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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랍 (奥拉)

  • 작성일 2022-11-01
  • 조회수 1,823

[단편소설]



오랍 (奥)1)



이화경





야, 자냐. 왜 말이 없어. 너 있는 거 다 알고 있거든. 인정이 누나가 자꾸 말을 건다. 그는 뒤척이면 한 뼘쯤 공간이 남는 좁장한 방에 누워 있다. 그만 자고, 얼른 일어나. 누나의 목소리가 벽에 뚫린 구멍에서 새나온다. 인정이 누나는 턱에 가늘고 긴 보조개가 있어서 자신의 인생이 쪼개졌다고 믿는 운명론자였다. 아주 나쁜 불행, 덜 나쁜 불행, 그저 그런 불행으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들을 자잘하게 쪼개면서 가루로 만드는 데 위안을 얻는 누나답게 벽을 쪼개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404호, 인정이 누나는 405호. 셋방살이 신세인 그와 누나는 쪼개면 주인이 게거품을 물고 돈 물어내라고 할 게 무서워 대신 벽에 구멍을 뚫어버리기로 했다. 그가 먼저 가위 끝으로 벽을 가격했다. 홈이 조금씩 팬 곳을 숟가락으로 긁어냈다. 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면 누나는 제 방 벽을, 그는 자신의 방 벽 팬 지점을 미친 듯이 뚫는 데 몰두했다. 가위 두 개와 숟가락 여섯 개로 일주일 만에 벽을 뚫었다. 야, 자냐. 인정이 누나가 또 묻는다. 아무래도 담배가 떨어졌지 싶다. 그에게 마치 맡겨 놓은 것처럼 담배를 달라고 했다. 그는 담배를 피진 않지만 누나를 위해 사놓곤 했다. 누나는 아마 405호 콧구멍만 한 방바닥에 개처럼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겠지. 누나가 자꾸 구멍으로 도넛 모양의 담배 구름을 마술사처럼 흘려보냈다. 숨이 막혔다. 하루에 벌어진 아주 나쁜 불행, 덜 나쁜 불행, 그저 그런 불행에 대해 누나는 얘기를 했다. 불행은 습관처럼 중독성이 심한 습성을 갖고 있는 모양인지 인정이 누나에게 잘도 달라붙었다. 구멍으로 불행한 이야기들이 각다귀처럼 윙윙거렸다. 야, 자냐, 씨발년아, 왜 암말도 안 해. 누나가 묻는다. 왜 이 바닥 애들은 놈더러 년이라고 조롱하면서 말을 트는가.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대답할 수가 없다.


1) 「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우라(αύρα/aura)」의 한자 표기.



