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지금 한국영화는 역사 속으로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1,978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지금 한국영화는 역사 속으로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1. 역사 영화의 현장으로
기이한 현상. 지금 한국영화는 이상한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은 이제까지 한국영화사에서 걷지 않은 길이라 조심스럽고 걱정되기도 한다. 아니,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걱정이 더 앞선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는 두세 명의 남성, 더 나아가서 네 명 이상의 남성이 떼(거지)로 등장해 범죄 세계로 빠져드는 영화에 ‘올인’하고 있다. 이제 이런 현상이 지겨울 만도 한데, 개봉하는 영화들은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한국영화에서 여성 연기자들은 필요 없다는 볼멘소리가 등장할 정도이다. 한국영화에서는 남성 연기자만 존재하면 되는 것일까? 급기야 <브이아이피>(박훈정, 2017)라는 매우 ‘센’ 영화에서 ‘여혐 논란’이 일었다. 영화 속 여성은 단지 죽임을 당하기만 한다. 당연히 남성이 여성을 죽이는데, 그 죽음을 통해 남성들의 연대가 공고화된다고 몇 여성 평론가는 울분을 토했다. 이것이 일리 있는 지적이든 아니든 간에 남성 동맹의 거친 연대가 스크린을 지배하는 현상은 좋지 않아 보인다(여기서 말하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왜 남성 중심의 영화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거꾸로 말하면 왜 이런 영화들을 관객들이 선호하고 있는지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영화 비평은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남성들이 단체로 등장하는 영화의 한 축을 역사 영화(historical film)가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 영화란,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말한다. 이미 2000년대 직후에 거세게 일었던 팩션(faction, fact+fiction) 영화의 연장이면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의 팩션 영화가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실상은 허구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면, 최근 불기 시작한 역사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조금 더 상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가령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는 단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할 뿐 거의 대부분의 설정은 허구였다면, 지금의 영화들은 이와는 명확히 다르다.
2017년 여름은 <군함도>(류승완, 2017), <택시운전사>(장훈, 2017), <남한산성>(황동혁, 2017) 등이 개봉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어떻게든 세 영화는 논란의 중심에 섰고, 동시에 흥행의 중심에도 섰다.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영화는 단연 <군함도>이다. 일제강점기의 억압 가운데 가장 가혹하다고 평가 받고 있는 군함도를 영화적 배경으로 설정한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다양한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서 시작해, 허구적 설정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비판을 지나, 마침내 친일을 옹호하는 영화라는 비판까지 받으면서 결국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군함도>는 무척이나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다가 실패한 짬뽕 같은 영화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한 영화에 들어 있어 관객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과유불급. <군함도>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택시운전사>였다. 1980년의 광주를 다룬 이 영화 역시 온전히 광주의 학살에 집중하기보다는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하는 아버지의 슬픈 사연이 강하게 녹아있는, 신파적 정서를 내장한 영화였다. 결국 영화는, 장훈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두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현장으로 관객을 안내했고, 그 안내에 따라 관객들은 광주항쟁을 다시 조명할 수 있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연코 독일 기자의 눈으로(즉, 자연스럽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광주의 학살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송강호라는 뛰어난 연기자가 소시민과 불의 사이에서 딸이라는 가족 문제로 고민하면서 공감대를 만들어 낸 것도 흥행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남한산성>도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관객을 인도했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병조호란의 이야기. 남한산성에서 척화와 주화를 외치던 두 대신을 비롯한 신하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왕,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서날쇠로 그려진) 민중의 모습 등이 각자의 시점에서 재현되었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김훈의 원작이 그런 것처럼 갈등이 약화되고 말들의 전쟁, 언어의 전쟁이 스크린에 전개되면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영상으로 보여주는 매체라는 것을 새삼 느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영화는 왜 역사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 영화가 한 여름의 극장가를 지배한 것이 기이한 것은 속칭 사극(costume film)을 만들려면 제작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것은 손익분기점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철저하게 산업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매체이다. 소설가나 시인이 골방에서 원고지와 붓으로만 작품을 쓰는 것과는 다른 작업이다. 사극은 의상에서부터, 세트 등을 아우른 미술에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다. <군함도>처럼 아예 섬을 세트로 만들어야 하거나, <택시운전사>처럼 1980년의 광주를 재현해야 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군함도>는 무려 650만 명이 들었음에도, <남한산성>은 380만 명이 관람했음에도 흥행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흥행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간단하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사극을 만드는 것은 도박과 같은데, 이 도박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충무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정적인 의문. 이런 도박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



