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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

  • 작성일 2023-01-01
  • 조회수 2,026

[단편소설]



이웃들



고수경





어두운 건물 복도에 앉아 아는 얼굴들을 떠올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지금은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회사 근처에서 자취하는 주임님. 나를 초대해 준 적은 있지만 재워 주지는 않았다. 오늘처럼 회식이 자정 넘어 끝난 십이월 초 겨울밤에도.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사는 같은 과 언니. 연락을 안 한 지 일 년쯤 되었다. 세 손가락을 접었다 편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커터칼이 잡혔다. 문구용이어서 얇은 비닐 정도나 자를 수 있지만 빈손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을 올렸다 내리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의 불이 켜지고 갓 스물쯤 돼 보이는 여자가 복도로 들어오려다 멈춰 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뒤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불이 다시 꺼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암흑 속에서 202호와 203호, 204호의 현관문을 보며 생각했다. 이 중 한 곳에 사는 사람일 텐데. 하긴 휴대폰과 지갑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원룸 복도에서 커터칼을 든 사람을 발견하고 돌아선 여자가 나보단 나은 처지였다. 도로 바닥에 앉아 내 앞에 있는 201호의 현관문을 바라봤다.
십 분 전만 해도 나는 저 안에 있었다. 새벽 한 시쯤이었다. 그때는 가방과 휴대폰을 내려놓고 수납장에서 돌돌 말린 비닐을 꺼냈다. 이번 겨울에도 웃풍을 막기 위해 창문에 붙이고 남은 에어캡이었다. 택배 박스 안에 에어캡을 깔고 모서리 부분을 커터칼로 그어서 기포를 빼자 어느 정도 모양이 잡혔다. 밖으로 나와서 건물 입구에 주차된 차 뒤에 박스를 두었다. 차 아래 숨어 있던 고양이들이 눈치를 보다가 한 마리씩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패딩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아직 온기가 남은 핫팩을 넣어 주고 건물로 들어와 계단을 올랐다. 집에 가면 내일 오전 미팅의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피피티를 검토해 본 뒤에 씻고 나서 바로 잠들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평범한 하루를 마치기 전 오며 가며 보았던 길고양이들에게 집을 만들어 주려던 것뿐이었다. 기온이 올겨울 처음 영하로 떨어진다는 오늘 밤만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작은 공간 한 칸을.
집 앞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어 락은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을 네 번 울리고 나면 이런 음성이 나온다는 것.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리면 오 분 동안 시도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같은 숫자를 네 번 눌렀는데 실패했다면 다른 숫자를 눌러 봐야 한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다른 숫자가 없었다. 이십여 년 전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아이돌 가수의 생일 네 자리를 통장 비밀번호로도 만들고 온갖 사이트에 가입할 때 쓰고 이 집에서도 이 년 가까이 눌러 왔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생일을 다섯 번째까지 눌렀다는 이유로 차가운 바닥에 앉아 오 분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센서등이 꺼졌지만 내버려두었다. 손에 입김을 불면서 어둠에 적응하려고 눈을 깜빡였다. 복도 끝에 달린 창문으로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들어와 눈앞의 내 현관문만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202호부터 204호까지의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나지막한 텔레비전 소리와 이를 닦고 물을 트는 소리, 이불을 바스락거리는 소리. 컴컴하고 서늘한 복도에 앉아서 문 너머 사람들이 하루를 정리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언젠가 케이블 채널에서 본 저예산 공포영화의 도입부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공포영화를 즐겨보지 않았다. 감독이 정해 놓은 대로 휩쓸리다가 비극을 맞는 캐릭터들을 보면 나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비밀번호가 세 번째 안 맞았을 때까지는 안 맞는 원인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일이었다.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고 옆 건물의 주인집을 찾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복도가 너무 조용해서인지 자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것과 이대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쁠지에 대해서.
몇 층이라고요?
이층이요.
아래에서 누군가 두런거렸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순경 두 명이었다.
도어 락이 안 열려서요.
신고가 들어와서 확인 좀 하겠습니다. 여기 사는 분이세요?
네. 옆 건물에 집주인분들이 사시는데 절 알아요.
두 명 중 뒤에 서 있던 순경이 계단으로 가서 아래층에 대고 말했다.
