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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다른 세상 꿈꾸기

  • 작성일 2007-06-29
  • 조회수 4,925

 

더 나은 다른 세상 꿈꾸기



대담 이청준(소설가)

진행?정리 천명관(소설가)

 

 

 

intro 

천형 

체험과 과정 속에서의 태도 

더 나은 다른 세상 꿈꾸기 

사상계 시절 

열린 결말 

이상향 찾기, 낙원 건설 

문반 

현대문학은 신한테 대들어보는 것 

현대문학과 종교 

영화는 광장예술, 소설은 밀실예술 

산에 나무로 서있기 보다 숲으로 서있고 싶다 

노벨상 

최근 집필작품 

씻김굿 

 

 

천명관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청준  안녕하세요.

천명관  《문장 웹진》의 작가와 작가 코너 인터뷰를 위해 선생님을 만나 뵙는데요. 얼굴빛도 좋으시고, 바쁘실 텐데도 여전히 건강하신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이청준  고맙습니다.

 




호암상과 제비꽃 서민 소설상


천명관  최근에 선생님께서 ‘호암상’과 ‘제비꽃 서민 소설상’을 받으셨더라고요. ‘호암상’은 많이 알려진 상인데 ‘제비꽃 서민 소설상’이란 게 참 제목도 재미있고 정감이 있는데, 이 상이 어떤 것인지 소개해 주세요.

이청준  원래는 ‘호암상’을 받았으니까 올해는 다른 상을 극구 사양했죠. 그 상의 취지가 서민의 삶의 애환을 다룬 작가들과 작품에 주고, 또 한 가지는 전업 작가 중에서 작품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의 취지가 좋아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상을 상징하는 제비꽃 모양이 참 예쁘더군요. 상장에 상징 이미지가 박힌 그것을 받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천명관  서민들의 삶을 다룬 작가들에게 주로 주는 상인가 보네요.

이청준  그것을 수락하면서 얼마 전에 ‘호암상’ 수상소감에서 그런 말을 했거든요. 내가 지금 40여 년 소설을 써 왔는데 그 사이에 내가 무엇을 해왔나 지난날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는데, 내 문학이 진정 우리 삶의 아픈 상처들을 얼마나 어루만져줄 수 있었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빈곳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었는가. 또 우리 이웃들과 깨어있는 정신을 함께 할 수 있었는가. 그런 점에서 부끄러움과 자책과 의구심을 금할 수 없었다는 소감을 얘기한 일이 있어요. 바로 그 점이 제비꽃 문학상 취지와 들어맞겠고, 수상소감을 따로 준비할 일도 없겠다 싶어서.

천명관  (웃음) 한번 준비해서 두 번을….

이청준  문학이 늘 같은 얘기지만 그 문학의 이름으로 상을 받을 때는 같은 취지고 같은 뜻인 것 같아요.

천명관  선생님은 40여 년 글을 써 오셨는데 동년배 다른 작가 분들에 비하면 상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문학에 상을 준다는 것에 작가들은 언제나 어색해하지만 그래도 상은 뭔가 잘했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인데. 좀 가벼운 질문입니다만, 지금까지 작가의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라고 할까 이런 것은 없으신지요. 흔히 연예인들에게 이런 질문하지만, 자기 자식이 자기가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 말리겠느냐 권하겠느냐 이런 질문까지 같이 드리고 싶네요.

이청준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면요. 젊었을 때 결혼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고, 또 결혼하고 나서는 한눈을 많이 팔잖아요. 내가 바른 선택을 했나 하고 주변을 곁눈질 해보게 되는데요. 지나고 보니까 세월이 흐를수록 주변도 그렇고, 내 자신도 그렇고, 한눈팔지 않게 되죠. 비록 그 선택이 옳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죠. 그래서 문학도 똑 같이 생각돼요. 시골에서 진학한다는 말을 웃학교 간다고 하죠. 웃학교 가는 목적이 관리 되고 돈벌러 가는 것이지. 우리 고향동네에서는 문학이 고등학교나 대학 가서 하는 공부하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런 목적으로 진학했다가 나중에 문학으로 오고 나서는 자주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됐죠. 주변에서도 좀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 와서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때그때 어떤 이유나 욕구가 그것에 따라서 나름대로 충분한 생각 끝에 선택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되고 자신을 신용할 수밖에 없죠. 지금도 그렇게 문학을 생각하고 있고요. 제 후대가 이걸 한다고 하면, 저는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봤을 때 작품 평에도 인색하고. 이게 뭐냐면 사람이 젊었을 때는 소질과 전망이 있는데 지나치게 그 소질이라든지 전도에 대해 과도한 희망을 입력시켜주면 결과적으로 잘못 선택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문학을 40여 년 생애를 걸어서 하다 보니까 다른 삶의 길도 쉬운 길은 없겠지만 이 길도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러 천형이라는 생각까지 할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것은 처음에 권하기보다는 가로막고 반대하고, 그런 가운데도 상대가 내면의 욕구라든지 자기소질에 대한 평가를 끝내 이겨나간다면 그때 선택할 수 있는 거지. 가령, 요즘 그러지 않습니까. 쉽게 가수가 된다든지 그러다가 그 꿈이 꺾였을 때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학에서는 자기시험을 더 철저하게 시킬 필요가 있어요. 하물며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삶의 얘기를 생을 걸어서 할 때는 자기시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자식도, 주변도 일단은 반대를 합니다.

 




귀납적 글쓰기와 연역적 글쓰기


천명관  일단 반대를 해놓고 만약에 뭔가를 꿰뚫고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면 할 수 없다, 아마 많은 작가들이 그런 과정을 겪었을 텐데요. 요즘은 문창과로 대학을 진학해서 작가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돼버린 것 같습니다. 문창과 출신 작가들도 많고.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학생들을 만나러 간다고 표현하셨는데, 만나본 학생들, 또 그런 문학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청준  요즘 말로 하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고 할까요. 문학의 기술적인 부분, 기능적인 부분, 창작 기능적인 부분을 오히려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거기 담는 것은 삶의 내용 아니겠어요. 교육은 길을 안내하는 하드웨어 기능을 하고, 담는 것은 자기가 삶을 담아야죠.

그 점과 상관해서 요즘 학생들 만나보면 우리 시대에는 문학을 참 편안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전부 체험세대거든요. 독서라든지 거기서 삶의 정보를 구해서 그것을 문학으로 쓴 것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경우에는 학력이나 문학에 대해 배우지 않고 그저 살았어요. 배고프지 않게 남보다 조금 더 잘 입고, 잘 산다는 것, 뒤떨어지지 않게 아는 것도 좀 더 알아야겠다고 살다보니까 그것이 자기 안에서 삭아서 끓어 넘치려고 하는 것을 담고 싶은 욕망이 소설로 표출된 셈이거든요. 지난 시대는 그 삶을 전부 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쓰면 됐어요, 문학이라는 게. 그런데 요즘에는 그 내용까지 배우는 것 같아요, 교육 속에서. 더군다나 정보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삶의 콘텐츠라는 내용을 컴퓨터나 정보매체나 더 넓게 이야기 하면 책이라든지 전부 취재한 정보를 삶의 모습이나 행태 속에 배치하고 조직해서 그려낸다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죠. 힘들게 보였어요.

