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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역설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3,983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번역의 역설

- 번역을 둘러싼 네 가지 오해



조 재 룡





어머니의 혀에 파묻혀서 고립할지, 순수언어로
탈피해서 고립할지 양자택일하는 길뿐인가요? 정말 그런가요?
사시키 아타루1)


*


번역은 ‘지(知)’를 교류하게 만드는 ‘문(文)’의 ‘활동’이다. 그러니까 인류의 지식과 사유는 번역을 통해, 번역 안에서 어디론가 이동하고 어느 지점들을 횡단하는 것이다. 번역은 ‘지’를 ‘문’의 순환을 통해 ‘다시’ 위치시킨다. 번역은 이렇게 언어와 사유를 변형시킨다. 이 양자의 변형은 동시에 일어난다. 번역은 언어와 사유가 언어와 사유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이러한 순간들을 우리는 ‘고안(invention)’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번역은 고안의 산물들을 현재에 위치시키는 과정이다. 번역에 의해, 번역 안에서 일어나는 이 고안의 순간들은 그러나 자주 감추어진다. 번역은,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차라리 ‘이론의 공화국’에서, 그러니까 ‘추론의 세계’2)에서, 자주 제 흔적을 지워내야 하는 운명에 사로잡혀 기이한 방식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번역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흔적을 지워내려는 이데올로기에 번역이 포섭되는 순간은, 한편으로 번역이 자신의 특성을 실토하거나 최소한 고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역설이 또다시 역설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역은 역설이라는 이름하에, 역설로 인해 시련을 겪고, 바로 이런 시련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번역에 ‘부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시련이다. 번역은 역설의 산물이며, 오해에 사로잡히는 고유한 역설적 성질로 인해 자신의 특성을 드러낸다.

1) 사시키 아타루,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라라』(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6, 71쪽.
2) 이 글은 이론을 다룬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오롯이 추론에 의지한다. 번역을 다룬 기존의 글들, 특히 『번역의 유령들』과 『번역하는 문장들』(2010, 2016, 문학과지성사)에 묶인 글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1. 번역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역의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가? 번역가가 번역에서 감행하는 저마다의 선택은 자주 ‘론’, 즉 이론이라는 가면을 쓰고서 표상된다. 번역 방법은 사실 직역과 의역이라는 가장 손쉬운 형태로 설명된다. 직역과 의역, 단순하고 견고한 이 이분법은 실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매우 특수한 방식을 훌륭히 대처하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직역과 의역이 빚어낸 오해는 번역의 역설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든 것은 벌써 알려져 있다. 의역은 ‘의미’ 중심의 번역이요, 직역은 ‘형식’을 중시한 번역이며, 번역가라면 이 두 방법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공설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너무나도 자주 들어 왔다. 그러니까 바다가 갈라진다. 왼편으로 펼쳐진 ‘직역’의 물결 위로 형식, 문자, 구조, 문학성, 충실성, 딱딱함, 이국화, 들이대기, 이타성, 낯섦 등이 떠돌아다닌다. 맞은편에는 ‘의역’의 물결이 덜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위용 속에서 넘실거린다. 의미, 정신, 내용, 가독성, 창조성, 유려함, 자국화, 길들이기, 정체성, 친숙함이 제 맞은편의 물결들에 맞서고, 대조의 훌륭한 짝을 이루면서 나란히 평행선을 긋는다.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논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런데 이 ‘이분법’은 왜 오류가 아니라 역설일까? 번역이 경험적이라면 이 이분법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번역가인 당신은 지금 원문을 읽고 있다. 당신은 원문을 읽어 보기도 전에 어떻게 번역할지 미리 머릿속에 떠올리는 방법론의 소유자란 말인가? 바꿔 말해 보자. 나는 실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통해 번역을 다룬 이론서들을 섭렵했고, 그래서 나름 ‘의역’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자, 그러다가 뼛속까지 의역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급기야 이런 신념을 갖고 친구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번역서에 대한 비난이 요란스레 쏟아지고 있다네. 원인의 대부분인 이유를 내 풀이해 말하자면, 원문의 저 ‘뜻’을 제대로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해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네. 사실을 말하자면, 번역에서 형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차라리 내 자네에게만 건네는 말이지만, 내용을 옳게 전달하는 게 좀 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핵심, 요지 뭐 그렇다는 걸 사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친절한 길잡이도 되어야 하고, 그렇게 말이지, 번역가가 가독성을 확보해야 한단 말이지. 원문이 그다지 뭐 유별나게 친절한 것이 아니라면, 원문에 없는 무언가를 군데군데 덧붙이고 또 뜻을 풀어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바꾸면서 저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괴물 같은 원문을 길들여야 한단 말이지.


