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심리학 실험실

  • 작성일 2022-08-01
  • 조회수 1,503

[단편소설]



심리학 실험실



박정수





윤주는 빈 엘리베이터를 서너 번 올려 보냈다. 모임은 건물 오층에 자리한 상담센터의 맨 안쪽 방에서 이루어졌다. 가죽 소파와 팔걸이의자가 대여섯 개 놓인 방은 그룹 상담에 알맞아 보였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센터장이 윤주를 반갑게 맞았다. 윤주는 참가자들에게 목례하고 손 시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센터장이 손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냐고 물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손 시인은 대학 시절에 후배의 뺨을 때린 사건을 얘기하며 후회했다. 센터장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편지를 이제라도 보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 손 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 선생님이 그런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요?”
손 시인이 되물었다. 참가자들은 센터장을 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조 선생은 상담심리학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윤주를 포함한 다섯 명은 얼마간의 돈을 받으며 참여했다.
조 선생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네요.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야, 그러겠죠?”
“그렇죠? 내 마음 편하자고 편지 쓰는 것은 아닐까,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 후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한 번은 있을 테니까 받아들일 거예요. 인격 성장이 고등학교에서 멈추지 않았다면 말이죠.”
소도시 우체국에서 퇴직했다는 손 시인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의 눈은 대체로 깊고 아련했지만 간혹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남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모임의 일원인 함 사장이 전동 휠체어에 앉아서 말했다. 함 사장의 목두께만큼이나 두꺼운 목소리였다.
“윤주 씨 의견은 어때요?” 조 선생이 물었다.
“맥주 하나 주실래요?”
조 선생이 윤주에게 작은 맥주병을, 손 시인과 함 사장에게는 언더락 위스키를 건넸다. 윤주의 얼굴이 요 며칠 새 많이 상했다. 눈 밑에 그늘이 들어 있다. 맥주를 한두 모금 마신 뒤 윤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깨달은 게 있어요. 제가 속죄의 편지를 쓴다 한들 보낼 곳이 없다는 걸 알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편지를 쓰려면 먼저 생각을 정리하고, 한 번 쓴 뒤에는 다시 읽으면서 고치게 되잖아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상대의 아픔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사람은 성장하지요.”
조 선생이 댓글을 달듯이 말했다. 윤주를 바라보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덧붙였다.
두 달 전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의 그간 소재로는 사춘기의 성장통, 내가 받은 상처, 그리고 자살 충동이었다. 이번 소재는 타인에게 준 아픔. 조 선생이 내준 과제에 대해 2주 동안 숙고한 뒤 토요일 오후에 만나 진솔하게 풀어내야 했다.
오늘 박 여사가 결석이라니 윤주의 부담이 줄었다. 구술자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옛일에 대해 박 여사는 할 말 못할 말을 거르지 않고 뱉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 선생이 무지르며 주의를 주었다.
윤주는 심호흡을 했다. 앞가르마에 새로 나온 흰머리 탓에 염색한 커트머리는 꺼칠해 보였다. 두어 모금 맥주를 더 마시고 준비한 얘기를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거의 40년 전이군요. 저는 김영랑 시인의 생가와 다산초당으로 유명한 강진읍에서 자랐어요. 요즘은 광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가는데 당시에는 시외버스로 두 시간 반이 걸렸어요.”
방에서는 여성용 향수와 아로마 방향제 냄새가 뒤엉켜 나고 있었다. 구석마다 놓인 스탠드에서 연노랑 태양광이 동그란 천 사이로 번져났다. 고급스럽게 보이려고 애쓴 듯한 홍갈색 나무 벽에는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찍은 항공사진이 걸려 있었다.
“선생님들 중에서 영어 선생님의 인기가 유난했어요. 대학을 막 졸업하고 3월에 새로 부임한 청년이었거든요. 영어 선생님은 얼굴도 하얗고 옷도 말끔하게 입어서 인기가 높았어요. 그런데 삼 개월 만에 그만두고 광주에 있는 사립학교로 옮겨갔어요. 그해 오월에 일어난 항쟁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이 죽었기에 광주에 머물면서 집안을 추슬러야 했답니다.”