환자분, 정신이 드나요? 환자분 원래 이름이 무언지 모르지만, 여기 중환자실에선 하서남으로 되어 있어요. 어쨌든 하서남 님, 힘내시고 정신을 차리세요. 간호사는 환자의 심박동수, 혈압. 체[온, 혈중 산소 수치를 모니터링 한 다음에 환자의 귀에 대고 말을 붙였다. 뇌의 추가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산소는 일정하게 킵하고, 정맥 내로 삽입한 주사선에 포도당과 여러 약을 투여했다. 몸의 컨디션을 살피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위팅 사인을 면밀하게 체크해야 했다. 이름도 나이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피, 땀, 가래, 대변, 오줌은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이 오물들을 배설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배설물들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최후의 선이자 생존의 한계이다.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는 코를 통해 위로 삽입된 관으로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고, 동시에 소변이 정체되지 않도록 방광에 카테터를 삽입해서 배출시켜야만 한다. 간호사는 요로감염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한 다음에 한 자세로만 누워 있는 환자의 위치를 세심하게 바꿔 줬다. 특정 부위에만 혈액이 쏠리면 피부가 손상되는 압박궤양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환자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다리 정맥에 혈전이 생기면 폐로 이동해서 폐의 동맥이 막히는 폐색전증이 생기기 쉬우므로 발뒤꿈치에 보호용 패드를 괴어 주었다. 하서남은 한눈에 딱 봐도 몸피가 가냘팠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인 상태로 응급실에 이송되었다. 아무리 뒤져도 그 흔한 휴대폰도 지갑도 없었다고 했다. 그가 최초로 발견된 장소가 하서로였기 때문에 일단 환자 이름을 하서남이라고 명명했다. 추정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작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온 뒤에도 그에 대한 인적사항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교통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는 뺑소니를 친 상태라 경찰서에서 조회를 하는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심야에 교통사고가 난 데다가 교통사고 발생장소, 경찰서, 검찰청, 법원이 서로 상당한 거리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법적으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경우에 대비해서 환자의 성별, 혈액형, 연령별 분포와 같은 범주들을 다각도로 살펴봐야 했을 터였다. 여러 과의 의료진들이 들러붙어서 상태를 살펴봤을 때, 하서남의 뼈는 다 어긋나고 의식은 없었다고 했다. 만약에 하서남 환자를 도맡게 되면 의료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 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없는 상태라 의료비를 청구할 수가 없기에 뒷감당이 쉽지 않아서 다들 손사래를 쳤을 것이 뻔했다. 곧바로 하서남은 호프리스(Hopeless) 환자로 치부되었다. 보호자가 없는 경우 이삼 일간 찾으려고 노력한 후에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에는 퇴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하서남은 전원 할 이유를 납득시킬 보호자도 지인도 찾을 수 없고, 의식불명 상태인지라 퇴원도 타 의료기관으로 전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집을 나왔다. 부모가 막노동을 나가는 친구네 빈집에 새벽 몰래 스며들었다가 친구 부모가 귀가할 쯤에 빠져나온 세월을 두세 달 보냈다. 들키면 놀이터 벤치에서 동네 털갈이하는 비둘기 새끼들 같은 볼품없는 애들하고 새벽까지 삘까다가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찜질방으로 피씨방으로 열다섯 살의 소년은 늪 위의 소금쟁이처럼 뛰어다녔다. 기고만장한 폭력을 매일 성실하게 휘두를 때마다 아버지란 사람은 불쌍하리만치 말을 더듬곤 했다. 내, 내, 내가 말, 말이지. 다, 다, 다섯 살 때부터, 마, 말을, 더, 더듬었는데 말이지. 아, 아비란 새, 새끼가, 자, 자식 새, 새끼 마, 말을, 고치러, 벼, 병원을 데, 데리고 가야 하, 하는데, 쥐, 쥐새끼를, 자, 잡아다, 꺼, 껍질을 호, 호, 호올랑, 벗겨서, 구, 구워 먹이더란 마, 말이지. 내, 내가 고, 고양이 새끼냐. 쥐, 쥐를 먹이게. 야, 야, 야옹.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껴서 말을 안 할 땐 아버지는 꾀나 배운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 불치의 흔적이 된 말더듬이에 대한 불행의 뿌리를 토로할 때마다 탄원을 하는 건지 스스로를 조롱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을 때면 알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광기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폭행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것. 아버지의 아버지가 자식새끼의 병증을 제대로 고쳐 주지 못한 무식함과 무력함을 대를 이어 물려주지 않으리라는 부성의 훈육 지침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투명하고 선뜩했다. 소년은 야옹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쥐새끼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으면 이명이 고막을 찢어서 겨우겨우 균형을 잡는다는 걸 소년은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구석으로 도망가면 아버지는 소년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아버지의 손아귀에는 한 움큼의 소년의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소년은 울지 않으려 애썼다. 소년의 울음이 아버지의 광증을 점점 부풀리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콩깍지 속의 콩알처럼 꼭꼭 숨어 있으려 애써도 공포와 슬픔이 발발 떨며 기어이 기어 나왔다. 왜 그 순간에도 슬픔은 차오르는가. 차라리 공포만 순수하게 느끼면 좋을 텐데. 공포에 파랗게 질린 모습을 보여주면 아버지가 흡족해 할 텐데. 공포로 차라리 숨 막혀 깜빡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슬픔은 소년을 쪽팔리게 했다. 슬픔은 아버지란 자가 왜 자식새끼를 죽일 듯 패는가라는 질문을 달고 왔다. 맞고도 그 자리에서 콱 죽지 않는 게 슬퍼서 죽을 만큼 슬펐다. 때리는 몸뚱이도, 맞는 몸뚱이도 맷집이 쎄다는 게 슬펐다. 맞고 사는 게 슬퍼서 가출했다. 세상은 가출한 소년에게 퍽도 다정하게 훈계질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다. 가출한 소녀는 순식간에 발라당 까져서 문란해지고, 소년은 세상의 질서를 생까는 양아치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가출한 소년소녀들이 얼마나 가족에 매달리는지 모르고들 하는 소리였다. 오죽하면 가출팸(가출패밀리)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지겠냐고. 얘들은 시한폭탄 같은 핏줄들이 있는 씨족공동체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품어 주는 다정한 공동체 가족을 꿈꾸었다. 그런 가족은 영화 세트장에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엇보다 돈 문제가 걸리면, 서로의 등짝을 보일 새도 없이 흩어지곤 했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정인정 간호사예요. 하서남 님, 오늘도 제가 왔어요, 오늘은 정신이 좀 드시나요? 간호사는 환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출근하면 언제나 자신이 맡은 환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그녀의 루틴이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들의 이름이 똑같은 경우가 많다는 게 처음에는 그녀도 의아스러웠다.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보호자를 찾지 못할 경우엔 환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발견된 최초 장소명을 임의적으로 이름 붙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태양로에서 발견된 남자면 태양남, 달빛로에서 이송된 여자면 달빛녀로 불렸다. 병원에선 사고가 난 해당 경찰지구대로 신원 파악을 요청하는데 지문 조회가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일단 시급히 이름부터 만들어야 했다. 나이를 어림짐작이라도 해야 약물 투여할 용량을 정할 수 있고, 일련의 검사들을 위해서라도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해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보호자나 지인을 찾게 되었지만, 끝까지 중환자실에서까지 도로명 이름을 쓰는 하서남 환자는 예외였다. 400여 년 전 지구로 온 외계인이 나온 드라마의 주인공도 주민등록증이 있는 판에, 하서남은 가족관계증명을 확인할 길이 없는 미등록자란 말이냐. 도대체 하서남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가출하고 스물일곱 살이 된 지금까지 그는 부모를 딱 두 번 만났다. 가출하고 난 뒤로 단 한 번도 찾질 않았던 부모가 웬일?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하루 세 번 끼니때마다 소주를 마셔대던 아버지의 간이 더 이상 말을 들어먹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다. 가출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건네는 인사치곤 너무나 젠틀했다. 악수를 건네는 아버지의 손바닥이 붉었고 손가락은 굽어 있었다. 눈 밑과 뺨엔 빨간 몸통에 푸르스름하고 가느다란 다리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거미가 박혀 있었다. 안 본 사이에 스파이더맨이 되셨나. 소년은 거미줄에 걸릴까 봐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니 아버지가 간병변증 초기란다. 어머니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런데요? 그래서요? 두 질문 사이에서 소년은 머뭇거렸다. 거미가 박힌 아버지의 뺨이 둥그스레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은 아버지의 병이 가져다준 증상 탓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의심 많고 교활하고 각진 얼굴이 간땡이가 부어서 둥근 얼굴로 변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살리려면 네가 필요해.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왜요? 지금 니 아버지는 어떤 약으로도 살릴 수가 없대. 간을 이식해야만 한다는구나. 하세요. 소년이 말했다. 고, 고, 고맙다. 아버지가 말했다. 뭐가 고마워요? 간 이식해야 산다면서요? 그러니까 하시라고요. 소년이 말했다. 어머니 간도 있고, 작은 아버지 간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간 이식하시라고요. 소년이 말했다. 작은아버지는 간염에 걸린 적이 있어서 안 되고, 엄마 간은 여자라 작아서 안 된다고 헌다.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 제 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세요? 소년이 말했다. 너는 자식이잖니. 자식이라면 당연히 아빠를 살려야 하지 않겠냐.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가 용왕이에요? 소년이 물었다. 용왕이라니.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어머니가 물었다. 간이 필요하다면서요. 토끼 간을 이식하면 되겠네요. 소년이 대답했다.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어머니가 화를 냈다. 아버지라는 자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무지하게 살고 싶나 보네.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말대답하고 있는 소년을 향해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라도 들어서 한 대 후려칠 위인인데. 하, 하, 한 번만 도, 도, 도와주라.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이번 한 번만 도와줘. 아버지가 언제 너에게 뭘 부탁한 적이 있었냐. 아버지를 살려 주는 셈치고 병원에 가자. 어머니가 말했다. 살려 주는 셈치고? 아버지한테 살려 달라고 수백 번 부탁을 했던 소년을 어머니는 잊었나.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나. 도리도리 고도리를 치러 내뺐지, 아마. 소년은 자신에겐 진짜 부모란 건 없다고 여겼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들은 왜 소년에게 부모라고 우기면서 간을 달라고 하는가. 혹시, 간을 주면, 간만 떼어 주면, 이들은 영원히 소년에게서 손을 뗄 건가.