그는 번역이 비판받는 이유를 번역가들이 고지식하게 원문을 그대로 옮기려 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마구 덧붙이는 번역을 경계하면서도 조금 풀어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번역을 강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가가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집착하기보다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야 하며, 고지식하게 그대로 문장을 옮기려는 시도는 자살에 가깝다며, 글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게 훨씬 중요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번역은 어차피 이해이며 해석이라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번역은 일종의 저울질이라며, 등가(等價)를 잘 따져 낯선 어휘 등을 우리 것으로 교체하면 번역으로 인해 우리말이 오염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쯧쯧. 그와 생각이 다른, 매한가지로 번역가인 친구가 이 의역주의자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번역서 비판으로 참 시끄럽네. 원인은 대부분인 원문을 정확히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네. 번역에서 의미보다는 형식이 핵심이지. 독자의 이해를 위한 가독성보다 충실성 확보가 더 중요하다네. 원문이 난해하다면 난해한 그대로 옮겨야 한다네. 덧붙이거나 풀어 번역하기보다 원문을 들이대는 번역을 해야 한단 말이지.


그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제 견해를 보태면서, 번역서가 난해한 것은 원문이 난해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뜻’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형식’이 번역에서는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독자들 눈치를 보며 가독성이라는 이름으로 원문을 쉽게 풀어 소개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게 오히려 독자를 바보로 만드는, 그러니까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 번역가는 번역에서 무언가를 덧붙이는 행위는 번역이 아니라 차라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는 항상 이해한다고 믿는 것을 이해할 뿐, 이해의 기준은 애매하다고 덧붙이며 제 말을 매조진다. 당신이라면 이 둘 중 선뜻 어느 한편을 택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의역주의자도, 그의 친구 직역주의자도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공히 동의한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번역의 역설 중 하나가 여기서 탄생한다.
동상이몽. 다만 ‘의미’에 충실하자고 주장하는 전자에게 후자는 ‘형식’의 충실성과 그 필연성을 반복해서 강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충실성? 무엇에, 누구에게 충실하다는 말인가? 저자의 의도에 충실했다고 말하는 번역가와 원문의 리듬에 충실했다고 말하는 번역가는 이렇게 충실성을 번역의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코에도 걸고 귀에도 건다. 가독성도 마찬가지이다. 술술 읽힌다는 것은 대관절 무엇을 말하는가? 가독성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단일하게 울려 나왔다거나, 가독성의 기준이 명료하게 제시되었다는 말도 우리는 아직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번역은 선험성의 산물이 아니다. 번역의 이름에 ‘학’이 붙는 것도 그러니 일종의 역설이다. 제가 주장하는 방식이 진리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낱말에 하나의 뜻을 고정시키자고 덤비는 무모한 설득과도 같다. 번역의 방법론은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니다. 텍스트의 ‘성격’과 ‘특성’이 번역의 방법을 매번, 시시각각, 궁리하게 할 뿐이다. 번역에 원론, 원칙, 기준은 없다. 오로지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것, 텍스트가 생산해 내는 것, 바로 이 특수하고 고유한 언어의 작용을 정확하게 포착할 능력이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자기가 포착한 원문의 이 특수한 것들을, 자기 언어로 바꾸어낼 고유한 능력이, 다만 번역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뿐이다.
하품을 할 만한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여긴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번역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는 수많은 수식어들과 주장들을 일시에 잠재우려면 이렇게 말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번역의 유토피아는 없으며, 번역에 유토피아를 마련하려 해도 곤란하다. 번역은 오로지 번역이 처한 상황과 텍스트의 성격, 사회적 요청과 환경에 의해,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유토피아인 주장을 자주 디스토피아의 산물로 대치해 버린다. 또한 번역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역설을 추진한다, 그러니까 번역은 우리가 경험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이론에게 뿌리는 바이러스인 것이다. 