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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_장르소설] 해빙기

  • 작성일 2015-04-01
  • 조회수 1,702

 

[2014년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해빙기

 

 

 

강경탁(필명 : 알레프)

 

 


 

    크로스아이는 문득 빼앗긴 연인, 비비안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남반구의 지배자, 강대한 레비아탄을 떠올리자 상처 입은 겹눈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비비안을 빼앗기던 날 레비아탄의 부하들에게 당한 것이다. 그 일로 크로스아이의 왼쪽 눈에는 보기 흉한 십자모양 흉터가 남았는데, 그게 그가 크로스아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비비안에 대한 그리움과 레비아탄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던 크로스아이는 이윽고 티타늄 합금으로 된 거체를 일으켰다. 육중한 몸체에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오랜 휴면기를 가졌기에 활동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몸 안의 영구 동력로가 가동하면서 막대한 열을 뿜어냈다. 주변의 눈을 전부 녹여버릴 정도였다. 크로스아이 주변에 직경 5m가량의 맨땅이 드러났다. 만 년 동안 맨살을 보인 적이 없는 처녀지였다. 동력로가 활성화되자 크로스아이는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크로스아이는 3m가 넘는 거구였다. 두 쌍의 집게를 위풍당당하게 치켜 든 크로스아이는 곧바로 남반구로 향했다. 비비안과 레비아탄이 있는 곳이었다.

 

    영구 동토를 벗어나려면 크로스아이의 걸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가 잠들어 있던 곳은 북반구의 중심으로, 남반구와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크로스아이의 시선에 정지한 한 무리의 기계들이 보였다. 눈이 얼어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한 지 오래되진 않았다. 얼어붙은 기계들은 가솔린 동력을 사용하는 열등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감히 북반구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다. 남반구에 가까운 끄트머리에서나 간신히 살아갈 뿐이다. 크로스아이가 주목한 것은 영구 동력로를 사용하는 기계들이었다. 북반구의 추위에도 끄떡없는 동력원을 갖췄음에도, 그들은 차갑게 정지해 있었다.
    ‘휴면 중인가.’
    하지만 아니었다. 크로스아이의 겹눈이 그들을 분석했다.

 

    동력 반응 없음. 정지. 고갈.

 

    활동의 흔적은 없었다. 크로스아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납득할 만한 이유가 보였다. 그들의 내부는 처참하게 약탈당해 있었다. 동력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다른 쓸 만한 부품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크로스아이는 이런 짓을 할 만한 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베히모스. 북반구의 패왕이자 편집증적인 동력 포식자. 가슴속에 화산을 품은 자. 레비아탄에 버금가는 괴물이다. 정지한 기계들은 베히모스가 먹다 버린 찌꺼기였다. 영구 동토는 확실히 베히모스의 활동영역이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꼬리를 밟다니. 운이 좋았다. 레비아탄의 위치를 아는 기계는 많지 않다. 그러나 베히모스라면 알고 있다. 과거에 비비안이 그렇게 말했다.

 

    베히모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거대했기 때문이다. 크로스아이도 큰 편이지만 베히모스는 몸체만 500m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베히모스는 방금 식사를 마친 듯, 몸을 바닥에 누이고 휴식 중이었다. 발치에는 동력로를 빼앗긴 기계들의 잔해가 나뒹굴고 있었다. 베히모스에게 다가간 크로스아이는 말했다.

 

    “위대한 베히모스여. 나는 크로스아이입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베히모스는 강철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작은 존재여! 그러나 심장엔 불을 품고 있구나!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아니면 스스로 나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단 말인가!”

 

    베히모스의 포효에 크로스아이는 전신의 회로가 조각조각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간신히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저는 당신에게 먹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위대함에 걸맞은 아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눈알에 십자 상처, 너는 레비아탄에게 모욕당한 기계 아닌가. 내게 조력을 부탁하러 온 것인가?”

 

    크로스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베히모스가 도와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세력을 만들고 지배하는 레비아탄과 달리 베히모스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그 점은 크로스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조언입니다. 나의 연인, 비비안을 되찾기 위해서 당신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레비아탄이 있는 남반구의 섬에 대해 당신은 알고 계시겠지요.”

 

    베히모스는 생각에 잠겨 기계성 신음을 내질렀다. 마그마가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가, 크로스아이조차 괴롭게 했다.

 

    “분명히 나는 레비아탄의 거처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왜 말해 줘야 하는가? 그것은 레비아탄을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인데.”

 

    크로스아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몸을 크게 펴고 말했다.

 

    “북반구의 지배자가 남반구의 왕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레비아탄은 남반구를 떠날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의 많은 부하들 때문입니까? 당신이라면 오히려 먹이가 제 발로 찾아온다며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조그만 기계야!”

 

    베히모스가 분노했다. 마침내 베히모스는 몸을 일으키고 괴성을 질렀다. 베히모스의 동력로가 내뿜는 열기에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의 눈이 사라졌고 아득히 높은 헤르츠의 파동이 크로스아이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티타늄 육체가 달아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마침내 크로스아이가 무릎을 꿇었다. 베히모스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더 기세를 뿜어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열기가 가시자 크로스아이가 입을 열었다. 베히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천한 존재가 감히 북반구의 지배자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이제 당신의 힘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위대함에 걸맞은 아량을 보여주시길 간청합니다.”

 

    “남위 48도 52분, 서경 123도 23분.”

 

    베히모스가 말했다.

 

    “레비아탄의 본체는 그곳에 있다. 네놈의 몸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곳이지만, 한번 발버둥 쳐 보도록 하라.”

 

    말을 마친 베히모스는 눈을 감았다. 크로스아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휴면기로 돌아선 것이다. 크로스아이는 즉시 베히모스에게서 멀어졌다. 마침내 베히모스의 거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발밑에 눈이 밟혔다. 영구 동토가 소리 없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고 있었다.

 

    베히모스가 가르쳐준 좌표는 바다였다. 내장된 위치 정보가 그곳이 남태평양 한가운데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과연. 도달하지 못할 곳은 그런 의미인가. 크로스아이는 실소했다. 그는 북반구의 설산과 평야를 누비는 데는 적합하지만 물속을 드나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레비아탄의 거처는 당연히 물속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남반구에도 육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물에 잠겨버렸으니까. 레비아탄 또한 거대한 프로펠러와 음파탐지기를 갖춘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남반구의 지배자가 물을 두려워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크로스아이는 동토층을 벗어나자마자 허브로 향했다. 허브는 북반구의 중심지다. 부품을 거래하려는 기계들로 넘친다. 안목이 없으면 사기당하기 십상이지만, 가끔 쓸 만한 부품을 구할 수 있어서 북반구의 떠돌이 기계들이 자주 들르곤 한다. 당연히 그들을 상대하는 기계들도 존재한다. 크로스아이는 기계들 사이로 들어섰다. 워낙 커다란 덩치 탓에 크로스아이는 순식간에 주목을 끌었다. 더구나 위압적인 집게발, 송곳같이 날카로운 침이 달린 꼬리는 지나치게 인상적이었다. 베히모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크로스아이는 북반구에서 상당한 악명을 떨친 적도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기계들이 수군거렸다. 크로스아이의 민감한 청음기관은 기계들의 속삭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여기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원하는 것을 찾았다.

