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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410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여주는 핵심은 미래에 대한 태도의 전환이다. 이 소설은 동반 자살을 꿈꾸던 준이와 지민이 외삼촌의 독특한 시간적 인식에 대한 이해를 통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구성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유행하던 세기말 감수성 아래, 미래-없음과 전망의 부재를 경험했던 기억이 다시금 평범한 일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오늘날에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미래-없음과 전망 구성의 불가능성이 일상화된 묵시록의 형태로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묵시록적인 현재에 대한 거부가 오히려 미래를 기억하는 태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아이러니가 이 소설집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간다. 

   이 소설집에서 미래는 전망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시간적 인식의 저변에는 베르그송의 ‘지속’에 대한 시간적 이해가 있으며, 이 소설집은 가속 사회 안에서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단기화되는 미래의 시간성을 오히려 평면적으로 두들겨서 길게 연장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미래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뻗어나가는 2차원적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전하듯이 원처럼 구부러진다. 이러한 시간적 흐름의 전환이 새롭다기보다는 니체가 제안했던 영겁회귀나 예정조화와 같은 반복적 시간의 인식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이러한 영겁회귀나 예정조화는 초자연적인 운명의 개념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평범함의 인식으로 재조정된다. 시간이란 초월적으로 인간 세계의 인지적 영역 바깥을 일순(一巡)하여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상의 감각이 유지되는 평형 상태에서 개인의 삶이라는 원자를 둘러싼 전자들처럼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새삼스럽지만 결국 시간은 그것을 관측하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인지적인 개념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이해의 공간에서만 경험되며, 따라서 모든 시간에 대한 인식은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시대착오는 소설의 원점과 공명한다. 시간이 우리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며,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이야말로 소설이 창안하는 이야기의 공간적 부피에 값한다. 그렇게 김연수는 결국 다시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의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소설이 뭐였더라?’에 대한 응답으로서 도달하는 결말은 연대기적으로 미래를 향하지 않고 과거를 향하는 이야기들이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결말의 서술적 지점은 이야기 발화 시점으로서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와 그 이후 시점이 아니라 동생 바르바라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는 과거 시점으로 돌아간다. 연대기적인 삶의 시간과,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뒤집어 시간이 다시 도돌이표처럼 구부러져 흐를 수 있다는 시간의 순환성이 할아버지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게 하는 셈이다. 할아버지가 앓고 있는 치매 역시 비극적인 병증이 아니라 뒤죽박죽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적으로 구현하는 인지적 현상일 뿐이다. 할아버지는 막내 동생 바르바라를 잃어버린 미래를 살지만, 동시에 여전히 바르바라가 살아 있는 과거 어느 시점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소설적 시간의 동시성이란 SF에서 등장하는 평행세계나 시간여행의 개념보다도 본질적인 형태의 시대착오와, 그 평범성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시간이란 결국 시간을 통제하려는 시도에서만 구체화되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선고함으로써만 실체화된다. 다른 수록작 「진주의 결말」은 프로이트와 도라 사이의 사례사를 오마주한 것처럼 보이는 상담 실패의 사례다. 진주의 파괴적인 삶을 정신분석 상담 과정으로 재구성하는 이 소설의 형식에서 진주는 상담사가 가진 이야기적 완결과 의미의 구성을 거부함으로써, 논리적으로 구성된 연대기적 이야기 구조와 삶의 동형성을 원론적으로 부정한다. 오히려 진주가 선택하는 뒤죽박죽이고 비연대기적 서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도출되는 선택의 영역을 암시한다. 따라서 ‘결말’은 끝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의 한순간일 따름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시간을 결국 과거형 시제로 쓸 수밖에 없는 소설적 언어 형식의 한계를 뒤집게 된다. 명시적인 한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과거를 지시할 수밖에 없는 소설적 언어의 원점을 환기하며, 연대기적인 시간 인식의 파탄을 통해서 모든 형태의 시간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삶의 평범성에 도달한다. 

   김연수에게 소설적 언어의 과거시제는 소설 형식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통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에게 치유와 구원의 평범성을 제공하는 가능성의 도구다. 물론 이 소설집에서 김연수가 그려내는 일련의 시도와 그 주제의식이 소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 주거나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소설 형식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뻔뻔하고 고리타분할 정도로 고전적인 이해를 되풀이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변화하는 소설적 시도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소설의 원점을 환기하며 응시한다. 소설의 원점에서 뻗어 나오는 긴 시간을 보는 것이 역설적으로 미래를 기억하는 필연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시간이다.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려고 발버둥 치지만, 인간이라는 부족한 이해의 담지자를 위해 고안된 인지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시대착오의 시간 말이다.