이 이분법의 역설은 물론 또 다른 역설을 낳는다. 텍스트의 종류를 나누어 유형별로 부합하는 번역론을 상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역설의 핵심이다. 시는 형식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산문은 뜻을 살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도 된다는 말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들었을 것이다. 이분법의 이데올로기와 결합을 시도하는 또 다른 이분법들의 자기복제는 끝이 없다. 직역-시-형식, 의역-산문-내용이라나, 이 얼마나 멋진 아류인가? 이분법은 두 가지 논리 중 하나를 배제하면서만 살아남을 뿐이다. 텍스트는 그러니 무엇인가? 어쩌면 그 성질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변주되고, 그 특성 역시 바로 그 수만큼이나 가변적인 것이 바로 텍스트 아닌가? 번역하는 방법은 텍스트의 다양한 성질과 특성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2. 번역은 ‘하나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이 문장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방금 번역을 둘러싼 오해 중 가장 대표적인 오해 하나를 기술했다고 한다면? 여기서 복합적면서도 복잡한 사유를 촉발시키는 것은 ‘하나의 언어’나 ‘다른 나라의 언어’, 그리고 ‘옮기다’이다.
하나의 언어, 그러니까 한국어는 고정된 실체인가? 그럴 리가! ‘모국어(mother tongue)’는 ‘기원’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모국어는 항상 변화하는 모국어일 뿐이다. 언문일치의 전형처럼 소개되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고작해야 100년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오늘날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허경진의 번역서를 읽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근대 서구의 번역은 신조어의 탄생은 물론 문장의 구조까지 변모를 겪는 사건이었지만, 방대한 외국 서적을 대면할 어휘가 없었던 시절과 그 상황을 지금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번역가들이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고자 엄청난 변화를 감내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사실도 체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국어는 번역의 산물이다. 서구라고 예외는 아니다. 모국어는 오로지 ‘오염된’ 상태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국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언어가 단순한 문법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 문법을 배운다. 쏟아지는 아이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말의 원리와 규칙, 용례를 설명해 주고 더러 사전을 참조하여 정리하는 기회를 갖는다. 문법은 비유하자면, 언어에서 최소한의 윤리, 즉 법에 해당된다. 수많은 현상 뒤에 자리한 법칙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법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것 자체로 옳거나 투명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법칙은 그저 모종의 구조를 갖는 명제들의 집합일 뿐이다. 법칙과 예외라는 이분법을 끌고 와 예외가 법칙의 미지일 뿐이라며 법칙의 불변성을 주장하면, 번역의 역설은 하나마나 한 공설이 된다. 언어라는 무한의 조합, 의미 생성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예외나 법칙의 이분법은 잘 구동하지 않거나 별반 소용이 없다.
번역가의 왼손이라 할 저 사전은 또 무엇인가? 사전은 풀어쓰기 전의 물감들과도 같은, 낱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미를 모아 정리하고 담아낸, 그러니까 리스트일 뿐이다. 텍스트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 문장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낱말들의 ‘집합’이 아니라 ‘조합’이다. 그러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건, 어떤 언어로건 텍스트는 발화의 상태, 즉 서로가 서로에게 엉켜들어 새로운 색깔을 부여받고, 자기 외의 다른 색채들과의 관계에 녹아들어 오롯이 제 고유성을 부여받는, 그러니까 풀려 나와 팔레트 위에 뒤섞인 물감들의 덩어리처럼 존재한다. 언어의 기원이, 의미의 실체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언어의 작동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한다. 사전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낱말들을 꺼내 번역가는 그것을 통사의 순서대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풀어 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① My friend is terrible, because he killed his father.
② My friend is terrible, because he speaks five languages fluently.


