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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 '아프고, 아프다'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2,589

[기획]

 

 

독자모임

- 아프고, 아프다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정홍수 : 두 번째 자리네요. 네 분 의견을 모아 함께 이야기할 작품을 정했습니다. 강화길의 「손」(『문장웹진』 8월호), 김애란의 「가리는 손」(『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소설집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 권여선의 「손톱」(『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이렇게 네 편의 단편입니다. 김애란과 강화길의 작품 제목에는 흥미롭게도 공통적으로 ‘손’이 등장하는데, 그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다릅니다만 비슷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손」, 강화길, 문장웹진 2017년 8월호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가리는 손」, 김애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소설집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2" align="aligncenter" width="230"]「오직 두 사람」, 김영하, 소설집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3" align="aligncenter" width="230"]「손톱」, 권여선,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caption]

 

이영순 : 편견이라는 부분에서 그랬어요. 「손」에서는 나라는 화자가 사실은 알고 보면 편견에 사로잡혀 아이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끝에 가서는 뒤집히고요. 「가리는 손」도 목격자인 아들이 혼혈아라는 점 때문에 가해자의 위치와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 같습니다.

 

정홍수 : 그 편견을 요즘 많이 쓰이는 ‘혐오’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또는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고는 그와 다른 것을 불신하고 배제하고, 심지어는 가해도 하는 양상 말이죠. 여성혐오라는 것도 사회적으로 큰 의제이고요. 두 소설에서도 다문화 가정,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 불편한 감정들이 바닥에 깔려 있죠. 재미있는 게, 「손」의 경우에는 그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일단 겉으로는 역전되어 있죠. 거기에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시선이 겹쳐지면서 간단치 않은 문제의 국면을 드러냅니다.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서도 노인에 대한 폭행을 목격한 뒤, 아이의 손이 가렸던 게 웃음인지, 경악인지 하는 질문을 반전처럼 던지면서 문제의 복잡하고 착잡한 국면으로 우리를 데려가죠.

 

장수라 : 「가리는 손」에는 ‘얼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와 관련해서 ‘얼룩의 관성’하고 ‘청결의 관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그늘이 ‘얼룩의 관성’에 연결된다면, 엄마가 자식에게 기대하며 바라보는 ‘청결의 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홍수 : 그런 관성들 때문에 사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장수라 : 네, 그 때문에 진실이 가려지는 것 같아요. 엄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청결의 관성으로 바라보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식을 포용하려 해도 이미 그 아이가 사회적 약자로서 얼룩으로 남아 있는 환경 안에서는 한계가 있겠지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약자로서 소외된 사회 구조 안에 있는 거죠.

 

정홍수 : 그 얼룩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는 문제를 묻는 질문의 방식이, 김애란의 경우 단선적이지 않죠. 그게 이 아이가 혼혈 가정의 아이이기 때문인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는 건지, 이 소설에서는 답을 내리고 있지 않죠.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이 주는 깊은 울림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요.

 

이영순 : 제게 인상 깊게 다가왔던 부분 중에 “작은 몸으로 벌써 사회생활을 감당하고 있구나.”라는 구절이 있어요. 아이가 어릴 땐 집에 들어오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하거든요. SNS로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내 연결되어 있는 아이라고 하면 마주쳐야만 발생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무형의 폭력을 당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하면 아이가 얼룩을 묻힌다거나 오염되기가 더 쉬울 것 같아요. 또 폭력의 형태와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얼룩의 정도가 더 가혹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를테면 목격자로서, 가해자의 쾌감 같은 것을 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정홍수 : 소설을 읽으며 ‘틀딱’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는데, 노인들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일베적인 용어더군요. 그런 문화에 늘 노출되어 있으니까 재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로서 저 자신 쉽게 모욕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혐오의 문화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어 가해의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일반적인 사회 구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까지 파고드는 게 소설의 몫이라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손」도 가해/피해의 구도가 단선적이지 않죠.