여기 세입자시라는데요. 확인해 보시겠어요?
또 두 명이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집주인 부부가 아니었다. 한 명은 몇 분 전에 여길 나갔던 여자였고 한 명은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여기 사신다고요? 주인집 아들인데 저는 처음 뵙네요.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저를 아세요.
지금 방콕 가셨는데. 잠시만요.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마른 체격에 앞머리가 덥수룩해 키만 자란 소년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순경 두 명과 낯선 여자와 집주인 아들과 좁은 복도에 서서 길어지는 신호음을 듣는 동안 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휴대폰 속 에덴 아주머니, 에덴 아저씨의 진짜 이름을. 모두가 가만히 있어서 복도의 불이 꺼지자 순경이 박수를 짝 쳤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다른 번호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두 분 다 안 받으시네요. 거기도 밤이어서 그런가.
남자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나를 흘깃거렸다. 순경 중 한 명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무기를 소지하고 계십니까?
무기요? 이거요?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자 정적이 흘렀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순경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불이 깜빡깜빡하는 복도에 서서 다 말했다. 자동차 밑에서 떨고 있던 길고양이들과 갑자기 비밀번호가 맞지 않는 도어 락과 내 신분증이 이 문 안에 있다는 것까지. 모든 일을 줄줄이 설명하자 어쩐지 아주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순경이 입을 열었다.
옆집에 아는 분이 있으세요?
누구요?
선생님이 여기 201호에 산다는 걸 증명해 주실 분이요.
순경 뒤에 서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그들을 비집고 나왔다.
저는 들어가도 되죠?
선생님은 저분을 뵌 적 없으신 거 맞습니까?
순경이 여자에게 확인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204호로 들어가 버렸다. 집주인 아들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나를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흘긋대면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만 나는 중에 순경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 이 건물에서 신원을 보장해 주실 분이 계십니까? 옆집이 아니라 여기 사는 누구라도요.
복도는 조용했다. 세탁기나 헤어드라이어가 돌아가는 소리, 샤워기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고 있거나, 복도의 대화를 듣고 있거나.
원룸 살면서 누가 옆집이랑 안면 터놓고 살겠어요. 저분도 처음 보는데요.
순경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



작년 여름 뉴스에서는 예년에 비해 선선한 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나는 매 여름이 더울까? 지은 지 이십 년도 훌쩍 넘은 원룸은 해가 져도 열기가 빠지지 않았고 나는 퇴근 이후에는 에어컨을 틀고 쉬다가 열한 시가 넘으면 줄넘기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삼십 분 동안 땀을 뺀 뒤 찬물로 샤워하고 나면 선풍기만 틀고도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초여름부터 건물 입구 옆에서 줄넘기를 했는데 그 시간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적었고 누가 지나가더라도 못 본 체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나를 보고 멈춰 선 세입자는 송이 처음이었다.
송은 멀끔한 차림에 백팩을 메고 있었다. 남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어깨가 좁고 호리호리해서 흰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 잘 다듬은 대파처럼 보였다. 송은 입구로 들어서려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정면을 보면서 줄을 꽉 쥔 채 줄넘기를 했고 송은 금방 들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도로 나왔다. 트레이닝으로 갈아입고 줄넘기를 들고서. 그를 보자마자 나는 줄에 발이 걸렸다.
“옆에서 같이해도 돼요?”
그게 송이 나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순간 당황했으나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두어 걸음 물러섰다.
“너무 가까우면 안 돼요.”
송은 성인 남자가 팔을 벌린 너비 정도의 거리에 섰다. 줄넘기를 하는 두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였다. 줄넘기의 손잡이에는 SONG이라는 글자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는데 원래 그런 제품인지 그가 붙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몇 분 동안 말없이 줄넘기를 했다. 줄이 허공을 가르고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삼십 분을 채우고 줄을 손에 감자 송도 멈춰 서서 물었다.
“매일 하세요?”
“거의요.”
“몇 시에요?”
“왜요?”
“저도 늘 줄넘기를 하고 싶었는데 못 하고 있었거든요. 밖에서 혼자 하기 그래서요.”
