔진 몰라도 곧 찾겠어. 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지으면 그 벌을 피하지 못하고 다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노인은 카세트덱을 가방에 넣고 얌전히 전파상을 빠져나왔다. 필요한 전구를 사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금방은 아니었다. 나쁜 운세를 가진 노인은 아치형으로 된 지붕이 있는 상가 통로를 통과하여 높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반투명한 지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얼굴 위로 금세 햇빛이 쏟아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흰 벚꽃 잎이 흩날렸다. 공원으로 이어지는 육교의 방향을 따라 심긴 벚나무들이 많았다. 꽃 피는 나무 아래 가득 떨어져 모인 꽃잎들이 햇빛을 반사하여 노인을 눈부시게 했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내렸다. 노인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열에 끼지 않고 떨어져 걸었다. 자신이 나쁜 운세를 가졌다는 걸 모두가 알게 하려면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계속 돌아다니면 되었다. 언제고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자신의 운세 때문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어째서인지 마음이 놓였다. 노인은 교차로에서 보행신호를 지켜 횡단보도를 건넜다. 잠깐만, 잠깐만. 누군가 걷고 있는 노인을 붙잡았다. 노인은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 뒤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직접 운세를 봐주었던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맵고 더운 향신료 냄새가 났다. 내가 거짓말을 했어. 오늘 그쪽 운세가 아주 좋아. 샘이 나서 그랬어. 카세트덱은 돌려주고 자, 여기 건전지를 가져가. 그러나 노인은 카세트덱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카세트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나는 이게 좋은데. 노인이 말했다. 작업복을 입은 노인은 그래? 하고 서 있다가 그래 그럼, 하고 다시 상가로 되돌아갔다. 기다리던 소식이 있을 거야. 오늘이 아니더라도 동쪽이나 서쪽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어. 기유년에 태어난 양자리는 피해. 노인은 가방을 고쳐 메고 다시 걸었다. 길에서 녹색 운동복을 보았다. 공장가의 인쇄업자를 보았다. 야채를 파는 여자의 손가락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름을 불린 사람들과 마주쳤다. 공원의 안내문을 읽었다. 날이 아직은 쌀쌀했다. 하지만 볕이 따뜻해 오래 걸을 수 있었다. 가볍게 뛰어 보기도 하던 노인의 몸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노인은 옥외로 나 있는 계단에 앉아 잠시 쉬었다. 건너편에 지어진 개인 병원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약국이 있었고 문가에 골판지 상자가 쌓여 있었다. 달리 할일도 없이 노인은 그것들을 보았다. 구급차가 오가는 병원이 아니었기에 주변이 깨끗하고 조용했다. 진찰을 받고 나오는 환자들의 손에서 박하 향이 났다. 다른 조건에서 살고, 다른 소리를 듣고 다른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거나 따로 말하며 걸었다. 노인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그들을 보고 있어 박하 향을 맡지는 못했다. 가까이 갈 수 없으면서도 그들이 나누는 말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의사가 평소에 하던 운동이 있으면 이제 해도 좋다고 했어요. 물어 보니까 생각은 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는 거예요. 어째서 오지 않았을까요? 아마 밤눈이 어두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걸 다들 몰랐을까요? 주세요, 이제 가볼게요. 그들이 길의 끄트머리에서 모퉁이를 돌아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다. 노인을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오지 않았다. 노인은 양 무릎을 펴고 그만 일어나 문이 열려 있는 건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찾을 수고도 없이 한낮이었으니 많은 건물들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노인은 밀거나 당길 필요 없이 앞서 완전하게 열어 둔 문을 찾고 싶었다. 노인은 완전하게 문이 열려 있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고 가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높은 로비가 나타났다. 층마다 다른 회사가 입주해 있어 노인이 느끼기에 무얼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경비원이 다가와 노인에게 방문 사유를 물었다. 그는 노인에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왜 왔냐고?
노인은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김채원
작가소개 / 김채원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장웹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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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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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엄청난 밀도에서 고단하고도 지난한 한 존재의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제 하루의 부분 부분을 잘게 쪼개서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요?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매일같이 온종일 투신하신 작가님의 시간 또한 와닿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덤덤하면서도 헛헛하기도 합니다.

    • 2023-12-26 21:01:41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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