 

장수라 : 「손」에서는 시어머니, 동네 이장과 학교 아이들까지 화자인 ‘나’를 둘러싼 전부가 큰 테두리에서 ‘나’의 ‘외부 세계’로 구분되면서 어떤 거리가 뚜렷하게 생겨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통이 끊어진 세상 속에서의 부적응, 그래서 마을 이야기를 자신의 눈으로 써 나가지만 사람들 틈에 흡수되지 못하죠. ‘나’도 그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고요. 개인과 세계 간의 의심, 크게 이렇게 봤어요.

 

정홍수 : 물론 분명 그런 의심이 존재하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화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나요? 분명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퍽’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요. 이게 대진이가 내는 소리인지 용권이가 내는 소리인지 그저 화자의 불안이 부른 환청인지 모호한 채로. 그밖에 실제로 화자에 대한 가해가 화장실 낙서를 통해 드러나고, 대진이를 왕따 시키는 가해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 모든 문제를 화자의 불안, 의심으로만 돌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게 이 소설의 또 다른 층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장수라 : ‘나’가 ‘손’에 대해 묻고 시어머니가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이 있죠. 이것도 중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김지윤 : 제가 봤을 때 표면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가 기저에 깔려 있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냄새의 정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 냄새는 마을 전반에 깔려 있는 냄새이고, 마을 주민 모두가 냄새의 원인이자 화자인 ‘나’도 그 냄새를 풍기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뜻하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정홍수 : 그렇죠. 그 냄새가 자신의 손에도 묻어 있다는 거잖아요. 이때의 손이 ‘손 없는’ 할 때 그 악귀의 의미와 핸드(hand)를 의미하는 손으로 중의성을 가지면서 소설 안으로 들어오는 대목이지요.

 

이영순 : 저도 이 손이라는 게, 내 안에 있는 손이기도 하고 어디에도 있는 손이라고도 읽었거든요. 저는 「손」하고 「가리는 손」하고 중의적으로 읽혔는데. ‘가리는 손’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즉 선하고자 하는 손과, 위선과 악마성을 가리는, 악함을 가리고자 하는 손, 이렇게 두 가지로요. 비슷한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강화길의 「손」은 화자에게 그 손이 처음에는 자기한테 미친년이라고 욕하는 누군가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아이들의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 나 자신의 손이면서,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손인 존재인 거죠. 그런 면에서 두 소설이 비슷한 지점이 있고, 던지는 질문들이 많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윤 : 두 작품 모두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보여줌으로써, 결국에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느꼈는데요. 「가리는 손」에 나오는 가정과, 「손」에 등장하는 용권이네 가족 모두 다문화 가정이고 또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소설에 끌어와서 윤리적인 문제로까지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윤리와 도덕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것이잖아요. 「가리는 손」에서도 엄마로서 자기 자식이 방관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 아닐 거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 그럴지도 모른다는 양가적인 감정들이 보이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결말 부분에 와서 가려져 있던 아들의 표정이 놀란 표정이 아니라 미소일지도 모른다, 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증폭되어서 좋았어요.

 

김보배 : ‘손’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말하는 것 같아요. 사회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결국 우리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학습된 폭력성으로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손에 휘둘리는 거죠. 저는 이 두 소설을 읽고 나서 남성 화자의 입장에서 쓰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남더라고요. 왜냐하면 전부 여성 화자이고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잖아요. 다문화 가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이런 화자들이 선택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정홍수 :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에 나오는 아버지가 어떤 면에서 우리 시대 남성 화자의 한 전형이지요. 그런 남성 화자들이 섬세한 윤리의 지점까지 스스로의 시선을 확장하기 힘들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이 아닌가 합니다.

 

이영순 : 두 작품 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던져 주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가리는 손」의 엄마 화자는 아이를 선하게 키우려고 하는 엄마인데, 입을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다고 하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손」의 엄마 화자 역시 아이를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안 하도록 키우려는 엄마인데, 어쨌든 얼룩이 여기저기에서 묻으면서 결국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으로 커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우리 시대의 부모들에게 질문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홍수 : 한 가정 안에서 아이를 선하게 키우려고 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은 구조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는 문제를 이 두 소설이 보여주고 있죠. 그런가 하면 또 그 구조 안에 우리 자신이 내속되고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요.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단순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거죠. 소설이 문제 삼는 윤리가 일반적인 의미의 그것보다 더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겠죠. 미시적인 단위에서의 생활 정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지점에서 한국 소설이 섬세하고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홍수 : 강화길의 다른 소설은 읽어 보셨나요?