천명관  그런 문학에 대해서, 취재나 정보 같은 것들, 그러니까 문학의 질료들이 그런 데서 오는 문학에 관해서, 선생님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심사 때문에 많이 접하셨을 텐데, 선생님세대의 문학과 어떤 차이가 있고, 그런 문학이 갖는 문제점에 관해서는 또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청준  깊이 생각해본 것은 없지만 굳이 나눠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을 살다가 체험과 과정 속에서 태도가 생기는데, 젊은 학생들은 교육이나 취재를 통해 태도가 먼저 생기는 것 같아요. 아까 말한 하드웨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먼저 입력이 되고 그 내용을 채워가는 식의 작품. 그 전의 우리 같으면 작품이라는 것이 귀납적으로 씌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연역적으로 씌어지는 그런 느낌이 강하죠. 그래서 작품을 읽어보면 굉장히 사유적이고, 삶의 움직임보다는 내면의 사유의 움직임 같은 것. 사는 형태나 모습이 먼저 결정되고 이게 옳으나 그르냐 따지고, 채우려고 하고, 혹은 그것을 못 깨뜨려서 고통스러운 이런 과정이 문학기술 과정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세대 문학이 차라리 쉬웠다는 것이 살아보니까 이렇더라, 이것 재미있고 값지더라 하는 얘기를 쓰는 것이거든요. 귀납적으로.

천명관  그러면 그런 문학들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청준  당연하지. 문학이 여러 가지 경향도 있고 유파도 있고 그런데 우리 삶이 어떤 몇 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문학도 아주 다양한 시각으로 넓게 보는 것, 세계를 넓게 보고 독자가 전해 받을 때는 어느 한 사람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향에서 보는 삶을 다양하고 탄력 있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 앞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방식도 있고,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방식도 있고. 태도가 먼저 연역적으로 구성된 다음에 삶을 사유하는 과정도 있겠고. 살아보고 큰 기침 섞어서 적는 방법도 있겠고. 그런데 지금은 어차피 속도시대가 돼서 삶을 적는 문학도 정보경쟁시대가 된 것 같아요. 불가피하게 신세대나 젊은 세대가 정보를 나름대로 조직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을 보면서 그 가치나 불가피성이 우리보다도 힘든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해요.



부끄러움의 기억과 상처, 그리고 글쓰기


천명관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문학 안에서의 일일 테고. 제가 궁금한 것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선생님께서 대학시절이나 젊을 때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시골에서 올라와 기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골에서 좋은 대학에 가셨잖아요. 보통의 사람들이 촌놈이 출세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촌놈이 출세했다가 아니라 촌놈이 출세하는 것이라고 보거든요. 촌놈들이 갖는 콤플렉스와 중앙에 대한 열망이 그 사람을 발전하게 만들고 성취하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도 흔히 말하는 입신양명의 조건을 갖추셨는데도 그 길을 마다하고 당시 생계의 방편으로 치면 너무 불투명한 작가의 길을 택하셨단 말이에요. 그 시기에 선생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네요.

이청준  어디 작품에서 잠깐 쓴 일도 있어요. 시골에서 처음에 도회지 중학교에 합격해서 가면서, 원래 진학을 못했을 텐데 외사촌 누님 한 분이 도시에 살고 있어서 그 누님댁에 더부살이….

천명관  그게 서울이 아니고 광주군요.

이청준  예, 고마움의 표시로 어머니와 둘이서 바닷가의 게를 한 자루 잡아서 짊어지고 외가댁에 들어갔더니, 벌써 썩었죠, 여덟 시간 버스 타고 오니까, 누님이 그 냄새나는 자루를 대문 앞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그래서 내 손으로 버리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내 자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 같은 창피하고 부끄럽고.

천명관  그때가 중학교 들어갈 때죠.

이청준  그렇지. 막 입학하러 갔다가. 참담한 느낌인데. 흔히들 시골은 배고프고 무지하고 야만적이니까 그게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름대로 삶이 다 있었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그 꿈이 더 아름다울 수 있었는데 그것까지도 전부 다 부인당하고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에서. 나도 도회인이 되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을 하는 방법은 진학을 했으니까 공부 잘하는 길밖에 없지요.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바로 전 학년에서 일등을 했어요. 4~5년 계속 됐어요. 그러면 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도회 살이의 흐름, 정서나 분위기는 절대로 끼어들 수 없더군요. 우선 그 쪽에서 받아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저쪽 질서, 도시질서, 도회문명에 대한 복수심인데 그것을 그때는 뭔가 잘 몰랐다가 나중에 문학이라는, 문자 속에 있는 세계가 따로 있더라고요. 소설이나 시 같은 것들을 학교 가서 읽고 그러면서. 지금 생각하면 자기 이상적인 세계를 혼자 찾아냈다고 할 수 있죠. 현실 너머에 있는 문자세계. 그래서 그 쪽으로 흘러갔죠.

천명관  그래서 그게 선생님이 어느 글에선가 쓰신, ‘더 나은 다른 세상 꿈꾸기’ 같은 것이었겠네요.

이청준  현상세계나 질서에서는 깨지지 않으니까 그것에 대한 반항, 복수심. 그것을 현실적으로 복수할 수 없으니까 내 식의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죠.

천명관  보통은 복수라고 하는 것이 서울 가서 출세해서 금의환향하는 방식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아마도 완곡하고 긴 복수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이청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미 그게 복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 챘어요.

천명관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작가라는 사람들이 언제나 현재성의 압박을 잘 못 견디고 내면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현실 질서에서는 패배자에 가까운 사람들인데…. 선생님께서는 그 시대에 그 길을 택하셨는데, 결혼을 하고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셨는지요. 우선 결혼은 언제쯤 하셨나요?

이청준  결혼을 68년에 했죠. 서른 살 때. 군대 갔다 와서 학교 졸업하고.

천명관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신 이후겠네요.

이청준  그렇죠. 65년에 「퇴원」으로 《사상계》신인상에 당선되고, 그게 인연이 돼서 《사상계》에 취직을 했죠. 그게 월급 받으나 마나 차비도 못 되는. 월급을 줄 때도 있고 안 줄 때도 있고…. 《사상계》가 사양길이라 거의 월급이라는 것을 못 받았죠. 그래도 그때는 아침마다 어디 갈 데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것도 없는 친구들이 주변에는 아주 많았거든요. 그러다가 ‘동인문학상’을 68년에 받았습니다. 67년 가을에 결정됐어요. 시상을 68년 봄 4월에 했는데 결혼은 그 해 가을에 했죠.