2. 스크린 속 대리 역사 전쟁
비단 올 여름에만 역사 영화가 기승을 부린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의 한국영화를 보면 역사 영화가 큰 틀을 구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다. 약간의 과장을 하자면, 지난 몇 년간의 한국영화는 대리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니, 영화가 가장 치열한 대중문화의 현장이기 때문에 영화에 그려진 역사의 재현을 두고 진보와 보수의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방송은 수장을 정치권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 철저하게 흥행에 민감한 영화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시작된 영화계의 대리 역사 전쟁은 보수적인 정치권과 진보적인 영화계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난 9년간 정권을 잡고 있었던 보수적인 정치권과 그런 반작용 때문에 영화를 통해 저항했던 대중들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특이한 것은 다른 분야의 어떤 곳에서도 영화처럼 치열하게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전개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최전선에 있었던 문학이나 미술이 현저히 약화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초전은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2012, 이하 <광해>)와 <도둑들>(최동훈, 2012)의 흥행이었다. 알다시피 두 영화는 2012년에 개봉했다. 그 해에 일어났던 일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대통령 선거이다. 보수당의 대통령 이명박이 임기를 끝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던 그 시기, 그러니까 보수의 재집권이냐 진보의 탈환이냐는 사활을 건 선거가 행해진 해인데, 바로 그 해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는 (영화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마치 양 진영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광해>에서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가짜 왕은 결국 신하들의 거센 저항, 진짜 왕의 등장 등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그가 그토록 지켜주고 싶었던 궁궐의 부하나 중전의 가족, 백성의 안위 등, 그 어떤 것도 보호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이 관객들에게 다가간 것 같다.(그 왕이 폐위가 되고 반정으로 등장한 왕이 명만 숭상하다가 결국 굴욕을 겪은 것이 <남한산성>이고, 그 영화는 흥행에서 패했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해석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광해>는 문재인 후보가 직접 영화를 관람하면서 ‘노무현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명박이 집권하면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 불운의 대통령. 특이하게도 사극인 <광해>에 비교된 영화는 케이퍼 무비 <도둑들>이었다. <도둑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서로를 속이고 속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상징하고 있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만이 성공의 잣대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들처럼 우리도 성공해야만 한다는, 개처럼 벌어서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 ‘우리 안의 이명박’ 정신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부자만 되면, 성공만 하면 어떤 범죄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의 한 단면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두 영화 가운데 어떤 영화가 관객들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다시 말해, 백성의 어버이가 되려다 실패한 왕을 그린 영화인가, 아니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성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적시한 영화인가? 두 영화는 공히 천만 영화가 되었지만, 결국 승자는 <도둑들>이었다. <광해>는 12,323,595명을, <도둑들>은 12,983,841명을 동원했다. 정말로 흥미롭게도 그 해의 실제 선거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박근혜는 15,773,128표를, 문재인은 14,692,632표를 획득했다. 영화의 예언이 실제 선거 결과로 이어졌다고 해야 하나? 당시 영화인들은 두 영화의 흥행을 두고 이미 선거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영화계의 역사 전쟁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변호인>(양우석, 2013)이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거세게 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다루고 있다. 상고를 졸업한 가난한 집안의 청년, 그러니까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 짧은’ 그가 고생 끝에 세무 전문 변호사로 돈을 벌지만, 한창 잘 나가던 그때, 시국 사건을 접하면서 삶이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 이 영화는 천만 영화 대열에 합류하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광해>가 불러온 노무현 현상이 실제 노무현의 과거 행적을 바탕으로 만든 극영화 <변호인>에서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영화에 그려진 송우석은 세속적인 변호사였지만 불의를 겪고 있는 이를 보면서 ‘삶의 전환’을 경험한다. 담당한 재판에서 그 유명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이야기를 그는 당당하게 내뱉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불통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그 시절에 박근혜의 반대편에서 송우석이 노무현으로 호출된 것이다.