하서남 앞 병상 세 개엔 새로운 환자들이 들어찼다. 젊고 튼튼한 신장을 수여받고자 입원한 환자 한 명, 활력 넘치는 심장을 원하는 환자 한 명, 새 세상을 보여줄 각막이식을 기다리는 환자 한 명. 그들은 아픈 몸 때문에 오래 고통 받았을 상처 많은 사연들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건강하게 살게 될 미래의 세월이 적힐 아름다운 달력을 구하기 위해 하서남 앞에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하서남도 의사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일 뿐 살아남기 위해 시시각각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마른 몸이었지만, 몸 안의 장기들은 청춘에 속해 있었다. 그의 삶은 불투명하지만 죽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성을 띠게 될 것이다. 낱낱의 장기로 그는 해체될 테지만, 장기를 수여받은 사람은 활력을 채울 것이다. 낱개의 죽음이 여러 삶으로 부활할 것이다. 은혜로운 죽음이었노라 칭송도 받게 될 것이다. 사내는 어쩌면 죽음으로 거듭날 것이다. 장기 수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사내의 생명은 양가적이다. 신선해야 하기에 생명의 생기가 보전되어야 하고, 죽어야 하기에 하루라도 숨이 빨리 소진되어야 한다. 하서남이 가족관계미등록자인 신분임이 이미 병원 관계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분명했다. 법은 뇌사나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려고 장기기증희망서약을 한 사람이 실제로 뇌사 상태에 빠지거나 사후가 되었을 경우에는 다시 가족의 동의를 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기 기증을 할 수 있노라 정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기증을 할 수가 없다. 하서남의 가족은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하서남은 호흡과 순환기 기능을 인위적으로나마 유지하고 있고, 신진대사 과정도 집중의료기와 의료진들의 처치를 통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혹시 만의 하나라도 그가 깨어난다면 장기 기증을 하겠다고 선뜻 동의할까? 간호사는 매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서남 님, 오늘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할게요. 하서남 님이 끝내 깨어나지 않으면…… 흠, 이대로 죽어버리면…… 의과대 학생들의 해부학 수업에 사용할 시체, 일명 카데바라고 하는데요. 수업용 시체로 기증되거나 하서남 님의 장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기증할 수도 있어요. 가족분들도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으시고, 하서남 님의 신원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병원 측에선 고민이 많습니다. 그녀는 앞 병상의 환자들이 들리지 않도록 하서남 환자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하서남이 깨어날지 죽을지 그녀는 모른다. 모른다는 이유로 그냥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람의 신체기관 가운데 귀만이 임종 시에도 열려 있다는 걸, 의식이 전혀 없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걸, 임상적으로 경험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겨울에 말을 타고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얼음이 녹고 풀린 강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를 그녀는 마음에 남몰래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소년은 병원에 갔다. 간 떼어 주러. 소년은 알게 되었다. 아들 있어요? 병원에선 아버지 같은 환자에게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떼어 줄 커다란 크기의 간이 있는 아들 유무라는 걸. 아들이 없는 사람은? 간 크기가 아들보다 작은 딸들은 두 명이 나눈 간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이식한다고 했다. 2:1 간이식. 세상엔 자식의 간이 필요한 부모가 넘쳤다. 효녀 심청이들이 따로 없지 않냐? 어머니의 말이 소년을 압박했다. 담당 의사 앞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년을 끌고 갔다. 의사는 소년에게 물었다. 몇 살입니까? 열다섯 살이요. 소년이 대답했다. 의사가 소년 너머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아드님은 이제 열다섯 살입니다.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제 십일조 사항에 따르면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십육 세 이상인 미성년자의 장기는 배우자, 직계, 직계존비속, 형제자매 또는 사촌 이내의 친족에게 이식하는 경우가 아니면 적출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의사의 말을 소년은 바로 알아들었다. 십육 세 이상의 미성년자! 소년은 아버지에게 간을 주고 싶어도 법으로 막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아버지가 미치게 간을 받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걸. 얘가 지금은 열다섯 살이지만 세 달만 있으면 열여섯 살이 됩니다. 어머니가 의사의 말을 받아쳤다. 남편분이 절박한 건 알겠는데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간 이식이 불가능합니다. 정 간 이식을 받고 싶으시면 형제자매들을 모시고 오세요. 필요한 검사에 대해서는 저희 병원 이식 코디네이터 간호사가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겁니다. 저, 저, 저기요. 서, 선생님. 세, 세, 세 달 뒤에 다시 오면 가, 가능, 하, 할까요? 아버지가 의사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일단 진정하시고요. 술 끊으시고, 건강 잘 챙기시다가 다시 오세요. 간호사, 다음 환자 들어오라고 하세요.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아, 참, 아드님이 너무 체구가 작아요. 일단 잘 먹이셔야겠어요. 누구의 등짝에다 대고 말씀하는지 알 수 없는 건 아버지와 어머니였을까. 니는 밖으로 빌빌 싸돌아다니기만 하고 뭐를 처먹지를 않았냐. 삐쩍 곯아 가지고서야 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어머니가 소년에게 지청구를 날렸다. 세 달 뒤에 찾으러 올 테니깐 밥 잘 챙겨먹고 있어. 어머니가 소년에게 이십만 원을 줬다. 세 달 동안 먹을 밥값치고는 좀 심했다. 도리도리 고도리 하우스판에서 기백만 원은 우습게 판돈을 거는 양반이라곤 믿을 수 없는 푼돈이었다. 아들아, 어디로 째지 말고 전화 꼭 받아라. 어머니가 콧소리로 다정하게 아들이라고 부를 때면 등골이 오싹했다. 그건 이득을 아들로 세팅할 때 써먹는 어머니의 은밀한 욕망의 표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어머니는 떠났다. 저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다정했던가. 평소 어머니라면 돈 벌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거둘 인간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돈이 아니었던가.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모든 눈송이들이 돈이기를, 벼락을 맞을 바엔 돈벼락을 맞길 소원하던 인간이 어머니였다. 보리밭의 쌍둥이 뱀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으며 삶을 뜯어먹던 인간들이 굳어 가는 간을 소중하게 받들며 오순도순 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소년은 진저리를 쳤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을, 아버지는 어머니의 도박중독을 서로 증오하면서도 중독이라는 공통의 질병으로 연대하면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소년은 집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쫓겨난 것처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누나, 나 죽을 것 같아. 남동생이 휴대폰 너머로 정인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바스라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죽을 것 같은 거와 죽는 건 엄연히 달라.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그녀는 엄살 부리는 환자를 대하듯 남동생에게 말했다. 마음이 쑥쑥 쑤시고 아팠지만 애써 모질게 굴었다. 누나, 나, 그 사람 없으면 안 돼. 활활 타오르는 촛불에 무모하게 손바닥을 대듯 뜨거운 말을 뱉는 동생 목소리에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사람은 쉽게 미치지 않아. 스스로에게 속엣말을 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사람이야.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만 하니? 제발 너도 정신 좀 차려. 펄럭거리는 촛불을 훅 불어 끄듯 동생의 말을 차갑게 덮었다. 남동생이 말하는 ‘그 사람’과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람’은 동일 인물이었지만, 뉘앙스와 온도가 완전히 달랐다. 집안에서 완강하게 반대하는 그 사람을 남동생은 죽을 것처럼 사랑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사람’을 향한 동생의 사랑은 가망 없는 꿈에 대한 집착이자 편집증적인 고집이며 기이한 현실도피라고…… 그러니 동생은 병에 걸린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병에 걸렸으니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믿었다. 죽을 것 같다는 말, 그 사람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동생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다. 동생은 그예 꿈같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죽음의 확실성으로 굳혀버렸다. 장난기와 웃음기로 생글거리던 동생의 눈동자, 오른쪽 뺨 근육만 살짝 올라가는 찰나의 미소를 짓던 깨끗한 입술, 봄날의 빗소리를 가장 좋아하던 소박한 심장을 가진 동생이 ‘그 사람’으로 인해 죽었다는 분노는 염치없는 감정이라는 걸 동생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에야 정확히 알았다. 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정확한 사랑은 가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동생을 죽였다는, 마지막 말이 비수가 되어 동생의 급소를 찔렀다는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그녀는 오래도록 허우적거렸다. 뭘 안다고 감히, 감히, 함부로 지껄였던가. 곁에 있을 때, 숨 쉬고 있을 때,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그깟 사랑 하고 싶은 만큼 다 하라고, 말하지 못했던가. 핏줄이라면서 죽어버리겠다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수 있었나. 강물도 겨울의 말발굽 소리를 기억하고 봄이면 와그닥와그닥 풀어 주는데…….