   마주 보는 야누스 : 시간의 교차와 기억의 다시-쓰기


   박민정의 단편소설 「전교생의 사랑」4)이 보여주는 것은 소설적으로 시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시선의 방향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시선이다. 단순히 기억과 망각이라는 상반된 키워드를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가지 키워드가 사실 서로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하여 우선 망각할 필요가 있으며, 망각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시간적인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무작위적이고 돌발적인 방식으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억하면서 잊고, 때로는 잊으면서 기억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잊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기억하려는 아이러니를 감당해야 한다. 결국 이 소설에서도 시간이란 우리가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지적 조작을 가해 출현하는 해석적 공간에 다름 아니다. 그저 흘러가게 두었던 과거의 시간적 끈을 잡아채 현재의 시간의 끈과 묶고 교차하면서 시간은 다발적 공간으로, 해석적 부피를 제공하는 과정 말이다. 

   우선 이 소설의 내용은 잊을 수 없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두 여성이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떠한 이율배반이나 형용모순이 없다. 양쪽으로 흐르는 시간의 논리가 이러한 양면성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실제로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와 병행하고 있으며 누적적인 방식으로 현재에 개입한다. 서술자인 최민지는 소설 서두에 20년 전의 기억 속 친절하고 의욕적이었던 초임 체육 교사가 점차 교육 현장에서 흑화해 버렸던 기억을 환기한다. 


   그로부터 20년쯤 흐른 지금, 부임한 지 반년 만에 군대 조교처럼 굴던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낯빛은 더한 잿빛이 되어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굴리고 있을까, 매년 새로운 아이들을 거듭 혐오하고 또 혐오하면서, 첫해에 만났던 괴물 같은 아이들을 아직도 저주하면서 살아갈까, 생각했다. (115쪽)


  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은 사실 최민지 자신의 상황을 지시하고 있으며, 흑화해 버린 체육 교사가 여전히 과거의 그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리라는 심정적인 동일시를 유발한다. 체육 교사에게는 이러한 기억에서 잊히고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다. 최민지와 이세리 역시 그렇다. 소설의 주인공인 최민지와 이세리는 모두 과거 아역으로서 1982년작 〈전교생의 사랑〉이라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제는 고인이 된 홍 감독의 무리한 요구를 경험한 트라우마적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20세기로부터 이만큼 지나왔는데, 나는 작가가 되고 세리는 연출가가 되었는데, 홍 감독도 이미 죽고 그의 뼛가루조차 어디에도 없을 텐데, 그런데 우리는 아직 「전교생의 사랑」에 머물러 있었다.”(122-123쪽)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배우로서의 경력을 끝마치고 현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전교생의 사랑〉이라는 공통의 기억이 그들을 다시금 현재에 마주하고 대화하도록 만든 셈이다. 

   이 마주 보는 대화가 바로 시간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 신화 속 야누스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는 두 얼굴의 소유자다. 문제는 우리가 양쪽의 얼굴이 서로 마주하는 이미지를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주로 자기연민과 노스탤지어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미래는 그러한 과거를 편의적으로 착취할 따름이다. 두 얼굴이 한 개인의 현재를 파편화된 방식으로 갈라놓을 때,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잊을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상호 파괴 속에서만 우리 삶의 시간을 허구의 타자처럼 대할 따름이다 “인터넷에는 열다섯 살의 가장 빛났던 세리와 스무 살의 타락한 세리가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콜라주된 사진만 돌아다녔다.”(117쪽) 소설에서 언급되는 기록의 영역이자 자의적 해석의 공간으로서 나무위키는 과거를 일방적으로 참조하면서 병렬적 시간을 수직화한다. 이러한 기록에는 세계를 종합하려는 통사론적 해석이 없으며, 저마다 파편화된 주관이 끊임없이 서로의 방향을 바라볼 따름이다. 과거를 재료로 폭주하는 현재는 어떠한 미래로도 향하지 않는다. 

   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러한 당사자들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록하며 잊히지 못하게 하는 힘 사이의 대립 속에서 두 사람의 주인공은 현재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곳에 도달한다.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전교생의 사랑〉을 재상영하고 현재의 관객들과 대화하는 행사에 두 사람은 과거 영화를 볼 수 없었던 당사자로서 기꺼이 참여하고자 한다. 영화가 상영된 이후 진행자 및 평론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이 소설은 과거와 마주함으로써 현재와 대결하는 것, 동시에 현재와 마주함으로써 과거와 대결하는 모습을 동시적으로 그려낸다. 핵심은 그러한 대결이 곧 나무위키에는 적혀 있지 않은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서로 참조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대화란 결코 협력적이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체념과 비관, 긴장과 적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발생하는 해석적 역동성의 핵심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말. “혼자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같이 망신당하는 게 낫잖아.”

