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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2000년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낯설거나 혹은 낯익은

  • 작성일 2012-09-27
  • 조회수 3,199

 

[좌담]

2000년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낯설거나 혹은 낯익은

 

─ 젊은 소설가들의 대화

 

 

 

일시 _ 2012. 8. 22

장소 _ 아르코미술관 3층 세미나실

사회 _ 고봉준(문학평론가)

좌담 _ 심재천, 윤보인, 정용준, 최민석(이상 소설가)

 

 

 



   
고봉준 _ 안녕하세요? 문장 웹진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고봉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장 웹진 식구 전체를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좌담의 기획 의도는 ‘젊은 소설가들의 방담’인데요, 최근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거나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을 모셔서 문학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이 취지라면 취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잠시 네 분의 프로필을 살펴보겠습니다. 등단 순으로 말씀드리면, 윤보인 선생님이 2007년 《문학사상》으로, 정용준 선생님이 2009년 《현대문학》으로, 최민석 선생님이 2010년 《창작과비평》으로, 심재천 선생님이 2011년 ‘중앙장편문학상’으로 각각 등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윤보인 선생님이 소설집 『뱀』을, 정용준 선생님이 『가나』를, 심재천 선생님이 『나의 토익 만점 수기』와 『본심』을 각각 출간하셨어요. 최민석 선생님은 아직 소설집이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좌담이 공개되기 전에 책이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좌담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최민석 씨가 2010년에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라는 취재 에세이를 출간했고, 최근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라는 ‘정통 에세이’를 출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2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장편 『능력자』가 10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충분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소 급박하게 진행을 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평소에 서로의 작품들은 좀 읽으셨나요?

 

   심재천 _ 네, 단편을 좀 읽었습니다.

   정용준 _ 저도 뭐, 대부분 읽은 것 같은데.

   고봉준그래요?

   정용준 네. 단편들 읽었고요.

   윤보인 _ 저도 읽었습니다, 네.

   최민석 _ 저는 시간이 없어서 일단 샀습니다. 그래서 판매 수익에 도움이 되게끔.

   정용준 심재천 작가님 작품은 다는 못 읽고 읽는 중입니다.

   최민석오면서 『가나』랑 심재천 선생님 작품 조금씩 읽고 왔고요, 보인 씨 작품은 예전에.

    고봉준심재천 선생님도?

   심재천네, 세 분이 쓴 작품들 두 편 이상은 다 읽었어요.

 

    고봉준좌담의 후반부에서 네 분의 작품을 대상으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모든 작품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인상적으로 읽은 것들만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최민석 선생님의 작품은 출간된 게 없어서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등단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는 많이들 읽으셨을 테니까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겠습니다. 먼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나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눠 볼까 합니다.

 

   심재천저는 회사를 떠나고 싶어서 소설을 쓰게 됐어요. 이런 이유로는 안 되잖아요? 도움이 안 될 텐데.

 

    고봉준아니오. 그것도 도움이 될 듯한데요. ‘소설’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심재천월급쟁이 신세가 너무 싫었어요. ‘회사’라는 매개 없이 누군가와 직거래하고 싶었어요.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도 싶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소설가는 출근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 단순한 이유가 가장 컸어요. 그게 실질적으로 소설을 쓰게 된 계기예요. ‘직업’으로서 소설가를 선택하게 된 계기요. 그 이전에는 소설에 뜻이 있으면서도 판돈 전부를 걸 만큼 모험적이진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던 시기에는 순수한 마음이 컸어요. 기성작가들이 쓰지 않는 걸 쓰겠다는 야망이 있었어요. 하지만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해도 계속 떨어지니까 좌절감이 심해서 도중에 그만 변절해 버렸어요. 초반 2년까지는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썼어요. ‘기존 소설을 다 뒤집어엎고 싶다’는 건방진 의욕이 철철 넘쳤죠. 하지만 2년 내내 등단에 실패하자 슬슬 교활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원래는 소설을 쓰기 위해 등단 관문에 도전하는 게 정상이죠. 좋은 소설을 쓰는 게 먼저고, 등단은 부차적인 절차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등단을 위해 소설을 써대는 ‘공모 사냥꾼’이 됐어요. 본말전도죠. 나중에는 아주 속물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쓴 게 당선이 됐어요. 그게 제 데뷔작 『나의 토익 만점 수기』예요. 이 작품은 제가 진짜 쓰고자 했던 소설은 아니에요. 등단을 위해서 심사위원들이나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들, 혹은 재미있어 할 만한 것들을 예측하고 계산해서 쓴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략’의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저는 그 책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부끄럽거든요. 속보이는 전략들이.

 

    고봉준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왜,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기존 소설을 다 뒤집어엎고 싶다’고 생각하셨는지…….

 

   심재천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뭐, 시건방진 생각에 불과했어요. 초심자들이나 하는 생각이죠. 의욕만 앞서는…….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으면서 ‘이거 좀 답답하지 않나?’ 하면서 기존 소설에 혹평을 내리는 찌질이. 기성 소설에선 죽음이나 폭력, 비애, 철학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보기엔 덜 여문 것 같았고, 순수문학은 으레 그런 주제를 건드려야 한다는 공식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았어요.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 같았죠. 습작을 시작할 때 제겐 기존 소설과 다른 것을 써보겠다는 의지가 있었어요. 일단, 죽음이나 불행 같은 무거운 소재가 주는 자동적인 비장미를 피하자고 생각했죠. 습작 시기 초반의 일이에요. 그렇게 순수하게 출발해서 쭉 밀고 나갔다면 정말 좋은 작가가 됐을 텐데. 지금은 『나의 토익 만점 수기』로 데뷔했기 때문에 코미디 작가가 되어버렸어요.

 

    고봉준최민석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최민석 _ 네. 저는 폭풍이 몰아치는 어느 밤, 언덕에 올라 “자, 이제 소설가가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사실 이 질문이 부담스러워 그랬습니다. 불순한 의도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떤 심정이냐면…… 음, 1학년 때 학과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2학년 선배들이 와서 꼭 물어보잖아요. “너 지금 행복하냐?”, “아니오, 안 행복한데요”, “너의 불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 그러면서 철학적 담론이 시작되잖아요. 그런 질문을 받는 심정과 비슷해요. 그런 질문을 받는 신입생들은 사실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이나 의지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상황파악이 잘 안 된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문학적 포부나 열망 없이 어쩌다 보니 시작을 한 케이스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취직해서 잘 지내고 있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갑자기 이상하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회사를 그만두기 어려운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가지고만 있었는데, 다행히 회사에서 제가 할 수 없는 보직으로 이동을 시켜 줘서 마음 편하게 사표를 썼어요. 그리고 원래 쓰고 싶어 했던 에세이를 쓰려고 했죠. 저는 소설보다는 원래 에세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허구의 이야기보다는 진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그때까지는 몰랐어요. 한국 문학계의 구조라든지 현실을요. 저는 에세이를 쓰면 책을 낼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에세이를 쓰려면 ‘반기문’, ‘박지성’, ‘김연아’가 되거나, 아니면 시인이나 소설가가 돼야 하는 거더라고요. 제가 대학생 때 시집을 낸 적이 있는데 저는 시를 써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래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현실적인 수단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죠. 소설을 쓰면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를 마음껏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죠. 장편소설을 써서 안 될 경우에는 데미지가 너무 크니까 단편소설부터 쓰기 시작한 겁니다.

 

   윤보인저는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다만, 책 읽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늦은 밤에 혼자 책 읽을 때의 비밀스러운 느낌 같은 것들. 뭔가 과거를 파헤치는 세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혼자 소중한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희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고. 특히 어머니께선 제가 책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인생이 굉장히 복잡해진다고, 보다 명확하고 심플한 세계로 가야 한다고 엄마는 이야기하셨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말이면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 근처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가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곤 했던 기억이 있네요. 나중에 독립적으로 혼자 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지만, 그때는 그냥 다른 세계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 아마도 이십 대 초반에 - 이런저런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책을 다시 읽으면서 이쪽으로 오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봉준정용준 선생님은?

 

   정용준 네. 저는 소설을 잘 써서 등단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등단을 하면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생각 같은 것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 혹은 소설과 관련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평소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지도 않고 뭐랄까, 문학에는 관심 자체가 없는 청춘을 보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군대를 가게 됐어요. 이등병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 읽는 거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무반에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전역한 선임병 중에 문창과 학생이 있었나 봐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라곤 이상문학상 수상집, 동인문학상 수상집 같은 문학과 관련된 책만 꽂혀 있었습니다. 취사선택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책들을 읽었지요. 그런 이상한 글들은 그때 처음 읽어 봤어요. 그러니까 문학의 첫 경험 같은 것이지요. 저는 그 당시 문창과 학생도 아니었으니까. 더더욱 그런 종류의 책들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독후의 남는 느낌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지요. 뭐랄까, 글이 좋다, 안 좋다가 아니라,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더라고요. ‘이게 뭐지?’ ‘왜 이상한 기분이 들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었던 소설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해피엔딩이거나 새드엔딩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독후감이 분명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읽었던 소설들은 그런 구분과 판단을 쉽게 내리기 어렵더군요. 희망을 준다거나 감동을 준다거나 가치관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닌 소설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에도 기여하지 않는 무용한 소설을 읽으면서 ‘하…… 이상하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좋았던 작가들의 이름을 메모해서 휴가 때 서점에서 소설책을 구입하기도 했고 좋았던 문장 밑에 밑줄을 긋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문학적인 독서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독서를 통해서 제가 느꼈던 것들은 일종의 공감 같은 거였어요. 뭔가 이해받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그런 개념이라기보다 이상한 발견 같은 거였어요. 소설 속의 어떤 인식과 생각들 인물의 회의감 같은 것들이 오래 전에 생각했던 부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렇게 소설을 계속 읽어 갔어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니까, 공감이 필요한 부분이 내 안에 분명히 더 있는데 그 공감을 이끌어내 주는 텍스트를 찾을 수 없게 되더라고요. 갈증? 혹은 불만족? 같은 것들이 내 안에 생기면서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쓰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내가 써볼까?’ 그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일기나 글짓기 같은 글을 써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문창과를 복수 전공했고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쓰고 싶은 대로 써지는 게 가장 꿈꾸는 소설쓰기의 단계인 것 같아요. 어떤 이미지가 막연하게 떠오르거나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면 마음속에 그려지는 이것을 가장 진짜에 가까운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쓰기의 욕망이 좀 생기더라고요. 그런 의미로 저한테는 소설 형식이 맞았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힘들고 주로 잘 안 됐지만 정말 즐거운 일이었지요. 저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와 과정들이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의미로는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고봉준문단에서 중견이나 원로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그분들에게 ‘문학’은 필연의 산물이었던 것 같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고, 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시거든요. 그런데 40대 정도로만 내려와도 필연적인 과정이나 의지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는 분들은 별로 없더군요.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사람도 거의 없고요. 이건 ‘장르’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더군요. 딱히 ‘소설’이나 ‘시’여야 했던 이유가 없었던 거죠. 여러분들은 왜 소설을 선택하셨죠?

 



  
정용준
저는 사실 처음에는 제 자신이 시 같은 형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저는 글쓰기를 해왔던 사람이 아니었고, 우연한 기회에 써보기 시작한 거였는데. 일단 시는 저한테 너무 어려웠고.

 

   고봉준왜요?

 

   정용준 시를 통해서 느껴지는 게 너무 막연했어요. 독서의 경험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시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막연히 좋고 막연히 이상했어요. 그 막연함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스스로 시를 써보려고 할 때는 굉장히 어려움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보다 분명하고 명징한 데가 있었어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를 담는 형식을 고민할 때 저한테 좋은 방식이 희곡이나 소설이었는데, 나중에는 소설이 좋더라고요. 소설은 하나의 형식이지만 그 형식 안에 수많은 방식과 장르가 있는 것처럼 소설을 쓸 때 소설 형식을 고민하거나 발견하는 것도 좋았어요.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작가가 되어야지’ 하면서 글을 쓰는 이들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뭐랄까, ‘작가가 좋나?’ 이런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고 책도 냈지만 글을 쓰는 게 제 삶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거든요. 작가라는 정체성이 저에게 기여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가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작가가 사회적인 개념으로 혹은 직업적인 개념으로 굉장한 캐리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고봉준윤보인 선생님도 마찬가지인가요?