세 달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빚을 받으러 오는 채권자처럼 소년을 찾아왔다. 소년은 혈액형과 조직적합성항원 검사를 받았다. 아버지와 일치하지 않으면 면역거부 반응이 일어나 수술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엿같게도 일치했다. 어머니는 하우스판에서 거액을 딴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아내 역할을 잘도 해댔다. 둘이 서로 못 죽여서 못 사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나. 정말 족 같은 가족이다. 이식코디네이터 간호사가 소년에게 따로 면담을 요청했다. 아버님에게 간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간호사가 물었다. 누가 그래요? 소년이 물었다.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거 아니에요? 소년은 면담 절차에 짜증이 났다. 혹시 부모님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기증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가요? 간호사가 물었다. 이제 와서 제가 기증 안 하고 싶다고 말하면 말짱 다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소년이 물었다. 생체 기증자가 거절 의사를 밝히면 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그니깐요. 이미 간 떼려고 저를 끌고 왔는데요. 내가 안 한다고 말하면 오, 그래? 하기 싫구나. 그럼 안 해야지. 이렇게 되냐고요? 소년이 물었다. 어떤 물음은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거나 하나의 답만을 제시할 뿐이다. 너는 왜 태어났니? 너는 왜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니? 이런 질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폭력적인 부모 따위와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하게 야만적인지를 거꾸로 보여줄 뿐. 빨랑 끝내줘요. 소년이 말했다. 그럼 생체 기증을 허락하는 걸로 알면 되겠니? 간호사가 물었다. 준다고요! 간 떼 준다고요! 왜 자꾸 귀찮게 물어요? 이젠 그만 대답할래요. 소년은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다시 앉았다. 아줌마, 그나저나 수술비는 얼마나 나온대요? 소년이 물었다. 수술비? 수술비가 걱정되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깐 막 짜증내더니. 효자네. 간호사가 대답했다. 그니깐, 얼마 드냐고요? 소년이 물었다. 건강보험하고 의료비 지원을 받으면 비용이 확 줄어들어. 생체기증자 검사 두 차례 비용, 간 이식 받을 환자분 검사 비용, 수술비용까지 합하면 사천만 원 정도 드는데. 저소득층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려고 정부에서 재난적 의료비 지원 사업 혜택을 주거든. 그러면 반으로 줄어. 너네는 기준 중위소득 사십 퍼센트에 미달하는 가구이기 때문에 수여자인 아버님은 의료급여 수급자 대상이라서 천만 원도 안 들이고 간 이식을 받을 수 있단다. 혹시 부모님께 사보험 들었는지 여쭤 봐. 장기이식특약에 들었으면 일부 실비보험 보상금으로 최대 이천만 원 정도 돌려받을 수 있거든. 소년이 돈 걱정하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간호사가 장황하고도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그런데, 아줌마. 처음에는 나한테 존댓말 쓰더니 왜 나중에는 반말하세요. 소년은 의자를 등짝으로 발칵 밀면서 일어나 말했다. 어? 뭐라고? 놀란 간호사의 말을 뒤로 하고 소년은 상담실 문을 드르륵 거칠게 밀었다. 보리밭의 쌍둥이 뱀처럼 서로 다정하게 엉켜 있던 두 인간이 한번에, 완벽하게, 이해됐다. 어쩐지, 돈 때문이었네. 씨발.
림프구의 신선도가 중요하다며 새벽부터 검사실에서 소년의 피를 채혈했다. 자기 것이 아닌 무언가 몸 안으로 들어오면 아주 생난리를 치기 때문에 조직의 적합도가 아주 중요하다고 검사실 간호사가 소년에게 설명했다. 아버지와 자신은 아주 정말 상극인 관계라고 말해 주고 싶은 걸 소년은 참았다. 면역반응의 항원 인식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전자와 단백질이라고 간호사가 덧붙였다.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 검사 결과, 소년은 장기조직검사에서 아버지와 조직이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AB혈액형, 백혈구, 혈소판, 혈액세포, 몸의 조직 세포 등 소년과 아버지는 깨끗하게 맞아떨어졌다. 몸뚱어리는 둘이 부자 사이임을 구체적이고 명증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마음은 격렬하게 아버지를 혐오하는데, 몸의 세포들은 이토록 우호적이고 친절할 수가 있다니. 아버지를 죽이려면 소년 자신부터 죽여야 했다. 소년은 강렬한 자해와 자살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살려 놓고 영원히 도망치자. 다시는 만나지 말자. 몸을 받은 이 저주의 빚을 어떻게든 갚고 내빼자. 맹장수술하고 비슷하대. 어머니가 베드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가는 소년에게 말했다. 장기밀매업자 같은 어머니가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었다. 맹장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알기나 하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배를 가르고 간을 떼 내고 꿰매는 대수술을 장에 가서 닭 내장 긁어내는 것처럼 쉽게 말했다. 아들, 너는 젊어서 두 달이면 너끈하게 정상으로 돌아온대. 수술실 문이 닫히기 전에 어머니는 또 뻐꾸기를 날렸다. 난 젊은 게 아니라 어리거든요. 개소리 좀 집어치우세요. 말대꾸도 하고 싶지 않아서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서남 님, 안녕하세요? 저는 정인정 간호삽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하서남 님은 젊으니까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지금 하서남 님 앞에는 심장, 신장, 눈을 당장이라도 가져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세 분이나 있어요. 모두들 하서남 님에겐 희망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희망이 있다고 희망하고 있어요. 더 좋아질 거고, 차차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그 모든 힘은 하서남 님 안에 있어요.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그녀는 하서남 환자에게 귀엣말로 힘을 북돋았다. 앞에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는 걸 등짝에서 따갑게 느꼈다. 하서남 님, 아무리 죽을 것 같은 환자도 누군가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좋아지는 걸 많이 봐왔어요. 제가 경험했거든요. 하서남 님도 나을 거라고 믿고,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애걸복걸하듯이 살아달라고, 깨어나라고 요청하는 그녀의 말을 듣는지 못 듣는지 도대체 하서남 환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간호사 선생, 말 좀 합시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저 사람 장기 기증 받게 해주겠다고 병원에서 우리를 중환자실에 데려다 놨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리다 저 사람보다 먼저 죽게 생겼어요. 하루라도 빨리 장기 받으려고 피 같은 돈 들여서 입원해 있는데, 날이면 날마다 저 사람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닥거리는 거냔 말입니다. 이러다 우리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예? 저 사람은 죽으려고 환장해서 길거리에다 몸을 내놨다면서요. 죽으려면 곱게 혼자 죽을 것이지 애먼 남 인생 망치게 자살을 그딴 식으로 한답니까?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적당히 하시죠. 예? 환자 한 명이 그녀에게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성마르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목 줄기에서 맥박이 요동치는 걸 느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목숨 거는 일엔 누구나 절박할 수 있다고, 그녀는 속으로 끄덕였다. 의식이 없는 저 사람, 하서남도 지금은 목숨을 거는 순간을 살고 있는지 당신들은 알고나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내가 왜 정인정 간호사를 불렀는지 아십니까? 투서가 들어왔어요. 정 간호사가 어떤 환자한테만 특별하게 친절하다면서요? 차별한다고 난리들이에요. 연거푸 두 번이나 질문을 해대는 병원장은 그녀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이미 알면서도 질타하고 있음을 정확히 보여주었다. 병원이 정해 놓은 암묵적 법칙을. 영업상의 엄격한 금지와 허용을 위반하는 직원에 대한 병원장의 세련된 압박이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제 환자를 잘 돌보고 친절하게 대하는 게 문제가 됩니까? 사실 그분들은 제가 맡고 있는 환자들도 아니에요. 환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물론 정확한 의료적 처치겠지만, 공공적 서포트나 심리적 지원도 환자를 살리는 중요한 기제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녀는 병원장 앞에서 일개 간호사 주제에 신념을 운운하는 게 같잖아 보일 것도, 애송이의 기고만장으로 비칠 것도 알았다. 장기를 떼려는 병원 측에게 뇌사자란 살아 있는 사람도 사망한 자도 아닌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모순에 대해, 삶과 죽음에 있어 중간 단계라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지 따져 물을 자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국내에서 손꼽히는 이식 전문의인 병원장 앞에서. 무엇보다 하서남은 뇌사자가 아니지 않는가. 네, 네. 다 좋습니다. 공공적 서포트도 좋고, 간호사의 정서적 돌봄의 임무도 숭고하지요. 그런데, 이 한마디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따박따박 매달 들어오는 정 간호사의 월급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는 있겠지요? 병원장의 메시지는 짧고 깔끔해서 소름이 돋았다.