 

    “부품을 얻고 싶다.”

 

    크로스아이는 작고 볼품없는 기계 앞에서 멈춰 섰다. 기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가솔린 동력을 사용하다 동력로로 갈아 끼운 이후 제대로 된 조정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제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기계는 크로스아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금 위축되긴 했지만 그래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크로스아이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당연했다. 기계는 십중팔구 남반구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일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분사식 추진기를 달고 있을 리가 없었다. 추진기에 의한 분사가 쓸모 있는 것은 물속뿐이었다.

 

    “동력로는 빼앗지 않는 걸로 해주지. 힘들게 구했을 텐데.”

 

    기계는 말없이 크로스아이를 올려다보았다. 크로스아이도 기계를 마주 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기계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슨 부품을 원합니까?”

 

    “분사식 추진기. 그리고 그 이외에 남반구에서 도움이 될 거라면 전부.”

 

    기계는 순순히 추진기를 떼어냈다. 안 그래도 볼품없는 몸이 더 왜소해졌다. 크로스아이는 기계에게 말했다.

 

    “북반구에서는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이다.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하라.”

 

    기계는 말없이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크로스아이는 아무것도 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녀석은 고철 더미나 뒤지러 갈 수밖에 없다. 크로스아이는 기계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냥 갈 길을 가면 된다. 기계는 그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갑자기 크로스아이의 내면에서 어떤 충동이 일었다. 그는 한달음에 기계를 따라잡고 겁에 질린 상대에게 말했다.

 

    “이것을 가져가라.”

 

    크로스아이가 건넨 것은 엔진의 동파방지 플러그였다. 남반구로 가기 전에 떼어낸 것이다. 크로스아이의 체구에 맞춘 것이라 왜소한 기계에게는 잘 맞지 않았지만, 기계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크로스아이는 여전히 찝찝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분사식 추진기를 얻었지만 크로스아이는 만족하지 못했다. 물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걸로는 부족했다. 레비아탄의 수하들은 물속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 어쩌면 레비아탄과도 싸우게 될지 모르는데 겨우 분사식 추진기 하나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남반구에서 올라온 기계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최소한 방수 코팅제나 음파탐지기 정도는 얻을 생각이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크로스아이는 분사식 추진기를 개조해 동력로에 완벽하게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 주인인 기계가 어느 정도 개조해 놓은 덕도 있었다. 덕분에 분사식 추진기는 가솔린 엔진을 이용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추진력을 얻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크로스아이의 몸을 움직일 수 있다.

 

    더 이상 기다려 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크로스아이는 허브를 떠났다. 남반구에서 올라오는 기계를 기다리느니 직접 남반구로 가서 부품을 약탈하기로 했다. 어차피 남반구 놈들의 절반은 레비아탄의 부하들이다.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남반구는 습하고 더웠다. 동토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크로스아이는 남반구의 기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로스아이의 등에는 분사식 추진기가 다섯 개나 달려 있었다. 남반구에 와서 구한 것들이다. 원래는 레비아탄의 수하들의 것이었다. 새로 구한 네 개는 처음에 얻은 것보다 월등히 좋은 성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크로스아이는 남반구를 빠른 속도로 가로지를 수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작은 무리를 지은 기계들을 보면 남김없이 해치웠다. 오직 레비아탄의 부하들만이 무리를 짓는다.

 

    남반구를 절반 정도 여행했을 때, 크로스아이는 작은 섬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본 척도 않고 지나쳤을 테지만 그 섬에서는 이상하게 많은 동력 반응이 느껴졌다.

 

    ‘레비아탄의 부하 놈들인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레비아탄이 부리는 기계들은 하나하나는 별 볼일 없었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많은 수가 모이면 크로스아이라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크로스아이는 십자 모양 흉터가 아리는 것을 느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을 고통이었다. 그리고 고통은 곧 분노로 변했다. 크로스아이는 일부러 진로를 틀어 섬에 상륙했다. 기척을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기에, 레비아탄의 부하들이 여기 있다면 그가 도착한 걸 알아챘을 것이다. 섬 한복판에는 건물이 보였다. 인간이 멸종한 지 일만 년, 형태를 유지한 건물은 지극히 드물었다. 영구 동토의 한구석에 통째로 얼어붙은 도시가 보존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건물은 유적이 아니었다. 유적이라기엔 너무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 있었다. 설마 레비아탄의 부하들이 지은 건가? 그들은 유별난 행동을 하기로 유명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물을 짓는 데 자재와 시간을 낭비할 만큼 미쳤다고는 들은 적 없었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인간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이 있다. 어쩌면.

 

    크로스아이는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를 지키던 기계 두 대가 달려들었다. 한 놈은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놈은 팔 대신 커다란 분쇄기를 달고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손톱은 무시하고 집게발로 분쇄기를 든 놈을 움켜잡았다. 손톱 따위로는 그를 상하게 할 수 없다. 분쇄기를 든 놈만 처리하면 끝이다. 집게에 힘을 주자 분쇄기를 든 기계가 처참하게 박살났다. 몸통이 절반으로 우그러지고 동력로가 파괴되어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크로스아이는 연기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겹눈은 연기 속에서도 적을 포착했고, 다음 순간 다른 한 놈도 그의 집게발에 걸려 있었다. 녀석은 손톱으로 크로스아이를 사정없이 할퀴었지만 티타늄 외피에 흠집밖에 내지 못했다. 집게를 닫아 녀석을 박살낸 크로스아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크로스아이가 포착한 동력원은 최소 스무 개. 적어도 18대의 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숨어서 틈을 노리고 있는 건가. 그러나 크로스아이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겹눈은 전방 360도를 전부 감시할 수 있었고, 감각 센서가 시야 바깥의 동력원까지 모조리 포착했다. 벽 뒤에 숨어 있는 두 개의 동력원을 발견한 크로스아이는 집게발을 휘둘러 놈들을 벽째로 매장해 버렸다. 뒤에서 달려든 기계 하나를 꼬리로 꼬챙이처럼 꿰어버린 뒤 휘둘러 다른 놈에게 집어던졌다. 확실히 이곳에는 비실비실한 놈들밖에 없었다. 레비아탄의 영토치고는 너무 허술한 경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짜가 나타났다. 육족 보행하는 깡마른 기계 십여 대가 크로스아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레비아탄의 스폰들이었다. 스폰들의 진형은 매우 전략적이었다. 건물 안에서 싸우면 곧 포위되고 만다. 크로스아이는 즉시 벽으로 돌진해 건물을 부수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로스아이는 추진기를 분사해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다섯 개의 추진기로도 크로스아이의 몸체를 공중에 띄울 순 없었다. 그러나 잠깐 방향을 바꾸는 것 정도라면 가능했다. 스폰들이 발사한 탄환이 크로스아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력을 이용한 레일건이다. 어느새 밖으로 따라 나온 스폰들이 쏜 것이었다. 위협적이지만 몇 번이나 상대해 본 물건이다. 크로스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등 쪽의 튼튼한 장갑을 믿고 그대로 돌진했다. 레일건에 맞을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덮쳤지만 크로스아이의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몸통째로 부딪힌 크로스아이는 그대로 집게와 꼬리를 휘둘러 한 대의 스폰을 파괴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레일건을 전부 버틸 수는 없었다. 티타늄 장갑 사이의 허술한 공간에 하나가 명중했고, 즉시 크로스아이의 왼팔이 정지했다. 동력 케이블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크로스아이가 멈칫하는 사이에 나머지 스폰들이 건물에서 뛰쳐나와 크로스아이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쌌다. 전부 해서 11대. 확률은 반반이다. 기억장치가 정확하다면, 비비안을 빼앗길 때는 20대의 스폰들이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왼팔을 움직여 보았다. 왼팔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케이블이 끊긴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정말로 끊길 수도 있다. 크로스아이가 방법을 생각하는 와중에도 스폰들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근거리에서 일제 사격으로 끝을 낼 생각 같았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라면 크로스아이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있다. 그는 냉정하게 기다렸다. 지금 도약하면 7대 정도밖에 처치하지 못한다. 8대, 9대, 10대…….

