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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거리는

  • 작성일 2013-02-01
  • 조회수 842

   십년감수(十年感秀)_시

 

 

  이글거리는

 

   이준규

 

 

 

 

   이글거리는 불면의 밤이 진행한다
   두꺼운 안개가 나뭇잎을 땅 쪽으로 조금씩 밀고 있고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요란한 치장을 하고 문을 나서는 휴일의 모든 창녀처럼
   도대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의 보푸라기를 일으키는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나선형 계단에서
   소름끼치게 너를 다시 만나리라
   너의 출렁이는 싱싱한 육체의 밤
   무한히 커지며 이지러지고 물방울 돋치는 새벽
   뒤통수에 뜬 달
   그러나 아주 작은 별 하나도 없다
   어찌 자연의 광휘를 노래하리
   새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이상한 기계들의 숨가쁜 눈빛
   아직도 밤하늘을 배회하는 어색한
   기쁜 신의 종족들
   결코 상이 되지 못하는
   어슬렁 배회하는 느낌들
   너라고 불러 보는 부름의 짖음의 명확한 끝
   밤의 차가운 기운을 쥐어짜는 허리 삔 공간 속에서
   투명하게 언어를 움직이고자 하는 불가능한 기획의 막바지
   언제나 출발선에 있고 언제나 문 밖에 있는
   당신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뜨거움
   자살 같은
   벼락같은
   마약의 시공 같은
   그러나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 『흑백』(문학과지성사, 2006)에 수록

 

 

   추천하며


   시인은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에 대해서 쓴다. 시를 쓰는 일을 주로 ‘시를 짓는다’고 하는 연유를 이 시에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시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백지와 연필이거나, 작은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와 키보드일 수 있겠으나 그 모든 도구들이 일단은 무용해 보인다. 당겨 말하면 이 시인은 활자를 나열하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활자의 반대편에 있는 듯한, 형언할 수 없고 그리하여 사로잡히지 않는 어떤 이미지들과 격조 없이 어울려 듦으로써 ‘시’라는 시공을 짓고 있다.
   “불면”이나 “마약의 시공” 같은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라는 이름의 세계가 명료한 의식이나 감각과는 다른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 시가 겨우 그려내 보이는 몇 가지 흐릿한 이미지들을 조합해 볼 때, 여기서 시라고 불리는 시공은 이미지를 초과하는 촉각의 소여들로 이뤄진 듯하다. “결코 상이 되지 못하는/ 어슬렁 배회하는 느낌들”은 명확하고 명료한 것의 극치에서 그 극단과 만나버린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시각적인 차원에서 어떤 대상을 최대한 선명하게 보고 명확하고 단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할 언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시인은 어렴풋하게 제 주위를 배회하는 느낌들 속에서 그 한순간을, 벼락과 같은 그때를 노려보고 있다.
   한 편의 시는 이렇게 최대의 의도와 최선의 무의도가 맞붙는 지점에 처한 시인의 몸으로 스며들고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겠다”는 저 시인의 문장은 시작(時作)의 선언이자 후언이라고 하겠다. 시인이 의도한 때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때까지를 한순간으로 갈음하는 시간을 짓는 일이 곧 시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_고봉준, 김나영, 김영희, 양경언)

 

 

   《문장웹진 2월호》

 

 

 

이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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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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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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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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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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