   그 장면이 지나가는데, 의외로 끔찍하다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세리가 내게 속삭이던 말이 떠오르는데, 왜 이제야 그 말이 기억나는지. 수많은 말을 기억하면서 왜 그 말만 잊고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133쪽)


   잊고 싶었던 기억 속에는 잊어서는 안 되는 말 역시 존재한다. 과거 세리가 홍 감독의 일방적인 요구에 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리가 함께 참여하여 새로운 씬을 구성하고자 요구했을 때, ‘같이 망신당하는’ 힘은 그 영화 속 장면 자신만의 의도와 해석으로 독점하고자 했던 홍 감독의 욕망을 굴절시킨다. 〈전교생의 사랑〉이 홍 감독이 자기 스승의 고전을 거의 그대로 참조하며 현재로 옮겨오려고 했던, 한 방향으로만 과거를 바라보았던 순진무구한 참조자에 불과했던 것과 달리 민지와 세리는 서로 마주 보았기 때문에 원작과는 다른 형태의 장면을 구성하고, 무자각적으로 ‘다시-쓰기’를 수행한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별다른 반성 없이 홍 감독의 영화를 한 방향으로 참조하는 현재의 편의성에 대하여 두 사람은 다시, 그러나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다시-쓰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의미에서 트라우마 극복기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흔히 하는 오해와 달리 트라우마는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직시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의 대화에서 발생하는 역동성에 의해 다시 쓰일 뿐이다. 이 이야기는 트라우마적 기억을 다시 쓰는 과정이며, 그러한 다시-쓰기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공동 창작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정신분석 치료 과정에서 요구되는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역할 및 그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디체인지’라는 영화 소재 역시 그들의 상호참조와 관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매개물로 다시 읽힌다. 여기에는 같이 망신당할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수행하는 창조적 역할 바꿈의 역동성이 존재할 따름이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참조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상호참조 가능한 형태의 대화를 서로에게 기록하기 때문이다. 열렬한 독서 행위에 있어서 텍스트의 외부란 존재하지 않듯이, 현재가 과거를 읽어내려는 시도에서도 외부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교생의 사랑」은 그렇게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당사자 바깥에서 읽어내려는 모든 무도한 독자들에게 그 독서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우리를 신경 쓰지도 않고 서로를 마주 보는 야누스의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 살아가기


   김은의 소설 「사랑의 여름」5)은 명백한 과거 한 시기를 기점으로 삼아 그러한 시대적 열기가 현재 한 개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연관성에 대하여 그려낸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시기는 개인의 삶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때 ‘사랑의 여름’이 1967년 여름 미국 전역을 비롯하여 유럽에서 온 10만 명 이상의 히피들이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집결해 ‘사랑과 평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축제를 즐겼던 일종의 반문화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6-17쪽) 실제로 ‘사랑의 여름’ 운동은 현실적인 조건에 좌초되며 최종적으로 ‘히피 장례식’을 치르며 해산되었을 정도로 실패한 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유럽의 68혁명과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계승되는 히피 정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여름」의 주인공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사랑의 여름’ 운동의 여파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사랑의 여름’ 운동은 히피 운동으로서는 완전 연소나 승화되지 못한 운동이지만, 그때의 기이한 열정만큼은 운동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후의 흐름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여름’의 시간성은 바로 현실이라는 제약과 잔존하는 가능성 사이를 길항하는, 길 잃은 순간들처럼 보인다. 가시적으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문화적 기억으로 살아남은 히피 문화처럼 말이다. 따라서 주인공에게 ‘사랑의 여름’ 운동과 자유를 향한 열정이란 대학 교양 수업을 듣는 강의실의 기억과 교수가 알려준 노래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의 노랫말로나 기억될 따름이다. 직접 경험하지도 않았으며 당사자들에게 듣지도 못한 물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들 말이다.  

   이처럼 경험하지도 못한 역사적인 과거와 문화적인 기억이 마치 의인화된 것처럼 한 명의 사람을 통해서 현현한 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가출을 했다는 아버지는 우리에겐 몇 장의 사진으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16쪽) 1967년 ‘사랑의 여름’을 히피에 가까운 모습이 찍힌 사진 뒷면에 적어 놓고서 사라져 버린 아버지는 말 그대로 어떠한 가족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로부터 도피한 자유로운 영혼에 다름 아니다. ‘나’의 삶은 그 이후 아버지의 부재를 오히려 기본값처럼 여기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실패와 마주할 때마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핑계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쓸모란 ‘있음’의 상태가 아니라 ‘없음’의 상태일 때만 유효한 것인지도 몰랐다”.(24쪽) 

