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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민들레문학상_수필]희망의 날갯짓

  • 작성일 2015-03-28
  • 조회수 860

 

[제3회 민들레문학상 장려상_수필 ]

 

 

희망의 날갯짓

 

 

 

김홍기

 

 

 

 

    나는 1964년 강원도 정선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가정의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사실상 없다. 그래서일까 20대의 삶은 특별한 기억 없이 보냈고, 30대에 들어서서는 남들 다하는 결혼도 못 한 채 아버님을 모시고 새시 대리점을 열심히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2005년에 아버님에게 치매가 오셨고, 2008년도 요양원에서 투병 생활하시다가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그해 겨울 어느 날…….
    나는 발가락이 심하게 아팠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통증이 심해 강릉아산병원에 갔더니 의사로부터 ‘버거씨 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버거씨 병, 처음에는 그 병이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다.
    거부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사는 방법이라 숙연한 마음으로 다리에 인조혈관을 넣고 발가락을 절단하고 삼 개월 만에 퇴원하였다.
    퇴원할 때 담당 의사는 수년 안에 인조혈관이 또 막힐 수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홍천 장애인 작업장에서 일하는데 이번엔 다리가 아팠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불안했다. 결국 직원의 소개로 2011년 봄 서울국립의료원에 입원하였다.
    의사는 내 다리를 보며 치료가 불가능하고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며칠 뒤 소식을 듣고 강릉에서 누나와 동생이 병실로 찾아왔다.
    누나는 한참 서 있다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동생은 우두커니 서서 눈물만 흘렸다. 나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동생에게 울지 말라고만 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누나는 하얀 봉투를 내밀면서 필요할 때 쓰라고 말하고 병실을 나섰고, 나는 정문까지 배웅하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고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수술 날이 다가왔다. 간호사는 팔목에 번호가 새겨진 팔찌를 채워 줬다. 그 팔찌가 왠지 다른 세상으로 가는 티켓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했다. 육중한 수술실 문이 열리고, 냉기와 함께 분주한 의사들의 모습이 꼭 저승사자들 같았다.
    수술대에 몸을 맡기니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마취를 한다는 말과 동시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고, 머리가 아파 왔다. 정신을 차리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올라왔다.
    그때서야 두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내 미래와 희망도 두 다리와 함께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이 흘러 퇴원할 때가 가까워졌다. 병원 사회복지사가 퇴원하고 갈 곳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특별히 갈 곳은 없다고 했다. 며칠 뒤 복지사는 영등포 쪽방으로 가라고 했다. 나에게 수급증도 만들어주고, 타고 갈 휠체어도 준다고 했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영등포 쪽방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럭저럭 보냈던 20대, 멋진 사업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던 30대를 보내고 난 후 쪽방 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것에 적응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방에서 텔레비전을 봐야 했고, 주변 사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얘기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너무 힘들었고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라는 생각으로 그때부터 술을 먹었다. 혼자서 먹다가 조금씩 주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어울려 먹었다. 밤낮없이 술이 내 몸과 마음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영등포 광야교회에서 밥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빅이슈 직원이 책을 팔아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무실로 찾아갔다. 수습기간을 거쳐 문래역에서 책을 팔기 시작했다. 오전 6∼9시, 오후3∼9시까지 책을 팔았다.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드디어 한 권, 두 권 책을 팔았다.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면서 책을 팔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 적은 돈이지만 저축도 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추석날쯤 옆집에 사는 사람과 먹지 말아야 할 술을 먹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사람 방에 가서 또 막걸리를 먹던 중 집주인이 조용히 하라고 했다.
    들은 척도 안 하고 술을 먹으면서 시끄럽게 했다. 주인은 방문을 열고 나가라고 하면서 나를 쫓아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주인에게 욕설을 하고, 싸우고는 분에 못 이겨 슈퍼에서 생수 두 병을 샀다.
    생수 물을 버리고 주유소로 갔다. 주유소 직원에게 보일러 기름이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고 물 대신 석유를 생수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 그 집 복도에 뿌리고는 라이터를 들고 다 죽인다고 소리쳤다.
    잠시 후 경찰이 와서 방화예비범으로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후회했다. 휠체어를 끌고 동네에 방을 구하러 다녔으나 소문 때문에 방을 주지 않았다. 내가 불쌍한지 주위 사람들이 서울역에 가면 쪽방이 있다고 해서 결국 가방 하나만 메고 서울역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2012년 가을부터 남대문 5가 쪽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활은 영등포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눈뜨면 가게 앞 공터에서 술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서 저녁이 되면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경험에서 나왔을까?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사람들과 싸우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고, 구토를 했다.
    매월 20일 수급비가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24만 원 방세 주고, 외상값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어 또 외상술로 한 달을 시작했다. 나의 계획,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하루살이처럼 오늘만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거리에서 술을 먹다 남대문지역 상담센터 직원과 간호사님을 만나면 건강 해친다, 술 먹지 말라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그고,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과 나만의 세계에서 살았다. 내가 사용하는 방은 난지도와 다름없었다. 늘 술에 취한 채 누나에게 전화를 하면 또 술 먹었느냐고 전화를 끊었다.
    술로 인해 가족 관계는 이미 단절되었고,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술친구밖에 없었다. 생활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항상 그 자리를 맴돌았다.