 

김지윤 :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호수」를 읽었습니다.

 

「호수」, 강화길, 소설집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년

 

김보배 : 네, 저도요.

 

정홍수 : 그 작품은 데이트 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사태의 진실을 특정하지 않고 폭력과 공포의 분위기를 아주 불쾌한 호수의 안개 같은 것으로 느끼게 만들죠. 그런 면에서 「손」과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추리적인 기법이랄 수도 있겠는데, 서사의 정보도 친절하지 않죠. 불안을 감각화 하는 문체의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윤 : 「호수」도 그렇고, 「손」도 마찬가지로 긴장감을 느끼면서 읽었던 것 같은데요. 일단 주인공이 몹시 신경증적이고 예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고요. 또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시골 마을인데 굉장히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을 행사를 하는 것도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소설의 배경이나 분위기만으로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 나가는 데 긴장감을 조성하는 힘이 있어요.

 

이영순 : 「손」을 보면 독자가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딱 치고 들어오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용권이 엄마는 베트남에서 왔다.”와 같은 문장이요. 이 문장이 그 지점에서 나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정홍수 : 대진이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일 것 같은데,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뒤집어버리는 거죠.

 

이영순 :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을 느꼈어요.

 

김보배 : 「가리는 손」은 편하게 읽혔어요.

 

정홍수 : 정통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김보배 : 「손」은 서스펜스적인 느낌이 좋았어요. 저는 긴장감을 가지고 집중해서 읽는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이 소설을 밤에 노트북 불빛에만 의지해서 읽었는데, 너무 무서운 거예요. 소름이 막 돋고. 그래서 지윤이한테 바로 읽으라고 추천을 했어요.

 

장수라 : 저는 영화 「곡성」이 생각났어요.

 

이영순 : 저도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데 ‘퍽’ 하고 그림자 같은 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어요.

 

정홍수 : 요즘 이런 테마를 다룬 소설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혐오’라는 게 커다란 사회적 의제이기도 하고요. 많이들 공감하시나요?

 

김보배 : 제가 어떤 혐오를 느꼈던 적은 많지 않지만, 주변에서 혐오를 느낀 사례들을 말해 주기도 해서 마치 저도 그 기분을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어요.

 

장수라 : 저는 요즘 사람들이 무척 예민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쩌면 일상생활에서 습관화되거나 무뎌져 문제제기를 안 해서 그렇지 그런 예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거나 물을 마실 때 작은 소리만 나도 사람들이 째려보더라고요.

 

이영순 : 저는 애들도 키우고 직장생활도 오래 했고 친척 중에 다문화 가정이 있거든요. 다른 보통의 한국 가정과 다르지 않은데 편견의 눈빛을 받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또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해서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본 적이 있고요.

 

정홍수 : 「손」은 이문열의 「익명의 섬」처럼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그 속에서 외지인을 배제하는 구도가 작동하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서로를 불신하고 의심하는 것이 소문의 형태로 떠돌잖아요. 반면에 「가리는 손」의 경우에는 소문의 형태도 있지만, 인터넷이라는 매체도 중요한 환경으로 작용합니다. 혐오의 문화가 더 은밀하게 번성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명의 섬」, 이문열, 소설집 『익명의 섬』 문학사상사 2011년
소설집 『익명의 섬』 민음사 2016년

 

이영순 : 가끔 뉴스 댓글을 볼 때가 있는데, 혐오적인 시각에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곤 합니다.

 

정홍수 : 어쩌면 습관화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죠. 「가리는 손」에 나오는 한 대목이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품이 드는 거잖아요. 그런 인터넷 문화는 그 품을 아예 생각지 않는 문화 같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면 소설, 문학은 그 이해의 품을 들이는 시간이기도 한 거죠. 이제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으로 넘어가 볼까요. ‘딸바보’인 아버지와 ‘아빠딸’인 딸, 부녀가 제목에서 말하는 ‘오직 두 사람’인데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부녀의 모습을 풍자적이고 아이러니한 시선으로 잘 보여줍니다.