윤주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래도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털어놓아야 한다고 다잡았다.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은 술도 함께 마시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어두운 경험을 얘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지난날의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스스로를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응어리를 조금씩 푸는 듯 보였다. 이를 지켜본 다른 참가자도 속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인격이 쓰레기통에 떨어지는 비밀까지 꺼내지는 않았다. 조 선생도 그 점을 용인했다. 지난달 모임에서 박 여사는 복사해 온 것을 나눠주었다. 얼굴 보며 얘기하기에 너무 부끄럽다면서 집에 가서 읽어 보라고 말하고는 끝냈다. 어떤 참가자는 그런 부담감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 후임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 교사가 광주에서 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키도 작고 빼빼했습니다. 입는 옷도 지나치게 검소했고요. 아이들은 실망했어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그 나이 여학생들의 관심사란 게 외모가 대부분을 차지했죠.”
윤주도 프로젝트 중간에 그만둘까 망설였지만 지금껏 잘 버텨 오고 있었다. 이 연구의 끝까지 함께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했거니와 은행원으로서 돈만 다루고 살아온 자신에게 어떤 변화의 수업이 되길 바랐다. 함 사장이 윤주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이 모임을 왜 수업이라고 부르냐고. 서로가 뭔가를 배우면서 성숙해지는 시간이 된다면 좋겠다고 그녀는 답했다. 윤주는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했고, 졸업 후에는 맞벌이로 자식 둘을 키우며 부지점장까지 올라가느라고 숨 가쁘게 걸어왔다. 때문에 작년에 퇴직할 때까지 자신을 진지하게 뒤돌아 볼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선생님의 몸놀림은 날렵했어요. 교내 체육대회 때, 우리 반 부담임으로서 이어달리기 선수로 나갔는데 바통을 받아서 뛰는 동작이 야무졌어요. 앞선 주자를 따라잡으며 잽싸게 달리더라고요. 이번 과제를 받고 저는 맨 먼저 그분을 생각했습니다. 성함은 김현숙이에요. 지금껏 여러 차례 떠오를 때마다 가시에 찔리듯 가슴이 아팠지만 그분의 근황을 알아보진 못했어요. 제가 너무 무심하고 매정했어요.
김현숙 선생님은 영어 회화와 발음을 중시했는데 그 발음을 듣기에 귀가 피곤했어요. 목소리가 새되면서 탁했으니까요. 선생님은 에프 자를 정확히 소리내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듯이 하라고 시켰지요. 우리는 그게 서툴러서 힘들어했어요. 차라리 문법 공부나 단어 외우기를 바랐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말을 할 때는 애써 표준어를 쓰다 보니 속도도 느리고 억양도 밋밋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들 앞에서 사투리를 써도 괜찮았는데 그분은 못 그랬던 거지요. 사범대학에서 배운 ‘교단에서는 표준말을 써야 한다’는 규범을 곧이곧대로 따르느라고 그랬나 봐요. 스물 네댓 살짜리 여자가 낯선 시골에 와서 처음 교단에 섰는데 무엇을 얼마나 잘했겠어요? 나중에 보니까 동료 교사들과 얘기할 땐 사투리를 곧잘 썼고 템포나 높낮이에 거침이 없더라고요.
졸음이 밀려오던 오후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이 김현숙 선생님에게 부탁했어요. 얼마 전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요. 동네 오빠가 거기에서 재수 학원에 다녔는데 그 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광주에서 오셨으니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 것 아니냐며. 김현숙 선생님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저희는 잔뜩 기대하며 들었습니다. 특유의 표준어 투로 십 분 정도 나지막하게 얘기하고는 영어 수업으로 돌아갔어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우리는 투덜댔어요. 그날 저녁에 저는 광주항쟁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었지요. 더 자세히 알고 싶었거든요.