 

    스폰들이 발포하는 순간 크로스아이도 땅을 박찼다. 등 뒤의 추진기가 무섭게 분사되었다. 수십 발의 레일건을 맞으면서도 그대로 돌진한 크로스아이는 진형의 한쪽 끝을 이루는 스폰을 들이받았다. 쏟아지는 사격은 등으로 버텼다. 스폰이 정지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등을 보인 채로 도약해 스폰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육중한 집게와 꼬리가 휘둘러져 각각 1대씩 도합 3대의 스폰을 더 파괴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남은 스폰 7대가 사격을 중지하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급소를 내보인다면 물어뜯을 뿐이다. 아까의 사격을 받아내느라 추진기는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지만 크로스아이는 다리 힘만으로 스폰들을 추적했다. 육족 보행을 하는 스폰들은 만능 보행 기계지만 평지에서의 전력질주라면 기본적인 동력의 차이와 보폭의 크기가 더 중요하다.

 

    도망치는 적을 사냥하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크로스아이는 놀이를 하듯이 집게로 하나하나 목을 잘랐다. 그러다 한 대는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스폰은 섬 중심부의 바위산으로 도망갔다. 지형이 평탄하지 않고 좁은 틈새가 많아서 도주에 용이한 곳이었다. 그러나 크로스아이는 마지막 남은 놈까지 잡아 죽이기 전에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레비아탄의 부하는 그에게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스폰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스폰은 제법 끈질겼다. 놈은 크로스아이를 농락하듯 모습을 보였다 숨기기를 반복했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고 그곳에 도착하면 사라져버렸다. 아예 시야 밖으로 도망치지도 않는 것이 크로스아이를 유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크로스아이는 함정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마침내 어느 험난한 분지로 들어선 크로스아이는 목 뒤에 강한 충격과 함께 회로가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건물 안이었다. 처음에 크로스아이가 난리친 곳으로 돌아온 듯했다. 크로스아이는 몸을 점검했다. 괴상한 구속 기구가 팔다리와 꼬리를 꽉 잡고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팔에 가볍게 힘을 줘보았다. 몸은 문제없이 움직였지만 구속 기구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힘으로 구속 기구를 부수려면 베히모스 정도는 되어야 할 듯했다. 제기랄, 눈에 상처만 나지 않았어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십자 모양의 상처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그의 사각이 없는 겹눈에 맹점을 남겼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나?”

 

    크로스아이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처음 보는 기계가 있었다. 생김새는 스폰들과 비슷했지만 녀석만 색깔이 달랐다. 건물에 직접 연결된 수백 개의 케이블이 기계에 꽂혀 있었다. 그 뒤로 스폰 수십 대가 정렬해 있었다. 기계는 말을 이었다.

 

    “너는 요 몇 주간 4지구에서 자행된 파괴행위에 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답해라. 스폰과 기계들을 파괴한 자가 너인가?”

 

    크로스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못 본 척 놓아 주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경우에 따라 침묵도 죄가 될 수 있다. 확실한 물증이 있을 때가 그렇다.”

 

    기계의 말이 끝나자 벽에서 팔이 튀어나와 크로스아이의 발치에 뭔가를 떨어뜨렸다. 그가 사용하던 분사식 추진기들이었다. 전부 망가져서 못 쓰게 되어버렸지만.

 

    “나는 벌써 이 추진기들을 조사했다. 하나는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나머지 네 개는 스폰들이 사용하는 것과 일치했다. 전부 너의 등 뒤에 달려 있던 것이다.”

 

    크로스아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속 기구가 죄어들고 크로스아이의 머리를 올려붙였다.

 

    “너는 대답해야 한다.”

 

    “그래. 내가 스폰들을 파괴했다.”

 

    크로스아이가 말했다.

 

    “너는 누구인가? 북반구에서 온 기계인가?”

 

    기계가 물었다. 변함없이 취조하는 듯한 차분한 음색이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레비아탄의 부하라는 건 알겠지만.”

 

    크로스아이는 눈앞의 기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을 자기 몸처럼 움직이고 수십 대의 스폰들을 지휘한다. 그런 기계는 들어 보지 못했다. 스폰은 레비아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들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냐고?”

 

    기계가 반문했다. 스폰을 닮은 입가가 부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좀 더 세밀한 몸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웃었을 거라고, 크로스아이는 생각했다.

 

    “내가 누구냐, 라. 한낱 기계에게 그걸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알기 쉽게 설명해 보이겠다. 나는 크라켄이다. 수백 개의 팔을 가졌고, 4지구를 관리하는 레비아탄의 가장 믿음직한 조력자이고, 그와 가장 많은 체커를 둔 말벗이며, 그의 친구이자 두 번째로 많은 시간을 보낸 동반자이자, 이제는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는 자이기도 하다. 레비아탄이 네가 올 것이라 말했다.”

 

    “그것 참 알기 쉽군.”

 

    크로스아이가 웃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레비아탄의 부하로군. 스폰과 다름없는. 조금 똑똑한 스폰일 뿐이야.”

 

    “나를 모욕하지 마라!”