천명관  그러면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언제쯤이세요?

이청준  그 무렵에, 전부 얽혀진 일이죠. 동인상까지 받고 나니까 내가 글만 써서 먹고 살겠다는 자신감까지는 어림없었지만, 앞으로 잘되면 그렇게도 될 수 있겠다는 희망…. 현실적으로는 잡지들이 몇 군데 있을 때고, 특히 60년데 후반에는 여성지 전성시대였어요. 계간지, 종합지들이 생기고. 소설 쓰는 사람은 잡지사 주변에 가서 명색이 편집직원 할 기회가 많았죠. 그런 동네에서는 글 쓰는 사람에 대해 너그럽고, 사무실에서도 일이 없을 때는 글 쓰는 것을 다소간 양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도, 사라지는 이야기


천명관  선생님 뵈면 여쭤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선생님 작품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게 어언 30년 가까운 세월이지만. 그때 『이어도』나 『병신과 머저리』나 『당신들의 천국』……. 이런 것을 보면 제가 문학도는 아니었지만 책읽기는 좀 좋아하는 정도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입시가 코앞에 있는데도 교과서 이외 책을 열심히 읽은 덕에 대학도 못 갔죠. 그런데 선생님 책을 보면 뭔지 모르게 어려웠어요. 결말도 늘 모호하고. 제가 제일 궁금했던 게 『이어도』에서 저랑 같은 성을 가진 천 기자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전에 선우 중위와 대화를 계속 나누잖아요. 『당신들의 천국』도 그렇고, 뭔가 치열하게 대화를 하는데 그 말들이 그 당시에는 좀 어려웠어요. 읽기도 난해하고. 『비화밀교』같은 작품도 기억이 납니다만. 『이어도』의 마지막에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떻게 됐다는 것인가. 과연 이어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이게 저는 그때 궁금했어요. 30년 정도 지나서 여쭤보겠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청준  그 뒤로 읽어내셨을 텐데요.

천명관  이것은 제가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서 질문 드리는 것입니다.

이청준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결국은 문학이라는 것이 삶의 길 아니겠어요. 어떤 삶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인가, 뜻있는 삶의 길인가 그런 것을 찾는 길인데. 나는 좀 올되다고 할까. 시골에서 도회로 왔을 때 문명코드가 다른, 거창하게 말해서 문명충돌이죠. 삶의 진로가 그때 이미 어느 정도 바뀌면서 결정된 것. 사실은 4?19, 5?16 이런 것도 있었지만 제대하고 나서 《사상계》에 있으면서 정치 모습을 많이 구경했어요. 그때 정치에 관계하던 분들이 《사상계》의 중심축이 돼 있었으니까. 학자들도 그렇고. 그분들 겪으면서 삶의 구경을 많이 했죠. 학교에서 배울 때는 바른 길이 있고 책을 읽으면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배우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삶이 이렇다는 자신감이 없어요. 그 삶의 베끼는 것. 문학도 확연하게 이렇다 저렇다 결말을 낼 수 없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어떻게 서양문학 이론이 우리나라에서 얘기된 가운데 쉽게 단어만 이야기하자면 ‘열린 결말’, 그 말이 결국은 내가 회피하고자 하는 소설의 결말이라든지 소설 기술법하고 상당히 맞아떨어졌어요. 결국 어느 선생님께서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현대소설은 작가가 일상인보다 열심히 못 사는 면이 있는데 그러고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런 천재 없다, 오늘의 작가는 다만 피 흘리면서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순례의 과정에서 발자국이나 피 흘린 자국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지, 최종적으로 도달한 진실의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근자에 또 한문학 문예이론 한 선생님 글을 보니까, 영양의 발자국이라고 해서. 영양이 도망가다가 급해지면 뿔을 나무에 걸고 발자국을 지워버린대요. 그것이 소설쓰기와 똑 같다는 것이지. 그래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깊은 글쓰기에 대한 통찰은 거기에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건 요즘에 와서 본 것이지만. 그때 삶에 대해서 자기 신념이나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태도에다가 그때 접한 서양현대소설의 경향이 맞아서 그런 식의 결말을 많이 보여줬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면서 늘 변형을 한 가지 해요. 그 소설이 소설 독법을 따라가면 되는데, 나는 결말에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기술 과정에서 할 얘기를 다해버리거든요. 마지막 결말은 독자에게 남겨주는데. 작가가 일상인보다 세상 더 열심히 못산다는 것 대신에 작가는 그러면 뭐냐, 삶의 대한 물음을 대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끊임없이 물어서 삶의 물음의 숲속까지 유인한 다음에 놔두면 어떻게든 길 찾아서 가게 돼 있거든요. 그 길은 당신의 몫이다, 그런 태도를 취하죠. 이런 소설에 대해서 고전적인 독법으로 이 소설 안에 삶의 진실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자기가 안 찾고 작가가 숨겨놨다고 생각하고 찾아가면 없는 것을 찾으니까 어려울 수박에요. 그것을 어렵다고 이야기하죠.

천명관  그때부터 비교적 근작인데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에서도 그렇고, 선생님 소설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많더라고요. 저는 그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 아까 모호한 것 말씀하셨지만 특히나 무소작씨 이야기는 선생님의 자전적인 모습 같기도 하구요.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같기도 하고요. 결국은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 그 작품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시죠.

이청준  제가 『이어도』부분에서 소년 때 고심을 하셨다고 하니까. 거기도 사실은 넓게 이야기하면 이상향 찾기죠. 제주도라는 현실 섬에서 이상향을 이어도로 설정하고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상향으로서만 기능하지 현실로는 기능하지 못하거든요. 고난 많은 제주도의 현실의 삶이 이어도라는 허구 이상향이 있기 때문에 위로받고 언젠가는 거기로 가리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찾아내려면 안 되죠. 그 소설의 주제가 현실로 증명하려는 사실주의자들의 실패를 그리고 곁들여서 해답을 암시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떠올라서 제주도로 왔죠. 결국 이상향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 죽어서 제주도로 돌아왔으니까 이상향은 현실의 제주도라는 것이죠.

천명관  제가 그 점을 간과했는데.

이청준  파도에 떠밀려 왔죠.

천명관  그 당시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는 관념적인 작품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약간 비현실적이고 특수상황 안에 인물들을 가둬놓고. 저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 당시 작품들을 많이 떠올리는데. 이후에는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버려두고 떠나온 남루한 시골살이의 기억들’을 다시 찾아서 ‘길 닦기’라는 표현도 하셨는데 문학적으로 그런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변화가 저는 『이어도』에 이미 예고돼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돌아온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 좀….