밖에서 혼자 잘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대신 열한 시쯤 나온다고 대답했다. 송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날 밤 열한 시,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송이 나왔다. 우리는 간단한 눈인사를 나눈 뒤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섰다. 전날과 달리 송은 사이사이에 가위표 뛰기, 이단 뛰기와 내가 모르는 줄넘기 기술로 줄넘기를 열띠게 했다. 그동안 못한 기술을 다 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언제나처럼 일단 뛰기만 하는 동안 현란한 줄넘기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송은 줄넘기가 쉽고 편하면서도 재밌다고 했다. 지루해지면 다른 기술로 변주를 줄 수 있으니까. 줄넘기 기술이 쉰 개도 넘는다는 걸 나는 송에게 처음 들었다. 가위바위보 뛰기, 뒤로 뛰기, 엇걸어 뛰기, 옆떨쳐 앞으로 뛰기……. 내가 줄넘기를 하는 이유는 단지 열대야를 빨리 보내기 위해서였다. 열대야가 아닐 때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봤다. 혹은 과자를 까먹거나 벽지의 무늬를 세어도 괜찮았다. 천장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벌면 스키를 타러 다녀야지. 미슐랭 식당에도 가보고 마카롱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도 들어야지. 그러나 월급이 차곡차곡 모여도 나는 늘 에덴빌 201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는 B101호예요.”
십 분 동안 줄넘기를 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송이 말했다. 삼 초쯤 뒤에야 나는 그가 말한 게 이름이나 별명이 아니라 집 호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행성 B612도 아니고 사람 사는 집 호수가 B101호라니 웃기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 웃기는 건 송이 내 아랫집에 산다는 거였다. 나는 아래층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줄넘기를 밖에서 해왔다. 그런데 정작 그 아랫집 사람은 내가 줄넘기하는 동안 옆에서 같이 줄넘기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가 밖에 있다고 내가 집 안에서 줄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집에 있으면 그도 자기 집에 있을 테니까. 결국 송과 나는 매일 밤 열한 시에 다세대 주택 앞에서 같이 줄넘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왜 혼자서는 못 하는데요?”
나는 충동적으로 송에게 물었다. 송은 당연하단 듯이 대답했다.
“무섭잖아요.”
“뭐가요?”
“밤중에 혼자 줄넘기하고 있는 남자를 보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저도 밤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서워요.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고. 안 그래요?”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요.”
“그건 그래요. 저는 게다가 공포영화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매일 밤 자기 전에 봐요.”
“안 무서워요?”
“무섭죠. 무서워서 이 집이 안락하게 느껴지고, 여기가 안전지대인 것 같은 그 기분이 좋아요. 영화 속에선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는 공포영화를 줄넘기만큼 좋아해서 이후로도 종종 공포영화 예찬론을 펼쳤다. 엑소시스트와 악마의 씨, 히치콕 영화부터 아리 에스터나 조던 필에 이르기까지 공포영화의 역사를 줄줄 꿰었다. 전반부는 코미디, 후반부는 스릴러였던 한국 영화도 후반부만 돌려봤다. 반지하도 아니고 진짜 지하에 사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것도 몰래 숨어서! 더 불행한 사람을 보고 행복을 느끼는 건 악취미라고 지적했더니 송은 인정하면서도 한마디를 더 했다. 그건 영화 속 가상 인물이잖아요. 진짜로 여기 살고 있는 건 나고. 어쨌든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악몽을 꾸어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송은 흥미를 보였다.
“어떤 꿈이었는데요?”
“지하실에 사는 아저씨랑 마주쳐서 도망가는 꿈이었어요.”
“그런 꿈이라면 겁낼 필요 없어요.”
“왜요?”
“우리는 그런 지하실이 있는 대저택에 살지 않으니까요.”
요즘도 나는 송이 했던 말을 생각하곤 했다. 그를 지적했던 일이 무색하도록 가끔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대저택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지하실에 사는 사람도 아니라는 게. 지상에서 반 층 위에 있고 누군가 숨을 공간도 없이 비좁은 에덴빌 201호가 나에게 적당한 집처럼 느껴졌다.