   이러한 ‘나’의 아버지에 대한 심리는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감정만이 아니라 오히려 한 시대를 대변했던 자유에 대한 문화적 실험과 그 급진적 실천에 대한 갈증과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여름’은 아버지를 휩쓸어 간 한때의 열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거쳐 ‘나’에게도 간접적인 형태로 이어진 셈이다. 그리고 ‘나’는 부재함으로써 유효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의 쓰임에 대하여 감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감각의 반대급부는 ‘나’ 스스로가 가족이라는 외부 세계에 대하여 떠안고 있는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환기하게 한다. ‘나’ 역시 떠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현실의 제약 너머,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부장이 부산 발령을 내려 하는 상황으로부터 훨훨 떠나버리고 싶은 열정 말이다. 따라서 현실의 제약 앞에서 이미 ‘사랑의 여름’에 대한 갈증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다면, 반대로 아버지의 존재가 돌아온 상황에서는 그러한 갈증이 더욱 명백한 실패의 형태로 현실의 제약 앞에 되돌아온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버지를 통해 극대화된 양면적인 감정이 부풀어 가는 와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 소유의 쓸모없이 버려진 산에 오래전 심어 놓은 장뇌삼을 찾겠다고 ‘나’와 동생, 그 여자친구까지 함께 산을 오르게 된다. “책임감 있는 가장의 역할을 흉내 내듯”(20쪽) 굳이 가족을 데리고 산을 오르는 아버지의 모습과, 여전히 허황된 열정을 쫓듯이 장뇌삼을 찾아 무리하게 산행을 서두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나의 양면적 감정에서 진자운동 중이다. 결과적으로 산행 중에 다리를 다친 ‘나’와 동생네를 두고 장뇌삼을 찾아 홀로 산을 올라간 아버지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에서 아버지를 매개로 하는 삶의 양면성을 두고 고민하던 ‘나’에게 명확한 삶의 선택이 구체화된다. ‘나’는 사라진 아버지를 찾지 않고 동생을 설득하여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 ―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모든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 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남동생에게 하지는 않았다.”(31쪽)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삶의 태도는 우리를 사로잡는 ‘사랑의 여름’이라는 현기증 나는 갈증으로부터 등을 돌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에 있다. 물론 이것을 급진적으로 자신을 던질 수 없는 현대인의 안전 지향이나 소심함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맹렬했던 여름이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32쪽)는 말처럼 아버지로 대변되었던 사랑의 여름은 그 열기를 잃어 가겠지만, 반대로 부재의 유효를 되찾게 될 것이다. 되돌아온 아버지보다 오히려 사라진 아버지가, 그 책임과 의무를 내팽개치는 사라져 버린 자유에 대한 열정이 이따금 되돌아옴으로써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상호 개입하는 방식은 존재하지도 않는 기억, 경험한 적도 없는 먼 과거의 시간이 현실의 제약과 현재의 삶의 순간에 부재함으로써 유효해지는 아이러니다. 물론 ‘사랑의 여름’은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다시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앞서 김연수의 소설에서 언급했던 영원회귀나 예정조화와는 다소 다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속되는 여러 다발적인 시간을 살아가지만, 애써 그 다발 중에서도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한 가닥의 시간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반대로 이 소설은 현실과 현재에 충실하라는 책임과 의무 너머에 사랑의 여름이라는 계절을 포개어 다발화한다. 여름 한복판의 갈증처럼 그 계절과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서 현재를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살아가는 것은 놀라운 시대착오의 한 가지 태도다. 우리는 살아 본 적 없는 시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거나, 그 문화적 영향력 속에서 지나가 버린 삶의 열정을 현재에 포개어 놓는다. 다시 사랑의 여름으로 떠나간 아버지와 달리 ‘나’는 현실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여름을, 그 식어 가는 열기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이중의 시간을 살아가는 셈이다. 허구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소설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이야기, 경험한 적도 없고 내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허구를 통해서 우리의 시간을 다발적인 것으로 재발견한다. 소설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그 모든 이야기는 우리를 여러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맹렬하게, 그 여름의 열기가 드리우도록 말이다.


1) Käte Hamburger: Die Logik der Dichtung. Klett, Stuttgart, 1957, S. 63-78.
2) 프랭크 커모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플롯은 물리적 시간성에서의 탈피를 내포하며, 그래서 ‘현실’이라는 규범으로부터 어느 정도 이탈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어느 면에서나 모든 과거를 ‘어제’라고 생각하는 어린이의 심리 상태”다. 프랭크 커모드, 조초희 옮김,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3, 63쪽. / Frank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Studies in the Theory of Fi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3)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3.
4) 박민정, 「전교생의 사랑」,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110-138쪽.
5) 김은, 「사랑의 여름」, 『사랑의 여름』, 자음과모음, 2023. 9-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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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 관리자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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