이청준  아까 사라진 부분을 조금 더 하자면, 『이어도』얘기가 이상향 찾기였다면 『당신들의 천국』은 낙원 건설이죠. 인류사회에서 끊임없이 이상향과 낙원 건설의 꿈은 이어졌는데 그것이 이뤄진 일은 없거든요. 결국은 다시 지워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다시 다음 세대가 이상향을 꾸미고 또 지우고 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인문주의자 무소작씨 종생기』는 그것을 소설 담론화 과정에서, 결국 소설이라는 것이 현실 너머의 이상적인 희망의 삶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 과정 끝에 이야기로 화하면, 영원성을 부여하면 사라져야 하거든요. 사라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사람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했는데, 그렇게 해서 늘 사라졌다면 아까 말씀하신 다시 돌아가고 하는 부분은, 그래서 그때까지는 삶이 그렇죠, 이항대립적으로 이해를 했죠. 시골살이와 도시살이. 시골살이는 개별적이고 자연적이고 감성적이라면 도회살이는 집단적이고 이성적이고 공리적이고 현실적이고. 그렇게 늘 이해를 해왔는데, 아까 끼어들기라고 했을 때 문학으로도 되돌아보면 끼어들기였어요. 그런 시대를 20여 년 지내다 보니까 그 힘이 소진돼요. 그때부터는 내가 뭐 때문에 여태까지 도회살이에서 버티려고 애썼는가.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것, 소위 내가 무엇이고 내게 있어 삶이 무엇인가. 그때부터 고향이라는 것을 다시 찾기 시작했죠. 고향이라는 것이 요약하면 어머니고 대지고 자기 정체성, 그때부터는 시골로 다시 내려가고. 한 20년 넘어 버리고 잊혔던 고향을 다시 찾는 것은 값을 많이 물어야 합니다. 그것을 길 닦기로 표현했는데요.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항상 원하는 세계는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저쪽에 있는 것 같아요. 서울에 앉아 있으면 시골에 있어야 할 것 같고, 시골에 가면 삶 속에서 부대끼는 서울에 나와 내 문학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늘 여기가 아니라 저쪽에 있어서 갔다가 돌아오고 또 가고. 그것을 작고한 김현은 떠남과 되돌아옴이라고 해서 역감상이라고 해요. 여기서 저쪽으로 갈 때하고 다시 돌아올 때는 변해온다, 저쪽에 것을 묻혀오고, 그 다음에 시골에 갈 때는 도시에서 뭘 묻혀가고. 삶도 묻히고 생각도 묻히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은 뭔가 변해가지 않는가 생각하게 됐죠.



문반들


천명관  방금 김현 선생님이야기를 해서 기억이 났는데 선생님 산문집에서 오규원 선생님에 관한 글을 감명 깊게 읽었거든요. 그  시대 작가들의 관계가 격조 있고 진지하고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한 측면도 있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고, 그런 점이 부럽게 느껴졌어요. 저는 워낙 문단에 늦게 나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왠지 그런 느낌이 아니거든요. 격이 많이 얇아진 것 같아서 소위 문반이라는 것을 대단히 부러워했어요. 친하게 지내시던 다른 작가들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이청준  그때는 우스개로 이야기하면 자연히 해 지면 만나게 돼 있어요. 주머니 사정이 푼푼치 못하니까 해지면 술 생각은 나고, 사람 모이는 데가 주로 출판사였어요. 신구문화사라든지, 《현대문학》, 그때 《문학》이라는 잡지도 있고 그랬어요. 그 사무실에 가면 술 고픈 친구들이 많이 모이죠. 그중에 누군가, 정 안 되면 출판사에 제직하는 누군가가 대포 한잔 사라고 농담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습니다만. 그때 많이들 모였죠. 지금 고인된 사람도 있고 해서 이름을 거명하기는 좀 뭐하지만. 그러면서 그 사람들 중에 잡지에 있으면서 글을 주고 받아야하는 것 처리도 되고, 또 한 가지는 출판사를 내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아주 구분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때 출판사 냈다고 하면 책을 어떤 식으로 청탁하고 내게 되느냐 그러면, “따로 술 한잔 하세” 해서 가면 “나 출판사 한번 해야겠는데, 될까” “해보소” “자네가 주면 하지” “내 뭐 하나 줄게, 해” 그러죠. 그때 인지 찍어 주는 것이 인지가 돈 계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책 모양 만들고 작가가 실제로 체온이, 손이 스쳤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이거든. 그런 식으로 해도 아무 탈이 없었어요. 그런데 15년 전부터는 출판사가 으레 계약서를 가져오는데 그것 읽어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한번은 계약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쓰면 가령 요 작품들은 앞으로 다른 데 못준다고 그러기에 “보소. 이 작품들이 다른 데서 이미 발표도 하고 책도 들어가 있는 작품들인데 당신이 늦게 하면서 누구 보고?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도 못 한다” 했어요. 사실 예전 언젠가 도장 한번 찍고 혼났어요. 작가들은 전집에 들어가면 인세도 나오고 책도 팔리고 그러는데. 한두 군데는 못 들어갔어요. 고소를 하니 어쩌니 하고. 이런 점에서 예전과 바로 대비가 되죠. 딱 한번 도장 찍고 곤욕을 치르고. 지금도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가령 전집 같은 것 하는데 계약서 안 했어요. 오히려 그런 데는 별 탈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아까 그 세대들의 풍속이라고 할까, 사람들의 관계가 문학 속에서 못 믿고 신뢰감이 안 생기면 어떻게 하겠어요.

천명관  그 때는 출판사 근처나 대포집에서 비즈니스나 약속이 다 이루어지는데 요즘은 계약서가 오가고 전화로 청탁이 오가고 그렇죠.

이청준  그때는 이랬어요. 대포라는 막걸리가 쌀술이고, 맥주는 보리술이잖아요. 모처럼 누가 돈이 생기면 맥주 산다는 말을 “오늘은 쌀 술 말고 보리술을 먹을까” 해요. ‘향촌’이라고 하는 맥주 파는 방석집이 있었어요. 한번은 내가 술 살 차례인데 열여덟인가 모여 앉아 있어요. 그 날 당시 860장 짜리 『조율사』라는 장편을 싣기로 하고 원고료를 받았는데, “술 한잔 사거라” 해서, 잠깐 병원에 들렀다가 늦게 도착해 방석집 문을 열어보니 열 몇 명에다가 옆에 앉은 사람까지…. 그날 원고료 봉투, 술값에 마지막에는 차비까지 해서 다 써버린 일이 있어요. 또, 김현이 「소문의 벽」이라는 중편이 350장 되는데 농담으로, “너는 이제 글만 열심히 써. 300장씩 쓰고 원고료까지 받잖아. 너는 글만 써도 앞으로 먹고 살거야” 그래서 그 날 저녁 술 샀지. 한 푼도 못 가지고 집에 갔어.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으레 운반비라고 그래요. 원고료 운반비라고. 낮에 원고료 준다고 하면 점심만 사고, 저녁때 원고료 준다고 하면 비싸게 해서 몇 사람 모이지. 차례로 계 돌아가듯이. 나는 그러대요, 저녁에 사면 많이 사고 낮에 사면 덜 사는 것이 아니라 점심때 먹으면 밤까지 먹어요. 그러고 살았어요.