 

장수라 : 이런 아빠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이 소설 속 아빠는 단순한 ‘딸바보’가 아니라, 그 자신도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성장 과정에서 치유 받지 못한 어른이거나 덜 성숙해서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편협하고 다른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아빠잖아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과거에 참 많았던 캐릭터 같아요. 지난해 3월 터키에서 본 들판의 양이 생각났어요. 풀이 아직 자라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이기도 했지만 카파도키아 땅이 사막같이 척박하지요. 양들이 가시 풀을 먹는 거예요. 먹을 게 없으니까. 소설 속의 딸을 보면서 주어진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입에 피를 흘리면서 가시 풀을 뜯어먹는 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 부녀 관계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읽히더라고요.

 

정홍수 : 그런데 그렇게 보아버리면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켜 버리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가족 제도의 변화, 가부장제에 대한 반성, 새로운 가족 윤리의 대두와 같은 흐름을 놓쳐버린 부녀의 이야기로 읽는 게 맞지 싶은데요.

 

이영순 : 소설에 나오는 내용 중에 ‘역주행하는 미친놈’ 이야기가 있거든요, 자신이 역주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맞게 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역주행하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딸 한 명만 편애하는 이 아버지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권이 몰락해 가는 상황에서 한 명의 딸에게 애착을 가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고, 가족들에게 센 척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소외된 와중에 무언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기도 했어요. 저는 오히려 딸 현주에게 이해 가는 점이 있으면서도 온전히 공감할 순 없었어요. 아버지한테 벗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적인 삶을 살려고 하고 아버지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면서 옆에 있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수동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수라 : 그 수동성이 엿보이긴 했지만 자식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도 자기 아버님 세대에서 대물림 받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거죠. 아버지는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잖아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변화에 열린 마음을 가진 학자였다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가족 중 한 사람만 편애를 하고 아내와 다른 자녀들에게도 무심한 아버지의 캐릭터는 문제죠. 결국은 가족이 분열되는 건 당연한 이치이고 남아 있는 딸마저도 미성숙한 채로 어른이 되어 간 거겠죠. 아버지는 유아기적인 상황에 갇혀버린 아이 같았고, 자식에게 삶의 가이드가 되는 성숙한 어른이 아니었어요. 그로 인해 겪은 딸의 그늘은 소설의 마지막 아버지의 죽음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단순히 가족관계 그 이상의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소설을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정홍수 : 이 소설의 아버지는 개인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세대의 초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알레고리일 수도 있고요. 작가가 어떤 콘셉트를 잡고 쓴 거죠. 그런 면에서 딸의 수동성이 과장되게 표현되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김보배 : 사실 딸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수동적이고 덜 자란 어른 같은 느낌인데, 이것도 한 세대를 대표하도록 형상화된, 선택적으로 캐릭터화 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김지윤 : 네, 그래서 인물이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정홍수 : 너무 순진무구하죠. 실제 이런 부녀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문제제기를 위한 유형의 측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작가 특유의 예리함과 명료함이 살아 있기도 하고요. 소설에 “외국어를 쓰게 되면 논리적이고 명쾌하고 이성적인 사유를 하는 느낌이 든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하죠. 반면에 인물의 입체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그게 이 소설의 전략일 수는 있겠지만요.

 

이영순 : 저는 이 소설에서 전 세계에서 희귀한 모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이라는 모티브가 좋았습니다.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이 제 마음에 아련한 그림자를 만들어냈어요. 그렇지만 이 화자가 소설 마지막에 “자신이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된 탓이겠죠.”라고 했는데, 만들어진 듯한 수동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공감이 잘 안 되었어요. 현주가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남은 거죠.

 

정홍수 : 그러니까 여기에서 아빠가 일종의 모국어이고, 외국으로 간 엄마와 동생이 택한 삶은 외국어의 삶인 건가요? 하긴 그렇게 읽어버리면 너무 단순해지네요. 이 소설이 우리 사회가 통과하고 처리해야 할 가족제도의 비합리성, 퇴행성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편지의 수신인인 언니는 누구인 것 같나요?