“누가 항쟁이라고 하더냐?” 아버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요.” “학교 선생 누구?” “김현숙 선생님이라고 영어 가르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저는 움츠러들었어요. “항쟁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광주사태라고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혼잣말을 했어요. 그러고는 저에게 어디 가서 광주사태에 대해 아는 척하지 말아라, 민중이니 항쟁이니 뭐 그런 단어는 절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제 어쩔 수 없이 저희 집 내력을 꺼내게 됐군요. 당시 강진군청에 다니던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전처와 헤어지고 엄마와 재혼했답니다. 좁은 읍내라 대부분 사람이 그걸 알았어요. 엄마는 재취라는 꼬리표를 지겨워했지요. 대도시로 이사하길 바랐지만 아버지가 낸 전근 신청서는 매번 되돌아왔대요. 광주로 가려는 사람이 많아서 순위에 밀린 거라고 들었어요.
다음날 국보위라는 완장을 찬 군인들이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두 명의 군인이 교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어요. 군화발로 교단 위로 올라가서 김현숙 선생님의 양팔을 각자 하나씩 잡고 데려갔지요. 선생님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영문을 모르는 눈길이었어요. 두 손은 블라우스의 허리께 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지요. 그들은 김현숙 선생님을 지프차에 태우고 떠났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는 학생들과 현관까지 따라 나온 교사들을 뒤로 한 채. 당시 계엄령 하에 국보위란 게 있었는데 나중에 군사정권의 앞잡이로 드러났지요. 시골 관공서나 학교에까지 아래 조직을 내뻗어 공무원과 교사를 끄집어들였어요. 아버지도 당신의 뜻과 무관하게 거기에 들어갔고 불순분자를 신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대요.
그날 저녁 교장 선생님이 유치장으로 면회를 갔답니다. 김현숙 선생은 공포에 질려서 턱과 손을 덜덜 떨었대요. 핏기가 사라진 얼굴엔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혀짤배기소리로 횡설수설하다가 울음을 터트렸답니다. 그러면서도 출입문 쪽 군인의 눈치를 살피더라고, 함께 간 수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작은 목소리로 알려줬어요. 면회가 끝나고 김현숙 선생님이 군인에게 이끌려 들어가다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구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 때문에 면회 간 사람들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대요. 다음날은 부모님이 내려와 광주사태 때 딸아이는 집에만 있었다고 국보위 지부장에게 애타게 호소했답니다. 그 뒤로 영어 시간은 매번 자습이었어요. 우리는 김현숙 선생님을 걱정했습니다. 무슨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간첩 사건에 엮이어 감옥에 가면 어쩌나. 어떤 매정한 애는 영어 담당이 또 바뀌게 생겼다고 투덜댔고요. 그때마다 저는 가슴이 뜨끔했어요. 설마 아버지가 국보위에 신고했을까?
아버지가 전근 신청을 냈는데 늦여름에 광주로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썼는지 거의 확실하다고 했어요. 저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재취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테니 기뻤지요. 엄마는 미리부터 이사 준비를 한다고 더펄더펄 뛰어다녔어요. 광주에 얻을 전셋집은 제가 전학 갈 학교 근처에 얻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어렸을 때 저는 후처 딸년이라는 놀림을 당해서 자주 울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사 가자고 졸랐습니다. 나중에는 나를 흉보는 애의 신발에 벌레를 넣어 두었어요. 지난날을 얘기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군요. 지금은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때는 그악스러웠지요. 어떤 애랑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여러 번 싸웠어요. 그 아이 신발에는 기어 다니지 못하게 다리를 잘랐어도 살아서 버둥대는 장수풍뎅이를 넣었습니다. 그 검은색 곤충의 머리는 장수의 투구같이 딱딱하면서 광택이 났어요. 거기엔 긴 뿔과 날카로운 가시 돌기가 세 개 달렸었지요.
