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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치유의 나르시시즘: 새로운 연대를 위한 가능성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3,162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소통과 치유의 나르시시즘: 새로운 연대를 위한 가능성



김서영





1. 나르시스 칸타타: 연대의 가능성을 위하여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나르시스 칸타타(Cantate du Narcisse)」에서 나르시스를 사랑하는 님프는,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의 모습에서 “물의 맑은 수의의 싸늘함(le froid du limpide linceul de l’onde)”1)을 느낀다. 귀찮게 구는 님프에게 역정을 내며 나르시스는 “그대는 나의 고독을 온통 더럽혀 놓았어(Vos avez corrompu toute ma solitude).”2)라고 말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서설』3)을 정확히 요약하는 장면이다. 프로이트는 왜 이 논문의 제목을 서설(Einführung/introduction)이라고 지었을까? 나르시시즘에 관련된 본론을 집필하기에 앞서 서론적 해설을 썼다는 말일까? 그러나 프로이트 전집 중 나르시시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개진되는 작품은 이 논문 단 한 편뿐이다. 그렇다면 서설의 의미는, 어떤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라는 키워드를 도입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어떤 내용’이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체계 전체를 뜻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출발하는 중심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을 거치며, <문장 웹진>, ‘비평in문학’ 코너에서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나르시시즘’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나르시스 신화에서 그리고 있는 자기애적 폭주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혁명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제시한 오르페우스와 나르시스의 긍정적 함의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밝히고, 그러한 이론 체계 속에서 정신분석이 오랜 비판들을 돌파할 수 있도록 조력하여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혁명의 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이론적 동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실천적 도구이다. 남근선망, 거세공포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에서 시작된다.
2017년 한국해석학회 제118차 춘계 학술발표회에서 강호숙은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 신학적 고찰: 여성신학적 성서해석과 여성을 위한 설교를 중심으로」4)를 발표했다. 나는 발표자의 주장에 동의하며,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 글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실천적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이론적 기반을 제시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아래 내용은 결코 발표자 또는 질문자의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질의응답 시간에 제시된 문제에 관련하여, 정신분석학 전공자로서 포착할 수 있었던 개념적 활용에 대한 보완적 지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강호숙은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사회문화적 원인에 대해 설명하며, “남성의 나르시시즘은 자신들을 흠 없는 존재로 보존키 위해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책을 전가시켜 왔다.”5)라고 말한다. 이 문장 중 ‘나르시시즘’에 대한 각주에서 그는 “원래 이 용어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여성성의 특징으로 규정한 것이다.”6)라고 부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의 코멘트는 정신분석학에서 나르시시즘은 여성보다는 남성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그것을 여성성의 특징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 전공자가 답해야 할 듯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나서지 않았다. 혹시라도, 발표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마음과 달리 비판적 뉘앙스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중심으로, 나르시시즘 개념을 정신분석학 속에서 해방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폴 발레리, 「나르시스 칸타타」, 『발레리 선집』, 박은수 옮김, 을유문화사, 137쪽.
2) 같은 책, 136쪽.
3) Freud, S. “On Narcissism: An Introduction”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J. Strachey (trans.), 1914, London: The Hogarth Press, pp. 73~102. 이후 인용은 이 책의 쪽수이다.
4) 강호숙 「보수교단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 신학적 고찰: 여성신학적 성서해석과 여성을 위한 설교를 중심으로」, 『해석과 주석 그리고 번역』, 2017년 한국해석학회 제118차 춘계 학술발표회 프로시딩, 29~44쪽.
5) 같은 글, 34쪽.
6) 같은 글, 34쪽.