 

이영순 : 저는 화자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가상의 인물에게 보내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장수라 :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일부러 작가가 쉽게 풀어 나가기 위해 서간체라는 방식을 택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홍수 :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저는 편지의 수신인이 소설에 내속되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설의 구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에서 아버지에게는 전혀 변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떠셨나요.

 

김지윤 : 저 역시 ‘언니’의 정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서간체를 사용한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의 편지 내용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재밌기도 했지만요. 수신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난 정보가 없어서 아쉬웠던 것 같아요. 작품 전반에 대한 생각은,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묘한 부녀 관계를 가지고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권력 관계, 아버지가 자식에게, 다른 가족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얘기를 듣다 보니까 한 방향으로밖에 해석을 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하, 물론 작가님이 쓰신 바를 제가 잘못 찾아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서간체 때문일 수도 있고요. 앞에서 말씀하셨듯이 수신자인 언니의 정체가 모호한 부분 때문일 수도 있겠고요. 또 소설에 깔아 논 복선들도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초반부에 나온 오빠의 농담들은 결국 아버지의 인생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었고, 파키스탄 무슬림 여성이 나온 에피소드도 아버지와 나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소설 끝 무렵에 아버지의 죽음을 동생이 지켜보면서 “이런 의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도 구세대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김보배 : 김영하 작가님은 제가 보기에 굉장히 힙한 분이시고 젊은 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많이 다뤄지는 소재를 선택한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남성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을 텐데 그게 배제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트렌디한 분이라서. 왜 하필 남성 작가가 여성 화자로 소설을 썼을까, 그렇기 때문에 앞선 지적들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김지윤 : 근데 여성 화자의 시선에서 엄청 잘 쓰신 느낌이 들었어요.

 

김보배 : 맞아, 맞아요.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정홍수 : 불가피한 한계 같은 것도 있겠죠.

 

김지윤 : 네.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앞서 말했던 잘 쓰셨다는 느낌은 여성 화자가 발화하는 방식이나 말들이 남성 작가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요.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지점들을 남성이 공감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 내에서 한계라고 느꼈던 지점들은, 예컨대 우리가 한 가족의 ‘딸’로서 ‘아버지’에게 느끼는 폭력들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요. ‘여자애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거 아니다. 다 걱정 되니까 하는 소리야.’라는 말도 가족이니까 염려가 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사실은 걱정을 가장한 폭력적 발언이거든요. 이러한 지점들을 몸소 체화한 ‘여성’들이 더 예민하게 잘 포착하고 그려낼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남성 화자’들이 섬세한 윤리의 지점에 못 들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수라 : 네, 남성 작가가 여성 화자로 녹아들며 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영순 : 제 생각에도 이 소설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만약 여성 화자가 아니라 남성 화자를 내세워 썼다면 결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사건을 놓고 보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시각은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여자는 사건 내면에 숨겨져 있는 정서를 들여다보는 반면 남자는 객관적 사건 그 자체만 보려고 하잖아요. 여자가 당하는 명시적인 혹은 암묵적인 폭력에 대해 남성 화자는 온전히 내재화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홍수 : 마지막으로 권여선의 「손톱」 이야기를 해볼까요. 정말 생생하죠?

 

김지윤 : 울 뻔했어요.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화자가 20대 초반의 여성인데, 저희가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너무 구체적이어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더 확 와 닿았어요.

 

이영순 : 소희의 죽은 손톱을 새살이 돋거나 재생할 수 없는 상처로 읽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굉장히 집중력 있게 읽었거든요. 저를 놓아 주지 않더라고요. 세대가 다른데도 소희의 정서와 감정에 온전히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글이글 달아오르다 끝내 퍽 터져야만” 하는 소희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려 주고 싶고, 기대어 울게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굉장히 절실한 감정을 느꼈어요.