보수 정치권도 이런 영화적 흐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이제 보수의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시작은 <연평해전>(김학순, 2015)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이 영화의 배급사가 <변호인>의 배급사와 같은 회사라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배급사의 속사정을 알아보면 되겠지만, 하여간 <연평해전>은 실제 일어났던 연평해전을 다루고 있다. 영화가 이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적군인 북한군의 모습은 최대한 보여주지 않고 아군인 국군의 피해 상황과 죽는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죽어간 국군의 가족들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실제적인 전투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긴장감을 조성하기보다는 죽어가는 국군의 공포와 희생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죽은 국군 가족의 슬픔을 다시 강조한다. 이렇게 하면 <연평해전>은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강조한 영화가 되는데, 영화는 이런 희생의 원인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의 무책임한 정책으로 돌린다. 심지어 해전 와중에 대통령이 일본으로 월드컵 결승을 보러가는 것으로 설정해 영화를 보는 이들은 김대중을 비판하게 만들어 놓았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연말에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극적으로 타협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발표가 있자마자 많은 이들이 이에 반발했다. 겨우 100억 원에 자존심을 팔아넘긴 밀약이라는 비판이 많았고, 실제로 위안부 할머니들조차 자신들에게 어떤 의견도 구하지 않고 협상을 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보호하기 위해 그 추운 겨울에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하는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영화가 한 편 당도했다. <귀향>(조정래, 2016)이라는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 歸鄕이 아니라 鬼鄕, 즉 영어 제목처럼 Spirit's Homecoming인 영화는 죽어서 귀신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일본군의 성적 학대와 육체적 폭력에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소녀들의 아픔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영화, 그래서 영화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비판마저 들어야 했던 이 영화는 오히려 그 방식 때문에 적극적인 반향을 불어 모았다. 그리고 현재의 폭력에 희생된 소녀가 무당이 되어 영적으로 과거의 죽은 귀신과 만나 그들이 대화를 하며 서로의 아픔을 공감할 때 여전히 남성 중심의 폭력이 공고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영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부가 맺었던 일본과의 합의는 더욱 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재협상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보수 정치권의 반격은 2016년에도 이어져 거대 규모의 영화 <인천상륙작전>(이재한, 2016)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리암 니슨이라는 할리우드의 대배우가 맥아더 역을 맡고, 이정재, 정준호, 김선아 등이 출연한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북한의 폭압적인 통제 아래 신음하는 인천을 맥아더의 상륙작전으로 구출해 북진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군으로 위장한 남한군이 인천으로 가서 상륙작전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뒤 마침내 희생하는 내용. 결국 영화는 남한군의 희생을 강조한다. 이들의 희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감독은 남한군이 피신하는 곳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들의 근거지였다는 설정을 해 두었다. 그런 설정 때문에 북한군 편이었던 여성도 남한군을 돕게 된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 역시 가족의 이야기를 꺼낸다. 마지막 작전을 수행하러 가기 전에 어머니를 먼 발취에서 보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아내와 어린 아이를 만난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헤어진 뒤 장엄하게 죽어간다. 이미 아는 것처럼 2015년부터 국정교과서 논란이 일어나면서 이를 통과시키려는 보수 정치권의 노력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건국절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승만을 국부로 삼자는 이야기는 공공연히 주장되었다. 이런 주장들의 연장선 상에서 <연평해전>과 <인천상륙작전>이 만들어졌다.