 

   윤보인저도 그거를 잘. 제가 한번 생각해 본 적은 있는데. 몇 가지로 명확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좀 어렵겠지만. 전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고 싶은 그런 게 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요. 그때 교실에서 제가 「춘희」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그 책을 빼앗아 가시더라고요. 이유를 알고 싶다고 제가 물어봤죠. “네 나이에 읽기엔 이 소설이 너무 야하다” 라고 하셨는데 저는 납득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 어른들의 세계가. 다시 그 책을 돌려받고 싶어서 매일매일 찾아갔는데, 한 2주 3주 걸쳐서. 3주 후에나 돌려주시더라고요. 그랬던 기억. 책을 펼쳤을 때 나에겐 위안이 되는 어떤 세계가, 어떤 사람은 차단을 할 수 있구나. 그런 게 굉장히 의문스럽고 또 비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고봉준최민석 선생님은 어땠나요?

 

   최민석네. 아까 얘기했지만, 시는 제가 취미 이상으로 쓸 수는 없을 것 같았고요, 소설은 직업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실적으로 소설을 택했어요. 사실 옛날 선배들은 문인이 되고 싶었지만, 요즘 세대들은 그런 친구들이 많지 않잖아요. 저는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거든요. 그래서 철저히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그런 생각만 줄곧 해왔어요. 제 이야기의 서사 전개 방식은 영화를 보면서 터득한 방식이지요. 전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됐는데, 첫 번째 요인은 현실적으로 소설은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쓸 수 있는데, 영화는 많은 장비와 투자자본과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저의 성격 탓인 것 같아요. 영화는 제가 아무리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더라도 촬영감독이 어떻게 촬영을 하느냐,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 투자자의 의견이 어떻게 반영되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굉장히 많이 달라지고, 또 협업도 해야 하는데, 저는 한편으론 그런 걸 즐기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성격상 그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물론 편집자들과 협의를 하고 또 수상작일 경우에 심사위원의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을 하는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매체에 비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꽤 담아낼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돼요.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고, 그리고 노트북이 없어도 되죠. 펜과 종이만 있어도 되니까. 그것만 있으면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소설을 써요.

 

   고봉준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읽으면서 굉장히 영화적이라는 느낌 저도 받았어요. 이건 영화로 만들면 ‘딱’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심재천 선생님은?

 

   심재천앞서 고 선생님이 지적하시기를, 중견 혹은 원로 소설가들은 ‘소설이 내 운명이다’라고 말하는데 젊은 작가들은 별로 그런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고봉준그러니까 어른들에겐 대개 ‘장르’ 선택에 필연성이랄 게 있더라고요. 젊은 소설가들의 경우에는 그게 명확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심재천젊은 소설가들에게도 소설을 쓰는 필연이 있어요. 다만, 그런 걸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게 촌스러운 시대가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소설,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 이런 거 있잖아요. 사실 그런 심정은 저도 갖고 있지만 밖으로 얘기하기가 부끄러워요. 너무 비장하잖아요.

 

   고봉준아, 비장해서요?

 

   심재천네. 아마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이거 아니면 끝장’ 각오를 하고 쓸 거예요. 입으로는 “시간 남아돌아서 소설 쓴다” 따위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위악이죠. 자기 전부를 거는 도박 없이는 소설 쓰기가 힘들다고 저는 생각해요. 사실 그런 각오 같은 건 소설가의 내면에 다 베이스로 깔려 있기 때문에 ‘소설이 당신에게 운명이오?’ 하고 물어보면 질문하는 사람도 멋쩍고 대답하는 사람도 부끄러워지는 거죠. 왜 소설이란 장르를 택했느냐 하면, 제게는 소설만이 제 이야기를 제대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TV 드라마 보기가 상당히 힘들었어요. 사람을 현혹시킨다는 느낌, 바보 취급한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어요. “이런 빤한 스토리로 내 심금을 울리려고 하다니 너무 뻔뻔하다” 투덜댔고요, ‘싸구려 감동 가지고 거저먹으려고 하네’ ‘시청자에게 너무 아부를 떨지 않나’ 하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런데 소설은 다르더라고요. 예를 들어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이런 작품들처럼 누구 눈치 안 보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신이 저한테는 굉장히 와 닿았어요. TV와 함께 영화도 저는 불만이었어요. 너무나 많은 클리셰들, 비장미, 감동 코드들이 절 지치게 해요. 물론 좋은 예술영화도 있지만요. 상업영화 대부분은 주인공이 멋있고 정의롭고 싸움을 잘해요. 망가지는 역할을 맡아도 그들은 멋있죠. 저는 그런 꾸밈이 인간의 실제 모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요. 문학이나 예술은 그런 영웅주의의 거품, 빤한 감동에 가려진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TV, 영화와 멀어지게 됐고 진짜 소설, 소설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진짜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소설에 끌렸어요. 흥행 걱정 없이,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골똘히 제 앞만 보고 가는, 그런 태도가 제게 와 닿았어요. 그러니까 제게 소설 장르는 필연이에요. 다른 거 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고봉준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죠. 원래는 등단 전후의 과정에 관해 듣고 싶었는데, 지금 문득 생각하니 이 좌담을 접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가장 좋은 질문과 답변은 등단 전후의 얘기보다 등단작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등단작들이 다 강렬하잖아요. 그 강렬함이 있어야 등단이라는 게 가능하니까. 각자 등단작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과정을 들려주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윤보인 선생님부터 말씀하시겠어요?

 

   윤보인저는 등단을 했을 때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스물아홉 살 때 십이월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서른을 앞두고 좀 막막하잖아요.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고,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신춘문예에 한번 내보고 싶어서 방 안에 앉아 글을 고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전이었는데 《문학사상》 편집자께서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렇구나. 오늘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전에는 직장 생활하면서 계속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보면 저를 다독이고 추스르고 위로하는 과정에 불과했는데요. 사실 부모님께서 굉장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는데. 왜냐하면,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말씀드렸을 때,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연극이나 사진, 드라마 하는 분이 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예술적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도전의식이 좀 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장하다기보다는, 아프리카에 홀로 가서 횡단해야겠다는 그런 느낌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등단 전에는 갈등이 많았는데요. 제가 「뱀」이라는 소설을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던 건 아니었는데, 처음엔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올랐어요. 제가 그 당시에 헌책방을 좀 자주 갔었고요. 그것이 저에게 어떤 구원이나 안식처처럼 느껴졌는데, 거기서 정말 고독하고 외로운 어떤 한 사람이 사람과 소통할 수 없고 뱀을 키우고 있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었고요. 그런데 그것을 책상 속에 넣어 놓고 있다가, 어떤 느낌은 있었습니다, 만약 등단이 된다면 이 소설이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은 막연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한테 보여줄 때는 좀 많이 혼나기도 하고. “이거는 안 되겠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좀 더 고쳐야 되겠다는. 그런데 저는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갔고요. 그래서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갈등과 방황이 좀 많았다면, 등단 이후에는 글쓰기로부터 조금 더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고봉준그럼 최민석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나요?

 

   최민석일단 에세이를 쓰고 싶은데, 에세이는 소설로 데뷔를 해야 나중에 쓸 수 있으니까, 그러면 일단 소설을 쓰자, 장편은 내가 소설을 써본 적도 없으니까 단편부터 시작을 하자, 이렇게 해서 책상 앞에 앉았죠. 책상 앞에 앉아서 어떤 소설이 상을 받는가 고민을 해봤는데, 수험생 같은 마인드가 되는 거예요. 수능 대비전략 짜는 것 같고. 이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출판사와 신문사의 성향을 분석해서 지금까지 나온 작품 중에 없었던 게 뭐고 있었던 게 뭐고. 또 이걸 토대로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너무 복잡한 거예요. 그러지 말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를 생각해 보자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려고 했는데. 사실 저는 소설을 쓰기 전에 소설을 끝까지 읽어낸 게 두 권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뭐가 소설인지 모르는 거죠. 뭐가 문학인지도 모르는 거고. 소설이 어떤 식으로 씌어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냥 내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는 하나의 목적을 가졌어요. 내가 여태까지 왜 유명한 많은 소설책들을 펼쳤다가 다 덮었는가. 그러한 점들을 배제하고 쓰자고 생각을 했죠. 저는 굉장히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첫 문장이 마음에 안 들면 덮고, 첫 문장이 마음에 들어도 첫 문단이 마음에 안 들면 덮고, 첫 문단이 마음에 들더라도 첫 페이지가 마음에 안 들면 덮었어요. 그러니까 처음이 강렬해야 한다. 영화를 보고 자랐으니까. 007류의 첩보영화는 서사와 상관없이 항상 초반 20분에 뭔가 터지고 그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잖아요. 그러니까 결코 첫 장이나 둘째 장에서 독자가 덮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첫 문장을 뭔가 엉뚱하게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 이름이 떠올랐어요. 지금 정확히 생각할 순 없는데 대충 말하자면, “내 이름은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블라블라블라블라 초이아노프스키다.” 이게 첫 문장이었죠. 그래. 일단 첫 문장이 기니까 뭔가 차이점은 있어. 그럼 이걸 수습하자. 내 이름이 왜 이렇게 기냐면 선조의 이름이 들어가고, 그 영광을 이어받아…… 라는 식의 장광설을 풀다 보니 또 길어지더라고. 너무 긴데? 그럼 좀 짧게 쓰자. 길고 짧게 쓰다 보니까 리듬감이 생기고 이걸 계속 수습하려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뭔가 기존의 것과는 다른, 그러니까 기존의 것들이라 함은, 여성 작가나 운동권 출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깊은 고독, 고민, 그것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나까지 그걸 답습하면 안 될 것 같고 좀 크고 황당한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해서 이렇게 된 거죠. 자꾸 벌리다 보니까 수습을 하기 위해서 앞의 문장이 뒤의 문장을 끌어가고, 작가가 문장을 수습하려고 허겁지겁 달려가다 보니까 초고가 완성이 된 거예요. 한 세 시간 정도 화장실도 안 가고 숨차게 쓰고 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 나중에 제가 마라톤을 한 번 완주했는데, 마라톤 완주했을 때만큼 힘과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 같아요. 그날은 잤어요. 그냥 뻗어서. 그 다음날 읽어 보니까 조금 유치한데, 이런 말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그냥 읽어 보니까 뭐 나쁘진 않은데, 생각해서 그걸 일단 내버려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속에서는 ‘이게 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전의 것들을 보니까 굉장히 한 문장, 한 문장에 깊이가 있고, 앞뒤로 이끌어 주는 메타포가 강렬하고, 시대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더라고요. 거기에 비해 제거는 굉장히 유치하고 조악하고 어떻게 보면 약간 장난스러운 만화 같아서. 일단 한 편은 썼으니, 이제 기성 작품처럼 스타일에 맞춰서 야심작을 따로 쓰자고 생각해서 한 편을 썼습니다. 「쿨한 여자」라고 제 야심작인데. 어째 그거는 떨어지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가 당선돼서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하는 마음으로 되게 얼떨떨하고 황당한 기분으로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봉준심재천 선생님은 아까 잠시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은데요. 전략적이었다고.