‘내 친구’는 과연 ‘끔찍한가’, ’끝내주는가’? ‘terrible’의 ‘의미값’은 이 ‘terrible’을 둘러싼, 그러니까 ‘terrible’을 벗어난 다른 낱말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정되지 않는다. 다른 낱말들이 ‘terrible’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 구사의 논리, 그러니까 각각의 낱말, 구, 문장, 심지어 언술의 ‘의미값’은 결국 각각의 낱말, 구, 문장, 심지어 언술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낱말들, 또 다른 구들, 또 다른 문장들, 또 다른 언술들이 부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발화되기 전 그 어떤 낱말도 자기 값을, 미리,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며, 사전은 그 가능성들을 정리한 최소한의 목록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유독 번역에서 역설처럼 작용한다. 다시 말하자. 사전은 최소한의 목록일 뿐이며, 번역가의 선택을 오롯이 보장하는 진리의 출처가 아니다. 사전을 참조하지 말라거나 신뢰하지 말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법을 정초한다는 것은, 귀납적으로 그러모은 언어적 경험과 그 지식을 연역적으로 분석하고, 최소한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그렇겠지만, 원리와 실행은 일대일로, 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삐걱거린다. 각각의 텍스트는 고유한 각각의 ‘문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번역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발생할 수도 없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와 포개지며,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의 ‘작용’과, ‘다른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작용’을 우리는 번역이라고 부른다. 이 ‘다른 언어’의 작용은 ‘하나의 언어’ 즉, 우리가 원문이라 부르는 텍스트의 작용을 탐색하게 만든다. 또한 동시에, ‘다른 언어’의 작용은 ‘하나의 언어’와 포개짐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자기가 믿고 있는 자신에서 이탈한다. 번역은 이렇게 ‘작가의 언어’와 ‘번역가의 언어’가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작업이다. 이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이 둘은 공히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원문은 번역문을 통해 자기 고유의 특수성을 드러내며, 번역문은 원문을 통해 생성 중인 상태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번역을 ‘탈중심’, 혹은 ‘중심이탈(décentre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번역은, 말을 옮기면서, 동시에 말을 만든다. 원문에 기대어, 즉 타자의 언어로. 그래서 번역은 개념을 옮기면서, 동시에 개념을 궁굴리고 궁굴리는 언어를 고안한다. 원문의 사유에 기대어, 즉 타자의 개념으로. 번역가가 번역을 통해 마주하게 된 말이나 개념은 번역가의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번역은 타자의 것을 들여다보며, 자아의 저 아래를 주시하고 훑는 일과 같다고 해야 할까? 번역은 자주 문법이 하지 말라는 짓을 감행하며, 간혹 할 수 없는 일을 가능성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반복하자. 번역은 원문을 깨트린다. 또한 원문은 번역을 통해 비로소 원문임을 드러낸다.
번역은 모국어를 만든다. 모국어는 번역 이전이나 이후에도 고정된 모국어인 적이 없다. 아니다. 모국어는 없다. 번역에 의해 성장이 시험의 반열에 오른 언어가 있을 뿐이다. 모든 언어는 다양한 형태, 다양한 종류의 번역으로 인해 닳고 닳아빠진, 지금-여기의 언어인 것이다. 고정불변의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는 쓰다가 폐기한 말들의 집합소이며, 타자에서 옮겨온 더럽고 오염된 낱말들이 우글거리는 병균의 저장고이자 그걸 닦아 쓰는 재활용 창고이며, 타자가 과시한 낱말들을 요란스레 흔들어대는 몸짓의 공연장이다. 번역은 나의 언어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려 타자의 말과 대적하는 장소이다. 번역은 모국어의 ‘방언성’과 모국어의 ‘외국어성’이 동시에 분기를 하며 서로 다툼을 벌이고, 화해를 촉구하면서, 오로지 활동의 상태로만 고지되는 지금-여기,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종의 사태를 빚어낼 뿐이다. 번역은 내가 아직 모르는 내 언어의 이질성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 상투성에서 내가 해방될 실험이다. 번역은 언어를 궁리하는 하나의 잠정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3. 번역은 창의적인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번역에는 정답이 없다. 