2017년이 되면서 <택시운전사>로 진보의 반격이 다시 진행되었다. 1980년의 광주 학살을 대담하게 그린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진보 정권으로 정치 지형이 변화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는 결코 제작이 쉽지 않았을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이 영화의 기획을 박근혜 정권 아래서 했다는 점이 대단해 보인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변호인>에서 노무현 역을 맡았던 바로 그 송강호가 노란색 택시 운전복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노무현 코드’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지금 영화계에는 노무현 현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노무현은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3. 강한 민족주의의 영화적 자장 또는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들의 특징
최근의 역사 영화에서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는 편수도 많지 않았고 흥행 성적도 좋지 않았다. 충무로의 흥행 기록을 연출하는 족족 세워나갔던 강제규도 <마이 웨이>(강제규, 2011)를 통해 처음으로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고, 가장 개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김지운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김지운, 2008)에서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흥행기계’였던 두 감독의 상황이 이러니, 두 편을 제외한 다른 영화들은 특별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충무로에 일제강점기 귀신이 씌였다’는 말이 돌 정도였을까!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시류를 바꿔놓은 영화가 <암살>(최동훈, 2015)이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 700만 명이 손익분기점이었음에도 가뿐히 넘기고 천만 영화의 대열에 합류한 <암살>은 특이한 영화이다. 먼저 여성이 원톱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반민특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거친 남성들만 스크린을 누비는 상황에서 전지현이 원톱으로 등장하면서 하정우, 이정재, 조진웅, 오달수 등 쟁쟁한 배우들을 끌고 가는 상황은 신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실패한 아픈 역사인 반민특위를 다루면서 관객들에게 판타지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암살>은 대중영화의 공식들을 인용하면서 역사적 교훈마저 주려는 영화이다. 최동훈이 자주 활용하던 케이퍼 무비의 컨벤션을 활용하면서 홍콩 느와르적 감수성을 듬뿍 뿌려 놓았다. 통쾌한 복수극을 만들어 놓은 것.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토록 흥행이 되지 않아 제작조차 가물가물하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호>(박훈정, 2015), <동주>(이준익, 2016), <귀향>, <해어화>(박흥식, 2016), <아가씨>(박찬욱, 2016), <덕혜옹주>(허진호, 2016), <밀정>(김지운, 2016), <눈길>(이나정, 2017), <박열>(2017, 이준익), <군함도> 등등. 이 영화들은 대부분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가혹한 일본을, 식민지 피지배자로서의 피해자인 조선(인)을 그린다. 그래서 모든 영화가 민족주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고 작동된다. 다만 그 안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는 여러 스펙트럼을 만날 수 있을 따름이다.
<암살>은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과 그에 협력한 인물들의 모습을 재현한다. 어머니를 암살한 친일파 아버지, 유모를 학살한 간도 참변의 책임자를 경성으로 들어온 독립군 딸이 처단하고, 밀정 염상진마저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된 상황에서 암살한다. <암살>이 통쾌함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개인적 복수를 역사적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밀정>은 <암살>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경성으로 들어와 비밀 작업을 수행하는 내용. <암살>과 비슷하게 대부분의 대원들이 죽은 후 마지막이되어서야 마침내 복수를 한다. 밀정을 처단하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두 영화는 상상적으로나마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요인을 암살한다. 이렇게 보면 두 영화 속 인물은 일제에 대해 가장 강력한 저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영화에 관객들이 가장 많이 호응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일제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 수 있다. 선명한 이분법에 입각해서 통쾌하게 복수를 하고 암살을 하는 것. 우리에게 일본은 그런 나라이다.
이런 흐름과 달리 <귀향>, <덕혜옹주>, <눈길>, <아가씨> 등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두세 명의 남성들이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만 등장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참으로 희박한데, 일제강점기를 그린 영화에 유독 이런 설정이 많은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강자인 식민지 지배자는 남성으로 상징화되고, 약자인 식민지 피지배자는 여성으로 상징화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강한 제국주의는 남성으로 상징화 되고 약한 제3국은 여성으로 상징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제국주의 일본이 남성으로 등장해서 식민지 피지배자인 조선의 여성을 직접적으로 강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시 말해 식민주의의 본질을 영화적으로 잘 재현한 것인가, 식민주의를 형상화하면서 개인적인 여성의 아픔은 지워버린 것인가? <귀향>은 가장 직접적으로 일본 남성 군인들에게 성적 폭력을 당하는 조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길> 역시 어린 나이에 위안부가 되어 일본 남성의 성적 폭행을 당하는 조선인 여성을 그린다. 두 영화가 공히 위안부를 소재로 하니, 비슷한 서사를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영화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할머니는 현재의 어린 여성(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을 만나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그 아픔을 치유하려고 한다. 여기서 여성의 연대가 발생한다.