천명관  그 시대 얘기를 들으면 뭔가 훈훈하고 문반이라는 것이 소중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제가 갖는 큰 부러움 중의 하나입니다. 선생님은 종교가 있으세요?

이청준  없습니다. 우리 때에는 굳이 종교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마음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종교와 구원의 글쓰기


천명관  유치한 질문 하나 드리면요. 사람이 죽으면 육신이 스러지는 것처럼 영혼도 스러지는 것인지, 또는 그 무엇인가 남는 것인지,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청준  그 답부터 먼저 드린다면 내 말이 옳고 진실이라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에게 숙제이지 않겠어요? 죽음의 문제로 소설을 두 편 썼죠. 내 죽음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상정할 수 있을까를 「해변아리랑」으로 쓰고, 소설 제목이 「가위 밑그림의 음화와 양화」인데, 죽음의 모습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 것이지요. 최상으로 생각한 것이에요. 거기서는 삶이 죽음으로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정지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순간의 삶의 정지, 영원한 정지. 내가 어떤 순간에 삶이 끝나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톱모션이 된 것이죠. 차라리 그렇게 받아들이면 죽음이 덜 무섭죠. 실제에서는 아무래도 나는 생명현상이 물리학 용어로 전기작용인 것 같아요, 영혼은 정신작용이고. 누구 책을 보니까 우리 생물이라는 것은 유전자를 운반하는 수레에 불과하다고 그러대요. 생물학적으로는 그 쪽인 것 같고, 정신작용은 전기작용인 것 같고. 전기작용의 근원은 천상 섭리하고 생각해요. 무질서나 카오스는 아니고. 섭리의 움직임은 분명히 있는데 거기 따라서 우리 생명현상이나 세계는 같다, 그런데 종교라는 것은 섭리를 기명화시킨다고 생각해요. 여호와라든지 석가모니라든지 기명화시켜서 집단화하고 세력화하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허약하니까 의지하려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신체계가 필요했으리라. 처음에 종교가 없다고 말하기도 힘든 것이 시골에 물론 유교적인 전통이 있었고 당연히 불교적인 것에 젖어 있었고…. 시골 우리 동네에는 1906년에 첫 교회가 생겼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긴 교회죠. 유소년 때는 거기 다녔고, 찬송가 지금도 안 잊어버려요. 지금 내가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그것의 복합체일 것인데 지금 와서 누구의 이름으로 구획 짓는 것이 좀 부질없다는 생각…. 개인적인 것이지만 현대문학이라는 것이, 가령 인문주의라는 것이 하느님한테 덜 의지하고 사람이 자기 책임으로 세상 좀 생각하고 살아가자 이것 아니겠어요. 기독교 문학도 있고 불교문학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쪽 규율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진정한 현대문학은 신한테 좀 대들어보는 것이 아닌가. 현대문학을 무엇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반문학적이긴 하지만 그런 것이 현대문학의 숙명이지 않을까. 신앙적인 믿음을 갖기 어려운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해요.

천명관  선생님 작품에는 기독교적인 영향이 많이 있다고 느꼈거든요. 동양적인 불교개념에서의 구도라는 개념보다는 구원의 주제들이 오래전 작품부터. 저도 교회를 다닌 적도 있고, 불교신앙에 대해 고민한 시기도 있었는데. 선생님 작품 안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된다는 거죠. 기독교적인 것이 인간에 대해 좀 더 비관적인 시각이 있는 것 같아요. 불교는 우리가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구도라고 하는 것이 치열하게 뭔가를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기독교는 애초에 그런 가능성을 부인하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을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고, 그래서 기독교가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좀더 비관적이다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 작품 안에서는 그것이 절묘하게 서구적인 것과 우리 식의 인간관 이런 것들로 보입니다. 아까 사라진다고 하는 것들도 일종의 절충안 같은 것이 아닐까, 선생님이 바라보는 인간관은 어떤 것입니까.

이청준  종교와 상관해서는 이런 식이었죠. 지금 내 소설에서 기독교적인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은 현대문학 자체도 그렇고 현대문화라는 것이 결국 기독교 정신이 파고들어 온 게 아닌가. 그러면서 신앙과 문학과의 관계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연결될 때 현세적인 삶은 문학의 몫이고, 내세적인 삶은 신앙, 종교의 몫이다라고 일단 편의상 이분을 해놓고 보면 결국 내세까지 몫이 다를 뿐이지 연속성은 가능하거든요. 우리 쪽의 신앙이 기복적인 측면이 강하다 보니까 내세의 구원문제만 생각하고 현세의 삶은 부정적으로 보는 그런 경향이 있었죠. 그 점 때문에 기독교가 현세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주어온 것이 사실이죠. 근자에 와서는 문학이 내세적인 영혼의 구원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종교도 이제는 내세의 영혼 구원을 위해 현세에서 덕을 쌓아야 한다, 현세적인 삶이 내세의 구원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쪽으로 전개가 되죠. 필요한 일정부분을 공유해 가는 흐름이 아닌가 싶어요. 더구나 사회운동에는 기독교의 힘이 강하잖아요. 결국 현세적인 삶의 긍정적인 측면이죠.

천명관  다른 질문을 드리면, 영화 때문인지 최근에 선생님이 글을 한창 쓰실 때보다 언론에 오히려 더 많이 회자되는데 어디선가 선생님이 영화는 광장예술이고 소설은 골방예술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골방이 처박히기를 원치 않는단 말이죠. 우리 문학이 광장으로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것이 문학을 위해서 골방에 있다면 어떻게 대중하고 소통할 것인지 다른 분들보다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요.