김현숙 선생님은 잡혀간 지 닷새 후에 풀려났어요. 친척의 승용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본가로 갔대요. 그 친척은 전남 일대의 지붕개량사업에 쓰이는 슬레이트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한다더군요. 육이오 참전 용사고요. 담임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얘기를 해줬지요. 김현숙 선생님은 며칠간 몸을 추슬렀답니다. 부모님이 휴직을 간절히 권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대요. 다시 출근했을 때 보니 얼굴이 심하게 상해 있었어요. 워낙 몸집이 작은 데다 강단이 다 빠져버려서 누가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저쪽으로 나자빠질 듯싶었어요. 관사에서 이삼 일 더 쉬었다가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며칠 더 쉬라고 했지만 진도를 맞춰야 한다면서 나왔답니다.
김현숙 선생님은 잡혀갔던 일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했습니다. 국보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안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입을 꾹 다물었지요. 그 침묵에 대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어요. 무슨 말을 했다가는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때였으니까요. 다만, 거기서 잠 한숨도 못 자게 했냐는 옆자리 교사의 속삭이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얼굴만 수그렸대요. 한번은 교무실에서 이유 없이 울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이상한 뒷얘기가 돌아다녔어요. 혹시 성고문을 당해서 입을 닫은 것은 아니냐. 그 친척이 돈을 써서 덮어버린 것 같다. 아마 국보위에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마지막 소문을 들었을 때 저는 놀랐으며 속으로 엄청 찔렸어요. 누가 밀고했는지를 그 뒷배가 알아냈을 것 아닙니까?
마침 담임선생님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입원하는 바람에, 부담임인 김현숙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게 됐지요. 여름방학을 보름 정도 앞둔 때였어요. 김현숙 선생님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사람 같았어요.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기도 했고 사소한 기척에도 깜짝깜짝 놀랐어요.
방학을 이틀 앞둔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왔을 때는 밤늦은 시간이었어요. “국보위 놈들이 내 전근을 막은 것 같아.” 아버지의 술주정이 내 방까지 들려왔어요. 엄마는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나는 문가로 가서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신 국장한테 잘 보이려고, 영어 선생을 귀띔해 줬는데 말이야. 그게 역효과가 났어. 김 선생이란 여자가 며칠 만에 말짱하게 나온 걸 보니 국보위 안에 엄청 센 빽이 있는 게 분명해.” 아버지가 긴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어요. “그 엄청 센 빽이 나한테 앙심을 품은 거야. 군청 직원들한테 듣기로는, 해남에서는 어떤 교사가 잡혀갔는데 초주검이 되어 나왔대.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동료 선생들까지 다 조사 받았다는데 말이야.” 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어요. 너무 세게 누르며 닦았던지 광대뼈 위의 살갗이 쓰라렸습니다. 일전에 가졌던 가슴 찔림을 거둬들이고 새로운 감정에 후드득 몸을 떨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학급 당번이 아닌데도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어요. 운동장 가로 늘어선 포플러나무에선 매미들이 사이렌 소리처럼 울어댔습니다. 김현숙 선생님은 널빤지 한쪽이 내려앉은 교단에서 가르치는 교사처럼 언제 넘어질지 몰랐지요. 그래도 이를 악물고 수업을 마치더군요. 교실을 나설 때 보니 김현숙 선생님은 가시 돌기에 발바닥이 찔린 사람처럼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었고 이따금 휘청거렸어요. 그래도 출석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쥐고 있었죠.
여름방학 날 담임선생님이 다리 깁스를 풀고 교실에 나타나 종업식을 치렀어요. 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었지요. 짝꿍은 방학 동안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닐 거라며 우쭐댔어요.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새로운 영어 교사가 왔습니다. 우리는 남자 선생님이라고 덮어놓고 반겼어요. 부스스한 곱슬머리의 그분은 회화나 발음보다는 문법과 독해 위주로 가르쳤지요. 재밌는 얘기도 간간이 섞었기에 애들이 더욱 좋아했어요. 김현숙 선생님은 그렇게 잊혔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윤주는 맥주병을 들어 길게 마셨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두 눈 사이를 눌렀다. 잠시 그러고 있더니 말을 이었다.
