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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뒷모습과 그늘의 추억

  • 작성일 2015-05-08
  • 조회수 917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뒷모습과 그늘의 추억

 

 

 

이경혜

 

 

 

 

    박경리 선생에 대한 추억담을 쓰겠다고 덜컥 청탁을 받아들였지만 기실 선생은 나를 개인적으로 아시지도 못했다. 토지문화관에서 선생을 뵙기는 했지만 나는 작품 활동이 저조한 무명작가라 선생께서 기억하지 못하셨고, 나 역시 그런 부끄러움으로 선생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내게 선생은 직접 뵈었을 때의 기억보다는 먼발치에서 혼자 지켜보던 뒷모습으로 더욱 선명하고, 선생이 베풀어 주신 너른 그늘에 깃들었던 아늑함으로 더욱 친밀하다.

 

    2001년 봄, 나는 우연히 신문에서 토지문화관 기사를 읽었다. 가뭄 끝에 빗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곳의 이틀이면 뭐든 해낼 것 같아 내게는 벅찼던 숙박료를 지불해 가며(그때는 집필실 지원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오래 팽개쳐 둔 소설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본관 3층 구석방에 나는 홀로 있었다. 산속의 밤은 어둠이 짙었고, 다른 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선생이 옆집에 계신다는 생각만으로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때 문학과 멀어진 채 물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3년째, 내 혼은 갈증으로 바싹 말라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그 밤은 해녀가 참았던 숨을 내뱉고 깊은 숨을 들이켜듯 간절한 밤이었다. 나는 그 귀한 밤이 아까워 자리에 눕지도 않고 소설을 썼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새벽이었다. 정 쪼는 소리에 잠이 깨어 창밖을 보니 아직 채 밝지 않은 세상 속에 선생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쪼고 계셨다. 그러더니 선생은 일어나 밭에 물을 주셨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 곁을 맴돌았다. 물을 준 뒤에 선생은 널찍한 바위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셨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몰래 바라보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무료 집필실로 제공되었고, 나는 물론 가장 먼저 지원했다. 그곳에 머물면서 오가시는 선생을 뵙기도 하고, 선생이 사주시는 밥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얻어먹기도 했다. 여전히 선생 앞에서는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고양이 이름은 여쭤 보았다. 선생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에데,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에요.” 소설 속 공주의 이름을 고양이에게 붙여 주신 선생의 모습은 뜻밖에 사랑스러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해, 나는 그곳에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물건 파는 일에서 빠져나와 내 본연의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생의 그늘에 깃들어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이었다.

 

    글 쓰는 사람들은 10대에 빠져들었던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10대에 러시아 문학에 매료되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세계를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겼다. 그랬기에 20대에 『토지』에 빠져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작품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유장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나는 내 삶의 무의미함과 사소함을 잊었다. 처음 『토지』에 빠져든 그때부터, 선생은 내게 태산이었다. 문학으로도 삶으로도 그러했다.
    30대 중반이던 1994년 여름, 나는 내 삶의 구비를 틀며 홀로 돌아다니다 고시원 방 한 칸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선생은 25년의 장정 끝에 『토지』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나는 거대한 별자리 하나가 완성되는 것을 본 듯싶었다. 그해 늦가을, 나는 고시원 생활을 청산하고 원주 변두리 농가의 방 한 칸을 얻었다. 그것은 새로운 내 결단이었다. 누가 싼 방을 소개해 줘서 얻은 것이었지만 ‘하필 원주’인 게 반가웠던 것은 물론 선생 때문이었다. 그 방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책도 선생의 산문집 『Q씨에게』였다. 이미 『토지』가 완간된 시점에서 오래전의 그 글을 읽는 맛은 남달랐다. “이제 나는 몇 년 후 쓸 소설이 있어요. 지금까지 쓴 것은 그것을 위한 습작입니다.” 그런 말에 몇 번이고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책을 밤마다 아껴 읽었다. 단구동을 찾아가 먼 발치에서 선생이 계신 집을 바라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차마 부끄러워 찾아뵐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러고도 7년 뒤, 그렇게 토지문화관에 들어간 것이었고, 선생을 먼발치에서라도 처음 뵈었던 것이다.