광장예술과 밀실예술


이청준  편의상 광장의 예술과 밀실의 예술로 나눠보겠습니다. 이 말의 개념은 최인훈 선생의 『광장』 소설 위주로 많이 사용돼 왔는데, 그때 밀실이라고 한 것은 현실적으로 혼자 한다는 뜻이죠. 영화하는 데 가보면 혼자 하지 않고 협동적으로 하고 있어요. 광장이라는 뜻은 자본이에요.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소설은 볼펜과 종이만 있으면 쓸 수 있는데 영화는 안 그렇잖아요. 두 장르가 만나서 양보해야 할 것은 소설이죠. 큰 자본과 조직적인 작업방식 보고 소설 따라 오라고 할 수는 없죠. 「축제」라는 소설에서 일을 같이 병행해서 해보니까 줄거리가 소설하고 영화하고 달리 갈 수 있는데, 그때는 소설이 양보해야 해요. 소설 자체를 전체적으로 줘버리지는 않고 감독한테 편지 쓰는 형식으로 늘 진행형으로 갔는데요, 그런 뜻에서 광장과 밀실이죠. 물론 소설이 밀실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죠. 소설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물리적으로 혼자 하고, 작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지요. 무엇을 통해 가능하냐면 결국 상상력이죠. 결국은 소설이 광장으로 나가는 길은 독자의 상상력을 빌려서 그 공간을 통해서 나가는 거예요. 쓴 사람은 골방에 앉아 있어도 세계에 있는 독자들과 만나는데 그 통로가 상상력이어서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천명관  선생님은 대중의 눈치를 안 보고 작업을 해오셨는데 뜻밖에 영화를 통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단 말이죠. 요즘 한국 문학이 너무 안 팔린다며 문학위기론이 회자되고, 문단에서도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하는데, 독자들이 문학을 떠나니까 그런 얘기들이 오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청준  요즘 소설 두 편이 동시에 영화화되어 영화를 통해서 소설이 독자 만나는 길을 얻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학생들을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그 친구들도 활자예술, 소설시대는 끝나지 않았나,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 같아요. “소설이라는 작품을 책이라는 완결된 상품으로 만들어서 팔아왔는데 그 시대가 간 것은 사실이다, 상업성이나 광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팔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 대신에 소위 벽 허물기, 영화, 연극, 음악으로 될 때, 근자에는 화가들과 그림과 시를 묶어서 기행기도 내곤 한다. 심지어는 만화까지, 또 다른 식으로는 강연용과 수업용으로 교육하기도 하는 등 이렇게 수없이. 소설이 책의 형태로는 못 팔지만 벽을 허물고 다른 형태의 장르와 섞이면서 길은 더 넓어졌다.”라고요. 재래적으로 해온 소설 생각은 삶에 대한 1차 정보거든요. 문학 안에서도 복합모방이라든지 장르간의 대화를 하는데 다른 매체의 장르하고도 많이 섞이라는 거지요. 유통정보 생산이라고 할까요? 이것을 옷감에 비유하면, 재래적으로 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옷감을 만들어서 옷까지 지어서 파는 것과 같아요. 지금은 그러지 말고 좋은 천만 짜서 여기저기 소용되는 사람에게 팔라는 거지요. 이것이 장르간의 대화고 벽 허물기고 유통이지요. 그 전에 천을 짜서 옷 만들던 사람이 그 대신에 질 좋은 옷감만 짜면 텐트도 만들 수 있고, 등산복도 만들 수 있고, 이불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요즘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너는 요즘  몇 편 팔아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 하겠지만, 실제로 〈밀양〉그것도 쓴 것이 20년 넘었습니다. 〈서편제〉저것도 75년경이었으니까 한 30년 됐어요. 그때 그것 쓸 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문단에서 재미있다는 얘기한 친구도 없어요. 그 시절에 서편제 시리즈, 「벌레이야기」도 마찬가진데 신문에 평도 없고 출판했다는 소리도 없고. 30년 동안 기다린 끝에 다른 장르의 감독이 잠자던 것을 깨워준 것이죠. 제목 달고 다시 나온 것인데. 특히 감독들한테 고맙지요. 내 작품 깨워줬으니까. 하려고 한 이야기는 나도 30년씩 기다렸다는 것이죠. 그렇게 안 걸려도 요새는 아주, 우리가 앞으로 심사할 때 이 작품 영화로도 괜찮겠다 하면, 얼마 후에 보면 이미 그렇게 되고 있어요. 30년 안 기다려도 원단만 좋으면. 자부심을 갖고 좋은 원단 짜는 데 집중하면 비관부터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무에서 숲으로


천명관  최근에 어느 문예지에서 문단의 한 문제점을 짚었는데, 장편소설이 주목을 못 받고 단편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문단의 위기를 불러온 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 보면 단편에 강하신 분들이 있고, 장편을 많이 쓰시는 분도 있지만, 선생님은 장편도 10여 편 가깝게 되고, 단편집도 10여 편 가깝게 됩니다. 각 작품들도 장편과 단편이 두루 알려지고 인정받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우리 문단의 단편 중심 시스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말씀해주시죠.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지만 작업하실 때 장편과 단편 쓸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요.

이청준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독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젊었을 때 소설 시작하고 당선됐거나 그럴 정도 같으면 누구에게나 단편 몇 편은 좋은 것이 있습니다. 대표작 한두 편은. 그런데 장편은 그렇게 안 되거든요. 결국은 저력이라는 것인데. 생각이나 삶의 두께가 두꺼워져야 하고 격도 생기고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문장의 호흡도 그렇고 결국 길게 조금 더 안정적으로 평가 받으려면 장편으로 하는 것이 옳지요. 우리 시스템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한정이 있고 지원도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긴 해요. 장편에 지원하면 장편 하나가 단편 열 사람 지원 받을 몫을 혼자 받고 이런 점도 있을 거예요. 장편은 문학적인 무엇을 걸고 게임하듯 대들어야 쓸 수 있는 것이고. 그 힘이 요구될지도 모르죠. 또 요구된다고 생각하고. 제 개인적으로 작가는 자기균형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오른쪽으로 가는 소설이 있으면 왼쪽으로 가는 소설도 있어야 안심이 되고. 나는 산에 나무로 서있기보다는 숲으로 서있고 싶다고 어디가 쓴 적이 있는데요. 넓어지고자 하는 욕심이고 균형감, 안정감 같은 것 때문인데. 장중단편 꽁트까지도 골고루 이렇게…. 또 각기 다른 형태로 적합한 얘기가 있죠. 이 얘기 형태를 찾다보면 이것저것 생기기 마련인데. 조금 더 그러면 희곡도 쓰고 싶고, 요번에 희곡이 맞겠다 하면 희곡으로 쓰고. 또 그렇지 않습니까. 동양 사람은 체력이 약해서 그런지 나이 먹으면 말이 줄어들죠. 우리나라 시조문학이 발달한 이유도 이것과 상관이 있지 않나 싶어요. “뭐 긴 소리해, 몇 마디면 되지.” 소설 쓰는 사람으로는 요건 몇 마디 짧은 시로 쓰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기고.

천명관  산문집 보면 시가 있거든요.

이청준  차마 시라고는 못하고 시 장난이지.

천명관  최근에 우리나라 시인이 노벨상 후보에 회자되고.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그랬는데요. 우리 문학의 위상이 높아졌고 그럴 만한 자신감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사회에 대한 콤플렉스와 인정주의 같은 것이 작동한 게 아닌가 싶어 민망한 구석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외국 많이 다니면서 외국 작가들도 여럿 만나보신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물론 올림픽 금메달 따는 것과 다른 것이지만, 뭔가 좀 그쪽에도 좀 알리고 그럴 필요도 있을 텐데요. 그런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노벨상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감을 가지고 계신지요.