“눈에 밟히는 분인데 그동안 찾아보지 않은 게 참 후회스러워요. 이번에야 수소문했으니까요. 저는 제 가족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두 번 소식을 들었을 법도 한데, 그해 유월과 칠월 두 달 동안만 가르친 분이라 동창들도 관심이 없었어요. 설마 그렇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윤주의 턱이 조금 떨렸다.
“당시의 담임선생님과 어렵사리 연결이 되었어요. 그분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저의 부탁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냈답니다.”
함 사장이 새 잔에 얼음을 넣고 양주를 따라줬다. 윤주가 한 모금 마셨다.
“학교를 떠난 뒤 김현숙 선생님은 한 학기를 쉬었대요. 그 후로 다른 곳에서도 근무했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정신과 병원에 들락거렸답니다. 치료를 받아서 몸이 나아지면 학교로 돌아갔대요. 집안 형편도 어려웠나 봐요.”
식도가 화끈거리고 명치가 찌륵찌륵 쑤셔 왔다.
“수년간 휴직과 입원과 복직을 되풀이했답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 날 숨을 놓았답니다. 유족은 정확한 사인을 가까운 친지에게도 숨겼다고 해요.”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윤주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윤주보다 대여섯 살 위인 손 시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인은 뭔가 억울한 게 떠올라 분개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윤주는 다시 양주를 마셨다.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감정이 오르내렸고 가슴이 에이기도 했다. 이게 속죄의 첫걸음이니 털어놓을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꺼낸 고백이었다.
“혹시 편지는 썼나요?”
조 선생이 물었다. 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쓰긴 했지만, 여러분에게 공개하고 싶진 않아요.”
조 선생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윤주를 바라보았다. 도톰한 아랫입술로 얄브스름한 윗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조 선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윤주는 잔이 놓인 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요. 편지를 내놓고 용서를 빌어야겠지요.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에게 용서를 구할까요?
“당시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지 않았나요? 이보다 더 심한 사건도 많았어요. 군사 정권 때라 폭력이 일상이었으니까.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함 사장이었다. 윤주는 위로가 되지 못했지만 위로해 주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이번에는 손 시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선배 시인도 군인들에게 끌려갔어요. 가짜 혐의를 쓴 소설가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말이죠. 광주 학살이 일어난 지 1년쯤 지난 때였습니다. 캄캄한 지하실에서 참혹한 구타를 당했답니다.”
손 시인은 선배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래된 슬픔과 새로운 분노가 뒤섞인 듯한 낮으면서도 거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물고문과 전기 고문이 선배의 인생을 망가뜨렸어요. 선배는 그 후유증으로 끔찍하게 괴로워했지요. 서울 올림픽의 성화가 꺼지던 날 마흔두 살 나이로 죽었어요.”
조 선생이 손으로 입을 가렸고 함 사장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 시인은 올라오는 울컥함을 가라앉히려는 듯 입술을 앙다물고 허공을 바라봤다. 벽에 붙은 항공사진으로 눈길을 돌린 채, 마치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이 떠오른 탓에 더 분통한 것 같은 분위기에 젖었다.
침묵을 깨며 조 선생이 오늘 모임은 여기서 마치자고 말했다. 그녀가 유리창에 쳐진 보라색 커튼을 열었다. 밖에는 빗줄기가 긋고 있었다. 얼굴이 발그레해졌어도 윤주는 벗어 두었던 트렌치코트를 입거나 복도로 걸어 나가는 데 흔들리지 않았다. 2주 후에 다시 만나자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려온 손 시인이 후배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말했다. 윤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 시인이 우산을 펴들고 느티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갔고 함 사장은 전동 휠체어를 움직여 횡단보도를 부드럽게 스르륵 건너갔다. 윤주는 시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윤주는 현관에서 인조대리석 바닥에 신발을 비벼댔다. 내가 너무 일찍 냉정해진 건 아닐까? 이게 김현숙 선생님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일까? 손으로 핸드백을 만지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제산제가 담긴 작은 비닐 튜브를 꺼내 짜먹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이렇게라도 죄 갚음의 첫발을 떼어야 한다.