그 후 우리는 가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느 커플이 우리를 보면서 지나갈 때, 봐요, 같이하니까 덜 창피하죠? 했던 것 정도. 아뇨, 같이하니까 더 창피한데요, 라고 대꾸했던 것까지. 그러고는 각자의 운동에 열중했다.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연락처도 모르는 채로 매일 밤 만나서. 서로를 불러야 할 때 나는 송을 B101호님이라고 불렀고 송은 나를 201호님이라고 불렀다. 하루 이틀 빠질 때도 사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운동을 마칠 때 내일은 못 나와요, 라고만 말했다. 못 나간 날 밤 침대에 누워 있으면 간간이 트럭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이 시간에 줄넘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한 번씩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면 아래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나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끔 움찔할 때마다 그가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했다. 그러면 안심이 되었다.


팔월 말쯤 송은 다다음 주에 이사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군요.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줄넘기를 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송의 이사 전날 밤 운동을 마친 뒤 송이 먼저 입을 열었다.
“201호님은 앞으로도 계속하실 거죠?”
“그러겠죠.”
거짓말이었다. 날이 선선해져서 운동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운동은 더운 밤을 견디려고 시작한 거니까. 송은 줄넘기를 손에 감으면서 말했다.
“저 여기 사는 사람이랑 알고 지낸 거 처음이었어요. 201호님은 저 말고 있었어요?”
“아니요. 옆집 사람 얼굴도 몰라요.”
내가 202호에 대해서 아는 건 가래가 낀 듯한 기침소리였다. 그리고 재채기 소리, 코를 푸는 소리. 천식이 있는 게 분명하고 여름에도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이었다. 한참 기침소리가 난 뒤에는 선풍기보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렸는데 아마 공기청정기인 것 같았다. 그 공기청정기가 우리의 월세보다 비쌀까 궁금한 적도 있었다. 이걸로 내가 202호를 안다고 할 수 있나. 송이 가고 나면 나는 다시 이 원룸에서 아무도 모르고 지내게 될 거였다.
“그런데 웃기지 않아요?”
“또 뭐가요.”
“101호가 없잖아요. B101호랑 201호는 있는데.”
“반지하가 있는 집들은 다 그렇죠. 201호도 사실 이층이 아니라 일점 오층에 있는 거예요.”
“그럼 101호는 B101호랑 201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거네요. 여기?”
송은 우리가 서 있는 땅을 가리켰다. 우리의 머리 뒤에 201호 창문이 있고 종아리 뒤에 B101호 창문이 있다. 그러네요. 나는 운동화 끝으로 땅을 툭툭 치면서 대답했다.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송은 반 층 아래로, 나는 반 층 위로.
다음날 퇴근해서 돌아오는 길에 분리수거장에서 낡은 줄넘기를 보았다. 손잡이에 붙은 SONG이라는 글자 테이프가 너덜너덜했다. 그게 그의 성인지, 이름인지, 별명인지, 회사명이나 제품명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버린 그가 앞으로 뭘 하면서 여름밤을 보낼지도. 이사 가는 집은 몇 호인지만이라도 물어 볼 걸 그랬나 싶었다. 소행성 B101호를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 이 넓은 우주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얼마나 적은지 이야기해 봐야 했는데.
나는 정말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도 나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이름이 뭐고, 나이는 몇 살이고, 무슨 일을 해서 월세와 관리비를 어떻게 내는지.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송이었다. 송은 내가 언제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를 쓰는지, 몇 시에 알람을 끄고 세탁기를 며칠에 한 번 돌리는지도 알았고, 주말에는 고양이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을 자주 본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발을 딛고 선 바닥과 송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이 너무 얇아서였다.
그 외에도 송이 나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공포영화를 본 날 밤에는 꼭 악몽을 꾸었다. 다리는 튼튼한데 기관지가 약해 줄넘기를 십 분 하면 잠깐 쉬어야 했다. 그럴 때는 담배 생각이 절실해서 무설탕 사탕을 하나씩 까먹었다. 일주일에 사십 시간 이상 함께 보내는 직장 동료들은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송은 내가 에덴빌 201호에 산다고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송이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처음으로 일곱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B101호를 두드렸을 것이다. 남색 트레이닝을 입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당당하게 이 사람이 나를 안다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년 여름에 매일 밤 같이 운동을 했다는 것조차 이제는 나만의 기억이다. 줄넘기와 사탕 몇 개만 들고 나오는 나에게 생수와 휴대용 선풍기와 캐러멜 같은 것들을 건넸던 그 손도. B101호에 살던 사람이 나를 알았고, 나는 그 사람의 나이는 모르는데 나보다 어린 건 분명하다고, 그래도 끝까지 존댓말을 썼지만 속으로는 아래층에 사는 동생으로 여겼다고, 이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마스터키 있으시죠. 이 문만 열어 주시면 신분증 보여드릴 수 있어요.