 

   심재천네. 물론 강렬함이 필요하긴 해요. 하지만 화끈한 걸 보여주겠다는 의욕만 앞세워서는 되는 일이 없죠. 자기가 진짜 표현하고 싶은 진정성, 그것이 있어야죠. 제 경우 한 손에는 강렬함, 다른 손에는 진정성을 쥐고 잘 버무리다 보면 단편 하나가 나오곤 했어요. 저는 장편으로 데뷔를 했지만, 한 2년 반 동안 단편만 썼어요. 강렬함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었어요. 속된 말로 ‘어떻게든 튀고 싶다’는. 왜냐면, 문예 공모에는 무명의 응모자들이 수백 편의 작품을 출품하니까 그중에서 일단 눈에 띄고 싶다는 조바심이 항상 있었어요. 하지만 ‘눈에 띄는 것만으로 되겠나’ ‘그래서야 연예인병 환자와 다를 게 뭐냐’는 회의가 들었고, 그래서 항상 진정성과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한국의 영어 광풍이란 게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외면화한 건데 사람들이 그냥 무작정 쫓아가는 것 같다는 의심에서 출발했어요. 이걸 장편으로 한번 만들어 볼까. 그렇게 시작했어요. 저는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쓰레기 취급하는 그런 데서 가치를 발견하는 소설가가 되려고 해요. 우리는 사회 관습이나 미디어, 공교육이 공인해 준 것만 가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어요. 죽을 때까지 일방통행만 하죠. 그런 사실을 들추고 싶어요. 그것도 소설가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봉준정용준 선생님은?

 

   정용준 저는 잘 못 느꼈는데 주위에서 제 소설이 강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의도하지 않게 그 강렬함이 등단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은 들어요. 등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쓰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등단작을 쓸 당시에 그런 이미지에 많이 압도되어 있었어요. 뭐랄까 어둡고 탐미적인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요. 망상이나 어둠의 형상 같은 거. 물론 소재와 소설의 서사가 좀 가학적이고 강렬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야기보다 더 잘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 소설로 등단을 하게 됐어요. 그 이후에 발표한 소설들이 비슷한 느낌이 있었는지 제 소설을 강렬함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았지요. 등단 이후에는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어요. 일단 독자가 생겼다는 게 되게 이상했어요. 한 번도 누군가가 내 글을 읽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등단 전에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등단 후에도 여전히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밖에 없는데,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들이 독자의 독법과 부딪히고 감상에 반할 때 제가 느끼는 당혹스러움, 놀라움이 있었어요. 약간 혼란이 오더라고요. 독자나 혹은 평론가 분들께서는 작품들을 하나의 코드로 읽으셨나 봐요. 그런데 이제 제가 그 코드가 아닌 다른 것들을 쓸 때, “왜 갑자기 변화하려고 하느냐”라든지. “그 전이 좋다” 이런 평가가 저로서는 굉장히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일 년에 열심히 발표해도 두 번, 많으면 세 번 발표하는데, 일 년 사이에 제 자신이 얼마나 변하겠어요? 그런데 겨우 그 작은 시차와 소설의 변화, 경향, 혹은 생각,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제가 긍정을 하고 부정을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등단 이후에는 소설 쓰는 게 어느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기보다, 뭐랄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아닌 것 같고. 물론 지금은 괜찮은데, 등단하고 나니까 저는 오히려 글쓰기가 어려워졌던 것 같아요.

 



  
고봉준
네, 그 이야기를 나중에 좀 이어서 해보죠. 다음 이야기는…… 글쎄요, 이런 거 상당히 어려워하시던데요. 장편의 경우에는 좀 덜할지 모르지만, 소설집의 경우에는 ‘당신이 이 소설집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냐?’고 물으면 상당히 싫어들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딱히 어떤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경우들이 많고, 또 쓸 때와 달리 묶어 놓으면 공통되는 무언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겠습니다. 소설집이나 장편소설, 그러니까 본인들의 작품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게 껄끄러우시면 ‘소설’ 자체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최민석 선생님, 이 좌담이 문장 웹진에 게재될 무렵에는 책이 나오겠죠?

 

   최민석언제 올라가죠?

 

   고봉준9월…… 아마 그 책이 나와야 올라갈 겁니다. (웃음)

 

   최민석아, 그래요?

 

   고봉준그러니까 『능력자』에서 던지고 있는 것에 관해서…….

 

   최민석사실 제가 쓴 다른 소설도 그런데, 『능력자』는 특히 메시지가 없는 소설이에요. 왜 썼냐면, 그때 제가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로 외로워서 그냥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제 자신을 위해서 쓴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약간 재밌는 것만 쓰자. 생각하고 쓰다가, 복싱 이야기를 한 번은 꼭 써보고 싶어서. 복싱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복싱 이야기에 감동적인 걸 넣어서 쓰자, 라고 생각해서, 그것만이 그냥 목적이었어요. 이야기 자체가. 그런데 이게 수상작이 되고, 수상작에 메시지가 없으면 곤란하다고 해서 나중에 메시지를 좀 넣어 달라는 요청이 와서 어쩔 수 없이 넣었는데. 사실 제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 중 하나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이야기 속에 다 침잠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치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건데 소설에서 잘 녹아들지 않았을까 봐 노파심에 후기에서 작가가 막 뭘 쓴다든지, 평론가가 그걸 잘 해석해 주면 “아, 이 평론 좋다” 그러고, 잘못 해석하면 “거 참. 평론이 잘못된 것 같은데”라고 골방에서 구시렁대는 건 자기가 이야기를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표면적인 메시지,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짜 메시지는 그냥 문장 속에 다른 이야기로 다 표현된다고 생각해요. 『능력자』는 어쩔 수 없이, 요청도 있고 해서 그냥 대놓고 썼거든요. 그 의미를, 제가 추구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고봉준수정한 부분에 그게 들어갔다는 얘기죠?

 

   최민석네. 그런데 나중에 편집자가 바뀌면서 새로 수정을 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는데, 저는 그때 이미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라서. 또 바꾸면, 앞뒤 이야기가 유기성이 있기 때문에 전체를 바꿔야 되니까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대로 하자고 했어요. 기본적으로는 할 말이 없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거창한 이야기를 담지 않는 이야기가 진짜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일본에 <심야식당>이라는 만화가 있는데, 그걸 그린 ‘아베 야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쓸데없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다. 저는 거기에 깊이 공감을 하거든요. 우리가 사는데 대단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는 거 아니잖아요. 아침에 일어나 눈뜨고 된장국 먹고 생선 먹고…. 뭐, 좋은 일이 있다면 노을이 지는 거 보는 정도고,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정치적인 이야기는 사실 먼 이야기고. 밋밋한 이야기 속에 책을 읽다 보면 ‘뭐야, 이딴 이야기로 시작이 되는 거야?’ 하는데, 읽다 보면 ‘오호, 이런 게 이야기가 되는군’ 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난 다음에 ‘야, 이거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 이건 내 일상과 뭔가 닮아 있는 것 같아. 어, 그럼 내 일상이 꽤 가치가 있는 거군. 내 일상이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거군’ 하고 넥타이 끈을 매면서 ‘오늘 한번 잘살아 볼까?’ 이런 다짐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설 속에 간혹 무슨 제국주의라든지, 국가 전복이라든지, 자본주의 비판이라든지, 그런 거는 물론 의도한 것도 있지만 한국 순수문학의 풍토에 맞춰서 약간 타협한 면이 없잖아 있고,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이야기예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고봉준심재천 선생님은 어떠세요? 두 권을 출간하셨는데.

 

   심재천네.

 

   고봉준『본심』이라는 제목에는 ‘오기’ 같은 것도 들어 있지 않나요?

 

   심재천아니, 그건 편집자가 그렇게 카피를 쓴 거예요. 저는 그저 문예 공모에서 낙방한 단편들을 묶어 내자는 의도였어요. 소설 독학생을 위한 실전문제집을 만들고 싶었죠. 저는 이미 데뷔를 한 상태라 그것들을 수정해서 신작처럼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긴 싫었어요. 2년 전에 쓴 걸 새 작품처럼 발표하는 것도 끔찍했고, 그것들을 신작으로 발표하면 나중에 소설집으로 묶을 때 공모 심사위원들에게 들었던 심사평을 싣지 못하니까요. 그것들은 적어도 본심에 거론돼서 심사평을 얻어 들었던 단편들이거든요. 저는 혼자 소설을 배워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습작 시절엔 최종심에서 낙방한 작품들을 읽고 싶은 바람이 간절했죠. 왜 떨어졌는지 알면 심사 기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소설 습작생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본심』을 출간한 겁니다. 습작 시절의 찌꺼기를 싹 털고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편집자가 카피를 그렇게 썼더라고요. ‘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마케팅 때문일 텐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봉준혹시 ‘메시지’ 같은 게 있습니까?

 

   심재천습작기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썼어요. 지금은 조금 달리 생각하지만 그때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테마를 정하고 소설의 모든 요소들이 그것을 떠받치게끔 썼어요. 예를 들면 「베레타」 같은 단편은 밥통 옆에 놓인 권총 한 자루의 파급력, 「드라마틱」은 매스미디어에 대한 거부, 「잉글리시 티처」는 한국인에 대한 백인들의 오만한 시선, 그런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요. 그렇게 단선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는 건 너무나 기본적인 작법이에요. 조금 낮은 차원의 소설이란 생각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건 형식과 문체로 어떤 낯선 분위기를 창조하는 거예요. 왜 그런 작업에 몰두하는가 하면, 저는 제가 교육받은 인간이라는 게 싫어요. 30여 년 동안 학교, 군대, 직장에서 조직적인 ‘교육’을 받아 이 모양 이 꼴이 됐어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잘 안 되더군요. 초?중?고 교육받고, 대학 다니고 군대까지 갔다 오고 면접관들한테 애교 떨고 직장 상사한테 아부 떨고……. 이런 식으로 30년 넘게 살았는데 한순간에 확 바뀔 리가 없죠.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을 항상 소설로 드러내려고 하죠. 제가 하고자 하는 건 문체와 문장으로 교육, 체제, 상식에 균열을 내는 거죠. 저는 인간의 감정조차 교육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희로애락조차 의심스럽죠. 분노, 슬픔 같은 것도 우리가 진짜 그렇게 느껴서가 아니라 ‘그런 일에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세뇌를 받은 결과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저는 비장한 상황, 지나치게 멋있는 상황을 싫어해요. 제 소설에선 비장미가 완전히 바보취급 당하죠. 그렇게 인간의 자동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뒤트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걸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독자들은 스토리 위주로만 읽는데, 형식과 문체에 깃든 작가의 의도도 함께 봐주셨으면 해요.

 

   고봉준『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가독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꽤 있더군요.

 

   심재천네, 그렇습니다.

 

   고봉준‘가독성’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1930년대 박태원의 『천변풍경』 같은 작품에는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잘 읽히는 면도 있죠. 선생님의 작품에도 장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다 빠져 있습니다. 정통적인 방식에선 대개 ‘묘사’를 통해서 작가의 필력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심재천네.

 

   고봉준그런데 오히려 그런 게 읽기의 속도를 끌어올리죠. 소위 ‘쭉쭉’ 읽힌다고나 할까요?

 

   심재천그렇게 잘 짚어 주시면 저는 정말 기뻐요.

 

   고봉준묘사를…….

 

   심재천일부러 다 뺐어요. 그렇게 작정하고 썼어요. 그렇게 딱 짚어 주시니까 정말.

 

   고봉준빨리 읽혀야 눈에 띌 수 있다?

 

   심재천눈에 띌 수도 있고. 네.

 

   고봉준알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문체’는 그거하고는 좀 다른 거죠?

 

   심재천네. 약간.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스피디하게 읽히게끔 만들기 위해 묘사를 배제하고 상황과 에피소드 위주로만 썼어요. 그 상황과 에피소드들이 제 내면을 반영한 게 아니라 대중적 유머 코드에 맞춘 촌극에 가깝다는 게 문제죠. 거기서 문체로 관습을 비틀겠다는 의도가 팍 죽어버린 거예요. 묘사를 배제하는 작법이 혁신이 될 수도 있고, 영합이 될 수도 있죠. 어쨌든 묘사는 너무 전통적인 기법이란 생각이에요. 회화로 치면 붓으로 정물화를 그리는 거죠. 미술계에선 앤디 워홀, 잭슨 폴록이 나왔는데, 그들은 착실하게 붓으로 그리지 않죠. 정물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식의 회화는 이제 아무도 안 해요. 저는 소설을 묘사가 아닌 인물들의 액션과 심리 위주로 꾸미고 있습니다. 소설과 토익을 결합하는 시도도 했고요.