승강기 근처로 다가갔다. 핸드백 안에서 A4 용지 여러 장을 꺼냈다. 선생님의 불행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조 선생을 도우면서 진실을 밝히는 게 김현숙 선생님에게 더 나을 것이다. 윤주는 종이를 넘기며 위아래로 보더니 그중 넉 장을 집어냈다. 반의반으로 접어 상담센터의 우편함에 넣었다. 너무 일찍 냉정해졌다고? 시기가 이르든 늦든 이제 와서 무슨 의미일까? 내 가슴 속의 비석은 오래도록 작은 조각만큼도 가벼워지지 않을 텐데.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윤주는 조 선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모임 자리를 정리하던 조 선생은 문자를 받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우편함에 꽂힌 종이를 뽑아 상담실로 돌아왔다. LED등을 환하게 밝히고 인사말도 끝맺음도 없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며칠 전, 아들이 운전하는 차로 강진에 갔어요. 햇빛이 쏟아지는 때엔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봐 학교에 들어서지 못하고 어둠이 내린 뒤에 발을 옮겼습니다. 동네 사람 몇몇이 운동장을 걷고 있었지요. 운동장 가 포플러는 몇 그루만 남았더군요. 저는 그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여름이 아닌데도 매미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괴로웠어요.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소주를 마셨지요.
운전 중에 아들은 비트코인을 팔아버린 게 후회된다고 투덜대더니만 교정에 들어선 후에는 여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히죽히죽 웃었어요. 당시 당신의 나이가 대학을 막 졸업한 현재의 제 아들과 비슷했으니 사실 어렸는데, 그때는 당신이 제법 어른같이 여겨졌어요.
읍내 식당에서 나온 빛이 교정을 희미하게 밝혔습니다. 예전의 목조 교사는 사라지고 콘크리트 건물이 방향을 바꾸어 들어서 있더군요. 당신이 국보위 지프차에 실려 갔던 현관은 그래서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세 번째의 소주병을 땄을 때 운동장을 걷던 여자가 제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40대 후반으로 보였어요.
“교내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처럼 말했어요. 저는 미안하다고 답하며 얼른 병마개를 닫았지요. 술병을 주섬주섬 쇼핑백에 넣어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면서 창피해졌어요.
“강진 사세요?”
그녀가 물었어요. 저는 아니라고, 타지에 사는데 잠깐 들렀다고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아들이 안 해도 될 말을 했지요.
“엄마는 여기 졸업생이에요.”
“아, 그래요? 실례지만 몇 회예요? 저도 졸업생인데.”
“아니에요. 나는, 나는, 잘 몰라요. 몰라요.”
저는 두 손과 머리를 동시에 흔들며 말했어요. 그러면서 얼른 일어섰지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어요. 미안하다고 다시 말한 저는 교문 쪽으로 황급히 발을 내딛었지요. 하지만 제 몸이 무거워서 생각만큼 빨리 걸어지지 않았어요. 혹시나 아는 사람 이름을 그녀가 댈까 봐 어서 멀어지고 싶었는데. 서너 걸음도 못 가서 허방을 밟았던지 꽈당 하고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순식간에 코와 입으로 흙먼지가 들어왔어요. 팔꿈치와 무릎이 깨지면서 몹시 아팠어요. 너무 아프고 놀라서 신음을 내지르며 뒹굴었지요. 어느새 눈물이 나왔어요.
잠시 후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데 욱하고 구토가 올라왔어요. 허리가 꺾이면서 먹었던 것이 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지요. 속이 뒤집어지면서 명치가 가시에 찔리는 듯이 쓰렸어요. 웩웩거리며 대여섯 차례 토했을 겁니다. 몸속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나니 토악질이 잦아들더군요.