내 말에 남자는 마스터키는 있는데, 하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순경들에게 물었다.
만에 하나라도 여기가 이분 집이 아니면 저는 주거침입으로 걸리는 거 아니에요?
순경들은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남의 집을 이렇게까지 들어가려고 할 리가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는 한결같이 차분했다.
남의 집을 이렇게까지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저도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저희 집이 원룸 건물만 다섯 채를 관리하다 보니까요.
저기, 저희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순경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서로 가주시든가 주민등록번호라도 불러 주시면 신원조회를 해드리겠습니다.
순경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여기 신원조회 좀 부탁합니다. 나는 군말 없이 열세 자리의 숫자를 읊었다. 잠시 뒤 무전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깔끔한데요. 전과 없고.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당연한 말인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순경들이 가기 전에 남자는 한 번 더 물었다.
이분이 세입자라는 걸 확인하기 전에는 문을 열어 드리면 안 되는 거죠? 신원과 상관없이요.
뭐…… 그렇죠. 원칙적으로는.
순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하세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적적한 복도에 남자와 둘이 남겨졌다. 패딩에서는 아직도 기름 냄새가 났다. 왜 이 회사는 매번 통풍도 안 되는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시 이런 날 회식에 참석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애초에 술도 마시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소리 질러 가며 건배 제의를 하지도 않고 회사 일만 마친 뒤 퇴근했다면. 아니, 사실 고양이들에게 박스를 주러 내려가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침대에 누워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는 혀를 깨물었다. 그걸 후회하다니.
저희 집에 계약서가 있을 거예요. 그걸로 주민등록번호랑 연락처를 맞춰 볼까요?
남자가 제안했다.


그의 집, 그러니까 주인집은 에덴빌 옆의 삼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에덴빌에서 볕이 잘 들지 않는 방은 주인집 쪽으로 창문이 난 방이었다. 나는 월세가 이만 원 더 비싸고 창문이 가려지지 않은 방을 택했다. 그때 나는 그런 점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풍부한 채광. 침대를 놓고도 줄넘기를 할 수 있는 여유 공간. 저렴한 월세. 대신 이곳은 시시티브이가 없었다. 중개업자는 이 동네가 치안이 아주 괜찮은 편이고 특히 이 집은 경찰서가 코앞이라고 했다. 아주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조만간 시시티브이를 달 거라고. 정말 그렇게 했다면 그 시시티브이에는 내가 이 년 동안 이 건물을 드나든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신원조회를 할 필요도 없고 주인집에 갈 일도 없었을 텐데.
시시티브이는 언제 달아 주시는 거예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물었다. 시시티브이요? 반문하는 남자에게 아주머니가 했던 말을 전했다.
음, 시시티브이는 생각보다 설치비랑 유지비가 많이 들어요. 다른 건물에는 달아 놨는데 그래서 여기보다 관리비가 더 비싸죠.
여기만 안 단 거예요?
에덴빌은 아주 오래된 건물이에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어요. 시시티브이는 건물을 지을 때 달아야 편한데 에덴빌이 지어질 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대요.
밖으로 나왔을 때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적갈색 벽돌 건물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너무 낡아서 관리하기 힘드니까 정리하자고 여러 번 말했는데 안 들으시네요. 다섯 채 중에 월세는 제일 적게 나오는데 클레임은 제일 많거든요. 그래서 여기 세입자들하곤 거의 안면을 텄는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은 정말 처음 보네요. 엄마한테 얘기는 들어 봤는데.
제 얘기요?
그냥, 에덴빌 201호는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고요. 순하다고 했나? 참하다고 했나.