 

   고봉준정용준 선생님은 메시지를 딱 드러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가나』에서, 주제의식이 아니어도 괜찮은데요, 독자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나요?

 

   정용준 되게 무책임한 말일 수 있는데. 하지만 이게 저에게 진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저는 사실 등단하고 첫 소설집을 내는 몇 년 동안은 독자까지 염두에 둘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어요. 독자를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독자가 좋아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쓰는 것도 힘들었고 반대로 독자가 싫어하는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도 알지 못했지요. 가독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독성을 높인다는 말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려고 하는 목적이 일단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최민석 작가님이 말했던 첫 페이지의 강렬함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일 수도 있고요. 다 맞는 말이지만 저는 사실 소설이 소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설득하고 꼬셔내는 건 어떤 면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소설은 그리고 문학은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들 내에서의 싸움이라는 말이지요. 문학이 뭔가를 열심히 노력해서 일반 독자를 꼬셔낼 수 있는 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나를 꼬셔내려는 목적이 느껴지는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제가 계속 매료됐던 작품들은, 인격으로 말하면 굉장히 시크한. 가령 이런 거 있잖아요. 아부도 안 하고 처세술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매력적인 친구. 그래서 자꾸 쳐다보게 되고 왠지 이야기하고 싶고 존재 자체가 매력적인 친구. 그런 느낌을 주는 글이 저는 좋았어요. 때문에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죠. 저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힘은 작가의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재미있게 쓸 수 있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사실 제가 안 해 본 건 아니거든요. 그런 글들을 많이 써봤어요. 왜냐하면, 제가 재미있는 글을 좋아해요. 만화도 좋아하고 웹툰도 읽고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잘 안 되더군요. 슬프게도 재미있게 쓰려고 하면 재미가 없는 글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깨닫게 됐지요.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있고, 나는 쓰고 싶지 않지만 내가 쓸 수 있는 소설이 있다는 걸 말이에요. 그때부터는 그냥 제가 쓰고 싶어 하는 소설을 내가 만족할 때까지 쓰게 됐죠. 그러니까 이게 묶여서 소설집이 나올 때 제가 가장 당황했던 것은 이런 거예요. ‘아, 이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읽는구나’라는 생각. 어떤 소설은 너무 가혹할 정도로 끝까지 갔고, 쓸데없는 묘사가 많았고. 아까 묘사 얘기 나왔는데, 저는 어떤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으면 그 이미지가 비슷하게라도 표현될 때까지 끝까지 쓰고 싶어요. 제 속에 있는 감각과 느낌을 전할 순 없잖아요. 그 이미지를 사진 찍어 줄 수도 없으니까. 언어로 전달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그게 시적인 표현도 되고, 문장이 길어질지라도. 문장이 반복되고 문장과 문장이 서로 부정하더라도 끝까지 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소설에 이야기라는 측면이 부족하거나 약하다고 느껴요. 물론 제 소설에서 은근히 이야기가 강력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저는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고 글을 써본 적은 없어요. 그래서 여러 모로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소설집이 나왔을 때 독자들이 읽는다는 것은 고맙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메시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독자를 만나면 기뻤어요. 제가 뭔가 계몽하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나는 이거라고 생각해”라고 하는데, “어, 나도 이거라고 생각하는데”라고 말하는 독자를 만날 때. 제 소설을 저랑 공감대를 형성해서 읽어 주는 몇몇 독자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아,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미리 포기를 했지요. 지금 장편소설을 쓰고 있지만 지금도 제 생각은 같아요. ‘아무리 재미있게 쓰더라도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 자신을 저평가를 하는 게 아니라. 언어로써 사람을 꼬셔내는 건 정말 몇 안 되는 능력이에요. 불행하게도 저한테는 별로 없는 능력이지요. 저는 그거는 잘 못 하겠더라고요.

 

   고봉준윤보인 선생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윤보인저는 스물네 살 때부터 서른셋까지, 9년 동안 쓴 걸 첫 단편집으로 묶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9년이라는 시간이 좀 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어떤 변화 같은 게 단편집에 들어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저 역시 조금씩 변해 왔고. 제 자신과 글의 색깔이 좀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요. 시간이랄까, 폭력이랄까,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고. 그것이 꼭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죽음도 그렇고. 저는 늘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데 제가 20대에 뭔가 무너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구석으로 몰렸다는 느낌이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썼던 글과 이후 중편의 색깔이 조금 다른 게 있는데요. 장소도 그렇고, 인물들도 그렇고. 저는 그들을 조금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고. 어떤 분께서 저에게 ‘시간이라는 고리’라는 표현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이 되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아무래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읽어 주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고봉준
조금 뜬금없는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을 텐데요, 등단을 하고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개월을 지내셨어요. 혹시 이 시대에 작가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요? 2000년대에 ‘작가’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작가의 일상에 관해 들려주셔도 좋아요.

 

   정용준 저는 요즘에 이 생각을 좀 많이 해요. 지금 제가 장편연재를 하고 있는데요, 장편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소설가적인 자의식이 생겼어요. 장편을 쓰면서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거예요. 단편은 짧은 시간 집중하고 집약해서 온 힘을 다해 좁고 깊은 구멍을 파는 작업인 것 같아요. 하지만 장편은 달랐어요.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계속 한 편의 글을 쓰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일상인으로서 소설을 쓰는 게 좋은 거구나.’ 반복되는 어떤 생활을 계속해 내는 거에 대한 자기 성취감 같은 게 있잖아요. 긴 글을 쓰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단편에서는 못 느꼈던 기분이거든요. 반복적으로 계속 쓰는 것. 마치 일하듯 공부하듯 말이에요. 그래서 소설을 일정한 흐름과 계획을 갖고 차곡차곡 쓰는 것은 굉장히 건강한 거라는 걸 최근에 느낍니다.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저는 소설가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인과 소설가를 하나의 작가의 범주로 엮는데, 저는 그 구분도 잘 된 구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차라리 시인은 뮤지션이나 화가에 가깝고 소설가는 번역가나 산문가, 에세이스트랑 가깝다고 생각해요. 소설가들은 어쨌든 긴 글을 쓰는 사람들이고, 예술적 영감이나 어떤 기이한 상태에 도취되어 있는 것보다 그냥 계속 앉아서 생각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2000년대 작가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 같아요. 일단 작가라면 많이 써야 하겠죠.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작가는 직업의 역할도 감당해야 하겠죠. 하지만 직업적으로 보면 매우 불리한 직업이에요. 아무리 많이 써도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습작생들이 가끔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질문을 할 때 담겨 있는 기대치는 기본적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맞춰져 있어요. 작가로 살고 싶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기대감은 자기만족감 혹은 다른 것에 구속받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일,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나 희열 같은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산해 내서, 이야기 자체의 생명력으로 책이 팔리고, 그것이 생활에 주는 모종의 유익에 기대를 가지는 건 조금 어려울 수 있어요. 저도 작가가 되었고 작년에 책이 나왔지만 그런데도 아직도 누군가 저한테 물어보면, “작가입니다”라고 선뜻 말을 잘 못해요. 작가로 산다는 건 절대 부끄럽진 않은데, 그들에게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힘들더군요. 그래서 아직도 제 몇몇 친구들은 제가 작가인지 몰라요. 아직도 누군가 얘기할 때 “학생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훨씬 편해요.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부와 명예를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심재천작가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환경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요즘 출판사에선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아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영화화가 되어야 해’ 같은 말이 상당히 방해가 돼요. 저는 소설이 영화에 기대지 않고 아주 따로 갔으면 해요.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인 소설은 아주 위험하다고 보는 편이죠.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영화, TV 같은 매체가 워낙 대중화돼서 소설이 죽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오히려 잘 된 거라고 봐요. 정말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만 이쪽으로 들어오니까. 밥벌이가 안 된다는 거 알고 오기 때문에 그냥 입 다물고 쓰는 사람이 많아진 게 좋죠. ‘끝내주는 스토리로 크게 한 건 하고 싶다’는 사람은 영화 쪽으로 가면 되죠. 그게 뭐 나쁜 길은 아니니까요. 또, 2000년대는 이데올로기나 사회운동에서 자유로워져서 쓸 소재도 무한해졌죠. 미니멀리즘, 실험소설, 해체소설 등 형식도 무궁무진해졌어요. 재미있는 소설, 시시한 소설, 추한 소설 뭐든지 쏟아져 나오고 있죠. 90년대 초만 해도 사회 고발적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역사에 대한 어떤 부채감 같은 게 남아 있는 시기였어요. 왜냐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이 1980년에 일어났으니까 1990년대에선 불과 10여 년 전 역사였죠. 대통령이 자국 국민을 쏴 죽이는 일이 벌어졌는데 개인적인 쾌락이나 일상의 소소함을 예찬하기는 어렵죠. 이젠 7, 80년대 정치 상황이 거의 망각됐죠. 거리에는 9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세기가 달라지면서 7, 80년대가 아주 먼 옛날 일처럼 여겨지게 됐어요. 누구도 민주화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 시대가 됐죠. 그렇게 사회 분위기라든지 환경이 변했네요.

 

   최민석질문이 2000년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잖아요. 제가 막 500살쯤 되어서 17세기부터 작가로 살아왔다면 비교분석해서 근사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지만, 데뷔했을 때부터 이미 2000년대라서 2000년대에 작가의 특성이 어떤지는 모르겠고요. 그냥 제가 경험하는 작가로서의 생활은, 저는 좋아요. 작가가 제 적성에 제일 잘 맞는 거 같아요.

 

   고봉준어떤 점에서요? 출퇴근이 없다?

 

   최민석그것도 그렇고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출퇴근 시간을 정해서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글 쓰는 장소도 정해져 있고요. 오늘도 글을 쓰고 왔고요. 이런 식으로 나름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있지만, 강제적인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게 좋은 거겠죠.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변명을 해도 질책할 사람이 없다는 거. 대학원 다니면서 프로젝트도 하고 회사 다니면서 직장인으로서 살아 보고 다른 아르바이트도 하는 등 이런저런 일들을 해왔지만, 작가로서 가지는 자기 생활 통제권이 저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것 같아요. 누구 밑에서 일을 하면 어떤 목표가 저에게 주어졌을 때 설령 그 목표가 저에게 맞지 않을 경우에도 생활하기 위해서는 싫어도 제가 가지는 능력을 거기에 맞춰야 되지만. 물론 연재나 기획물은 또 다르겠지만, 제가 전작으로 쓸 경우 그냥 쓴다는 행위 자체의 기쁨에만 몰두할 수 있죠. 즉 욕심이 없는 사람은 작가로서 굉장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2년 동안 4권 정도 썼는데 아직 출판된 건 하나도 없거든요. 출판계 템포는 굉장히 느리더라고요. 저는 빨리빨리형이죠. 제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고민해서 쓰는 게 아니니까. 저는 B급 통속 막장 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냥 막 쓰고 별로면 버리고 버리기 아까우면 가지고 있는 편이에요. 출판이 잘 안 되면 답답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만 스스로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최소한의 간단한 생활만 영위하면서 쓴다는 기쁨 자체로만 만족한다면야 작가는 굉장히 행복한 직업인 것 같습니다.