 

    2013년 12월의 어느 날, 냉기가 온 방을 뒤덮었다. 절단된 다리가 엄청 시려 왔다. 추위를 피할 수단은 오직 전기장판뿐이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염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머리는 언제 이발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무성했다.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닌데,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이제 내 나이 50대,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방 청소부터 했다. 남대문지역 상담센터에 가서 이발을 하고 목욕을 했다. ‘나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부터 술을 먹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의료보험공단에 의족을 신청했다. 2014년 2월부터 남대문지역 상담센터 지하실에 가서 의족을 착용하고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운동기구에 의지하여 제자리 걷기부터 시작했다. 스스로 일어서는 운동을 시작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웠다. 정말 아팠다. 그럴 땐 포기하고 싶었다. 누구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아팠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다. 목발에 의지하여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한 달이 지나니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남대문 마을교회 청년들이 찾아왔다. 교회를 나오라고 권유했다. 교회에 가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기기 시작했다. 교회 가는 길 계단을 기어 올라가면서 예전의 나의 모습을 버리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도 드렸다. 교회에 가서 젊은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던 중 3월부터 남대문지역 상담센터에서 컴퓨터 교실을 개강한다는 공고를 보고 신청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컴퓨터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만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팔 하나가 없는 그분은 리어카를 끌고 파지를 주우러 다닌다.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신조로 생활했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들고 잊고 있던 과거의 술친구가 생각이 나고, ‘술만 먹게 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중증 장애인 모임에도 가입해 매주 토요일 모임에 가서 나보다 더 불편한 형제들에게 작은 것이나마 도움도 주고, 나는 그래도 그들에 비하면 행복하다는 생각과 함께 용기를 얻었다.
    어느 날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우연한 기회에 닉 부이치치의 『플라잉』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팔다리가 없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팔다리가 없어도 서핑에 도전하고, 요리를 하고, 드럼을 연주하고, 타이핑을 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아들도 낳았다. 어떤 순간에도 절망을 딛고, 희망을 보였던 닉 부이치치의 끝없는 도전에 감동을 받았다.
    닉 부이치치에 비하면 내가 직면한 장애와 환경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4년 9월 중순 컴퓨터자격증 시험(ITQ)을 치렀다. 30년 만에 처음 보는 시험이었다. 긴장되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4주 뒤 A등급으로 자격증이 나왔다. 남대문지역 상담센터장님을 비롯해 직원들, 강사님까지 축하를 해주었다.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흐뭇했고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I.T.Q 엑셀 시험에 도전할 것이다.
    컴퓨터를 배우는 동안 남대문지역 상담센터의 컴퓨터 업무를 돕기도 했다. 어느 날 남대문지역 상담센터장님이 그동안 사무실 일을 도와줘서 수고했다면서 작은 선물을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받고 ‘나란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다. 무엇보다 센터장님과 직원들의 격려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강릉에 살고 있는 누나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지난 추석에 전화를 하니 열심히 산다고 칭찬도 받았다. 누나에게 부모님 성묘 가는 데 쓰라고 적으나마 돈도 부쳐 주었다. 내년 봄에는 의족을 하고, 부모님 산소에 다녀올 계획이다.

 

    국립의료원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퇴원할 당시 가지고 있던 300만 원을 영등포 쪽방에서 탕진했지만, 남대문 쪽방에서 열심히 생활한 결과 400만 원이라는 돈도 저축하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잘 것 없는 금액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희망의 끈과도 같다.
    나는 이 돈이 씨앗이 되어 더 큰 열매를 맺으리라 확신한다.
    사람이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란다. 비록 두 다리는 잃었지만 그로 인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스스로 배웠다.
    이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기 싫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인생의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 머지않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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