번역의 역설은 번역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발생한다. 번역은 ‘돌이킬 수 없음’을 특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원문은 하나인데 번역은 여럿인 것이다. 원문은 노후하지 않는데 번역은 노후한다. 좁혀 이야기해 보자. 당신이 동일한 텍스트를 다시 번역한다 해도 당신에게는 동일한 결과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카뮈의 『이방인』을 번역하고 있다. 이 기이한 소설의 첫 문장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자판으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라고 공들여 옮긴다. 그만 키를 잘못 눌렀다. 번역한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했더라? 짜증을 내며, 당신은 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고작 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면 되리라. 기억을 되살리고, 짜증을 물릴 자그마한 용기를 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이 당신의 손에서 나왔다. 실수는 한 번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이번엔 자판 위에 커피를 쏟았다. 어찌어찌해서 파일이 또 지워졌다. 당신은 다시 번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문장의 쉼표, 마침표, 어법 등이 유난히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혹은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라고 번역한다. ‘비교적’ 간단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번역은 당신에게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주 단순한 낱말, 가령, 우리가 단어-문장이라고 부르는 ‘no’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그런가? 이 낱말이 처한 맥락과 상황, 그걸 부린 작가 고유의 문체와 텍스트의 특성에 따라, 이 ‘no’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 ‘틀렸다’, ‘아니’, ‘아닌걸’, ‘웬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심지어 ‘천만의 말씀’도 ‘no’의 번역어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I’m sorry.’를 경우에 따라 ’내 이름은 쏘리입니다.’라고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원문은 결국 번역을 만나 원문이 되거나, 원문의 도움으로 침묵에서 풀려 나온다. 즉 원문은 번역을 통해 제 가치를 드러내거나, 원문이 모국어인 독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사안들을 번역은 문제로 전환해 내는 것이다.
이처럼 번역의 역설은 번역이 ‘창의적’이라는 데에 있다. 번역가는 창작적 재능을 죽인 창의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창작 이상의 일을 한다. 번역은 창작이 목도하지 못할, 다다르지 못한 고유한 일, 창작과는 다른 창의적인 일을 수행한다. 번역의 역설은 바로 이 ‘옮김’의 창의성에도 있다. 그렇다. 번역은 무언가를 옮기는 일이며, 그렇게 말한다. 영어 ‘translation’이나 프랑스어 ‘traduction’은 ‘어딘가를 통과해서(즉 ‘trans’)’ 이르는 작용(즉 ‘tion’)을 뜻한다. 어딘가를 통과하며 어딘가에 이르는 일, 이와 같은 작업을 우리는 ‘옮기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옮기는’ 일이 어떻게 창의적 특성을 지니는가. 번역이라는 이름의 조작과 변형, 첨삭과 왜곡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번역에서 ‘옮기다’와 ‘창의적이다’는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원문의 문장들, 그 운용에 정확히 호응하는 번역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벌써 ‘창의적인’ 재능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은 필연적으로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번역의 역설이 있다. 번역의 창의성은, 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덕지덕지 덧붙여 유려한 문장을 만들어낸다거나, 번역을 그야말로 창작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조작을 감행하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프랑스어나 독일어처럼, 한국어와는 상당히 다른 통사적 구조와 매우 상이한 어법, 한국어에 비추어 매우 낯선 어휘들을 최대한 정확히 살려내려는 시도 자체가 벌써 창의적인 재능과 두 언어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 고안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번역의 아주 간단하면서도 기초적인 원리, 즉 그냥 쓰인 대로 원문을 옮긴다는 원리는 실제 번역에서는 자주 역설을 결부시킨다. 원문을 단순하게 그대로 옮긴다는 말은 사실 간단하지도 않으며, 기초적인 번역의 원리도 아닌 것이다. 가장 난해한 작업, 가장 창의적인 작업인 것이다. 번역의 창의성이나 번역가의 창의적 재능은 역설로만 설명된다. 이와 반대로, 원문을 유려하게 풀어낸 번역, 원문에 무언가를 덧붙인 번역, 원문의 고유성을 우리 것으로 과감히 바꾸어버린 번역, 원문의 이해를 고집하며 난해한 어휘나 구문을 평범하게 대처한 번역, 복문을 단문으로 바꾸어버린 번역, 그러니까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일에 실패한 번역을 우리는 창의적인 번역이라고 부르는 대신, ‘지워내는 번역’, ‘기계적인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기계적인 번역?