 

   고봉준그런데 과연 그 미니멀한 삶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최민석저는 처음에 데뷔를 안 한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뒀거든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만두고, 퇴직금이랑 몇 달 생활할 비용만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최소한의 생활만으로도 만족하겠다 생각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윤보인저는 글을 쓰는 동안에만 제가 작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고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거의 잊고 사는 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기도 하고, 고독해지기도 하고, 약간 현실과 멀어지고 싶어서인데요. 하지만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급적 건강관리에 힘쓰려고 하는 편인데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균형을 찾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삶을 단조롭게 만들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일. 그리고 평온한 저녁을 맞고, 늦은 밤에 책을 읽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하는 그런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이 저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딱히 2000년대 작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휴식

 



  
고봉준
2000년대에 들어서 꽤 많은 작가들이 서로 다른 경향을 앞세워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작가들의 작품마다 실제로 독자들이 반응하는 방식이나 문단의 반응 또한 다 다를 겁니다. 예를 들면, 제 생각에, 정용준 선생님의 작품은 독자들이 많이 볼 것 같진 않으나 독자들이 안 해 주는 것 이상을 ‘문단’이 지원해 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작가는 많이 팔아서 수익금을 받지만, 또 어떤 작가는 지원금이나 상금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쨌건 다양한 경향이 경합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경향이 다 똑같이 대접받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불가능할 테고요. 어떤 작가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어떤 작가들에 대해서는 판단중지 상태일 것이고. 등단 이후 활동을 하시면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셨을 텐데, 이런 맥락에서 한국 문학계에 제언할 게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비판도 좋습니다. 뭐, 비판은 주로 평론가에 대한 것이겠죠? (웃음) ‘한국 문학계에 바란다’, 이렇게 제목을 붙여 보면 어떨까요? 윤보인 선생님의 이야기부터 듣겠습니다.

 

   윤보인특별히 바라는 게 없어서요.

 

   고봉준이대로가 최선이라는?

 

   윤보인글쎄요. 제가 뭐…….

 

   고봉준여기 지원금 담당하시는 분도 계시니까요. 지원금 관련해서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지원금 담당하시는 분’은 좌담 당시 녹음과 사진촬영을 맡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담당자를 가리킴.)

 

   윤보인아무래도 지원금이 활성화되면 작가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죠. 여행도 갈 수 있고. 여러 가지 경제적으로도 많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인 것 같고요. 그런데 한국 문학이 상품성 있게 가야 되는가, 아니면 본래의 문학성을 더 중시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요. ‘한국 문학계에 바란다’ 이런 것까지 해서, 제가 바란다고 해서 바뀔 것 같진 않은데요. 앞으로 제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제가 지금 해야 될 일, 즉 작가로서 열심히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가장 필요하지 않나 싶고요. 딱히 한국 문학에 대해선 제가 구체적으로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고봉준최민석 작가님은 ‘작가의 말’을 보니 유니세프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나 문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범위의 사람들이 작가들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이 작가들이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최민석작가들이라고까지 거창하게 이야기한 건 아니고, 저한테만.

 

   고봉준네, 그러니까요.

 

   최민석제 책 꾸준히 사달라고.

 

   고봉준혹시 한국 문학계 혹은 출판계에 말씀하시고 싶은 게 있으면?

 

   최민석저는 개인적으로 좌담 같은 데 나가면 작가로서 망하는 거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좌담에 나가서 할 말도 없고요. 그런데 저번에 담당자님이랑 통화를 하면서, 그때 제가 뭔가 불만에 차 있어서 “한국 문학계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면 나가겠습니다” 했는데.

 

   고봉준아, 그러셨어요?

 

   최민석그래서 “나오십시오” 하셔서 굉장히 후회했어요. 그 이야기가 질문에 들어갈까 봐. 왜냐하면, 그때는 잠깐 욱했던 거고. 이 질문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기를 주저하는 거는 그만큼 한국 순수문학계가 굉장히 좁고 배타적이고, 동시에 말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리고 품평이 많은 집단이라는 거죠. 제가 뭣도 모를 때는 이런 질문이 나왔을 때 비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그냥 토론하면 되는 줄 알고 다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이야기를 다른 출판사의 편집위원들과 편집자들이 알고 있더라고요. 그때 저는 경악을 했습니다. ‘아, 이곳이 이런 곳이구나.’ 거기에다가 갈수록 소문은 각색과 윤색되기 마련이라서. 아무튼 의도치 않게 다른 식으로 소문이 나서 지금도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운데요. 문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청탁이 끊기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쟤는 굉장히 반사회적이고 삐딱하구나, 라고. 꼭 써주십시오. ‘최민석은 웃으면서 얘기했다.’ 이게 또 텍스트만 들어가면 제가 반사회적이고 불만 많은 애라고 오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는 지금은 마음 비우면서 쓰고 있고요. 작품 수상을 하기로 결정을 하면서부터 저는 이미 거대자본에 굴복을 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하고 싶은 건 문단의 시스템에 있어요. 시스템이 굉장히 공고한 것 같아요. 예컨대 첫 소설집을 내려면 최소 2년 이상이 걸리는 것부터가 그렇죠. 그 사람의 원고가 완성이 안 되어 있거나 작품의 질이 안 좋거나 출간 순서가 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례상 문예지에 하나하나씩 다 발표를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문예지에 작품을 하나씩 다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그렇게 탄탄하지 않거든요. 문예지에 발표를 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그런 입소문이 나서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건데. 사실 그 문예지를 사 보는 독자들은 이미 충분히 이너서클 안에 들어와 있는, 제가 볼 때는 말 그대로 이너이너서클이거든요. 가장 많이 팔리는 문예지의 정기구독자가 만 명 수준으로 알고 있고. 그 잡지도 실은 텔레마케팅까지 해서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소설 발표를 하니까 저에게도 전화가 오더라고요. 구독을 해달라고.

 

   고봉준어떤 잡지인지 감이 오네요.

 

   최민석전부는 아니겠지만, 정기구독자라는 건 이런 식으로 유입된 독자까지 포함된 숫자라는 거죠. 게다가 그 사람들이 다 소설을 읽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한국 문예지의 실제적인 영향력은 문단 내의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보다는 사실 굉장히 적다고요. 그런데 그 구조에 기대어 계속 문예지에 단편을 내고, 그게 끝나면 소설집을 내야 된다는 게 마치 깰 수 없는 관례처럼 잡혀 있다는 거에 대해서 다른 예술 분야의 예술가들이나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 본다면 굉장히 비합리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처음에 들어왔을 때 그렇게 생각을 했고요. 지금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신인작가의 의욕이 상당히 많이 꺾이죠. 책을 써도 책이 안 나오니까. 원고 질이 안 좋아서 계속 시간을 두고 고치자거나 아니면 출간 일정이 그때밖에 안 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관례상 이래야 한다는 건 합리적이지 않죠. 그런 것도 있고. 아까 질문 중에도 있었는데 ‘이 작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메시지가 뭡니까’ 이런 질문은 과거 한국 문학이 정치 도구로 사용되어 온 역사와 맞물려 있다고요. 순수문학이라고 했을 경우에 반드시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독자에게 어떠한 것을 전달해 줘야 하고 그래서 작가로서의 위상을 얻는다는 것에서 이제는 탈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시대가 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걸 통속소설이라고 한다면, 비록 통속소설이라도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하고 매력적이라면 순수문학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순수문학계에서 책이 출판되고 편집되고 작가를 선정하고 기획을 하는 과정이 사실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무튼 순수문학계가 말 그대로 좀 순수해졌으면. 그래서 오직 작품만이 중요한 그런 문학계가 됐으면 좋겠어요.

 

   심재천제가 바란다고 뭐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문단에 그리 바라는 건 없어요. 저는 독자들이 직접 소설을 더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고봉준독자들이 소설을 쓴다고요?

 

   심재천네. 두려워할 것 없이, 등단 제도에 짓눌리지 않고. 사람들은 등단이 면허증이나 자격증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없다고 겁을 내는 것 같아요. 자신이 써서 스스로 감상하고 친구들끼리 돌려볼 수도 있는 건데. 뭔가를 쓰는 행위는 중요해요. 왜냐면, 영상매체의 강력한 시각적 최면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새 세뇌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전 영화는 거의 프로파간다라고 봐요. TV도 그렇고요. 알게 모르게 감정을 교육시키잖아요. 그렇게 컨트롤당하면서 살다 가면 억울할 것 같아요. 뭔가를 쓰다 보면 오로지 텅 빈 백지하고만 마주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본래의 것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흉한 형태라고 해도 흉한 글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자기가 진짜 느끼지도 않았으면서 과장해서 멋있게 쓰려 할 때 글은 흉해지죠. 쓰면서 그런 걸 깨달아 가는 거예요. 문단이 인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더라도 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사실 저도 신춘문예나 신인상 제도에 불만이 있었어요. 왜냐면 아무리 도전해도 낙방하니까. 버림받고 거절당한 남자의 증오 같은 게 있었죠. 하지만 지나고 보니 시답잖은 작품이 심사위원에 의해 걸러져서 다행이라고 느껴요. 습작기의 어설픈 작품이 등단작이 됐다면 좀 창피했을 거 같아요. 저는 등단 제도에 대해 비판할 입장은 안 돼요. 어쨌든 전 타협을 했고, 제도권 문학상으로 데뷔를 했죠. 그리고 저는 분노에 차서 뭔가를 비판하는 일이 내키지 않아요. 외부자로서 불만인 부분을 ‘까는’ 건 지금 당장이야 후련하겠지만, 내부자의 사정 같은 게 항상 있기 마련이죠. 나중에 보면 그 비판이 성급했거나 방향이 어긋났다고 판명되는 일이 많아요. 전 속사정을 자세히 알기 전까지는 일부러라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에요. 문단의 끼리끼리주의, 배타성은 알고 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요. 사람이 모여 조직을 이루면 당연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이 돼요. 특별할 게 없어요. 저는 제 글하고 독자, 이 두 개만 안고 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용준 저는 문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요. 최근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문제인데요. 지금 작가님들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만 지금 제가 말하는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어지기 전의 이야기를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아니어도 가능한 방식의 소설 이전의 이야기 말입니다. 많은 곳에서 이야기가 강력한 소설을 원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야기가 강력한 소설을 원하는 것 자체는 절대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로 완결된 이야기라기보다 소설 속 이야기가 유연한 상태로 다양한 장르로 만들기 편한 소설을 원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소설이 연극이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의 소스로 전락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전락이라고 말했지만, 소설의 그러한 변화를 아주 바람직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문단 안에서 조성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이게 문제냐면, 이러한 분위기가 작가들의 작의를 위협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라는 건 그리고 형식이라는 건 최근에 생긴 게 아니잖아요. 어떤 시대나 형식과 장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었지요. 읽기 편한 소설과 읽기 힘든 소설, 대중적인 소설과 자의식으로 꽁꽁 뭉친 소설은 지금 시대뿐만 아니라 언제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작가들의 글은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엔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나 드라마로 쉽게 활용될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을 원한다는 느낌이 들고 심지어 각종 문학상과 등단작들도 이런 느낌의 소설이 뽑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그게 좋다, 안 좋다가 아니라, 작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작의와 스타일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한다는 작의와 글쓰기를 위협당하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쓰고 싶어 하는 글이 최근의 유행과 다른 방식의 글일 경우에 느끼는 절망감이 있다는 겁니다. 더 끔찍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글쓰기 욕망을 바꾸거나 2차 텍스트를 염두에 둔 텍스트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게 저는 뭐랄까, 좋지 않게 느껴져요. 작가가 다르면, 작가의 욕망과 스타일이 다르면 당연히 글도 달라져야 하지요. 이건 유전자라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유전자가 다 다른데 어떤 작가들은 그리고 어떤 소설지망생들은 자신의 소설 유전자를 슬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거든요. 소설이라는 장르가 현재 대중매체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 위협을 견뎌낼 힘이 굉장히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을 사람은 읽고, 못 읽을 사람은 못 읽는 상황은 사실 옛날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읽고 있는 고전이라는 것도 다 그렇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다 읽은 게 아니라, 소수의 독자가 읽은 어떤 가치가 지금까지 내려온 거니까. 그게 당연한 건데 이상하게 대중에 대한 부담과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작가가 자신의 글 때문에 가난해지고 망하는 건 자기가 책임질 수 있거든요. 그것은 충분히 스스로 예상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른 방식의 압박으로 인해 정신적 가난함을 느낀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지요. 작가가 다르면 당연히 글도 달라지는 건데. 내 재능의 부족,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어떤 슬픈 자괴감. 그런데 전혀 반대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저와 비슷한 걸 느끼더라고요. 왜 이렇게 이상한 구조가 되었을까요. 다른 건 몰라도 장편소설을 뽑는 심사위원들에게 혐의를 둘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뽑잖아요. 분명히 다양한 소설이 투고될 텐데, 어떤 기준에 의해서 뽑히고 있고 그게 계속 재생산되고 있잖아요. 떨어진 사람들은 자기의 글을 어떠한 경향에 맞출 수밖에 없는 작의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은 또 요구하는. 그게 굉장히 이상하게 보여요. 단언컨대 이야기 세계에서 소설은 너무 열등한 장르죠. 영화와 드라마가 장면으로 이미지로 쉽게 보여줘 버리는데 아무리 언어로 열심히 묘사하고 자세히 표현해도 한계가 있어요. 영화는 딱 한 장면, 1초 만에 그걸 끝장내 버리거든요. 툭 까놓고 ‘영화가 될 수 있는 소설’을 원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설가들에게 이야기 주문생산을 하는 순간도 오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소설가는 소설이라는 완결된 창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제공하는 정도의 수준이랄까요. 그런 글을 쓰지 않으면 출판사에서 계약을 안 할 거고 그런 글을 투고하면 안 뽑을 거고. 그러니까 점점 이야기가 강력해지고 다양한 장르로 바꿀 수 있을 만한 소설들이 많이 출판되겠지요. 그냥 그런 점들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봉준
마지막 이야기일 듯합니다. 여기 네 분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한 권씩 올려놓고 그분께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부터 할까요? 궁금한 점이나 느낌도 좋습니다.