2. 물의 맑은 수의(壽衣)의 싸늘함: 고립, 단절, 정신병


나르시시즘은 여성성과 관련되는가 아니면 남성성과 관련되는가?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여성성의 특징으로도 규정했고, 동시에 남성성의 특징과도 관련지어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외부 대상보다는 자신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는 나르시시즘적 유형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자신을 모델로 사랑 대상을 선택하는 남성과 관련하여 ‘나르시시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프로이트는 동성애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단순화된 단안적 시각은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심리학 일반에 만연된 고착적 사고였으며, 동성애는 장애로 인식되었다.7)
그러나 이 부분들은 모두 나르시시즘을 설명하는 지엽적 항목들이며, 나르시시즘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병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론적 필요성이 제기된 개념이다. 「나르시시즘 서설」에서도 시작과 끝, 본문의 중심 부분은 모두 정신병과 연관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유토피아적 이미지나 신화적 장면이 아니며, 자기애적인 이기심이나 자신에 대한 관심도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나르시시즘은 1차적으로 ‘정신병’의 구조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한 인간을 물의 맑은 수의에 감싸 싸늘한 공간에 고립시키는 기제를 이르는 개념이다. 외부와의 소통이 전무하고, 한 줄기 빛도 새어들지 않는 마음의 폐허, 그 정신병적 고립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에너지는 내부에 침잠되고, 나가는 이도 들어오는 이도 없이 죽음과 같은 폐허가 끝없이 이어진다.
「나르시시즘 서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가 1차적 나르시시즘과 2차적 나르시시즘8)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발성 치매(크레펠린)나 조현병(블로일러)을 리비도 가설로 설명하려 했을 때 그 이론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9) 프로이트는 이 환자들에게서 과대망상과 무관심이라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관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이다. 그들은 “사람이나 사물 등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그들이 “외부 세계의 사람과 사물로부터 리비도를 회수한 듯 보인다.”10)라고 설명한다. 어떤 소통도,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은 채 한기 어린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신병 병례인 슈레버 사례 분석을 통해 프로이트는 그러한 폐허 속에서 환자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찾은 마지막 수단이 바로 망상이라고 말한다. 외부와 단절된 폐허 속에서는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없던 곳에 이야기를 쓰는 불완전한 방식이 바로 환자의 망상이다. 그것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 사연을 생성할 수 없기에, 재료 없이 혼자 이야기를 닮은 구조를 얽어내는 행위이다.
프로이트는 강박증이나 히스테리와는 구분되는 정신병의 이 특성 ― 리비도의 회수 ― 에 주목한다. 리비도의 회수란 외부 에너지를 내부로 전회 시킨 상태라기보다는, 근원적인 에너지 자체가 내부에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과대망상으로 표현되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병적 상태가 아니라 근원적인 기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적 에너지의 일부가 외부 대상에 부착될 때 인간은 이 근원적 나르시시즘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다시 이상한 질문을 제기한다. 과대망상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낯선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의 전능성과 같은 마술적 믿음은 어린아이나 원시부족에게서 관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병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성장과 발달의 일상적 단계에 안배될 수 있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때 프로이트가 직면한 문제는 이와 같은 설명이 그의 이론적 구도와 상치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아와 성을 구분하고 자아 편에 자기보존 충동을,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편에 리비도를 안배했다. 그런데 자아의 기원에 근원적 자기 사랑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아와 성을 대극 구도로 분리할 수 없게 된다. 나르시시즘 가설에 의해 프로이트는 자아와 성, 자기보존과 리비도가 한편에 존재하는 이론적 혼돈을 대면했다. 프로이트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기존의 이원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리비도가 내부에 고인 채 절멸의 상태로 치닫는 고립의 구조를 치유 이론으로 돌파하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즘 서설」은 프로이트가 이 두 가지 문제들을 풀어 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7) 1973년에 출간된 DSM(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제3판에 와서야 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된다.
8)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1차적 나르시시즘’으로, ‘일반적인 나르시시즘’은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번역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아메바와 위족으로 구분하는데(프로이트, 1914, 75쪽), 원래 존재하던 에너지 자체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에 관련되고, 대상에 부착되었다가 다시 회수한 에너지는 일반적/일상적/2차적 나르시시즘에 관련된다.
9) 프로이트, 1914, 74쪽.
10) 같은 글, 74쪽.