의식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못한다. 어떤 여자가 사내에게 살라고, 깨어나라고, 눈을 뜨라고, 끝없이 속삭인다. 사내는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여자는 후일의 만남을 약속이나 한 듯이 재촉한다. 하서남 님, 하서남 님, 들리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면 눈을 깜빡이거나 손가락을 움직거려 보세요. 사내더러 하서남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내의 귀에다 대고 자꾸 말을 거는 걸로 봐선 자신을 하서남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부서진 의식 틈으로 검은 사람이 자꾸 옷자락을 밀어 넣고 있다. 사내는 어떻게 깨어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가 가출할 때는 미성년자였다. 가출할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머물 집도 먹을 음식도 아니었다.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원룸도 구하고 일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 민증이 있어야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른들만 살라고 펼쳐 놓은 곳이었다. 가출 청소년들이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창궐할까 봐 세상은 모든 문의 빗장을 단단히도 걸어 놓았다. 소년은 애들 소개로 민증을 구했다. 가출 청소년에서 독립 성인이 되어서 민증이 굳이 필요 없는 인간들의 민증을 돈 주고 샀다. 11, 12월이 되면 민증 물량이 거의 없어서 비싸기 때문에 물량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덕분에 소년은 몇 달 동안 훔친 신분증으로 버텼다. 일을 해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성인이 될 때까지 민증 세 개로 돌려막았다. 훔친 민증의 얼굴이 소년의 앳된 얼굴과 너무나 달라서 일하던 주유소 세차장 이모가 의심하는 걸 보고 바로 도망쳤다. 가출팸 형들 따라간 술집에 경찰이 떠서 소년은 민증을 까야만 했다. 하필 민증 원 소유자가 뭔 짓을 저질렀는지 경찰은 수배 중이라고 했다. 경찰관에게 압수 증명서인지 영장인지 갖고 오라고 악을 쓰고 발광을 했다. 꼬리뼈에서 목덜미까지 단박에 떨림이 전달됐다. 너무 무서웠다. 얼른 가정으로 돌아가라. 경찰관이 민증을 뺏고는 소년에게 말했다. 어른들은 소년더러 집이나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그때마다 소년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 뒤로 몇 번 경찰과 맞닥뜨리면서 신원조회와 불심검문을 받았던 소년은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 전단지도 돌리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고깃집 불판 옮기는 일도 하고, 택배 일도 하고, 자동차 시트 공장에서 일하면서 방 월세 내고 밥값을 치렀다. 야간 일을 하면 임금을 높게 쳐줘서 주로 밤에만 일했다. 어찌 된 일인지 돈은 모이질 않았다. 어리지도 젊지도,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삶의 밑창이 뜯겨진 채로 살았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지만 떠돌이, 방랑자, 만성적 홈리스로 남았다.