나는 클레임을 잘 걸지 않았다. 작년 겨울에 세면대 수도꼭지가 터졌을 때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수도를 교체한 게 전부였다. 그건 내가 순해서도, 참해서도 아니었다. 그런 게 좋은 세입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별일 아닌 문제로 집주인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알아서 하려고 하는. 이웃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역시 이런 곳에서는 그런 게 암묵적인 배려라고 생각했다. 옆집의 우당탕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을 못 본 척하는 것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좋은 손님은 안 오는 손님인 것처럼 없는 듯 사는 세입자가 좋은 세입자고 없는 듯 사는 사람이 서로에게 편한 이웃이라고. 그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각자의 줄을 넘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시시티브이의 붉은빛이 번쩍이는 단독주택 문 앞에서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더니 나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아주머니. 저 에덴빌 201호예요. 작년 겨울에 수도꼭지 교체해 주셨잖아요. 시시티브이 달아 준다고도 하셨어요. 하나부동산에서 계약할 때요.
그랬어요?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어서 문 열어 달라고 해요.
수화기 너머 번화가의 활기찬 소음이 목소리에 섞여 들렸다. 휴대폰을 돌려주자 남자는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거기도 밤 아니야? 왜 아직까지 밖에 있어. 공연? 이제 끝났어? 무슨 마사지를 지금 받으러 가. 알았어. 끝나면 바로 호텔 들어가서 주무셔.
그가 마스터키를 가지러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기다리며 집에 들어가면 할일을 생각해 놓았다. 일단 패딩과 니트, 모직 바지와 양말을 벗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이를 닦는다. 머리를 말리고 내복과 수면 잠옷을 입는다. 노트북을 켜서 피피티를 검토한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포근한 이불을 덮는다. 다섯 시간쯤 잘 수 있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침 일곱 시부터는 오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내일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겨울밤의 추위 속에서도 이제야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대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왔다. 빈손이었다.
못 찾겠네요. 엄마는 또 전화도 안 받고.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빨리 들어가시지 좀.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더니 창고라도 가보겠다면서 도로 들어갔다. 어떡하지. 얼어 가는 손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남자에게 돈을 빌려서 모텔에 갈까. 아니면 택시비를 빌려 일단 과 언니네 집에 가볼까. 그사이에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했다면. 어쩌다가 연락이 끊겼던 거였지? 하얀 입김이 허공에 퍼졌고 날선 바람에 귀가 아렸다. 더운 나라에서 베드에 누워 마사지를 받고 있을 아주머니를 생각했다. 아늑하게 어두운 조명과 포근한 매트리스와 조용하고 선선한 방. 나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고 싶었다. 남자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창고에도 없네요. 기사를 불러 드릴까요? 이십사 시간 하는 데는 좀 멀어서 시간이 걸릴 텐데.
얼마나 걸려요?
이 시간에 불러 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문을 부술 수도 없고…….
남자가 멈칫했다. 그리고 에덴빌 쪽으로 걸어가서 창문에 달린 방범창을 두드렸다. 알루미늄 창살에서 깡, 깡, 속이 텅 빈 소리가 났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창문도 문이잖아요.
남자가 주택에 들어가서 공구함과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씩 웃더니 에덴빌 앞에 의자를 펼쳐 그 위에 올라섰다. 정확히 말하면 201호와 B101호의 창문 앞에. 이곳을 101호라고 불렀던 그때처럼 발치에는 B101호의 창문이 있고 201호의 창문은 남자의 얼굴 앞에 있었다. 그는 공구함에서 휴대용 절단기와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절단기로 201호 방범창의 창살을 끊었다. 일 분도 안 돼서 창살 하나가 끊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골목에는 가로등 몇 개만 켜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잘린 창살을 꺾어 뽑아냈다. 그러다 갑자기 말했다.
예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세입잔데 비밀번호를 잊었다고 했고, 월세랑 관리비는 얼마고 내는 날이 언제인지도 다 알더라고요. 별생각 없이 마스터키로 열어 줬죠.
방범창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창문 앞이 텅 비었다. 그가 창살을 모아 바닥에 내려두고 방충망을 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세입자 전 남자친구였고. 진짜 세입자는 이주 동안 입원했어요.
추위와는 다른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방충망 뒤의 창문을 밀었으나 창문에는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잠가 두셨네요. 잘하셨어요. 역시 안전이 최고죠.
남자는 망치를 들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깼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쨍하게 골목에 울렸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했지? 이게 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방범창이 이렇게 잘리고 창문이 깨지면 안 되지 않나. 잠긴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야 하잖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남자는 한 번 더 창문을 내려쳤다.
이건 뭐예요?