 

정홍수 : 중간중간 언니인 본희가 엄마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가 고딕체로 들어가 있는데, 그것도 참 리얼하죠. 우리 몸 중에 다쳐서 안 아픈 곳이야 없겠지만, 손톱이 제일 아프잖아요. 박스에 찔려서 손톱 뒤집어지는 장면, 저는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그 장면은 잘 못 읽겠더라고요. 끔찍해서.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상처가 소희 세대한테 가 있는 거겠죠. 그런데 소희가 그 힘든 삶을 견뎌 나가는 방식이 너무 리얼합니다. 출근 시간까지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하는 장면, 빚을 갚아 나갈 계획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는 장면 등등. ‘뭘, 뭘, 뭘’이라는 항변이 ‘미친개처럼’이라는 표현과 공명하는 대목도 그렇고요. 쉴 시간도 돈도 없는 소희가 휴대폰 대리점에서 공짜 사탕을 먹으며 그나마 짧은 시간을 보내는 대목 같은 것.

 

이영순 :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젊은 애들이라고 하면 대충대충 사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기성세대의 시선에 대해 다시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어요.

 

정홍수 : 그런 게 정말 소설의 힘이죠. 무슨, 무슨 ‘세대’ 같은 사회적 명명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명명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정말 구체적인 삶의 시간들이 이 소설에는 분초 단위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것은 어떠한 사회적 보고서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장수라 : 견디는 삶을 사는 주인공, 회피하고 싶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공감이 되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손톱은 온몸에 신경이 다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라서 거기가 아프면 온몸이 다 아픈 거죠. 소희를 두고 작가는 “달아오르다 달아오르다 끝내는 퍽 금이 가야 하는 상태, 뿜어낼 구멍이 절실할 때, 손톱이든 어디든 와삭 깨지고 퍽 터트려야 할 때”라고 표현하죠. 터지지 않으면 속에서 곪잖아요. 오히려 터져야 순환이 되는데. 소희라는 캐릭터가 고통을 안고 가야 하는 삶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너무 잔인하다고 느꼈어요.

 

정홍수 : 늦게 퇴근해 잠잘 시간도 얼마 안 되는 소희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포인트 적립 찍고, 중고매매 사이트에 들어가는 장면도 있죠.

 

이영순 : 그렇지만 소희가 부동산에 가서 새로운 매물들을 보곤 하는데, 어쨌든 저는 그게 하루하루 견디며 나아가기 위한, 희망이라는 걸 놓지 않기로 하는 그런 태도로 읽었어요.

 

김지윤 :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희망 얘기 하셨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나? 과연 그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지금 20대들은 많이들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해요. 소희가 소설에서 같이 일하는 ‘진수’에게 ‘남자애가 왜 저렇게 말이 많아.’라고 하는 대목도 사실 누군가를 이해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자기 삶을 살아가기도 너무 벅찬 마당에 과연 누군가를 생각할 여력이 있을까. 온전히 자기 자신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나마 소희가 버틸 수 있는 건 언니 ‘본희’에게 문자를 보내는 행위잖아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언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 그게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정홍수 : 맞아요. 조금의 긴장의 끈이라도 놓는 순간 벼랑으로 떨어지는 삶이죠. 이 소설은 그냥 소희의 삶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 같은데도 많은 이야기와 울림이 우리에게 건너오는 것 같습니다. 그밖에 또 절실하게 와 닿은 장면은 어떤 거였나요?

 

김보배 : 계속 계산을 하잖아요. 시간도 돈도 상황도 미래도.

 

장수라 : 출퇴근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는 장면이나, 짬뽕 곱빼기 시켰다가 오백 원이 부족해서 그냥 나오는 장면도 생각납니다.

 

김지윤 : 시간을 돈으로 치환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극적이었어요.

 

김보배 : 근데 다들 해봤죠.

 

김지윤 : 맞아요. 아르바이트 하면서 한 번쯤 해본 생각이었어요.

 

이영순 : 저는 “소희 이렇게 진짜 혼자 두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는 부분이요. 진짜 소희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 놓고 치료도 받지 못하잖아요.

 

김보배 : 짬뽕 못 먹고 나오는 장면. 정말 진짜 짠했어요.

 

정홍수 : 오늘 다룬 작품들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각자 다 다른 방식으로 환기시켜 주면서도 문학적 울림도 큰 작품들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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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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