‘지워내는 번역’을 ‘기계적인 번역’이라 부르는 까닭은, 이러한 번역은 결코 한국어를 시련에 빠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전한 번역, 제거된 번역, 거세된 번역, 한국어의 통념을 확인하고는 무사히 빠져나오는 번역이다. 무언가를 새로이 덧붙였고, 원문에 부재하는 수식들로 한국어의 역량을 과시하며 몹시 치장을 한 번역이 오히려 기계적인 번역이며, 아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모험을 하지 않는 번역인 것이다. 복잡성과 단순성, 미지와 통념, 고안과 반복의 이분법이 여기서 산산이 깨지며 단숨에 역전되고 만다. 또 하나의 번역의 역설. 창의적인 번역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원문을 지워버리거나 무언가를 원문에 추가하지 않는 번역이 가장 창의적이다. 창의적인 번역은 타자의 말과 내 말을 가장 밀착시키려 시도하는 번역이며, 내 언어로 원문의 언어를 최대한 포개어 보려고 고심하는 번역이다. 그렇게 이 둘의 깨짐을 경험하게 하는 번역이며, 깨진 조각을 다시 최대한 공들여 이어붙이며 원형을 그려 보는 번역이다. 창의적인 번역은 경험적으로 말해, 원문을 그대로 옮기려 시도한 번역, 그 과정에서 원문의 특수성을 한 구절 한 구절 살려내려 애쓰는 번역, 그렇게 자기 언어를 타자의 언어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밀착시키는 일을 성사시키고, 결국 자기 언어의 한계와 통념을 뒤흔드는 과정을 경험의 지평 위로 끌어내는 번역이다. 창의적인 번역은 타자의 언어와 내 언어를 오로지 이와 같은 방식에 의지해서만 돌보고, 가꾸고, 지펴낸다. 타자의 언어로 모국어의 중심을 이탈시키는 번역은 실로 가장 어려운 번역이다. 이러한 번역은 그러나, 그럼에도, 턱없이 원문에 기대어 내 말의 운용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번역이다.
창의적인 번역은 가독성과 난해성의 더미에 묻혀 어쩌면 대중에게 가장 인정받기 어려운 번역이면서, 매번 새로운 독서의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번역이다. 독서의 일회성을 휘발시키지 않고, 작품을 보존하는 번역, 작품을 고갈시키지 않는 번역이다. 창의적인 번역은 작품을 이해의 지평 뒤로 쉽사리 넘기며 소비하는 대신, 작품의 영원회귀를 실현한다. 그러니까 작품이 매 순간 부활하고 생명을 얻는 데 관여하며, 작품의 끊이지 않는 활동에 끊임없이 불을 지핀다. 그렇다. 여기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타자의 언어를 존중하는 번역, 타자의 언어를 정확히 파악하는 번역, 타자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번역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사리 나의 언어를 방치하고 훼손한 번역, 원문을 베끼다시피 한 모사(模寫)와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최대한 밀착시키는 번역은 오히려 반대의 일을 한다. 타자의 언어로 나의 언어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고, 이렇게 끌어낸 나의 언어의 흔적과 발견을 다시 타자의 언어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모국어에 혈류를 흐르게 하고, 기름지게 한다. 번역은 ‘잘해야 본전’이 아니다. 번역에서 가장 경멸을 받을 만한 이 경구를 너무나도 쉽사리 주억거리는 사람들은, 번역이 어느 모로 보나, 할수록, 시도할수록 점점 불어나는 모국어의 ‘이자’와도 같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한다. 바로 이 이자가 바로 모국어의 본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 턱이 없다. 물론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4. 자동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화두가 된 적이 별로 없지만 사실 항상 화두였다. 번역은 어지간해서는 따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감추어진 상태에서건, 드러난 현장에서건, 드러났지만 감춰진 것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상황에서건, 번역은, 번역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번역은 오로지 지워졌다는 믿음 속에서만 지워진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인공지능이 번역을 화두로 만든다. 여기에도 역설이 작용한다. 지금까지 번역가 역할을 해주었던 고마운 당신, 이제 잠시 무거운 짐을 ‘구글’에게 내려놓고 쉬도록 하자.