이청준  노벨상 얘기는 나도 2~3년 전부터 들어왔으니까 에피소드 차원으로 많이 알고 있죠. 어차피 현대문학이 서구장르로 타고 들어왔으니까. 그쪽 평가를 한번 받아야 할 거예요. 말씀 하신 것처럼 받지 않으니까 1년에 한 번씩 고질병을 앓잖아요. 일본이 삼십 몇 년만에 받습디다. 한번 받아야 콤플렉스도 없어질 것 같고.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이 하도 확 달아오르는 경향이 있어서. 어떤 작품이 노벨상을 받으면 쏠림현상이 굉장히 많을 것이라고요. 마치 그것만 문학이라는 식으로 그 병을 5년, 10년 앓을 수 있고. 병은 1년 앓을지 모르지만 후유증은 상당히 가리라고 생각해요. 이렇든지 그렇든지 상을 한번 받으려면 수준으로 보면 우리 소설이나 시나 받을 수 있는 수준에 가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뒷받침되는 여건 형성이 돼야 하는데 국가의 문화적인 신인도(信認度)도 문제가 될 것이고. 신인도 문제에서 밑바닥이 넓어지려면 어떤 작품 한두 작품, 어떤 작가 한두 명 갖고는 천재가 났으니 이 사람에게 주자 이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20년 전에 파리에서 서점을 구경했는데 거기 널따란 벽에 스페인어권 책이 쫙 꽂혔어요. 다 팔리는 책이에요. 그쪽 나라 출판사들이 팔아보겠다고 번역해서 서가에 내놓은 것이거든요. 우리 책은 한 권도 없었어요. 더러 얘기되다시피 파리는 그런 식인데…. 그때 느낌은 우선 우리 책이 외국 출판사가 이 소설이, 시가 재미있으니까 이것 우리가 사다가 번역해서 서점에 늘어놓으면 장사가 좀 되겠다, 그래서 상업출판 되는 책이 몇 십 종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안 가봤으니 모르지만 거기 우리 책이 몇 권이나 팔리고 있을까. 적어도 이 사람 아니면 이 사람. 프랑스에는 이 사람이 유력하던데 스웨덴 현지에서는 또 이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댓 사람 있고… 이런 식으로 폭이 좀 있어야 돼요. 앞에 이야기들이 전부 걸리는 문젠데, 체계적으로 번역해서 한국문학을 제대로 알려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몇 사람의 어떤 작품들을 좋은 번역자가 한 사람의 작품이라도 먼저 알리고 계속해서 알려가야지요. 또 작가별로도 전략을 갖고 각자 작가가 뛰더라도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긴밀한 뭔가가 있어야 해요.

천명관  큰 플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이청준  번역 지원처도 있지만 거기 사람이 많으니까 나눠주기 바쁘죠. 저쪽에서 책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지원금 넘겨다보고 이 사람 출판하겠다고 해서 그게 잘못 번역돼 나가면 그 사람 책은 다시는 거기서 번역 안 하죠. 그 나라에서 심지어는 한국문학 별것 아니라는 이야기 들을 염려도 있고. 그런 면에서도 전략과 플랜이 필요하죠.

천명관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개별적으로 출판되는 것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 작품도 많이 번역됐죠?

이청준  번역은 좀 된 편이죠. 지금도 뭐…. 이제 난 지쳐서. 번역 지원은 한다고 하지만, 번역돼 외국에 나가 있는 책이 저 쪽에서 어떻게 돼 가는지 관리도 좀 하고, 출판사 소개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가령 계약서도 아무 소용없는 나라가 있어요. 책 몇 권 보내주고는 시치미 뗀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따져요? 그런 면에서 관리가 필요하고 연속성이 있어야 하지요. 10년 전에 번역하겠다고 한 사람이 아무 소식 없을 경우 잊어버리고 있기도 하지요. 지금은 컴퓨터가 있어서 파일화시켜 보면 누구에게 어떤 계약을 했는지 알지만, 그 전에는 누구에게 승낙서를 써준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래서 또 저 쪽에서 항의하고. 그것 번역해서 출판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덕도 없는데. 송사에 휘말릴 염려가 있어서 안 해, 다 싫어. 요즘 그런 식이고. 그 사이에 개별적으로 인연 있는 곳에서 한두 군데…. 거기 하고만 하지.

천명관  외람되지만 노벨상 이야기하면 세계사적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선생님 작품 중에서 그런 것에 근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작품이 있다면요.

이청준  엊그제 호암상 받을 때 그랬어요. 노벨재단 양반이 와서 말을 부드럽게 바꿨지만, 아까 그 얘기했어요. 노벨상은 바깥 세계의 우리 문학에 대한 평가니까 하나의 숙제거리지만 나는 노벨상을 이미 받은 것으로 하겠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굉장히 젊거든요. 나도 한 발이라도 더 나가려고 애를 쓰겠지만 이 사람들이 틀림없이 이 상의 위상과 내실을 거기까지 채우고 높여 가리라 믿어요. 내가 안 받더라도 이미 거기까지 와 있거나 앞으로 누군가는 받을 것이다, 호암상의 위상을 거기까지 올려주고 그것으로 받은 것으로 치자, 우리 자존심이나 자긍심을 그렇게 갖게 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그 쪽 반응이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데 힘들여 쓴 것을 생각하면 『당신들의 천국』을 앞세우고 싶어요. 하지만, 작품을 개인적으로 아끼느냐 안 아끼느냐 하는 문제는 좀 다릅디다. 자기 문학적인 욕심으로 공리적인 생각을 쓴 작품은 애정이 가지 않아요. 제일 그래도 개인적으로 오래 떠올리고 아끼고 싶다고 그럴까, 잊히지 않는 작품은 고백적으로 쓴 작품이지요, 자기 삶에 밀착해서. 「눈길」이나 『남도 사람』시리즈라든지. 공리적인 욕망으로 쓴 것은 시의성하고 많이 관계가 돼요. 『언어 사회학 서설』하고 『남도 사람』시리즈 하고 같은 시기에 썼죠. 그런데 한 쪽은 사회성, 한 쪽은 고향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인데 지금 돌아보면 『언어 사회학 서설』은 평자들의 논의에는 나와 있지만 읽는 사람은 없거든요.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남도 사람』은 영화도 되고 이야기도 되지요. 그런 것을 보면서 결국 문학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자기 삶을 쓴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진정성이 제일 문제인 것 같아요. 꿈의 높이나 공리적인 문제보다는 자기 진정성,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통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요.

천명관  진짜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거죠?