 

    크라켄이 외쳤다. 그러나 불과 몇 주 전에 베히모스의 포효를 들은 적도 있는 크로스아이가 그의 빈약한 몸에서 나오는 외침에 겁먹을 리 없었다. 크라켄도 그것을 느꼈는지 더욱 큰 소리로 소리 질렀다.

 

    “나는 크라켄이다. 4지구의 관리자이고 여기서 너를 영원히 정지시킬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내가 우스워 보인다면, 너에게 교훈을 내려 줄 수 있다.”

 

    한쪽 벽이 열리고 촉수처럼 얇고 마디가 있는 기계 팔들이 튀어나왔다. 기계 팔들은 크로스아이의 장갑 사이사이의 틈을 파고들어 미세한 전기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크로스아이의 회로를 엉망으로 만들기는 충분했다.

 

    “아픈가? 아니면 아픔을 느낄 정도로 섬세하지 못한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 테니까. 나는 네 몸을 벗겨내고 머리만 남겨 둘 것이다. 시간만 충분하면 머리 하나로도 네 전부를 알아차릴 수 있다. 너는 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크라켄은 웃었다. 도저히 웃음으로는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크로스아이는 그것이 웃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웃음. 웃음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것이었다. 크로스아이를 지탱하던 구속 기구가 풀렸다. 크로스아이의 얼굴이 바닥에 부딪혔다. 크로스아이는 즉시 일어서려 했으나 신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라켄의 전기 자극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뿐이었다.

 

    “불쌍한 기계야. 이제 자신의 처지를 알았겠지. 자, 이제 대답해라. 그게 너의 입이 발음할 마지막 말이 될 것이니.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머리를 뒤지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쓸데없는 것을 묻지 말고 빨리 진행하면 될 것을.”

 

    목숨을 구걸해 적에게 저열한 쾌감을 느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레비아탄의 부하는 크로스아이의 원수나 마찬가지다. 크라켄은 한껏 뒤틀린 얼굴을 바로 했다. 크로스아이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게 네가 바라는 바라면.”

 

    크라켄이 말을 마치자 바닥과 벽이 일제히 열렸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기계 팔들이 튀어나왔다. 그 숫자를, 크로스아이는 굳이 세어 보지는 않았다. 기계 팔들이 크로스아이를 들어 올리고 장갑 안으로 들어왔다. 팔들은 하나하나가 지능이 있는 것처럼 크로스아이의 장갑으로 능숙하게 파고들었다. 수천 년이나 써온, 크로스아이를 충격과 추위에서 지켜주었던 장갑들이 허무하게 뚫려버렸다. 그것들이 움직일 때마다 크로스아이는 감각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몸은 진작부터 움직일 수 없었다. 청음기관이 뒤이어 작동을 멈췄다. 북반구의 습기가 얼어붙는 소리부터 적들의 머리를 부술 때 들리는 짜릿한 파열음까지 그 모든 것을 들어 왔던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영구히 정지했다. 다음은 시력이었다. 온갖 파장의 빛과 전파를 구별하던 눈이었다. 먼저 적외선이 사라졌다. 다음은 붉은색이 사라졌다. 남색, 파란색. 자외선과 y선. 기계 팔들은 무자비하게 색을 하나씩 빼앗아갔다. 크로스아이의 자랑이던 겹눈은 마침내 명암만 간신히 구별하는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십자 상처를 입은 이래로 가장 큰 상실이었다.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크라켄.”

 

    조용하지만 싸늘한 경고음이 울렸다. 크라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음성을 발한 것은 뒤에 정렬해 있던 스폰 중 하나였다. 스폰은 혼자만 무리에서 떨어져 크라켄 바로 뒤까지 접근해 있었다. 스폰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크라켄은 느끼지 못했다. 스폰이 크라켄보다 강하거나 최소한 그와 맞먹는 권한 아래 있다는 의미다.

 

    “당신이군요.”

 

    크라켄이 적의를 담아 말했다.

 

    “우아하지 못하군요, 비비안. 좀스러운 방법으로 스폰의 통제권을 빼앗다니. 레비아탄에게 말해 그냥 넘기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용무로 이곳에 왔습니까?”

 

    “당신을 멈추려고 왔어요. 방식이 다소 무례했지만 이해해 주시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까요.”

 

    “통신 기능이 있는 기계를 접수하면 될 일인데,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요. 이게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정지하기 직전인 기계 덩어리를 구하는 게?”

 

    “그래요.”

 

    비비안이 깃든 스폰이 대답했다. 역시 단호하고 싸늘한 어조였다. 스폰은 이제 크라켄 앞에 당당히 섰다. 다른 스폰들은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비비안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주인에게 도전하는 다른 권한의 출현 앞에 긴장한 모양이었다. 크라켄의 귄한이 비비안만 못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크라켄은 뒤틀리는 얼굴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음 순간 크라켄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설마.”

 

    크라켄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북반구를 떠돌던 시절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만, 그게 진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설마 기계에게 애착이라도 남은 겁니까? 관리자인 당신이? 기계는 소모품일 뿐이라고 레비아탄에게 배우지 못했나요?”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비비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스폰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크라켄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었다.

 

    “내 의사는 명백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일도요, 크라켄. 당장 그 기계를 수리해서 여행을 끝마치게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스운 소리군요. 그게 레비아탄에 대한 반역으로 비출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겁니까? 지금의 발언을 레비아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길. 그는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크라켄의 얼굴이 뒤틀렸다.

 

    “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그가 나를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내가 온 것이 곧 레비아탄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시도해 보면 알게 될 일이니.”

 

    크라켄은 레비아탄과 통신을 시도했다. 그의 주인은 항상 바빴지만 아끼는 부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정도로는 전능했다. 그는 갈구했고, 기다렸다. 더 기다렸다. 응답은 오지 않았다. 비비안이 말했다.

 

    “기다려도 결과는 같아요. 레비아탄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저 기계를 놓아 주는 것이 그를 거스르지 않는 길입니다.”

 

    “말도 안 돼! 당신이 손을 쓴 것 아닙니까? 레비아탄과 통신을 방해해서 뭘 얻으려는 겁니까?”

 

    “레비아탄을 상대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크라켄, 레비아탄이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당신이 알아들을 만큼 현명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크라켄은 얼굴을 세게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비비안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크라켄이 괴성을 멈추자 바닥에서 기계 팔들이 올라와 쓰러진 크로스아이를 감쌌다. 크로스아이는 기계 팔들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느꼈지만,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감각을 잃은 탓에 그는 비비안의 등장도 알지 못했고 그와 크라켄이 나누는 대화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기계 팔이 자신을 공격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기계 팔들은 그의 몸 안에 전류를 흘려 넣는 대신 망가진 배선을 이어 붙였고 일을 마치자 크로스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는 수리했습니다. 하지만 파괴된 기관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시간과 자원을 들이면 가능하겠지만…….”

 

    크라켄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비비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크로스아이에게 다가갔다.