3. 정신병의 구조 대 정신병적 구조: 정신병적 구조에 대한 이의 제기


프로이트는 삶에 대한 의지나 감동적인 치유론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환자가 칠흑 같은 내부의 어둠을 뚫고 외부로 손을 내밀게 되는 계기를 관찰해 낸다. 이는 두 번째 문제에 관련된 부분인데,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여기에 한정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그 후 6년 동안 이론적 교착상태에 관련된 첫 번째 문제에 대해 고민한 후 1920년이 되어서야 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하는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라는 두 번째 이원론을 뜻한다. 즉, 자아와 성의 대립에서 삶과 죽음의 대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라플랑시(Jean Laplanche)는 『삶과 죽음의 정신분석학적 함의(Life and Death in Psychoanalysis)』11)에서 나르시시즘을 중심으로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의 구도로 재편되는 프로이트의 이론적 체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와, 정신병적 고립에 대해 프로이트는 ‘사랑’이라는 유사-해답을 제시한다. 물론 이 역시,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나르시시즘의 연장선상에서 개인을 외부 대상으로 이끄는 필연적 우연의 계기를 뜻한다. 나르시시즘적 여성 유형에서도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만은 그가 외부 대상일지라도 자신의 일부로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프로이트는 이를 부모의 사랑 일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부모의 사랑이란 매우 고귀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 기반은 매우 유치한데, 그것은 부모가 가진 나르시시즘이 대상 사랑으로 전환된 것”12)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이미지를 대상으로 그것과 동일시하는 과정 역시 그 기반은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마지막 부분은 내면의 이상을 가리키는 자아 이상에 대한 논의로 구성된다. 1923년에 자아 이상은 초자아로 개념화되어 자아, 이드, 초자아의 구도를 형성하게 되지만, 서설의 차원인 이 논문에서는 나르시시즘의 연장선상에서 자아와 외부의 소통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되며, 이 기제를 운용하는 정신 기관은 양심으로 명명된다. 프로이트는 심지어 양심의 목소리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정신병의 망상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나타난 문제 중 하나는 정신병과 신경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양심의 목소리와 정신병의 환청을 동일한 기제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초자아가 이론화되는 지점에 오면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지만13), 진단의 구분에 대해서는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로이트는 자아 이상에 대한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구분하여 전자를 논문의 이전 부분과 연결시키고 후자를 초자아의 전신으로 준비하는데, 이 구분 역시 리비도의 회수에 의해 고립되는 정신병의 구도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할 때도 프로이트는, 정신병에 대한 연구가 나르시시즘에 접근할 수 있는 중심적 통로라고 말하며, 기질적인 질병이나 건강염려증 등의 사례를 통해 에너지가 정체되는 이유를 추적하고 있지만, 그는 왜 그러한 고립이 초래되었으며, 그것이 신경증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신경증과 다른 어떤 치유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증의 구조와 정신병의 구조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는 세상에 첫발을 내딛지 못한 상태를 정신병으로 정의하며, 이 구조는 삶 속에서 변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신병의 구조를 가졌으나 발현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신경증의 구조에서 정신병의 구조로, 또는 그 역으로 바뀌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번 세상의 어긋남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정신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정신병적 고립의 상태, 즉 정신병의 구조로 정신 구도가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늑대 인간 사례 분석에 관련된 진단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분석가들은 동일인을 신경증으로 진단하기도 하고 정신병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경계선’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모호함에서 나오게 된 개념이다.
이를 감안하고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 본문을 읽으면, 그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정신병의 구조는 ‘정신병의 구조’와 더불어 신경증자의 ‘정신병적 구조’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상태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논문에서 나르시시즘적 상태란 소통과 이해가 차단된 내적 고립 자체를 일컫는 듯하다. 그렇다면 편견과 차별이라는 고착된 사고는 이와 같은 상태의 전형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자만과 교만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과대망상적 상태들이다. 이는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유아적 고립 상태를 뜻한다. 정신병의 구조에서 망상이 회복을 위한 노력을 뜻한다면, 정신병적 구조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회수는 소통과 배려를 배우지 못한 이들의 자기 고립을 위한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며, 외적 사물과 교감하지 않는다. 정신병의 구조에서와 달리 정신병적 구조를 가진 이들의 경우, 그러한 고립은 선택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어른들로서 과대망상적 믿음 속에서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11) Laplanche, J. Life & Death in Psychoanalysis, 1985,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2) 프로이트, 1914, 91쪽.
13) 이드가 외부 세계와 맞닿는 면이 자아로 분화되며, 외부 대상과의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의 부분이 초자아로 명명된다. 즉 자아 이상이 내적 에너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나르시시즘 서설」의 설명과 달리, 이후 초자아는 외적 대상과의 조우 이후에 형성되는 작인으로 이론화된다.