장기 이식 수술은 성공했다. 수술하고 난 뒤엔 이 개월이면 정상으로 몸이 돌아오고, 삼 개월이면 수술 전 몸 상태로 완벽하게 회복된다고 의사는 장담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소년은 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차마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내장들이 찢어진 것처럼 숨넘어갈 듯한 통증이 소름끼치게 진격해 댔다. 원래 기증자들이 마취에서 깨면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고 있으니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도 했다. 소년의 회복은 더뎠다. 간을 떼 냈는데, 이상하게 어깨가 산산 조각난 것처럼 저리고 아팠다. 항문에선 간헐적으로 설사를 내보냈다. 수술 끝나고 이주 뒤엔 다들 퇴원한다는데, 니는 왜 빨리 안 낫는다냐? 니네 아버지는 연세가 많은데도 버얼써 좋아졌잖냐.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문제다 문제. 어머니가 닦달을 해댔다. 병원에서도 간과 혈액검사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소년이 호소한 통증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련되고 사무적인 얼굴들에게 소년의 고통은 어쩐지 골칫거리처럼 보여서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뭘 기대했던가. 수치스러워서 가슴이 아려 왔다.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나가자, 다신 돌아오지 말자. 내빼자. 소년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거리의 햇볕은 뜨거웠다. 꼬리뼈에서 목덜미까지 고드름이 박힌 것처럼 춥고 아리고 떨렸다. 병원 앞 약국에 들러 해열진통제를 샀다. 한 알, 두 알……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껍질을 까는 데 애를 먹었다. 아, 씨발. 돌아가는 길, 시냇물에 휴대폰을 던졌다. 원룸으로 돌아가서 몸을 눕혔다. 더듬더듬 잠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피부 아래에서 잠이 통증과 섞여 진저리를 쳤다. 야, 자냐, 나 몰래 어디 좋은 데 갔다 왔냐? 이주일 넘게 꼴도 안 보이더라? 벽 구멍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인정이 누나가 물었다. 목구멍까지 떨려서 소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떨림을 누군가가 진정시켜 주었으면. 누가 꼭 끌어안아 주면 떨림이 멈출 것 같았다. 후드 달린 오리털 점퍼를 입고 이불을 덮었는데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인정이 누나한테 안아 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누나는 동거하던 형이 다른 형들 두 명과 함께 인정이 누나를 이용해 조건 사기를 친 경험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누나가 채팅으로 남자를 유혹해서 모텔로 들어가면, 형들 세 명이 급습해서 동영상이랑 사진 찍어서 협박을 한 뒤에 돈을 뜯어냈다. 미성년자의 몸을 강박적으로 욕망하는 미친 어른들이 넘친 탓에 형들은 제법 큰돈을 만졌다. 쌩 양아치 새끼를 만나는 바람에 누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형들이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춰서 늦게 모텔에 들어간 탓이었다. 누나를 ‘우래기(우리 아기)’라고 불렀던 형은 누나가 도망가거나 신고할 수 없도록 연인 관계로 묶어 두었다는 걸 누나만 모르고 있었다. 모든 걸 알게 된 누나는 동네 깡패에게 형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로 누나는 남자새끼라면 이를 갈았다. 누나,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 목구멍으로 나오는 말을 소년은 이를 악물고 막았다. 병신새끼, 뭐래는 거냐? 너도 남자새끼라고 안아 달라 어쩌라 지랄이냐? 인정이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야, 자냐? 뭐라고 말 좀 해봐.