 

   최민석저는 다 읽지는 못했고 어제 사 가지고 오면서 좀 보고 오늘 오면서 좀 읽었는데, 제가 며칠만 일찍 샀더라면 분명히 다 읽었겠더라고요. 그만큼 속도감이 굉장히 빠르고. 프로필 보니까 기자 출신이시더라고요. 기자 출신이라서 문장이 이렇게 짧게 씌어졌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궁금한 게 혹시 이 작품이 처음으로 쓴 장편이에요? 아니면 발표만 처음으로 된 거예요?

 

   심재천이 작품 이전에 경장편을 한 번 썼었어요.

 

   최민석그거는 경장편이고 이거는 두꺼운 장편인 거죠?

 

   심재천네. 그거는 500매, 이거는 800매.

 

   최민석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제가 제일 처음 소설을 쓸 때 생각을 했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문장의 호흡이 너무 길어서 벅찼던 기억이 있거든요. 기자는 아니지만 전공도 언론이고, 저도 회사 다닐 때 기사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무조건 짧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많은 동질감을 느꼈고. 지금은 제가 많이 변했어요. 지금은 오히려 짧게도 써보고 길게도 써보려 하고 있어요. 최근에 쓴 소설은 일부러 길게 썼는데. 아무튼 굉장히 스피디하게 전개되어서 잘 읽혔던 거 같아요.

 

   고봉준저는 거의 최선을 다해 짧게 썼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어요.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뽑거나 소설을 칭찬할 때 가독성이라는 것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어요.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춘문예 작품들이나 문예지 응모작품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짧고, 묘사를 빼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묘사가 많거나, 철학적인 내용이 포함되거나, 이야기 전개가 더딘 작품들을 기피하거나 안 읽는 경향이 생겼어요.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 밸런스가 맞아야 독자들의 취향이나 평론가의 취향에 따라서 골고루 섞일 텐데, 한쪽으로 완전히 꺾여버린 느낌이 들어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소설을 강의하는 분들이 공공연하게 한국 소설을 읽지 말라고 하잖아요. 한국 소설 읽으면 소설 못 쓴다고. 그러면서 외국의 명작들을 강의하죠. 한편으로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지만, 실제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 모범으로 삼는 정전은 한국 문학이 아니라 외국 문학이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어요. 이런 경향이 한국 문단에 계속 팽배해 있어요. 길게 보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낳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최민석
저는 거기에 관해서 적정 리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서는 굉장히 짧은 호흡의 글이 편하고 읽기 좋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썼고요. 그리고 한국 신인 작가들의 글은 일단은 짧은 경향이 있죠. 왜냐하면, 심사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심사위원들은 너무 많은 걸 봐야 하고 머리도 아프고 뭔가 하나를 뽑아내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데뷔를 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했고. 데뷔를 한 다음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죠. 외국 작품을 보니까, 물론 외국 작품은 번역을 거치며 길어진 면도 있겠죠. 영어는 복문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긴 결과물이 생산되는 거죠. 어쨌든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데뷔는 짧은 글 위주로 하고 데뷔를 해서 점차 긴 글 위주로 갑니다. 그러고 데뷔를 했을 때는 책을 읽지 않는 잠재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사람들이 많고 데뷔를 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 읽는 사람들은 아예 안 읽는다는 사실을 자각을 한 뒤에 책을 읽는 사람들 위주로 쓰는 거죠. 그러면 그 시간을 거쳐서 결국은 짧은 리듬과 긴 호흡 사이에서 점점 적당한 템포를 작가가 잡아 가고 독자들도 잡아 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은 과도기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미리 앞서 나가서 하는 사람도 있고 미리 그걸 보는 독자들도 있고 그걸 아는 평론가들도 있고 결국은 시간의 문제가 아닌가, 큰 문제는 아니고 작은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요.

 

   고봉준네. 저도 지금 당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상을 받은 작품들을 염두에 두면서 신인작가들이 성장을 하잖아요. 그럴 때 신인작가들의 모델들이 천편일률적인 경향을 보인다면 그게 문제라는 이야기죠.

 

   정용준 제가 봤을 때 두 분이 약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같은 작가니까 이 작품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는데, 그런 마음이 조금 닮은 거 같다는 생각을 처음에 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기도 한데요, 저는 솔직히 제가 재미있는 소설을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번 써봤더니 굉장히 재미없고 이상했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가독성 있는 소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게 놀라운 재능이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렇게 쓰려고 할 때 이렇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작가가 가진 가장 큰 능력이라고 보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성공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가독성을 느꼈거든요. 컷이 딱딱 돌아가는 느낌을 받아서, 이게 문장으로도 가능한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저는 이런 속도감이라든지 도약, 비약. 이게 굉장히 좋았어요.

 

   윤보인아까 하신 말씀 중에 계획을 하고 전략적으로 쓰셨다는 말씀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저는 계획을 하고 전략을 가지고 쓰는 편이 아니어서 굉장히 놀라웠고요. 소설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 좀 인상적이었어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직접 호주에 가셔서 경험을 하셨나? 약간 이런 생각이 좀.

 

   심재천네. 호주, 2002년에 한 번 갔다 왔어요.

 

   윤보인아, 오래 계셨나요?

 

   심재천워킹홀리데이 비자로 1년 여행했어요. 바나나 농장에서 일도 해봤고요. 그런 경험에 그냥 말도 안 되는 픽션을 붙여 소설을 쓴 거죠.

 

   윤보인아, 나머지는 그렇군요. 그거 한번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최민석저는 궁금했던 게, 제목.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건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붙인 건지.

 

   심재천제목은 제가 직접 지었어요. 제목부터 먼저 짓고 시작한 소설이에요. 출판사 마케팅 부서는 제목을 바꾸길 강력히 원했어요. 심사위원 이제하 선생님도 제목만큼은 꼭 바꾸라고 말씀하셨죠. 이 작품은 말 그대로 공모용 소설이었기 때문에 제목을 딱 정해 놓고 시작했어요. 이런 제목이면 심사위원의 눈길을 끌지 않을까. 반어적인 제목으로 풍자 효과를 높일 수도 있겠고. 혹은 진짜 토익 만점 수기인 줄 알았는데 속아 넘어가는 재미도 줄 수 있겠고. 그런 계획 하에 쓰였어요.

 

   정용준 저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이 작품이 소설 영역에 있어서 놀랐어요. 처음에 자기개발서인 줄 알았거든요. 우연히 책을 봤을 때, 처음에는 이 작품이 왜 여기에 들어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서, 좌담을 한다고 해서 ‘아, 이분을 만나는구나’ 그 생각을 했었죠.

 

   고봉준사람들은 아마 그런 기대를 가지고 볼 텐데. 사실은 토익 만점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깔고 있죠.

 

   심재천허접해요.

 

   최민석그리고 궁금한 건 실제로 토익 고득점을 획득하셨는지?

 

   심재천저는 절대 못 맞았죠.

 

   최민석그래도 취직하시려면…….

 

   심재천조금. 900점 조금 넘나? 평균적인.

 

   고봉준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아까 제가 얼핏 여쭤 본 건데, 여기 계신 분들은 작가이면서 또 독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묘사’가 사라진다면? 그게 어떻게 보면 작가의 스타일이나 문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볼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본다면 결핍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용준 제가 이 질문에 첨부해서 살짝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아까 좋게 느끼고 영향 받았던 소설들을 말씀하셨을 때 쓰신 소설과 정반대의 소설을 말씀하셨거든요. 박상륭 선생님이라든가. 흔히 말하는 본격소설도 그런 본격소설이 아닌. 소설을 예술의 지경까지 끌고 가는 그런 소설들을 이야기하셨는데 그 영향과는 아주 별개로 지금은 계획적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셨어요. 그 작업방식이 저는 약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간극은 어떤 건지 궁금해요.

 

   심재천위대한 소설을 좋아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 존경해요. 제가 위대한 작가를 흉내 내려 해도 나오는 결과는 초라해요. 제게서 나오는 건 토익 갖고 비틀어 풍자하는 가벼운 소설이에요. 박상륭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서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소설이란 장르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제가 쓴 것도 소설이겠거니 하며 살고 있어요.

 

   정용준 그 묘사.

 

   심재천묘사요? 뭐였죠?

 

   고봉준작가나 독자 입장에서 묘사가 없거나 적다라는 게 소설에 크게 문제가 될까요?

 

   심재천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은데요. 묘사 위주의 소설이 주류였으니까 그게 소설의 전형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저 관습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쓸 수가 있죠. 묘사 없이도 소설이 가능하고, 캐릭터 없이도 가능해요. 묘사를 생략하거나 소설에 필수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소설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묘사는 사실 학교에서 훈련받은 기법이죠. 저는 묘사 위주의 서술에 반발심이 들어요. 너무 착실한 거 아냐, 하는. 제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이란 인간의 머릿속에 가득 찬 음탕한 생각들, 터무니없는 망상, 비논리적인 사념,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거든요. 제게는 그게 리얼이죠. 인물의 머리칼 색깔, 스웨터의 색상을 묘사할 바엔 그런 망상들을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에요. 물론 저도 습작기에는 묘사와 플롯으로 끌고 가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인간은 어처구니없는 존재이고,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하고 살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뭔가를 말할 때는 교육의 힘으로 인해 틀에 맞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저는 묘사에 대한 강박이 그와 상통한다고 봐요. 저는 그런 관습의 힘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요. 특히 소설을 쓸 땐. 그런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묘사를 배제하고 어처구니없는 액션과 망상을 많이 집어넣죠. 또한 요즘은 독자들이 너무나 많은 걸 보고 듣고 알고 있어서 뭔가를 상세히 묘사하는 일이 그들에게 좀 따분하게 여겨질 거란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관습을 어겨 주는 맛이 없으면 소설 쓰기가 좀 힘들어요. 왠지 숙제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렵습니다.