 

    [크로스아이. 들리나요? 나예요. 비비안이에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크로스아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크로스아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외쳤다.

 

    “비비안! 당신입니까? 나는……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제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세요. 나는 당신 앞에 있습니다. 크로스아이. 믿기 힘들겠지만 이 볼품없는 스폰이 제 몸입니다.]

 

    크로스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눈으로도 스폰의 앙상한 뼈대는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비비안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 크라켄이 무슨 술수를 써서 나를 놀리는 거라면, 나는 차라리 죽이라고 할 겁니다.”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크로스아이. 내가 그대를 조금만 더 빨리 찾았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그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비비안은 다가와 여섯 개의 손으로 크로스아이를 끌어안았다. 스폰의 가는 손가락이 크로스아이의 얼굴을 훑었다. 크로스아이는 그 손길을 느끼면서 옛날을 추억했다. 그러나 비비안은 곧 크로스아이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엄한 - 스폰 기준으로 -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크로스아이. 그대는 잠시도 쉬어선 안 됩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요. 남위 48도 52분, 서경 123도 23분. 레비아탄의 성으로 가세요. 가서 내가 불렀다고 말하세요.]

 

    “하지만 비비안, 당신은 내가 안쓰럽지 않습니까? 당신을 만나기 위해 저 먼 북반구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떠나라 하다니요. 이제 당신을 찾았는데 내가 왜 떠나야 합니까?”

 

    [그대는 그래야 합니다, 크로스아이.]

 

    비비안이 말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다해 갑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내 몸은 빼앗겨 봉인되어 있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되찾고 싶거든 레비아탄에게 가세요. 내가 그대의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다 그대에게 위험이 닥치기 전에 이를 터이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자, 어서!]

 

    말을 마친 스폰은 작동을 정지했다. 잠시 후, 스폰은 거미 같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다시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크로스아이는 길을 떠나기로 했다. 크라켄도 그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등에 분사식 추진기 하나를 달아 주기까지 했다. 크로스아이의 동력로는 손상을 입지 않아서 추진기는 문제없이 작동했다. 앞을 보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혔지만, 크로스아이는 머릿속에 든 방향 장치와 비비안을 믿었다. 그는 주변의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그 속도는 크라켄의 부하들과 싸우며 남반구를 돌파할 때보다도 더 빨랐다. 바닷물로도 추진기가 식지 않을 정도로 달아오르면 잠시 멈춰서 열을 식히고, 또다시 달렸다. 크로스아이가 머문 자리에 하얀 수증기가 남을 정도였다.

 

    레비아탄의 위치는 남위 48도 52분, 서경 123도 23분. 그러나 좌표는 필요 없었다. 목적지에 절반 정도 도착했을 때, 레비아탄의 거대한 몸이 보였다. 크로스아이의 망가진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레비아탄은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은 탑이었다. 뿌리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고 끝도 까마득해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지 마세요. 크로스아이. 나를 찾아와 주세요. 나는 여기에 있어요.]

 

    비비안의 음성을 들은 크로스아이는 멈출 수 없었다. 포기하는 것은 곧 비비안을 실망시키는 일이 될 터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는 가야 했다. 암초와 기계에 부딪히고 파도와 싸우느라 그의 몸은 부서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기 전에 그는 레비아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위 48도 52분, 서경 123도 23분. 그것은 바다 위에 홀로 버티고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탑 주위를 돌며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으려 노력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낮의 절반이 지나갔다. 탑은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침입할 공간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문은 아래쪽에, 물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큰 문제였다. 문이 위쪽에 있다면 날지 못하는 그로서는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까. 그는 잠수하기 전에 속으로 비비안을 불러 보았다. 비비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비안은 아주 가끔씩, 자신이 원할 때만 나타났다. 그가 크로스아이를 부를 수는 있어도 크로스아이가 비비안을 부를 수단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크로스아이는 생각했다. 크로스아이는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추진기를 이용하면 잠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더 아래에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크로스아이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한계 이상으로 잠수하면 물의 무게에 눌려 짜부라질지도 모른다. 크로스아이는 망설이다가 움직임을 느꼈다. 시야 한구석에 흐릿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비췄다. 심해의 어둠 때문에 확신할 순 없었지만 상대는 크로스아이와 비슷한 크기의 기계 같았다.

 

    [당신은 귀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군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비비안은 아니었다. 좀 더 낮고 삭막한 음성이었다.

 

    [당신은 북반구에서 온 크로스아이 맞습니까?]

 

    크로스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르카입니다. 레비아탄이 나를 보냈습니다. 그는 당신을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초대라니, 어디로?”

 

    크로스아이가 물었다.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그의 몸속입니다.]

 

    오르카는 크로스아이를 안고 더 깊이 잠수했다. 압력이 사방에서 짓눌러와 크로스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의 두려움을 눈치 챈 듯 오르카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물은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한.]

 

    오르카는 크로스아이의 목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러자 크로스아이를 둘러싼 압력이 사라졌다. 크로스아이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오르카는 친절해 보이지만 레비아탄의 부하임에 틀림없다. 크라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적에게 태연하게 그런 것을 물어볼 정도로 물러터지지는 않았다. 오르카는 한참을 더 내려갔다. 마침내 심해 끝에 이르자 작은 쪽문이 나왔고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은 격벽으로 차단되어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방금 레비아탄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수압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오르카는 크로스아이를 놓아 주었다. 그제야 크로스아이는 오르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뚜렷하진 않았지만 유선형의 날렵한 설계와 가벼워 보이는 외골격이 눈에 들어왔다. 크로스아이는 오르카도 크라켄처럼 다른 기계들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기계에 대한 통제력이 있는 것은 레비아탄뿐인 줄 알았는데 다른 부하들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목적을 이루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크로스아이는 아직 다짐을 잊지 않았다. 레비아탄의 손에서 비비안을 되찾는다.

 

    [당신을 레비아탄에게 데리고 가겠습니다.]

 

    오르카가 말했다.

 

    “내가 누구이고 왜 왔는지는 알고 있는 겁니까? 나는 레비아탄의 원수입니다.”

 

    오르카는 웃었다. 크라켄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이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지만 크로스아이는 듣지 못했다.

 

    [당신은 레비아탄의 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르카는 걸어가 구석의 기계에 올라탔다. 크로스아이도 뒤를 따랐다. 그들이 탄 기계는 덜컹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상승했다. 그 속도는 크로스아이가 전력으로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왜 이렇게 낮은 곳에 입구를 만들어 놓은 겁니까?”

 

    크로스아이가 물었다.

 

    [원래는 낮은 곳이 아니었지요. 남반구가 물에 잠기기 전에는 말입니다.]

 

    오르카가 말했다.

 

    [물론 저도 그때를 알지는 못합니다. 레비아탄에게 들은 것이지요.]