이청준  꼭 직접적으로 자기 얘기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체질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세계. 물론 궁극에 가서는 자기 이야기가 되겠죠.



자기구원과 씻김질의 이야기


천명관  현재 쓰고 계신 작품이 있으면 귀띔 좀 해주시죠.

이청준  환갑 지나면서 나는 이제 작품이라고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살면서 예순 될 때까지 했으면 소진됐지 뭐가 더 남아 있겠나 생각했지. 어느 시기에 서당에 다녔다고 했더니 이인성씨가 “정말로 서당에 직접 다니셨어요? 서당에 직접 다닌 마지막 세대겠네요”해서 그때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그때 떠오른 서당 이야기 풍경들을 처음에는 어디에 써볼까 싶다가도 ‘에이, 뭐 그런 얘기를!’ 그랬지요. 환갑 지나면서 소설 안 쓰겠다고 생각한 그때부터 문학도 정보경쟁이었거든. 그렇다고 내가 정보를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정보매체에 입력된 것을 꺼내야 하는데 나한테는 과거에 들었거나 머릿속에 든 것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꺼낸 것도 얘기 정보일 수 있겠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기록의 차원에서 장난을 쳐볼까, 장난삼아 놀이 삼아 적어볼까 했지요. 그 무렵 외국작가와 얘기 중에 아픈 질문을 하나 받았어요. 신화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유소년 때 살았던 시골마을이라는 데가 작은 신화의 동네인데, 동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 마을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이 전부 엄격해요. 옛날 혼사 풍속, 요새로 치면 서리 풍속도 규율이 엄격해요. 어디까지는 용서가 되지만 어디까지는 안 되지요. 이게 그 시절의 공동체 규율인데 그 규율만으로는 못 삽니다. 어떤 공동체든 설화적인 전혀 엉뚱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인 불효자, 힘 센 사람, 오입꾼, 편작 같은 의원, 씨름 잘하는 사람 들이 있어 각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지요. 그렇게 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 설화적이거나 신화적인 흔적 같은 것, 거기에 우리의 소위 집단정체성에 대한 뭐가 있겠다 싶어서 그것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데, 소설은 아니죠.

천명관  우리가 구체적으로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언제쯤 될까요.

이청준  일부는 어디다 썼어요. 《본질과 현상》이라는 계간지에 썼어요. 3회까지 하고 4회로 끝내는데 그냥 옛날 얘기예요.

천명관  저도 작년에 제 할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어요. 아쉬웠던 것이 할머니께 더 많은 이야기를 못 들었다는 것……. 100세니까 한 세기잖아요.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까 정보 이야기 하셨지만 서당 이야기 같은 게 더 귀한 정보가 아닐까요?

이청준  그런 생각을 좀 했죠. 그것이 새로 쫓아가지 않고 기왕에 입력된 정보다. 그런 면에서 경쟁할 필요 없는.

천명관  마지막 질문을 드리자면, 아까 부끄러움 때문에 도회와 도회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 부끄러움과 콤플렉스가 글을 쓰게 했다고도 하시고, 글의 자기 구원과 씻김질 같은 이야기도 하셨는데 돌이켜보면 씻김질이 많이 됐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청준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눈길」 마지막 장면이, 노인이 삼거리까지 와서 아들을 보내고 새벽 눈길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겁니다. 아들이 떠났거든요. 저는 결혼하고 2년 뒤에 어머니를 보러 갔어요. 이 이후로 삼거리에서 그날 저녁에 어떻게 가셨나, 돌아갈 집이 없었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셨나 묻지를 못했어요. 만약에 그 대답이 나오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죠. 며느리가 할머니 같은 시어머니 앞에서 물정을 모르니까 물어서 결국 눈길 마지막 장면 얘기는 들었지요. 그때까지 뭔가 그 일만 생각하면 답답하고 무서워서 그 장면을 떠올리려 하지 않고 도망갔어요. 그런데 그 소설을 쓰고 나서는 두렵지 않고 그 노인네가 거기 서 있던 것도 정면으로 보았지요. 그 세월 동안 쭉 거기 서 있었어요. 소년도 거기를 못 떠나고 그 노인을 보고 있었고. 그 소설 쓰고 나니까 그 노인네도 갔어요. 얘기를 들었으니까. 적어도 더 어려운 데로 갔더라도 거기 안 서 있죠. 그래서 노인을 씻겨드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노인을 씻겨드린 것이 아니라 나를 씻겼어요. 그 답답한 노인의 새벽 영상이 자신에게서 사라졌으니까. 소설 쓰는 것이 내면의 본질을 못 견뎌 쓴 것 아니겠어요? 그것을 한편 쓸 때마다 나는 그런 씻김굿을 한 번씩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농담으로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질문자가 해산통에다 비유를 하대요. 소설 한편 쓸 때마다 여자가 산통 겪듯이 한다는데 어떻게 그것을 수없이 겪으면서 또 쓰고 쓰고 하느냐,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해요. 나는 애기 안 낳아봐서 모르지만, 여자들이 그렇게 해산통을 앓다가도 딱 아이 낳는 순간에 모든 것 다 잃어버리고 성취감과 충만감에 황홀해진다더라, 그때 그랬어요. 또 잊어버리고 해산통으로 가는 이불속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라고.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책에서 읽은 글 그대로죠. 내면의 욕구를 견딜 수 없을 때…. 김현이 프랑스에 가 있을 때 엽서를 한 장 보냈는데 잊지 못할 이야기를 적었어요. ‘소설 안 써진다고 그렇게 초조해하지 말아라. 니 몸속에 고통이 가득 차서 니가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니 전체가 고통덩어리가 될 때 그때 써도 된다. 지금 할 일은 고통을 참을 때까지 참는 일이다.’ 우리가 즐거워서 만세 부르자고 소설 쓰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면 그 고통이 한 번씩 자기 안에서 씻겨나가는 정화감이라든지 성취감을 느끼리라고 생각해요. 작가에게 소설은 밥 먹는 방편도 되겠지만, 그런 작가의 몫이 있어야 견디고 계속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천명관  선생님은 소박하게 그때의 부끄러움이 글을 쓰게 했다고 말씀하시지만, 긴 시간 씻김질을 하는 사이에 선생님이 나무가 아니라 숲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이제 겨우 한권 냈지만 어떤 선생님이 농담 삼아서, 약간 두껍다 보니까, “너 혼자 쓴거냐” 해서 “저 혼자 쓴 것이 아닙니다” 했습니다. 제가 알게 모르게 읽었던 이야기와 언어들이 제 안에 육화된 것이 저도 모르게 나온 것 같아 제가 혼자 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작품으로 알게 된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뵈어서 너무 기쁘고 좋은 자리였습니다. 앞으로 아까 말씀하셨던 신화 이야기와 서당 이야기, 빨리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이청준  고맙습니다.《문장 웹진/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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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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