 




  
고봉준
네. 좋습니다. 두 번째로 정용준 선생님의 『가나』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윤보인시 같기도 하고, 서정적이면서 슬픈 세계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아까 제가 장편을 다 쓰셨는지 잠깐 여쭤 봤는데 지금 쓰고 계시다고 하셨어요. 지금 장편을 쓰고 계신데, 아무래도 지금 현재진행형이니까 단편과 장편 쓰실 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용준 글쎄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써보니까 저는 단편하고 장편이 완전히 다른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지어 어떤 생각까지 했느냐면요, 단편소설로 등단한 작가한테 자연스럽게 장편소설을 청탁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겠단 생각도 했어요. 그러니까 단편과 장편은 시나 소설처럼 다른 장르구나, 단편소설로 등단한 작가의 장편소설은 실패할 확률이 높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편이 혹시 약한 게 있다면 그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써보니까 알겠더군요.

 

   고봉준우사인 볼트(Usain Bolt)가 마라톤을 못 뛰는 이유 같은 거 아닐까요?

 

   정용준 네. 호흡이랄까. 소설을 이야기라고 규정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야기라고 놓고 볼 때 너무나 다루는 방식이 달라요. 저는 정말 습작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까지 제가 썼던 방식이나 습관들이 전혀 장편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지만, 단편 쓸 때보다는 확실히 장편 쓸 때가 작가로서는 재미있더라고요. 재미있고, 훨씬 좋았고. 단편 쓸 때는 쓸 때만 몸이 조금 이상해지고 아프고 그랬는데 장편은 점점 몸이 좋아지고 근육이 붙는 것 같은 느낌 (……) 저는 글을 쓰는 것은 괴로움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편 쓸 때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어요. 산문의 힘이라고 할까요. 산문은 한순간의 섬광으로 쓰는 게 아니라 오래오래 생각하고 계획해서 일정한 흐름에 맞춰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냥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단편하고 장편하고는 아예 다른 장르 같다. 하지만 제가 단편보다 장편을 잘 쓸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창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장편은 저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고봉준좀 복잡한 이야기입니다만, 소설에서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2000년 이후에 비평가들의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 또한 사실은 가독성이 높은 작품도, 많이 팔린 작품도 아니었습니다. 대형 서점들은 매일, 매주, 매월 베스트셀러 집계를 발표하지만, 그 리스트의 최상위에 랭크된 작품들에 대한 평문이 문예지에 실리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렇다면 주로 어떤 작품들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을까요? 한동안은 ‘나쁜 소설’이 주목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계몽적 태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 은폐되어 있는 이면적 사실에 대한 소설, 사실 은폐된 것도 아니죠. 거리에 나가면 금방 보이니까요. 어쨌거나 변태적이고 기괴한 것들, 이미지와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어요. 윤보인 선생님의 작품도 그런 경향성 속에서 여러 번 거론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정용준 선생님의 작품은 경계선에 놓여 있는 듯해요. 예를 들면, 최민석 선생님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새드앤딩으로 끝나지는 않지요. 굳이 따지자면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따스한 여운이 묻어나는 쪽에 가까운데, 사실 그런 작품들은 한동안 평론가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기도 했어요. 세상의 불화를 봉합하려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불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을 소설의 ‘윤리’라고 말하기도 했죠. 정용준 선생님의 글에는 묘하게도 두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듯해요. 전반적인 느낌, ‘정조’라고 이야기할까요? 기본 모드(mode)는 ‘나쁜 소설’의 것을 물려받고 있지만, 결말이 항상 ‘새드앤딩’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작품들이 여러 편이더군요. 저는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사랑해서 그랬습니다」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그래서 궁금해요. 이 작가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할지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서 그랬습니다」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태아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희생’과 ‘사랑’이라고 읽더군요, 그 죽음이 희생, 사랑일까요? 사실 우리 시대의 철학적 담론들은 ‘희생’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허구’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용준 희생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그랬습니다」는 제가 유일하게 소설 제목에서 말장난을 해본 소설인데요. 소설 속 인물들은 다들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결국 다 사랑에 실패하잖아요. 아버지도 그렇고 심지어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태아의 어머니, 소설에 나오는 ‘사라’라고 하는 태아의 어머니는 다른 것 같지만, 태아는 사라를 의심하죠. 마지막에 태아가 죽기 때문에 희생을 한다는 느낌이 있지만, 일단 제가 규정하고 쓴 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 자신이 느끼기에는 희생은 아니고 어쩔 수 없음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라의 두려움과 불행이 그토록 명징하게 느껴지는데 도저히 세상 밖으로 못 나가는 거죠. 자기가 자신의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아는데 그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소설을 스스로 해설해 볼 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남을 안다는 게 뭘까에 대한 탐구에 있다고 생각해요. 진짜 타인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을 대하는 게 힘들어질 수밖에 없죠. 쉽게 사랑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어요.

 

   고봉준앞에서도 잠시 이야기가 나왔는데,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때, ‘알 수 있다’, ‘알 수 없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선택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의미인가요?

 

   정용준 네. 진짜 안다는 건 굉장히 힘들고, 남에 대해 뭔가를 정확히 알았을 때 그 사람은 굉장히 불행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얘는 내 편이다’, ‘내 편이 아니다’라고 쉽게 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저는 계속 그것을 추적했던 것 같아요. 등단작부터 해서, 「벽」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 남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씩 나오는데 그 사람이 가장 무기력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죠. 잘 아는 상대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심재천저는 이 자리 배치가 참 잘 됐다고 생각해요. 좌석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저는 정용준, 윤보인 두 분의 소설에서 어떤 공통점을 느꼈거든요. 공통점이라기보다는 두 분은 한국 문학의 적자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 소설의 적통을 쭉 이어받는 입장. 반면, 저와 최민석 선생님은 사생아고요.

 

   고봉준제 생각이랑은 반대인걸요?

 

   심재천두 분은 정규군의 느낌이고 저희는 게릴라나 급조된 농민군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용준 선생님이 무거운 주제를 묵직한 문체로 잘 쓰시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저는 노력해도 그게 잘 안 돼서 팔랑거리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아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완벽하게 표현될 때까지 끊임없이 쓴다는 말씀을 듣고는 ‘아, 이것이 정통파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언어의 한계를 일찌감치 느낀 편이에요. 언어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표현의 완결성에 대한 집착이 없어요. 그런 주제에 언어를 다루는 소설가가 됐으니 불구 같은 느낌이긴 한데, ‘불구라고 쓰면 안 돼?’ 하는 마음으로 쓰고 있거든요. 두 분에게선 언어에 대한 믿음이 느껴져서 저는 듬직했습니다.

 

   최민석제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데뷔한 지 얼마 안 되고 작품을 발표할 기회도 많지 않았지만, 공교롭게 뭔가 할 때마다 자꾸 용준 씨랑 같이 뭘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이렇게 같은 자리에 나오게 됐지만. 작년인가요? 웹진에.

 

   정용준 네, 그렇죠. 신인상. 특집 할 때도.

 

   최민석그때도 같이 들어갔었어요. 그리고 작년에 젊은 소설. 거기에도 또 같이 들어가고. 또.

 

   고봉준나중에 ‘세기의 라이벌’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웃음)

 

   최민석아니,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아무튼 같은 동료고 같은 친구고 이렇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패션지에서 산문을 하나 써달라고 해서 줬는데 거기에도 또 용준 씨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계속 엮이게 되는 거 같은데. 그래서 용준 씨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 되게 궁금했어요. 물론 웹진에 발표되는 작품도 있지만. 되게 궁금했고. 용준 씨 소설이 나오고 난 다음에 여기저기서 격찬이 많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래서 사실은 굉장히 보고 싶었는데. 되게 구차한 변명이지만 마감도 있고 해서 못 봤지만, 대충 어떨 거라는 감은 잡았어요. 왜냐하면, 블로그 이웃을 맺어서. 블로그에 올린 짧은 문장들만 봐도 문장에 깊이가 있고 진중한 맛이 있더라고요. 그러다 『가나』를 마침내 사서 읽었는데, 되게 수긍했던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스타일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쓰고자 하는 말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빨리빨리 흘러가는 주의고 말장난도 하고 그런 주의지만, 용준 씨는 정말 한때 유행했던 한 땀 한 땀. 아니면 정말 천재적인. “그냥 썼는데 그런 거예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정말 정성이 들어간, 정말 땀이 배어 있는 문장이구나, 그렇게 느꼈고. 전반적으로는, 영화감독으로 치자면 이명세 감독처럼 스타일리스트인 것 같아요. 이미지나 어떤 정서를 잘 포착해서 이끌어가는 것 같아서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고봉준
네. 세 번째 책은 윤보인 선생님의 『뱀』입니다. 누가 먼저 말씀해 주실래요?

 

   심재천저는 역시 저랑 다르다는 느낌을 확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두 번째 작품이 「악취」인데, 악취가 안 나던데요? 문장이 워낙 이렇게 매끄럽고 세련됐으니까. 짧고 간결하고. 악취가 전혀 나지 않는 그런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궁금한 게 혹시 소설을 배우셨는지. 프로필을 못 봤는데.

 

   윤보인네. 문창과 다녔습니다.

 

   심재천그런 느낌을 조금. 터부를 굉장히 용기 있게 건드리시는데 문장도 확 망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이런 말 하지? 아무튼 깔끔하고 너무 잘 정련된 문장으로 악취나 뱀 이런 소재를 밀고 나가니까 굉장히 새로운 미학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았습니다.

 

   윤보인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민석제가 이어서 할게요. 저는 개인적으로 알기도 하지만, 보인 씨 작품은 제가 보면 굉장히 낯선 여행지로 가는 느낌을 받아요. 저랑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거나 인간의 폭력성 이런 주제는 제가 아직 고민해 보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에 이런 걸 보면 ‘이야, 이런 것도 있구나. 이런 거를 가지고 이렇게 쓰고 밀어붙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새로운 여행지에 가서 안내를 받고 굉장히 낯설고 신비한 경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저의 문화적 지경이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가라서 굉장히 고맙고요. 굉장히 깔끔하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 작업방식을 알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9년 동안 썼다고 했는데, 그러면 정말 촌스러운 건 다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다작을 해서 한 달 만에 후다다닥 해서 내버려두고 안 보는 작가라면, 보인 씨는 9년 동안 매번 꼼꼼하게 보니까 깔끔할 수밖에 없죠. 전 제 작품 유치해서 못 보거든요. 보인 씨 작품에 대해선 정말 다른 세계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있어요. ‘야, 정말 끈기 있게 자기 문장을 포기하지 않는구나.’ 그런 점은 저도 굉장히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전 포기를 해버리죠. ‘저건 내가 도달하지 못할 세계야.’

 

   심재천잘 나눴다니까요.

 

   고봉준‘문지파’와 ‘안 문지파’? 최민석: 아무튼 그런 생각 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윤보인고맙습니다.

 

   고봉준저 역시 윤보인 선생님의 작품 경향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주목하고, 꽤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주목받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특정한 이미지와 경향 때문에 주목받은 작가들은 그 세계에서 조금만 벗어나려고 시도하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죠. 아마 개인적으로는 고민이 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뱀』을 읽은 솔직한 느낌은, 독백적이고, 이야기 자체보다는 다른 장치들이 훨씬 돋보이고, 속도감을 강조하는 문체가 아니기 때문에 장편으로 바로 넘어가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면 단편의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혹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윤보인장편은 써서 넘겼고요. 하나 더 초고 썼습니다.

 

   최민석저 개인적으로 장편에 대한 줄거리를 좀 들어 봤는데…….

 

   윤보인아니, 하지 마세요.

 

   정용준 저는 굉장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재천언제 나오나요?

 

   윤보인일정에 맞춰서 아마. 저도 아직 이야기는 못 들어서.

 

   최민석굉장히 기괴하고……. 뭐랄까. 그냥 이야기만 딱 듣고 보니까 김기덕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은…….

 

   윤보인아니오, 아니오. 그게 아니고.

 

   고봉준‘나쁜 남자’ 이야기입니까?

 

   윤보인아닙니다.

 

   최민석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또 스포일러가 될 테니까.

 

   윤보인네.