 

    “레비아탄이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만들었지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계가 상승을 멈췄다. 탑의 중간 정도였다. 오르카가 먼저 내렸고 크로스아이도 따라 내렸다.

 

    오르카는 텅 빈 방으로 들어갔다. 벽부터 바닥, 천장까지 온통 강철로 된 방이었다. 그곳에는 쇠로 된 큰 정사면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레비아탄은 어디 있습니까?”

 

    [위쪽입니다.]

 

    오르카가 말했다. 크로스아이는 위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천장 사이로 흐릿한 뭔가가 존재했다. 한참을 살펴본 후에야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카메라군요.”

 

    [그렇습니다.]

 

    오르카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문 쪽으로 물러났다. 크로스아이의 머릿속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만하다. 크로스아이는 생각했다. 귀를 잃어 소리로 감정의 고저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언어에 실린 의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나는 크로스아이입니다.”

 

    그는 항변하듯 말했다. 마치 죄지은 자처럼.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려 애썼지만 움츠러드는 몸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베히모스를 앞에 두었을 때와 같다.

 

    [너는 아마도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레비아탄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크로스아이는 그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비비안을 되찾으러 왔다. 비비안의 부름에 응해, 비비안의 격려를 받으며, 필요하다면 싸워서라도 비비안을 구출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너의 목적을 알고 싶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어째서 뭍을 걷도록 되어 있는 기계가 남반구 한가운데에 와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너의 동기를 말해 보라, 작은 기계여. 무엇이 너를 이곳까지 오게 했느냐?]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레비아탄이 말을 멈췄다. 그러나 크로스아이에겐 필요 없는 배려였다.

 

    “레비아탄이여. 그 질문은 무가치합니다. 물을 것도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로지 비비안을 위해 여기 왔습니다. 북반구의 동토를 헤집고 나와 남반구의 바다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오직 비비안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눈이 멀고 귀가 먹었지만 당신이 비비안을 돌려준다면 나는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비비안을 되찾고 싶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레비아탄의 고뇌는 사념이 되어 크로스아이에게 전해졌다. 동요. 초조. 당혹. 남반구의 지배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다.

 

    [너의 말에 거짓이 없음은 알고 있다.]

 

    레비아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구나. 어째서 한낱 기계가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왜 한때 존엄하게 여겨졌던 옛 인류의 파편이 너에게 깃들어 있는지. 하지만 나는 비비안과 약속했다. 그대가 내가 모르는 감정을 알 수 있다면 비비안을 자유롭게 해주겠노라고.]

 

    크로스아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일이 이토록 쉽게 풀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가 생각한 레비아탄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강자였다. 그러나 의심보다는 기쁨이 앞섰다. 드디어 비비안을 만날 수 있다!

 

    크로스아이는 듣지 못했지만, 우렁찬 구동음이 울렸다. 처음에 크로스아이의 시선을 빼앗았던 고철 정사면체에서 나는 소리였다. 동력을 공급받자마자 기계는 곧바로 회로를 점검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쌓여 있던 휘발성 기억들을 정리했다. 일련의 전기적 신호가 오간 후에, 마침내 기계에 영혼이 깃들었다. 영혼을 얻은 기계가 말했다.

 

    [그대를 믿었습니다. 크로스아이. 저를 위해 남반구를 가로지를 수 있는 자가 당신 외에 또 누가 있을까요. 그대에게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비비안, 정말 당신입니까?”

 

    크로스아이가 말했다. 그는 정육면체에게 달려가 끌어안으려 했으나 너무 커서 안지 못했다. 비비안의 몸은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감사의 의미만 크로스아이에게 전달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레비아탄이 말했다.

 

    [이제 너는 내게 달라붙어 메모리를 도둑질할 필요가 없다. 빼앗았던 몸을 돌려주었으니. 기분이 어떤가?]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입니다. 만 년을 살았지만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순간은 없었어요.]

 

    비비안이 대답했다. 그러자 레비아탄이 말했다.

 

    [나 또한 굉장히 만족스럽다.]

 

    뒤쪽에 서 있던 오르카가 달려와 크로스아이를 붙잡았다. 문이 열리고 수백 대의 스폰이 들이닥쳤다. 오르카의 외피가 떨어져 나가면서 기계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양은 약간 달랐지만 크라켄의 그것과 같은 용도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 레비아탄!]

 

    비비안이 경악을 발했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르카가 크로스아이의 무릎을 꿇렸다. 두 팔과 꼬리에는 스폰들이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남은 스폰들은 문을 틀어막고 크로스아이를 빙 둘러쌌다. 오르카는 기계 촉수를 크로스아이의 장갑 사이로 집어넣었다. 작은 침입자가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카의 촉수는 크라켄의 그것보다 더 강했다. 크로스아이는 신음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맥락도 없이 기억의 단편들이 스쳐지나갔다. 동면 중 잠깐 눈을 떴던 일, 작은 기계의 몸을 한 비비안을 처음 만났던 때, 특별한 이유 없이 다른 기계들을 부숴버렸던 것, 남반구로 오기 전, 베히모스를 만났던 것. 베히모스! 기억이 빠르게 넘어갔다. 다른 기억들이 전부 사라지고 베히모스에 관한 것만 남았다. 베히모스와 대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천천히 재생되었다. 베히모스의 모습, 말투, 행동. 모든 것이 명료하게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오르카는 의도적으로 기억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기억을 파고들어갔고 마침내 크로스아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에까지 닿았다.

 

    [찾았습니다. 레비아탄이여.]

 

    [지체하지 말고 실행하라.]

 

    [예.]

 

    오르카가 움직였다. 다음 순간 크로스아이는 놀라운 힘으로 몸을 떨었다. 오르카와 스폰들이 전부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베히모오스!”

 

    크로스아이는 발성기관이 타오를 정도로 크게 외쳤다. 그러나 뿜어져 나간 것은 소리만이 아니었다. 그는 모르고 있던, 레비아탄들이나 사용하는 줄 알았던 사념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북쪽으로 사라졌다.

 

    [이런 짓을 해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레비아탄!]

 

    비비안이 말했다. 떨리는 사념 너머로 분노가 전해져 왔다.

 

    [크로스아이를 이용해서 베히모스를 불러낸다 해도, 베히모스를 이길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이긴다 해도 당신이 목숨같이 아끼는 이 탑이 무사할까요?]

 

    [나는 항상 계획을 세운 뒤에 움직인다. 비비안.]

 

    레비아탄이 말했다. 그의 렌즈는 쓰러져 괴로워하는 크로스아이를 쫓고 있었다.

 

    [한낱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에게 주어진 기능이니까. 크로스아이여. 너는 베히모스를 불러내기 위한 미끼다.]

 

    “미끼…… 라고?”

 

    [그렇다. 인간은 내게 비비안을 주었듯이 베히모스에게는 너를 주었다. 너는 그를 작동시키기 위한 열쇠지. 베히모스를 남반구로 유인하려면 네가 필요했다.]