하서남 님, 안녕하세요? 저는 정인정 간호삽니다. 오늘은 좀 죄송한 말씀을 드릴게요. 선생님이 우리 병원에 와서 받은 치료비가 너무 많이 나오게 생겼어요. 너무 오랫동안 안 깨어나시면 병원비가 무척 많이 나올 거예요. 얼른 깨어나셔서 퇴원하시고, 병원비를 다 갚으셔야 세상으로 나가 떳떳하게 살 수 있지 않으시겠어요? 그녀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의료자원의 측면에서 불합리한 사용으로 간주되고 있고, 다른 환자들이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병원 측의 입장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의 과중한 치료비 때문에 가족들이 환자의 장기 기증을 선택하는 사례를 그녀는 봐왔던 터였다. 살 권리만큼 죽을 권리도 있다고들 말하지만, 살고 죽는 걸 선택할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는 하서남 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이 소멸하는 동안 방해받지 않겠노라는 의지를 보여줄 수도, 장기를 기증하겠노라는 동의도 할 수 없다. 완전히 사망했다고 판정하는 불가역적 시점은 누가 정할 수 있는가. 살아 있기 전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은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은 경계의 불확실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을 무한한 존재라고 부를 게 아니라 무궁무진한 존재라고 불러야 옳은 거라고 죽기 며칠 전에 주장했던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동일한 것 같아 보여도 동일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동일한 것은 가짜인 거다. 겨우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여도, 거의 죽을 것 같아 보여도, 삶과 죽음은 엄연히 다르다.