그가 깨진 창문 안의 두껍고 불투명한 비닐을 가리켰다.
단열 에어캡이에요. 창문에 붙이는.
집에 가서 가위를 가져와야겠네요.
남자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나는 거기에 대신 올라서면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냈다. 겨울을 맞을 때 창틀 전체를 덮도록 꼼꼼히 붙였던 에어캡에 흠집을 내고 쭉 찢었다. 그 틈으로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다행이네요. 이럴 줄 알고 가지고 계신 거 아니에요?
남자가 농담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내가 창틀에 손을 짚고 올라서 안으로 넘어가는 동안 뒤에서 남자는 통화를 했다.
마사지 끝났어? 여긴 다 해결됐어. 마스터키는 아닌데…… 그거랑 비슷해.
방 안으로 넘어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접이식 의자와 공구함을 챙기면서 말했다.
창문이랑 방범창은 내일 원상복구 해드릴게요. 비용 정산해서 문자로 넣어 드릴 테니까 다음 달 월세에 같이 주시면 돼요.
그는 잘린 창살을 흔들며 인사하고 멀어졌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에 서서 잠시 창틀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 할일을 모두 생각해 놓았는데 어떤 게 첫 번째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벽지와 가구와 각종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어딘가 낯설었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누군가 다녀간 곳에 뒤늦게 신발을 신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느 때나 이 서늘한 느낌이 되살아날지도 몰랐다. 며칠이 지난 뒤 아무 일 없이 집에 들어서는 평범한 순간에도 문득문득 고개를 돌려 집 안을 뜯어보게 될지도.
일단 신발을 벗어 현관에 두었다.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남은 택배 박스를 잘라서 임시방편으로 창문에 붙였다. 잘 붙었나,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자 창문을 가린 택배 박스의 자투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의 벽지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피피티는 손 볼 데가 없었다. 내일 미팅과 발표를 위해 사흘 동안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만든 자료였다. 그런데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 이상하게도 내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피피티는 내가 만들었지만 발표는 사수가 하고 미팅 주관은 팀장이 하니까. 오늘 회식 때 팀장은 그 미팅에서 할일이 없는 나를 들어가게 해주는 건 그의 배려라고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와 안면을 트고 눈도장을 찍는 게 중요하다고. 이런 게 쌓여서 인맥이 된다고 말이다.
휴대폰에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집주인 김정훈입니다. 무슨 일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잘 부탁해요.
집에 돌아가 계약서를 찾아본 모양이었다. 나는 010으로 시작하는 열한 자리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박스를 잘라 붙인 창문으로 바깥의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가 가냘프게 우는 소리. 빠르게 걷는 소리와 비닐봉지가 달랑거리며 패딩에 스치는 소리. 이제 술집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작년 여름 송의 집에서 들렸던 어떤 소리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울음소리였다. 그건 영상 기기의 음향과는 달랐다. 화면 속 배우가 연기하는 소리와도. 그래도 나는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줄넘기를 들고 나오는 송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아서 불을 켰다. 책상 서랍을 열어 깊숙한 곳에서 줄이 칭칭 감긴 줄넘기를 꺼냈다. 손잡이에 붙은 스티커는 SO만 남아 있었고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튼튼했다. 딱 여름 두 달 동안만 매일 쓴 것처럼.
이 줄넘기도, 어딘가에 있을 내 줄넘기도 올 여름에는 쓰지 않았다. 밤에도 더우면 에어컨을 틀었다. 밤을 보내는 방법을 돈으로 사는 건 생각 이상으로 편했다. 지나가는 주민들과 눈이 마주치는 일도, 건물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줄에 스칠 뻔할 때 사과를 건네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반 층의 계단을 내려가고 저녁에 반 층의 계단을 올라오기만 하면서 여기에 내 하루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누구에게 아는 척하고 말을 걸기에는 일곱 칸의 계단이 너무 짧다고.
오늘은 아니었다. 창문이 깨져서. 너무 많은 소리가 들려서. 잠이 오지 않아서. 나는 SO가 붙은 줄넘기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지금은 열한 시도 아니고 열대야도 아니지만. 201호님은 저 말고 있었어요? 송의 질문을 생각하며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도어 락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밖으로 열렸다.











고수경
작가소개 / 고수경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수료. 202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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