지금 이런 생각이 드네요. 제가 이제야 벌을 받기 시작했다고. 앞으로 이보다 더한 벌을 두고두고 받아야 할 거라고.
여름방학 하루 전날, 영어 수업을 막 시작하려던 당신은 출석부에 끼워진 쪽지를 보셨지요. 그걸 읽고 깜짝 놀라더니 맥이 풀어지며 의자에 주저앉더군요. 급우들은 무슨 일인가 의아했어요. 당신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지요. 포플러나무의 이파리들이 약한 바람에도 회색 뒷면을 드러내며 팔랑거렸습니다. 속도 모르는 애들은 조잘대며 떠들었습니다. 점점 더 웅성거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숙연해졌지요. 자신의 자리에서 허리를 뒤로 돌려 잡담하던 애도 자리를 고쳐 앉았습니다. 모두 당신을 바라봤지요. 당신은 울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입을 앙다문 것 같았지요.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습니다. 눈물은 야윈 뺨 위로 흘러내려 턱에서 물방울로 맺혔습니다. 이내 미색 블라우스의 칼라에 뚝뚝 떨어져 번졌습니다. 번지는 눈물 자국은 천천히 피어나는 노란 접시꽃 같았습니다.
당신은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셨어요. 앞에 앉은 학생의 손수건을 빌려서 닦았고 휴지를 꺼내 코를 푸셨지요.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얼마 동안 창밖을 바라봤어요.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당신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어요. 그러곤 그날 수업할 영어를 칠판에 쓰기 시작했지요. 말없이 단어를 채워 나갔어요. 칠판에 알파벳이 가득 찼을 때 맨 오른쪽 아래에 한글을 적었습니다.
쪽지를 누가 썼나요?
짝꿍은 영어 단어 옆에 그 문장도 적었더군요.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당신이 말했습니다. 느리고 밋밋한 표준어 투로.
“필체를 대조할 테니 국어나 사회 공책을 내세요.”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어서 저는 당황했고 속으로 몹시 찔렸어요. 공책을 모두 거둔 당신은 다시 수업을 이어 갔습니다. 눈가가 벌겋게 짓뭉개진 채로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몇 시간 후 종례 시간에 당신이 공책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더욱 핼쑥했습니다. 당신은 누가 범인인지를 아셨겠지요. 필체 비교를 마쳤다며 한 명씩 이름을 불러 공책을 나눠줬습니다. 학생이 앞에 나오면 얼굴을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찬찬히 들여다봤어요.
제가 앞에 섰을 때 공책을 건네는 당신의 손이 떨렸습니다. 그 떨림이 공책을 잡은 제 손까지 전해져 왔어요. 반대로 저의 들썩이던 심장 박동이 당신에게 다다랐을 것입니다. 제가 공책을 받고 돌아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당신은 뒷사람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확실한 신호를 보내셨지요.
맞아요. 쪽지를 쓴 사람은 저였어요. 입에도 못 담을 온갖 욕설과 함께 빨갱이 년이 학교에 다시 나타나면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발모가지를 분질러 놓겠다고. 제 몸뚱어리 어디에 그런 악의와 고름이 들어 있었을까요? 저는 잔인한 년이었습니다. 누군가 지저분한 욕을 퍼부으며 저의 머리끄덩이를 함부로 잡아당겨도 저는 묵묵히 당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저의 죗값을 치러야 할까요?
김현숙 선생님.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정년퇴임을 하셨겠네요. 그동안 이 학교 저 학교에서 소리 내는 입 모양을 보여주면서 프, 브, 즈- 발음하셨겠지요. 학생들이 따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친구들과 함께 당신을 모시고 식사라도 했을 텐데요. 갱년기도 지난 저희는 포도주를 마시며 점잖게 대화하다가 드물게 촌티를 드러내고 깔깔거립니다. 흰머리를 진갈색으로 염색하고 얼굴에 나잇살이 찐 당신. 우리 학교를 떠난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주시겠지요. 어떤 친구는 당신이 자신의 언니인 양 살갑게 굴며 어깨를 쳐댈 수도 있으니 양해하셔요.