 

   심재천그런 터부의 소재는 남들과 달라야겠다는 자의식을 일부러 가져오시는 건가요? 아니면 내적으로 진짜 그게 느껴져서 그런 걸 쓰는 건지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윤보인약간 후자인 것 같아요. ‘남들과 달라야겠다’ 이런 것보다도, 제가 사실 소설이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자유롭게, 대범하게 써야 하지 않을까, 항상 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억압되어 있던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요.

 

   심재천그러시구나.

 

   정용준 아까 이렇게 잘 나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에 토를 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구성은 그런 것 같아요. 작의의 문제인데요, 왜 이 사람은 이 글을 쓰고 싶어 할까. 소재를 택하고 분위기를 택하는 거는 작가가 최초에 택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도 다른 걸 쓸 수 있지만 계속 이걸 쓰는 거고, 보인 씨도 왜 계속 저렇게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친한 사람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넌 왜 자꾸 이런 걸 쓰냐.” 그걸 굉장히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보던데, 저도 그 말이 굉장히 아팠어요.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쓴다고 유리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좋았단 느낌보다도 작가로서 멋지단 생각이 들었고 저처럼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끝까지 가는 묘사와 주제의식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직접 만나면 순하고 착한 느낌이 들거든요.

 

   윤보인네. 그렇군요.

 



  
고봉준
마지막 작품은 최민석 선생님의 ‘근간’ 예정작입니다.

 

   최민석죄송합니다. 아직 출간이 안 돼서…….

 

   고봉준『능력자』를 대상으로 놓으면 질문을 할 사람이 저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단편을 함께 이야기해도 좋겠네요. 저는 『능력자』를 읽으면서도, 사람들이 훗날 이 소설을 예술가 소설의 2000년대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았어요. 명색이 ‘작가’인데, 현업은 ‘야설작가’에 머물고 있거나 황당하게도 복서의 일대기를 써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최민석예술가 소설요? 아니면 예술과 소설요?

 

   고봉준예술가 소설이죠. 주로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루저’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전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자의식이 많이 들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최민석꽤 자전적입니다.

 

   고봉준그래요? 작가의 세계관이겠죠. 저는 최민석 선생님의 등단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심지어 그 작품에 관한 해석을 포함시켜 학회에서 발표도 했어요. 물론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어요. 작가는 의식하지 않고 썼겠지만 그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고, 웃자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테러’나 이주노동자의 ‘인권’ 같은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잖아요? 결말 부분에서 그들이 버스를 탈취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지향이나 관심 같은 것을 안 느낄 수 없었어요. 국적이 다르고, 사연이 다르고,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버스 안에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어디론가 달려간다는 설정은, 설령 그 버스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비극적인 현실을 따뜻하게 안아 보려는 느낌을 갖게 하더군요. 창비 신인상 수상소감에 등장하는 엉덩이에 털 나는 작품(‘항문발모형’)이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호시 마모루 감독의 영화처럼 비극적인 것을 희극화시키는……. 『능력자』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어요.

 

   최민석이거 예고편인데. 결말이 공개되면 안 되는데.

 

   고봉준이 사회가 갖고 있는 ‘경쟁’의 문제라든가 자기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가치 있는 것이라는 등등의 이야기들은 지금의 젊은 작가나 평론가들이 ‘계몽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과 가까운 게 아닐까요?

 

   최민석초고에는 없었는데, 추가한 부분이에요. 그게. 수상작인데, 메시지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냐고 해서. 결국 제가 설득을 당한 거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저런 요구 다 받아 고치다 보면 이거 내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의견을 표했고, 그래서 이야기가 원점으로 되돌아갔죠.

 

   고봉준그럼 이 질문은 드리면 안 되는군요.

 

   최민석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했을 땐, 이미 제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였어요. 메시지를 넣으면서 소설 곳곳에 바꾼 대목이 있어요, 그걸 빼면 거의 전체를 다시 손봐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엔 ‘그래, 이게 이 소설의 운명이다’라고 여기기로 했어요. 귀찮을 땐, 합리화 시키는 능력이 배가됩니다.

 

   고봉준「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에서 사람들이 테러를 모의하고 버스를 탈취했을 때, 그 다음 장면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했는데, 결국 버스중앙차로라는 ‘우연성’을 개입시켜서 끌고 나가더군요. 그런 설정 자체가 구상 단계에서 결정되어 있었던 건가요? 『능력자』도 12라운드로 구성이 되어 있던데요.

 

   최민석장 구성은 처음에는 안 하고 쓰고 나서 한 거고요. 일부분은 구성을 하고 쓴 거예요.

 

   고봉준소설을 쓰면서 아주 꼼꼼하게 구성을 하지는 않고 그때그때 바꾼다는 느낌이에요.

 

   최민석네. 저는 큰 거 하나만 정해 놓고 제목도 안 정하고 써요. 『능력자』를 쓸 때는 <파이터>라는 영화를 보고 왔어요. 복싱 영화인데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저런 걸 한번 써봐야겠다. 제가 염두에 둔 건, 훈련 장면. 비탄에 빠진 주인공이 훈련에 빠져 재기를 하고, 그 와중에 드러나는 삶의 의지. 뭐, 이런 거였어요. 멋있게 이기는 건 좀 그렇고 현실적으로 쓰자. 그것만 가지고 쓴 거예요. 바이오리듬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날씨와 습도에 따라서. 그런데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는 버스전용차선이 생기면서 느낀 점이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의도하고 쓴 거예요. 서울 시민 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요소들을 소설에 가능한 한 많이 때려 넣고 쓰자. 평소에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사실, 예전부터 ‘장례식장에서 우는데, 와서 차 빼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영화 <괴물>에 나와서 못 썼어요. 다른 단편소설에서 썼는데 뺀 이야기는 ‘부부가 부부관계를 가지는 절정의 순간에 핸드폰이 울리는 거예요. “저 아래 302호인데 차 좀 빼주세요.”’ ‘그래서 사정을 멈추고 차를 빼야 하는 사정에 빠졌다.’ 이런 문장으로 한국적 상황을 담고 싶었던 거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는 쓰기 전에,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느낀 점들이 이미 리스트화되어 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선 꽤 많은 부분들이 구상이 된 거라 할 수 있네요.

 



  
정용준
저는 개인적으로 최민석 작가님 글을 좋아합니다. 단편소설이 말 그대로 재미있기는 쉽지 않아요. 말 그대로 재미 즉 퍼니한 거. 읽을 때마다 이런 유머와 익살을 어떻게 썼을까, 많이 생각해 봅니다. 최민석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같은 지면으로 함께 발표할 때가 몇 번 있어서 작가님 작품을 두세 편 정도 읽었는데 그때마다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어요. 중간중간 아이러니한 걸 보면서 웃기도 했고 유머에 웃기도 했지요. 그리고 읽으면 항상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지죠. 마지막까지 읽어지는 게 솔직히 쉽지 않잖아요.

 

   윤보인저도 최민석 작가님 등단작을 굉장히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요. 무엇보다도 진지한 분인 거 같은데, 소설에서는 허무맹랑하고. 그리고 만화를 굉장히 많이 보신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대사 같은 것도 그렇고. 그런 느낌이 굉장히 강했고요. 저는 최민석 작가님이 가지고 계시는 B급 코드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기대가 되는데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실 건지 그런 생각이 들고.

 

   최민석요즘은 제 문학적 자아가 성숙해져서.

 

   윤보인이제 절제하실 생각이신가요?

 

   고봉준왜 세상의 모든 B급은 웃겨야 할까요?

 

   윤보인또 다른 장편을 쓰셨다는 데 기대 많이 하겠고요. 『능력자』 제가 읽어 보지는 않았는데, 꼭 읽어 보겠습니다.

 

   최민석네. 감사합니다.

 

   심재천저는 단편들을 찾아서 읽어 봤어요. 스타일이 한국 순문학의 전형과 달라서 반가웠어요. 싸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까 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소설을 배우려면 외국 작가의 작품을 읽으라는 교수들의 충고는 어떤 기준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의 수준을 가르는 거잖아요. 요컨대 요즘 한국 소설은 그런 기준에 못 미친다는 얘기죠. 저는 오히려 기준에 못 미치는 쪽이 좋아요. 싼 소설이, 미니멀리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다뤄 줘야 일반 사람들도 소설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거 같아요. 소설을 ‘나부랭이’로 여기는 것은 문제지만, 저는 문학지상주의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최민석 선생님은 문학의 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서 반갑고, 저도 일종의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교육으로 공고해진 벽, 글을 쓰려면 문창과에 들어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싶어요. 최 선생님과 저는 비슷한 방향으로 소설을 쓰는 듯해요. 하지만 유머 코드는 저하고 맞지 않아서 최 선생님의 작품에 그렇게까지 웃지를 못했어요. 그것만 빼면 굉장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어요.

 

   최민석저급한 걸 좋아해서.

 

   심재천저도 마찬가지예요. 전 그런 게 좋다니까요. 의관을 차려입고 옷깃을 여미는 그런 것들도 물론 중요하고 인간 정신에 도움이 되겠지만.

 

   고봉준예전에 구(舊)소련에선 문학 사전의 ‘소설’ 항목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논쟁을 했다고 하더군요. 반면 우리는 거의 동어반복 수준이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설명이 대부분이잖아요? 아니면 매우 편의적으로 쓰는 사람 마음대로고요. 할 수만 있다면 작가와 평론가들 다 모여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웃음 코드가 강한 건 B급이냐, A급이냐’ 이런 문제에 관해 따져 보았으면 좋겠어요. 한국 문단도 몇 개의 문학적 경향이 ‘진영’의 형세를 취하고 있으니 각 진영의 대표들이 나와서……. 문학이 ‘합의’의 영역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합의도 존재하지 않으니 독자와 학생들에게 ‘소설’이 무엇이고,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예요. 모든 게 다 ‘소설’이라고 말해버리면 하나마나한 이야기고, ‘이러이러한 게 소설이다’라고 말하면 정작 그런 정의를 벗어난 소설이 너무 많고…….

 

   정용준 저도 장르를 이렇게 구분하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요.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봉준모르겠습니다. 전국작가대회 같은 걸 해봐야 할까요?

 

   심재천평론가 선생님들은 뭔가를 딱 정해 놓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희는 붕 뜬 채로 있어도 얼마든지 괜찮거든요.

 

   고봉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시’에 관한 정의나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상 그게 없어요. 그러니까 때로는 시집에 들어 있으면, 시인이 썼으면 ‘시’라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해요. 그러면 교과서로서의 시론(詩論)도 필요가 없죠. ‘시’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시’인 것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시’가 아닌 것이 되고 말아요.

 

   정용준 저도 얼마 전에 그 질문을 받아서 저는 어떻게 대답을 했느냐면, 가령 소설보다 긴 장시가 있잖아요. 또 반대로 한유주의 소설이나 정영문의 소설처럼 표면으로 드러나는 서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소설도 있고요. 텍스트만 놓고 볼 때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 작품의 장르는 작가밖에 모른다고 생각해요. 소설이라고 쓰면 소설이고 시라고 쓰면 시가 아닐까요.

 

   고봉준맞아요.

 

   정용준 작가를 지우고, 제가 가령 『농경시』의 어떤 것들을 제 이름으로 발표하면 소설 텍스트로 비평을 하겠죠? 반대로 한유주의 글도 어떤 시인이 발표하면 시로 보겠지요. 더 이상 텍스트만 보고 일반 독자들이 비평가가 해석 없이 이건 뭐라고 얘기할 수 없으니까. 저도 난감할 때가 많아요.

 

   고봉준그렇죠. ‘시’와 ‘시 아닌 것’, ‘시’와 ‘소설’의 경계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 개념들이 살아 있는 한은 규정이나 정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문학의 운명이고, 모든 위대한 문학은 바로 그 경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씌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시인, 소설가와 달리 ‘시’와 ‘소설’의 이론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한 게 사실이죠. 벌써 예정된 시간을 넘겼네요. 긴 시간 동안 말씀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은 이야기는 뒷풀이 자리에서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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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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