4. 치유를 향한 여정: 소통의 나르시시즘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제시한 ‘사랑’이라는 유사-해답 역시 정신병의 구조보다는 정신병적 구조에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병적 구조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치유책을 제시하는데, 그가 내부와 외부를 잇는 상위 기제로 설명하는 이 치유책은 ‘승화’이다. 그는 승화를 ‘비상구’14)라고 부른다. 승화란 에너지를 운송하는 통로의 질적 변환을 의미하며, 프로이트의 설명대로, “억압과 관련되지 않은”15) 기제이다. 승화는 고립된 내부가 외부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신비 자체를 설명한다. 「나르시시즘 서설」에서 프로이트는, 눈앞의 이익과 관심이 아닌 그 너머의 목표로 전진하는 마음의 상태를 은자 또는 수도사의 사례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병리적이라 부를 수 없으며, 그들은 나르시시즘적 성향에 의한 대상 선택에 굴복하지 않으며 “신성, 자연, 생명에 대해 더욱 고양된 관심”16)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라캉은 스물세 번째 세미나에서 프로이트가 신경증에 대해 제시한 승화라는 답을 정신병의 구조에 관련해서도 적용했다. 그가 정신병적 승화 기제로 고안한 개념은 ‘생톰(sinthome)’이다. 생톰에 의해 정신병의 구조를 가진 이들도 폐허와 같은 내적 상태를 벗어나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경우를 제시한다. 라캉에 의하면 조이스는 정신병적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폐허 속에서 삶을 소진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생톰이라는 고양된 소통 방식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생톰은 ‘글’이었다.
「나르시시즘 서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프로이트가 소통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의 정신분석학 개념들이 늘 그렇듯이, 그것은 인간 정신의 숭고함과 위대함보다는 관찰에 의해 획득한 삶의 전제와 관련된다. 그가 원시부족이나 아이들에게서 나르시시즘적 현상이 자연스럽게 관찰된다고 말한 부분은 인간이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리비도라는, 자아의 힘과 구분되는 에너지가 외부와의 관련성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라는 나르시시즘적 에너지가 자아 속에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2차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병의 경우 환자는 1차적 에너지 속에 갇히게 된다. 신경증자의 경우, 그 에너지는 외부 세계의 사람과 사물에 연계되며 확장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에너지가 확장되는 가장 기본적인 기제로 다시 나르시시즘적 대상 선택이라는 과정을 설명했다. 자신의 닮은꼴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경험이 자아의 확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캉은 어머니라는 최초 대상이 처음에는 아이의 내면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거울 단계에 관련된 논문을 통해, 그러한 구분이 명확해지는 지점에서 자아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어떻게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 내가 모르는 것과 관계를 맺겠는가? 모든 관계와 소통은 당연히 내 리비도가 부착된 부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내 리비도가 부착될 만한 이유를 가진 대상과만 소통한다면, 그 세상의 모습은 「나르시시즘 서설」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정신병적 고립과 폐허에 닮아 있을 것이다. 그런 구조 속에서는 나와 무관한 대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시선이 온통 나와 닮은 것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승화란 그 너머로 나아가 타자의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시선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라캉은 성인이 되기 위해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와 닮은 세상이 파괴되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프로이트의 ‘거세’ 개념이 뜻하는 바라고 설명한다. 거세는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뜻하며,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이르러, 거세 너머에서 승화된 나르시시즘의 상태를 가정해 보기도 했다. 그는 『문명 속의 불쾌(Das Unbehagen in der Kulture)』에서 이를 “대양적 감성(ozeanisches Gefühl/oceanic feeling)”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교감하고 나르시시즘적 리비도가 에로스로 확장되는 이상적 상태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무너지고,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똑같이 소중해지는 상태,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상태, 그 이상향이 승화된 나르시시즘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거세라는 결단이다. 내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 내가 사수해야 하는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타인의 손을 잡을 수 없다. 거세되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정신병적 고립을 초래한다면, 거세된 나르시시즘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후자는 한 번도 야단맞지 않은 어른들, 아이로 남은 어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다.
정신분석은 소통하지 않는 이들, 과대망상에 갇힌 나르시시즘적 유형들과의 전투에서 그들이 기를 쓰고 사수하는 마지막 보루를 공격하는 유용한 무기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정신분석이 가진 남근중심주의적 사고를 파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늘 그랬듯이, 만약 정신분석의 작업이 충동에 대한 더욱 적절한 가설을 제안할 수 있게 된다면 기존의 가설을 포기할 것이다.”17) 「나르시시즘 서설」에 의해 정신분석의 기본 축이 변경된다는 것 역시 그러한 결단에 해당된다. 프로이트는 “관찰만이 모든 것의 근거이다.”18)라고 말한다.
모든 멈추어진 것들과 모든 고착된 사고에 저항한다는 원칙이 없다면, 인간의 치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타 영역과 연대할 수 있는 정신분석의 가능성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타 영역들과의 연대 속에서 정신분석이 소통과 치유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는 날 우리는 함께 나르시스의 고독을 더럽힐 것이다.

14) 프로이트, 1914, 95쪽.
15) 같은 글, 95쪽.
16) 같은 글, 80쪽.
17) 같은 글, 79쪽.
18) 같은 글, 77쪽.














정은경
작가소개 / 김서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정신분석학자. 저서에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프로이트의 환자들: 정신분석을 낳은 150가지 사례 이야기』, 『내 무의식의 방: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무의식에 비친 나를 찾아서』, 『프로이트의 편지: 새로운 삶을 위한 동일시 이야기』가 있고, 옮긴 책으로 『라캉 읽기』, 『에크리 읽기: 문자 그대로의 라캉』, 『시차적 관점』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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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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