 

    통영에 거처를 마련한 것은 2007년이었다. 통영은 아버지 때의 인연으로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하다 살러 간 곳이었다. 이번에도 선생의 고향이니 더욱 애틋했다. 한밤중에 자다가 깨서도 가슴이 벅차 밤의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 목공소에서 책장 열 개를 짜 맞춰 거실을 채웠다. 마구 쌓아 둔 책들을 일일이 자리 잡아 줄 때면 기어코 올 곳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의 책은 시집부터 사진집까지 책장 몇 칸을 차지했다. 통영에서 다시 읽는 『김약국의 딸들』은 그야말로 진진했다.
    다음 해, 선생이 편찮으셔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연세 높으셔도 정신의 어느 자락 하나 허물지 않으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이미 병은 깊었지만 주변에도 못 알리게 하시고, 치료도 거부하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동료 작가들과 병원에 찾아갔지만 면회가 금지되어 병실 복도만 서성이다 돌아왔다. 그 복도에서 나는 감히 선생이 쾌유하시기를 빌 수 없었다. 오직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시기’만 빌었다. 선생이 낫기를 바란다면 나으시기를, 그러지 않으시다면 그러지 않으시기를. 한 생을 남김없이 문학에 쏟으신 분이었다.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셨다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던가. 마침 5월 3일에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는데, 5일에 선생이 세상을 뜨셨다. 서울에 있었으니 곧장 장례식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토지문화관에 머물렀던 작가들도 여러 가지 일을 나눠 맡게 되었다. 멀리서 흠모만 해온 나도 부조 받는 몇몇 작가들 사이에서 더불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8일 아침에 영결식을 하고, 장례 행렬은 통영을 향해 떠났다. 그것은 또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나는 특별한 애를 쓰지 않고도 자연스레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끝까지 동행할 수 있었다. 며칠 전 통영에서 올라올 때야 내가 이렇게 선생을 모시고 그곳으로 함께 내려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원주에 들러 노제를 지내고, 진주여고를 거쳐 통영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을 먹고 다들 마련해 둔 숙소로 갔지만 나는 혼자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는, 그동안의 강행군에 늪처럼 잠에 빠져들면서도 지난 며칠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하고도 묘했다. 내가 하도 선생을 흠모하며 살다 보니 이런 인연이 이어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9일 아침, 오일장 마지막 추도식은 강구안항에서 이루어졌다. 항구 앞에 도열해 있던 만장은 거친 5월의 바닷바람에 통곡 같은 소리를 냈고, 시민들은 모두 모여 노제 행렬을 따랐다. 누군가 임금의 장례보다 낫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 선생은 번잡스러워 싫어하셨겠지만 선생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다는 건 남은 자들에겐 위안이었다. 모두들 함께 충렬사 앞 명정동 생가 부근까지 걸어가는데 통영 시민이 다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미륵산 자락 한산도가 보이는 햇살 좋은 묘지에 선생이 홀로 누우실 때는, 참으로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선생은 살아서나 돌아가셔서나 언제나 홀로, 높고, 외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아렸다. 잘라내고, 잘라내어, 고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그분은 유택조차 그러하였다. 그 고귀하지만 외로운 유택에 입주하시는 모습이 내가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었다. 처음 뵙는 순간이 그랬듯 마지막 순간도 나는, 우글거리는 취재진 뒤편 구석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기만 했다. 두 해를 더 살고, 나는 통영을 다시 떠났다. 열 개나 짰던 책장은 다 나눠주고, 이제 나는 네 개의 책장만 짊어진 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어떤 인연은 인생을 뒤흔든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이렇게 머쓱한 일방적인 추억담을 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렇다. 선생을 태산처럼 여기고 흠모해 온 사람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어느새 선생을 다시 못 뵙게 된 지도 7년, 그래도 생전의 선생을 직접 뵈었고, 그 그늘에서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참으로 행운아라 할 것이다. 선생이 세상에 머물러 계실 때도 선생의 그늘에서 글을 쓰고 힘을 얻었지만,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 그늘에 깃들어 글을 쓰다 온다. 선생의 그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그늘에 깃들어 우리들은 먹고, 글 쓰고, 쉬고, 잔다. 선생은 아직도 그곳에 계신 것만 같다. 늘 머무시는 건 아닐지라도 가끔은 들르시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 널찍한 바위에 앉아 길게 담배를 태우시리라. 그 새벽, 처음으로 뵈었던 선생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립다. 하늘로 올라가던 뿌연 담배 연기조차 사무치게 그립다.

 

 

 

작가소개 / 이경혜(소설가)

1960년 출생.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과거순례」 당선으로 등단.
2001년 백상출판문화상 아동문학 단행본 부문 「마지막 박쥐 공주 미가야」 수상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그 녀석 덕분에』 『유명이와 무명이』 등등.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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