<아가씨>는 이보다 더 대범하다. 아가씨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이모부는 아가씨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함께 살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녀와 결혼해 그녀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사람이다. 이모부는 매일 밤 신사인 것 같은 호색들을 모아 자신의 저택에서 아가씨를 판타지로 삼은 기괴한 파티를 일삼는다. 사기꾼 백작이 아가씨에게 접근하기 위해 하녀를 붙여주면서 영화의 갈등은 극대화된다. 결국 아가씨는 하녀와 합작해서 상하이로 탈출하고 이모부와 사기꾼은 지하실에서 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의 폭력을 내재화한 조선 남성들의 폭력과 식민주의의 피해자인 여성의 대결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미스터리 형식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결국 아가씨와 하녀가 연대해서 식민주의의 원류인 일본이나 그것을 내재화한 조선이 아니라 국제도시 상항이로 탈출해서 그들만의 황홀한 섹스를 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고 그 만큼 강한 통쾌함이 있다.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 논란이 심하게 불거졌던 영화지만, 그 논란을 넘어 흥행에 성공했다. <군함도>가 논란을 일으키면서 흥행에 실패한 것과 비교하면 기이한 현상임에 분명하다. 고종을 조선의 구국적 황제로 그리고, 일본에 있는 영친왕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민하며, 덕혜옹주는 상하이로 탈출해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려고 한다는 설정은 모두 허구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떻게 흥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덕혜옹주>에는 <귀향>과 <눈길>의 서사 구조가 녹아있다. 즉, 우리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위안부의 이야기를 덕혜옹주를 통해 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친일파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강제로 결혼을 하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버림을 받은 후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위안부의 모티프와 겹친다.
<동주>는 행동적인 지식인 송몽규와 성찰적인 시인 윤동주의 삶을 차분히 영화로 따라가고 있지만, 제국주의의 가혹한 남성적 폭력에 무너지는 ‘여성적인’ 윤동주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어, 위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윤동주가 시를 쓰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남성일지라도 식민주의의 피지배자이면서 가혹한 폭력의 희생자인 여성으로 읽힌다. 특히 그의 시와 영상이 잔잔히 연결되면서 그런 효과는 배가되는데, 아무래도 이런 설정과 장치 때문에 이 영화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제 한 편의 영화가 남았다. 이런 연결고리로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는 영화 <대호>이다. 이 영화가 제국주의 지배자 일본과 제국주의 피지배자 조선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서구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인 일본은 자연을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면서 조선의 마지막 남은 호랑이를 잡으려 한다. 일부 조선인 포수들이 이들과 함께 대호를 잡으려 하지만, 최고의 포수는 그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보은신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최고의 포수는 산군은 잡으면 안 된다고, 자연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연을 대하는 조선의 정신이었다. 그런 정신을 서구의 근대화를 내재화한 일제가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포수와 대호는 운명을 함께 하고 만다.



4. 역사와 영화의 행복한 조우를 꿈꾸며
지금 한국영화가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역사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다룬 영화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수단이다. 영화는 바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래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역사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한다. 현재 강하게 이어지고 있는 역사 영화의 흐름을 보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명량>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을 때(정말 말도 안 되게 무려 1760만 명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했다), 이순신이라는 장군의 그 전투를 관람하려고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아주 단순하게 명량해전만을 다룬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영화가 개봉한 2014년의 특정한 사회적 징후와 만났을 것이다. 재난을 대하는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 그 당시 요구되었던 지도자의 상, 물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통해 본 세월호의 아픔 등이 없었다면 이런 흥행을 기록하는 것은 단연코 불가능하다. 결국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한다.
부연하자면, 현재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과거를 통해 우회해서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해석이 들어간 과거의 사건을 영화화하고 있으니 현재의 역사 영화 흐름은 바람직해 보인다. 결국 남은 것은 역사 영화 속에 그려진 현재의 우리들의 생각이고 모습이다 대중영화가 흥행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면 반드시 그 시대의 집단무의식적 욕망과 사회적 징후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일제강점기를 다룬 많은 영화가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의 강한 자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다르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역사와 영화가 행복하게 조우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북한의 핵을 핑계로 타국을 공격하는 법을 만들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 안의 친일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만 얽매여서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여전히 소구하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를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영화를 볼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작가소개 / 강성률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무비위크> 스태프 평론가 역임, 전주영화제 단편,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종상 등 심사 역임. 저서로는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 바보』, 『영화는 역사다』, 『친일 영화의 해부학』, 『영화 비평』, 『영화 색채 미학』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추천 콘텐츠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