수술 후유증인지 합병증인지 병원에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일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길을 가다가도 졸도하듯이 쓰러지곤 했다. 하루에도 턱이 툭, 떨어지듯이 벌어지면서 아버지처럼 어버버 말이 어눌해지다가 벽돌로 이마를 때리듯이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졸음의 공격을 받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소년의 증상이 있는 병을 기면증이라고 했다. 일을 하다가도 졸음이 쏟아져서 잠이 들어버린 탓에 그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돈을 벌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신체부위별 국제 암시장 장기 매매 가격을 알아봤다. 간은 약 1억 7천만 원, 심장은 1억 4천만 원, 신장은 약 3억 정도로 가격이 매겨졌다. 피는 0.473리터에 38만 원, 피부는 평방인치당 약 1만 1천 원 정도였다. 위, 소장, 쓸개, 비장, 안구 등을 다 합하면 얼추 7, 8억은 넘었다. 피부와 혈액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뺀 합계였다. 몸은 단 돈 만 원도 못 버는데, 내장들은 값을 쳐주는 세상이었다. 돈 벌기 위해 장기들을 다 팔고 나면 몸은 이 세상에 없을 터였다.
아버지는 어찌 되었나? 일 년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알코올중독자답게 시원하게 들이마시다 갔다고 나중에 들었다. 어머니는 보험금을 갖고 튄 다음에 도박이 발각되어 별을 달러 갔다고 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연락이 닿지 않은 소년을 실종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탓에 주민등록이 없는 가족관계미등록자 신분이 되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실혼 관계로 둘 사이에 소년만 낳았을 뿐 법적 부부는 아니었다. 원래 거지같은 가족이기에 남아 있는 기대 따윈 한 점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낱낱이 다 까발려진 사실 앞에서 이상하게도 소년은 속이 메슥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가출까지 했건만 기어이 죽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마음을 일러 무슨 병이라고 하나.
야, 자냐? 나무늘보처럼 웬 잠만 그렇게 처자냐? 인정이 누나가 아직도 옆방에 살고 있었던가. 헤어진 지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왜 자꾸 인정이 누나는 말을 거는 걸까. 조건 사기를 그만둔 인정이 누나는 소년더러 중고폰 판매 사기를 치자고 꼬드겼다. 수시로 낮잠을 자는 소년이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소년이 인터넷에 중고핸드폰을 판매한다고 글을 띄우면 사겠다는 사람이 떡밥을 물었다. 계좌는 인정이 누나가 텄기 때문에 판매 금액의 일부가 선불로 입금이 되었다. 나중에야 인정이 누나가 핸드폰 대신에 돌이나 쓰레기를 넣어서 사기를 쳤다는 걸 알았다. 소년에게만 사기를 치자고 한 게 아니라 다른 가출 애들에게도 하자고 꼬드겼다는 걸, 사기에 이용된 대포통장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누나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는 걸, 소년이 돈 가져간 줄 알고 다른 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두들겨 팬 다음에야 알았다. 보호관찰을 받게 된 인정이 누나는 어디로 갔나. 새이기도 하고 공룡이기도 한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미국 어딘가의 정원에 돈 모아서 함께 가자고 벽 구멍으로 속삭였던 누나의 발자국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인정. 누나의 이름. 소년은 그녀의 이름이 가짜일지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소년이 자신의 본명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듯이. 쥐라기 시대의 공룡 따위를 떠벌리면서 잘난 척 아는 척을 해댔던 짓도 어딘가 수상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잠만 자다 보니, 이젠 제정신이 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거나 떠나거나, 그 누구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마침내 깨달은 그를 잡아 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어두운 상점들이 빗속에서 젖어 가는 거리를 걸었다. 이제 낮이나 밤이나 잠이 쏟아진다. 그는 보도블록 턱에 머리를 모로 대고 몸을 거리에 눕힌다. 자냐? 왜 허구한 날 너는 잠만 자냐? 누나가 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속삭인다. 누나는 어디 갔나? 모두들 어디로 떠났나? 살아가는 법을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걸, 존재 자체가 흉기였던 아버지와 게임하듯 인생을 탕진했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니 맛이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모두가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비에 젖은 나방의 날개처럼 감은 눈꺼풀에 축축한 잠이 덮이고, 전조등의 불빛이 뿌옇게 눈가를 스친다. 심장 무게만 1톤이 넘는다는 공룡의 두 발이 그를 우지끈 밟는다.


정인정 간호사가 돈 얘기를 꺼낸 뒤, 3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하서남의 인공호흡기에서 삐삐 신호음이 들렸다. 응급상황이었다. 하서남이 갑자기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떼 내려고 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들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자가 호흡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이프레셔가 발생하면서 일종의 파이팅 시그널을 하서남이 보여주고 있었다. 담당의들이 호출되었다. 자가 호흡이 완벽하게 가능한지 엑스레이 검사가 즉각 이루어졌다. 폐는 깨끗했다. 인공호흡기를 뗐다. 그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열흘 만이었다. 정인정 간호사가 누구신가요? 병원에 실려 온 뒤에 처음으로 듣는 하서남의 목소리였다. 제가 정인정 간호삽니다.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천만다행입니다.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의 목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치료 다 받으면 나가서 뭐라도 해서 어떻게든 병원비 다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살아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링거 줄이 달린 손으로 뺨과 두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인정 간호사 님, 제 이름은 하서남이 아니라 이인화입니다. 하서남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자꾸 이름을 불러 주셔서 깨어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주유소 입구에서 호객하는 풍선인형 에어댄서처럼 고개를 연거푸 까딱거리며 인사를 했다. 굳었던 목 관절이 꺾이는 게 고통스러울 거라고 간호사는 생각했지만, 같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서남, 아니 이인화 씨는 일반 병실로 갔다.
정인정 간호사는 임무가 완료된 차분한 마음으로 다른 환자들을 돌봤다. 일주일이 지났다. 재활병동으로 옮긴 이인화 씨의 호전된 상태가 궁금해서 그녀는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들렀다. 이인화 씨는 좀 어떤가요? 간호사실에서 차트를 보고 있는 수간호사에게 물었다. 이인화 씨요? 저희 병동엔 그런 이름을 가진 환자가 없는데요. 혹시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수간호사가 간호사실 벽면에 설치된 환자 리스트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말했다. 정인정 간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화경
작가소개 / 이화경 

1997년 《세계의문학》에 단편 「둥근잎나팔꽃」으로 등단. 펴낸 책들로는 『수화』, 『나비를 태우는 강』, 『꾼』, 『탐욕』, 『화투 치는 고양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열애를 읽는다』, 『그림자 개』,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울지 마라, 눈물이 네 몸을 녹일 것이니』, 『윗도리』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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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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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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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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