① My friend is terrible, because he killed his father.
② My friend is terrible, because he speaks five languages fluently.


구글에게 번역을 부탁하자, 과연 예상했던 결과를 얻었다.


① 그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내 친구는 끔찍합니다.
② 내 친구는 5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기 때문에 끔찍합니다.


이 자동번역의 결과는 낱말의 근사치의 값을 옮기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번역은 여기서 실패를 고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자동번역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현재, 자동번역이 실패하는 이유는, 가령 ‘terrible’이 어떤 낱말과 함께 조합될 때 ‘끝내주는’이 또 ‘끔찍한’이 되는지,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의 무한대에 이르는 조합을 계산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고 여겨 왔으며, 산술로 환원하는 작업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3) 그런데 이 주제를 다룬 최근의 글에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인공지능은 이와 같은 제약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시가 가장 잘 해왔으며, 가장 특권적으로 실천해 왔다 할, 언어의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 전반을 ‘살려내’ 자동으로 번역하는 작업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 「컨텍트」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문장 ‘The rabbit is ready to eat’, 그러니까 “rabbit을 eat의 목적어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저녁식사가 곧 시작될 것을 알리는 문장”이 되고, 그러나 “rabbit을 eat의 주어로 본다면 이것은 이를테면, 어린 소녀가 퓨리나사의 애완용 토끼 사료 봉지를 열 작정임을 자기 어머니에게 알리는 경우에 맞는 암시에 해당”되는, 다시 말해 서로 “완전히 상이한 언술”4)을 자동번역기는 “이 문장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해 주는 복잡한 맥락을 오롯이 파악하여, 현명한 선택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번역기, 즉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선택(번역은 반드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의 결과 앞에서, 우리는 ‘오류’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5)

3) 조재룡, 「알파 포에지? : 자동 번역, 그리고 시」, 『현대시학』, 2016. 4월호, 18-31쪽을 참조할 것.
4)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김상훈 옮김), 엘리, 2016, 212쪽.
5) 조재룡, 「시(詩), 그리고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혹은 그럴 거라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직관과 추론의 한 형식, 차라리 그러하리라는 믿음에 대한 증명되지 않은, 다소 위험하고 뜬금없다 여겨질 수도 있는 몇몇의 단상들 - 알파고, 자동번역, 시, 그리고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계산’과 그 작용에 관하여」, 『모든 : 시』(창간호), 2017, 8월, 56쪽.


수십만 장의 기보를 입력해서 인간의 뇌의 신경망에서 착안한 전산 시스템을 구축했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딥-러닝이라는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에게 선보인 ‘계산’은,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 온 그런 계산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간 고유의 지적 활동이라 여겨졌던, 직관과 추론의 능력을 통한 응용이나 판단을 목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다. 자동번역은 가능할 것이며, 지금도 상당부분 번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번역가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인공지능과 자동번역이 성립하는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왜 낑낑대며 번역을 해야 하냐고? 이와 같은 물음은 물론 기만적이다. 자동번역의 역설은 자동번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이 행한 번역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번역은 문법에서 문법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언어의 친화력을 헤아려 특수성을 가져오는 행위, 그 특수성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모국어를 흔들어 깨우는 작업이다. 문학을 대상으로 한 자동번역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에게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의 학습에 필요한 것은 문법서가 아니라, 수많은 번역의 예들, 번역문들, 작가마다 상이한 문체로 쓰인 작품들을 번역한 자료들일 것이다. 그래야 인공지능이 뭘 배우든지, 딥-러닝을 통해 학습을 하든지, 나아가 응용을 하든지 할 것이 아닌가.
자동번역기의 완성은 오로지 번역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물론 ‘파파고’를 비롯해 일상 회화나 소통을 위한 대화 등을 해결해 줄 자동번역기는 벌써 완성이 되었으며,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아니다. 파파고는 벌써 복문과 혼합문도 번역한다. 장문도 소화한다. 그런데 문학 작품은? 아니 철학서는? 보들레르의 작품의 자동번역을 수행하기 위해 인공지능이 학습해야 하는 것은 단지 프랑스어일 뿐인가? 인공지능이 보들레르의 작품을 학습하려면 어떤 과정이 요구되는가? 번역된 보들레르의 작품을 입력해서 그 예를 반복해서 학습해야 할 것이다. 보들레르의 작품의 자동번역을 위해 번역된 보들레르의 작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과연 역설인가? ‘번역된’ 시인들의 작품들을 입력하여 학습 과정을 거치면, 인공지능은 시를 관통하는 시적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보들레르 이전의 시인들의 작품을 입력하여 학습을 수행한 인공지능은 과연 보들레르의 시, 그 특수성과 고유성을 번역해 낼 수 있는가? 시를 자동으로 번역할 시의 보편적 문법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시의 정신이라 우리가 부르는 것인가? 자동번역은 아담의 언어, 그러니까 바벨이 붕괴된 이후 겪게 된 개별 언어들의 혼란을 걷어낸, 저 순수언어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정은경
작가소개 / 조재룡

문학평론가, 번역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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