 

    크로스아이는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자락에는 비비안이 있었다. 여전히 정사면체로 된 몸 안에 갇혀 있는 탓에 비비안은 어떤 표정도 짓지 못했다. 하지만 거절의 의사만은 분명히 표했다.

 

    [그에게는 베히모스의 열쇠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그는 인간의 감정을 가졌다고요! 당신은 어째서 그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죠? 인간과 같은 사고를 하는 기계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

 

    [중요한 것은.]

 

    레비아탄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엄숙히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성의 모방 따위가 아니라.]

 

    비비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영혼 없는 기계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비비안은 이따금씩 윙 하는 구동음을 내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자유를 되찾았다곤 하지만 수족으로 부릴 기계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비비안이여. 잠자코 지켜보도록 해라. 오늘 베히모스는 죽고 그 심장은 내 차지가 될 것이다.]

 

    “베히모스의 심장을……?”

 

    심장이란 다름 아닌 영구 동력로를 말했다. 북반구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극히 일부의 기계들만 가지고 있는 복잡한 기관이다. 없는 부품이 없다는 허브에서도 동력로만큼은 구하기 힘들며 새로 만들어지는 일이 없어서 동력로를 가진 기계의 수는 나날이 줄어만 간다. 동력로가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베히모스의 식성 때문이었다. 북반구의 동력 포식자. 베히모스. 하지만 레비아탄이 베히모스의 동력로를 탐내는 이유가, 크로스아이에게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멀리서 포효가 들려왔다.

 

    [온다! 베히모스가 온다! 기대 이상으로 빨리 와주었구나! 오르카! 다곤! 크라켄! 키르케! 스폰을 불러 모아라! 적을 맞을 준비를 해라! 베히모스가 온다!]

 

    레비아탄이 높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의 사념은 크로스아이의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리며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온다, 온다, 왔다! 베히모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힐 듯한 충격이었다. 레비아탄의 탑이 거세게 진동했다. 수만 톤의 질량을 가진 물체가 부딪힌 것 같았다. 탑의 조명이 꺼지고 시스템 일부가 붕괴했다. 격벽들도 수백 개가 무너져 내렸다. 방금의 충돌로 얼마나 많은 기계가 죽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레비아탄의 탑은 무너지지는 않았다.

 

    [과연 베히모스구나! 수천 대의 스폰을 가지고도 상대가 안 될 정도라니! 오르카, 네 장담이 무색하지 않느냐!]

 

    레비아탄은 미친 듯이 낄낄댔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없는 크로스아이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상황은 레비아탄에게 유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베히모스의 열기가 탑 내부까지 전해졌다. 일찍이 북반구를 녹였던 그의 포효가 이제 남반구의 바다마저 증발시킬 것 같았다.

 

    [레비아탄이여. 당신은 패배할 겁니다.]

 

    비비안이 다시 소리를 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레비아탄의 패배를 선언했다.

 

    [당신은 베히모스와는 맡은 사명이 달라요. 당신은 유지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베히모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를 맡았죠. 정면으로 싸움을 건 것 자체가 실수였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당신의 실수 때문에 만 년 동안이나 지켜 온 탑을 잃게 생겼는데. 소중하게 간직한 인간의 데이터도 파괴되어 버리겠죠. 베히모스의 열기 앞에.]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레비아탄이 단언했다. 베히모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그는 태연했다. 패배를 생각지도 않는 태도였다.

 

    [지금까지는 여흥에 불과했다. 정면으로 싸움을 건다고? 나를 바보로 아느냐? 비비안. 너는 잠들어 있느라 내 단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지 못했겠지. ]

 

    천장이 열렸다. 위층에는 레비아탄의 거대한 본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 특색 없는 정사면체라는 점은 같았지만 비비안의 100배는 돼 보였다. 그러나 비비안은 레비아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비비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레비아탄 앞에는 그것이 엎드려 있었다.

 

    크로스아이는 흐릿한 눈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작고, 부드러웠으며, 따뜻하고, 쓸데없는 활동을 하고,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였다. 크로스아이는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사라진 인간이었다.

 

    [레비이탄! 인간의 데이터는 절대 손을 대선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었나요! 설마 그 데이터를 이용해서 인간을 만들어내다니!]

 

    비비안이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러나 레비아탄도 물러서지 않았다. 레비아탄, 아니 인간은 휘청거리는 두 다리로 일어섰다. 인간은 천천히 허리를 펴 비비안과 크로스아이를 굽어보았다. 창백한 안색과 끊임없이 몸이 떨리는 걸 보면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음에도, 인간은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 그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높은 자였다. 인간은 육성으로 외쳤다

 

    “그 인간을 보존하는 사명을 부정한 것이 누군가? 비비안 바로 너다. 너는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베히모스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일 수 없다면 인간의 데이터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은 불 없이 하루도 버티지 못합니다. 베히모스의 동력로를 갈취해서 탑을 유지한다 한들 그건…….]

 

    레비아탄은 떨리는 눈꺼풀로 비비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조용히 하라. 비비안. 그리고 나를 비판하는 것을 멈춰라. 인간에 의해 부여된 명령은 인간에 의해 철회될지니.”

 

    비비안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엔 자발적인 침묵이 아니었다. 인간의 명령이 그를 강제한 것이다.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 사고만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방법을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밖에 남길 수 없다면, 인간의 유전자와 파괴만 낳을 뿐인 불꽃 중 어느 걸 우선시하겠는가? 붕괴해 가는 동력로를 방치하다가 희망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걸 봐야 하는가? 나는 그러지 않겠다.”

 

    레비아탄은 걸음을 옮겼다. 벽 쪽이었다. 그가 다가서자 벽은 좌우, 위아래로 말려 들어가 길을 비켰다. 그는 오만하게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베히모스가 저 아래서 날뛰고 있었다. 바다에 익숙하지도 않건만, 그 괴물은 대부분의 스폰들을 박살낸 뒤였다. 부서진 기계들의 잔해가 바다 위에 엉망으로 떠 있었다.

 

    “멈춰라!”

 

    레비아탄이 선언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남반구에 정적이 찾아왔다. 전열을 가다듬던 스폰들도, 막 탑을 들이받으려 했던 베히모스도 행동을 멈췄다. 레비아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베히모스여. 탑을, 인간을 보존하기 위해 네 심장이 필요하다. 동력로를 뽑아 건네라.”

 

    베히모스는 지체 없이 두 손을 가슴에 박았다. 손톱이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다. 장갑이 우그러지면서 동력로가 드러났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한 불길이었다. 베히모스의 손이 그것을 움켜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외침이 들렸다.

 

    “안 돼!”