모임이 끝날 즈음,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받고 당신은 볼을 붉히며 미소 짓겠지요. 주름진 손등에 매듭이 도드라져 보이는 손가락과 살색 매니큐어 손톱. 두 손을 이용하여 포장지 위에 십자로 묶인 끈을 조심스럽게 끄르시겠지요. 높은 목소리로, 어머나, 정말 예쁘다, 고르는 안목이 참 좋구나. 탱큐!
그때 저는 국보위의 그 뒷배가 우리의 이사를 막았다고 믿었습니다. 아비의 술주정만 듣고 그렇게 확신한 제가 어리석었죠. 2년 후에 진실이 밝혀졌어요. 군청에서는 아버지가 일이 년 전부터 공금횡령에 얽혀 있다고 의심했기에 전근을 안 보냈답니다. 자기 잘못을 다른 식으로 만회해 보려고 아버지는 당신을 국보위에 일러바쳤던 거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의도대로 안 되었고 엄마에게는 거짓말로 국보위와 당신 탓을 했답니다. 그때서야 저는 당신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했어요.
하지만 당신을 찾아뵙지도, 속죄하지도 못했지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몸서리쳤지만 금세 입시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아버지는 징계를 받아 외딴 곳의 면사무소로 쫓겨났고 가로챈 돈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합격해도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는 형편이 되었지요. 부모님은 자식 하나라고 여기저기 변통하여 간신히 첫 번째 등록금만 대줬습니다.
이런 핑계를 대는 제가 너무 뻔뻔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네요. 당시에 사죄의 편지 한 장도 보내지 않은 제자신이 참으로 혐오스럽습니다. 김현숙 선생님,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결과적으로 저는 그들과 한패였습니다.
마지막 종례를 마치면서 당신이 말했어요.
“그 일이 있은 후로 몸이 아주 나빠졌어요. 수업 시간에 눈앞이 캄캄해진 적이 여러 번이었지요. 이유 없이 가슴이 조마조마했고요. 그렇지만 영어 선생이 한 학기에 두 번이나 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 수업을 했습니다.”
말하기도 숨이 찼던지 혹은 감정이 차올랐던지 잠시 눈을 감으셨지요. 그러고는 신음하듯 입을 떼셨어요.
“여러분의 앞날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길 빕니다.”
몸이 더 나빠질 당신의 앞날을 스스로 예감하셨던 걸까요? 얼굴에 병색이 드리운 당신에게도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길 우리는 빌지 못했어요. 당신과 열 살 차이도 안 났는데 당시 저는 왜 그리 어렸던지.
쪽지 쓴 학생이 교무실로 찾아오면 용서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당신은 교실을 나섰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조 선생은 유리 다관에 국화차를 우렸다. 프로젝트 초입에 손 시인이 반투명 유리병에 담아왔던 찻잎. 들에서 꺾은 구절초나 산국을 뜨거운 물에 데친 후 그늘에 말렸다고 했다. 불에 달궈지는 다관 속에서 꽃송이들이 오르내리자 들판의 향기가 상담실에 퍼졌다. 조 선생은 꽃 이파리를 살살 불어 가며 국화차를 두세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윤주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김현숙 선생님께 쓴 편지의 일부를 우편함에 넣었습니다. 너무 괴롭고 수치스러워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지 못했어요. 제가 이제야 김현숙 선생님께 편지를 드린다고 한들 저의 죄가 어떻게 가벼워질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조 선생님의 박사 논문에 쓸 만한 사례가 될 거라 여겨서 드립니다. <끝>



* 손 시인의 선배에 대한 대사는 한수산 소설가의 필화 사건과 박정만 시인에 관한 위키백과 웹사이트를 참조하였음.








박정수
작가소개 / 박정수

202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이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2022년 8월호》



추천 콘텐츠

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