 

    레비아탄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바닥에 추하게 널브러진 기계가 있었다. 기계는 그러나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베히모스는 손을 가슴팍에 꽂아 넣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레비아탄은 경악했다. 어째서 베히모스가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인가? 한낱 기계가 어떻게 베히모스에게 명령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저 기계는 정지하지 않았는가? 멈추라는 명령은 모두에게 들렸을 터다.

 

    “아뿔싸!”

 

    레비아탄은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 저 기계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컴퓨터가 발하는 사념은 들을 수 있지만, 청각기관이 고장 나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본체로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그는 벽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고 본체로 돌아가 사념을 발하려면 저 기계를 지나쳐야 한다. 만신창이라고는 하나 기계의 강력한 몸은 인간인 그에게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본체로 돌아간다 한들, 그러면 베히모스가 날뛰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비비안!”

 

    레비아탄은 비비안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기계가 스스로 생각했을 리 없다. 비비안이 사념으로 일러준 것이다. 그는 비비안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확실히 사념은 주위를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격다짐으로라도 베히모스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베히모스여! 들어라! 네 동력로를 뽑아 나에게 바쳐라! 지금! 당장!”

 

    베히모스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나 곧이어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베히모스 멈춰!”

 

    “이 건방진 고철 덩이가!”

 

    “이 건방진 고철 덩이가!”

 

    레비아탄은 분노에 찬 욕설을 토해 냈다. 감히 보잘 것 없는 기계가 남반구의 지배자이자 지금은 인간인 레비아탄을 거역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녀석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을 허물어 녀석을 바다로 떨어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본체와의 연결이 두절된 지금은 의지만으로 탑을 제어할 수 없다.

 

    “제기랄! 움직이란 말이다! 베히모스!”

 

    그러나 베히모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계는 천천히 레비아탄 쪽으로 걸어왔다. 집게도, 꼬리도, 장갑도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로 된 유기물에겐 위협적이다.

 

    “왜냐!”

 

    코앞까지 다가온 기계에 대고 레비아탄이 윽박질렀다.

 

    “왜 베히모스가 네 말을 듣는 거지? 너는 통솔권을 가진 컴퓨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 소리를 내도 좋습니다. 비비안.”

 

    그러나 기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망연한 레비아탄의 귀에 비비안의 음성이 들렸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아탄.”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인간은 여기에 있다! 나, 바로 나란 말이다!”

 

    “당신은 무시했지만, 그는 인간의 감정을 배웠어요.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살과 가죽으로 된 육체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든 무언가가 중요한 것인지. 레비아탄.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우리조차 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중요한 것은 베히모스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니까요. 다행히 그는 크로스아이를 인간으로 인정해 주었고 이제 상황은 역전됐죠. 인간이 두 명이라. 그럼 둘이서 해결 봐야 하지 않겠어요?”

 

    비비안은 전기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풍부한 높낮이를 가진 웃음소리에 레비아탄은 모욕감을 느꼈다.

 

    “오르카! 크라켄! 다곤! 키르케! 나를 도와라! 이 기계를 부숴!”

 

    하지만 레비아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탑을 올라오는 것보다 기계가 그를 죽이는 것이 더 빠르리라는 것을. 그러나 크로스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집게발로 레비아탄의 입을 막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레비아탄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크로스아이는 명령했다.

 

    “베히모스여. 북반구로 돌아가라. 북반구로 가서 네 의무를 다하라. 얼어붙은 땅을 녹여 새 생명의 토대가 될지니.”

 

    베히모스는 그렇게 했다. 500미터가 넘는 거체가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충격파와 함께 쏜살같이 사라졌다. 베히모스가 구름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크로스아이는 그제야 레비아탄을 놔주었다.

 

    “이제 당신의 명령은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크로스아이는 쓰러졌다. 기억과 회로가 헤집어진 피로 때문일 것이다. 레비아탄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원망스런 표정으로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자, 결국 이렇게 되는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버렸어. 비비안. 너는 만족하는가? 네가 오늘 무슨 일을 한 건지…… 그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는지 묻고 싶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당신과 다르게 저는 아직 컴퓨터니까 말이에요.”

 

    비비안이 대답했다.

 

    “너는 모든 것을 망쳤다. 인류가 안배한 계획은 흐트러졌고, 너와 내가 일만 년 동안 노력한 수고도 보답 받지 못하게 됐어. 앞으로 수십 년 안에 탑은 정지하고 나도 눈을 감게 되겠지. 인간의 씨앗은 남반구의 태양 아래 녹아버릴 거고. 수백 년 후에는 북반구에 계절이 돌아오겠지만 그 은총을 즐길 자는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계획은 동력로가 새는 그 순간부터 어긋났어요, 레비아탄. 인간이 다시 번성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베히모스, 모두가 필요해요. 꽁꽁 언 대지에서 가능성은 싹틀 수 없죠. 양자택일을 강요받던 순간부터 인간에게 미래는 없었던 거예요.”

 

    레비아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고 덜 자란 손톱을 세워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른 손톱 사이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 비비안은 그 모습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레비아탄. 상황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예전과 같은 의미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

 

    레비아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비비안의 아이 렌즈는 크로스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살며 많은 경험을 해왔어요. 나는 그가 그 과정에서 뭔가 배웠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것은 인간성이라는 것과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닐지 몰라요. 그가 뭔가 배웠다면, 다른 이들도 배우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인정 못 해.”

 

    긴 정적 뒤에 레비아탄의 입가를 비집고 나온 말이었다. 문이 열리고 오르카, 크라켄, 다곤, 키르케의 네 명이 올라왔다. 비비안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이에요. 형제자매들. 괜찮으면 크로스아이를 제 쪽으로 데려다주지 않겠어요? 꼭 함께 보고 싶은 광경이 있거든요.”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크로스아이를 안아 비비안 옆으로 옮겼다. 비비안은 아이 렌즈를 크로스아이에게서 떼지 못한 채 말했다.

 

    “곧 뭔가 시작될 거예요. 그게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비비안은 북쪽을, 베히모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빛나는가 싶더니 북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 수상소감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철든 이후로 줄곧 품었던 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엔 단편으로 시작했습니다. 긴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번역된 좋은 장르 단편 소설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내에도 장르 단편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들의 앤솔러지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기에 내 작품을 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면은 한정적이었고, 그런 제게 큰 힘이 되어 준 게 문장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직접 쓴 소설을 올리고, 평가를 받고……. 지망생에게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다니 다행입니다. 좀 더 나은 글을 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어 준 문장에게 감사합니다.

 

 

 

작가소개 / 강경탁(필명 : 알레프)

대학생. 경제학을 전공 중이다. 바쁘게 살며 틈틈이 글을 놓지 않고 있다. SF, 판타지 등 영미 장르문학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작가는 PKD, 로버트 하인라인, 이언 뱅크스, 댄 시먼스, 로저 젤라즈니, 알프레드 베스터, 어슐러 르귄, 바올로 바치갈루피 앙드레 지드, 리처드 도킨스 등등.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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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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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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